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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이 May 21. 2019

그들만의 작전, 그들만의 사랑

드라마 <이몽>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드라마 <이몽>이 지난 5월 4일 첫선을 보였다. <이몽>은 200억 대의 제작비를 들여 사전 제작한다는 점, 유지태, 이요원 등의 명품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방영 전부터 MBC 드라마의 기대작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다소 아쉬운 상황인데, 5~6%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월북해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 김원봉을 굳이 주인공으로 설정해야 했는가에 대한 논란도 이런 평가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무엇보다 많은 시청자가 유입되지 않은 것은 드라마의 ‘불친절함’ 때문으로 보인다. 아직 2주분이 방영되었을 뿐이기는 하지만 왜 주인공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 감정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한 마디로 시청자에게는 드라마의 이야기가 그들만의 작전, 그들만의 사랑일 뿐이었다.


국뽕도 좋지만

‘국뽕’이라는 표현은 국가와 히로뽕(필로폰)의 합성어로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과도하게 도취해 있는, 무조건적으로 한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비꼬는 신조어(김환표, 트렌드 지식사전 2, 2014)다. 여러 기사와 댓글에서 노골적으로 관객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작품(영화 <인천상륙작전>, <명량> 등)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국뽕이라는 말의 주체를 자신으로 옮겨올 때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내가 국뽕에 취한다’는 것은 스스로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고 역사적 영웅의 스토리에 감동하고 있다는 강조의 표현으로 쓰인다.

역사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국뽕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증을 잘했는가, 현실적인가를 떠나 나라와 민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이 내용이 관객 혹은 시청자의 역사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를 다룬 <이몽>은 과도한 미화 없이 시청자를 충분히 ‘국뽕’에 젖어 들게 할 의무가 있고, 이는 지금까지의 방영분에서 화려한 액션신과 여러 등장인물의 독립에 관한 의지로 잘 표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는데, 명확한 근거가 없는 지지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거품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40부작에 달하는 긴 서사 동안 시청자들이 주인공을 지지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김원봉이나 이영진 같은 독립투사인 주인공은 그 자체만으로 시청자가 응원할만한 당위성을 가진다. 하지만 주인공과 시청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호흡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국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단순히 국뽕을 위한 연출이나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독립에 대한 태도, 투쟁방법의 정당성에 대한 고뇌 등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다룬 드라마의 의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방영분에서는 그런 부분이 충분히 묘사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자신은 독립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무장투쟁 운동에 반대한다고 했던 영진이 사실은 파랑새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의 반전은 드라마의 재미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다른 면모가 있을 법한데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영진의 모습은 극 초반부에 시청자가 그녀는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효과적인 진행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극의 모든 인물이 이렇게 모호한 묘사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베일에 싸인 인물은 시청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인물인 동시에 가장 거리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인물의 미스터리함은 그 자체로 매력이 되지만, 시청자가 그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그가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이 지지할만한 사람이라는 증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스터리한 인물이 등장할 때 시청자는 많은 경우 이 인물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또 다른 인물에 몰입하게 된다. 선하면서 정의로운 이 인물이 미스터리한 인물의 정체를 밝혀주기를 바라며 그의 행동과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탐색자의 위치에 있는 이 인물은 명확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스터리한 인물 대신 시청자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주인공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몽>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원봉과 그의 조직인 의열단에 대한 묘사가 영진과 마찬가지로 비밀스럽게 흘러가고 있다. 8회까지의 방영분을 보면 의열단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집단인지, 의열단이 표방하는 정의는 무엇인지, 김원봉은 왜 파랑새를 찾는지 등 의열단과 김원봉에 대한 정보가 거의 대사 몇 마디 정도로 제시되었다. 김원봉과 의열단이 시청자와 함께 서사를 이끌어갈 확실한 주인공이 아니라 또 하나의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청자는 어느 주인공도 마음 편히 지지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대표적인 두 주인공은 쉽게 믿기에 정보가 부족하고, 다른 두 주인공인 일본인 검사 후쿠다와 여가수 미키에게 몰입하기에는 그 국적과 직업에 대한 심리적인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 모두가 시청자에게는 그저 관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미 많은 시청자는 작년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이후의 개화기 열풍으로 일제강점기의 서사에 익숙해져 있다. 특히 올해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만큼 영화 <항거>, <말모이> 등의 일제강점기 서사를 다룬 작품도 많았다. 막연한 역사적 의무감을 강조하는, 이른바 ‘이것도 안 본단 말이야? 한국 사람 맞아?’ 하는 식의 국뽕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청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굳이 시청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인 것이다. <이몽>이 그들‘만’의 작전을 그려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시대물도 좋지만

또한, 아쉬운 것은 역사 고증에 대한 문제다. 지나간 시대를 온전히 묘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보기에도 부족한 수준의 고증이라면,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면서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상식과 드라마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이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현재까지의 분량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왜 일본어, 중국어가 사용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조선말을 쓴다. 조선인이 조선말을 쓰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면서도 조선총독부 병원에 소속된 의사, 간호사 등의 직원들까지 조선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을 생각할 때 이상하다. 1930년대는 만주사변 이후 조선을 지우고 일본을 이입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이 강화되었던 시기다. 우리말과 역사 교육이 금지되고, 창씨개명이 강요되었다. 특히 이 시기를 다룬 영화 <암살>, 드라마 <각시탈> 등의 작품에서는 비슷한 직위에 있는 인물들이 매우 당연하게 일본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몽>에서는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까지 모두 조선말을 쓴다. 심지어는 배경이 조선이 아닌 상해가 되어도, 일본인끼리의 혹은 중국인끼리의 대화에서도 말이다. 이런 점은 등장인물의 국적을 오인하게 만들고, 시청자의 일반적인 시대 감각을 교란해 극에 대한 몰입을 어렵게 만든다. 만약 여러 문제로 조선말만 사용하게 설정해야 했다면 이를 뒷받침할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 없이 그저 조선말로만 드라마를 진행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외에도 <이몽>의 고증 관련 논란은 현재 진행 중이다. 물론 의혹과 논란이 정당한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이몽>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고증 관련 항의가 속속 올라오고 있고, 실존 인물의 행적에 비추어볼 때 적절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기사도 등장했다. 고증 논란은 역사를 다룬 작품이라면 쉽게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혹자는 작품에서 고증을 논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며, 그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는 전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물도 활발하게 창작하고 감상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다. 심지어 시대만 차용할 뿐 그 외 인물 및 사건은 모두 재창조하는 것, 판타지의 요소를 추가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 시대를 제대로 그려내고 싶지 않다면, 그 점을 명확히 밝히고 창작자의 마음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역사물’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한다는 작품에 제대로 된 고증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그저 ‘퓨전’의 산물일 뿐이다.

오마이 뉴스

근현대는 고대와 현대 사이의 과도기적인 면모를 보여주어 창작자에게 매우 매력적인 시대다. 하지만, 현대와 가까운 시대일수록 관련된 연구자료, 서적, 사진 등은 너무나 많다. 여러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섬세하고 체계적인 고증이 없는 작품은 역사에 대한 진정성과 성실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금은 한국사 필수과목의 시대다. 한국사에 관한 관심이 당위적이고 양심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이몽>이 잘 만든 ‘역사’드라마가 되려면 시청자를 극에서 멀어지지 않고 집중하게 할 수 있는 고증의 탄탄함이 필요할 것이다.


사랑도 좋지만

최근 들어 범죄 수사, 의학, 법정 등 다양한 장르 드라마가 늘어나면서 장르물을 어떻게 한국식으로 구현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여러 드라마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의 드라마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로맨스’라는 핵심 서사를 극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혹은 아예 배제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몽>은 ‘첩보 멜로’ 드라마를 표방하며 전자를 택했다. 아직 8회까지밖에 방영이 안 되었지만, 김원봉-이영진-후쿠다-미키의 사각 관계가 그 윤곽을 드러냈다.

장르 서사와 로맨스 서사를 공유하고자 할 때는 두 서사 간의 매우 세심한 완급조절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장르 서사에 주력한 나머지 로맨스 서사가 개연성을 잃으면 ‘대체 언제 주인공들이 사랑하게 된 거냐, 언제 저렇게 사랑이 깊어져서 목숨까지 걸고 남은 인생을 바치느냐’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로맨스 서사에만 집중한다면 ‘또 병원, 법정 등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만들었네’하는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방영분을 볼 때 인물 간의 감정 교류에 대해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인물의 감정이 너무 급속도로 전개되는 것을 볼 때 장르 서사에 주력한 나머지 로맨스 서사의 개연성을 잃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몽>에서는 특히 남성 주인공들의 사랑이 돋보인다. 원봉은 조선인 여의사를 쫓는 과정에서 영진을 만나게 되었는데,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한 번 만난 것을 계기로 이후 그녀를 구하기 위해 두 차례나 위험을 감수한다. 특히 5-8회분에서는 영진을 위해 청방을 저버리기까지 하는데 말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조직을 위태롭게 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또한, 마성의 여자 영진은 후쿠다까지 한 번 만난 것으로 홀리는데, 일본 검사인 후쿠다는 영진과 정식으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마음을 고백했고, 이후에는 혼자 결혼까지 생각한다. 또한, 후에 검사장이 영진과의 관계를 접는 것이 좋겠다며 충고하자 술을 마시고 괴로워할 정도로 감정이 진척되어 있다. 이처럼 우연히,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캐릭터는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물론 몇 번 만나지 않고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여러 작품이 있다. 영화 <암살>에서 하와이 피스톨과 안옥윤이 그랬고, <박열>에서 박열과 후미코의 시작이 그랬다. 여러 사건이 선행되지 않고서도 둘의 사랑은 충분히 관객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몽>은, 하와이 피스톨과 안옥윤이 연인 행세를 하는 것, 박열과 후미코가 ‘불령선인’이라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과 같은 감정적인 교류를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했다. 더구나 긴 서사인 만큼 네 사람의 감정을 쌓아갈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차근차근 쌓아간 감정이 결국 선택의, 행동의 동기가 된다면 시청자는 더욱 인물의 사랑에 몰입할 것이다. 하지만 벌써 목숨까지 걸어버리는 <이몽>의 사랑은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 독립투사라는 인물의 설정은 등장인물 간의 사랑이 비극이 될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비극은 감정의 변화가 촘촘히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야 이에 힘입어 그 슬픔과 애틋함을 폭발시키는 서사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오로지 주인공들끼리만 절절하고 애틋할 뿐, 시청자는 저들이 왜 저렇게까지 괴로워하고 슬퍼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몽>은 시작한 지 2주 만에 주인공이 다른 인물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러한 전개는 설득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청자의 비극에 대한 감정을 무디게 만든다. 비극에 대한 심리 대신 일반적인 영웅 서사에 대한 심리, ‘또 목숨 걸고 구하러 가겠지~ 주인공은 안 죽어~’가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비극과 촘촘하지 않은 감정의 변화가 마지막에 있을 비극의 결말을 잘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드라마는 영화보다 시청자를 잡아두기 힘든 매체다. 극장에서 관객은 중간에 나가지 않는 한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본다. 하지만 집에 있는 시청자는 언제든 리모컨을 들 수 있고, 언제든 TV를 끄고 들어가 잘 수 있다. 따라서 드라마는 시청자를 드라마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전제작 드라마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가 바뀌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의 전개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청자와 함께 웃고 우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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