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히 번지는

by 녀웃

물은 높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더 위를 차지하려 하지 않고,

더 드러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흐르고,

머물고,

스며든다.


물은 자신이 물임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늘 영향을 남긴다.


물을 따라

땅은 부드러워지고,

생명은 자라고,

풍경은 만들어진다.


물은 무엇을 이루겠다는

의도를 갖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세상을 바꾼다.


사람은 종종

높은 자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더 위에 서고 싶고,

더 드러나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다.


그래야

존재가 또렷해질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물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른다.


낮아질수록

더 넓게 퍼지고,


드러나지 않을수록

더 깊이 스며든다.


존재의 영향은

높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조용히 머무는 자리에서도

사람은 충분히 영향을 남긴다.


말하지 않아도 남는 사람,

앞에 나서지 않아도 기억되는 사람,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람.


그 영향은

드러남이 아니라

존재에서 온다.


그래서 어떤 존재는

크게 보이지 않아도

오래 남는다.


낮은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 아니다.


위치를 통해

가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든

나로 존재하고 있는가.


물처럼

자신이 되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자신인 채로

흐르고 있는가.


존재는

높은 곳에서만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낮은 자리에서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조용히 세상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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