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날에도

by 녀웃

우리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세계에 들어간다.


잘하면 인정받고,

못하면 보완해야 할 사람이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치는 결과와 연결된다.


무엇을 해냈는가,

얼마나 잘했는가,

어디까지 갔는가.


이 질문들은 어느 순간

조용히 변형된다.


그래서 너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그래서 너는

존재할 만한 사람인가.


문제는

이 기준이 바깥의 평가에서

내면의 기준으로 옮겨왔을 때 시작된다.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을 존재로 느끼기보다

결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잘하고 있을 때는

자신이 또렷해지고,

잘하지 못할 때는

자신이 흐려진다.


성과가 있는 날에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성과가 없는 날에는

자신이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시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자기 가치가 낮아진 시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은 행동이 아니다.


사람은 결과가 아니다.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순간에도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존재는

수행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이미 있다.


성과는

존재 위에 잠시 놓였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잘해낼 때만 괜찮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너무 자주

존재를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

실패한 날,

멈춘 시간에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


그래서 질문은

이제 달라진다.


나는 무엇을 해냈는가가 아니라


나는

해내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지워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성과가 없을 때도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가.


우리는

잘해낼 때만 잠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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