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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각의 링

커제의 바둑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며칠새 커제의 바둑을 여러 판 쭈욱 감상할 수 있었다. 그는 외견상 예의가 좀 부족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의 바둑은 정말 일품이어서, 하수도 감탄하여 몇자 끄적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본 바둑은 삼성배 이세돌과의 준결승 2판, 엘지배 강동윤과의 8강전 1판, 그리고 몽백합배 박영훈과의 준결승 3판이다.


첫째, 그의 바둑 운영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카가와를 연상시키는 유장함이 있었다. 대신 본인도 얘기했듯이, 상대의 무리수는 꼭 응징한다는 근성과 실력이 그의 바둑을 떠받치고 있었다.


조훈현을 깨는 이창호의 반집처럼, 이창호를 깨는 이세돌의 무한변신처럼, 커제의 바둑은 이세돌을 깨는 평정이 인상적이었다. 쎈 돌이 끊임없이 수를 내는데도 커제의 단순한 대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서유기의 손오공과 부처님 손바닥이 떠오른 것은 오직 나뿐이었을까?


둘째, 그의 바둑은 흐름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리듬감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 돌의 움직임과 반응을 통해 중앙이든, 실리이든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다케미야는 아예 대놓고 중앙을 집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카토는 아예 대놓고 대마를 잡으러 갔다. 고바야시는 아예 대놓고 실리를 취하였다. 조치훈은 아예 대놓고 상대의 집 속에 들어가 수를 내고자 하였다. 이제 그런 선명한 선배들의 바둑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커제에 의하면 돌의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세력도 생기고 집도 생긴다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전과 응전이 만들어가는 역사처럼 그의 바둑은 흘러갔다.


세째, 그의 바둑은 아득한 두터움이었다. 아마도 구리의 두터움이 배어든 듯하다. 몽백합배 박영훈과의 1국과 3국에서 그는 두터움의 끝내기 신공으로 박영훈을 물리쳤다. 이제 끝내기의 영역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느낌이다. 중앙 공배를 집으로 만드는 끝내기 신공은 박영훈의 독법 바깥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영훈의 다음 도전이 기다려진다.


물론 몇 발짝 앞서 스쳐가듯 지나가는 응수타진이, 그의 깊은 수읽기 능력과 대세관을 보여주는 핵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체적인 측면에서, 현재 커제의 바둑은 기사들 중 가장 중용의 도를 실천하고 있는 바둑으로 보인다.


박정환의 바둑은 신출귀몰함이 그 특징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지만, 워낙 변화가 많아, 가끔 실족하곤 한다. 꾸준한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평범 속의 비범을 장착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본 그 여섯 판 중 커제는 강동윤에게 1판 졌다. 내가 보기에는 강동윤이 무리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커제가 그것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였다. 박영훈에게도 1판 졌다. 아마 몽백합패의 세 판 중 둘 째 판은 박영훈의 명국이었는데, 오히려 커제가 무리스럽게 둔 한 판이었다.


바둑의 대권은 변화와 부동의 양극단을 왕복하는 진자운동이 아닐까? 조훈현의 변화는 이창호의 부동으로, 다시 이세돌의 변화로 움직여왔다. 그렇다면 그 진자운동이 향하는 곳은 이제 부동 쪽이 아닐까? 그간 모두들 이세돌의 스타일을 여러 경로로 변주하여 왔지만 부동의 극치를 이루는 자가 다음 대권을 쟁취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커제는 가장 가까이 다가선 기사로 보이고, 그 기보 하나 하나에 나는 주목하는 바이다.


*추가: 세간의 예상을 깨고, 이민배 준결승에서 이동훈이 커제를 꺽었다. 내가 보기에 최근 커제를 꺽은 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판이었다. 부드럽고도 무리없이 두려고 하는 커제에게, 그가 그렇게 바둑을 운영해선 이길 수 없다고, 이동훈은 계속 주장하였다. 꽤 이른 시기에 중용의 커제도 무리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훈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였고, 훗날 기단의 거목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느끼게 해준 일국이었다.


(2015.12.02 사이버오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