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우공이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필 Zho YP Feb 26. 2023

자본주의 탄생의 단서 : 유대인 추방령

홍익희

조선일보,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2022.11.20~2023.2.19.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1492년 1월 2일 마지막 이슬람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석 달도 되지 않은 3월 31일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 인구 700만 명의 6.5%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숫자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특히 유대인들은 장원제도가 발달한 중세에 농촌에 살지 않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도시인구의 1/3을 차지했다. 유독 스페인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던 이슬람들이 500년 이상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구가하며 ‘유대 문화의 최고 전성기’를 이베리아반도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한 시대였다. 그 무렵 수도 코르도바는 문화와 상업이 발달한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성한 도시였다.


1492년 스페인 법원 대심문관이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유대인 추방령에 서명을 요청하고 있는 모습, 에밀리오 살라 작, 1889년. /위키피디아


그러다 11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교조주의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여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며 학살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이 피난 길에 올라 북부 스페인 왕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14~15세기 스페인 왕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2년 당시 스페인의 재정 고문 아이삭 아브라반넬도 유대인이었다. 스페인을 무역 경제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유대인 추방령을 돈으로 막으려 하다가 실각한다.

유대인 추방은 전쟁 후유증으로 불거진 사회적 불안이 크게 작용했다. 왕실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기독교 국가의 위엄을 세우려는 의도로 기독교로의 종교 단일화를 제시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 이유도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추스르고 바닥난 국고를 채우는 데는 유대인 추방과 재산 몰수가 일거양득의 묘수였다.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신항로 탐사에 들어갈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한몫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4개월 이내에 스페인을 떠나라고 선포한 추방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재산을 처분해서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화폐와 금, 은 등 귀중품은 가져 나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발각되면 처형이었다. 한마디로 억지였다. 재산은 놔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는 소리였다. 칙령이 발표되자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몇 달 이내에 헐값으로 팔아 치웠다. 집을 주고 당나귀를 얻었고 포도원이 몇 필의 포목과 교환되었다.

이렇게 재산을 급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사는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을 평상시에도 나누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1/3은 현찰로, 1/3은 보석이나 골동품 같은 값나가는 재화로, 1/3은 부동산으로 부를 분산시켜 관리했다. 안정적인 재산관리방식인 포트폴리오(Portfolio)는 여기서 유래했다. 그 와중에도 대부업을 했던 유대인들은 담보대출 시 저당 잡은 보석류를 챙겼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토지나 부동산 소유는 법으로 금지당했기 때문에 대부분 저당물이 보석류였다. 당시 보석류는 오늘날과 같이 높은 경제적 가치는 없었지만 이는 후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간 안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등 보석시장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다.

떠나기에 앞서 12살 이상 되는 아이들은 모두 결혼시켜 가족을 이루게 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어야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이라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레나 나귀에 짐을 싣고 태어난 나라를 떠났다. 단 4개월만인 8월 초에 이르자 추방은 완결되었다.

이리하여 유대인 17만 명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1480년 이래 종교재판을 피해 빠져나간 사람까지 합치면 약 26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여 년 사이에 스페인을 떠났다. 그 무렵 인구 3만이 넘는 도시가 흔치 않은 유럽에서, 26만 명은 대단한 숫자였다.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는지는 학자에 따라 13만~80만 명까지 다양하다.

1492년 8월 2일 세비야 근처 항구에서는 마지막으로 추방되는 유대인 무리가 배 위로 탑승하는 동안, 또 다른 세 척의 선박이 그 옆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바로 그 가련한 유대인들의 후손을 위하여 그가 발견하게 될 신대륙이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콜럼버스 자신을 비롯해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스페인 북부에 살던 1만 2천 명가량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에 가까운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 그곳 통치자들은 오랫동안 종교재판 제도의 도입을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왕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바라 왕국도 결국 종교재판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으로 잠시 피신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택했고, 일부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로 향했다.


14~15세기에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가 스페인이다. 당시 스페인 인구가 700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7%인 약 50만 명 정도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톨레도와 같은 주요 도시의 경우에는 인구의 1/3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도시가 44개에 이르렀는데 이는 스페인 방방곡곡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스페인 왕실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당시 부유층이었던 유대인들의 재정적 도움이 절실했다. 또 혼란기 국가를 이끌어 가기 위해 능력 있는 유대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이들을 상업, 무역업, 수공업은 물론 의술, 통역 등에 활용했다. 또 세무, 재정, 관리 부문에도 중용하여 중요한 일들을 맡아보게 했다. 부(富) 이외에도 그만큼 그들의 재능과 정직성이 뛰어났다는 증표다.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17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10만 명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했다. 하지만 그것도 5년간의 체류에 불과했다. 1495년 마누엘 1세 왕이 포르투갈의 권좌에 올랐는데, 그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의 왕국을 상속받고 싶은 욕망에서 그들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다. 이들 부부는 마누엘의 포르투갈 왕국 내에 비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한 딸을 줄 수 없다며 결혼을 수락하지 않았다. 1496년 12월 포르투갈 내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그들에게는 1년의 여유 기간이 주어졌다. 그전에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모두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마누엘은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여 유대인들이 떠나는 길을 방해했다. 마감 날이 지나자 마누엘은 미처 떠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노예라고 선언하고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이들 중 다수 역시 비밀리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마라노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1497년에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비교적 안전한 북해 연안의 저지대 곧 플랑드르의 부뤼헤와 안트워프로 향했다. 그곳에는 1290년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상업과 교역 그리고 모직물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반겨 맞아 주었던 오스만제국으로 향했고 또 나머지는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 등으로 이주했다. 이주 중에 약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는 프랑스로도 이주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몽테뉴를 존재케 했다. 그의 어머니가 스페인계 유대인의 직계 후손이다. 모로코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유대인 정착촌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을 떠나온 유대인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멜라(mellahs)”라고 하는 특별 구역에 격리되어 살았으며 유대인으로 인식케 하는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한때 모로코에 2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 뒤에도 스페인 왕실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마라노 무리가 여전히 몰래 유대교 관습을 지킨다고 보았다.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지금도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톨레도와 세고비야에는 새끼돼지를 구운 애저요리가 유명하다. 톨레도에는 축제 때 돼지고기를 먹는 행사가 있다. 이는 당시 마라노들이 공개석상에서 유대인들이 금기시 했던 돼지고기를 먹어 보임으로써 그들의 개종을 만천하에 알리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애저요리(Cochinillo)는 생후 2주 된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어서 먹는 스페인의 특선 요리로 접시로도 잘라질 만큼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일품이다.


세고비아 식당에서 애저를 접시로 자르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 뒤에도 종교재판을 피해 약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스페인을 떠났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안트워프, 암스테르담 등지로 이주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경제력이 중부 유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사회의 몰락은 유대사 가운데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였다. 페니키아 시대에 이미 스페인 카디스 등에 유대인들이 진출한 기록이 있다. 적어도 솔로몬 시대부터 스페인에는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그곳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하며 유대인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카스티야에서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왕실의 요직에도 진출해 있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 결과 그들이 많이 살았던 주요 상업도시의 집세와 가게세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바르셀로나는 은행들이 대거 파산했다. 이로써 인구의 6.5%가 유대인이었던 아라곤 왕국은 금융업과 상업이 몰락하다시피 타격이 컸다. 전성기에 300개의 작업장을 자랑했던 바르셀로나의 면직물 산업은 15세기 중엽에 10개 정도의 작업장만을 운영하는 초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유대인 추방은 한마디로 고급두뇌와 핵심 인재의 유출이었다. 당시 의사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주 납세자도 유대인이었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마라노들도 유대인 티를 안내기 위해 전통적인 유대인 직업들을 버리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그들의 재능도 함께 땅에 묻어버렸다.

그 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인도 제도에서 후추와 향신료를 싣고 와도 유통망이 붕괴되어 소비자가 있는 북유럽으로 유통시킬 방도가 없었다. 동인도 제도로 싣고 갈 교역품도 구할 수 없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생산과 유통 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유대인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뒤 내수 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 감소는 스페인 경제를 피폐케 했다. 이는 국고 수입 감소로 직결되어 스페인 왕국은 중남미에서 대량의 금과 은을 지속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수 차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사에서 중상주의 시대를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300년간으로 보고 있다. 곧 스페인 제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국제무역 중흥기를 거쳐 영국의 산업혁명 직전까지이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던 시기이다. 정복 시대처럼 약탈한 재물로 국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상인 자본의 힘으로 국부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중상주의에 격렬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고, 또 같은 해에 나온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이로 미루어 중상주의는 바로 그 직전까지다.


플랑드르, 현재 벨기에 북부 지역. /위키피디아


유럽의 자본주의는 두 지역에서 피어났다. 하나는 중세 시대 크게 부흥했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Flandre) 지역이다. 플랑드르(영어로 ‘플랜더스’)라는 이름은 8세기에 처음 나타났는데, ‘저지대’ 또는 ‘물이 범람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 지역이 북부 이탈리아와 더불어 유럽 대륙 내에서 지역단위 경제 규모가 가장 크고 1인당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지역의 성장을 유대인들이 주도했다.


중세 교역로 라인강 변에 유대인들이 몰려 살았다. /위키피디아


바이킹의 침입이 누그러진 후, 플랑드르 지역에는 떠나갔던 인구가 다시 찾아들었다. 12~13세기 플랑드르 지방은 북유럽의 모직물 산업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 무렵 플랑드르는 북쪽의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남쪽의 지중해 국가들을 연결해 주고 또한 영국과 대륙을 맺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하여 바닷길은 물론 라인강과 그 지류들을 교역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플랑드르가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브뤼헤(브뤼주)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 항구를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했다.

그 무렵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 산업은 유대인들이 주도했다. 원래 모직물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 유목민들의 면양 사육에서부터 유래되었는데 뒤에 중앙 아시아를 거쳐 비잔틴 제국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중국에서 훔쳐 온 누에고치로 양잠 산업과 비단 직조 기술도 갖고 있었다. 제국은 이 직조 기술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

이후 비잔틴 제국의 테살로니카와 테베의 유대인들이 직물 산업을 주도하며 직조 기술을 비밀에 부쳐왔다. 1147년 2차 십자군 원정 때 시칠리아 왕국도 비잔틴 원정에 참가했다.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족 출신 루제루 2세가 다스리는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갖고 있었다. 루제루 2세는 직접 원정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해군을 파견해 데살로니카와 테베를 침공하여 유대인 직조공들을 포로로 잡아와 수도 팔레르모에 궁정 작업장을 세웠다. 이들을 통해 견직물과 모직물 산업이 시칠리아 왕국에 뿌리내렸다.

이 기술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 유대인들에게 퍼져나갔다. 그 뒤 밀라노 유대인들은 지력이 좋은 포강 근처에서 누에를 치고 양을 길러, 때가 되면 누에고치와 양털을 시칠리아와 나폴리 유대인들에게 내려보냈다. 그러면 남부에서 이를 가공하여 비단과 모직물을 짰다. 밀라노 유대인들은 이를 다시 수거해 아랍과 프랑스 남부에서 독점 수입한 천연염료로 ‘자색’(紫色, 보라색) 염색을 했다. 이 자색 염색이 유대인의 비기(秘技)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색깔이었다. 그 무렵 이탈리아산 자색 비단과 모직물은 모든 유럽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왕족과 성직자에게만 허용되었던 색깔이다. 그래서 자색을 ‘추기경의 색깔’이라 불렀다. 그 무렵 직조 기술과 염색 기술은 극비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 공동체 간의 끈끈한 인연은 이를 뛰어넘었다. 결국 북부 이탈리아 유대인들이 플랑드르 유대인들에게 모직 기술을 전파하여 모직물 산업은 플랑드르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1492년 스페인과 1497년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이 종교의 자유와 동족들이 있는 브뤼헤였다. 브뤼헤는 13~15세기 북유럽의 대표항구였다. 지중해에 베네치아가 있다면 북해에 브뤼헤가 있었다. 브뤼헤는 지중해와 북유럽, 영국과 대륙,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대륙 간 뱃길의 길목에 있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브뤼헤의 성장사를 살펴보자.

1096년 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내 반유대 정서가 고조되면서 유대인 박해와 살해가 잇달았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바다 건너 플랑드르로 탈출했다. 이러한 이주는 거의 100년간 지속되었다. 플랑드르 지방은 11세기 이래 영국령으로 유대인들은 영국의 양모를 가져다 이를 상파뉴 정기시에 내다 팔았다. 그 뒤 플랑드르에 모직물 산업을 일으켜 상업 도시들이 생겨나 발전했다.

이후 3차 십자군 전쟁 때인 1290년 11월에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일시에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업에 종사하던 1만 6000 명 모두를 한꺼번에 내쫓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 추방이다. 이는 반유대 정서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영국인들이 그간 유대인에게 진 빚을 무효화시키고 영주들이 그들의 재산마저 몰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도버 해협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플랑드르 지방의 브뤼헤 항구였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대륙의 플랑드르와 보르도 지방은 영국 국왕의 영지였다.

브뤼헤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기존 유대인들과 손잡고 당시 최고 상품인 모직물 고급화에 주력했다. 질 좋은 이탈리아 모직물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자기들이 살았던 영국에서 품질 좋은 고급 양털을 선별해 들여와 이를 유통시켜 모직물 질을 한 단계 높였다. 모직물은 주로 프랑스 샹파뉴 정기시(定期市)에 내다 팔고 일부는 영국에 수출했다. 샹파뉴 정기시는 이때 번영의 절정에 달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브뤼헤를 대부업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1291년 제노바가 지브롤터 해협을 발견하여 이후 지중해 무역이 대서양 연안 및 북해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베네치아는 해군력을 키워 당시 이슬람이 장악하고 있던 지중해 해상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제노바하고는 100년 소금 전쟁을 치루었다. 그리고 지중해를 넘어 북해로 진출하여 플랑드르의 브뤼헤와 직항로를 개설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상인들이 알프스를 넘는 험준한 육로보다는 해로를 선호하게 되어 프랑스 상파뉴 정기시를 통한 거래 보다는 바닷길로 브뤼헤를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것이 브뤼헤의 상권이 상파뉴 정기시를 앞서게 된 이유였다.

브뤼헤에 유대인들이 자리 잡자, 이때부터 그들이 주도해 영국과 양털 교역이, 지중해 국가들과는 모직물 직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도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1296년 양모 시장이 브뤼헤에 개설되었다. 그리고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1297년 새로운 성벽이 건설되어 도시 규모가 3배로 확장되어 새로운 저택과 창고들이 빠르게 건설되었다. 성 밖을 삥 둘러 판 오래된 해자는 상품 수송 운하로 사용되었다. 해상무역이 발달하자 1300년에는 브뤼헤가 한자(Hansa)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여기서 Hansa는 ‘집단’을 뜻하는 중세 독일어이다. 하지만 그 뒤 이 말은 상인조합을 의미하는 낱말로 변했다.

그 뒤 1306년에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브뤼헤에 합세했다. 이들의 합류로 브뤼헤는 그들이 취급하던 프랑스산 포도주, 아마포와 양모 등 프랑스 상품의 중심 수출입 항구가 되어 경제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브뤼헤는 통과(通過)무역이 번창했고, 유럽 최대의 모직물 산업지역이 되었다.

교역이 늘어나자 금융업이 발달했다. 무역과 금융은 실과 바늘의 관계였다. 중세 이래로 무역이 발달하면 이를 지원하는 금융이 발전했다. 무역과 금융업이 발달하자 브뤼헤에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상설 시장이 열렸다. 나중에는 브뤼헤 직물 시장에 제노바 상인뿐 아니라 베네치아, 스페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 먼 거리 상인들도 왔다.

당시 제노바와 베네치아로부터 들어오는 갤리선들은 대개 이탈리아로부터 사치품, 이탈리아산 비단, 벨벳 그리고 레반트로부터 동양 비단과 향신료를 싣고 왔다. 갤리선은 고대부터 지중해에서 주로 군함으로 쓰였는데, 돛도 사용하기는 하지만 바람보다는 수많은 노수꾼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를 지어 운항하는 배다. 중세 이후 상선으로 쓰이는 갤리선이 지중해와 대서양을 거쳐 그 먼 길을 주로 사람의 힘으로 항해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먼 길을 배로 오는 이유는 그래도 육상보다 안전하고 통과세도 덜 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많은 화물을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중해에서 북해까지 먼 길을 정기 운항하게 되면서 갤리선은 3개의 대형 삼각돛이 장착되어 노수꾼의 힘보다는 바람의 힘을 더 많이 이용하는 대형 ‘갤리 상선’으로 진화하게 된다. 플랑드르 노선에 투입된 베네치아 갤리 상선은 길이 50m에 폭이 9m로 약 250톤가량의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북유럽 최대 무역 도시로 성장한 브뤼헤는 14세기 전반에는 200여 도시의 연합체인 한자 동맹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 무렵 한자 동맹 상인단은 북유럽의 소금, 목재, 곡물, 모피, 꿀, 청어 등을 브뤼헤를 통해 서유럽 전역에 판매하면서 14세기에는 프랑스 상파뉴와 이탈리아반도를 능가하는 번영을 보였다. 그러자 플랑드르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다. 동 플랑드르주 주도인 헨트의 인구수는 14세기에 8만 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브뤼헤도 4만 명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었는데 이는 당시 런던의 인구와 비슷했다.

그 무렵 플랑드르의 주인이 바뀌었다. 14세기 후반 부르고뉴 공국의 필립 공이 이른바 베네룩스 3국이라 불리는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원래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의 중심부에 있던 나라인데 좋은 지도자 덕분에 국력이 급팽창하여 지금의 독일-프랑스 접경지대 알사스 로렌을 점령했다. 그 뒤 플랑드르 백작 집안과의 결혼으로 저지대의 지배자가 된다.

남부 독일과 북부 스위스에 걸친 지역의 소영주로 일개 백작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가는 뜻하지 않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실력 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들이 이 집안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1273년 독일 왕으로 선출한 것이다. 합스부르크라는 성(性)은 그의 스위스 영지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城)에서 유래했다. 당시 독일 왕국은 여러 공국의 연합체였다.

루돌프 왕은 고율의 소금세가 왕에게 큰 힘이 된다는 걸 알았다. 당시 이를 상징하는 도시가 있었다. 잘츠부르크 외곽도시 잘츠캄머굿(Salzkammergut)은 독일어로 ‘황제의 소금 보물창고’란 뜻이다. 그야말로 당시 소금이 왕에게는 보물이었다. 그림처럼 펼쳐진 알프스 산들과 70여 개의 평화로운 호수 주변에 소금 동굴이나 광산이 많았다. 실제로 이곳이 오스트리아 소금 광산의 주(主) 광맥이다. 이런 곳은 빙하시대 이전에 지반이 해수면보다 낮게 가라앉아 바닷물에 잠겼다가, 그 후 시간이 흘러 지반이 다시 올라오면서 땅속과 동굴, 골짜기 등에 남아 있던 바닷물이 모두 증발하여 소금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인류는 그곳에서 돌소금 곧 암염을 채굴했다. 그리고 주변 지하 샘물에서는 소금물이 솟아났다. 무려 70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루돌프 1세는 소금 세금 덕에 재정이 튼튼해지자 실제 실력자가 되었다. 그를 대적하는 보헤미아 군대를 1278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내쫓아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을 점령했다. 합스부르크가가 오스트리아를 본령(本領)으로 삼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은 소금 채굴 이권을 찾아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 잘츠부르크(Salzburg)라는 이름 자체가 소금 성(Salz=소금, Burg=성)이라는 뜻이다. 잘츠부르크는 금, 은, 구리의 산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라이헨할 소금 광산으로 유명하며, 소금을 파내 그 부를 이용해 도시를 만들었다. 지금도 라이헨할은 유럽의 소금 공급지이다.

1308년 알브레히트 왕이 암살된 뒤 15세기까지 합스부르크가는 독일 왕위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프리드리히 5세(재위 1440~1493)때 지금의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합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의 소금 광산에서 파낸 돌소금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잘츠부르크 인근 할슈타트의 경우, ‘hal’은 켈트어로 소금이라는 뜻으로 소금 도시라는 의미이다. 거부가 된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5세는 1440년 독일 왕에 선출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영주이자 독일 국왕인 프리드리히 5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인스부르크의 은광산과 은 주조공장 그리고 소금 광산 덕분에 더 큰 부를 이루었다.

재력은 곧 국력이었다. 1452년에는 프리드리히 5세가 독일 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독일 왕 프리드리히 ‘5세’가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3세’가 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공국의 연합체 성격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선출직이었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사실 로마와 상관도 없고, 게다가 제국도 아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 3세는 로마에서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질녀인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후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정책의 초석이 된다.

그 뒤 프리드리히는 50년 이상 황제의 자리를 지키면서 합스부르크가의 왕위 ‘세습’을 이루어냈다. 막대한 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지속 계승하는 합스부르크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는 1477년 아들 막시밀리안을 브루고뉴 공국의 상속녀 마리(마리아) 공주와 결혼시켜 브루고뉴 공국과 저지대를 확보했다. 이때부터 플랑드르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이들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국과 신대륙,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을 손에 넣게 되어 유럽 최대 가문이 된다.

15세기 말에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대인 약 30만 명이 추방당했다. 엄청난 숫자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항구 도시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들의 상업적 재질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정착했다. 브뤼헤(벨기에), 앤트워프(벨기에), 암스테르담(네덜란드), 런던, 트리에스테(이탈리아), 함부르크(독일) 같은 상업과 교역이 발달한 항구도시에 그들의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업에 종사했다. 이들을 ‘항구의 유대인’(Port Jew)이라 불렀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이들 도시에 몰려드는 유대인들이 많았다. 너무 급격히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면 도시민들 사이에 반유대 감정이 쌓여 결국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때부터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면 유대인 박해와 추방이 관례화되는 경향이 생겼다. 이즈음 베네치아에서도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자 이들을 특별 구역에 한정해 살게 하는 ‘게토’가 1516년에 생겨났다.

그리고 상당 수의 유대인들이 북부 아프리카와 당시 유대인을 환대하던 오스만 제국으로 몰려갔다. 이후 테살로니카는 세파르디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으로 간 유대인들은 경제를 부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투르크(터키)족에게 대포, 화승총, 탄약, 탄환을 비롯한 군수 제조 기술과 인쇄술도 보급해 주었다. 이후 대포와 화기를 갖춘 오스만 제국 보병은 발칸 반도의 전쟁에서 대포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또 일부 유대인 수천 명이 멀리 인도까지 가 정착한 후 본토인과 피를 섞어 인도인처럼 변했다. 유명한 지휘자 주빈 메타가 바로 인도계 유대인이다.

그 무렵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이 종교의 자유와 동족의 연고가 있는 플랑드르의 항구도시 브뤼헤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였다. 15세기 말 유대인들이 대거 합세한 이후 브뤼헤는 명실공히 전 유럽 최고의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다. 유대인들이 떠나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구가 유통 능력이 없어져 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브뤼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쫓겨 온 유대인들 덕분에 ‘중개 무역’이 발달했다. 중개 무역은 통과 무역과 달리 무역의 주체가 유대인이었다.

이곳에 온 이베리아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살았던 이베리아 반도의 특산품들을 특히 많이 취급했다. 스페인산 양모와 피혁 그리고 천일염이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철과 남부 산 과일, 올리브, 쌀, 포도주들이었다. 진귀한 품목으로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와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재배되는 커피가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남부지역에는 이슬람들이 재배했던 유럽 유일의 커피 농장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취급 품목과 무역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중개 무역을 위해 들여온 상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가 가치를 높였다. 또한 교역망도 승계되어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상품의 중개 무역 이외에도 발트해 연안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으로는 플랑드르산 아마, 모직물과 프랑스 포도주, 독일 맥주가 있었다. 특히 15세기 말에는 수요를 감당치 못하는 브뤼헤의 직물은 황금 직물이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닥쳐온다. 북해로부터 15Km 떨어진 브뤼헤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츠빈 만의 레이 강 수로가 퇴적물로 막히면서 바다로 열렸던 길이 단절되었다. 퇴적물로 인해 더 이상 배들이 접안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도시는 항구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브뤼헤를 중심으로 주로 해상교역에 종사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불운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인근의 또 다른 항구도시인 앤트워프로 발길을 옮겨 다시 시작했다.


브뤼헤가 항구의 기능을 잃자 유대인들은 브뤼헤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진 앤트워프(안트베르펜)로 옮겨갔다. /구글 지도


브뤼헤가 항구의 기능을 잃자 유대인들은 브뤼헤에서 약 100㎞ 정도 떨어진 앤트워프(안트베르펜)로 옮겨갔다. 앤트워프 역시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북해 하구변 스헬데 강가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상의 항구였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브뤼헤와 앤트워프 두 곳으로 나누어 정착할 때, 앤트워프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보석 장사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될 때 숨겨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당시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돈과 금, 은 등을 갖고 나가다 발각되면 사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석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무렵 보석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또 보석의 가치가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돈과 귀금속을 보석류와 바꾸어 모두 다 한 움큼씩 가져 와 유통량이 상당했다. 이를 바탕으로 바르셀로나에서 보석 장사를 했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보석 시장이 쉽게 형성되고 활성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앤트워프는 국제 보석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보석 거래 가운데서도 다이아몬드의 이윤이 가장 많이 남았다. 그러자 유대 보석 상인들은 인도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협력하여 직접 다이아몬드 원석을 들여와 이를 가공해 팔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2000년간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다이아몬드 생산국이었다. 그 뒤 17세기 말 베네치아의 유대인 페르지가 다이아몬드 특유의 ‘브릴리언트 커팅’ 연마 방법을 개발한 뒤로 다이아몬드가 명실상부하게 최고의 보석이 되었다. 그러다 18세기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됨으로써 다이아몬드의 주산지는 브라질로 넘어갔다. 그러나 정작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시대를 열게 된 것은 18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강 근처에서 유레카라는 2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면서부터다. 이어서 남아공에서 대규모 광상(鑛床)이 발견되어 다이아몬드가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점차 보석 물량이 커지자 이번에는 가공한 물건들을 외국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손잡고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이 ‘수입-가공-수출-유통’ 프로세스 일체를 장악하여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완전한 독점 산업이 되었다.

바다와 단절되면서 몰락해 버린 브뤼헤의 패권은 그 뒤 온전히 앤트워프로 넘어갔다. 브뤼헤가 플랑드르 지역 직물 산업의 중심 항구였다면, 앤트워프는 브라반트 공국의 직물 산업 중심 항구였다. 1500년께 이르러 앤트워프가 완벽히 브뤼헤를 대체한 후 국제 무역 시장으로 급속히 발전한다. 이렇게 앤트워프를 짧은 시간에 발전시킨 것은 포르투갈이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 후추 등 동방 물품이었다. 1497년 유대인들을 추방한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향신료를 실어 와도 이제 이를 유통시킬 능력이 없었다. 결국 1501년에 리스본에서 동방의 계피와 후추 등 향신료를 실은 포르투갈의 배가 유대인을 찾아 앤트워프로 들어온다. 그 뒤 포르투갈에 앤트워프는 동방의 향신료를 유럽 대륙에 유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 된다. 이는 유대인을 추방한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다루었던 주요 교역품은 이베리아 반도와 브뤼헤 시절 다루었던 교역 품목에 인도산 향신료와 금,은,보석과 다이아몬드가 추가되어 주축을 이루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고부가가치 품목들이었다. 그 무렵 다이아몬드는 주로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16세기 전반에 앤트워프는 발틱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중계무역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당시 유럽과 동인도는 물론 신대륙의 상품을 거의 다 다루었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 상품의 대부분이 한곳에서 거래되었다는 의미에서 ‘세계시장’이 출현했다. 그러자 앤트워프의 정기시들이 일 년 내내 열리는 상설 시장으로 변모했다.

앤트워프에서 유대인들이 취급하는 상품은 더욱 다양해졌다. 북유럽의 타르(역청)와 호밀, 스페인의 양모·소금·포도주·올리브유 등 당시의 대표 수출 상품들이 북유럽과 스페인에서 직수출되지 못하고 모두 이 도시에서 거래되었다. 여기에 커피와 차, 코코아, 담배, 설탕이 더해졌다. 이 품목들이 이후 몇 세기를 풍미하는 최고 히트상품이 된다.

특히 포르투갈이 신대륙에서 가져온 설탕은 유대인이 떠난 리스본에서는 유통시킬 수가 없었다. 이후 리스본을 경유하여 들어온 브라질산 설탕이 유대인에 의해 1508년부터 앤트워프에서 거래되었다. 그 뒤 신대륙의 설탕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탕이 금값이어서 일반인들은 설탕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폭리를 통해 거대한 자본 축적을 이루어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형성을 주도한 상품이 설탕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인도에서는 설탕을 제조하고 있었다. 서구에 설탕이 처음 알려진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공 때였다. 기원전 325년 인더스강 동부 지역을 답사한 대왕의 부하 장군은 “인도에서 자라는 갈대는 벌의 도움 없이도 ‘꿀 같은 것’을 만들어 낸다. 인도인들은 그 즙으로 단 음료수를 만든다”고 기록했다. 장군은 사탕수수를 가리켜 ‘꿀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라고 했다. 유럽인의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다.

이후 6세기 페르시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이슬람은 전리품으로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 비법을 챙겨 가는 곳마다 이를 전파했다.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이 비교적 기후 조건이 비슷한 스페인 남부 연안과 마리다 섬을 필두로 카나리아 제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드디어 유럽 대륙에서도 사탕수수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11~13세기까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설탕 전파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칠리아 등 따듯한 기후의 지중해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이 적고 귀해 값이 비쌌다.

그 무렵 설탕은 왕이나 귀족들만 애용하는 고급 향신료이자 의약품이었다. 설탕은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몇몇 유럽 왕실은 중요한 행사 때 그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설탕 조각을 만들어 전시했다. 물론 값은 엄청났다. 영국에선 설탕 4파운드(1.8㎏)가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싸진 것이다. 1372년 레반트에서 베네치아를 경유해 들어온 설탕 1㎏의 가격은 수소 2마리 값이었고 14세기 말에는 수소 10마리 값까지 폭등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원당 무역뿐 아니라 정제 기술까지 습득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 이후 아프리카에서도 사탕수수가 경작되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신대륙 점령과 함께 재배 지역이 중남미로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15세기 내내 설탕 1㎏ 가격은 보통 소 한두 마리 가격을 유지했다. 이러한 고이윤을 오래도록 보장할 수 있는 길은 독과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유대인들은 설탕의 독과점 유통 체제를 완성한다. 곧 설탕의 유통 경로 일체를 장악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직접 브라질과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운영했다. 이로써 사탕수수 재배에서부터 운반-정제-판매의 핵심 프로세스를 일괄 장악하는 독과점 체제를 완성했다.

사탕수수는 특히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식물이다. 사탕수수는 심고 나서 12개월간 많은 물을 꾸준히 대야 한다. 심고 나서 베기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물을 대야 한다. 따라서 물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조직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사탕수수는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어 재배 지역을 자주 옮겨주어야 한다. 이렇게 옮겨 심고 물 주고 길러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솎아 내는 것도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때 수확해 단시간에 즙을 짜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건조해져 즙을 충분히 짜낼 수 없었다. 또 즙을 짜내면 바로 끓여야 했다. 이를 위해 많은 땔감을 마련하고 붙어 앉아 오랜 시간 불 관리를 해야 했다. 그러려면 직접 사람의 손으로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등골이 빠지도록 일해야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된다.

그 뒤 유대인들은 사탕 수수와 흑인 노예를 토대로 유럽-아프리카-신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을 주도했다. 그리고 앤트워프에 설탕 정제 산업도 발달시켰다. 설탕 정제 산업은 유대인들이 이미 베네치아에서 해봤던 일이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커뮤니티(디아스포라) 간의 결집력을 이용해 ‘생산-교역-가공-유통’의 일괄 독점 체제의 완성은 이후 다른 산업에서도 유대인의 주특기가 된다.

유대인들의 또 다른 특기는 중개 무역이었다. 대부분 스페인, 포르투갈, 인도 등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개 무역은 통과무역과 달리 유대인이 무역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자본력 또는 금융 운용 실력이 관건이었다. 유대인들은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역을 금융과 연계시켰다. 처음에는 담보금융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신용대출을 상품에 연결시켰다. 유대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약속어음을 담보로 한 신용대출은 중세 초기에 계약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 유대인들은 믿을 만한 이방인들에게도 신용대출을 확대해 나갔다. 이것이 상인들 사이에서는 외상 장사로 발전했다. 신용대출과 외상 장사로 상업 활동에 필요한 유동성이 크게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이것이 상업뿐 아니라 해상교역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기폭제가 된다.

유대 상인들은 앤트워프 상설시장에서도 처음에는 신용대출을 상품에 연계시켰으나 나중에는 3개월에 2~3%, 곧 연간 8~12% 이자율의 ‘환어음’을 개발하여 정기시 상인들 사이에서 유통시켰다. 이렇게 상업과 무역을 지원하는 금융을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이 성장시켰다. 원래 환어음의 역사도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사람들은 당시의 화폐인 금이나 은을 집에 보관하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못해 위험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튼튼한 금고를 가지고 있는 금 세공인에게 맡겼다. 그리고 보관증서를 받아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증서가 환어음의 시초이자 종이 화폐의 기원이다. 그 뒤 이것이 진일보하여 유대인들은 금은 이외에 상품에 연계시키는 환어음도 개발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1630년경에는 부유한 상사들이 상품과도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금융상의 환어음만 다루었다.

환어음은 당시 유통되던 약속어음보다 훨씬 발전된 금융기법이었다. 약속어음은 발행인 자신이 지급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에 반해, 환어음은 제3자가 지급 의무를 진다. 주로 물건을 외상으로 준 수출업자가 채무자인 수입업자를 지급인으로 지정해 발행한다. 이는 누가 됐든 어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약정된 시기에 어음에 표시된 금액을 무조건 지급할 것을 위탁한 증권이다. 한마디로 요사이 수표와 같은 기능을 했다. 당시 교역 활동을 하기 위해 금, 은 주화를 많이 가지고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척 무거웠다. 이러한 위험과 고충을 한 방에 해결한 것이 환어음이다. 이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이러한 환어음이 여행 중간의 위험 부담을 줄이면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부를 쌓는 일에 관해 유대인이 기여한 최대 공헌은 신용대출이라는 제도 자체를 만든 일이었다. 뒤이은 공헌이 유가증권을 발명한 다음 이를 보급시킨 일이다. 유대인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지역뿐 아니라 박해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도 유가증권의 사용을 추진했다. 그들이 이렇게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간주하는 선진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이 뿔뿔이 흩어진 이산(離散)의 결과였다. 일찍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간의 교류로 글로벌한 시야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앤트워프의 인구는 유대인이 몰려오기 전까지는 2만 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몰려온 1500년 무렵에 두 배가 넘는 5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그 무렵 도시 인구의 반이 유대인이었다. 그 뒤 1516년 베네치아에 게토가 생겼다. 당시 베네치아에서 자유롭게 해상무역과 조선업 그리고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히게 되자 이를 피해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왔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올라온 유대인들과 베네치아에서 옮겨온 유대인들이 합쳐지면서 여러 면에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해상무역의 범위가 넓어졌으며, 금융기법이 발달하고, 특히 조선업이 강해졌다. 유대인들이 몰려온 앤트워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양 공국 베네치아의 뒤를 이어 유럽의 중요한 유통 기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앤트워프는 중개무역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급속히 커져갔다. 유대인을 추방한 영국은 무역과 금융 모두를 앤트워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 시기에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저지대 헨트(겐트) 출신 카를 5세(카를로스 5세)가 선대의 결혼동맹 덕분에 1516년 스페인 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해 가톨릭에서 신교가 갈라져 나왔다. 이후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5세가 투르크의 침입이 있자, 제후들의 원조를 얻으려고 1526년 ‘신교 포교 금지’를 해제해 루터파의 포교를 허락했다.

그러자 앤트워프에서 종교재판이 폐지되었다. 당시 종교재판이란 주로 개종 유대인이 실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인지를 조사하여 허위로 밝혀질 경우 화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반 종교혁명 조치였다. 스페인의 악명 높은 종교재판을 피해 고향을 등진 유대인으로서는 앤트워프가 축복의 땅이 되었다. 종교 핍박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은 무역과 금융으로 앤트워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앤트워프 경제가 무섭게 급성장했다. 1560년 무렵에는 인구가 10만 명이 되어 당시 스페인의 최대 항구 세비야를 능가했다. 조그마한 앤트워프가 무역 면에서 신대륙을 거머쥔 스페인 제국을 추월한 것이다. 앤트워프는 당시 유럽에서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파리 다음의 큰 도시로 성장해 유럽 5대 도시의 하나이자 유럽 최대 무역항이 되었다. 이후 유럽 경제의 중심지는 단연 활기찬 앤트워프였다. 세계 교역의 절반 가까이가 이 도시를 통해 거래되었다. 완연히 국제적인 상업 도시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페인 제국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 저지대에 주둔하던 용병 부대의 급료를 주지 못했다. 이에 용병들이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1576년 11월 앤트워프를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앤트워프 약탈 사건’이다. 약 7000명의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저지대는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위치한 17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 /위키피디아


저지대는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위치한 17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로, 합스부르크가의 결혼동맹으로 1516년부터 스페인령이 되었다.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 일대이다. 저지대는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댐을 쌓아 간척한 땅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금기가 많아 농업과 목축업이 부적합했다. 16세기 들어 수산업과 염료 산업이 발전하기는 했으나 모직물 산업과 금융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지하자원이나 특별한 생산물이 없는 척박한 곳이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자 이번에는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유통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오늘날까지도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의 독과점 사업이다…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유통업체인 드비어스의 창시자 세실 로즈… 는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이 다이아몬드 가격을 고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생산과 공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로 그는 1888년 드비어스사를 설립하여 판매를 독점했다. 그리고 광산을 사들이기 시작함으로써 공급을 장악하여 단일 채널의 다이아몬드 시장을 구축했다. 이후 20세기 후반에 러시아와 캐나다 등에서 경쟁 생산업체들이 등장했으나 그들 역시 대부분 유대인들로 담합 체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다이아몬드가 만약에 자유로운 경쟁 체제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하면 하루아침에 돌 값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중세 유럽에서 소금 상권을 장악한 민족이 해상 교역을 주도했다. 8~11세기의 스칸디나비아 지역 바이킹들은 약탈 못지않게 교역에도 힘써 수로를 통한 교역망 개척은 주로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심이 얕은 강에서도 탈 수 있는 가늘고 긴 롱십(longship)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물이 끊기면 배를 끌거나 둘러메고 다른 수로를 찾아 이동하면서 교역망을 개척했다. 당시는 약탈과 거래가 혼재했던 시기였다.

덴마크 지역 바이킹이 9세기 저지대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로 내려온 것은 해안가에서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주요 교역품이자 주식인 절임 대구를 염장할 소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트해는 평균 수심이 55m에 불과한 대륙붕으로 겨울철 결빙 시기에는 해수 증발이 없고 주변 강들에서 흘러나오는 민물로 인해 염도가 낮아 소금 생산이 불가능했다.

노르망디에 내려온 바이킹들이 파리를 자주 습격하자 프랑스 왕은 바이킹의 수장 롤로와 911년 화해 조약을 맺고 그에게 공작의 지위를 주어 아예 노르망디를 내주었다. 이후 바이킹들이 시칠리아 등 지중해로 침공한다. 이 역시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롤로의 후손 윌리엄 1세는 1066년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 왕가의 시조가 된다. 이로써 정복왕 윌리엄은 영국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를 겸하게 되어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왕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 윌리엄 왕은 영국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다른 바이킹족들이 영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대규모 요새 겸 성들의 건축 자금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한자동맹의 범위/ 위키피디아

암흑의 중세에 바이킹의 뒤를 이어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북유럽 한자동맹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란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 도시들 90여 개가 힘을 합쳐 결성한 상업 동맹이자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한 무역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상인집단은 14세기 덴마크와의 10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력권을 공고히 했다.

한자동맹도 소금 교역을 통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북해 연안에는 대구를 비롯한 생선이 많이 잡혔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무진장으로 잡혔다. 그러나 생선은 쉽게 상했다. 햇빛에 말려서 건어물로 만들면 장기 보관이 가능했으나, 북유럽은 대체로 흐린 날씨가 연중 이어졌다. 그래서 염장을 하거나 훈제해야 했다.

훈제에는 값비싼 목재가 너무 많이 소요되었고 공급마저 충분치 못했다. 남은 방법은 염장밖에 없었다. 염장은 물론이고 훈제하기 위해서도 소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장에서 가까운 곳에서는 소금이 많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멀리 발틱해 연안 지역에서 암염 광산이 개발된 이후부터 북해 어장의 생선들이 유럽의 중요 식량자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소금과 생선의 교역을 통해서 경제적 번영의 토대를 닦았고, 소금과 생선의 교역은 다른 특산품의 교역까지 활발하게 했다.

스칸디나비아 근처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14세기부터는 해류의 변화로 네덜란드 연안 북해로까지 밀려드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러다 1425년경부터는 어장의 중심이 아예 발트해로부터 북해로 이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너도나도 청어잡이에 나섰다. 그 결과 당시 매년 여름이면 약 1만t의 청어가 잡혔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총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는데 고기잡이와 관련된 인구만 30만 명이었다. 거의 전 세대가 청어잡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청어잡이는 전 국민의 밥줄이었다. 14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한 어민 ‘빌렘 벤켈소어’는 선상에서 작은 칼로 한칼에 청어의 배를 갈라 이리를 제외한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없앤 다음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염장법을 고안해 냈다.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잡는 즉시 함수에 절이고 육지에 돌아와서 소금에 절이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1년 넘게 보관할 수 있었다.

그러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폭넓은 갑판의 배가 필요했다. 그들은 1416년 ‘뷔스(buss)’라는 갑판이 넓은 청어잡이 전문 선박을 개발했다. 적재량은 100t에 달했고, 염장 숙련공은 물론이고 통 만드는 기술자도 동승했다.

네덜란드는 이 두 가지 기술혁신을 통해 주변 경쟁국들을 압도했다. 조업 중에 보급선이 와 소금을 갖다주고 잡은 생선을 가지고 가, 항구로 회항할 필요 없이 계속 조업하면서 염장 작업도 직접 배 위에서 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네덜란드 어선은 청어 이동 경로를 따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연안까지 종횡무진으로 조업했다. 어장 쟁탈로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는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냉장고가 없는 당시에 소금에 절인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렇게 청어를 저장하고 수출하는 데에는 소금이 필수품이었다. 절임 청어 원가의 대부분은 청어가 아니라 소금이 차지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관 기간을 획기적으로 연장시켜준 절임 청어는 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년에 140일이 넘는 기독교 육류 금식 기간에도 생선은 먹을 수 있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 수백 명이 매일 아침 소금에 절인 청어를 유럽 전역으로 가져가 돈을 벌었다. 당시 필요한 소금의 일부는 브뤼헤나 앤트워프를 통해 수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 광산에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왔다.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당해 저지대에 온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청어를 절이는 데 필요한 대량의 ‘소금’이었다. 그 무렵 소금은 비쌌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그들은 먼저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는 소금 대신 이베리아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했다.

천일염이 암염보다 값이 쌀 뿐 아니라 질은 말할 나위 없이 훨씬 더 좋았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청어 절임 소금을 암염에서 천일염으로 서서히 대체해 나갔다. 이는 네덜란드를 소금 중개무역 중심지로 만들어 준 중요한 시초였다. 유대인들은 소금 공급을 토대로 자연스레 절임청어 유통의 독과점 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천일염을 다시 한번 ‘정제’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천일염은 암염보다 순도도 높고 깨끗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정제하여 더욱 고운 소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당시 소비자는 소금의 순도, 모양, 때깔 등 소금의 질에 민감했는데 특히 양질의 음식에 쓰일 소금에는 더 그랬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고객의 요구에 맞춘 것이다. 이 요구에 부응해 역사상 처음으로 거친 소금을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로 만드는 소금 정제산업이 유대인에 의해 최초로 발달했다. 유대인들은 대서양 연안 천일염으로 결정이 더 작고 염도가 높은 소금을 만들기 위해 이를 다시 끓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시켜 순도 높고 고운 결정을 만들었다.

16세기 중엽에는 총 400개의 대서양 연안 소금정제소에서 4만t의 소금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저지대 소금 필요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이 정제 소금이 멀리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육로로 가져오는 암염보다 쌌다. 한마디로 이베리아반도의 정제 천일염은 대단한 가격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 모두를 갖고 있었다. 이로써 북해 지역이 발트해를 제치고 소금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북해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독일어권 지역의 암염 대신 유대인들은 양질의 천일염을 정제하여 대량으로 들여와 한자동맹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소금이 경제권역 간의 주도권을 바꾼 것이다.

당시 한자동맹이 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유대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하고 매매 대금으로 현지 화폐만을 고집했다. 그러니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금의 독점적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금융이 꽉 막힌 그들에게 유동성이 줄어들자 급격히 쇠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청어를 절이고 남는 천일염과 정제 소금은 인근국들에 싼값에 되팔아 소금 유통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 체제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유통시킬 국내 자원이 부족하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고대로부터 상인들이 몸에 귀중품이나 금은 주화를 갖고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귀한 상품이나 주화를 운반해야 하는 상인들은 항상 대규모 상단을 구성해 함께 다니면서 용병들을 고용해 그들을 호위케 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들 디아스포라 간 교역에 있어 주화 대신 어음을 사용했다. 어음은 거래 당사자 간에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한 증서다. 처음에는 어음 발행자가 채권자에게 직접 지급하는 약속어음이었다.

그런데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어음의 뒷면에 채권의 양도를 기재하는 ‘이서’(裏書)를 함으로써 처음으로 상인들 사이에 서로 이전되고 할인시장에서 유통되기도 했다. 이것이 환어음으로 수표 역할을 했다. 강력하고 거대했던 한자 상인들이 환어음을 받지 않아 망하는 것을 본 유럽 상인들은 유대인들의 환어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환어음이 유통되자 신용거래가 자리 잡고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여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유대인들은 청어 처리에도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바로 ‘분업화’를 도입한 것이다. 고기 잡는 사람, 내장 발라내는 사람, 소금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했다. 숙련공들은 1시간에 약 2천 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냈다. 이로써 절임 청어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청어의 포획부터 시작하여 처리와 가공 그리고 수출은 기업화되기 시작했다. 청어 절임이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오늘날의 수협 격인 ‘어업위원회’를 만들었다. 동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아 체계적인 청어 산업을 관리 감독했다. 어업위원회는 품질 관리를 위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다. 그리고 가공 상품의 중량, 포장 규격 등 엄격한 품질기준을 만들어 네덜란드산 청어가 뛰어난 품질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관리했다. 그리고 어획 시기를 한정해 청어 산업의 장기적인 포석과 더불어 공급을 조절하여 청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끌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 시장에서 다른 나라에 견주어 우수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관 공정 체계의 완성과 유통의 장악, 그리고 공급 조절 곧 ‘독과점 전략’은 원래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유대인들은 염장 대구가 영국과 프랑스 해군과 상선의 필수품이 되었듯이 네덜란드 해군과 상선 모두에 소금에 절인 청어를 공급했다. 이로써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했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살려 절임 청어를 품질이 균일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전 유럽에 판매했다.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절임청어, ‘더치 헤링(dutch herring)’을 즐겨 먹는다. 주로 꼬리를 잡고 통째로 먹기도 하고, 양파를 곁들여서 샌드위치로 먹기도 한다. 청어의 비릿한 향과 양파가 조화를 이루면서 은근히 입맛을 당기는 묘한 매력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청어는 지방질이 많아 빨리 상했다. 그래서 상하기 전에 염장 처리하려면 만선이 안되더라도 빨리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네덜란드 어부들은 14세기 중엽부터 청어를 배 위에서 작은 칼로 내장과 가시를 처리하여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염장하는 ‘선상 염장’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이제는 항구에 자주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주변 경쟁국들을 따돌리고 청어 어획고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함수로 염장한 청어는 소금에 절인 청어에 비해 짜지 않아 생선 식감이 훨씬 좋았다. 함수로 염장한 청어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생청어’(Dutch Herring)이다. 여기에 식초를 부어 절이면 ‘식초 절임 청어’, 연기에 말리면 ‘훈제 청어’, 소금으로 2차 염장하면 1년 이상 유통할 수 있는 ‘염장 청어’가 된다. 이로써 경쟁국에 비해 맛이 좋은 네덜란드 염장 청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청어 산업은 국가 산업이 되었다.


청어잡이 전용선 ‘헤링버스’와 보급선. /위키피디아


이제 네덜란드 어부들은 북해 앞 바다뿐 아니라 청어 떼를 쫓아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작은 고기잡이배로서는 원양 항해가 무리였다. 그래서 15세기 중반부터 청어잡이 전용 선박 ‘헤링버스’(Herring Buss)가 개발되었다.

네덜란드 저지대 원주민들은 8~11세기에 이주한 바이킹 후손들이 많았다. 바이킹 배는 길쭉하고 물에 얕게 잠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청어잡이 배를 기동성 좋은 바이킹 롱쉽(long-ship)을 토대로 선상 작업에 편리한 형태로 개량했다. 우선 선상에서 청어 내장과 가시를 처리한 후 통에 담는 작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갑판 넓이를 라운드쉽(round-ship) 모양으로 키웠다.

그리고 어업 방식도 진화했다. 청어잡이 배가 항구로 회항하는 대신 보급선들이 식량과 함수, 소금을 싣고 와서 청어를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청어 잡는 어부들이 바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어잡이 배 또한 더 많은 청어와 소금, 그리고 더 많은 선원들을 태워야 했기에 헤링버스 크기는 지속적으로 커져 16세기 말에는 140~200톤 규모에 달했다. 이렇게 커진 배는 청어잡이 시즌(5~9월)이 끝나면 청어 관련 무역선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배 만드는 기술을 비밀에 부쳐 설계도의 외부 유출을 엄격히 금했다.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몰려든 시기는 크게 3차례이다. 1차 이주는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된 1492년과 포르투갈에서마저 추방된 1497년, 2차 이주는 앤트워프 학살 사건에서 탈출한 1567년, 3차 이주는 앤트워프가 스페인에 정복당한 1585년이었다.

유대인들이 1차 이주하여 활발히 활동하던 1514년의 암스테르담 인구는 1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항구도시였다. 그 뒤 2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의 이주가 더 이루어져 암스테르담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음에도 1590년 암스테르담 인구는 4만 명 남짓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을 정비하고,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이고, 운하를 파서 세계적인 항구로 발전시켰다. 이에 힘입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1620년에 10만, 1670년에 20만 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 인구의 11%가 유대인이었다.

1차 이주 때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몰려온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정착하면서 스페인 천일염을 수입해 소금 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한자 상인들을 몰아내고 자연스레 청어 산업과 조선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표준화와 분업화’로 청어잡이가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 배가 많이 필요했다. 이는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화물선 제작 능력이 좋아졌다. 네덜란드 산업은 이처럼 수산업에서 시작하여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조선업이 발달하니 목재업이 호황을 누렸다. 100톤이 넘는 청어잡이 배를 대량 건조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목재가 필요했다. 선박용 목재는 땔감용 나무보다 재질이 우수해야 했다. 대형 선박 한 척 건조하는데 약 2,000그루의 참나무가 필요했다. 6만 평 숲에서 100년 동안 키워야 확보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저지대는 소금기가 남아 있어 큰 나무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라인강을 이용해 강 주변의 독일 내륙 숲에서 자른 통나무들로 뗏목을 만들어 암스테르담까지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유대 무역상들은 삼림이 풍부한 스칸디나비아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배로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수심이 낮고 물살이 빠른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경로를 개척해 발트해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통나무를 대량 수입해 목재 제재소와 조선소를 확장했다. 1497년부터 1503년 사이에 발트해를 드나들면서 통관세를 지불한 선박의 70%가 네덜란드 배였으며 그중 78%가 유대인이 많이 사는 홀란트 주의 배들이었다.            



어업과 무역의 성장은 더욱 조선업 발전을 촉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목재 수입을 위해 빈 배로 발트해까지 갈 수는 없어 배에 뭐라도 실어야 했다. 그들은 소금과 절임 청어 그리고 플랑드르 모직물, 프랑스 포도주, 독일 아마와 맥주 등을 발트해 지역에 수출하고 목재와 곡물 그리고 조선업에 필요한 자재들을 수입했다. 이 중 일부를 자체 소비하고 나머지를 서유럽과 지중해 도시에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정제되지 않은 소금과 기타 제조업 제품들을 수입하는 중계무역을 발전시켰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청어 절임에 필요한 질 좋은 소금을 추출하는 정제업이 크게 발전했다.

발트해 무역의 백미는 곡물 중개 무역이었다. 16세기에 유럽 인구가 크게 늘어나 식량이 모자랐다. 1500년경 8,1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600년경에 1억 400만 명으로 28%나 늘어났다. 식량 생산성이 낮았던 근세에 인구가 크게 느니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지중해 도시들이 기근에 허덕였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당시 유럽 최대의 곡창 폴란드에서 수입한 식량은 중개무역을 통해 지중해 지역에 비싸게 수출했다. 특히 1550~1650년까지 폴란드 곡물은 서유럽인과 지중해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식량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의 발트해 무역이 지중해까지 삼켜버린 셈이다. 네덜란드 무역선은 지중해 곳곳에 진출했다.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암스텔강의 둑’이란 뜻이다.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둑을 설치하고 정착한 데서 유래했다. 그 뒤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함부르크의 맥주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뤼헤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들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하는 바였다.

네덜란드는 산이 거의 없고 전 국토가 평평했기 때문에 일 년 내내 북해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의 나라였다. 이 바람을 이용해 풍차를 돌렸다. 풍차 날개의 최대 회전속도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분에 평균 24회 정도 회전한다. 이를 이용해 바닷가에 뚝을 쌓고 풍차로 바닷물을 빼내어 간척지를 개발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중개무역이 늘어나자 16세기 말에 암스테르담 항구 기능을 확대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른바 ‘새로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였다. 이는 부채꼴 형태의 운하 체계를 이용하여 습지의 물을 빼내고, 군데군데 늪지를 매립하여 항구를 확장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이 간척사업에 풍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풍차가 물 빼내는 용도 이외에도 유용한 용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594년 네덜란드의 한 발명가는 풍차 날개의 움직임에 맞추어 수직으로 톱질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최초의 풍력 활용 제재소를 발명했다. 네덜란드에서 16세기 말 목재 제재소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때맞추어 풍차 동력을 활용한 ‘목재 제재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풍차는 증기기관 등장 이전 좋은 동력원이었다.

덕분에 목재 제재업과 조선업에 표준화와 분업화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잔(Zaan) 강 유역에 600개가 넘는 풍차가 세워져 최초의 공업단지가 만들어졌다. 풍차 제재소들이 생산한 목재는 네덜란드 내부 수요뿐 아니라 여러 국가로 수출되었다. 그 뒤 풍차의 동력을 활용해 방직 등 직물업도 발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영국과 스페인에서 양모를 들여와 직조하고 염색까지 해서 이를 유럽 전역에 팔았다. 대표적 직물업 중심지 레이덴은 17세기 유럽 최대 직물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풍차 동력으로 제당업, 염료가공, 제지, 도자기 제조 등 제조업과 출판, 운송, 상업 등 서비스산업까지 다양한 분야가 균형 있게 발전했다.

목재업이 발전하자 이는 즉시 조선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95년 홀란트 주 암스테르담 북부 호흔(Hoorn)의 조선소에서 갑판이 좁고 선복이 큰 형태의 배가 개발되었다. 이른바 플류트(Fluyt)선이다. 배불뚝이 배 또는 뚱보선이라 불릴 만큼 앞뒤가 둥글둥글하고 갑판은 좁고 상품 싣는 선복이 넓은 배다.

이 배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자.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에 게토가 생기자 그곳에서 해상무역과 조선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히지 않으려고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왔다. 그 뒤 목재 가격이 올라 선박 건조 비용이 상승했을 때, 베네치아는 16세기 식 표준을 고수한 반면,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기존의 갤리온선보다도 좀 더 가볍고 조종하기 쉬운 배를 개발했다. 이것이 베네치아와 네덜란드 간 조선업과 해운업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와 그 인근 나라들에는 배 만들 큰 나무들이 대부분 벌채되어 희귀해졌다. 반면 네덜란드는 핀란드 등에서 배 만드는 큰 원목을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업과 해운업은 네덜란드의 독보적인 산업이 되었다.

영국도 이에 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네덜란드 유대인의 과감한 모험정신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발트해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 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 배에는 양옆으로 수많은 대포를 장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대포를 장착하지 않거나 12~15문 정도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싼 나무로 화물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 경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곧 플류트선은 흘수선(waterline)에서 갑판으로 올라갈수록 선폭이 좁아졌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오늘날의 컨테이너선인 셈이다. 이 배는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돛이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랐다. 플류트선의 설계는 초기 갤리온선의 설계와 유사해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플류트선 한 척의 적재 용량은 약 250t~500t에 길이는 25미터 내외였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 및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발트해의 통관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플류트선이 통행료를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개발했다는 것은 끈질긴 신화라는 이야기이다. 1562년부터 1632년까지 70년 동안 통행료 기록부에 의하면, 징수관이 선하증권을 사용하여 선박의 선적 용량 곧 배의 너비, 길이, 깊이를 평가한 다음 이에 따라 통행세를 매겼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앞 바덴 갯벌은 우리 서해 갯벌과 함께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이다. 곧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갯벌에서는 썰물 시에도 배가 안정적으로 정박해 있으려면 밑바닥이 뾰족한 유선형의 배 곧 ‘첨저선’이 아닌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야 한다.

즉 플류트선은 용골(선박 바닥의 중앙을 받치는 길고 큰 재목)을 먼저 만들어 그 속에서 제작하는 첨저선과는 달리 배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땅 위에서 직접 건조할 수 있어 선박 건조비가 싸게 먹혔다. 영국에 비해 60% 수준이면 족했다.            



게다가 배의 크기도 마음대로 키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의 용적이 최대치가 되도록 설계되어 적재 화물도 첨저선에 비해 두 배 이상 실을 수 있었다.

이런 이점 이외에도 발트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항해 속도가 빠른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2-3개의 마스트(돛을 달기 위하여 배 바닥에 세운 기둥)에 가로돛을 달았고, 마스트 높이는 갤리온의 마스트 높이보다는 높았는데 이는 빠른 속도를 위한 것이었다.


플류트선 모습. /위키피디아


또한 돛 줄을 조작하는 복합 도르래(block and tackle)를 돛대에 최대한 많이 달아 승선 인원이 보통 9~10명으로 영국 동급선박의 30명에 비해 저렴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보통 12문의 대포를 장착했는데 때로는 더 많은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대포를 떼어내어 해변에 남겨두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화물 운송비를 1/3까지 낮추었다. 이로써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그런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인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상운송 물량이 폭증하자 이런 장점을 가진 배를 대량 건조했다. 이를 위해 조선소의 설비와 자재, 계측장비 등을 표준화했다. ‘표준화’ 또한 유대인 장기였다. 청어 산업에 이은 표준화가 조선업에서도 위력을 발했다. 이로써 배를 저렴하고 빠르게 건조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북방무역의 70%를 장악했다. 보유 상선 수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 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1602년 동인도회사 출범 이후 상선 건조는 대폭 늘어났으며 특히 1625년부터는 약 1만 명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매년 400~500척의 선박을 건조해 네덜란드 상선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497년부터 1660년까지 외레순 해협을 통과한 선박이 약 40만 척이었는데 이 중 60%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1670년 네덜란드 상선은 총 56만8000톤의 운송량을 기록했으며 이는 유럽 전체의 절반 이상이었다.

중세 이래로 라인강 유역 나루터와 상업 도시에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상권을 주도하고 있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 가장 많은 학살을 당한 사람들이 라인강 변의 유대인들이었다. 이때 동구와 러시아로 피란 간 유대인 후예들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뜻의 ‘아슈퀴나지’이다. 16세기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라인강 주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과 협동해 내륙 물류 산업을 장악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주요 항구인 앤트워프, 세비야, 런던 등이 얕은 바다를 끼고 있거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플류트선은 화물선으로 가장 효율적인 배였다.



1596년 네덜란드 항해가 빌렘 바렌츠가 북극해의 스발바르 제도를 발견했다. 그 인근에 고래와 물개, 바다코끼리가 많았다. 포경은 기원전 6000년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 인근이 최초 포경지의 하나였다.

초기 포경업은 주로 해안가에서 이뤄졌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몰려 나가 고래가 지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뒤를 쫓아가 호흡이 가빠진 고래가 물 위로 떠오를 때 고래에게 집단으로 작살을 던져 잡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연해에서 고래가 사라지면서 먼바다로 나가게 된다. 먼바다에서 큰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고래를 발견하면, 선상의 작은 배를 내려 노를 저어 가서 작살을 던져 사냥하는 방법이었다.


긴수염고래 사냥. /위키피디아


그런데 대형 고래인 긴수염고래만은 사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고래들은 헤엄치는 속도가 빨라 범선이나 노를 젓는 배로는 따라잡기 어려웠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포를 이용한 작살로 고래 잡는 기술을 발명하여 그곳을 장악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1610년경부터 고래잡이 분야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대량의 고래기름과 고래수염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고래기름은 오랫동안 밤거리 가로등에 사용되었다. 게다가 고래 고기는 찬 음식으로 분류되어 육식이 금지된 금식일에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으로 알려져 오랜 기간 서구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네덜란드 포경선단은 약 150척에서 250척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해에 잡은 고래 수만 750~ 1250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경선단은 240여 년간 독점적 포경으로 북극해 일대의 고래를 거의 멸종 단계로 몰아넣었다.

16세기 전후 포르투갈이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열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했고, 1521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일주한 해로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지나야 했다. 네덜란드는 더 빠른 길을 찾고 있었다. 북극 바다를 지나면 아프리카의 희망봉이나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지 않고 빠르게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뱃길을 거치면 1만2000㎞이지만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2만4000㎞이다. 운항 거리와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스페인 왕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면서도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북동항로를 찾는 배를 내보냈다. 그 선두에 빌렘 바렌츠 선장이 있었다.


북극항로와 수에즈 항로/ 위키피디아


빌렘 바렌츠 선장은 북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최단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모험에 나섰다. 그는 1594년 1차 항해에서 이미 노바야젬라 섬에 도달하고 주변 섬들을 발견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듬해 2차 항해에 실패하는 통에 한 푼의 보조금도 받지 못했지만 굴하지 않고 1596년 3차 항해길에 올랐다.


북극 빙하에 갇힌 바렌츠의 배/ 위키피디아


바렌츠 선장은 화물을 싣고 새로운 북극 항로를 찾아 한여름에 3차 항해길에 올랐다. 그들은 여름철이면 24시간 낮이 지속되는 ‘백야 현상’으로 얼지 않은 바다에서 최단 북극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배는 빙하에 갇히게 된다. 선원들은 닻을 내리고 빙하 위에 올라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짓고 불을 지폈다. 그들은 8개월 동안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지냈다. 배의 갑판을 뜯어 불을 피우고, 최소한의 음식으로 버티다 그 식량마저 떨어지자 북극곰과 여우를 사냥해 허기를 채웠다. 그사이 네 명이 죽었다.


빌렘 바렌츠 일행의 오두막집/ 위키피디아


선장과 선원들은 1597년 6월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항해에 나섰지만, 일주일 뒤 쇠약해진 바렌츠 선장은 숨을 거두었다. 결국 선장을 포함해 8명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어가면서도 위탁받은 화물에 있는 식량과 의복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십여 일 뒤, 얼음이 풀리면서 생존자 12명이 러시아 상선에 구조되었다.


바렌츠 선장의 죽음. /위키피디아


구조된 선원들이 그해 11월 돌아왔을 때 네덜란드는 감동에 젖었다. 위탁화물인 옷과 식량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얼어 죽고 굶어 죽으면서도 화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경쟁국에 비해 값싼 운송료와 더불어 네덜란드가 해상운송을 장악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신용’이었다. 냉엄한 도덕률과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명예 의식과 상도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이 꽃피었다.


바렌츠가 위탁받아 무역거래를 하려던 물건들/ 위키피디아


사람들은 감동했다. 목숨 바쳐 지킨 ‘상도의’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부심이 되어,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영원한 기록이 되었다. 유대인의 상업적 재능에 더해진 ‘신뢰’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원양 항해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트러스트: 사회도덕과 번영의 창조> 저서에서 ‘신뢰’가 국가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바로 ‘신뢰’였다.


바렌츠해/ 위키피디아


노르웨이와 러시아 북서부 앞에 있는 바렌츠해는 빌렘 바렌츠 선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게다가 바렌츠 선장이 죽기 전해인 1596년에 발견한 스발바르 제도에서 대량의 석탄이 발견되어 네덜란드에 큰 부를 안겨다 주었다. 그는 죽어서도 애국자였다. 47년 짧은 생을 보낸 바렌츠는 네덜란드 10유로짜리 동전의 주인공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네덜란드 10유로 동전. /위키피디아


162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어선은 2000척이 넘었는데 대부분 70톤에서 100톤에 이르는 청어잡이 배였다. 선원들이 한 척당 15명 정도 승선했으니 단순 계산으로도 3만 명 이상의 어부가 조업했다. 1630~1640년대에는 연간 약 3만2500톤의 청어를 처리해 당시 유럽 전체 청어 포획량 6만 톤의 절반을 넘겼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부는 청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청어잡이와 청어의 가공 처리, 통 제작, 망, 어선 건조 등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합하면 그 수가 약 45만 명에 달했다. 당시 국내 노동인구의 태반이 청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수산업에서 촉발된 활황은 배 만드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또 목재업·무역업·금융업의 발전을 낳았다. 청어 어업이 네덜란드 경제와 해운 그리고 무역과 금융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자는 금기시되어 왔다.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불임설”을 주장했다. 돈은 그 자체로 이윤을 낳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받는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고리대금업은 가장 미움을 받는다. 그것이 미움을 받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 왜냐하면 화폐란 교환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지 이자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자는 고대로부터 비난 받아 왔다.

기독교 또한 이자를 금했다. 이자는 돈을 빌려준 시간에 대해 받는 반대급부인데 시간은 신께 속한 영역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인간이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융’이라 부르지 않고 ‘고리대금’으로 불렀다. 중세는 아무리 값싼 이자라도 어쨌든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면 고리대금이라고 칭했다. 기독교는 교회법인 카논 법률에 이자놀이를 불법으로 명시해 1179년부터 이자 받는 사람들을 아예 파문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처형한, 영원히 저주받을 족속인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순결한 기독교인들을 죄악으로부터 지키도록 했다. 가톨릭이 유대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허용한 것은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들이니까 이런 역할을 맡겨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대부 활동으로 경제 부흥을 촉진시킬 필요도 있었다.

반면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는 받을 수 있되 너의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근거로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탈무드도 이자를 많이 받는 고리대금은 엄격히 금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고리대금업자를 살인자와 동일시했다. 기독교도들은 대부업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피했고 자연히 대부업은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그 때문에 중세 기독교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은 국고 관리를 주로 유대인에게 맡겼다. 유대인의 대부업은 이자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117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대금업자는 파문한다”고 선언하자 각국 군주가 돈 빌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는 과연 대금업이 무엇이냐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이어졌다. 한편 국제 무역이 증가하면서, 어음 거래 또한 늘어났다. 어음 거래를 막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아 어음 거래는 금융 거래가 아닌 매매의 연장이므로 대금업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자 자금 융통을 위해 어음을 발행하면서도 마치 실제 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꾸몄다. 이런 어음을 ‘건식 어음’이라 했다.

상업상의 실제 어음과 건식 어음을 구분해 가려내는 일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16세기 초 프랑스 신학자 장 거송(Jean Gerson)이 “차입자를 가혹하게 옥죌 목적으로 대출할 때”만 대금업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독일의 에크(Eck)는 『5% 계약에 관한 연구』(1515년)라는 책을 통해 5% 이자야말로 하느님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합리적 상한선이라고 거들었다. 푸거 가문에서 뒷돈을 댄 결과였다. 그러자 교황 레오 10세가 같은 해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출법』을 통해 5%의 이자 수취를 합법화했다. 레오 10세는 다름 아닌 메디치 은행 대표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었다.

그 무렵 광산업을 통해 큰돈을 번 북부 독일의 유대 푸거가에 빚 지지 않은 통치자들은 별로 없었다. 당시 푸거가는 바티칸 교황청의 최대 채권자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대부업 금지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1517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자 받는 대부업에 대한 대부분의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 금융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 금융의 중심은 북부 독일 한자 도시들에서 유대인이 금융을 주도하는 앤트워프로 이동했다.

1545년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칼뱅이 레오 10세의 결정에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왜 이자가 꼭 5%이어야 하는가? 칼뱅이 히브리 성경을 오래 연구한 결과 대금업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는 두 가지였다. “깨문다”는 뜻의 네섹(neshek)과 “늘린다”는 뜻의 타빗(tarbit)이었다. 이 중 성경에서 명백히 금지하는 것은 네섹뿐이라는 것이 칼뱅의 결론이었다. 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한 자는 깨물지 말고 대가 없이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얼마든지 이자를 받고 대출해줄 수 있는 것이다. 칼뱅은 대금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가톨릭의 경제관을 뒤집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금융업이 공인되고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자금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이자가 결정되었다.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려고 하는 돈이 적으면 이자는 올라가지만, 그 반대 현상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는 돈이 더 많으면 이자는 내려갔다. 이로써 수급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채권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에 환어음과 차용증 제도를 정착시켜 신용사회를 구축했다. 당시 저지대에서는 ‘부채증서의 양도에 관한 법률’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유대 상인들은 환어음을 통해 빠르게 자본을 모으고 순환시킬 수 있어 은행 등 금융업이 발달해 신용거래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1550년대 유대 금융인들은 채권시장을 활성화시켜 정부도 강제 공채제도 대신 채권시장을 통해 공채를 발행해 대부받는 관행을 정착시켰다. 당시에는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평소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전쟁 공채를 사서 전쟁 자금을 지원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전통은 강제화되었다.

저지대 주 정부와 도시들은 세 종류의 공채를 발행했다. ‘오블리가티엔(Obligatien: 단기채권)’은 ‘무기명 채권’으로 이를 소지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은행에서 현금으로 매각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중세 베네치아 이래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무기명 유가증권을 선호했다.

장기 채권으로는 ‘로스렌텐(Losrenten)’이 있었다. 이는 종신연금으로 무기명 채권과 달리 공적 원장에 자기 이름을 등록하고 정기 이자를 받았다. 이 증권은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었고, 소지자가 죽으면 상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이프렌텐(Lijfrenten)’이 있는데 이는 소지자가 죽으면 지급이 중단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로스렌텐과 비슷했다. 곧 사망하면 지급이 중단되는 종신형 연금과 후손에게 대물림이 가능한 상속형 연금의 차이였다. 이러한 채권시장이 가장 발달한 곳은 유대인이 많이 모여든 앤트워프였다. 영국 왕실도 큰돈이 필요한 경우 앤트워프에서 융통해 썼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극복한 저지대 간척의 역사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저지대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해수면과 지반의 침강과 융기를 통해 현재의 지형을 형성했다. 저지대는 해수면보다도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그 흔한 언덕조차 보기 힘든 평평한 늪지대와 갯벌이 대부분이었다.

네덜란드 텍설(Texel)섬에서 덴마크 남부 해안까지 이어지는 바던해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에서도 가장 큰 갯벌이다. 밀물과 썰물의 조수 간만 차가 3m가 넘고, 길이는 약 500㎞, 넓이는 약 1만㎢에 달한다. 라인강, 마스강, 스헬더강 등 북부 유럽의 3대 강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바덴해 갯벌. /위키피디아


그러다 보니 저지대 해안가가 모두 강 하구에 쌓인 침적토와 갯벌과 늪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홀란트주는 늪지대 간척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주민들이 간척한 땅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그러자 1270년경 어민들이 암스텔(Amastel)강에 둑[Dam]을 쌓고 다리를 놓아 늪지대를 간척하여 정주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 이름이 그대로 암스테르담(Amastel+dam=Amasterdam)이 되었다.


해수면보다 낮은 늪지대. /위키피디아

저지대 앞 바다 북해는 북위 60도 중위도 저기압대에 걸친 까닭에 기상 악화가 잦고 바람이 많이 분다. 심할 경우 폭풍해일이 들이치는데, 이 폭풍해일이 북해 연안선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도 있다.

1282년 발생한 해일이 북해에 있는 텍설섬 부근 모랫둑을 무너뜨리면서 바닷물이 들어와 자위더르해가 만들어졌다. 이 재해가 암스테르담을 항구도시로 만드는 운명의 첫 신호탄이었다. 침적토가 쌓인 암스테르담 부근까지 큰 배가 들어오면서 해상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들어온 발트해 상선들에 의해 작은 마을이었던 암스테르담이 항구로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라인강과 연결되는 강 하구에 위치한 마을의 특성을 살려 라인강을 타고 올라가 내륙 수로 교역망을 넓혀나갔다. 이때 라인강 주변에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이들이 라인강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이 커지자 이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은 1367년 한자동맹의 하나인 ‘쾰른동맹’에 참가하여 라인강 내륙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은 위도에 따라 기후 차이가 크다. 북부 유럽은 숲이 울창하고 농사짓는 데 적합했고, 남부 유럽은 포도주 등 술과 소금을 얻는 데 유리했다. 이렇게 남북의 생산품이 달랐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했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발트해 상선들에게 남부 유럽의 술과 소금을 팔았고, 남부 유럽에는 발트해 상선들이 가져온 목재와 곡물을 팔았다.

1421년 11월 대규모 홍수로 북부 저지대 10개 도시가 물에 잠겼다. 이후 사람들은 해안에 방조제를 쌓기 시작해 간척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땅을 ‘폴더’라 불렀다. 이렇게 저지대 사람들은 간척사업을 통해 땅을 넓혀갔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물을 빼내는 풍차는 간척사업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도구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저지대에 모여든 것은 15세기 말부터였다. 곧 1492년 스페인에서의 추방, 1497년 포르투갈에서의 추방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저지대에 몰려왔을 때 대부분은 플랑드르 항구도시에 정착했고, 일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는 수천명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나막신. /위키피디아


북부 저지대 사람들은 쓸 만한 땅을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수로를 팠다. 그러면 물기는 빠지지만 땅이 주저앉는 지반침하 현상이 발생했다. 땅이 꺼지면 바닷물이 밀려든다. 그러면 제방을 더 높이 쌓고 풍차로 물도 계속 퍼내야 했다. 그래서 그곳 늪지대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낸 후 생긴 땅은 소금기가 있어 농경지로 바로 쓰지 못했다. 소금기를 빼내기 위해 땅을 말려 소금을 얻은 뒤, 하천으로부터 담수를 끌어와 민물 호수를 만든 후 나중에 민물을 빼내면 농경지로 쓸 수 있었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내고 다시 하천의 민물을 끌어오다 보면 자연히 생기는 것이 운하였다.

이렇게 간척에 성공해 생긴 땅은 다른 유럽 나라들과 달리 군주나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는 절대 봉건주의 곧 군주나 주교의 통치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의미였다.

그 무렵의 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시민들이 땅을 자유로이 사고팔 수 있었으며,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이 군주나 영주로부터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다. 이는 훗날 ‘네덜란드 공화국’ 탄생의 토대가 된다. 그러다 보니 저지대는 특정 종교나 사상에 대해 제약이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유대인들도 나서서 간척사업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을 베네치아와 비슷한 항구도시로 만들기 위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항구에는 상업지역과 늪지대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늪지대의 토탄을 채취해 팔면 돈이 되었다. 토탄은 식물류가 오랜 기간 땅속에 퇴적돼 생성된 석탄 초기 과정의 물질로 연료로 쓰였다.

이렇게 늪지대의 토탄을 파내면 드러나는 모래 자갈층 밑바닥에, 물에 잘 썩지 않는 참나무 말뚝들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덮어 인공섬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땅과 집을 획득했다. 지금의 암스테르담은 70%가 간척지로 약 90개의 인공섬이 1500여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모여드는 유대인 덕분에 1514년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만1000명에 도달했다. 당시 북부 저지대 인구 백만명 중 20%가 1만명 이상 규모 도시에 살았다. 이렇게 도시화율이 높다는 것은 농업 환경이 좋지 않아 장원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항구도시에 어업 관련 종사자들과 유대인과 같은 상인층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 뒤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이 소금 상권을 장악하고 청어 산업을 주도하면서 저지대는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이후 유럽 곳곳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이 무렵 안트베르펜 유대인들도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오면서 1541년 이후 안트베르펜 경제가 후퇴하면서 상대적으로 암스테르담이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 암스테르담 인구는 1557년 2만2000명을 넘어섰고 1564년 3만명을 돌파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결혼동맹을 통해 저지대와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스페인 왕국은 저지대에 군인을 주둔시켜 이단심문을 통해 가톨릭을 강요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과 칼뱅파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을 추방해 세수가 급감한 스페인 왕국은 재정 파탄에 시달리자 저지대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 스페인 왕국 국세의 40%를 저지대에서 뜯어갔다. 이러한 종교재판과 중과세 정책에 항거하는 상인들이 반란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1566년 칼뱅주의자들이 ‘성상 파괴 운동’을 벌여 저지대 성당들을 모두 파괴했다. 이를 반역으로 간주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만명의 군대와 함께 악명 높은 알바 공작을 파견했다. 이 일로 8000명이 처형당하고 10만명이 국외로 탈출했다.

이에 반발해 저지대 17주는 1568년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이른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중 스페인 왕국의 재정 파산으로 인해 안트베르펜에 주둔한 용병들에게 2년 치 월급이 밀리자, 1576년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 통에 시민 7000명이 학살당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안트베르펜을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저지대 북부 7개 주. /위키피디아


1578년 지금의 벨기에 지역 남부 10주는 스페인 군대에 굴복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대인과 칼뱅파가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 등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해 항전을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로써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많은 유대인과 프랑스의 위그노(칼뱅주의를 추종하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러던 차에 158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합병하면서 암스테르담 유대 상인의 동방물산 유통 참여를 배제하고 독일 함부르크 유대 상인들에게 이 권리를 넘겼다. 유통 거점이 암스테르담에서 함부르크로 바뀐 것이다. 이때 부상한 가문이 독일의 유대 가문 푸거(Fugger)가였다.

게다가 이듬해인 1581년 7월에는 북부 저지대 7주가 주도하여 더 이상 왕정이 아닌 의회를 통해 각 주가 권한을 행사하는 세계 최초의 연방제 국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탄생시켜 독립을 선언했다. 유대교와 영국에서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칼뱅파 청교도와 프랑스의 칼뱅파 위그노는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과 교리가 일맥상통하여 궁합이 잘 맞았다. 특히 상업과 금융에 대한 시각과 부의 축적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 독립전쟁이 격화되자, 유대인들은 이제 네덜란드마저 스페인에 정복당하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이상 피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가 연방분담금 곧 국방비의 대부분을 부담했다. 홀란트가 65%, 제일란트가 15%로 두 주가 80%를 담당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주 정부가 발행하는 전쟁채권을 열심히 사주었다. 7주 중에서 홀란트가 가장 넓고 조세 부담률도 높아 네덜란드를 아예 ‘홀란트’라고도 불렀다.

암스테르담의 금융혁명은 16세기 중엽 유대 대상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인들은 은행 대부를 받던 방식에서 탈피해 부자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았다. 곧 기존 은행가에 채권을 팔던 것과는 달리, 개인 부호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자금 조달에서 ‘소매금융’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영국보다 100년, 미국의 남북전쟁 시 채권보다 300년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기법이 유대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이후 런던을 거쳐 300년 뒤 미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제임스 쿡은 북부 연합채권을 은행권을 통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팔아 명성을 얻은 바 있다.

1568년 시작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초기에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 공채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용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유대 징수 청부인들이 발행하는 단기채권 ‘오블리가티엔’은 정부의 자금 융통에 도움을 주었다. 징세 청부 제도란 나라에서 세금을 거둘 때, 민간 청부인에게 도급을 주어 그 사람이 먼저 할당된 세금을 납부하고, 그 뒤 청부인이 자기 수익을 보태 세금을 거두던 제도이다. 이렇게 급한 불을 끈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해외 디아스포라 자본을 장기 채권시장에 끌어들여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16세기 들어 저지대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영주에게 속박되어 있는 장원 제도 아래 농노들과 달리 저지대는 간척지 개발로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자영농이 많았다. 이런 사회 시스템 덕분에 농업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은 기후 여건상 밀과 보리 같은 밭작물이 주요 곡물이다. 그간의 삼포제는 경작지의 3분의 1을 휴경지로 정해 생산에서 제외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목축과 퇴비 생산을 위해 목초지가 따로 있어야 했다. 그런데 휴경 대신 땅을 네 부분으로 나눠 계절에 따라 ‘귀리나 보리, 클로버, 밀, 순무’ 순으로 돌려짓기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중세부터 600년간 이어진 삼포제 농법을 극복하고 ‘4포제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토양에 질소를 공급해 지력을 회복시키는 클로버와 파종 후 2~3개월이면 수확이 가능한 순무는 가축 사료로도 이용되었으며, 퇴비를 사용할 때보다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했다. 결과적으로 경작 면적이 3분의 1 이상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게다가 잎이 풍성한 순무를 저장했다가 겨울 동안 가축 사료로 사용하여, 예전처럼 가축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대부분 가축을 도축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년 내내 가축을 사육하여 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가 낙농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당시 이미 시장경제 원리에 정통했다. 수출과 산업에 필요한 고부가 가치 작물을 재배하고 값싼 식량은 대부분 수입했다. 고부가 가치 작물 중 하나가 직물 염색 원료로 쓰는 작물의 재배였다. 유대인들은 아마와 삼 그리고 자주색 염료 식물 ‘꼭두서니’와 남색 염료 식물 ‘판람근’(대청)을 재배했다. 직물 산업과 염색 산업에 꼭 필요한 작물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자주색 염색 기술을 비기에 부쳐 비밀로 간직해왔던 민족이다. 고대의 자색은 가나안 해안가 뿔고둥 내장에서 추출한 체액으로 만들어 무척 귀했다. 이 염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는 로마 은화 5만 데나리온으로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해당했다. 그래서 자주색을 ‘황제의 색상’ 또는 ‘추기경의 색상’이라 하여 중세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는 고급 색깔이었다.

대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청이라는 관목식물 잎을 거두어 퇴비처럼 식히면 노란 즙이 흘러나오는데 공기 중에 놓아두면 진한 쪽빛을 띤다. 쪽빛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인기가 좋았던 대청 염료는 심지어 파란색의 금이라고 해서 ‘블루 골드’로 불릴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영국산 생모직물을 수입해 이를 자주색과 남색으로 염색해 비싼 값에 수출했다.

자주색과 남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염색이 아니었다. 염색할 때 쓰는 매염제의 구성 성분과 정확한 함량은 오랫동안 유대 공동체 안에서만 전수되는 비밀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직물에 아무리 색을 들이려 해도 세탁 과정에서 색이 바랬다. 따라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천연염색 기술로 큰돈을 벌었다.

1540년 최초의 염색 서적이 보세티에 의해 기술되어 이후 다른 나라들은 인도로부터 아열대 작물인 남색 천연염료 인디고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력 면에서 네덜란드를 따라올 수 없었다. 이후 레이던이 유럽 최대의 직물과 염색산업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레이던에서 그들의 경전 탈무드를 인쇄하기 위해 출판업도 발전시켰다. 값비싼 천연염료가 인공 합성염료로 대체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저지대 사람들은 1570년대부터 자연환경에 맞춘 전문 농업을 발전시켰다. 점토 지역에는 곡물을 재배하고,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목축업을 하고, 도시 근교에서는 튤립 같은 원예작물을 재배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고부가 가치 경제작물, 유제품, 과일, 원예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고, 맥주의 향료인 홉은 맥주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572년 8월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칼뱅파인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옮겨온 것은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수천명의 위그노가 살해당한 뒤였다. 이후 5년에 걸쳐 전쟁과 학살이 거듭되면서 위그노들이 저지대로 많이 피란 왔다. 위그노들은 유대인보다 80년 늦게 암스테르담에 발을 들였다.

저지대에 유대인 주도 경제가 뿌리를 내리자 1590년대 러시아와 동구로부터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이 몰려들어 암스테르담 인구는 6만 명에 육박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 무역이 급팽창했다. 이때 네덜란드 선단이 본격적으로 지중해로 진출해 지중해 교역을 늘리게 된다. 이는 유럽 경제사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은 베네치아 공국을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였다.

그런데 네덜란드 선단이 발트해 무역을 주도하고 폴란드 곡물과 스칸디나비아 목재 등 원자재, 북유럽의 공산품을 이탈리아까지 직접 가서 공급하게 되자, 네덜란드가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게 된다. 유럽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와 마침내 대서양 시대가 열리게 된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단절했다. 다시 한번 해상교역에 종사하는 네덜란드 유대인들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항상 그렇듯 유대인들은 이러한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살려낸다. 1580년 스페인의 포르투갈 병합 이후 후추 유통 경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유대 상인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에 네덜란드는 아시아로 직접 가서 후추를 구해오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몰랐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 무렵 동양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린쇼텐’이라는 사람이 1592년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와 <인도항로 항해지남서>라는 책을 출판했다. 책은 1596년에 출판됐지만 이미 그 이전에 그의 조언으로 네덜란드 상인들도 인도 항로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의 한 귀족이 포르투갈의 국가기밀인 25개의 포르투갈 항해도를 반출해, 네덜란드 출판업자에게 큰돈을 받고 넘겨줬다. 그는 입수한 지도를 자비를 들여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펴냈다.

이즈음 몇몇 네덜란드 상인들과 해도 제작자가 항해 경험이 많은 코르넬리스 하우트만이라는 사람을 2년간 리스본으로 파견해 인도 항로 기밀에 대해 자세히 정탐해 오도록 했다. 1594년 그가 돌아오자 9명의 상인과 한 명의 해도(海圖) 제작자는 29만 길더를 출자해 ‘원국회사’(遠國會社)를 설립했다. 네덜란드어 회사명은 ‘먼 곳의 나라에 대한 회사’라는 뜻의 ‘콤파녜 판 페레’이다.

원국회사는 향신료를 현지에서 직접 사들이기 위해 1595년 8월 배 4척에 선원 249명으로 구성된 하우트만이 지휘하는 첫 번째 상선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무역풍을 이용해 마다가스카르 동해안을 거쳐 몰디브 군도를 지나 수마트라 순다 해협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다시 메단으로 이동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을 피하고자 먼 길을 돌아 항해했던 것이다. 중간에 괴혈병으로 많은 선원을 잃었다. 인도네시아 자바 해안을 돌다 발리의 왕을 만나 후추 몇 단지를 사들여 2년 남짓 만에 배 3척에 선원 87명과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후추만으로도 모든 손해를 보전하고도 남으면서 아시아로의 항해 열기를 촉발했다.

하우트만이 아시아 항로를 발견한 이후, 네덜란드는 아시아 열기에 휩싸였다. 1598년 3월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상인들이 힘을 합쳐 출자금을 모아 선단을 조직했다. 선단은 인도에 진출해 향료의 주산지인 몰루카 제도까지 교역을 확장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온 후추 교역선을 몰루카 섬 주민들이 환영했다. 그간 기독교 선교에 열을 올렸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주민들이 반감을 지닌 덕분이었다. 이듬해 7월 선박 4척이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대박이었다. 단 한 번의 항해로 선박 건조 비용을 모두 뽑고도 수익이 남았다.

그렇게 시작된 후추 교역은 이윤이 엄청나다 보니 1599년 한 해에만 배 22척을 보내 14척이 후추를 싣고 돌아왔다. 귀향하기만 하면 400% 이상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 뒤 비슷한 회사가 6개나 생겼다. 1595년부터 1601년 사이에 네덜란드 탐험대는 희망봉 또는 마젤란 해협을 우회하여 인도 또는 말레이제도와 교역을 했다. 이 시기에 20% 이상의 배가 돌아오지 못했음에도 네덜란드는 5년 동안 15개 선단 65척의 상선을 보낼 정도였다.

(출처 : 조선일보,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2022.11.20~2023.2.19.)


Note:

기원전 3천 년 어느 따스한 오후, 황제(黃帝)의 부인, 누조(嫘祖)가 정원에서 차를 즐기려던 참이었다. 뽕나무 그늘 아래에서 차를 마시려는 순간 조그마한 물체가 바로 코 앞에서 잔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황비는 깜짝 놀라 잔을 들여다 봤다. 딱딱하고 기다란 하얀 나방 고치가 흔들리는 뽕나무 가지에서 떨어졌다. 침착하게 이 작은 고치를 잔에서 꺼내 던지려던 순간 고치가 이상하리만큼 부드럽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치가 딱딱한 껍질이 아닌 아주 부드러운 섬유질로 둘러 쌓였는데 잠깐 뜨거운 찻물에 담가졌던 사이 더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느슨한 가닥을 하나 잡아 풀었더니 600m나 되는 정원 길이 만큼 펼쳐졌다. 호기심에 뽕나무에서 고치를 모아서 풀어보고 그 실들로 천을 지어봤다. 완성된 천은 아주 부드럽고 은은한 빛을 냈고 촉감은 시원했다.

새로운 발견에 신이 난 누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치를 만들어내는 누에를 연구했는데 뽕나무 잎만 먹는다는 점을 알아냈다. 누조는 황제를 설득해 뽕나무 과수원을 만들어 누에를 칠 수 있도록 했다. 또 고치의 섬유질을 실로 감아내는 얼레와 고치실을 천으로 짜는 베틀을 발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아낸 것을 시녀들에게 전해 양잠을 탄생시켰다.

누에고치가 찻잔에 떨어진 일 이후, 누조가 발명한 것은 중국 5천 년 역사와 긴밀히 연결된다. 이때부터 누조는 비단의 신, 즉 잠신(蠶神)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후베이성 위안안현에 있는 누조양잠공원.


비단은 곧 히트를 쳤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가벼우면서도 품위 있는 비단은 그 용도가 다양하고 여러 장점이 있어 아주 귀하게 여겨졌다.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땀을 배출하는 기능도 있었다. 염색한 비단천은 수백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았다.

처음 비단이 발견되고 수천 년 간 비단은 오직 황제와 황족, 그리고 고관에게 주는 선물로만 제작되었다. 비단 생산량이 증가하자 사회 다른 계층에도 비단 소유가 허락됐다. 하지만 각 사회 계층과 지위에 따라 특정한 색깔이나 장식, 도안만 허용됐다. 예를 들면 황색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색깔이 다른 머리 장식을 착용해서 계급을 구분하기도 했다.

비단은 천과 장식 외에도 악기, 활시위, 낚싯줄, 세계 최초의 (고급) 종이에도 쓰였다. 사실 수많은 고대 지식이 비단 두루마리에 보존되어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기원전 206~220) 때는 비단이 화폐로 쓰이기도 했다.

비단 생산 지역인 중국 곳곳에서 수백 년에 걸쳐 어머니와 딸, 손녀들이 반년간 누에를 치고, 그 다음 반년을 수확하고, 풀고, 감고, 짜고, 물들이고, 수를 놓았다.

천을 짜기 위해 비단실을 준비하는 여성들.

 

누에는 중국에만 서식하는 애벌레이고 외부에는 비밀로 하고 있어 외국인들은 비단 제작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단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섬유가 되었고 많은 나라들이 교역품으로 비단을 원했다. 이 급상승하는 인기는 실크로드의 흥성을 가져왔다. 비단 제품은 중국 국경을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양잠 비법만은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누에나방이나 애벌레 알을 몰래 갖고 나가다 잡히는 이들은 처형됐다.

2천 년 간 국경 보안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후 양잠 지식은 이민자들을 따라 한국과 인도에 조금씩 전해지기 시작했다. 서기 440년 양잠은 중국 서부 국경 너머로도 전해졌다. 중국 공주가 외교적 이유로 한 부족의 왕자와 정략 결혼을 하기 위해 서부로 가야 했는데. 이때 올림머리 속에 누에나방의 알을 넣고 간 것이다. 하지만 비단을 사랑하는 유럽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부족도 양잠을 비밀에 부쳤다. 때문에 서구 세계는 더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서기 550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모시던 두 수도사가 지팡이에 몰래 누에 알을 숨겨오는데 성공했고, 그토록 찾던 양잠 지식이 마침내 비잔틴 제국으로 흘러 들게 된다. 이전에 로마인들은“물로 나뭇잎에 있는 솜털을 제거해”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중에서) 비단을 만드는 것으로 믿었다. 양잠 지식은 이로부터 서서히 유럽 전체로 퍼져갔다.

고고학자들이 기원전 2600년 전의 고치를 발견했는데, 고치실이 반정도 풀리다 만 상태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중국을 뜻하는 세레스(Seres)는 ‘비단의 땅’을 의미한다.

비단 무역은 실크로드가 형성되기 전부터 있었다. 가장 이른 증거로는 실크로 싸여있던 기원전 1070년의 이집트 미이라가 있다.

(출처 : ko.shenyunperformingparts.org, 비단이야기)



영국에서 유대인은 노르망디공 윌리엄 1세가 1066년 영국을 정복할 때 유대인 상인과 의사를 데리고 간 것을 시발점으로 한다. 이후 1290년 에드워드 1세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유대 상인들이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한 법령을 어겼다는 게 이유였다. 이때 영국에서 쫓겨난 유대인이 4,000~1만6,000명으로 추산된다. 이후 유대인들은 간헐적으로 영국에 입국했다. 그들은 유대인 신분을 감추거나 기독교로 개종한 마라노(marrano)였다. 마라노들은 브리스톨에 거주지를 형성하고 대륙의 유대인들과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영국에서 유대인의 재입국이 허용된 것은 청교도혁명 시기인 1656년에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서였다.

크롬웰은 항해조례를 반포해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했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 이외의 피난처를 찾아 나섰다. 그 대상지가 스웨덴과 영국이었다.

이듬해 크롬웰은 내각과 상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인 재입국을 허용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추방된지 360여년만에 영국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된다.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집단으로 도버해협을 건넜다.

미나세가 주도하는 유대 금융인들은 크롬웰에게 전쟁 비용을 제공하며 적극 도왔다. 크롬웰은 상인들에게 중상주의 정책으로 보답하고, 런던 도심에 2.6㎢ 넓이의 땅에 특별금융구역으로 지정했다. 그곳이 오늘날 런던금융가 더시티(The City)다. 더시티는 유대 금융인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1688년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윌리엄 3세와 메리의 부부가 군대를 이끌고 명예혁명을 일으키고 왕권을 장악했을 때 네덜란드의 금융인들이 따라갔고, 유대인들도 합류했다. 이때 윌리엄 왕을 따라 영국에 들어간 유대인은 세파르디(Sephardi) 유대인 3,000명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 5,000명 등 도합 8,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윌리엄 3세를 따라온 유대 금융인들은 네덜란드의 자본주의 사업방식을 그대로 영국에 이식시켰다. 윌리엄과 메리 부부 왕은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받아들여 비국교도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자유롭게 영국 주류사회에 진입할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의 금융산업 발전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대인들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 설립에도 참여했다. 때는 윌리엄 3세 때였다. 윌리엄은 해군 전력 강화에 120만 파운드가 필요했다. 의회의 승인을 얻지 않고 대규모 자금의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영란은행의 설립이었다.

유대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은 자본을 투자해 영란은행을 설립하고, 그 돈을 정부에 대부하기로 했다. 대신에 영란은행은 출자액 만큼의 발권력을 부여받았다. 영란은행은 12일만에 120만 파운드를 조달했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 2020.8.30.)


                    

매거진의 이전글 인도양 향료길 자료 모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