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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May 09. 2023

동아시아에는 왜 과학이 없었는가?

조영필

근대과학을 성립시키는 데 기여한 요소는 1) 그리스의 자연철학(시민계급 대상으로 경쟁, 논리의 극한 추구, 그러나 관찰에만 의존하였고, 실용화에 무관심하였으며, 기술은 하층계급의 일로 생각함), 2) 피타고라스학파의 추상화(수를 자연의 근본원리로 인식, 그러나 무리수 불인정 및 제논의 도전), 3) 유클리드 원론에서의 연역적 증명 추론, 4) 연금술의 실험방법, 5) 베이컨의 귀납적 추론, 6) 기독교의 영향(신의 섭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과학적 태도,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봄, 플라톤의 이데아론 보전, 수도원과 대학제도), 7) 상업의 발달(회계를 위한 수학의 발전, 도시와 부르주아 계급의 성립, 기술을 활용하는 산업(부르주아에게 기술은 이윤의 원천), 기술을 활용한 기계(시계, 풍차, 나침반, 선박 등) 개발), 8) 중세 말의 대형 프로젝트(르네상스 건물, 성벽, 성당 건축, 조각 등)으로 기술적 도전 과제 제공 및 과학 기술 건축전문가에 대한 사회적 지위 상승, 9) 지역분권적인 정치체제간의 군사적 경쟁(총포, 화약, 군함), 10) 법치(와 재산권) 및 특허 제도의 확립(과학은 사상의 자유와 발견/발명의 명예를 통해 그리고 기술은 재산권 제도를 통해 성장 가능), 11.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신지식의 급속 확산 및 과거지식의 재발견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 12. 대항해시대의 지리상의 발견(지도 제작을 통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지혁명 및 신대륙의 금은 유입과 연결된 인플레이션과 금융혁명)등을 들 수가 있다. (이러한 진술은 동아시아에는 왜 과학이 없었는가? 라는 질문과 같은 보편성의 특수성에 대한 대답이라기 보다는 서구에서는 왜 과학이 있었는가? 나아가 그들은 어떻게 근대로 나아갔는가?와 같은 특수성의 보편성을 탐구하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적 사유를 처음 한 곳은 그리스이다. 그리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나, 질적으로 다른 설명을 해내기 시작한 첫 문명이다. 왜? 이들이 첫 주인공인가? 하는 질문에는 이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공중(公衆)에게’ 자신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즉 이미 이때 상업적 ‘시민계급’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타 문명권에서는 왕권에 봉사하는 구조였으며, 중국의 제자백가라 하더라도 군왕들을 설득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논리 개발에 군왕의 이해 및 상식의 추구라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그리스는 이때 이미 상업적 경제의 발달로 이들 자연철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경제력이 충분하여, 종교나 신화에 구속되지 않고 그야말로 지식(진리)의 발견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사회정의나 개혁 같은 사회정책에 관여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한 자유로운 풍토 속에서 논리의 극한까지 추구하는 자연철학을 수립하였다 (이들 자연철학자들의 계보를 따라가 보면, 대부분 자신의 관점에서 스승의 이론의 문제점을 자유롭게 비판하고 그 위에서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판적 주체성이다.)

 

수학은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 후 토지 측량으로 많이 발전했고 메소포타미아도 이와 비슷하지만, 이집트가 농지 측량으로 수학을 발전시킨 반면 메소포타미아는 자원이 많이 부족하여 소아시아 반도 쪽의 상류지역과 물자의 교역을 많이 하여야 했으므로 상업적으로도 수학을 많이 다루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점토판도 초기의 것은 채권 채무관계를 표현한 것이 많다. 이러한 계산기술이 오늘날 터키 서부해안(사모스섬) 출신의 피타고라스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추상적인 ‘수’로써 세상을 설명하는 수학으로 환골탈태하였다. 이때 ‘추상화’의 방법이 적용되었으며, 일반화된 증명의 수학이 발전하였다. 발견의 수준과 증명의 수준은 다른 것이다. 중국 문명에서는 계산은 존재했으나 일반원리로서의 증명이 부재하였다는 것은 추상보다는 실용적인 것에 의미를 두는 중국문화를 반영한다. 그리스 수학의 완성자인 헬레니즘 시기 유클리드의 원론은 수학방법의 기초를 놓았는데 그것은 공리에서 증명해 가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 방법이 수사학에도 적용되어 이후 서구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로서 터키 서부해안(이오니아,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의 ‘논리’에 한층 ‘추상화‘가 더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의 과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자연철학자들은 관찰에만 의존했지, 실험을 하지 않았으며, 기술을 중시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과학의 실용화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술은 여전히 하층계급의 일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에서 그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지상의 물체의 움직임의 원리와 동일하게 이해하려는 가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의 크기, 지구의 크기 등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동설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 집대성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었다. 그리스의 천문학과 중국의 점성술은 사고방법부터가 달랐던 것이다.(2024.5.28.)//

 

그러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기술들이 교역과 전쟁을 통해 상호 교류되며 발전을 한다. 그러다가 이슬람에서 발화한 연금술 및 여러 문명의 기술 공학의 전통이 고대 그리스의 과학철학과 만나 비로소 근대 실험과학으로 탄생되었다. 이러한 과정에는 중국, 인도, 이슬람 등의 기여도도 매우 컸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어느 문명에서든 기술자들의 계급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자연과학이 근대 실험과학으로 탄생한 배경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과학에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는 신의 섭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극한까지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라고 하였으므로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의 철학(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을 자신들의 신학에 반영하여 잘 보존해두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지식의 보존에는 지역적 정치체제에 독립적인 수도원의 연구하는 수도사, 필경사 등의 집단이 있었다. 또 종교개혁이 있다.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이 추구한 보편성의 이론이 로마가톨릭의 비보편적 행태를 질타한 것으로 논리가 권위에 도전한 것이므로 지성의 위대한 힘의 역사적 실현에 해당한다. 이밖에도 서구에서 기독교의 여러 제도는 군사적 권위 옆에 별도의 권위로서 항상 견제의 긍정적 기능으로 작용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설파한 가족주의의 탈피이다.


또 생각해볼 점은 서구에서의 상인(부르조아)계급의 성장이다. 이들에게 기술은 곧 이윤의 원천이었다. 이들이 기술을 적극 지원하고 활용하였다. 또한 서구사회는 군사영주적 봉건제 사회였다. 따라서 군사경쟁을 하면서도 기술은 발전하였다.

 

이렇게 기술과 과학이 각기 발전하고 점차 결합되어 갔지만, 1차 산업혁명까지는 아니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의 개발은 과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기술자들과 상인기업가들의 연합에 의한 기술혁명이었다. (물론 와트가 글래스고우대학의 실험도구 제작장인으로 있으면서, 과학자들의 이론에 노출되어 기술개발에 일부 영향을 받은 사실에서 보듯 전혀 상호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과 미국이 주도한 1900년대의 2차 산업혁명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과학이 기술과 결합하여 과학에 의한 기술 개발과 과학과 기술의 상업화가 이루어진다. 이때의 중심 기술은 주로 화학과 전기였는데, 과학이론을 기술로 발전시킨 것이다.

 

중국 주자학의 '이(理)'와 '기(氣)'의 사유는 추상인가? 아닌가? 그 사유는 왜 과학적 사유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일부 논자들은 그러한 성리학의 사유는 자연 자체를 대상화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인간사회의 도덕률을 유도하기 위한 사유라는 주장이다. 즉 이와 기의 진위를 사물의 현상에서 검증할 만한 방법론이 없었다. 그러나 이(理)와 기(氣)의 사유도 자연철학이며, 신화적 덮개를 벗겨낸 사유이며, 충분히 추상화한 사유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추상화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일(全一)적으로 이루어져서 오류 검증을 통한 발전이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이것이 다른 기술장인들과의 실험적 방법과의 교류와 결합을 막은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신유학의 11-12세기 사유는 중국에 인도 불교가 들어온지 1000년이 되어야 발생한 사고체계로서 그래봐야 그리스와 비교하면 1500년이 늦는 것이다. 즉 신유학의 발생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질문(충격)에 대한 중국인들의 대답이다. 그런데 이렇다 보니, 그 낱낱의 격물을 통한 추상화는 이미 인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중국인들은 기초적 측면의 격물은 스스로 하지 않은 채, 높은 수준의 추상화된 논의만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추상적 개념에 자신들의 전통인 도학의 태극도설이나, 음양오행을 결합시켰기 때문에 성리학의 개념은 비록 추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증가능성 또는 수정 등이 어려운 교조적인 성격을 띠게 된 점이다.


태극과 음양오행이라는 우주의 생성원리에 대한 가설이 어떠한 경험적 증거를 통해서도 도전받지 않았다. 이 경우 한의학은 기존의 원리에만 기반하여, 새로운 정황들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즉 서양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고수하기 위해 행성 궤도의 설명에서 많은 추가 가설을 수반하여 복잡해진 것과 같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과도 같이 동양의 기본원리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종래 한의학의 음양오행을 따르지 않는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생각해볼 때, 동아시아에서도 인쇄혁명이 도래하고, 한의학뿐만 아니라 도전적인 다른 많은 경험학문의 전통과 전문가집단 그리고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면, 과학의 탄생이 언젠가 가능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받아들이면 끝까지 씹어삼키는 조선에서 당대의 중요 유학의 논쟁들을 보더라도, 실제로 그 논쟁들은 절대로 자유롭지 않다.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는다. 즉 한 발 길을 잘못 들여놓으면, 그것은 능지처참을 당하는 허균이 되고, 또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정여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치열한 논리적 원칙주의자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계속 나왔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보편성의 탐구열이 한편으로는 조광조의 왕도정치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학파 유학자들의 천주학의 독자적인 탐구로 이어진 점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귀중한 유산임을 새삼 깨닫는다. 즉 사림에 대한 4대 사화와 천주학에 대한 4대 박해는 세종의 한글 창제와 맞먹는 우리 잠재적 근대성의 증표인 것이다.


근대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결국 일종의 사상의 자유와 관련되는데 그것은 동양은 분권화된 군사봉건제가 아닌 중앙집권적 관료제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법치주의와 공진화하는 상업의 발흥을 억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점은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으로 인해 서구에서 지식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때,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는 5~10만자의 표의문자에 갇혀 지식의 대중화를 이루지 못한 점이다. 이점에 있어 16-17세기에 이미 일본은 비록 목판본이지만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빠른 출판문화를 이룩하였던 것이 그들의 문예발흥에 크게 기여하였고 또한 훗날 근대화에 성공한 대중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인도유럽어의 언어와 동아시아 언어의 차이(중국어는 표의문자의 벽이 있을 수 있고, 한국과 일본어는 술어중심 언어로 주객 비분리의 벽이 있을 수 있음)에 의한 과학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일부 주장이 있기는 하나 우생학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 세력은 미약한 편이다. 사실 여러가지 역사적 반증이 있고, 근세에 들어 일본의 약진 그리고 최근의 중국의 약진 등을 생각해볼 때, 언어가 이해를 궁극적으로 가로막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게르만어의 명사적 어법과 주객 구분과 연결되는 철학적 전통을 생각해볼 때 생각의 발단이나 전개 측면에서 교착어(알타이어)나 포합어(중국어)의 언어적 약점은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

 

이밖에 대항해시대의 도전을 통한 항해술의 개발과 견문의 확대 그리고 상업의 발전에서는 금융의 발전과 함께 기독교의 이자대부 금기가 한편으로는 자본의 축적과 대부를 막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리(低利)의 건전한 자본 형성에 기여했고, 또 프로테스탄티즘은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끝없는 자본 형성에 기여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왕과 귀족간의 권력 쟁투에서 신탁개념이 나오고 이와 관련 근대 은행업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업과 금융의 발전이 기술 및 과학의 발전을 여러모로 활용하고 지원하였음은 중세말, 근세초의 여러 수학자 과학자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의 과거 과학기술의 수준에 대해서는 조셉 니덤의 연구가 방대하지만, 아무리 중국이 대단한 것으로 기술해본들, 거기에는 기술/발견 만이 있었을 뿐 이의 추상화, 논리화, 필연성 등은 부재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대그리스의 과학적 사유는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인류문명사에서의 특이한 케이스이다. 알파벳 문자도 그리스에서 B.C. 10~5세기 경 여러 가지 우연의 산물로 만들어지지만, 이러한 알파벳의 개발과 자연철학의 발견도 어느 정도의 관련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중국문명의 안타까운 점은 유라시아 대륙의 문명으로서, 인도와의 교류, 이슬람과의 교류,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마테오리치 등으로 대표되는 서양선교사와의 교류 등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하는 전통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중국인의 머리 속에 무언가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져 있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가 없이 세상의 이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신념에 '중화'라는 우상이 더해진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까지 그렇게 기술자들을 중인계급으로 무시해오면서도 문명을 유지해온 것이 오히려 대단하게 느껴진다.


홍성욱 교수는 카오스 '기원' 대담에서 과학자와 기술자 간의 연결 또는 매개자로서 그 첫번째가 ‘과학기구’(저울, 망원경, 측정기구, 실험기구 등)를 통한 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잘 이루어지려면, 기술자 계층의 보존과 함께 과학자 계층의 보존이 있어야 한다. 기술자는 어떤 사회에서나 필요했다. 그러나 과학자 계층은 어떤 제국이나 문명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왕조의 흥망과 함께 부침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볼 때, 로마가톨릭의 수도원 같은 곳에서 왕조의 흥망과 상관없이 지식의 전승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 또한 서유럽의 지식 승리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지동설의 주창자인 코페르니쿠스가 로마가톨릭의 사제이었다는 것이 그 한 예증이라 할 것이다.


주기율표의 발견이 과학에 상당한 이정표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전에 라브와지에가 1789년에 벌써 원소들을 네 가지 계열로 분류해 놓은 게 있다. 이는 거슬러올라가면 그리스자연철학에 연결되며 오늘날의 원소 분류와도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19세기에 현대과학이 정립되었다고 하지만, 고대과학, 근대과학에서부터 서양과 동양은 입론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인식론의 유무이며, 인식론, 존재론, 가치론의 철학적 구분이 과학적 사고에 적용되어졌는지 여부이다.) 그리고 그것이 몽골 원나라때의 세계적 기술교류에 있어서도 인식론적인 한계를 가진 동아시아 특히 중국은 서양과 같은 과학방법론을 수용할 수도 개발할 수도 없었다. 서로 기술적 교류가 있었음에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인식적 한계를 동아시아의 중국문명은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참고자료:

이문규 (2017), 동아시아 전통과학의 발견과 그 영향: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중국에는 왜 과학이 없었던가? 라는 질문은 중국 철학자 횡여우란(馮友蘭, 1894-1990) 교수가 젊은 시절 1920년대 품었던 주제이었다.*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진행되었던 이른바 '과학과 인생관' 논쟁에 참여했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장쥔마이(張君勱, 1887-1968), 딩원장(丁文江, 1887-1936), 후스(胡適, 1891-1962) 등 많은 지식인들 역시 중국에는 과학이 없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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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g(1922), 237-238.

**안대옥(2012), 193-196; 허남진·박성규(2002), 177-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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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과학에 대한 이런 생각은 서양의 학자들에게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한 편지에서, 서양 과학의 발전의 기초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형식논리학 체계를 발명한 것과 르네상스 시대에 체계적인 실험에 의해 인과관계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을 꼽으면서 중국에서 과학이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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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4.23. 아인슈타인이 슈비쩌(J.S. Switzer)에게 보낸 편지, 조셉 니담(1963), 김영식편(1986), 60-61.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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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덤은 예컨대 송원(宋元) 시대의 수학 수준이 방정식 풀이에서 세계 제일이었으며... 중국에서 먼저 발명되어 서양으로 전해진 기술이 250여 가지도 넘는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우리는 과학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수준으로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원시과학(proto-science)'이라 부를 수 있다. 다음은 중세 과학으로 약 1700년 이전의 중국이나 대략 1500년 이전의 유럽에서 나타난다. 셋째는 근대 과학 혹은 세계 과학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과학의 탁월한 성과를 찾아냈지만 그것을 중세 과학의 수준으로 평가한 니덤의 견해는...

"... 나는 근대 과학을 실제로, 세계의 모든 문명으로부터 나온 강들이 자신들의 물을 마구 흘려보내는 대양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 바 있다."


... 니덤 역시 르네상스 이후 과학혁명을 통해 근대과학이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

"... 내 생각에 근대과학은 다음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으로 자연에 대한 가설들을 수학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이고 엄격한 실험을 하는 것이다."

... 결국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통해서 니덤이 찾은 것은 근대과학이라는 큰 바다에 중국이 아주 많은 강물을 흘려보냈다는 사실인 셈이라 하겠다.


니덤은 "중국 과학은 왜 중세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중국에서는 과학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왜 중국 과학은 근대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는가, 어떤 요인이 중국 과학이 근대 과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을까, 만약 그런 요인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국과학은 15세기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어떤 것이 근대 과학이 시작된 유럽만의 고유한 요인이었을까... '니덤의 질문', '니덤의 문제' 또는 'Why not 질문'


중국 전통 과학에서는 기하학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 중국의 순환적인 시간개념... 중국 지식인들이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 등용되기를 희망했다는 점... 유가사상과 과학의 관계... 도가나 묵가... 음양과 오행, 이(理)와 기(氣), 주역, 상수(象數) 등 중국 사상의 주요한 개념...


... 니덤이 가장 중시하고 결정적인 답이라고 제시한 것은... 유럽에서 중세 봉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성립하는 것과 함께 근대과학이 출현했는데, 그러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중국은 군사적이고 귀족적인 유럽의 봉건제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관료적 봉건제 사회였다... 중국의 관료적 봉건제는 부와 권력이 세습되지 않고 매 세대마다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체제로서 오랜 기간 동안 중국 과학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상업주의 정신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자본가 계급이 성장할 수 없었다... 학자들에 의한 수준 높은 수학과 장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실험적 전통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과 장인들이 결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과 실험이 결합하여 전혀 새로운 모습의 과학이 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 과학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기술과 서로 다른 종류의 활동... 과학이 지식을 추구하는 데 비해 기술은 인간의 물질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한 활동...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다루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기술적 성과에 대한 것...



김영식, 중국과학에서의 Why not 질문: 과학혁명과 중국전통과학,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읽기, 서울대출판부, 2007.


몇몇 학자들은 중국의 과학활동이 단절되고 널리 확산되지도 못한 이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물음을 던졌다. 철학자인 로버트 코헨(Robert S. Cohen 1973)의 경우가 한 예인데, 그는 “중국은 지극히 세련되고도 자랑스러운 과학전통을 발달시켜 근대적인 과학, 기술의 문턱에까지 도달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왜 못했을까?”라고 물었다. 철학자 아놀드 코슬로(Arnold Koslow 1975)가 제시한 물음은 “고대 및 중세의 중국에서 상당 수준에 도달했던 광학(optics), 음향학(acoustics), 수학(mathematics)과 같은 분야의 전통들은 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었는가?”였다. 과학혁명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플로리스 코헨(H. Floris Cohen 1994)은 “갈릴레오와 같은 사람이 중국에 출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그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라고 물었다. 때때로 이 질문에 잠정적인 대답이 why not 질문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했다. 즉 “왜 과학활동은 유럽에서만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제도화되었으며, 중국이나 여타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못했을까?”(Restivo 1979) 아마도 가장 중립적이지만 별로 흥미롭지는 않은 형태는 내가 제기한 질문인 “왜 중국인들은 자연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을 그들이 한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유럽인들이 근대과학을 발전시킨 형태로는 발전시키지 않았던 것일까?”(Kim 1982)일 것이다.


이슬람의 과학에 대해 고찰한 후 플로리스 코헨은 과학의 발달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4가지 요인을 제시하였다. 그중 셋은 과학혁명이 일어나는데 대한 필요조건으로서 ① 과학은 적어도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체계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끼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② 과학에 종사하는 것이 매우 존엄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신념을 굳게 유지해 나가는 최소한 전문가집단에 준하는 과학자 사회가 존재해야 하고, ③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사회가 파괴되지 않도록 평화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사회가 초기 근대과학(early modern science)의 기반을 마련함에 있어 결정적인 이점을 줄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것이다. H. F. Cohen (1994), p. 417을 보라.


시빈은 이러한 관점을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나타나지 못하게 한 방해요인으로 흔히 제시되는 문인관료계급(scholar-bureaucrat class)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유럽에서 과학혁명이 발생하던 때를 돌아보면, 책속에 파묻혀서 과거에 눈을 돌리고 있으면서 자연을 지향하기 보다는 인간세계의 제도들에 관심을 갖는 스콜라철학자나 대학교수들이 학문세계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전 유럽을 휩쓴 거대한 변화를 막지 않았다. 상상력이 풍부한 역사학자라면 스콜라철학이 없었을 경우 그러한 변화가 더 일찍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Sivin 1982, p. 57.)


최근에 로이드(G. E. R. Lloyd)는 중국과 서양 두 문화권이 지적인 논의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권위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서양의 경우에는 논쟁적인 토론을 선호한다. Lloyd (1996)을 볼 것.


살 레스티보(Sal P. Restivo)는 니담의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한군데에서만 “중국과 서구에서 근대과학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한” 29개의 방해요인과 “근대과학이 출현하도록 이끌어주는” 33개의 요인을 찾아내었다. Restivo (1979), pp. 44-47(Appendixes B와 C)를 보라.


Nelson (1974), pp. 460-463. 넬슨은 근대유럽사회의 온상으로 일컬어지는 12, 13세기의 도시, 대학, 전문직업, 신분 등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시기에 양심, 자아, 개인, 사회, 우주, 행위, 정의, 통치형태, 법제도 그리고 학습에 대한 새로운 이상과 지평이 이후 서구세계 특유의 독특하면서도 주요한 새로운 특징을 갖도록 하는 하나의 전반적 틀이 마련되었다.” (p. 164)



정동욱, 동양에도 과학이 있었는가, 2013.11.7.


과학(科學)은 19세기말 science에 대한 일본에서의 번역어


이광수: "유교 vs 과학"

유교가 이렇게 과학을 천히 여기므로 다만 과학이 발생, 발달치 못하였을 뿐더러 인민의 생활 방식이 전혀 비과학적이 되고, 인민의 사상이 전혀 비과학적이 되어, 그 사회에는 과학적 조직이 없고, 그 생활과 사업에는 과학적 근거와 경륜이 없이 오직 황당한 미신과, 무계한 상상과, 일시적 생념에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오인(吾人)의 가난함, 천함, 근심은 이 비과학적인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광수, 신생활론, 매일신보, 1918.)



이문규, [동아시아의 전통과학] 근대과학 잉태못한 전통과학의 한계, 포항공대신문, 2000.6.14.


원주율 π

 “…3.1415926과 3.1415927 사이에 있다. 정밀한 값(密率)은 366/113이고, 간단한 값(約率)은 22/7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조충지(祖沖之, 429∼500)가 원주율에 대해 말한 값이다... 서양에서 원주율을 이 정도로 정확하게 계산하게 된 것이 천 년이 더 흐른 뒤의 일...


고대 중국인들 역시 초기에는... 먼저 유흠(劉歆, ?∼23)은 곡식을 재는 원형의 청동용기(斛)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원주율이 약 3.15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장형(張衡, 78∼139)은 구의 부피를 계산하면서 √10(≒3.1622)을, 해와 달의 운행을 설명하면서 92/29(≒3.1724)를 원주율의 값으로 제시하였다. 왕번(王蕃, 219∼257) 또한 혼의(渾儀)라는 천문기구를 설명하면서 원주율의 값을 142/45(≒3.1556)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한 원주율의 구체적인 계산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구장산술>(九章算術, 1세기 경)에 자세한 해설을 덧붙인 유휘(劉徽, 3세기 활동)는 ‘할원술’(割圓術)이라는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원주율을 계산했다. 그는 원에 내접하는 정 6각형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변의 수를 늘리면 마침내 정다각형의 면적과 원의 면적이 근사하게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유휘는 정 96각형과 정 192각형을 통해 원주율의 범위를 314*64/125<100π<314*169/625와 같이 얻었다. 나아가 정3072각형을 이용하여 원주율이 3927/1250(≒3.1416)이라고 계산하기도 하였다.


조충지가 원주율을 계산한 방법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도 유휘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렇다면 원에 내접하는 정다각형의 변의 수가12288과 24576이었을 것이다. 아직 주산이나 필산(筆算)이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에서 실제 계산은 대나무나 동물의 뼈로 만든 산가지를 사용했을 것이니, 그 과정의 복잡함과 정교함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고차방정식과 천원술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의 수학은 대수학이 매우 발달되었다고 한다. 사실 <구장산술>에서부터 이미 1차, 2차 방정식은 물론이고 초보적인 3차 방정식도 다뤄지고 있다. 이후 진구소(秦九韶, 1202∼1261)는 <수서구장>(數書九章, 1247)에서 본격적으로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탐구하여 10차 방정식을 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숫자방정식에 국한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고차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그의 방법 ‘정부개방술’(正負開方術)은 19세기 영국의 수학자 호너(W.G. Horner, 1736∼1837)에 의해서 얻어진 ‘호너법’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대수학의 특징이 부호를 사용하여 미지수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때, 그 역시 13세기 중국의 천원술(天元術)에서 시작되었다. 천원술이란 명칭은 미지수를 ‘元’이라는 부호로 표시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체적으로 일차항의 위치에 ‘元’이라고 표시하거나 상수항의 위치에 ‘太’라고 표시하여 주어진 방정식의 해를 구하였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대수학의 시대가 열리게 된 셈이다.


천원술과 관련하여 아래에서 소개할 두 명의 수학자는 기억할 만하다. 첫 번째는 천원술의 체계를 처음 세운 이야(李冶, 1192∼1279)이다. 그는 실용적인 색채가 강한 중국의 수학전통에서 ‘수학을 위한 수학책’ <측원해경>(測圓海鏡, 1248)을 통하여 대수학의 기초를 쌓았다. 뿐만 아니라 천원술의 내용을 종합 정리하고 실제 계산과정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익고연단>(益古演段, 1259)도 저술하였다.


두 번째는 <산학계몽>(算學啓蒙, 1299)과 <사원옥감>(四元玉鑒, 1303)을 지은 주세걸(朱世杰, 13∼14세기)이다. <사원옥감>은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1원의 천원술에서 시작하여 미지수가 4개(각각을 天, 地, 人, 物로 표시했다)인 고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등차급수의 합을 구하는 문제도 여럿 들어 있고, 소위 ‘파스칼의 삼각형’으로 알려진 이항계수를 보여주는 그림도 들어 있다.


수학과 근대과학

아인슈타인(Einstein, 1879∼1955)은 1953년 한 편지에서 서양과학의 발달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형식논리 체계의 발명과 (르네상스 시기의) 체계적 실험에 의해 인과관계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의 발견에 기초하였다고 하면서, 중국에는 그런 요소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의 전통수학은 원주율이나 고차방정식 이외에도 여러 중요한 분야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하학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과연 전통과학이 근대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근대과학은 기하학의 토대 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일까?


16, 17세기 유럽에서 근대과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중요한 요소로 기하학적 사고방식을 꼽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유럽의 근대과학은 기하학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가 기하학적 사고의 부재때문은 아니다. 과학의 역사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매클렐란 3세 & 도른 (1999),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전대호역(2006), 모티브.


209-216/ 중국 과학은 세 차례에 걸쳐 외래 영향의 물결과 맞닥뜨렸다. 첫번째 물결은 당 시대인 600~750년에 불교를 비롯한 인도 사상과 함께 밀려왔다... 이 번역 활동에 편승하여 수학, 점성술, 천문학, 의학을 비롯한 인도의 세속 과학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두번째 (이슬람 세계로부터 들어온) 외래 물결은 몽골의 쿠빌라이 칸에 의한 중국 정복 시기부터 시작하여 13세기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훗날의 명 황제들도 이슬람 천문학 관청을 두는 전통을 유지했다... 중국과 페르시아는 원대(1264~1368)에 거대한 몽골 제국을 가로질러 서로 교류했다. 중국인들은 그 교류를 통해 유클리드와 프톨레마이오스를 접했지만 늘 그랬듯이 추상적인 과학에 무관심했으므로... 그 두 인물의 저술을 번역하지 않았다.


... 예컨대 중국의 대수학이 송대에 절정에 이른 후 200년이 지났을 때, 중국 수학자들은 과거의 대수학 문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위대한 시계 제작자 소송(蘇頌 1020-1101)이 죽고 100년이 지난 후(1195년)에는 아무도 그의 시계를 다시 만들기는커녕 수리할 수조차 없었다...


중국 과학에 밀려든 세번째 외래 물결은 서유럽에서 온 것이었다. 예수회 선교사이며 과학자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는... 마침내 1601년 베이징 입성을 허가받았다. 명의 황제와 왕실과 중국 사회는... 그가 전한 서양 수학, 천문학, 달력, 관개기술, 회화, 지도, 시계, 대포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공교롭게도 마테오리치가 가져간 것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의 새로운 태양 중심 천문학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고대와 이슬람으로부터 배워 더욱 개량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었다...


마테오리치의 상륙 이후 중국 과학사는 크게 볼 때 세계 과학으로 통합된 역사라 할 수 있다.


216-219/ ... 중국어는 말과 글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과학을 표현하고 소통하기에 이상적인 매체가 아니었다는 설명이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은 서양에서 발전한 종류의 논리적·객관적·과학적 추론에 불리했을지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중국인의 사고방식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유비추리나 연합적 혹은 '연상적' 사고 등의 다양한 개념을 동원하여 규정했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중국에 과학적 방법론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 과학이 정체되었다고 주장했다... 묵가와 법가에 대한 탄압을 지적한다. 그 두 학파의 방법은 서양식 과학으로 이어지고 중국 과학혁명으로 귀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명가(名家)의 학자들은 논리학, 경험, 앎을 얻는 방편으로서의 연역과 귀납을 강조했고, 따라서 서양에서 발전한 것과 유사한 과학적 전통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중국 사상에는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중국문명은 인간과 자연에게 절대적 명령을 내리는, 전능하며 신성한 입법자를 거론하지 않았다... 중국 지식인에게는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거나 신의 작품에 깃든 질서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했다.


... 중국 과학의 '실패' 원인을 중국인의 문화적 자만성에서 찾는다... 중국 밖에 사는 '야만인들'의 과학적 지식을 흡수하고 연구할 이유가 없었다.


지배적인 철학이었던 유학과 도교도 전통적인 중국의 과학연구를 망쳐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독립적인 '자연'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관계에 중점을 두는 것, 실용적인 기술에 대한 멸시, '인위적인' 행위(예컨대 실험)에 대한 거부감이 그런 측면들이다...


마지막 설명은 중국 문명에서 상인 계급이 대체로 주변에 머물렀기 때문에 근대과학이 탄생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 사업가들과 자유시장경제가 일원적인 관료체제의 통제에 굴복하지 않고 성장했다면, 아마 더 자유로운 사상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며, 대학과 유사한 독립적인 기관들이 등장하고 근대과학이 탄생했으리라는 것이다.



Francis Fukuyama (2011), The Origins of Political Order (정치질서의 기원), 함규진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2년.


158/ 수많은 근대화의 길

왜 통일된 진제국의 정치적 근대화가 경제, 사회 부문에서의 근대화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자본주의에는 다른 제도들의 출현이 필요했다. 서구의 자본주의 혁명에는 초기 근대의 인지 혁명 cognitive revolution이 앞섰고, 이는 과학적 방법론, 근대 대학 제도, 과학적 관찰에서 새로운 부를 얻어내는 기술혁신, 그리고 이런 혁신을 부채질하는 동기를 유발하는 재산권 제도 등을 낳았다. 진나라는 여러 가지로 지적 토양이 비옥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주된 학문 전통은 회고적이었으며 근대 자연과학에 필요한 추상화를 해낼 수가 없었다.


또한 전국시대의 중국에는 독립적인 상업 부르주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도시는 상업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 행정의 축이었으며, 자치와 독립의 전통을 가지지 못했다. 상인이나 공인의 사회적 지위는 미미했다. 그들의 지위는 지주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재산권은 존재했지만 근대 시장경제의 발전을 추진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재산을 징발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법치주의도 결국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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