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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ug 26. 2021

보르네오섬과 뉴기니섬

조영필


인도네시아에 보르네오 섬이 있다. 그 섬의 남쪽은 인도네시아 땅이고, 북쪽은 말레이시아 땅인데, 그리고 그 위에 조그맣게 또 브루나이란 나라가 있다. 인도네시아 관련 회의*1)에서 누가, 저 섬은 인도네시아 땅인데, 말레이시아가 침범했군! 한다. 그래서 한번 찾아 보았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에서 독립하였고, 말레이시아는 영국령에서 독립하였다. 그런데 원래 보르네오섬은 상당 부분 브루나이의 영향력이 미치는 땅이었다.

 

보르네오는 다양한 해양 교역 세력이 섬의 해안가를 할거하던 상황에서 대항해시대를 맞이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이 향료제도 방면에서 다음에는 스페인이 필리핀에서 역시 향료제도를 목적으로 그리고 포르투갈을 뒤이어 향료제도를 장악한 네덜란드 세력이 섬의 남쪽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보르네오섬 북부의 브루나이는 한때 스페인에 수도가 점령당하고,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회복하기도 한다. 종교는 이슬람이고, 종족은 말레이이며, 무역국이었다. 그러다가 반란이 일어났는데, 어떤 영국인이 이를 진압하여 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나마 있던 섬 북부의  대부분의 지역이 또 영국계의 차지가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보르네오 섬의 북쪽은 말라카와 함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이후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하게 되었다*2).


그러고 보면, 제 3 세계의 영토란 어떤 것인가? 대항해시대를 연 항해왕 엔리케 왕자와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메리카는 고사하고, 아시아의 지역구분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아프리카만 식민 모국이 영토 경계를 그어버린 것이 아니다. 아시아 또한 그 영향이 너무도 선명하다.

 

전화영어를 하면, 주로 필리핀 여성들이 선생님인데 그들에게 한번 필리핀의 역사를 물어보았다. 1세기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 역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필리핀 제도는 서구열강의 침공 전에는 선사시대이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종 구성이었다. 그러다 대항해시대에 스페인령이 된다. 이는 마젤란의 세계일주(1519-1521)의 덕택이다.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대항해시대의 기가 막힌 조약이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년)과 사라고사 조약(1529년)이다. 세계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오선을 기준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금을 그은 것인데, 교황이 보증을 서 교황자오선이라고도 한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서경 46도 37분) 성립 당시 브라질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데, 훗날 브라질이 발견되었을 때, 이 조약에 의거 포르투갈이 그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마젤란의 항해(1521-22년) 이후 스페인이 남미를 돌아 동쪽으로 넘어오자, 태평양에서도 경계를 정할 필요가 생겼다*3). 따라서 몰루카 제도*4) 동쪽을 기점(동경 144도 30분)으로 제2의 경계선 협정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사라고사 조약이다. 이 협정에 따르면, 한반도나 일본도 스페인에 대해 포르투갈에게 우선 점유권이 부여되는 셈이다. 비기독교 지역은 무주공산으로 간주되던 시대이었다.


그러므로 필리핀 지역은 원래 자오선 기준으로는 포르투갈령이 되어야 하는데, 왜 스페인이 점거하게 된 것일까? 스페인이 필리핀 제도 식민화를 시작한 때는 1565년이었다. 처음에 포르투갈은 이러한 스페인의 거점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연합*5) 시기로 이어졌다. 그 후 교황권의 약화 및 무적함대의 패퇴로 이베리아반도인들만의 조약은 유명무실해졌지만 스페인이 필리핀을 떠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어 보면, (필리핀의) 루손 총독이 멕시코의 왕에게 보고하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한반도를 침략할 무렵에 필리핀은 멕시코 부왕령 (지금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포함된 땅)에 귀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스페인의 필리핀 진출이 대서양-태평양을 건넌 루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페인이 필리핀을 발판 삼아 브루나이까지 진출하려 하는데, 더는 묵과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이 브루나이를 도와주어 이를 격퇴하게 되고, 이로써 스페인의 아시아 태평양으로의 서진은 필리핀에서 멈춰진다. 이후, 미서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로 필리핀이 미국령이 되고 나면, 이제는 태평양전쟁과 함께 가시권에 들어오는 필리핀의 역사이다.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할 무렵에는 앞선 세력인 포르투갈의 거점이 팔렘방과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도처에 있었는데 이러한 포르투갈의 기존 거점을 후발 네덜란드가 모두 장악해버린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말레이시아 반도와 보르네오 섬 북쪽을 장악하지 않고 남겨둔 것은 말레이시아 반도에 있던 기존의 말레이시아 지역 술탄의 세력이 어느 정도 건재하였고, 또한 보르네오 섬 북쪽에는 브루나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포르투갈이 장악하던 뉴기니섬 서부도 네덜란드가 이어받는다. 이러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영토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가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왜 포르투갈이 뉴기니 섬 서부만 장악했을까 하는 것이다. 뉴기니 섬 서부와 파푸아 뉴기니(뉴기니 섬 동부)를 가르는 경계선이 동경 141도인데, 그 옛날 사라고사 조약의 자오선과 거의 일치한다.


뉴기니 섬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섬이다. 특히 이 섬의 고지대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여겨졌었다. 왜냐하면, 뉴기니 섬의 저지대 인들조차, 고지대 인에 대해 잘 모를 정도로 그 둘 간은 교류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해안지역에 진출한 유럽인들 또한 섬의 고지대 인에 대한 정보를 알 길은 없었다. 또한 섬 중앙의 고원지역은 해발고도 4000m까지 올라가는 험준한 지역인데다가 해안과의 거리도 멀고, 또 울창한 정글이 가로막고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 그러다가 1930년경 금을 찾는 탐험가들에 의해 19세기까지 전혀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뉴기니 문명이 세상에 드러난다*6).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는 뉴기니는 전세계의 6,000개의 언어 중에서 자그마치 1,000개가 텍사스 주보다 약간 큰 지역에 몰려있다고 서술한다. 이 언어들은 다시 수십 개 어족으로 세분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언어들도 많으며 이들은 모두 영어와 중국어만큼이나 서로 많이 다르다고 한다 (P. 459).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의 저술의 단초가 뉴기니 섬 원주민의 '화물'에 대한 질문이었고*7), 또한 다이아몬드 본인이 오랫동안 뉴기니 섬에서 식생을 연구한 학자이어서 그의 책에 뉴기니에 대한 서술이 꽤 많이 보이는데도 예전에는 뉴기니 섬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눈 뜬 장님이 따로 없다.


뉴기니 섬 동쪽의 남부는 영국이 장악하였고, 뉴기니 섬 동쪽의 북부는 독일이 장악하였는데, 그 북서쪽에 비스마르크 제도가 나오므로, 독일의 태평양 진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은 태평양전쟁 때, 미드웨이 해전과 더불어 미국과 일본의 치열한 접전지역이었다. 그 전쟁 과정의 기록을 보게 되면 역시 뉴기니 섬 중앙 고원 지대의 험준함과 군사 작전의 어려움을 새삼 알 수 있다.


이러한 섬 중앙부의 높은 산악지형은 사라고사 조약의 한계와 더불어 뉴기니 섬을 한 해양 세력이 모두 장악하지 못한 이유일 수 있다. 이는 뉴기니 섬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섬인 보르네오 섬에 대해서도 똑같이 유효하다. 그리고 이들 섬의 험준한 중심부가 상당한 투자와 모험심으로 결국 탐험될 수 있었던 것 또한 각각 석유와 금의 자원 탐사가 목적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만하다.



1) 예전에 다니던 회사의 2011년에 있었던 해외영업 전략회의에서이다. 즉 일반인들은 이러한 동남아의 지역구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해외경험이 많은 비즈니스맨들조차도.

2) 이때 브루나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참여의사를 시늉만 하다가 참여하지 않는다. 참여의사를 통해 영국의 보호로 나라를 유지하고, 이후 참여하지 않아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게 되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발견된 브루나이 인근 해상의 거대한 유전의 부를 말레이시아의 다른 연방과 나누고 싶지 않았고, 또한 술탄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3) 마젤란의 세계 일주의 목표 중의 하나가 교황자오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탐험대를 이끈 마젤란이 포르투갈인이었다는 사실은 제노바 출신이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2, 제3의 모국으로 생활하던 콜럼버스에 비견할 만하다. 자기 나라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개인이 타국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해볼 수 있었던 것은 흡사 이직이 자유로운 (이직 제한 계약이 금지된) 실리콘밸리의 역동성을 연상시킨다.

4) 일명 향료 제도, 유럽인들이 그토록 찾아 나섰던 향료의 원산지이다. 그 중 대표인 육두구는 남부 반다 제도에서 자라고 정향은 북부인 테르나테 섬과 티도레 섬 등 몇 섬에서만 자란다. 네덜란드는 남부의 암본을 그들의 거점으로 삼았다.

5) 동군(同君)연합은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에 유고가 생겼을 때, 스페인의 왕이 포르투갈 왕을 표방하여 한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동일한 왕이 통치하던 시기(1580-1640년).

6) 뉴기니의 고지대는 금단의 장소다. 정글과 늪지대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해안에는 말라리아 모기가 득실거리고 내륙은 험준한 오지여서 발견되고 난 후에도 수 세기 동안 탐사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마이클 리히Michael Leahy라는 젊은 오스트레일리아 탐광시굴자가 금맥을 찾아 뉴기니의 내륙 오지로 모험을 떠났다. 비스마르크 산에서 맞이한 첫날 저녁 그는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기니의 고지대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여겨져 왔는데, 어둠이 내리자 산 아래에 수백 개의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외부세계와의 접촉없이 여전히 석기시대 생활을 하고... 총은 말할 것도 없고 굴러가는 수레바퀴조차 본 적이 없는 고지대인들이 100만 명 가까이 살고 있었다... 뉴기니 탐험에 관한 책 [시간을 잊은 땅The Land that Time Forgot]...(자카리 쇼어, 생각의 함정, 에코의 서재, 2009, 243-247쪽.)

7) 한 뉴기니 원주민이 왜 유럽인은 '화물(문명의 이기)'이 많은데, 유럽인에 비해 두뇌 면에서 열등하지 않은 뉴기니인은 왜 '화물'이 없는가 하는 점을 질문하였고 이것이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를 저술한 동기가 되었다. 사실 뉴기니 인의 척박한 고원지대에서의 영농 기술은 오늘날의 농업전문가들 못지 않으며, 토양의 질소 수준을 인위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아이디어는 뉴기니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Note:

2011년에 시작한 글인데, 10년 동안 내버려두었다가 정리하려고 보니 조사할 게 너무 많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다.

이제 이 두 지역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려고 한다. 인도네시아는 최근 수도를 칼라만탄 지역(보르네오 섬의 남부 인도네시아 령)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사실 동남아 무역의 역사적 중심지이었던 수도 자카르타는 지하철도 건설하기 힘들 정도의 너무 무른 지반에다가 난개발로 더 이상 발전이 쉽지 않은 지역이기는 하다.

다음으로 독립국인 파푸아뉴기니는 뉴기니 섬 원주민들의 구성이 특이하게 보전된 나라이다. 오스트로네시아인이 인종청소가 된 백호주의 호주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만큼 뉴기니 섬 고원지대가 유럽인들에게 늦게 발견된 행운에다가,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각 해양 세력이 야만인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식의 식민지 경영을 할 겨를이 없었고, 세계 대전 이후에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어느 정도 정립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독립국 파푸아뉴기니는 현재 중국의 태평양 진출로 인해 호주(또는 미국)와 중국의 사이에서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의 동부 자치주 부건빌 섬(솔로몬 제도)의 팡구나 광산(Panguna mine)에 엄청난 양의 광물(구리 10억 톤, 금 1,200 만톤)이 매장되어 있음이 1964년부터 알려져 현재 신생 독립국 파푸아뉴기니의 젖줄이 되고 있다. 따라서 최근 기사에 보면 부건빌 섬은 파푸아뉴기니로부터 독립을 하는 주민 투표를 실시하였는데, 98%가 독립에 찬성하였다고 한다. 돈(자원)이 역사의 원동력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2021.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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