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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May 09. 2023

서구 개념 한자어

정광제, 일본식 한자조어를 알아보자, 한국의길, 2019.8.20.   https://road3.kr/?p=21376&cat=150)


-에도시대 말기 이후, 서구 문명의 새로운 개념 등 나타내기 위해 번역차용으로 활발하게 만들어

-한자문화권인 대만, 대한민국, 베트남도 일본식 한자조어(和製漢語)를 자국어 한자로 받아들여

–科学(과학) 등 새로 만든 단어, 自由(자유) 등 기존 한자어에 새 의미 부여해 전용(転用)한 단어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는, 일본에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한자어이다... 일본제 한어(日本製漢語) 또는 신한자어(新漢語) 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한자어(新漢語)는 2종류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科学(과학) 哲学(철학) 郵便(우편) 野球(야구) 등, 새롭게 한자를 조합하여 만든, 문자 그대로 새로운 단어이다.


두번째는, 自由(자유) 観念(관념) 福祉(복지) 革命(혁명) 등, 예로부터 있어왔던 한자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전용(転用) 재생(再生)한 단어이다.  


근대 이후에는 性(~성) 制(~제) 的(~적) 法(~법) 力(~력) 이나 超(초~) 등의 접사에 의한 조어도 활발하게 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단어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는 특히 근대 이후, 중국에 역수출된 것들도 적지 않다. 이를 일본의 대륙침략과 연결지어서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만, 실은 오히려, 중국이 근대화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특히 청일 러일전쟁 전후로, 중국인 유학생에 의해 일본어 서적이 다수 번역된 것에 영향받은 부분이 크다고 여겨진다.


중국어가 된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의 예

意識(의식) 右翼(우익) 運動(운동) 階級(계급) 共和 (공화) 左翼(좌익) 失恋(실연) 進化(진화) 接吻(접문 : 키스) 唯物論(유물론) 共産主義(공산주의) 등.


중국에서도 스스로 서구언어의 번역을 시도하여, 중국식 신한자어(華製新漢語, 화제신한어) 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이 종종 일본식 한자조어(和製漢語)와 경합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中華人民共和国(중화인민공화국)의 人民(인민) 共和国(공화국)도 일본식 한자조어(和製漢語)로, 나라이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국가체제에 필요불가결한 개념까지도 일본식 한자조어(和製漢語)로 채워져 있다. 또, 같은 한자문화권인 대만, 대한민국, 베트남에서도 이러한 일본식 한자조어(和製漢語)를 자국어의 한자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에도시대 이후의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의 예

文化(문화) 文明(문명) 民族(민족) 思想(사상)
法律(법률) 経済(경제) 資本(자본) 階級(계급)
警察(경찰) 分配(분배) 宗教(종교) 哲学(철학)
理性(이성) 感性(감성) 意識(의식) 主観(주관)
客観(객관) 科学(과학) 物理(물리) 化学(화학)
分子(분자) 原子(원자) 質量(질량) 固体(고체)
時間(시간) 空間(공간) 理論(이론) 文学(문학)
電話(전화) 美術(미술) 喜劇(희극) 悲劇(비극)
社会主義(사회주의) 共産主義 (공산주의) 등.


이처럼, 동북아시아 각국에서 쓰이는 근대 개념어의 대부분이 일본제 한자조어로 채워져 있다고 타카시마 토시오(高島俊男)는 주장하고 있다.


한편, 1860년대 중반에 청나라에서 번역된 국제법 해설서인 <만국공법(万国公法)>이 에도시대 말기의 일본에 수입 되어, 국제법 · 정치 · 법학 관련의 개념을 나타내는 중국제 신한자어(中国製新漢語)가 일본어에 수용되었다.


<만국공법>에 의해 일본에 수입된 중국제 신한자어(華製新漢語)

国債(국채) 特権(특권) 平時(평시) 戦時(전시) 民主(민주) 野蛮(야만) 越権(월권) 慣行(관행) 共用(공용) 私権(사권) 実権(실권) 主権(주권) 上告(상고) 例外(예외) 등.


이처럼 일본어에서 중국어로 수출된 신한자어 중에는, 각종 영중사전(英華辞典)이나 한역양서(漢訳洋書)를 참조하여 일본에서는 보급되었으나 중국에서는 금방 잊혀졌다가, 다시 한번 일본에서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일본제 한자조어를 만든 인물들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0)

<해체신서(解体新書)>에서 神経(신경) 軟骨(연골) 動脈(동맥) 処女膜(처녀막) 十二指腸(십이지장) 등의 근현대 의학용어를 조어(造語)하였다.


•우다가와 겐신(宇田川玄真, 1770-1835)

의학용어에 쓰이는 腺(선) 膵(췌)라는 한자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 1798-1846)

酸素(산소) 水素(수소) 窒素(질소) 炭素(탄소)
白金(백금) 元素(원소) 酸化(산화) 還元(환원)
溶解(용해) 分析(분석) 細胞(세포) 属(속)을 조어(造語)하였다.


•이치카와 세이류(市川清流, 1824-?)

博物館(박물관)을 조어(造語)하였다.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

芸術(예술) 理性(이성) 科学(과학) 技術(기술) 意識(의식) 知識(지식) 概念(개념) 帰納(귀납) 演繹(연역) 定義(정의) 命題(명제) 心理学(심리학)등을 조어(造語)하였다.




최치현, 번역을 예술 경지로 승화시킨 니시 아마네, 월간중앙, 2018.8.17.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2633


“‘Reason’은 이성(理性)과 통하더라”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의 기원에 대해 무감각하다. 그 시원(始原)에 대한 고민 없이 모국어인 양 사용한다.


... 일본의 교육자 주만 가나에(中馬庚, 1870~1932)는 ‘baseball’을 야큐(野球)로 번역했다. 베이스를 설치하고 공으로 하는 놀이는 들판에서 벌이는 전쟁 같은 스포츠가 된다. “숏스톱은 전열(戰列)에서 대기하고 움직이는 ‘유군(遊軍)’으로 보는 듯하다”는 설명으로 遊擊手(유격수)라는 명칭도 만들어냈다.


근대 조선은 서양의 발명품을 일본의 번역을 통해 그대로 삼켰다. 스스로 고민은 없었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조선을 도와주러 오는 ‘유격대’는 없었다. 조선이란 베이스는 텅 비어 있었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에서 부분적으로만 세계와 소통하던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양 배우기에 나선다. 견수사·견당사·조선통신사·견구사절단 등 선진문물을 수용했던 일본은 젊고 유능한 인재를 서구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 첫 번째 나라는 네덜란드다. 난학(蘭學)의 전통을 유지하던 일본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적의 서구 국가였다... 1870년경에 이르면 이러한 움직임이 절정을 이룬다. 서양 각지로 유학을 떠났던 인물들이 귀국해 서양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의 번역이 아닌 선진문명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모방이었다. 동서양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권에 살고 있었기에 동양에는 없는 개념들을 번역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선두에 서서 이 일을 맡은 나라가 일본이다.


중국도 번역에 나섰으나 언어감각이나 국제감각에서 일본에 밀렸다. 같은 단어를 한자로 번역해도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가 생존율이 더 높았다. 일본은 번역을 통해 서양의 선진문명을 일찌감치 수용하고 변신을 시도해 동아시아의 최강자 반열에 오른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에 편입해야 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을 주장하며 일본 근대화의 틀을 제공한 이끈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그는 서양의 ‘democracy’라는 개념을 두고 처음에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번역했다가 나중에 민주(民主)로 바꿨다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을 문명으로, 라이트(right)는 권리로, 소사이어티(society)는 사회로 번역했다. 복식부기·보험 등의 번역도 그의 작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어’ 한자는 대부분 서양(그리스) 언어 번역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철학·예술·사회·문화·문명·자유·권리·개인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개념어들이 한자로 번역됐다. 거기에는 서구 문명의 한가운데로 유학을 가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메이지(明治) 시대의 언어와 지식 천재들의 역할이 컸다.


메이지 이후 근대어의 번역에는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됐다. 첫째 17세기 이후 중국에 온 선교사가 번역한 한역양서(漢譯洋書)와 영화사전(英華事典)에 인용된 한자 단어다. 둘째 18세기 일본의 난학자들이 네덜란드 서적을 번역하면서 창안한 한자 단어다. 셋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이 서양 서적을 번역하면서 만든 한자 단어다.


일본제 한자어는 근대 이후 중국에 역수출된 것도 적지 않다. 중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청일·러일전쟁 전후 중국인 유학생에 의해 일본어 서적이 많이 번역된다. 중국어로 된 일본식 한자어의 예로 ‘의식’ ‘우익’ ‘운동’ ‘계급’ ‘공산주의’ ‘공화국’ ‘좌익’ ‘실연’ ‘진화’ ‘키스(接吻)’ ‘유물론’ 등이 있다.


중국에서도 스스로 서양어 번역을 시도하고, 중국산 새 한자어를 만들어내는 등 일본제 한자어와 경쟁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 없던 개념을 번역하는 분야에서는 일본식 한자가 최종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economy’를 중국에서는 엄복(嚴復, 1854~1927)이라는 사람이 생계학(生計學)으로, 일본에서는 경제(經濟)로 번역한다. 한자 문화권은 후자를 선택한다.


1720년 막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금서령(禁書令)을 완화한다. 이때부터 한역양서가 일본에 전해지게 된다. 중국에 진출한 서양 가톨릭 선교사들이 영화사전을 편찬한다. 조금 늦게 중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도 한역양서를 발간한다. 대표적인 서적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다. 영화사전과 만국공법의 학습으로 신조된 많은 한자가 일본에 수입된다. 국채(國債)·특권(特權)·민주(民主)·야만(野蠻) 등을 꼽을 수 있다.


서양 단어를 한자로 만든 학술단체 메이로쿠샤

난학자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서적이 스기타 겐파쿠(衫田玄白, 1733~1817)의 [해체신서(解體新書)]다. 스기타 겐파쿠는 신경·연골·동맥·정맥 등의 번역을 통해 서양 의학을 받아들였다. 자연과학이나 기술 분야의 번역은 주로 난학을 통한 결과였다.


다음으로는 서양 유학생 출신들이 주동한 신문명 결사체라 할 수 있는 단체의 움직임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서양의 단어를 한자로 만들어 기여한 곳은 메이로쿠샤였다. 메이로쿠샤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계몽 학술단체다.


1873년(메이지 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정치가·외교관, 히토쓰바시대학 창립, 1847~1902)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교육자·저술가, 게이오주쿠 창립, 1835~1886),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교육가·관료, 1836~1916),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교육자, 1832~1891), 니시 아마네(西周: 사상가, 1829~1897),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계몽사상가·관료, 1828~1902), 쓰다마미치(津田真道: 관료·계몽사상가, 1829~1903), 미쓰쿠리슈헤이(箕作秋坪: 교육가, 1826~1886), 스기 코지(杉亨二: 계몽사상가·관료),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 법학자·교육자, 1846~1897))등과 함께 그해 가을에 계몽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했다.


하급무사·서민 등 하층 출신의 맹활약

메이로쿠샤의 핵심이 된 동인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니시무라 외에는 하급무사 혹은 서민과 같은 하층 출신자였다. 이어 메이지 시대 이전부터 양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막부의 학문기관인 가이세이쇼(開成所) 등에 고용돼 있었다.


회원 대부분이 에도 막부 말기 또는 메이지 시대에 양행(洋行) 경험이 있었던 만큼 존왕양이(尊皇攘夷)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 또 후쿠자와를 제외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관리로 정부에 출사한 것도 특징이다. 인습과 고정관념의 속박이 덜하고 새로운 지식을 함유할 수 있는 개방적 심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서양문물을 오랑캐의 더러운 물건 취급하며 기득권 수호에 급급하던 조선 대부분의 사대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처럼 서양 사정에 밝은 지식인들이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정례 연설회와 잡지 발행이었다.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정례 연설회에서 개별 테마에 대해 의견 교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필기한 것을 [메이로쿠잣시]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지식의 전달은 잡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연설회에서 ‘연설’이라는 단어는 후쿠자와가 ‘speech’를 번역한 것이다. 또 연설회가 열린 곳은 양식(洋式) 취향이 강한 쓰키지(築地)의 세이요켄(精養軒)이었다.


동양철학과 서구 유학 경험의 접목

햇수로 2년 만에 정간(停刊)한 [메이로쿠잣시]였지만 그 여파는 대단했다. 정례 연설회 개최와 함께 그를 토대로 한 학술 잡지 발행이라는 계도 스타일도 선구적이었다. 이들이 시도한 작은 날갯짓은 서양의 개념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펼치는 데 공헌했다. 여기서 동서양을 아우르며 활약한 인물이 바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다.


그는 일본 최초로 공식적으로 서양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1862~1865년 막부의 명으로 네덜란드에서 유학했다. 그는 법학·칸트·경제학·국제법을 공부했다. 친목 결사인 프리메이슨에 처음으로 가입한 아시아인이다. 현재 그 문서가 라이덴 대학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예술·이성·과학·기술·철학 등 한자 번역어의 ‘저작권자’다.


니시 아마네는 일본 근대의 중요한 계몽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최초로 서양철학과 사회과학을 계통적으로 일본에 소개한 학자다. 그런 이유로 ‘근대 일본 철학의 아버지’ ‘일본 근대 문화의 건설자’라고 불린다.


한자 문화권에서 서양 근대 철학의 번역어를 조어(造語) 하려면 동양 전통 철학과 서양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필요했다. 니시 아마네는 풍부한 문화적 소양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니시 아마네는 어릴 적부터 조부의 지도를 받아 글씨를 배웠다. 네 살 때 [효경]을 읽고 여섯 살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읽었다. 열두 살부터 번(藩)의 학교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공부하며 [주역] [상서] [시경] [춘추] [예기] [근사록] 등을 열독했다.


이러한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와 서구의 유학 경험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번역어 찾기 몰두한다. 영어의 ‘reason’을 이성으로 번역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유학 기간에 쓴 [가이다이몬(開題門)]에서 “송대의 유학과 이성주의는 말투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비슷하다”고 밝혔다.


니시 아마네는 중국의 철학 사상에 대해서 서양철학의 이성주의자, 예를 들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이성들은 감성 인지만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없으며 반드시 수학 추리의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니시 아마네의 ‘이성’이란 신조어는 서양 이성주의에 입각한 송·명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무임승차’와 혹독한 세월

니시 아마네는 동시대에 활약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종종 비교된다. 메이지 유신 후의 문화사를 말할 때 그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래서 니시 아마네를 ‘어용 학자’로 간주하고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으로 일본 내에서 니시 아마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불편하다. 니시 아마네는 존황주의자로 일본 군국주의 군인정신을 기초한 사람이다. 니시 아마네는 그의 사후에 펼쳐지는 침략전쟁 때 군인정신의 토대를 만든 인물이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적 각성을 통해 야만국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자신들보다 뛰어난 문명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도전한 사람들은 약소한 민족에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 문학사에서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소설로 쓴 모리 오가이(森鴎外, 1862~1922)는 니시 아마네 사후인 1898년(메이지 31년) [니시 아마네전(西周傳)]을 쓴다. 두 사람은 고향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모리 오가이 역시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모리 오가이는 군인 신분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와서 동아시아 최초로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을 한다. ‘아우어바흐 켈러’라고 하는 레스토랑에 걸린 괴테 파우스트의 명장면이 20장 정도 있다고 한다. 그중 한 그림은 파우스트가 아닌 모리 오가이의 초상화다.


언제까지나 문화 식민지로 남이 만들어 건네준 번역어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근대의 번역에서 일본은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중국은 일본과 경쟁했으나 보편성 획득에 실패했다. 조선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무임승차의 길을 택하더니 자유를 잃어버린 혹독한 세월을 경험했다.


우리에게는 반관*의 이성적 기다림과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하지 않는 민족에 미래는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육구연(陸九淵)은 ‘반관(反觀)’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밖에서 찾지 않아도 되며 자신의 마음을 ‘반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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