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기, 경제적 합리주의의 사상사적 연원-M.Weber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33(1), 2016.]
... 브렌타노 논의의 최대 특징은 종교와 경제를 이상추구(경제윤리)와 영리추구(경제적 자연)이라는 기본적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베버가 종교와 경제의 '선택적 친화관계'에 주목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브렌타노가 강조한 근대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종교개혁의 의의, 특히 칼뱅이즘(퓨리탄이즘)의 의의라는 점은 베버의 논의에서도 기본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베버는 바로 이 '의의'를 논증하려고 한 것이다. 다만 이것은 브렌타노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공통인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좀바르트의 근대자본주의 정신론과 베버의 <정신>논문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주목하고 그 기원을 추구하고 있지만 '정신'과 '근대 자본주의 경영'을 구별하고 있음, 이 '정신'은 냉정하고 합리적인 영리정신이라는 것, 그것은 단순한 영리충동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과 대립하는 것 같은 특수한 역사적 형성물이라는 것이므로 자기 목적화한 도착적인 영리추구가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함... 좀바르트가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경제적 합리주의를 주로 경제적 기술(특히 복식부기의 발명과 보급)에 의한 것으로 설명한 것에 대해 베버는 합리적 태도를 지닌 새로운 타입의 종교인(동시에 새로운 타입의 경제인이기도 함)의 출현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좀바르트에 있어서(브렌타노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틀림없이 칼뱅이즘(퓨리탄이즘)이야말로 근대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조장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지만 동시에 종교적 요인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하고, 보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담당자로서는 칼뱅이스트보다 오히려 유태인 금융업자를 생각하고 있다.
이 경우도 좀바르트는 유대인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처해 있던 사회적 상황 즉 자기 실현 가능성이 경제활동면에서만 허용되었다는 사정을 중시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베버는 칼뱅이즘이야말로 그 교리(예정설)의 결정적인 심리적 임팩트에 의해 그 특수한 정신의 산파역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브렌타노나 좀바르트처럼-순수하게 경제적으로만 보아서- 그 자체가 근대적이라고 할 만한 경제 합리주의는 이미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국지적으로 성립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베버에 의하면 이러한 경제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근대적 합리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에는 종교적 윤리가 초래한 경제활동의 질적 변화의 결과로서의 경제적 합리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종교적 동기의 개재 결과로서의 '윤리론까지 높아진 영리욕'이나 '직업의무로서의 영리의 자기 목적화'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이 없으면 근대자본주의 정신은 없는 것이며, 근대적 자본주의 그 자체도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이에 멈추지 않고 베버는 이 '정신'의 '경제'에 대한 선행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조준현, 다시 읽는 자본주의 3, 국제신문, 2023.5.15.]
자본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그 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비슷한 용어들을 섞어 쓰다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라는 용어로 정리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누가 그 말을 처음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 용어가 지금처럼 보편적으로 사용된 데 가장 중요한 계기가 독일의 역사학파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1941)가 쓴 10권의 대작 '근대 자본주의(Der Moderne Kapitalismus)'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농촌이 아니라 도시에서, 농업이 아니라 상업에서, 건전하고 성실한 생산활동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에 찬 소비생활에서 왔다고 생각하였다. 자본주의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거대한 규모의 돈과 상품이 집적된 사회를 생각한다. 상품이 자본주의의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라면, 돈은 그 육체를 순환하는 혈액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부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중세의 농민들은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거의 화폐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영주들이라고 하더라도 시골에서는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돈과 상품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공간을 찾아보아야 옳겠다. 바로 도시와 해외의 영토들이 그것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인구가 수십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들이 나타난다. 대도시의 인구가 수백만, 심지어는 1000만 명을 넘는 요즘의 기준으로는 조금 놀라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16세기 이전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리의 인구는 겨우 10만 명을 넘길 뿐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오면 유럽에서 10만 명 이상의 도시는 13~14개로 늘어났고, 18세기 말에는 런던과 파리처럼 인구가 100만 명을 넘는 대도시가 나타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시가 생산활동의 중심지이다. 그러나 농업 중심의 중세 사회에서는 농촌이 생산활동의 중심지였고, 도시는 소비와 향락의 공간이었다. 대도시가 그만한 규모를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소비자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왕실과 귀족, 고관들 그리고 성직자들이 바로 그 소비자들이었다.
우리가 아는 중세 사회는 절제와 검약을 미덕으로 하는 경건한 신앙심의 사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처럼 거대한 사치와 향락이 만연하게 된 것일까? 좀바르트는 이러한 변화가 바로 십자군 전쟁(1096~1270)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십자군 전쟁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1042~1099)가 유럽 여러 나라의 왕과 제후들에게 성지탈환을 위한 출병을 호소하면서 시작되었다. 원정은 모두 8차에 걸쳐서 일어났지만, 성지탈환이라는 원래의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제1차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후의 원정은 모두 실패하였다. 제2차 원정에서부터 이미 종교적 열정은 사라지고, 상업상의 이익이 보다 중요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좀바르트의 '사랑과 사치의 자본주의(Luxus und Kapitalismus, 1922)'는 십자군 전쟁이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을 남녀관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해석하고,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출현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 당시의 유럽은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을 제외하면 외부세계와 거의 아무런 교류도 없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그런 유럽인들에게 훨씬 높은 수준의 문화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동방세계와의 만남은 거대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윤리적 태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사랑의 세속화'였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사랑이라고 하면 예의를 아는 기사와 고결한 숙녀 사이의 지고지순한 정신적 교류를 의미하였다. 육체를 드러내는 일, 정욕을 표현하는 일, 쾌락을 얻고자 유혹하는 일들은 모두 사랑이 아니라 도덕적 타락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유럽인들은 사랑을 정신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로, 고결함이 아니라 쾌락의 추구로 세속화시켰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인간의 벌거벗은 육체를 그렸다. 인간 본연의 정신을 탐구하고자 했던 르네상스는 다른 한편 인간 본연의 육체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였다. 여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은 곧 여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으로 번져갔다. 이른바 고귀한 신분의 신사들은 서로 여성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하였다.
사랑의 경쟁에는 당연히 돈이 들었다. 신사들은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값비싼 보석과 외국에서 수입한 귀한 재화들을 바쳐야 했다. 부인을 둔 신사들과 남편을 둔 숙녀들은 경쟁적으로 혼외정사를 벌였다. 어느 신분 높은 신사와 역시 신분 높은 부인이 나눈 편지에는 사랑의 밀어 대신 간통의 대가로 얼마를 받을 것인가 하는 흥정이 오갔다. 사랑이 사치를 부르고, 사치는 돈과 상품의 풍요를 가져왔고, 그렇게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4, 조선일보, 2023. 7. 29.]
‘근대 자본주의’를 저술한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암스테르담에 정착할 때 자본주의도 따라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좀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방방곡곡에 유대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미국의 혼’이라는 부르는 것은 순수한 유대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아메리카의 정신은 퓨리턴(청교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면을 쓴 유대교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이며 퓨리턴은 인공적인 유대이다.” ‘반유대교’적일 만큼 과격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크롬웰에 의한 영국의 청교도혁명 이후 영국이 서서히 유대화되었고 드디어는 대영제국의 정책, 나아가서는 세계정책에 유대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청교도 무리와 유대인들이 아메리카에 건너가 미국을 건설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유대인은 물 만난 고기였다. 그 이유는 청교도와 유대교 사이에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부를 부정하고 탐욕을 억제하라고 가르친다. 탐욕에 의한 혼란과 약탈을 방지하고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가톨릭은 돈과 부귀를 탐하지 말고 청빈하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모든 물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도록 ‘무소유’를 설파한다. 힌두교는 아예 아무것도 소유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도 물욕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종교가 한결같이 물욕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돈 버는 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데 딱 두 개의 종교가 부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부는 신의 축복이라는 교리를 강조한다. 이 두 종교가 바로 유대교와 청교도이다. 칼뱅은 ‘깨끗한 부자’를 강조했고 유대교도 부자가 축복받은 사람임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는 돈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사람을 해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이다.’ ‘몸의 모든 부분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돈지갑에 의존한다. 부는 요새이고 가난은 폐허이다’
뉴암스테르담은 다양한 국가와 인종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특히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는 바로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북미에 식민지를 세운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게 된다. 항해조례란 영국과 영국 식민지와 교역하려면 영국 선박이거나 영국 식민지 선박으로만 상품을 운송해야 한다는 조례이다. 이는 당시 해운업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붕괴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네덜란드는 브라질 일부 지역에 갖고 있던 식민지를 포르투갈에 빼앗겼고, 1664년 뉴암스테르담도 영국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새 영토의 주인이 된 영국 왕 찰스 2세는 왕위계승자인 동생 요크에게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을 선물로 주었다. 요크 공작의 소유가 된 뉴암스테르담은 곧 새 주인 요크(York) 공작을 기리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 ‘뉴욕(New York)이 되었다. 요크 공작은 뒤에 형의 뒤를 이어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된다.
뉴욕 최초의 영국 총독 리차드 니콜슨은 1665년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며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강조했다. “그 누구도 기독교 신자와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벌금을 낼 수 없다.” 영국인들이 원했던 식민개척자들은 상업적 재능과 우수한 무역망을 가진 이들이었다. 식민지에서는 과거 유럽과 달리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종교적 제약도 없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과거에는 결코 지니지 못했던 안전의 영속성을 식민지에서 획득했다.
유대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검소함으로 청교도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 뉴욕의 유대인들은 대구잡이와 행상을 하는 한편 인근 매사추세츠 유대인 조선소에서 직접 배를 만든 선장들은 유럽의 유대인 커뮤니티와 손잡고 해상무역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뻗어나가는 신대륙 건설과 늘어나는 일감에 일손이 부족해지자 유대인들은 유럽에 사는 친지들을 부지런히 불러들였다. 친척이 없는 유대인들도 건너왔다. 그들 대부분의 초기 이민은 농장에서 일하기로 계약을 맺고 건너왔지만, 곧 상업과 중개업, 여관업, 그밖에 도시형 산업에 종사한다. 조가비 염주 알을 제조하는 공방도 생겨났다. 유대인다운 발상이었다.
마침내 뉴욕은 유럽에서 몰려오는 유대인들의 처음 기착지가 되었다. 이후 뉴욕은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어 성장 가도를 달렸다. 한때 뉴욕 인구의 3분의 1이 유대인이었으며 뉴욕 소재 대학교 학생의 반이 유대인이었다. 오늘날의 뉴욕을 만든 이들이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곳곳에 그들의 정착촌을 이루어 나갔다. 유럽에서 이주한 어느 민족보다도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영국의 식민지 13개 주에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다.
뉴욕으로 건너온 유대인들은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의 초기 13개 주로 골고루 퍼져 나갔다. 17세기 후반에 뉴욕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와 교역하였던 3대 상품은 ‘모피와 노예, 밀’이었다. 밀은 허드슨강 주변에서 경작되었다. 또한 뉴욕은 서인도제도에서 당밀(糖蜜)이나 럼주를 수입하여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는데 썼다. 당밀은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가공할 때 부수적으로 나오는 찐득한 시럽을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럼주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미국은 영국에서 기계 장비를 수입하고 고래기름과 담배 등을 수출했다.
미국에 흑인이 처음 들어온 것은 1619년 네덜란드 국적 선박이 버지니아 식민지에 20여 명의 흑인을 내려놓으면서부터다. 미국에 흑인들이 청교도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노예는 아니었다. 그들은 계약노동자였다. 그때에는 비슷한 처지의 백인 계약노동자가 있었다. 대부분 가난 때문에 계약을 맺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리고 운임 대신 약 7년 동안 일을 해주고 자유를 얻었다.
정작 흑인이 노예가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흑인이 많아지면서부터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대규모 흑인들이 유입되었고, 이들이 인구의 20%를 넘어가자 통제를 위해 노예제도가 본격화되었다. 이후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농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의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흑인 노예의 수요가 급증하여 노예무역은 점점 번성했다. 특히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에 진출하여 사탕수수농장과 농장에서 일할 인력 공급을 위해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영국령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 섬이 브라질을 대신하여 사탕수수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1672년에 노예무역 독점회사로 왕립 아프리카회사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영국․ 아프리카․ 서인도를 연결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을 경영하여 네덜란드를 압도했다.
노예무역에서 삼각무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국에서 노예를 사는 데 필요한 럼주와 총포 그리고 화약 등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흑인 노예와 바꾸었다. 그 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를 팔고 그 대금으로 식민지 물품과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액즙과 당밀을 사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더욱이 17세기 후반 이래 북아메리카 남부의 담배와 쌀, 곡물, 인디고 생산의 대농장에서도 흑인 노예를 사용하여 그 수요는 크게 늘었다.
당시 뉴욕항은 수출로는 농산물, 수입으로는 공업제품과 노예가 주요 상품이었는데 1690년부터 근 60년간 영국·스페인 전쟁 등 각종 전쟁으로 군수품 무역항으로 성장한다. 군수품 무역 또한 솔로몬 왕 이래로 유대인들의 주특기였다. 1690년도 북아메리카 인구는 모두 25만명 정도였으나 그 뒤 인구는 25년마다 두 배로 늘어났다.
[좀바르트와 베버의 논쟁,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곧 청교도 정신의 금욕이 자본주의 정신을 잉태했다고 주장한 반면에 베르너 좀바르트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사치가 자본주의 탄생의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1902년 독일의 국민 경제학자 좀바르트는 <근대 자본주의>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활동의 특징이 영리주의와 합리주의라고 보았다. 특히 자본주의의 영리주의 측면을 강조한 좀바르트는 경제에서의 무한 추구 정신은 무한의 화폐 추구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청교도로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건전한 직업정신’과 ‘정당한 이윤추구’라는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는 노동이 신성하다면 돈도 신성하다면서 돈은 철저하게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책임감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이란 노동을 통해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했다.
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은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른바 금욕주의 정신에 충실한 자본가들은 자신의 직무를 엄격하게 수행하면서 윤리적으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잘못된 자본주의 정신과 건전한 자본주의 정신과의 차이점을 유대교와 청교도 정신(Puritanism)의 예를 비교로 들어 설명했다. 유대교의 경제적 지향은 정치나 투기에 의존해서라도 돈을 버는 모험적 자본주의 태도다. 한마디로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베버는 이런 유대교 자본주의 행태를 천민자본주의라고 말했다. 청교도적 논리였다.
당시 좀바르트는 베버에 맞선 강력한 라이벌로 두 사람은 거의 20년에 걸쳐 논쟁을 이어갔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논점 하나는 ‘금욕이냐 사치이냐’였다. 좀바르트는 ‘사치와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사회에서 어떻게 사치가 뿌리내리게 되는지를 다양한 수치와 문헌의 조사를 통해 추적했다. 초기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행해졌던 사치를 귀족이나 졸부들이 모방하게 되면서 이러한 사치 수요가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교역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는 것이다.
좀바르트는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을 함께 엮어내어 ‘사치와 자본주의’를 썼다. 그는 경제학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가치판단의 문제를 담고 있는 ‘규범경제학’, 오늘날 주류 경제학이 된 수치적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실증경제학’, 그리고 인문과학적 방법론을 담는 ‘이해경제학’의 세 부류로 나누고, 이해경제학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 이해경제학을 ‘사치와 자본주의’를 쓰면서 이 책을 통해 사회·경제·역사를 아우르고, 또한 그 속에 인문학적 성찰까지도 담아내고자 했다.
좀바르트가 제시하는 명제와 베버가 제시하는 명제는 명백히 상충된다. 한쪽은 사치가 자본주의의 원인이라 하고, 다른 한쪽은 노동윤리와 검약이 자본주의 초기의 특성임을 주장한다. 이 둘의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묘하게도 학문적으로는 이러한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둘은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잡지’를 간행하기도 했다. 마치 두 사람에게서 유대교와 청교도 관계를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