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담, 해리스, 린드버그, & 슈라이옥
[이재담, 서양의학의 역사]
서양의학의 뿌리
이집트 의학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이집트 의사들은 눈, 치아, 두부, 창자, 내장의 질병 등 각 분야로 전문화되어 있었다. 또 의사의 신인 토토의 의학 책에 씌어 있는 방법으로 치료했는데, 만일 그대로 하지 않아서 환자가 죽을 경우에는 중범죄로 다스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1세기 뒤에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는 이집트 의사들은 나흘 동안 치료한 뒤에도 환자가 낫지 않으면 치료법을 바꿀 수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의학은 바빌로니아보다 발전했는데, 기원전 2700년 무렵의 비석에 새겨진 상형문자에 의사와 치과의사에 관한 대목이 나와 있다. 이집트에서는 사제가 의사의 노릇을 했는데, 그들은 심장이 생명의 중심, 항문이 질병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으며, 주문과 기도로 치료했고, 의학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집트 최초의 의사로 알려진 임호텝은 기원전 2600년 무렵 이집트의 대신이었으며, 최초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시인이며 정치가이자 의사인 그의 이름은 '평화롭게 걷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죽은 뒤에는 의학의 신으로 숭상되었다. 그는 환자를 성전에서 재우면 초자연적인 힘이 병을 걷어간다는 '신전수면요법'으로 환자를 치료했다...
이집트 의학은 19세기 말에 발견된 의학 파피루스들을 연구하면서 밝혀졌다. 이집트인들은 500가지 이상의 물질을 제조해 876종류의 처방을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약물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후일 히포크라테스 시대에 나타난 치료법인 식이요법이나 방혈법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들은 종교적 이유에서 청결을 강조했고, 장의 풍습에 따라 수많은 미라를 만들었으나 인체해부학 지식은 아주 빈약했다. 이집트 의사들은 모든 물질이 땅, 물, 불, 공기 이렇게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4원소 개념을 발전시켰다. 의료 종사자가 따로 있었으며, 궁정에서 일한 의사들은 상류 성직자 계급에 속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내용이 고대 이집트 의사들의 윤리개념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히포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의학은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화학이라는 뜻인 그리스어 케미chemi는 검은 땅이라는 뜻의 고대 이집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과학science을 블랙 아트라고 부를 정도로 고대에는 이집트의 문화가 앞서 있었다.
바빌로니아 의학
... 기원전 3000년 무렵 수메르 제국의 의사가 사용한 도장이나 함무라비 법전의 문장에서 당시 의료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약 2250년에 만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 '농양을 찢어 눈이 나으면 은 10셰켈을 받고, 환자가 노예일 경우는 주인에게 2셰켈을 받는다. 그러나 환자를 죽게 하거나 눈이 멀게 만들면 의사의 두 손을 자른다'는 눈 주위에 생긴 농양 치료 기술이 나와 있다. 당시 숙련된 기술자의 하루 일당이 50분의 1 셰켈이었으므로 의료수가가 아주 높은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법전에는 소나 나귀를 치료하는 의사, 즉 수의사의 존재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미 의사의 전문화가 이루어져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 의사들은 환자의 얼굴 표정이나 소변, 침, 혈관을 절개했을 때 나오는 피 색깔을 보고 내장 상태를 짐작했다. 특히 간이 피의 원천이며 영혼의 중심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동물을 죽여 간의 상태를 살펴봄으로써 질병을 진단했다. 또한 진흙으로 동물의 간 모형을 만들어 의사들을 교육할 때 사용했다.
바빌로니아 의학서에는 간, 눈, 호흡기, 열병, 임질, 야맹증, 중이염, 신장결석, 뇌졸증, 옴 등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아편 따위의 약물을 사용한 처방전도 있었다.
당시 하수도,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위생이 청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병 환자를 격리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 이미 전염에 관한 개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정기휴일의 개념도 그들에게서 유래해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전해졌다.
바빌로니아에는 귀족, 서민, 노예 계급으로 신분이 나뉘어져 있었으며, 의사, 마법사, 점쟁이, 외과의들이 모두 귀족계급인 성직자계급에 속했다.
그리스 의학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질병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연적, 과학적, 논리적으로 관찰하고 접근했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쓰인 호머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 의사는 인간에게 중요한 건강을 다루었기 때문에 기술자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의사는 이미 신전의 신관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 기원전 7세기 무렵에는 진단과 분류를 발달시켰으며, 적극적인 국부처치를 시행한 것으로 알려진 크니두스 학파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예후와 일반적 처치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뒷날 히포크라테스를 배출한 코스 학파가 나타났다. 기원전 5세기에 남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철학적이고 이론적 과학으로서의 의학을 가르친 피타고라스 학파 등이 있었다...
... 피타고라스 학파인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와 열, 냉, 건, 습의 4체액, 그리고 심장에서 만들어지는 혈액, 뇌에서 만들어지는 점액, 간에서 만들어지는 황담즙, 비장에서 만들어지는 흑담즙의 네 가지 특성을 주장했다... 엠페도클레스의 학설은 히포크라테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갈렌이 발전시켜 중세 의학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방혈, 구토 같은 배출법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히포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의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학자로 크로톤의 철학자이며 의사인 알크메온이 있다. 그는 질병이란 신체 구성 요소들의 균형이 깨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해부학과 발생학을 연구했고 시신경, 동맥과 정맥, 기관trachea을 설명했으며, 뇌가 인간활동의 중심이 되는 기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 의학과 히포크라테스 학파
임상관찰을 토대로 하는 그리스 의학의 중심역할을 한 사람은 코스 출신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였다... 기원전 460년에 태어나 370년 무렵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전성기였던 살라미스 해전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에 활약했다...
... 질병을 관찰하는 것을 강조하되 질병 원인을 다룬 이론보다는 치료에 필요한 증상과 경과를 관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질병과 해부학적 변화를 관련지어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진단도 하지 않았다. 또 질병을 급성병과 만성병, 전염병과 풍토병으로만 분류했으므로 폐렴, 결핵, 산욕열, 탄저병, 볼거리, 말라리아와 같은 급성병에 관한 기술이 많지만 병명이 붙어있는 질병이 거의 없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만성병은 급성병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진단할 때 주로 시각과 촉각을 사용했고, 후각과 청각도 동원했으나 진단보다는 치료와 예후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병을 스스로 치료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치료는 자연치유력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식이요법을 주로 시행했다. 식이요법이 실패했을 때는 약제를 사용했으며, 수술은 가장 마지막에 하는 보조수단이었다.
... 그들은 의사의 윤리, 친절, 권위, 기능, 청결 등을 강조했으며, 불치병에 걸린 환자는 거절하는 것이 기술자의 관점에서 윤리적인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소리누스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는 코스의 아스클레피아드 파의 의사인 헤라클리데스와 어머니 페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배우고, 자라서는 의사 헤로디쿠스, 소피스트 고르기아스, 철학자 데미크리토스에게 배웠다...
히포크라테스를 최초로 의학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그를 '의학도를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의사들
... 이들은 떠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했는데, 여행하다가 한 곳에 거처를 정하고 진료를 하다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했다... 가난한 사람은 의사가 데리고 다니던 조수나 노예에게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 <동물의 역사>와 <동물의 부분>은 사람과 동물의 해부학에 관해 대략적이긴 하지만 상당히 유용한 지식을 담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의학
기원전 3세기에 의학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갔다. 초기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유클리드나 아르키메데스 같은 학자들이 수학과 실용기술을 발전시켰다. 또한 인체 해부가 허용되어 해부학이 발달했다.
이 시기의 의학자로는 기원전 300년 무렵 활약한 헤로필로스가 있는데, 그는 소장이 시작되는 부위를 '십이지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 감각과 운동마비를 구분했고 맥박을 물시계를 사용해 객관적으로 측정하기도 했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감각과 운동신경이 다르다는 것을 서술하는 등 뇌, 소뇌, 혈관의 해부에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사작용을 연구했으며 복수와 간경변의 관계를 설명한 최초의 병리해부학자였다. 히포크라테스의 체액설을 반대하고 고체병리학을 개척했다...
이 시대에는 '같은 증상은 같은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경험론자라고 부르는 의사들이 있었다. 헤라클리데스, 필리노스, 세라피온, 글라우키아스 등은... 이들의 영향으로 증상학, 약리학, 외과가 발전했다.
그리스의 전통을 이은 로마 의학
로마에서 그리스 의학의 우월성을 입증한 최초의 의사는 아스클레피아데스였다. 포도주를 이용한 식이요법과 목욕법을 주로 사용해 명성을 얻은 그는 정신병을 연구했으며, 동물의 뇌절제술, 상기도가 폐색되었을 때 기관절개술을 했다...
테미손은 아스클레피아데스의 영향을 받아 방법학파를 창설했다... 방법학파 의사 가운데 서기 100년 무렵에 활약한 소라노스는 산과와 부인과 분야에서 유명했다. 그는 정신병을 다룬 훌륭한 책을 썼는데, 정신병을 증상에 따라 울증, 조증, 광기로 구분했고 히스테리나 건강염려증은 정신병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 기원전 100년 무렵에 활약한 알키게네스는 사지 절단수술과 혈관을 실로 묶는 결찰법으로 유명했다. 그는 질병의 증상을 초기 증상과 2차 증상으로 구분했으며, 당뇨병, 파상풍, 디프테리아, 한센병 등에 관해서도 기술했다.
로마의 의학서를 대표하는 켈수스의 백과사전 같은 저술은 알렉산드리아 의사들의 지식을 수집해 편집한 것이다. 외과, 백내장 수술, 피부과에 대해 잘 설명해 놓았다. 그 밖에 네로 황제의 군의로 약리학자인 디오스코리데스는 600종의 약초를 기록했다. 루푸스는 해부학과 맥박을 연구했고, 암과 페스트에 관해 자세하고 훌륭한 기록을 남겼다.
로마에는 의료보험제도와 의사회가 있었다. 또한 분야별로 전문의가 있었으며 공중보건의사 제도가 있었다...
갈렌
로마를 대표하는 의학자는 갈렌이다. 해부학자이며 생리학자인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을 이어받아 중세 이후까지 이어진 의학 체계를 확립했다...
갈렌은 서기 130년에 소아시아 서북쪽에 있는 페르가몬에서 수학자이며 건축가인 니콘의 아들로 태어났다. '갈렌'은 그리스어로 '조용하다'라는 뜻이다. 그는 고향에서 수학, 철학, 논리학 등을 배웠으며, 17세 때 페르가몬의 아스클레피우스 학파에서 의학을 배우고, 20세에는 스미르나로 가서 의사 펠로프스라에게 사사했다... 15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검투사를 담당하는 의사가 되었는데, 치료를 아주 잘해서 잇달아 3년이나 고용되었다... 마침내 갈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다.
갈렌은... 동물을 해부하고 연구하는 것에 뛰어났다. 그는 원숭이와 돼지를 해부해 뼈와 근육에 관한 지식이 많았다. 또한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의 차이점, 반회신경과 음성, 뇌의 연수와 호흡, 동맥과 혈액의 관계 따위를 실험을 해서 증명했고, 소변이 만들어지는 부위를 실험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 그는 <병든 부분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장애 기능과 그것에 관여하는 기관을 고찰함으로써 고체병리학의 기초를 이룩했다...
켈수스
아우렐리우스 코넬리우스 켈수스는 기원전 42년에서 서기 37년 사이에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켈수스는 당시의 농업, 수의학, 의학에 관한 지식을 모아서 라틴어로 기록했다... 부분적으로 자신의 경혐을 기록해놓기도 했다...
디오스코리데스
... 그는 로마군과 같이 여행하면서 채집할 수 있는 모든 식물들을 모아 책을 저술했다... 식물로 약제를 만들어 고칠 수 있는 질병들을 나열했다. 디오스코리데스가 쓴 이 책은 서양에서 만든 가장 훌륭한 약물학 책 가운데 하나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권위를 인정받으며 사용되었다.
중세의 수도원 의학, 아랍 의학, 스콜라 의학
... 1130년 클레르몽의 종교회의에서 수도사의 의료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수도원 의학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때부터 보통 사람도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아랍의학의 대표적인 의학자라고 할 수 있는 라제스는 종교와 의료를 구분하고, 환자의 증상과 경과를 관찰했고, 인간에게는 자연적 치유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스, 인도 의학을 기초로한 객관적 관찰과 개개의 병을 처방한 임상의학백과사전을 비롯해 <천연두와 홍역> 등 100여 편의 의학서적을 저술했다.
이슬람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이븐 시나(아비첸나)는 철학, 신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 학문 전반에 정통했다. 그는 12~17세기에 걸쳐 유럽의학의 기본서가 된 그리스-이슬람 의학을 집대성한 <캐논(의학규범)>을 비롯해, <치료> 등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일반적으로 아랍의학은 고전의 권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해부학을 혐오하고 외과를 경멸했다. 외과 치료에서는 갈렌의 생리적 화농설을 신봉했으며, 상처를 열로 지지는 소작법을 많이 사용했다.
성직자가 대부분이었던 중세의 의사들은 내과와 외과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1163년 투르 종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의사는 외과를 다룰 수 없었다. 그 뒤 외과는 이발사, 목욕탕 주인, 망나니 같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도맡아했다. 대학에서는 약 200년 동안 인체해부를 했지만, 교수는 갈렌이 쓴 책을 읽어주기만 하고 조수가 해부를 했다. 따라서 이 당시 해부학은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중세의 의학 교육 과정
아비첸나의 <캐논>은 의학 이론, 간단한 약물들, 특수한 병리 소견과 치료, 일반 질병, 약전 등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르네상스의 해부학
르네상스 의학의 중심이 된 것은 해부학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시체를 해부해서 알게 된 지식으로 그린 '위대한 혈관의 사람' 같은 우수한 해부도는 당시의 해부학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 파리 대학의 실비우스는 신경해부학과 폐결핵의 결절 등에 관해 연구했다. 현대 해부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유스타키안 관, 부신, 흉선, 눈의 외전신경 등을 기록한 유스타기우스, 베살리우스의 제자이며 여성 생식기, 귀의 반규관 등을 기록한 팔로피우스가 있다. 팔로피우스의 제자이자 윌리엄 하비의 스승으로 태생학을 연구했으며, 카나노가 최초로 발견한 정맥판에 관해서 기록한 파브리치우스 아브 아쿠아펜덴테가 있다. 또한 1200년 무렵에 이미 폐순환이 존재함을 발견한 카이로의 이븐 안 나피스가 있다. 그의 뒤를 이어 혈액의 폐순환을 주장한 스페인의 미카엘 세르베투스도 있다...
... 발레리우스 코르두스는 500여 종의 새로운 식물을 설명해 놓았는데, 최초의 현대적 약전을 저술했다. 이 시기에는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식물들이 많아 유럽 각지에 식물원이 생겨나기도 했다.
... 안토니오 베니비에니스는 최초로 22증례의 임상 관찰 결과와 부검 소견을 비교해 발표했다. 또 장 페르넬은 생리학, 병리학, 치료학을 3권으로 묶은 <의학일반>을 저술했고, 인플루엔자, 매독, 결핵 등에 관해 기술했다.
1546년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는 처음으로 전염병에 관한 과학적 가설을 주장했다...
파라켈수스는 갈렌의 체액설을 반박하고, 실험과 관찰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병인론과 약리학의 발전을 주도했다... 인체가 연금술의 두 원소인 수은과 유황 그리고 제 3의 원소인 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질병은 종자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했다.
한편 앙브로와즈 파레(Ambroise Pare, 1510-1590)는 총상을 치료할 때... 소작지혈법 대신 혈관 결찰법으로 치료했다... 그는 또 산과에 태아회전술을 다시 도입했고, 조산부들이 담당하던 산과를 의학의 한 분야로 외과에 포함시켰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
젊은 시절 해부를 하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훔치기도 한 베살리우스는... 1543년에 마침내 2년에 결쳐 완성한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De Humani Coporis Fabrica>를 출판했다...
파라켈수스(Paracelsus) =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투스(Philippus Aureols Thophrastus Bombastus von Hohenheim, 1493-1541)
1512년 당시 의학을 이끌고 있던 이탈리아의 페라라 대학에 입학한 파라켈수스는 레오니체노에게 배웠다...
파라켈수스는 모든 질병은 각기 다른 고유한 외부 원인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했다...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78-1553)
프라카스토로는 1530년에 출판된 세 권으로 된 시에서 당시에 돌고 있던 새로운 악성 유행병인 매독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필루스의 이름을 따서 'syphilis'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다른 업적으로는 '전염'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주장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현대적인 감염의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1546년의 한 저술에서... 유행병이 환자의 몸속에서 증식하는 작은 포자spores에 의해서 생긴다... 프라카스토르의 감염설은 파스퇴르가 세균이 감염성 질환의 원인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기까지 별로 지지받지 못한 이론이지만, 전염병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감염설은... 고체병리학적 질병관-병은 신체의 어느 특정부위에서 발생하여 존재한다-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실험생리학의 발전
17세기는 실험생리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윌리엄 하비는 혈액순환의 원리를 발견했다. 호흡생리학에서 로버트 보일은 동물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중의 어떤 특정 성분이 중요하다며 산소의 존재를 예측했다. 로버트 후크는 흉곽을 제거해도 공기만 공급되면 동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리처드 로우어는 혈색의 변화가 폐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존 메이요는 횡격막과 갈비뼈 사이의 근육이 호흡운동에 관여한다는 것을 밝혔다.
소화생리학에서는 파라켈수스의 제자인 반 헬몬트가 소화는 일련의 발효작용이라고 주장하며 위 속의 염산을 확인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혈액순환설
17세기에 이루어진 의학의 가장 큰 업적은 윌리엄 하비가 발견한 혈액순환의 원리다...
하비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체살피노는 '순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폐쇄순환체계를 생각해냈다... 최초로 동맥과 정맥을 연결해 조직 안으로 혈액이 새지 않도록 하는 모세혈관의 개념을 주장... 체살피노는 큰 동맥과 정맥이 직접 연결이 되어있으며, 심장에서 혈액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하비의 증명은 우선 동물의 사체 해부와 생체 해부에서 얻은 형태학상의 증거에 기초했다... 정맥판막과 심장판막의 존재, 그리고 갈레노스의 학설과는 달리 심실중격에 구멍이 있지 않다는 사실... 두 번째 증명은 정량적인 성격... 실험동물의 심장에서 박출되는 혈액량을 측정하여 많은 혈액이 몸속에서 계속 만들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함... 세 번째 증명은 유명한 결찰실험을 통해서... 정량적 실험과 당시의 해부학 지식을... 방법론...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하비는 캠브리지에서 공부한 뒤 당시 유명한 외과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파브리치우스에게 배웠다. 파브리치우스는 이 즈음 정맥판과 닭의 발생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하비가 혈액순환과 발생학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602년 파도바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하비는 영국으로 돌아와 혈액순환에 관한 실험을 계속했다... 1628년에야 발표했다... <동물의 발생>... 이 책에는 '모든 동물은 알에서 나온다'는 하비의 유명한 말이 나온다.
말피기
말피기는 해부학 연구에 현미경을 도입했다... 베살리우스가 직접 눈으로 보며 해부를 했지만 말피기는 현미경을 사용해 해부를 했다...
... 1661년에야 발표한 논문에서 폐의 모세혈관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하비가 혈액순환설을 완성하게 했다.
산토리우스
... 그는 1611년 파도바의 '이론의학'의 교수가 되었다. 주로 대사에 관련해 사람의 몸무게와 섭취 및 배설물의 무게를 측정하고 '눈에 안 보이는 배설'의 변화가 모든 질병의 과정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체온과 맥박을 측정하기 위해 유리관과 물을 이용한 체온계, 진자를 이용한 맥박계, 습도계, 복부 또는 방광 결석을 제거하는 트로카 따위를 고안했다.
... 1614년 그의 대표작인 <계량적 의학>을 출판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갔다.
시드넘(Sydenham)의 관찰의학
토머스 시드넘은 임상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 통풍을 비롯해 히스테리, 말라리아, 홍역, 이질, 성홍열, 소무도병에 관해 그가 설명한 임상 기술은 현대의학의 기준으로 보아도 뛰어나다.
그의 영향을 받은 베퍼는 뇌졸증을, 몰턴은 폐병을, 글리슨은 구루병을, 비생스와 란치시는 심장병을, 라마치니Ramazzini는 직업병을 관찰해 기술했다...
... 오늘날 시드넘을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해부병리학과 새로운 임상의학의 발전
모르가니
이탈리아에서는 신분에 상관없이 사후에 부검을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모르가니는 1761년 부검 소견을 머리에서 발끝의 순서로 분류하고 거기에 맞추어 증상을 기록한 <질병의 자리와 원인에 관하여>를 출판함으로써 근대적인 국소병리학을 확립했다.
제너
... 제너는 1798년에 <우두의 원인과 효과의 조사>를 출판해 종두법을 확립하고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
병원의학과 과학적 의학의 시작
제멜바이스
이그나츠 필립 제멜바이스는 헝가리 출신으로 가스코다와 로키탄스키의 제자였다. 그가 빈 병원 제1산과 병동의 조수가 된 1846년은 신 빈 학파가 전성기를 맞으려던 때였다. 당시 산욕열로 인한 산모의 사망률은 병동에 따라 매우 달랐다. 즉, 조산부들이 환자를 돌보는 제2병동은 3% 정도였는데 비해 의과대생들이 실습을 하는 제1병동은 10%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산과 증례를 진찰할 때에는 누구든 염화칼슘 용액으로 손을 씻도록 했고, 그 결과 제1병동의 사망률은 9.92%에서 3.8%로 그 다음해에는 1.27%로 감소했다.
독일의 실험실 의학과 현대의학의 태동
헨레
... 1841년에 출판한 <일반해부학>에서는 비샤(Marie F. Xavier Bichat, 1771-1802)의 학설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현미경적 해부학을 기술했다...
세균의 발견과 면역학적 치료법
파스퇴르
... 1870년부터 5년에 걸쳐 진행한 실험 끝에 누에에 유행하던 전염병의 병원균을 바로잡아 그 예방법을 개발했다. 1881년에는 양의 유행병인 비탈저의 백신을 개발했다.
파스퇴르는 예방접종을 백시네이션이라고 이름 붙였다. 말년에는 광견병의 예방접종을 시행해 면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그와 함께 일한 제자들 중에는 식세포의 기능을 밝힌 메치니코프, 디프테리아 항독소를 개발한 구, 페스트의 원인균을 밝힌 엘신 등이 있다.
코흐
로베르트 코흐는 1876년 비탈저균의 완전한 생활사를 밝혀내며 혜성같이 독일 의학계에 나타났다. 1877년에는 세균의 고정법과 염색법을, 1878년에는 외상에 합병되는 여섯 종류의 세균을 동정, 배양해 병리 소견과 같이 발표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1882년에 특수한 염색법을 도입해 결핵균을 발견하는데 성공했으며, 이 논문에서 유명한 6개항에 걸친 '코흐의 선결요건'을 주장했다.
1883년 이집트와 인도에 콜레라가 발생하자 콜레라 조사단의 단장으로 파견된 코흐는 비브리오 콜레라균과 그 전염경로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에서는 우연히 전염성 결막염의 원인균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마취법과 소독법에 따른 의학의 발전
리스터
... 파스퇴르의 '와인의 발효와 부패에 관한 논문'에서 암시를 얻은 리스터는 (1860년) 석탄산을 이용해 복합골절을 절단하지 않고 수술하는 데 성공했다... 리스터의 이 소독법은 곧 세계로 퍼져 나갔고, 몇 년 뒤 코흐가 상처 부위에 주로 감염되는 병균의 종류와 성상을 밝혀내자 더욱 확고하게 인정받았다.
[린지피츠 해리스, 수술의 탄생]
프롤로그 고통의 시대
1846년 12월 21일 오후,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 수술실에 군중 수백 명이 모였다. 그 한가운데에서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외과의가 허벅지 절단 수술 광경을 보여 줌으로써 군중을 매료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이날 저명한 외과의 로버트 리스턴은 환자에게 에테르의 효과를 시험하겠다고 선언했다. '신사 여러분, 오늘은 한 양키 신물질Yankee dodge을 시험해 볼까 합니다. 의식을 잃게 만드는 물질입니다!'... 에테르는 1275년에 발견되었지만, 마취 효과가 밝혀진 것은 1540년 독일의 식물학자이자 화학자인 발레리우스 코르두스가 에틸알코올에 황산을 첨가해 에테르를 제조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발견하면서였다. 코르두스의 동시대 인물인 파라셀수스는 닭에게 에테르를 실험했다...
1842년 크로퍼드 윌리엄슨 롱은 미국 조지아주 제퍼슨에서 한 환자의 목에 난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할 때 에테르를 사용함으로써, 역사상 그 물질을 전신 마취제로 쓴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불행히도 롱은 자신의 실험결과를 1848년에야 발표했다. 그보다 좀 더 이른 1846년에 보스턴의 치과의사 윌리엄T.G. 모턴이 환자의 이를 뺄 때 에테르를 사용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1846년 11월 18일 의사 헨리 제이컵 비글로는 <보스턴 내외과회지>에 이 이정표가 된 사례를 발표했다... 모턴은 수술 직후 그 기체의 조성에 특허를 신청했고 구체적인 성분은 비밀로 유지했다... 그러나 비글로는 '레테온'에서 에테르의 달콤한 냄새를 희미하게 맡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런던에 있던 미국 의사 프랜시스 부트는 비글로에게서 보스턴의 그 기념비적인 순간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받았다... 실험은 성공했고, 부트는 바로 그날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의 로버트 리스턴에게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했다.
리스턴의 에테르 실험에서 수술의 성공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마침 그 자리에 조지프 리스터라는 젊은이가 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장 렌즈를 통해서
어린 조지프 리스터는 까치발로 서서 아버지의 최신 복합 현미경의 접안렌즈에 운을 대고 있었다...
리스터는 1827년 4월 5일에 태어났다...
... 조지프 잭슨은 부친이 하는 포도주 사업의 공동 경영자가 되었지만, 정작 리스터가 어렸을 때 조지프 잭슨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광학분야에서 이룬 발견 덕분이었다...
... 당시 대부분의 렌즈는 상을 왜곡시켰다... 조지프 잭슨은 이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고, 1830년에 드디어 시야를 산만하게 하는 후광을 제거한 색지움 렌즈를 선보였다.
8장 모두 다 죽다
콜레라가 자연발생하고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는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버드만은 아니었다. 외과의 존 스노도 1854년 런던 소호의 자택 주변에서 콜레라가 대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 그는 그 감염병 지도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했다. 지역 당국은 몹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스노는 기어코 당국을 설득하여 브로드가 우물펌프의 손잡이를 떼어냈다. 그러자 콜레라 유행이 금방 수그러들었다.
파스퇴르의 결론은 대담했다. 효모가 생물이므로 비트 뿌리 즙에 작용한다는 말은 19세기 중반 주류 화학계의 정통 견해에 반했다...
... 그의 실험은 현대 생물학의 주춧돌 중 하나를 놓았다... 머지않아 이런 다양한 미생물들을 가리키는 '균germ'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페놀이라고도 하는 석탄산은 콜타르에서 얻는다. 1834년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크레오소트라는 덜 정제된 형태로 철도 침목과 배의 목재를 보존하는 소독제로 쓰였다. 영국의 외과에는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석탄산은 식품 보존제, 때로는 구충제, 때로는 탈취제 등으로 무차별적으로 쓰이곤 했다.
에필로그 어두컴컴한 커튼을 걷다
1892년 12월, 조지프 리스터는 루이 파스퇴르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리스터의 소독법 채택은 의료계가 균 이론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가장 눈에 띄는 표지였다. 또 의학과 과학이 융합한 기념비적인 순간을 가리키기도 했다...
... 늘 든든하게 지원하는 부친이자 능력있는 현미경 학자인 조지프 잭슨, UCL에서 에든버러로 가라고 격려한 윌리엄 샤피 교수, 평생에 걸친 스승이자 장인인 제임스 사임, 19세기 의학의 큰 수수께끼 중 하나를 푸는 데 필요한 열쇠를 제공한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의 눈을 통해서다.
[데이버드 C. 린드버그, 서양과학의 기원들]
40~/ 제1장 3.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형성된 과학의 기원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 에서는 외과의술이 다루어지고 있다(... 에버스 파피루스(기원전 1600년경에 작성된 것이지만 훨씬 이전의 텍스트들로부터 옮겨진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와 거의 동시대에 작성된 것이다)... 외과의술과 약물조제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의사들은 이집트 의사들에 필적하는 기술을 활용했다...
205~/ 제6장 3. 헬레니즘 시대의 해부학과 생리학
히포크라테스 계열의 의사들에게 인체해부학과 생리학에 관한 지식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것 같다...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체 해부가 시작된 것은 큰 의의를 가진 사건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후원과 깊이 관련된 혁신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혁신은 해부학 지식의 중요성을 고양시킨 의학 내부의 발전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그리스 의학이 새로운 사회/종교 환경에 이식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종류의 의문이 전면에 부각되어 새로운 연구방법을 자극하고 있던 철학적 상황 안에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칼케돈의 헤로필로스와 케오스의 에라시스트라토스가 인체의 체계적 해부에 최초로 착수했다... 로마의 백과사전 편찬자인 켈수스와 초대교회의 교부인 테툴리아누스의 증언을 신뢰한다면, 그들은 죄수들의 생체해부에 참여했다... 소아시아 칼케돈Chalcedon 출신의 헤로필로스(Herophilus, -BC 260 또는 250)는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기 전에 코스의 프락사고라스 밑에서 의학을 배웠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1~2대 국왕의 후원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작업을 계승한 인물은 그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에라시스트라토스(Erasistratus of Ceous, BC 304~ )였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케오스섬 출신으로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 학교와 코스(Cos)에서 의학을 연구했다.
212~/ 제6장 5. 갈레노스와 헬레니즘 시대 의학의 절정
... 그는 기원후 129년에 페르가몸(Pergamum)에서 태어났다. 소아시아와 헬레니즘 세계 전체를 통틀어 지적 중심지의 하나였던 그곳에서 그는 철학과 수학을 연구하다가 의학으로 전향했다... 마지막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을 연구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페르가몸으로 귀환하여 잠시 검투사들의 주치의로 활동했다... 로마에서 그는 부유층과 권력층의 친구가 되었으며, 그들의 의학적 수요에 부응했다. 그가 교분을 쌓은 인사 중에는 황제만 해도 세 명(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모두스, 그리고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죽은 것은 210년 이후였다...
갈레노스에 의하면 의학의 성공적 실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개별 기관의 구조와 기능을 아는 것이었다. 그는 해부학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시대에는 인체해부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독자에게 우연한 기회에라도 해부학적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촉구했다. 무덤을 이장할 때라든가 길가에서 사체를 발견할 때가 그런 기회였다. 해부학적 관찰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유해를 직접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체해부가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과 유사한) 동물해부로부터 유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갈레노스는 여러 종류의 동물을 해부했다. 여기에는 바리바르 원숭이macaque로 알려진 작은 원숭이가 포함된다. 그는 해부학 지침서인 <해부절차에 관하여>를 위시한 다수의 해부학 논고들을 집필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그가 얼마나 탁월한 기술을 갖춘 해부학자였는지를 알 수 있다. 뼈대, 근육, 신경조직, 눈, 정맥, 동맥, 심장 등에 대한 그의 묘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의 연구성과로부터 빌려온 내용도 적지 않았지만, 그는 두 선배가 오류를 범했다고 느낀 대목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교정했다... 그는 동물에게만 발견되는 해부학적 특징을 인체에 부여하는 실수를 범했는데,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레테 미라빌레'*이다...
*'레테 미라빌레'는 미세동맥들로 엮인 망으로 소나 말처럼 발굽이 있는 동물류(유제동물류) 사이에서 냉각기능을 수행하는 것인데, 갈레노스는 이 혈관망을 사람에게도 적용하는 오류를 범했다...
546/ 제13장 6. 해부학과 외과의학
중세의 주된 의료행위는 식이요법이나 약물요법처럼 평범한 형식에 치우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떤 질병이나 응급사태는 더욱 과감한 개입과 처치를 필요로 했다. 유럽에는 이처럼 육체를 외과적으로 처치할 자세를 갖춘 의사들이 상존했다... 12세기와 13세기에는 다수의 외과용 아랍어 의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렇다면 중세의 외과의나 내과의는 인체의 해부구조를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해부학 교육 및 직접적 해부학 실험에는 어떠한 위상을 부여했을까?...
... 12세기에 유통된 번역본은 해부학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자극했다. 갈레노스의 해부학 논고는 물론 갈레노스에 기초한 아랍 세계의 (아비케나, 할리 아바스, 라지즈, 아베로이즈 등의) 작품도 모두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이로써 서구세계는 그 일련의 해부학 문현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해부학 지식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2세기에 살레르노에서 생체해부의 형식으로 처음 표현되었다. 해부대상은 해부구조상 인체와 유사한 돼지였다.
인체해부는 13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 특히 볼로냐 대학에서 시작되었으며, 분명치는 않지만 합법적인 활동이었던 것 같다. 사인을 규명하는 법정 내 부검은 처음부터 허용되었으며, 그 이후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의학교육용 해부도 역시 가능해졌다. 그 결과로 1316년에는 볼로냐 대학 교수 몬디노 데이 루지(Mondino dei Luzzi, ~1326?)가 <해부학Anatiomia>이라는 해부지침서를 집필할 정도로 인체해부에 능숙한 수준에 도달했다. 이 작품은 이후 두 세기에 걸쳐 인체해부의 표준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14세기를 거치면서 해부는 파도바와 볼로냐를 위시한 몇몇 대학에서 의학교육의 정규과정으로 정착했다...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의학교의 필요에 맞추어 사형집행일이 조정되기도 했다. 해부가 자주 수행되지는 않았다. 일 년 일 회의 해부가 가장 흔한 관행이었을 것이다. 의학도는 실험자이기보다 관찰자에 가까웠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부는 갈레노스의 원문을 확인하고 예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바, 실험연구가 아닌 교육의 일환으로 해부가 수행되었다는 뜻이다.
비록 해부는 의학교육과정에서 부차적 중요성밖에 없었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해부학 전통은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큰 진전을 이룩했다... 이를테면 해부학은 15세기에 인쇄술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16세기에는... 갈레노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새로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요인이 결합해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로 대변되는 해부학의 경이로운 업적을 낳았다.
[리처드 해리슨 슈라이옥, 근세서양의학사]
I. 의학 정립을 위한 최초의 시도 1600-1700
... 의학의 분야에서는 무균적 처치술이나 마취제 사용에 관한 약간의 지식을 가졌던 13세기의 유능한 의사들에 의해 괄목할 만한 성과가 얻어졌던 것 같다...
... 베살리우스Vesalius*는 공손하게 갈렌Galen의 권위에 의문을 표시하였고,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의학의 모든 스콜라적 전통을 공격하였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또 한 사람의 의사였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는 고대의 우주관을 허물고 있었다. 물리학과 생물과학은 실험과, 망원경이나 현미경 같은 기구의 발명에 의해 관찰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는 희망에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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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한편으로는 기독교적 전통에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적 해부학서에 따라서 해부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관찰하는 해부학자였다.
... 어쨌든 스콜라 철학에 반기를 든 17세기의 과학자들은 특히 그 정성적인 전승에 반발하여 스스로 관찰한 사물들을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중세 말기에 유럽에 전파된 근본적으로 새로운 수학-특히 아라비아 숫자의 도입 및 산술과 대수학의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의 도움을 받았다.
이미 1600년 이전에 공간적 요소와 병행하여 시간의 측정이 시작되었던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후기 르네상스 과학계의 지도자들이 시간을 공간에 관련된 변수로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 형태뿐 아니라 운동까지 측정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생명과 활력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당시의 미술은 그렇게 해서 변용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수학자은 이제 관찰하고, 실험하고, 운동의 법칙을 유추해내었고-낙하물체와 진자를 들고 있는 갈릴레이Galilei의 고전적인 모습이 언제나 떠오르지만-기하학과 정지역학 위에 더해진 운동역학은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고 있었다.
... 케플러Kepler와 갈릴레이는 역학과 천문학조차 부분적으로는 정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속에 수학적 원칙을 남겨두었는데,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뉴턴Newton은 지상의 운동역학을 천상에 투영하여 천문학의 일관성을 확립하였고, 그로 인한 감명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과학의 전 분야에 걸쳐 동일한 시도를 하도록 자극하였다...
... 공기펌프의 발명자 오토 폰 괴리케Otto von Guericke는 1654년 마그데부르그의 군중들 앞에서 기적과 같은 일을 실연해 보였다. 다수의 고위층 인물들의 놀란 눈들은 속이 진공인 두 금속반구를 반대 방향으로 분리하기 위해 12필이 넘는 말들이 헛된 힘을 쓰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 런던교의 상수도 공사... 양수용 기계였는데... 이 공사는 1582년 독일인 기술자 모리스Maurice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성 마그누스 교회의 첨탑너머로 물줄기를 댈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 뉴턴이 프린키피아(1687)를 발표하기 20여년 전에 워체스터Worcester 후작 에드워드 소머셋Edward Somerset은 런던에 40피트(약 12미터) 높이까지 양수할 수 있는 증기기관을 설치하였다. 또 1698년 토머스 세이버리Thomas Savary는 영국의 광산에서도 실제로 물을 퍼내고 있는 증기기관에 관한 특허를 얻었다. 한 번 이 단계에 도달한 기계물리학은 단지 지적 감명을 주는 것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을 했던 것이었다!
... 데카르트Decartes는 동물의 신체를 기계로서 파악하려는 최초의 기초적 시도를 하였고 그 작용을 수학자들이 행성들에 관해 설명하듯이 계통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 16세기 이탈리아 해부학자들의 연구가 형태에 관한 관심에서 기능에 관한 관심으로 바뀌어 간 것은 논리적 진행과정이다. 해부학은 생물과학에 필요한 기하학-정적 관련을 가진 문제-이었으나 기계학적 개념을 촉매로 하여 생리학의 형태로 부활하였다. 혈액순환을 추급하는 과정의 문제들은 마치 행성의 공전운동을 기록하는 문제들처럼 시간적, 공간적 운동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한 분야의 성공은 다른 분야의 성공 못지 않게 위대한 것이었다. 하비Harvey가 갈릴레이를 잇고, 실험 생리학에 전념하는 의물리학파가 탄생한 것은 역사상의 우연이 아니다.
... 하비가 혈액의 순환을 증명하자 렌Wren을 비롯한 사람들은 동물에서 동물에로의, 나아가 인간끼리의 수혈을 시도하였다. 보일Boyle의 각종 실험기록이나, 레벤후크Leeuwenhoek의 놀랄 만한 관찰기록에서 이들 과학의 선구자들의 뛰어난 활력과 재능을 느낄 수 있다. 한 사람의 독창적인 렌즈 연마사가 거의 혼자의 힘으로 근대적 기생충학과 미생물학의 기초를 결정적으로 확립하였던 것이다.
한편에서는 물리학적 연구뿐 아니라 화학적 연구도 의학 속에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화학적 치료법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파라켈수스Paracelsus가 과학은 연금술보다 약제술로 전향해야 한다고 선언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위대한 영국의 임상의 토머스 시드남Thomas Sydenham은 그의 객관적 관찰을 질병의 기술과 치료 두 가지 모두에 적용하였다.... 그는 어떤 처치가 실제로 가장 효과적인가를 자문하였다... 천연두 환자들은 더 이상 병 그 자체로 인한 고통에 더하여 밀폐된 방에서 반쯤 질식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질병의 자연 경과에 관한 시드남의 연구였다. 고대와 중세의 의학은 서로 다른 질병을 구분하는 것보다 환자의 각종 증상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경험에서 누구라도 명확히 알 수 있는 한센병이나 천연두와 같은 특정 질병이 인식되었고, 16세기와 17세기 초에는 그 외에도 상당수의 질병이 확인되었지만-프라카스토로Fracastoro의 매독에 관한 업적이 그 실례이다-1650년대에 와서도 의사들은 환자가 앓고 있는 특정한 질병의 실체보다 환자의 체액에 관해서 논하고 있었다.
시드남은 갈렌의 체액병리설을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특정한 질병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드남은 홍역, 이질, 매독, 특히 통풍-자신을 관찰하면 되는 고통스러운 장점이 있었다-에 관한 우수한 기술을 남겼다... 다른 의사들도 그를 본받아 폐결핵, 뇌졸증, 구루병 등과 같은 여러 다른 질병들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탈리아의 라마치니Ramazzini는 당시에 이미 직업병에 관한 기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의학에 위대한 발전이 있을 것임을 깨달은 당시의 사상가는 로크(John Locke)뿐이 아니었다. 경험철학자들만이 이 분야에 흥미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철학적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는 위생학과 치료법에서의 새로운 가능성이 인류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II. 의학의 부분적 실패 1700-1800
... 17세기 초의 일부 가장 우수한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오래된 스콜라적 정신이 약간씩 살아남아 있었다... 하비마저도... 심장 운동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 내재열Innate Heat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혈액의 정精또는 영靈이라고 여겨지던 개념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혈액의 정은 별들의 정수와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세의 실재론이 정말로 많이 살아남아 있었다...
... 낡은 치료법이나 치료제가... 존속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배출법-방혈, 하제의 사용, 발포Blistering법-이 18세기에 이르러서도 실질적으로는 개선되지 않은, 놀랍도록 수많은 종류의 약제들과 같이 성행하였다...
... '췌장에 도관이 있는 것을 알아도' 결국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의학이 길게 보면 필연적으로 임상의료에 도움이 된다는 쉬운 이치가 당시에는 명확한 사실이 아니었다...
... 기계론적 철학... 그것의 가장 완전한 의학적 형식은 프리드리히 호프만(Friedrich Hoffmann, 1660-1743)의 학설인데, 그는 인체를 기본적으로 근육과 신경의 협동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라고 보았다...
... 산토리오Santorio가 '불감증발Insensible Perspiration'을 측정하고 갈릴레이가 맥박과 체온을 측정한지 대략 두 세대가 지나서 레벤후크는 스스로 렌즈를 개선하고 원충과 세균을 발견하였다...
... 의사들은 동식물의 종을 분류하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모든 증상·질병을 분류하려 했다. 그들의 질병기술학이 1,800종류가 넘는 '아마도 다른 것 같은' 병들을 기록하자, 좋은 의도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불행히도 1760년 이전의 병리학 지식은 이 필요성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그 시대 이후에도 충분하고도 적절한 병리학 지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체계화를 시도한 학자들은 해부학과 생리학-여기에 새로운 자료의 대부분이 축적되어 있었다-이 제공하는 단서를 이용하여, 그리고 실제 정보가 빠져있는 부분은 이론으로 보충하여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화학의 발전은... 영향을 끼쳤다... 산소와 질소가 분리되자... 또 갈바니Galvani의 실험과 같은 뛰어난 공헌이 나타나면... 이 전류라는 개념은... '퍼키니즘(Perkinism)'과 '메스커리즘(Mesmerism)'... 이처럼 객관적 과학이 한 발 전진할 때마다 또 다른 의학의 체계들이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단순히 낡은 학설들을 새로운 사실들의 견지에서 다시 쓴 것에 불과하였다.
... 러시는 모든 질병은 혈관의 과도한 긴장의 형태라고 생각하였고, 브루세는 후일 모든 것을 위장염으로 설명하였으며, 하네만Hahnemann은 결국 거의 모든 병리를 건선 또는 개선(옴)이라는 최대공약수로 간소화하였다...
III. 1700년 이후 의학 발전을 지연시킨 사회적 요인들
의학적 재료들은 원래 취급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임상 또는 병리학적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으기 힘든 것들이었다... 1750년경 이전에는 소수의 국립기관들을 제외하면, 남들의 관찰을 전해 주는 전문 학회는 물론 잡지도 없었다...
... 근대적 병원은 16세기 중엽의 파두아에서 발상하였고 연구와 교육을 위한 병원의 가치에 대한 인식은 여기서 라이덴으로, 최종적으로는 비엔나, 에딘브러 및 다른 의학의 중심지들에로 전파되었다...
이 '병원운동'은 대도시의 현상이었다... 병원의 확충은 특히 거대도시-런던, 파리, 비엔나가 가장 훌륭한 예다-에서 현저하였다...
VII. 의학과 기초과학
... 광학분야에서는... 오일러(Euler, 1707-1783)는 호이겐스Huygens의 파동설을 지지하고 색깔의 차이를 파장의 길이로 설명하였다. 오일러는 '눈의 서로 다른 매질들이 색의 분산을 방해하는 특성을 가졌으며, 색수차를 없애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다른 물질로 렌즈를 만들 것'을 암시하였다. 이것이 웁살라에서 색수차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던 클링겐슈티르나Klingenstierna의 흥미를 끌었고, 그는 런던의 광학기계상 존 돌론드John Dollond가 끝내 색수차가 없는 망원경용 대물 렌즈의 제작에 성공(1758)하도록 협력하였다.
... 더욱 강력한 망원경이 만들어지고 우주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윌리엄 허셸William Herschell의 연구가 가능해진 뒤에야 색수차 없는 현미경이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곧 미소한 세계를 다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이 근대적 형태의 현미경이 '발명'된 정확한 날짜를 정할 수는 없지만, 이 새로운 기계는 1830년에서 1840년 사이에 널리 쓰일 수 있게 되었다. 빛과 렌즈에 관한 연구의 결과로 최초의 사진(1827)이 가능해진 것도 이 시기였다...
... 일찍이 1659년에 부료Boullian가 갈릴레이의 공기온도계를 유리관 속에 공기 대신 수은을 넣어 개량했었지만, 이 기구의 본격적인 개선은 170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단찌히 출신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Gabriel D. Fahrenheit, 1686-1736)는 최초로 수은온도계를 일상생활에 사용했다. 같은 시기에 그와, 레오뮤르Raumur, 셀시우스Celsius는 실험에 서로 다른 온도 측정용 눈금 단위를 사용했다. 1740년에는 13개나 되는 눈금단위가 사용되었었으나 위에서 이름을 언급한 3개만 오늘까지 남아 쓰이고 있다...
믿을 만한 온도계를 사용한 에딘브러의 블랙Black은 18세기 후반 물이 녹고 끓는 것과 관련하여 '잠열'의 개념을 주장하였고, 특정한 물질의 '비열'을 측정할 수 있었다. 그의 연구는 한편으로는 와트Watt에 의한 증기기관의 실용적 개량, 다른 한편으로는 럼포드 백작에 의한 분자운동학설의 부활로 진전되었다...
... 18세기말 갈바니Galvani와 볼타Volta라는 두 명의 뛰어난 이탈리아인의 노력에 의한, 전류에 관한 초기 연구였다. 갈바니는 볼로냐의 해부학 교수였는데, 개구리 다리의 근육과 신경으로 실험을 하던 중 '동물자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고국에 돌아온 리비히Justus Liebig는... 유기화합물을 분석하기 위한 개량된 기술을 개발하고, 뵐러와 협력하여 대사,호흡, 발효 및 동물의 체온에 관한 화학적 연구를 진행하였다.
... 뷜러Friedrich Woehler는 1828년에 동물 생체를 통하지 않고 화학적 방법으로 요소尿素를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의 군의 윌리엄 버몬트William Beaumot는 1833년에-위벽에 영구히 뚫린 구멍을 가진 증례 덕분에 가능했던-위에서의 소화가 정말로 화학적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주목할 만한 관찰을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