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피렌느
앙리 피렌느/강일휴 옮김, <중세유럽의 도시>, 신서원, 1997.
제 1 장 8세기 말까지의 지중해상업
... 로마제국의 존속은 지중해장악에 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4세기에 내륙에 위치한 수도였던 로마 대신에 훌륭한 무역항이기도 했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수도로 채택되었다.
3세기 말을 기점으로 로마문명은 확연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감소했고 기업정신이 쇠퇴하였다...
... 콘스탄티노플/ 에데사Edessa(오늘날 터키의 Urfa)/ 안티오크Antioch(오늘날 남부터키의 앙카라)/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직물이, 시리아에서 포도주와 올리브유 및 향료가,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가,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에서는 밀이, 갈리아와 이탈리아로부터는 포도주가 운송되었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 솔리두스 금화(solidus d'or)를 근간으로 하는 화폐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 4세기 이후가 되면 제국의 동부에만 진정한 대도시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수출산업, 특히 직물산업이 집중되어 있는 곳도 시리아와 소아시아 등 제국의 동부였다... 시리아인의 활발한 상업활동은 사회의 점진적 동방화-결국은 비잔틴화로 귀착되는-에 크게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 로마인들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들의 바다mare nostrum'라고 불렀던... 모든 게르만족이 한결같이 지중해를 향해 이동했으며, 서둘러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정주하고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려고 하였다... 프랑크족이 너무 늦게 이동하여... 클로비스Clovis는 프로방스Provence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처음부터 품고 있었다... 그의 계승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4반세기 후인 536년에 프랑크족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동고트족에 대한 공격을 잘 이용하였으며, 곤경에 처한 라이벌 동고트족으로부터 그렇게 갈망하던 영토를 양도받을 수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가 그 이후 계속해서... 킬데베르트Childebert와 클로타르Clotaire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542년 피레네산맥을 건너 원정을 감행했다... 이미 539년에 테우데베르트Theudebert가 알프스를 건넌 적이 있었으며, 그가 점령한 영토는 553년에 나르세스Narses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게르만족이 파괴하거나 새로 도입한 것보다 그들이 보존한 것이 훨씬 더 많았다...
... 그곳에서 로마제국의 문명은 제국정부가 무너진 뒤에도 살아남았다. 정복자인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교회와 언어, 그리고 우수한 제도와 법률을 받아들였다...
로마제국의 특징인 지중해적 성격이 8세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잘 입증해준다...
... 마지막 학교를 유지하였고 동시에 수도원제도를 알프스 이북으로 전파한 것도 바로 이탈리아였다. 그리고 고대문화에서 살아남은 것과 교회의 내부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서로 만났던 곳도 바로 이탈리아였다...
... 게르만족의 침입이 도시생활과 상업활동을 위축시켜 순수한 농업경제와 교류의 전반적 쇠퇴를 초래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심지어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유역에 있는 도시를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이런 도시는 로마도시가 세워졌던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명도 흔히 로마시대의 도시명이 약간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교회는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을 본떠서 종교구역을 설정하였다. 일반적으로 한 교구는 한 키비타스civitas(로마제국에서 통치단위의 도시로서, 도시자체만이 아니라 인접영토도 포함한다.)에 해당되었다... 교회조직은 그 도시적 성격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따라서 6세기초부터 키비타스라는 단어는 '주교도시' '교구중심지'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교회는 로마제국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제국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따라서 교회는 로마도시의 존속에 크게 기여하였다.
... 이탈리아에서만이 아니라 스페인, 심지어는 갈리아에서도 도시들은 시 참사회decuriones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도시수호자Defensor civitas'가 존재하였던 점과 공증된 증서를 '도시기록부Gesta Municipalia'에 기록하는 관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투르의 그레고리우스Gregoire de Tour(투르의 주교로서 6세기 후반에 프랑크 역사를 기술)의 저서를 숙독해보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갈리아에는 도시에 거주하는 전문적인 상인계층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내륙교역circulation interieure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간접적 증거는 '통행세teloneum(상품의 유통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통상 '시장세'로 번역됨)'의 제도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프랑크 국왕들의 화폐제도만으로도 이런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각 화폐의 중량도 로마의 그것과 같았다. 마지막으로 화폐에 새겨진 초상들도 로마의 것과 동일했다. 메로빙거 시대에 조폐소들은 화폐에 로마황제의 흉상을 새겨놓고 그 반대쪽 면에는 아우구스투스의 개선상Victoria Augusti을 새겨넣는 관행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그리고 조폐소들은 이러한 모방을 아주 오랫동안 유지하여, 비잔틴 사람들은 그 개선상을 십자가로 바꾸었을 때도 여전히 개선상을 새겨넣는 관행을 고수하였다.
마르세유는 8세기초까지도 여전히 갈리아에서 가장 큰 무역항이었다... 파피루스/ 향료/ 고급직물/ 포도주/ 올리브유 등 동방의 생산품이 주요 수입품이었다...
... 북해연안에 있는 캉토빅Quentovic(파드칼레道에 있는 Etaple 근처에 위치)과 두루슈테데Duurstede(라인강 하류에 위치)는 물론이고 대서양면에 있는 루앙과 낭트 등 항구도시의 상업활동도 멀리 떨어져 있는 마르세유의 영향으로 유지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생드니Saint-Denis 정기시장(보통 연 1회 정해진 기간에 개최되었으며 그 기간은 3일에서 6주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7세기에는 파리 근교의 생드니에 정기시장이 개설된 적이 있다. 그러나 중세의 대부분 정기시장은 11-12세기에 상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것이다... 상파뉴정기시장은 12-13세기에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정기시장이 되었다. 상파뉴정기시장은 4개소[Lagny-sur-Marne/ Bar/ Provins/ Troyes]에서 연 6회[프로뱅Provins와 트루아Troyes에서는 연 2회] 개최되었으며, 5회는 6주간, 그리고 1회[Bar의 경우]는 2주간 계속되어 그것이 중복되지 않음으로써 이 지방에서는 1년의 대부분을 통해 정기시장이 개설되었다.)은 12-13세기의 상파뉴 정기시장처럼, 루앙과 캉토빅을 거쳐온 앵글로색슨 상인들을 롬바르디아/ 스페인/ 프로방스에서 온 상인들과 접촉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그들 앵글로색슨 상인들이 지중해상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 도시의 성 안에 유태인과 시리아인들의 진정한 거류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메로빙거 시대에 리옹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동방상인들은... 마르세유의 부두에 화물을 하역한 뒤... 귀환하면서 승객은 물론이고 회송화물fret de retour도 실었음이 분명하다... 가장 타당한 추측은... 상당부분은 인간상품, 즉 노예였으리라는 것이다.
프랑크왕국에 노예매매는 9세기말까지도 계속되었다. 작센/ 튀링겐/ 슬라브족 거주지역의 만족들과의 전쟁으로 많은 노예가 공급될 수 있었던 것 같다...
... 7세기 초에 미래를 예견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그러한 전통이 지속되리라고 예측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당연하고도 합리적으로 예측되었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게르만족의 침입을 이겨냈던 세계질서가 이슬람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그들의 거침없는 진군은 8세기 초가 되어서야 멈추었다... 한편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713), 다른 한편으로는 카를 마르텔의 병사들이(732) 기독교 세계의 양 측면을 포위하여 공격하던 그 막강한 이슬람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 이슬람이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지중해 공동체도 파괴되어 버렸다. 한때 모든 지역들을 통합시켜 주었고 거의 집안식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던 지중해는 곧 각 지역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버렸다... 과거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였으나 이제 지중해는 대부분 모슬렘의 호수가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지중해는 유럽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기보다는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동부의 비잔틴제국과 서부의 게르만족 왕국들을 연결시켜주던 유대는 이제 단절되고 말았다.
제 2 장 9세기 상업의 쇠퇴
이슬람교도의 서유럽 침공이 끼친 거대한 영향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 이슬람 침공으로 서유럽에는 역사상 전례없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인을 통하여, 서유럽은 언제나 동방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서유럽은 처음으로 자력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당시까지 지중해 연안에 놓여있던 무게중심이 북쪽으로 옮겨졌으며, 그 결과... 프랑크왕국이 서유럽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도에 의한 지중해의 폐쇄와 카롤링거조 국왕들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이 동시에 나타났음은 분명히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넓은 시각으로 고찰해보면 두 사건 사이에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머지 않아 프랑크제국은 중세유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명이 완수되려면 필수조건으로서 전통질서가 먼저 무너져야 했다... 마호메트가 없었더라면 샤를마뉴라는 존재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중해가 이전의 역사적 중요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메로빙거 시대와 지중해의 영향력이 사라졌던 카롤링거시대가 서로 대조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관점에서 검토하더라도 9세기 문명은 이전 시대 문명과의 아주 뚜렷한 단절을 보여준다. 피핀 단구왕Pepin le Bref의 쿠데타는 한 왕조에서 다른 왕조로의 교체 이상의 것이었다.
... 샤를마뉴가 로마황제 및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비잔틴제국의 황제에 맞섬으로써 고대의 전통을 파괴하였다. 비잔틴황제(Basileus)의 영역으로 축소된 옛 로마제국은 이제 동방의 제국이 되었고, 서유럽의 새롭고 이질적인 제국과 병존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이 새로운 제국은 그 명칭은 로마제국이었지만... 이 제국에 봉사했던 세력은 북방지역의 세력이었다... 이제 지중해로부터 단절되어 버린 국가에서 지중해지역의 사람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중해를 포기해야만 했던 프랑크제국이 북유럽으로 팽창하여 엘베강과 보헤미아의 산악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한 그 순간부터 게르만족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 메로빙거 시대에 갈리아는 여전히 해양국가였고... 이와는 반대로 샤를마뉴의 제국은 본질적으로 내륙국가였다...
... 시리아는 634-36년에 이슬람교도에 정복당함으로써 더 이상 선박과 상품을 마르세유로 보낼 수 없었다. 바로 그 직후 이번에는 이집트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갔고(640), 그리하여 파피루스가 더 이상 갈리아로 수출되지 못하게 되었다... 왕실 상서국은 677년부터 파피루스 사용을 중지하였다.
... 프랑크제국이 이슬람교도나 노르만인에 맞서 해안방어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프랑크제국이 근본적으로 내륙적 성격을 띠었음을 잘 보여준다...
9세기 초에 어느 정도 상업활동이 지속되고 있던 곳은 북부 갈리아뿐이었다... 프리슬란트인들(Frisoans)이 행한 해상운송은 샤를마뉴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시기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플랑드르 농민들이 짰고 당시 사료들이 '프리슬란트의 외투pallia fresonica'라고 기록하고 있는 직물들과 독일의 라인강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당시 아주 정규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수출무역의 주요 품목이었다. 더구나 두루슈테데에서 주조된 데나리우스 은화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소금은 광범위한 교역의 주요 품목이었기 때문에 아일랜드 선박들도 드나들었던 느아르무티에르섬Noir-moutiers(루아르강 하구의 남쪽에 있는 섬)에서 생산된 소금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잘츠부르크에서 생산된 소금은 다뉴브강과 그 지류를 따라 제국의 내지에 운송되었다. 노예부역은 국왕들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동부 국경지역을 따라 행해졌다...
특히 유태인들이 이런 노예무역에 종사했던 것 같다... 남부 갈리아에 있는 유태인들은 스페인의 이슬람 점령지역에 있는 유태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향료와 고급 직물을 스페인, 그리고 아마도 베니스에서 구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유태인들 상당수는 자신들의 자식들이 세례받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일찍부터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9세기에 유태인들의 상업적인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13세기에 피렌체의 플로린화와 베니스의 두카도화 등 금화가 다시 출현한 것이 유럽의 경제부활을 특징짓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또 인정해야 한다면, 반대로 9세기에 금화 주조가 중단된 것은 경제의 심각한 쇠퇴를 나타내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갈리아에서 금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금화주조를 포기했던 것이다.
... 데나리우스화의 실제 가치가 아주 적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카롤링거제국의 경제적 고립을 증명해준다. 카롤링거 제국과 솔리두스 금화가 여전히 유통되고 있던 지중해 연안 지역 사이에 최소한의 교류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화폐단위를 예전의 가치에 비해 30분의 1로 줄이지 않았을 것이다.
... 화페주조권은 끊임없이 분산되었다. 이러한 사실도 경제쇠퇴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는 상업교류가 활발할수록 화폐제도가 통일되고 단순화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 불행히도 교류와 상업에서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이룩한 모든 위대한 업적은 군사력에 의해서, 아니면 교회와의 제휴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다...
프랑크제국의 재정기구는... 사실상 아주 초보적인 것이었다. 메로빙거조 국왕들이 로마를 본떠 존속시켰던 인두세impot public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의 재원은 왕령지로부터의 수입과 피정복민들로부터 징수하는 조공 및 전리품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통행세는 더 이상 국왕의 재정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는데, 이 사실도 당시 상업의 쇠퇴를 말해주고 있다. 통행세는 그것을 징수한 관리들이 착복해 버렸다.
... 국가는 관리들에게 봉급을 지불할 수 없었고 따라서 관리들에게 국가의 권위를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적 지위 덕택에 무보수로 봉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류인 귀족들을 관리로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귀족 가운데서 관리를 선발한 것이야말로 프랑크제국의 본질적인 결함이었으며... 제국해체의 근본원인이었다... 국왕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관리들의 충성에 의존하는 국가만큼 허약한 것도 없다. 봉건제는 이러한 모순된 상황에서 등장하였다...
... 이미 고대 말기에 '원로원 의원senatores'이라는 명칭을 가진 귀족들이 서유럽 도처에서 대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점차 소규모 토지는 사라져서 세습적인 농민보유지tenure herditaires로 바뀌었다.
한편 옛 자유농들도 세습적으로 토지에 결박되는 콜로누스colon(본래 '경작자'를 의미한다. 4세기경에 이르러 토지에 결박되었다. 이들은 법적으로 인신적 자유가 인정되지만 이동의 자유가 없었고, 그 신분도 세습되었다.)로 바뀌었다...
... 게르만족은 기존의 영지편성을 다른 영지편성으로 바꿀 동기도 없었고 바꿀 능력도 없었다. 그 영지편성은 기본적으로 모든 토지를 두 부류로 나누어 각각 다른 형태로 경작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 두 부류의 영지 가운데 면적이 작은 것은 토지소유자에 의하여 직접 경영되었다. 다른 하나는 농민보유지tenures로서 농민들에게 분할되었다.
이처럼 한 영지를 구성하는 장원villas 각각은 영주직영지terra dominicata와 공조貢租부과 토지terre censale로 구성되어 있었고, 망스mansus라는 경작단위로 나뉘어졌다...
교환경제에서 소비경제로 대체되었다... 9세기는 이른바 '폐쇄적 가내경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장없는 경제'의 황금시대였다.
남부 러시아는 사실상 두 선진문명권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카스피해 건너 동쪽으로는 바그다드의 칼리프 교주국이 펼쳐 있었고 남쪽으로는 흑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쉽게 항해할 수 있었다... 루스족은 문명화된 사람들에게만큼이나 미개한 사람들에게도 본능적이게 마련인 영리욕의 충동에 따라 그길로 돌진하였다...
루스족은 설탕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상품이었던 꿀, 그리고... 모피 등을 그 광대한 삼림지대에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스족은 아주 쉽게 노예들을 포획할 수 있었다... 따라서 9세기에 프랑크제국은 지중해가 폐쇄된 이후 고립되어 있었지만, 반대로 남부 러시아는 이 지역에 영향을 발휘하던 2개의 대시장에서 그들의 상품을 판매하였다.
'황제들의 도시Tsarograd'는 수세기 동안 러시아인들에게 매혹적인 곳이 되었다. 그들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다(957-1015)...
... 루스족의 예는 한 사회가 상업에 종사하기 전에 반드시 농업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는 상업이 본래적 현상이었다.
... 그러한 상업활동은 피체네그족Petchenegues(투르크족의 일파)이 11세기에 야기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카스피해와 흑해의 연안을 따라 행해진 피체네그족의 침입은 이슬람의 지중해침입이 8세기에 서유럽에 초래했던 것과 동일한 결과를 야기했다.*
*여기서는 '발트해-흑해' 교역로의 쇠퇴를 피체네그족의 침입으로 지적하고 있으나, 다른 논거도 있다.
황성우, '발트해-흑해 무역로'와 키예프 루시의 태동, <동유럽연구> 22, 2009.4.16.에 따르면,
'발트해-흑해' 교역로가 쇠퇴한 이유는 12세기와 13세기 초반 바이킹들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플 경제권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베네치아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자, 콘스탄티노플은 더 이상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 기능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발트해-흑해'교역로는 더 이상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국제 무역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단지 국지적 교역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 피체네그족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된 러시아남부지역들은 그 중요성에서 북부지역에 뒤떨어지게 되었다. 마르세유의 경우처럼 키예프는 쇠퇴하였으며, 카롤링거조와 더불어 프랑크국가의 중심지가 라인강 유역으로 옮겨갔듯이 러시아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옯겨갔다.
... 갈리아에서처럼 러시아에서도 토지귀족들이 등장하고 장원제가 조직되었다... 러시아는 카롤링거 제국이 단지 장원제만을 알고 있을 때 상업에 의해 생활하였으며, 그리고 서유럽이 새로운 시장들을 발견하여 장원제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 장원제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제 3 장 키비타스와 부르구스
... 카롤링거시대 '도시들'은 중세와 근대의 도시들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기본적 속성인 중산적 시민population bourgeoisis과 자치조직organization municipale이 없었다.
아무리 원시적인 사회라고 하더라도 모든 안정된 사회는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집회의 중심지나 만남의 장소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었다. 종교의식의 거행, 시장의 유지, 그리고 정치적/ 사법적 집회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정한 장소가 정해졌고, 이곳에 관련된 사람들이 집결했다.
일정한 장소를 정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이 군사적인 필요이다... 요새지의 축조도 전쟁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오늘날 영어의 town과 러시아어 gorod처럼 도시를 의미하는 단어들은 원래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장소'를 의미하였다.
샤를마뉴제국이 무너졌지만 주교의 지위는 하등의 침해를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확고해졌다. 왕권을 파괴했던 봉건제후들이 교권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교회의 신성神性 때문에 봉건제후들은 교회를 감히 공격할 수 없었다... 9-10세기의 무정부상태에서도... 주교들은 그들의 관할구 내에서 '신의 평화paix de Dieu(989년 Charroux 종교회의에서 결정... 여성/ 상인/ 농민/ 성직자 등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그 이후 1027년 툴루즈 종교회의에서... '신의 휴전'이 결정... 주요 축제일 및 수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전투를 금하는 것이다.)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카롤링거조 군주들의 궁전들이 키비타스에 소재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은 아주 특징적이며 시사적이다. 그들의 궁전은 예외없이 그들의 영지가 있는 농촌에 소재하고 있었다 : 뫼즈강 유역에 있는 Herstal과 Jupille, 라인강 유역에 있는 Ingelheim, 센강 유역에 있는 Attigny와 Quiercy 등. 엑스라샤펠(아헨)의 명성 때문에 그곳의 성격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국가의 행정은 키비타스의 지속에 전혀 기여할 수 없었다. 프랑크제국 자체가 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프랑크제국의 행정구역인 백령伯領comtes에도 수읍首邑chef-lieu이 없었다. 백伯comte들은 일정지역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판을 주재하고 세금을 징수하고 군인을 징집하기 위하여 그들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을 항상 순회하였다... 그들의 성은 황제들의 궁전과 마찬가지로 관례적으로 농촌에 있었다.
간단히 말해, 빈곤해지고 인구가 감소하는 등 카롤링거 시대 키비타스들에서 발생한 현상들은 4세기에 '영원한 도시'인 로마가 더 이상 세계의 수도가 아니었을 때... 일어난 현상들과 아주 유사하였다. 로마황제들은 로마에서 비엔나로, 이어서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가면서, 로마를 교황에게 맡겼다. 로마는 이제 더 이상 국가의 통치 아래에 속해 있지 않고 교회의 통치에 속하게 되었다...
... 주교들은 7세기 이후부터 그들 지역의 주민들의 토지에 대한 진정한 종주권을 부여받았다...
대체로 키비타스에는 주시장(週市場marche hebdomadaire이 있었으며 인근지역의 농민들이 그들의 생산품을 그곳에 가지고 갔다...
... 질서와 평화와 공공복리의 수호자로서 주교가 법에 의해서건 권위에 의해서건 관여하지 않는 분야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 키비타스의 주민들은 결코 특권 신분이 아니었다...
제후들은... 우선 필요했던 것은 이슬람교도나 노르만인들에 대한 방어 및... 인접제후들에 대한 방어였다. 그래서 9세기부터 도처에 요새지들이 축조되었다... 이러한 명칭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기술적인 명칭은... 부르구스burgus이며...
... 부르구스는 무엇보다도 군사시설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원래의 군사적 기능에 행정중심지라는 기능이 덧붙여졌다. 성주는 성에 주둔하는 기사들을 지휘하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제후는 10세기에 '성주령chatellenie'으로 불리게 되는 성벽 주위의 일정지역에 대한 재정권과 사법권을 성주에게 위임했다. 주교구가 키비타스에 의존하듯이 성주령은 부르구스에 의존하였다...
... 부르구스의 주민은, 부르구스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던 기사와 성직자를 제외하면, 이들 기사들과 성직자들에 봉사하기 위해서 채용된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숫자도 아주 적었다. 그 주민들은 요새지의 주민이었지 도시민들이 아니었다. 이런 환경하에서는 상업도 산업도 가능하지 않았고 심지어 인식되지도 않았다. 부르구스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주변 농촌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입으로 살아갔고, 단순한 소비자의 역할 이외에는 어떠한 경제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제후들에 의해 축조된 부르구스 외에 9세기에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많은 대수도원이 축조한 요새화된 성곽도 언급해야만 한다. 이런 성곽도 부르구스나 성으로 변모했다...
키비타스와 부르구스에서는 상업활동과 산업활동이 전혀 행해지지 않았다... 모든 점으로 미루어보아 부르구스의 주민은 수백 명에 불과하였으며, 또 키비타스의 주민도 2-3천명을 넘지 못했던 것 같다.
...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들은... 도시로의 발전에 있어서 '디딤돌'이었다. 10세기부터 그 첫번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경제부활 이후, 그것들의 성벽 주위에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제 4 장 상업의 부활
... 롤로Rollo에게 노르망디를 양도한 것(912)은 서부에서 노르만인들의 대규모 침략의 종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동부에서는 하인리히 1세와 오토 1세가 엘베강을 따라 슬라브족을, 다뉴브강 유역에서는 헝가리인들을 저지하였다(933-955)...
10세기부터 또다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 같다...
... 쿨뤼니 수도원 개혁(910년 아키텐공 기욤이 옛 마론지방[현재의 루아르현]에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창건)에 의해 활기를 되찾은 교회는 교회의 규율에 스며들었던 여러 악습을 정화하고 교회에 대한 황제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십자군원정이라는... 사업에 착수하게 하였다.
봉건제의 상무정신으로 웅장한 사업이 전개되고 성공을 거두었다. 노르만 기사들은... 시실리 왕국이 탄생하였다... 윌리엄공의 지휘하에 영국을 정복하였다. 피레네산맥 이남에서도 기독교도는... 톨레도와 발렌시아를 정복하였다(1072-1109)...
11세기 특징 가운데 하나인 높은 출생률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사업은 분명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 도처에 북적거렸으며... 군대는 용병들-Coterelli 혹은 Brabantiones라고 불리는-로 가득찼고... 12세기초가 되면 농민무리들이 플랑드르에서 네덜란드(?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엘베(?에스코Escaut)강 유역에 있는 습지(Moor)를 간척하기 시작하였다...
... 플랑드르에서는 1150년경에 최초의 간척지polder가 등장했다. 1098년에 세워진 시토교단은 곧 간척사업과 산림개간에 주력하였다.
... 11세기는 진정한 상업부활의 시기였다. 두 중심지 중 하나는 베니스이고 다른 하나는 플랑드르 연안이었다. 달리 말하면 상업부활은 외부자극의 결과였다... 해외시장과 단절됨으로써 서유럽의 상업이 자취를 감추었듯이, 바로 해외시장이 다시 열림으로써 서유럽에서의 상업이 부활하였던 것이다.
... 베니스는 바다 건너에 있는 대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의 영향권하에 있게 되었고 그 영향하에 성장하였다.
... 베니스는 비잔틴 제국 덕택에 상업이 번창하였을 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로부터 고등문명, 극 고도의 기술, 기업운영, 정치적/ 행정적 조직 등을 배웠다... 8세기에 이르자... 베니스의 선박들은... 이탈리아에서 밀과 포도주, 달마티아에서 목재, 간석지에서 소금을 각각 운송하였고, 교황과 비잔틴황제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해 연안에 거주하는 슬라브인들... 노예들을 운송하였다. 그 대신... 아시아에서 수입된 향료는 물론이고 비잔틴에서 제조된 값비싼 직물을 가져왔다.
11세기 초가 되면 베니스는 세력이나 부에 있어서 경이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 베니스는 포강을 통해서 파비아와 교류했으며, 이 도시는 베니스의 영향을 받아 곧 활기를 띠게 되었다...
10세기에 베니스의 영향으로 롬바르디아에서 상업활동이 활발해졌다... 기업정신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다... 제조업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11세기 초에 루카인들Lucques(중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도시)은 직조업에 전념하였다...
... 베니스만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니었다. 스폴레토Spolete(롬바르디아 지방 북부 도시)와 베네벤토Benevent)의 건너편에 있는 이탈리아 남부지역은 여전히 비잔틴 제국의 영향하에 있었고... 바리Bari/ 티렌토Tarente/ 나폴리Naples 그리고 특히 아말피Amalfi는 베니스의 경우와 비슷하게 콘스탄티노플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 11세기초 이후, 처음에는 제노바, 그리고 이어서 피사가 해상교역에 진력하였다... 1015-16년에 제노바는 피사와 연합해서 샤르데냐섬을 공격하였다...
이 모든 원정은 모험정신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종교적 열정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시작(1096)은 이슬람세력의 명확한 후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슬람교도의 지중해장악은 종식되었다... 기독교도에 의한 코르시카(1091)/ 샤르데냐(1022)/ 시실리(1058-90)의 정복으로 이슬람교도는 9세기 이후 그들이 서구를 봉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군사기지들을 상실하였다... 노르만인에 의한 아말피의 점령(1073)으로 이 도시의 상업이 종식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제노바와 피사는 아말피와 경쟁할 필요가 없어졌다.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상업은 제조업을 자극했고,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Berame/ Cremone/ Lodi/ Verone 등 모든 옛 로마의 도시와 '자치도시municipe'들이 로마시대보다 더 활기를 띠었다... 남쪽에서 토스카나가 정복되었다. 북쪽에서는 새로운 교역로가 알프스산맥 너머로 개발되었다. 그들 도시의 상인들은 Spluegen/ Saint-Bernard/ Brenner의 고갯길을 건너, 비잔틴제국에서 그들 도시로 온 것과 동일한 유익한 자극을 유럽대륙에 전했다. 그들은 동쪽으로는 다뉴브강, 북쪽으로는 라인강, 서쪽으로는 론강 등 수로로 특징지어지는 자연로를 따라 진출하였다... 12세기초에 플랑드르의 정기시장들foires에서는 이미 상당수의 롬바르디아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 베니스의 상업이 머지 않아 롬바르디아 지방의 상업을 자극하였듯이 마찬가지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해상활동은 플랑드르 연안의 경제부활을 야기하였다.
플랑드르는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북유럽 연안들에서 행해지는 상업의 서부 중심지가 되었다... 노르만인의 침략이라는 폭풍이 몰아치자 캉토빅과 두루슈테데는 차례로 자취를 감추었다. 캉토빅은 파괴되어 다시 복구되지 않았으며 츠윈만golfe de Zwin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형적으로 유리했던 브뤼주Bruges가 캉토빅의 역할을 계승하였다.
플랑드르가 그렇게 일찍부터 상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 도착한 선박에 소중한 회송화물fret de retour을 제공할 수 있었던 토착산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시대, 어쩌면 그 이전부터 모리니족les Morins과 메나피족les Menapiens이 모직물을 제조했다. 이 원시산업은 로마인의 정복에 의해 도입된 기술개선의 영향으로 완벽해졌다. 그 해안의 다습한 초원지대에서 사육되는 양에서 나온 양모의 질이 우수했다는 점도 성공의 한 요소였다. 그곳에서 생산한 사굼sagum(고대로마인이 입던 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군용외투)과 외투(birri)는 알프스 건너까지 수출되었고 로마제국 말기에 투르네Tournai에는 군복을 생산하는 공장까지 있었다.
... 9세기 역사문헌들에 등장하는 '프리슬란트 직물'은 플랑드르에서 제조된 것이 틀림없다. 그것들은 카롤링거 시대에 상거래의 대상이 되었던 유일한 제조품이었던 것 같다... 샤를마뉴가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Haroun-al-Raschid의 선물에 대한 답례를 할 때, 그는 '프리슬란트 직물'보다 더 좋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10세기에 스칸디나비아 항해자들은 감촉이 부드러울 뿐 아니라 색상이 아름다웠던 이러한 직물에 곧 주목하였다... 그것들은 북유럽의 모피, 아랍과 비잔틴의 견직물과 더불어서 가장 인기있는 수출품이 되었다...
... 11세기가 되면... 이때부터 플랑드르는 프랑스 북부지방과 교역하여 의류를 수출하고 그대신 포도주를 수입하였다.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이전에는 덴마크의 위성에 맴돌았던 잉글랜드가 유럽대륙과 연결되었으며 이전부터 있었던 브뤼주와 런던 사이의 교류가 더욱 증진되었다. 브뤼주의 인근지방에 또다른 상업중심지들이 등장했다 : Gang/ Ypres/ Lille/ Douai/ Arras/ Tournai 백伯들이 릴/ 투루Thourout/ 메신Messines/ 이프르 등에 정기시장을 설립하였다.
플랑드르 지방만이 북유럽 해상교역의 유익한 효과를 경험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반향은 저지대지방으로 흐르는 강들을 따라 퍼졌다. 에스코강에 접해 있는 캉브레Cambrai와 발랑시엔Valenciennes, 뫼즈강에 접해 있는 리에주Liege/ 위Huy/ 디낭Dinant이 이미 10세기에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라인강에 접해 있는 쾰른과 마인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영불해협과 대서양의 연안지방은 북해의 활동무대에서 여전히 배제되어 있어서 중요한 상업중심지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외적인 곳이 자연히 잉글랜드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던 루앙과 더 남쪽에 있는 보르도와 바욘Bayonne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발전은 아주 느렸다..
점진적이지만 그러나 명확하게 서유럽이 변형된 시기는 바로 12세기였다. 경제발전으로 서유럽은 전통적인 경직성, 즉 인간과 토지의 관계에만 의존하고 있던 사회적 조직 때문에 서유럽에서 필연적이었던 경직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업과 산업은 농업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업에 영향을 끼쳤다... 농산물은 이제 교환의 대상으로서 혹은 원료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당시까지 모든 경제활동을 억제하였던 장원제의 틀이 이제 깨졌으며... 고대처럼 농촌은 도시를 지향하게 되었다.
상업의 영향으로 옛 로마의 키비타스들은 활기를 되찾았고, 다시 인구가 충원되었다. 상인들의 집락들이 부르구스 밑에 형성되거나, 혹은 해안가/ 강가/ 강의 합류점 등 교류의 천연적 중심지에 형성되었다. 그런 곳에는 시장이 있었다...
... 도시출현 이전에 노동은 곧 예속노동을 의미했으나 이제는 자유노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였고... 12세기에 만개한 경제부활은 자본의 위력을 보여주었고...
... 진보의 길로 들어선 새로운 유럽은 결국 카롤링거 시대의 유럽보다는 오히려 고대 유럽과 더 유사했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고대도시가 중세도시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경제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중세도시의 비중이 고대도시의 비중보다 더 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제국의 서부속주들에서는... 대상업도시로는 나폴리/ 밀라노/ 마르세유/ 리옹 정도가 있었다. 10세기초에 베니스/ 피사/ 제노바/ 브뤼주 등과 같은 항구도시나 밀라노/ 피렌체/ 이프르/ 강과 같은 산업도시와 견줄 만한 도시가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2세기에 갈리아에서 오를레앙/ 보르도/ 쾰른/ 낭트/ 루앙 등과 같은 도시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제정로마 시대에 그런 도시가 차지했던 중요성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보인다.
... 기원 1세기초에 호박(장식품으로 쓰이는 황색의 투명한 광물)이나 모피를 거래하는 자들이 간헐적으로 드나들던, 아프리카 내륙만큼이나 황량했던 지역들에서 이제 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선박들은 과거에 지중해를 항해하듯이 발트해와 북해를 항해하였다.
... 이탈리아 도시가 지중해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축출하였듯이 12세기에 독일의 도시는 북해와 발트해에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을 몰아냈고, 따라서 이후부터 북해와 발트해에서는 한자동맹 소속의 도시가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베니스와 플랑드르 두 지점에서 상업이 시작되었고, 이 두 지점 덕택에 유럽은 동방세계와 접촉할 수 있었다. 또 이 두 지점에서 시작된 상업은 마치 전염병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져 유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쪽으로부터의 상업의 흐름과 남쪽으로부터의 상업의 흐름은 내륙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결국은 서로 만났다. 이 두 흐름이 만나는 곳은 브뤼주에서 베니스에 이르는 자연로의 중간지점인 상파뉴평원이었다. 이 지역에는 12세기에 유명한 정기시장, 즉 트루아Troyes/ 라뉴이Lagny/ 프로뱅Provins/ 바르-쉬르-오브Bar-sur-Aube의 정기시장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정기시장은 13세기말까지 중세유럽에서 자본이 집중되고 화폐가 교환되는 장소의 역할을 했다.
제 5 장 상인들
기원의 문제에 있어서 거의 언제나 그러하듯이 상인들의 기원에 관한 사료는 아주 부족하다.
... 해적질은 북구의 바이킹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호머시대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해상상업의 시초였다. 오랫동안 그 두 개의 직업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였다.
... 5세기에 로마의 속주를 침입한 게르만족은 해양생활에는 완전히 낯선 자들이었다. 그들은 토지를 점유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 상업부활의 첫번째 징조는 10세기에야 나타난다.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아직 서유럽에서 전문 상업의 확대를 예견할 수 없던 그런 시기에 베니스에 직업상인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미 6세기 카시오도로스Cassiodore(동고트족 국왕인 테오도리크 치세에서 집정관을 지냈고, 그 이후 시실리섬에 있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교회사> 등을 저술함.)는 베니스인들이 항해자이고 상인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확실한 점은 9세기에 베니스에서는 상당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거의 확실한 점은 간석지로 둘러싸인 작은 섬들에서 생산된 소금이 이전부터 이윤을 많이 남기는 수출품이었다는 사실이다...
베니스의 상업이 이렇게 일찍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신용제도였던 것 같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자본가로부터 일반적으로 연 20%의 연 이자율로 화물에 필요한 돈을 빌렸다. 동업을 하는 여러 상인들이 공동으로 선박에 화물을 선적하였다...
... 베니스의 상인들... 의 상업조직을 비잔틴의 상업조직과 연결시켜주는, 그리고 비잔틴을 통해서 고대의 상업조직과 연결시켜주는, 비잔틴과 베니스의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사실 베니스는 지리적으로만 서유럽에 속했고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에서는 서유럽과는 이질적이었다. 간석지로 둘러싸인 그 섬의 첫번째 식민자들은 아퀼레이아Aquileia 및 그 인접도시에서 도망쳐 온 자들로서 로마세계의 경제적 기술과 도구를 그곳에 가져왔다...
... 베니스의 항해자들은... 이슬람교도가 침입할 때까지 마르세유 항구와 티레니아해la mer Tyrrhenienne에서 아주 활발한 활동을 했던 시리아상인들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상법과 상관례가 베니스인들이 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 주도권을 장악한 원인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베니스는 11세기에 발전하기 시작한 다른 연안도시에 당연히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즉 베니스는 처음에는 피사와 제노바, 그리고 나중에는 마르세유와 바르셀로나에 각각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베니스가 지중해연안에서 유럽내륙으로 상업을 점차적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했던 상인계층의 형성에 기여했던 것 같지는 않다...
유럽내륙에서 전문상인층이 등장하는 시기는 바로 10세기이다. 이들의 발전은 처음에는 아주 느렸지만 11세기부터 가속되었다. 이 시기에 명확하게 가시화되기 시작한 인구증가가 분명히 이런 현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인구가 증가한 결과 토지로부터 점차 많은 사람들이 유리되었다...
초기의 전문상인들은 틀림없이 바로 이런 뿌리뽑힌 모험가들에게서 나왔다...
... 핀체일의 성 고드릭Saint Godric de Finchale의 전기...
고드릭은... 전적으로 영리욕에 따라 행동했으며, 그에게 유명한 '자본주의 정신spiritus capitalisticus'-일부 사람들은 르네상스시대가 되어서야 출현했다고 주장하는-이 쉽게 확인될 수 있다. 고드릭은 자신의 일상적인 필요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업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벌어들인 돈을 금고에 쌓아두었던 것이 아니라 사업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사용했다. 그가 거둔 이윤은 가능하면 빨리 재투자되어 자본회전을 높였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근대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놀랍게도 이 미래의 수도사인 그는 종교적 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품이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는 시장을 찾아내는 데 골몰했다. 그릐 이런 행동은 모든 종류의 투기를 금지하는 교회의 조치와 부합되지 않았고 '공정가격juste prix'이라는 교회의 경제원칙과도 상반되었다.
... 11세기 사회처럼 폭력이 여전히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진취성은 협동에 의존해서만 성공할 수 있었다...
... 고드릭의 전기는 고드릭이 다른 상인들과 조합을 결성하면서부터 그의 상업이 상향곡선을 그렸다는 점을보여준다...
... 안전은 무력에 의해서 보장되었을 때만 그들에게 존재하였고, 무력은 집단성의 속성이었다...
저지대지방에서처럼 이탈리아에서도 상업은 상호부조에 의해서만 전파될 수 있었다.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등장하는 'frairies형제단' 'charites우애단', 상인들의 'compagnies조합' 등의 단어는 게르만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등장하는 길드gildes나 한자hanses 등의 단어와 정확하게 동의어이다...
... 중세 경제부활의 특징은 바로 대상업, 보다 정확한 용어를 쓴다면 원격지 상업이었다... 상인들의 여행이 멀면 멀수록 그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많았다. 그리고 상인들은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편력생활의 고달픔/ 어려움/ 재난 등을 상쇄할 정도로 영리욕이 강했다. 중세의 상인들은 겨울철 이외에는 계속해서 편력했다. 12세기 영국의 문헌사료는 상인들을 '먼지투성이의 발pedes pulverosi'이라는 말로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편력하는 상인들은 이들의 이질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처음부터 농업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사실상 교회의 생존은... 사업과 이윤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장원조직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교회는 처음부터 상업을 파렴치한 행위로 교회에 불안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 대부분의 상인들은 농노의 자식이었음에 틀림없는데도 마치 처음부터 자유민이었던 것처럼 다루어졌다. 그들은 태어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사실상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다. 즉 그 누구도 그들이 자유민이 아니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유가 양도되었던 것이다... 농업문명이 농민을 대체로 예속신분으로 만들었듯이, 상업은 상인을 대체로 자유민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상인들은 영주법정이나 장원법정에서 재판받지 않고 공공법정에서만 재판을 받았다. 프랑크국가 사법제도의 옛 골격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수많은 개인법정보다 상위에 있었던 공공법정들만이 상인을 재판할 수 있었다.
상인들은 공권력에 의해서도 보호받았다... 샤를마뉴는 그의 농업적 제국에서 순회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었다. 그는 순례자와 상인들-유태인이건 기독교도이건-을 위한 칙령들을 반포했었다...
... 10세기에 교회가 주도한 '신의 평화paix de Dieu'는 특히 상인들을 보호하였다.
... 상인법 가운데 가장 초기의 흔적은 놀랍게도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 성직자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상인은 특별법을 향유했다...
제 6 장 도시의 형성과 부르주아지
...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중세처럼 도시의 사회경제적 조직이 농촌의 사회경제적 조직과 그렇게 대조를 보인 적이 없었다...
... 상인들은 처음에 이런 키비타스에서 일정지역을 차지하였을 것이며 상인이 늘어남에 따라 이런 지역은 곧 너무 협소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10세기부터 상인들 가운데 다수는 성벽바깥에 거주해야만 했다... 마르세유에서는 도시의 성벽이 11세기초에 확대되었음에 틀림없다... 로마시대 이래 당시까지 전혀 팽창한 적이 없었던 옛 키비타스들이 이 시대에 갑자기 확대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10-11세기에 그렇게 흔히 언급되는 플랑드르 및 그 인접지역에 있는 부르구스 곁에 새로 건설된 포르투스portus는 상인집락이었다고 자신있게 결론내릴 수 있다.
... 도시를 탄생시킨 사회질서와는 아주 판이한 사회질서에 적합하였던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는 결코 도시를 탄생시키지 않았다... 키비타스난 부르구스가 상업활동을 야기한 것이 아니다. 상업활동은 밖에서 그곳으로 온 것이다. 즉 그곳의 유리한 조건 때문에 상업활동이 거기에 결집되었던 것이다.
... 12세기 초가 되면 이미 상인 정주지의 건물들이 원래의 요새지인 키비타스나 부르구스를 사방으로 둘러싸버렸다...
... 대체로 12세기 초가 되어서야 상인 거주지들이 점차 번영함으로써 상인들은 석조로 된 견고한 성채를 축조하고 망루를 세워서 정규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 상인집주지는 원래 있었던 '구부르구스'와 대비해서 '신부르구스'라 불렸다. 그래서 적어도 11세기초부터 상인정주지의 주민은 '부르구스의 주민' 즉 부르주아(bourgeois; 영어 burgher; 라틴어 burgenses)라고 불렸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기로는 이 단어가 처음 언급되는 것은 1007년 프랑스에서이다...
... 흥미롭게도 그 명칭은 구부르구스의 주민들을 지칭하는 데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구 부르구스의 주민은 '요새지 주민castellani; castrenses'으로 알려졌다. 바로 이런 사실이 원래 있었던 요새지의 주민들에서가 아니라 상업활동을 위해 이런 요새지로 이주해온 자들에서 도시민의 기원을 찾아야 된다는 주장의 또하나의 중요한 증거이다...
플랑드르는... 켈트족 시대부터 이 지방에서는 직물업이 농촌에서 광범위하게 지속되었다... 프리슬란트 선원들에 의해 멀리 떨어져 있는 곳까지 수출됐었다. 이제 도시의 상인들이 그런 직물을 수출하는 데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10세기말부터 그러한 직물을 영국에 수출하였다. 그들은 곧 영국의 우수한 양모를 알게 되었으며, 이런 양모를 플랑드르에 수입하여 이곳에서 제조하게 하였다. 이처럼 상인들은 스스로 제조업자로 변신하였고 당연히 농촌의 모직공들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그 이후 이러한 모직공들은 농촌적 성격을 상실하였고 상인들에 봉사하는 단순한 봉급생활자가 되었다...
... 상인들은 직물이 직조되고 염색되는 작업장을 직접 조직화하고 경영하였다. 12세기에 들어서면 유럽시장에서 직물의 섬세함이나 색상에 있어서 그들의 경쟁자가 없게 되었다...
... 프랑스의 남부와 북부의 도시, 이탈리아와 독일 라인강 지방의 도시도 직조업에 종사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어떤 제조품보다도 직물은 중세상업의 기반이었다. 제련업도 중요성에서 직물에 훨씬 못 미쳤다. 제련업은 거의 전적으로 구리세공에 한정되었다. 일부 도시, 특히 뫼즈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디낭의 번영은 그러한 구리세공에 힘입은 것이었다...
... 관습법에 따르면, "출생은 어머니를 따른다partus ventrem sequitur"라는 속담에도 나타나 있듯이, 자식의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다...
...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서만 귀족들이 계속해서 도시에 거주하였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서는 전통이 보존되었고 로마제국의 도시조직이 어느 정도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프로방스의 도시들은 행정중심지로서 그 도시들이 소재하고 있는 영역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북유럽도시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기사들의 가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고립되어 있었고 마치 부르주아적 사회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12세기에 이르면 거의 모든 곳에서 귀족들이 농촌으로 이주하였다...
13세기가 되어서야 수도사들이 이전과는 다른 조건에서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탁발수도사들은 도시민들에게 보시만을 요구하였다...
제 7 장 도시제도
더구나 부르주아지가 기존의 사회질서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들의 요구와 그들의 정치'강령'은 결코 기존 사회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군주/ 성직자/ 귀족의 특권과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존재에 필요하였기 때문에 기존질서의 타도가 아니라 단순한 양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보는 그들 자신의 필요에 한정된 것이었다...
11세기초 이후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에 고통을 주는 기존질서에 대해 처음으로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그 이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결국 12세기가 되면 그런 개혁운동으로 말미암아 도시는 장차 도시체제의 기반이 될 기본적인 도시제도를 획득하였다.
1057년에... 밀라노에서 대주교에 반대하는 노골적인 반란이 발생하였다...
... 교황이 독일황제와의 투쟁에서 롬바르디아의 파타리파 사람들les Patarins에 의존하였듯이, 12세기 카페왕조의 국왕들은 코뮌에 호의적이었다.
... 公들이나 伯들은 부르주아들이 성주들의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성주는 세습적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세력이 백들과 공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프랑스 국왕들과 같은 이유로 즉 도시가 그들 가신들의 지위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도시에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방임하는 것으로 그쳤으며, 그들의 태도는 거의 언제나 도시에 호의적인 중립이었다.
... 과거의 잔존물 모두가 현재의 필요를 억눌렀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자유로운 팽창에 필수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부르주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있는 성주/ 수도원/ 영주에게서 그러한 개혁의 완수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르투스의 주민들은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집단이 대중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고, 그 집단이 대중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과 위신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였다.
11세기 중엽에 상인들이 단호하게 이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모든 점으로 미루어볼 때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길드가 도시자치의 선도자였음에 틀림없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부르주아지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점차 특권계급이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단순한 사회적 집단에서 법적 집단으로 변모하였고 제후들에 의해 그렇게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법적 신분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자치적인 사법조직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
플랑드르 지방에서 시 참사회 법정, 즉 도시에 독특한 그런 법정에 대한 언급은 11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관련된 도시는 아라스Arras이다...
... 플랑드르백이 1127년에 브뤼주의 부르주아들에게 "매일매일 그들 도시의 관습법을 개정할 권리"를 부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특허장들의 내용을 철저하게 고증하고 그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보완함으로써 12세기에 서유럽 도처에서 발전한 중세 도시법의 일반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 이 시기에 도시민의 신분은 자유민이었다... 이런 면에서 각 도시는 "특권지구franchise"를 구성하였다. 농촌 농노제의 모든 흔적은 도시의 성벽 안에서는 사라졌다. 재산 소유정도에 따른 차이가 있었지만-심지어는 대비-가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시민 신분이라는 점에서 동등하였다. 독일 속담에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Die Stadtluft macht frei"라는 말이 있으며, 이러한 진실은 모든 곳에서 유효하였다... 그 이후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도시 내에 1년과 1일을 거주한 농노들은 모두 명확한 권리로서 자유를 누렸다. 1년과 1일이 지나면 영주가 농노의 인신과 재산에 행사했던 모든 권리가 무효화되었다. 탄생할 때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요람에 있는 어린애의 신분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신분은 도시에서 사라졌다. 처음에는 상인만이 '사실상' 누렸던 자유가 이제는 '법률상' 모든 도시민의 공통적인 권리가 되었다.
... 도시 곳곳에... 모든 곳에서 옛 장원적 토지는 자유소유지 혹은 '부역면제 자유지alleu censal(부역을 수반하지 않과 상스[cens: 일종의 토지세]만을 지불하는 토지를 의미)'로 바뀌었다...
... 도시민은 자신의 집에 대한 저당권을 판매함으로써 필요한 유동자본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다른 사람의 집에 대한 저당권을 구입함으로써 도시민은 빌려준 돈에 비례해서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다...
통행세는 변형되어 도시당국의 감독하로 넘어갔다. 그러나 통행세를 제외한 기타 다른 영주권은 그렇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우선 영주가 주민에게 자신의 방앗간과 오븐에서 밀을 빻고 빵을 굽도록 강요하는 '시설독점권'이 있었다. 그리고 '판매독점권'이 있는데, 영주는 이런 독점권에 의해 일정기간 그의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주와 그의 가축에서 나온 고기를 독점적으로 판매했다. 다음으로 '숙식권'이 있었는데, 이것은 영주가 도시에 머무는 동안 도시민들로부터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는 권리였다. '징발권'이 있었는데, 이것에 의해 영주는 주민들의 선박이나 말을 징발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명령권'이 있었는데, 이것은 주민들이 영주를 따라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다양한 관습이 있었는데, 이런 관습은 수로에 다리를 세우는 것을 금한다든가 주민들에게 구 부르구스의 주둔군을 구성하는 기사들의 생계를 담당하게 하는 등 이제는 불필요한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억압적이고 귀찮은 것이 되었다.
12세기말이 되면 이 모든 것 가운데 추억 이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영주들은 저항을 시도해 본 뒤에 결국은 양보하였다...
... 일반적으로 법정의 재판장은 영주의 관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그의 선출을 결정하였다. 그는 도시의 특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으므로 도시는 모든 경우에 특권을 보장받았다.
12세기초에, 심지어 어떤 경우는 11세기말에 몇몇 도시는 이미 특별법정을 개설하고 있었다...
... 봉건시대의 조세제도와 도시코뮌이 제도화한 조세제도를 비교해보면... 봉건시대의 세제에서 세금은 단지 재정적 부과금으로서, 납세자의 재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인민들에 부과되는 고정되고 영속적인 의무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징수된 돈은 그 세금을 징수한 제후나 영주의 개인수입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그 돈은 직접적으로 공공이익을 위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도시코뮌이 제도화한 세제에서는 어떤 예외나 특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각자에게 할당된 금액은 재산에 비례하였다. 처음에 할당액은 일반적으로 수입을 근거로 산정되었다...
... 세금의 형태가 어떠했든 간에 징수된 돈은 모두 코뮌의 필요에 사용되었다. 12세기말에 이르자 조세제도가 제도화되었고 이 시기에 도시회계의 첫번째 흔적이 발견된다.
도시경제는 당시 고딕건축물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 도시경제는 아주 철저하게 그리고 '무에서' 우리 시대를 포함한 그 어떤 다른 시대의 것보다 더 완벽한 사회적 법제도를 창조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중세 도시민들은 고대 시민들 못지않게 공공사에 헌신적이었다... 12세기에 상인들은 그들 이윤의 상당부분을 동료들을 위해 사용하였으며, 병원을 세웠고 통행세를 되샀다. 상인들은 영리욕만이 아니라 애향심도 갖고 있었다. 각자가 자신의 도시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도시의 번영에 자발적으로 헌신하였다...
... 13세기에 세워진 경탄할 만한 대성당들은 도시민들이 이런 성당의 축조에 즐거운 마음으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대성당들은 '하느님의 집'이었을 뿐 아니라 도시를 찬미하는 것이었다...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시민정신은 매우 이기주의적인 것이었다. 도시는 성벽 내에서 향유하고 있던 자유를 독점하려고 하였다. 도시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농민은 도시민이 보기에는 전혀 동포가 아니었다... 도시는 도시민들이 독점하고 있는 산업에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 12세기에 존재했던 중세 도시는 코뮌으로서, 상업과 산업으로 살아갔고, 요새화된 성벽의 보호를 받았으며, 예외적인 법/ 행정/ 사법관-이런 것으로 인해서 중세도시는 특권적인 집단적 법인이 되었다-을 향유하였다.
제 8 장 도시가 유럽문명에 끼친 영향
중세도시의 형성은 당장에 농촌의 경제조직을 뒤흔들었다...
... 농민들은 그런 시장에 생산물을 가져가면 팔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농민들은 당연히 이처럼 유리한 기회를 이용하였다. 농민들이 충분히 생산하기만 하면 파는 것은 그들 자신에 달려 있었으며, 따라서 이때부터 그들은 여태까지 버려두었던 토지를 경작하기 시작하였다... 영주의 권리들은 장원의 관습에 따라서 일정비율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지수입의 증가는 차지인들에게만 이익이었다.
그러나 영주도 도시의 발전으로 농촌에 초래된 새로운 상황에서 이익을 얻을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는 거대한 미경작지/ 산림지/ 황야/ 습지/ 소택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1세기말이 되면 그런 개간운동은 이미 상당히 진척되었다... 1098년에 설립한 시토수도회ordre de Citeaux는 처음부터 이런 새로운 길을 걸었다. 시토수도회는 그 토지에 기존 장원조직을 채택하지 않고 현명하게도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였다. 시토수도회는 대규모 경작의 원칙을 채택하였으며, 지역에 따라 가장 수익이 높은 생산에 전념하였다. 도시들이 부유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수요가 많았던 플랑드르에서 시토수도회는 목축업에 참여하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시토수도회가 특히 양의 사육에 전념하였는데, 왜냐하면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들이 점차로 더 많은 양모를 소비했기 때문이다.
한편 도처에서 세속영주와 싱직영주들은 '신촌락ville neuve'을 세웠다. 처녀지에 세워진 촌락들이 그렇게 불렸으며 이런 촌락의 주민들은 연지대rente annuelle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받았다. 그러나 12세기 동안에 그 숫자가 꾸준히 증가한 '신촌락'들은 동시에 '자유로운 촌락ville libre'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기존의 농민들과 아주 상이한 새로운 유형의 농민들이 등장하였다... '신촌락'의 주민들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농촌의 부르주아들이었다... 따라서 도시제도는 도시의 성벽을 넘어 농촌지역까지 퍼져 그곳에 자유를 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더욱 퍼져나가 머지않아 기존의 영지까지 스며들었고 기존영지의 옛 제도들은 새로워진 사회의 한가운데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제 상업은 장원이 당시까지 자급자족하여 얻어야만 했던 모든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인접한 도시로 가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면 되었다...
농민의 해방은 경제부활-도시는 경제부활의 결과이자 도구이다-로 초래된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경제부활로 인하여 유동자본도 점점더 중요해졌다. 중세 장원시대에는 토지 이외에 다른 형태의 재산은 없었다...
... 상업은 이러한 퇴장된 화폐를 유통시켰고 화폐의 본래 용도를 회복시켰다...
... 11세기에 진정한 자본가가 많은 도시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 상업으로 인해서 화폐유통의 속도가 빨라졌고 그 결과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고물가는 자신들의 수입을 증가시키지 못했던 토지소유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것만큼이나 상인과 직인 등 도시민에게는 유리한 것이었다.
봉건국가의 현저한 특징은 초보적 수준의 재정일 것이다... 제후는 세금을 통해서 그의 재원을 증가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재정적 빈곤으로 인해서, 봉급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 면직될 수 있는 공무원을 채용할 수 없었다. 제후는 공무원이 아니라 세습적인 가신들만을 거느렸다. 자신의 가신들에 대한 제후의 권위는 그들이 그에게 한 충성서약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러나 상업부활로 인해 제후가 그의 세입을 증가시키는 것이 가능해져 화폐가 그의 금고 속에 흘러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즉각 이런 상황을 이용하였다. 13세기에 대관代官bailli들의 출현은 제후들이 진정한 공공행정을 확립시키고 점차 그의 종주권suzerainete의 통치권souverainete으로의 변화를 가능케하는 정치적 발전의 첫번째 징조였다.
... 봉건적 보수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도시민병의 오만을 경멸했다... 그러나 레냐노Legnano(북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에 있는 도시)에서 황제군에 대한 평민군의 눈부신 승리(1176: 독일에서 호엔슈타우펜조를 연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는 이탈리아로 진출하여 롬바르디아에서의 황제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이에 맞서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이 결성되어 황제군을 레냐노에서 격파하였다.)로 평민군의 능력이 입증되었다...
필립 존엄왕은... 부빈전투(1214: 영국의 존왕이 그의 생질인 독일황제 오토4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했으나 북프랑스에 있는 Bouvines에서 대패하였다)에서의 승리는 도시민병대에 기인한 바가 컸다.
... 12세기에 국가는 도시에게 돈을 빌렸다... 빌려주기로 동의한 돈의 댓가로 새로운 '특권franchise'을 요구하였다...
점차 군주들은 관례적으로 부르주아들을 고위성직자와 귀족들의 궁정회의council에 소집하여 부르주아들이 이들과 더불어 군주들의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이러한 소집의 예는 12세기에는 아직 드물었다. 그러나 13세기에는 그런 예가 아주 증가하였고 14세기가 되면 그런 관례는 신분제 의회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도화되었다...
... 적어도 13세기말에 이르러서야 문학과 예술이 부르주아지의 가슴에서 나왔고 부르주아지의 정신에 의해서 활기차게 되었다. 그때까지 학문은 전적으로 성직자의 독점물이었고, 라틴어만이 사용되고 있었다...
12세기 중엽이 되면 시 참사회는 부르주아지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는 데 전념하였고, 그러한 학교는 고대 말 이래 유럽에서 최초의 세속학교였다... 부르주아들이 귀족들보다 먼저 읽기와 쓰기를 배웠는데, 왜냐하면 이런 지식이 귀족에게는 지적 사치에 불과했지만 부르주아에게는 일상생활에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회는 즉시 도시의 세속학교에 대한 감독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서 교회와 도시당국 사이에 수많은 갈등이 발생하였다...
... 12세기말부터 도시생활에 필요한 여러 법령의 공포는 물론이고 도시의 서신과 회계를 담당했던 '서기'는 바로 그런 자들 가운데서 나왔다. 그런데 이런 '서기들'은 모두 세속인이었다. 왜냐하면 군주들과는 달리 도시는 성직자들-이들이 누리는 특권 때문에 도시의 사법권에서 벗어나 있는-을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세기 전반 이후 그들은 점점더 세속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도시들에 의해 세속어가 처음으로 행정업무에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진취성은 세속정신-중세문명에서 도시는 이런 세속정신의 대표자였다-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었다.
어느 시대건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넘쳐흐르는 신비주의로 유명했다. 바로 이러한 신비주의 때문에 그들은 11세기에 성직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척결하려는 종교개혁가를 열렬하게 지지하였던 것이다...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신비주의적이었던 중세 부르주아지는 이처럼 독특하게 미래의 두 사상운동, 즉 세속정신의 자식인 르네상스와 종교적 신비주의의 종착역인 종교개혁에서 그들이 행할 역할을 준비하고 있었다.
Note:
도시와 상업의 발전으로 중세 장원제도의 자급자족 능력이 해체되는 것은 흡사 시장의 발달로 기업들이 핵심 영역을 제외하고 아웃소싱하는 것과 닮아 있다. 영주의 토지세의 수입에 의존하는 방식이 상업의 발달과 인플레이션으로 위협받는 상황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상업을 경시하고, 투자와 대부활동에 진입하지 못하는 고정 봉급생활자들의 현실에서 반복되고 있다. 사회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영리주의적 속성의 강도에 달린 것일까? 고정급에 부착되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자들을 사회는 어떻게 인도해야 할까?
중세에 급증하는 성벽의 건설이 15세기 총포의 개량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그 이전 시기 12세기경 자치 도시의 성립과 함께 그 방어를 위해 필요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후 13세기 대성당의 건립붐 또한 도시의 발전과 자긍심의 산물이었다는 것 또한 이들의 건립책임자가 앙트레프레너 단어의 발달과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도시 부르주아의 경건한 신앙이 결국 종교개혁의 토양이 되었다는 것 또한 시사하는 바 크다. 들불처럼 번졌던 종교개혁이 그 이전 이단신앙으로 탄압받았던 알비파의 확산 또는 신비주의 신앙과도 겹친다는 것은 탐구해볼 만한 영역이다.
단순히 플랑드르의 직물산업의 기원을 조사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가 더 많은 엄청난 것을 얻었다. 처음에 이슬람의 침입으로 북해와 발트해의 교역이 발전한 것에 놀랐고, 뒤이어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지역 중심이 이동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인데, 서양사에 대한 눈을 한 단계 틔워 주었다. 또 서양의 도시가 고대의 키비타스와 단절되고 또 중세 봉건영주의 부르고스와 단절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중세의 암흑은 게르만족 이동의 결과가 아니라,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해 지중해의 폐쇄로 동로마와 레반트 지역과의 단절로 인한 것이었다. 유럽은 점차 북쪽으로 무역 중심을 이동시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면서 유럽이 확대되고 이에 바이킹은 기여한다.
그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대상업(원격지 무역)에 의해 자극을 받아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그 여파로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탄할 만한 통찰이다. (2024.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