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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n 02. 2024

바다 인류

주경철

주경철, <바다 인류 - 인류의 위대한 여정, 글로벌 해양사>,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22.1.24.

 


1부 바다와 문명의 발견

1장 인류사의 시작 그리고 바다


여러 반론이 있으나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사람들이 기원한 지역으로는 대개 중국 남부 지역과 타이완을 든다. 기원전 3500-3000년경 타이완으로부터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향해 대규모 인구 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기원전 1500년경 술라웨시해의 섬들이 폭발적 확산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인도네시아 북동쪽의 비스마르크제도로부터 남동쪽으로 확산하여 솔로몬 제도에서 멜라네시아로 그리고 산타크루즈 제도, 바누아투, 로열티Loyalty제도를 거쳐 대략 기원전 1200년경 뉴칼레도니아까지 도달했다. 또 한 갈래는 아마도 산타크루즈제도나 바누아투에서 피지로 갔고, 이 후손들이 더 멀리 확산하여 기원전 900-800년 사이에 통가와 사모아에 도달한 듯하다.


이 지역에서 오랜 기간 머물던 라피타Lapita(도자기) 문화 사람들이 다시 태평양 동부의 섬들을 찾아 다소 급작스럽게 항해를 재개했다... 사모아인과 통가인이 소시에테제도와 마르키즈Marquises제도로(서기 700), 그리고 500년 후 이 두 곳에서 이스터섬(폴리네시아식 이름은 라파누이)으로 갔다. 이스터섬은 태평양에서 가장 외떨어진 곳으로 그나마 제일 가까운 핏케언Pitcairn제도가 1,000마일(1,60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남아메리카 대륙은 그 두 배인 2,000마일 떨어져 있어 이 섬이 오스트로네시아어족 확장의 동쪽끝 지점이다.


다음 단계로 남북방향으로 확산이 이루어진다. 서기 700년경 소시에테제도와 마르키즈제도에서 하와이, 마지막으로 서기 1000년 이후(아마도 1280년경) 소시에테제도로부터 남서쪽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마오리Maori라는 이름의 원주민이 되었다. 서기 1500년경 마오리족이 동쪽으로 430마일 떨어진 채텀Chatham 제도로 찾아간 것이 태평양상 인구 확산의 거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2장 문명을 품은 대양


이라크 북쪽에서 발견된 기원전 5000년경의 무덤에 부장된 목걸이는... 목걸이의 구슬 중 일부는 흑요석으로 만들었고 일부는 800킬로미터 떨어진 페르시아만에서 나는 카우리 조개로 만들었다.

이라크 중부의 텔 아스마르Tell Asmar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0년대 구슬은 코펄copal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아프리카에서만 자라는 나무의 수지다.

동티모르의 몇몇 무덤을 발굴한 결과 이 지역에 없던 동물인 염소뼈가 나왔다. 이 염소는 아마도 중동 지역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을 것이다.

기원전 2000년대 시리아 지역의 고대 도시 테르카Terqa에서는 탄화된 정향colve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5000년경이면... 솔하임W. Solheim은 이 시기에 이미 인도양 전반을 아우르는 누산타오 해양 교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는 과감한 가설을 제기한 바 있다...


인류역사가 문명 단계로 진입하는 데에는 기후 변화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기원전 4500년경부터 사하라지역과 아라비아 지역은 초원지대에서 사막으로 변화해갔다. 사람들은 조여오는 사막을 피해 강을 찾아 모여들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선사시대 교역활동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로 우바이드 시대(Ubaid period, 기원전 6500-기원전 3800)의 토기를 들 수 있다. 독특한 채색토기들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다가 북쪽과 서쪽의 산악지대로 전해졌고 더 나아가서 바다를 통해 페르시아만 연안 지역까지 전해졌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목재, 석재, 금속 등 핵심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원거리 교역으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된다. 섬록암diorite, 반려암gabbro 등은 왕실의 중요한 석상 제작에 필요했고, 상아, 금 같은 귀한 물자도 필요했다. 수입물품 중에 청금석lapislazuli이 가장 잘 알려진 사례다.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에서만 독점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육로나 해로를 통해 먼 곳까지 수송해와야 했다. 청금석 구슬은 기원전 7000년경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현재의 파키스탄지역으로 수출되었고, 기원전 400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도 수출되어 각종 장신구나 인장에 쓰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투탕카멘의 마스크라든지 유명한 풍뎅이 장식물에 사용되었다. 미케네 지역에서도 유사한 장식물이 발견되는데, 이는 이집트와 초기 그리스 문명간 교류의 유력한 증거다. 한편 이 돌을 갈아 만든 염료인 울트라마린ultramarine은 유럽의 중세-르네상스 시기까지도 가장 귀하고 비싼 물질 중 하나로, 예컨대 마리아의 고귀한 푸른색 의복을 그리는 데 쓰였다.


수메르는... 오래전부터 발달해 있던 우바이드 시대 토기교역 네트워크를 활용해 딜문Dilmun(쿠웨이트 Failaka와 카타르에 걸쳐있는 페르시아만 서부 해안지역)과 교역을 했다. 기원전 3500-3000년경의 설형문자 기록들에서... 북쪽의 수메르인들이 곡물, 도자기, 역청을 남쪽지역으로 보내고, 대신 남쪽의 구리, 석재, 목재, 주석, 대추야자, 진주 등을 받아왔다. 특히 구리의 수송이 중요해서 당시 유프라테스강은 '구리 강'으로 통했다. 후기 우루크 시대(기원전 3800-3200)부터 오만반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구리가 수출되기 시작했는데, 그 양이 갈수록 증가했다. 수메르신화에서 구리가 유입되는 저 먼 남쪽지방은 세상의 끝 지점으로 묘사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에서 보면 딜문은 이처럼 외부세계의 먼 지점이지만, 사실 이곳은 교류의 종점이 아니라 남쪽지역과의 교역 중개지였다. 딜문에서 더 남쪽으로 항해해서 수메르 문명권 바깥으로 가면 오만반도의 마간Magan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이 지역에서 석재(특히 설화석고)와 구리가 생산되어 북쪽의 메소포타미아 중심지로 송출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딜문 주민들은 흔히 마간을 세상의 끝에 위치한 거친 지역으로 묘사했다.


아카드제국 초대 황제인 사르곤Sargon 1세(기원전 2400년경 통치)의 유명한 실린더 인장에는 "멜루하, 마간, 딜문에서 오는 배들이 아카드의 도크에 정박한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멜루하Meluhha는... 인더스 문명권을 가리킨다는 것이 정설이다.


수메르 자료에서는... 루엔릴라Lu-Enlilla는 마간과 교역하는 인물인데, 난나Nanna(달의 여신) 사원에서 양모, 의복, 기름 등의 상품을 받고 그것으로 구리를 구매했으며, 메루하로부터 각종 보석(홍옥수와 청금석 등), 금, 주석, 상아, 목재 등을 수입했다. 인도의 멜루하 상인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처음에는 마간과 거래하다가 교역루트를 더 확대해서 나중에 서쪽의 딜문까지 진입해갔을 것이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공산품 제조와 건축을 체계화하고 조세를 매기기 위해 도량형 체계를 표준화했다. 수암(규질암)으로 만든 입방체 혹은 다양한 종류의 구와 실린더 모양의 추들이 있는데, 0.86그램을 단위로 한 체계와 13.7그램을 단위로 한 체계 두 종류가 있다... 같은 도량형을 사용한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내부의 교역과 인더스 문명권 간 해상 교역이 긴밀히 연결되었다는 증거다.


파키스탄과 인도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하라파는 기원전 3000년대 중엽에 전성기를 맞았다... 하라파에서 수출한 물품 중에는 목재 같은 원재료 상품 외에 의례용 도끼날, 홍옥수carnelia 구슬, 인장, 도량형기 등이 있다... 유약을 바른 도기도 많이 발굴되는데, 아마도 이 안에 버터기름ghee 같은 음식이나 음료수 등을 담아 수출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의 설형문자 기록에서 선박 관련 전문용어만 400개가 넘는다는 사실도 항해가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우르 3왕조 시대(기원전 2112-2004, 아카드 제국이 몰락한 뒤 분열상태에 있다가 우르의 우르남무 왕이 수메르 전지역을 다시 통합한 시대)의 기록들에는 조선재료, 곡물 운송, 해상노동, 선박 임차 등에 관한 내용이 풍부하다... 인장에도 다양한 배들과 항해에 관한 내용들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적 발굴결과... 선박의 틈새 메우기caulking에 사용되는 역청, 로프, 판자 등 해상 항해 선박 재료들이 자주 발견된다.


페르시아만과 달리 홍해 지역은 외부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지만 교역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홍해는 해류의 흐름이 복잡하고 암초가 많아 항해 여건이 매우 나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이는 증기선이 개발된 19세기까지도 여전히 항해를 제약하는 요소였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홍해는 항해가 어렵기로 악명 높다.


홍해 항해의 사례로는 고대 이집트의 푼트Punt 교역을 들 수 있다. 이집트인들이 '푸엔테'로 부르던 푼트의 땅이... 오늘날 학자들은 수단과 에리트레아 해안 지역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3000년대 중반, 4왕조의 쿠푸Khufu 파라오 시대부터 이집트와 푼트사이에 교역이 행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시기에도 이미 교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집트인들은 이곳을 자신의 기원지로서 신의 축복을 받은 땅으로 보았다.


홍해는 나일강에서 동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이곳에 도달하려면 우선 와디 하마마트Wadi Hammamat를 지나 메마르고 좁은 계곡을 통과하는 육로를 지나야 한다. 이집트인들은 선박을 해체하여 짐꾼을 부려 이 먼 거리를 옮긴 후 바닷가에서 다시 선박을 조립하여 푼트까지 항해했다.


기원전 2000년대 중반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기원전 1507-1458)이 푼트 지역과 교역한 사례가 특히 유명하다... 여왕의 장제전(고대 이집트에서 국왕의 영혼을 제사하던 건물)을 장식하는 그림들을 보면 신의 도움을 받아 푼트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힘들게 그곳에 간 이유는 무엇보다 유향과 몰약 등 진귀한 상품을 구하기 위해서다. 유향은 유향나무Boswellia sacra에서 추출한 수액을 말린 제품이고, 몰약은 콤미포라 미르라Commiphora myrrha 나무에서 추출한 방향성 수지다... 몰약은 영생의 준비를 위해 미라를 만드는 데 쓰였고, 유향은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태우는 향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2200년경 기후 변화가 일어나 인도양 지역은 더 메마르고 예측하기 힘든 환경이 되었다... 아프리카 북부 사바나의 작물이 아라비아해 북쪽 연안을 따라 인도로 전해진 것이다. 특히 수수, 다양한 종류의 동부콩과 제비콩이 도입되었다... 반대방면으로는 중국에서 기원한 몇 종류의 수수가 남아시아와 아라비아를 거쳐 아프리카 북부로 들어갔다... 인도의 망고와 후추, 인도네시아의 대나무, 사탕수수, 바나나, 코코넛 등이 서로 상대 지역에 전해진 작물 교환도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한편 인도에서 아프리카로 들어간 중요한 식량자원으로는 흑소zebu를 들 수 있다.


3장 지중해 세계


밀로스 섬의 흑요석obsidia... 은 1만 5000년전부터 광범위한 지역으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로 들어가면서 밀로스 네트워크는 쇠퇴했다. 무기와 의례용 도구의 원재료가 청동으로 바뀌면서 흑요석 수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중해 지역 내에 다른 연결 네트워크들이 발전했고... 예컨대 목재, 상아, 금속, 동식물 등이 유럽대륙 북부 지역과 아프리카에서 들어왔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안고 있는 큰 문제는 목재 부족이다. 쿠푸 선박을 구성하는 목재의 95퍼센트가 수입산 레바논 삼나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키프로스 섬은 오래전부터 중요한 구리 공급지였다. 섬이름부터 그리스어로 구리를 가리킨다...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블로스 또한 흥미로운 곳이다... 비블로스 상인들은 이집트로 레바논삼나무를 수출하는 대신 파피루스를 구입해 에게해 연안 지역에 되팔았다.


기원전 1600년경 비블로스는 크레타섬과 교역을 하였다... 키프로스와 실리시아Cilicia의 구리, 에트루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멀리 콘월Cornwall 지방의 주석도 들어왔다.


미케네의 선박을 직접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로는 침몰선들이 있다... 기원전 1315-1305년경에 가라앉은 것으로 보인다... 354개의 구리 덩어리가 실려 있어서 그 무게만 11톤에 달한다. 여기에 더해 1톤의 주석 그리고 수많은 항아리, 유리 제품, 무기, 황금 잔, 상아 등과 함께 발트 지역에서 생산된 호박도 발견되었다. 이집트인들은 발트 지역의 호박을 매우 좋아해서 이집트 상인들이 파라오에게 바칠 호박을 구하기 위해 현재의 폴란드 지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집트인의 무덤 벽화 자료 중에는 외국사절들이 공물을 가지고 오는 모습들이 보인다. 크레타인은 금은으로 만든 그릇,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사절은 상아, 누비아Nubia인은 상아·짐승가죽·살아있는 동물들, 시리아인은 도자기, 가나안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담은 그릇, 마차와 말, 새끼 곰 등을 들여와서 실로 다양하고 화려한 모습을 선보인다.


4장 고전기 지중해 문명의 만개


페니키아라는 단어는 원래 무렉스murex 조개를 원료로 한 보라색 염료를 가리켰다... 페니키아의 화폐에도 이 조개가 표현되어 있다.


티루스의 왕 히람Hiram과 예루살렘 왕국의 솔로몬이 공동사업을 한 때가 대략 이 무렵이다. 솔로몬은 히람의 동의를 얻어 매달 1,000명의 인력을 레바논 산맥으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바닷가로 보내고, 대신 매년 4,500톤의 밀과 4,600리터의 기름을 받기로 했다. 두 사람은 선박을 해체하여 육로로 이동한 후 재조립하여 아카바Aqaba만(홍해 동북쪽 끝 시나이반도와 아라비아반도에 둘러싸인 만)에서 항해를 시작하여 쉬바와 오피르Ophir로 가는 공동 사업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티루스 상인들이 들여온 금, 향신료, 상아, 목재 같은 상품은 인도 산물로 보인다.


페니키아 인은 탁월한 항해실력을 뽐냈다. 처음에는 낮에만 항해하다가 머지않아 작은곰자리 성좌를 이용하여 야간에도 항해했다. 그리스인이 작은곰자리를 '포이니케Phoenice'라 부르는 것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서쪽으로 활동반경을 넓혀서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 사르데냐의 구리와 은 섞인 납, 에스파냐의 은 등을 교역했다.


페니키아인이 건설한 중요한 다른 식민시로는 에스파냐의 가디르Gadir(요새라는 뜻, 오늘날 카디스Cadiz)를 들 수 있다. 이곳은 과달키비르 강과 리오 틴토 강에 가깝기 때문에 이 강들을 통해 시에라 모레나Sierra Morena와 우엘바의 은광들에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페니키아 같은 고대 해양민족에게는 참다랑어 어획이 핵심산업 중 하나였다. 기원전 5세기에 염장법이 발달하여 가디르에서는 생선을 토막내서 소금에 절인 후 암포라(항아리)에 넣어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수출했다. 말하자면 참치캔의 원조인 셈이다.


주석을 찾아가는 항해 끝에 페니키아인들이 결국 잉글랜드 남서부의 콘월, 어쩌면 아일랜드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또한 아프리카 연안 지역으로도 가서 모리타니와 카나리아 제도 사이의 어장으로 진출해갔다. 아프리카 쪽 주요 정착지로는 모로코의 루코스Loukkos 강 입구에 위치한 릭수스Lixus를 들 수 있는데, 이곳 역시 서쪽의 아틀라스 산맥으로부터 금, 상아, 소금, 구리, 납 등이 들어왔다. 또한 지브롤터 남쪽 380마일 지점인 모가도르Mogador 섬에 도착하여 어업과 포경 사업을 했다.


그리스 세계에서 최초로 번성한 항구도시는 소아시아 해안지역에 위치한 밀레투스였다. 기원전 11세기에 건설된 밀레투스는 기원전 7세기에 이르면 동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와 흑해 연안, 이집트, 이탈리아에 60곳에 달하는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세계전체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한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가 밀레투스에서 태어나고, 또 그 하나의 원리를 물이라고 파악하여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다.


최초의 그리스 '식민지'는 7세기 말에 형성된 아폴로니아 폰티카Apollonia Pontica(현재는 불가리아의 소조폴, 흑해 서안의 도시)다.


그리스인은 처음에는 흑해 방면 개척이 힘들었던지 이 바다를 '폰토스 악세이노스(비우호적인 바다)*'로 불렀는데, 후일 '폰토스 에욱세이노스(우호적인 바다)'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인은 이곳에서 곡물을 구입하고 대신 청동 제품들, 도자기, 포도주, 올리브 기름 등을 보냈다. 이 교역로는 기원전 4세기경 더욱 확대되었다. 크림반도(타우리카) 서쪽으로 가는 교역은 스키타이인 때문에 위험요소가 커져서 다소 줄어들었지만, 대신 흑해를 가로질러 흑해 동부 연안으로 가는 교역이 크게 발전했다.


*'Pontos Axeinos'라는 이름은 이란어 axsaina-에서 왔는데 '검은색'이라는 뜻이다... 이때 검은색은 북쪽을 가리키므로 원래 이 이름은 북해를 의미했다. 마찬가지 논리로 홍해는 원래 남해를 의미했다. 만일 이 설명이 맞다면 이 용어들을 사용한 곳은 중동지역일 것이다...


기원전 7-6세기에 이르면 지중해 전역에 시장이 형성된다. 지요Giglio섬 연안에서 발견한 기원전 600년경의 침몰선 연구결과를 보면 이 교역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이 선박의 화물은 에트루리아와 페니키아, 코린트 산 암포라, 도자기, 철, 납 등 다양한 상품이었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 네코2세(재위 기원전 610-595)가 행한 세 가지 일을 거론한다. 첫 번째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판 일이다... 네코 운하는 홍해와 지중해를 직접 연결한 게 아니라 홍해와 나일강의 한 지류를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다... 두 번째로는 삼단갤리선 함대를 건조한 일이다... 세 번째 일은 아프리카 회항을 지시한 일이다.


홍해에서 출발하여 시계 방향으로 아프리카를 돌아 헤라클레스 기둥(지브롤터해협)을 지나 이집트로 귀환했다는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헤로도토스는 그 이전에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항을 시도한 사람의 이야기도 전한다. 강간죄로 크세르크세스에게 사형을 선고받은 사촌 사타스페스Sataspes는 이집트의 지중해 지역 항구를 떠나 헤라클레스 기둥을 넘어 아프리카를 돌아오는 항해에 성공하면 목숨을 구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그는 기니만까지 갔다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귀환한 듯하다.


한편 네코운하는 그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시대에 이 운하가 완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완공시기는 불명확하다. 이 운하를 이용하면 이집트와 페르시아 사이의 항해가 더 편해졌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헬레니즘 왕조는 기원전 3세기초에 서둘러서 운하를 준설하고 확장했다. 또 로마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기 2세기초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이 운하가 재개통되었지만('트라야누스의 강'이라 불렸다) 비잔틴 시대에 다시 토사가 쌓여 막혔다.


5장 고대 제국들과 바다



2부 아시아 해양세계의 역동성

6장 해상 실크로드의 발전


지중해의 로마와 달리 인도는 인도양의 패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아랍 지리학자들은 인도양 지역을 아잠Ajam(이란), 신드Sind(파키스탄), 힌드(인도) 그리고 '바람 아래의 땅들'로 구분했다. 네 번째 지역은 몬순을 이용하여 항해해 갈 수 있는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 자바해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한편으로는 지중해 세계와 인도양 서부 세계간 교역이 발전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역이 활성화하다가 이 두 개의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가 연결되기에 이른다... 지중해 세계로는 육상 캐러밴 교역로뿐 아니라 인도양·아리비아해·홍해를 연결하는 해상교역로를 통해 상품이 들어왔다. 아라비아의 유향과 몰약, 인도의 후추와 향신료, 보석, 중국의 비단이 들어오고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계속되었다. 반대편 방향으로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교역이 적어도 기원전 2000년대부터 이어져 왔다. 인도의 보석과 직물이 동쪽으로 가고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금, 주석, 고급 목재가 서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중국의 차와 비단, 도자기가 이 네트워크를 통해 인도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 루트를 통해 기원전 1000년대 말경이면 중국 상품이 인도를 넘어 중동 지역, 더 나아가서 지중해 세계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서기 4세기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생산하는 정향이 로마 지배하의 이집트에서 집세 지불용으로 쓰일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


짐바브웨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보면, 로마시대 동전들과 인도 쿠샨왕조 동전(130-150년경)들이 발견되고, 잔지바르의 쿠움비Kuumbi 동굴에서는 로마의 구슬이 발견된다.


이 광대한 바다 위를 오가는 상품들이 대개 사치품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아라비아의 향 상품들이 그리스-로마 세계, 인도, 중국 등지로, 소코트라와 인도의 대모(거북 등껍데기를 얇게 조각낸 것으로 빗, 상자, 혹은 가구의 장식용으로 쓰이는데 고급스러운 외양과 내구성 때문에 수요가 컸다.)가 로마로 들어갔다. 인도는 다이아몬드, 녹주석, 청금석, 진주, 자수정, 상아, 홍옥수, 산호 같은 보석 혹은 준보석들과 고급 면직물, 인이고 염료, 샌달우드Sandalwood(백단향), 에보니(ebony) 같은 고급목재를 수출했다. 인도,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생산하는 후추와 각종 향신료는 일찍이 중국과 중동,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반면 인도는 이탈리아, 그리스, 시리아로부터 포도주, 유리구슬, 보석 세공품 등을 수입했고, 곧 아리카메두Arikamedu 등지에서 복제품을 생산했다. 동남아시아의 소왕국들에서는 색깔있는 비단, 장식용 줄, 일곱 가지 보석을 두른 금관, 금장식 검, 황금의자와 은제 발걸이 그리고 코끼리 위에 올려놓는 향목으로 만든 가마, 희귀한 깃털로 장식한 파라솔, 진주 커튼, 공작새 깃털로 만든 부채 등 인도 제품에 대한 선망이 컸다.


불교 그리고 더불어 자이나교는 항해와 교역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우선 자이나교는 아힘사ahimsa(살생 피하기) 교리를 극단적으로 지키려 한다... 불교 또한 전도를 위해 먼 곳까지 여행하는 일이 잦고, 그 과정에서 항해 및 교역 활동과 연결되곤 했다. 특히 기원전 247년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져서 이곳이 상좌부불교(테라바다 불교)의 전파중심지로 성장한 점은 종교뿐 아니라 교역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띤다... 불교는 카스트 제도에 묶이지 않으므로 상인이 사회 상층으로 성장하는 데 유리하고, 또 의식에 사용하는 향과 허브 같은 물품들을 필요로 하므로 이런 측면에서도 교역과 관련이 깊다. 불교가 교역에 긍정적이라는 점은 예컨대 부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본생경Jatakas>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 경전에서는 아라비아와 아프리카를 항해하는 상선이야기, 난파사고 이야기, 인도에서 아라비아해와 페르시아만을 거쳐 바빌로니아로 교역하러 가는 이야기 등 해상교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알고보니 부처가 전생에 상인이었다는 식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많다. 상인들에게는 고무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다음 시기에 이 바다를 항해한 중요 인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들 수 있다... 그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정복한 후 모국으로 귀환할 때 본진은 육로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네아르코스 장군의 지휘하에 해로로 귀국했다. 이때 몬순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인도양의 원거리 항해가 활성화하는 데는 몬순에 대한 지식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위협적인 해적무리가 지키고 있는 근해를 피할 수 있어서 더 안전할 뿐 아니라, 항해기간도 크게 줄어서 나일강으로부터 인더스 하구까지 혹은 말라바르Malabar 해안까지 석 달이면 항해를 마칠 수 있었다. 지중해 세계와 인도양 세계는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서기 1세기 중에 타프로반Thaproban 즉 스리랑카 섬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 쪽에서 오는 선박과 서쪽에서 오는 선박들이 이 지점에서 만나 교역을 했을 것이다... 양측 선박들은 스리랑카섬에서 나는 산물들(예컨대 유럽에서 장례용품으로 애용된 붉은색 화강암)을 바닥짐으로 사용하여 귀국했다.


지중해 세계와 인도양 세계가 해상교역을 하려면 홍해를 거쳐야 한다. 문제는 홍해의 항해 여건이 매우 안 좋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홍해 교역을 할 유인이 크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항해가 더 활성화되려면 더 멀리 인도양 세계와 교역 가능성이 열려야 한다.


홍해에서 인도양으로 혹은 인도양에서 홍해로 가기 위해 아라비아반도를 돌아가는 항해 또한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도 4번이나 부하들에게 이 항해를 명령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페트라Petra와 게르하Gerrha 그리고 하드라마우트Hadhramaut(아라비아반도 서남부지방)를 연결하는 육상수송이 대세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를 지배한 이후(기원전 30) 이집트총독으로 임명한 가이우스 아일리우스Gaius Aelius(재임 기원전 26-24)에게 아라비아 지역을 탐사하고, 가능하면 정복하든지 우호세력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기원전 20년대의 이 기록을 보면 홍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교역이 어느 지점에선가 급격하게 발전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처음 이 교역의 주요 중계 항구는 아덴Aden이었다.

해상교역의 또다른 중심지는 소코트라섬('행복의 섬')이다

그런데 로마제국시대에 들어와서 항해가 더욱 발전하자 이 단계를 뛰어넘는다... 상당수의 인도 선박들은 홍해 내부로 항해해 들어가서 이 지역 항구인 미오스 호르모스나 베레니케Berenic로 직행했다.


<페리플루스>(일본에서는 <에리크레아 항해기>로 번역하고...)는 서기 30년경 로마의 속주 이집트에 거주하는 그리스 상인 출신의 무명 저자가 동료상인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주기 위해 쓴 일종의 무역안내서다.


서기 2세기 인도의 무지리스에서 그리스어로 작성된 문건은 사업자금을 투자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상인 겸 선장인 인물이 돈을 빌려서 감송, 상아, 직물 등 이 지역 상품을 사서 베레니케 혹은 미오스 호르모스로 간 다음, 육로를 통해 콥토스로 가서 나일강을 타고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25퍼센트의 세금을 물고 거래한 다음, 원래의 자금주 혹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의 대리인에게 빌린 돈을 갚는다. 이때 거래하는 상품 자체가 빌린 사업자금의 담보가 되는 방식이다.


7장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확장


8장 이슬람의 바다


200년경 개발된 '북아라비아 낙타 안장'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낙타는 대량의 짐을 싣고 도로가 없는 드넓은 사막 지대와 초원 지대를 장기간 오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고대부터 각 지역마다 대표적인 선박이 있었다... 원래 조선 디자인은 지극히 보수적이어서 매우 느리게 진화하는 특징이 있다. 지중해에서는 삼단갤리선trireme이... 사각범과 조타노가 특징이다. 중국해역에서는 정크선junk이 사용되는데... 높은 선수루, 많은 수의 마스트, 무엇보다 선미 중심타가 장착되어 있는 게 장점이다. 이런 배들에 대응하는 인도양의 대표적인 선박이 바로 다우선이다.


다우선은 원래 인도 선박이었다가 아랍 세계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dow'라는 말은 아랍어가 아니라 스와힐리어인데 영어에 들어와 'dhow'라는 형태로 널리 퍼졌다.

이 배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 높은 마스트에 거대한 삼각범을 쓴다는 점이다... 통상 다우선이 쓴다고 하는 라틴 범포lateen sail는 정확히는 세티 범포settee sail로서 삼각형에 가까우나 엄밀히 말하면 사각형이다. 범포 모양이 완전한 삼각형으로 진화한 것은 비잔틴 시대이며, 그때 유럽에 알려졌다. 그래서 다양한 미즌 범포mizzen sails(뒷돛대 세로돛)로 사용되어 유럽 선박들의 항해 유연성을 높여주었다... 둘째,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선체를 섬유, 밧줄, 가죽 끈 등으로 묶는 방식을 사용한다.


9장 당대 중국의 해상 세계 발전


10장 아시아 해양 세계의 새로운 구조


11장 몽골의 해상력 지배와 명의 해상 후퇴


1405년(영락 3) 정화鄭和는 칙명을 받고 서양(인도양) 국가들을 찾아가는 항해에 나섰다... 정화의 가문은 증조할아버지 배안Bayan 대에 일족이 원난으로 이주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1344년생)의 이름은 모두 하지로 되어있다. 당시 이 가문의 성은 馬씨였는데, '무함마드'의 음을 딴 성으로 중국 내 무슬림의 흔한 성씨다... 하지는 메카 순례를 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므로...


마화 즉 후일의 정화는 1371년 윈난의 쿤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고, 당시 10살이던 마화는 포로가 되어 거세 후 노예로 끌려갔다... 정화는 생김새가 씩씩한 귀인의 상이며 키가 9척이라고 한다.

정화는 1405-1433년 7차례에 걸쳐 남해 원정을 수행하며, 동남아시아, 인도양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했다... 3차 때는 몰디브, 4차는 아프리카 동해안, 5차는 아덴과 모가디슈, 7차는 메카까지 갔다. 왕복 항해에 20개월이 걸렸다.


특별한 상품으로는 렌즈가 하나인 망원경이 있다. 말라카 지배자가 영락제에게 10개를 선물했는데, 금화 1,000개 값어치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얼마 전에 베네치아에서 개발한 것이다.



3부 대항해시대의 교류와 지배

12장 중세 유럽의 해양 세계


로마 시대에 지중해는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들 간 경제·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는 '문명 통합의 해역'이었다. 그런데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의 말대로, 아랍 세력이 지중해 쪽으로 들어와서 남쪽 연안 지역들과 이베리아 반도를 통제한 뒤에는 북쪽의 기독교권과 남쪽의 이슬람권이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지중해는 이제 두 문명권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변경'의 성격이 강해졌다.


그 과정이 시작된 것은 이집트다. 640-642년에 아랍인들은 1만 2,000명의 소규모 병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 아랍인들은 현지 기술자와 선원 등을 고용해서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육군과 해군을 키워서 지중해 동부 각지를 공략했다. 무엇보다 이집트와 시리아 선박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이집트 곡물은 지중해 세계가 아니라 메디나 쪽으로 돌아갔다. 이를 위해 아랍인들은 강제 노역으로 '트라야누스의 운하'를 다시 복원했다. 이집트 곡물을 실은 배들은 홍해로 나가서 메카의 외항인 제다로 갔다. 제다는 곧 중요한 항구로 부상했다... 수에즈 운하의 원조라고는 하지만 트라야누스의 운하는 지중해 쪽으로 연결하지는 않았는데, 혹시 비잔틴 해군이 이 운하를 타고 홍해로 들어와서 순례를 방해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중해에 면한 알렉산드리아가 쇠락하는 대신, 홍해와 연결 가능한 푸스타트(올드 카이로)가 642년부터 이슬람 이집트의 수도로서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717-718년에는 이슬람 세력이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결정적 순간에 이슬람군 내의 콥트 기독교도들이 비잔틴 제국으로 투항했다. 레오 3세는 전력이 약해진 적들에 기습공격을 하여 '그리스의 불'(7세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개발한 화염방사 무기, 나프타와 생석회로 만든 것으로 추정하며, 물로 끄려 하면 불길이 더 크게 타올랐다고 한다.)로 포위선들을 파괴하고 육상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아랍인들은 북아프리카의 토착민 베르베르족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킨 후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서쪽으로 팽창해갔고, 급기야 8세기초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다.


서로마의 몰락 이후 봉건제가 강력하게 지배했던 유럽 중심 지역이 아닌 북부의 변경지역에서 교역의 돌파구가 열렸다. 북해부터 스칸디나비아 및 발트해에 이르는 연안지역들에서 해상 교역이 활기를 띠었다. 특히 네덜란드와 프리슬란트 지역을 중심으로 서유럽 내륙 지역과 영국,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등지를 연결하는 교역이 살아났다. 원래 이곳의 해안지역은 지대가 낮고 범람이 잦아 거주하기 힘든 곳이었다. 이 지역 거주민들은 인공적으로 큰 둔덕terpen을 만들어 작은 읍을 형성하고 주로 어업과 교역에 종사했다. 그중 도레스타드Dorestad가 8-9세기 중 가장 크게 발전했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남쪽 지방에 해당하는 이 교역시장emporium은 무엇보다 위치가 중개 교역에 유리한 덕분에 제법 번영을 누렸다... 이 지역은 돌연 바이킹의 침략을 받아 일시에 몰락했다. 특기할 점은 바이킹이 이 지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범포사용법을 배우고 항해술을 더욱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지중해에서는 고대부터 범포를 사용했는데, 북해에는 7세기에 도입되었다. 바이킹이 이 지역과 접촉하면서 범포를 알게 되고, 북부 및 동부 유럽에도 전한 것이다. 또 바이킹들은 배에 마스트를 세웠다가 해체했다가를 반복할 수 있게 개량했다. 범포는 놔두고 노만 사용하는 게 더 나은 곳에서는 아예 마스트를 내리고 항해했다. 이처럼 8-9세기에 항해술이 발달해서 원양항해가 가능해졌다.


독일어 자료에서는 하이타부Haithabu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헤더비Hedeby는 슐레스비히Schleswig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북유럽의 중요한 중개 도시였다.


비교적 평화로운 교류를 하던 스칸디나비아 지역 주민 일부가 서기 8세기 중엽 돌연 폭력적으로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바이킹**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을 비크(vik, wik)라고 하는데, 이런 곳을 공격한 사람들을 가리켜 바이킹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8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에 이르는 소위 '바이킹 시대'에 이들의 팽창은 크게 세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이킹은 크게 덴마크계, 노르웨이계, 스웨덴계로 나눌 수 있다. 그중 루스Rus(노젓는 사람들) 혹은 바랑고이Varangoi(선서를 한 동료)라고도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건너 동쪽과 남쪽으로 팽창해갔다.


바이킹은 러시아 땅에 머물지 않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비잔틴 제국에 도달했다. 전투용 도끼를 휘둘러대는 이 가공할 전사들은 '바랑기안 경호대Varangian guard'라는 이름으로 황제 경호대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북유럽 지역 경제 성장의 중요한 요소중 하나는 어업이다. 특히 청어와 대구 종류가 중요한 식량으로 올라섰다. 북유럽 어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2세기 이전부터 북부 독일 도시 상인들이 북해의 오래된 해상 교역로들을 활성화시켰다... 상호 협력하는 한자동맹(Hansa, Hanseatic League)을 형성했다. 다소 느슨한 형태의 동맹이 약 300년 가까이 존립하는 동안 점차 참여 도시가 늘어 170여 곳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자동맹의 활동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동유럽과 서유럽 간 교역을 중개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러시아의 모피, 발트지역의 호박, 스웨덴의 구리 같은 고가품에다가 밀과 호밀 등의 곡물, 맥주, 임산물 등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대신 직물과 소금 등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한 가지 특기할 상품은 청어다. 12세기 이래 청어는 한자 상인들의 대표상품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런데 청어가 많이 잡혀도 소금이 부족하면, 보존할 수도, 먼 곳에 판매할 수도 없다. 염장용 소금은 처음에 슬라브 지역에서 수입하다가 11-12세기에 뤼베크가 뤼네부르크 소금(암염)을 수입했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소금으로 평판이 높아 '흰색 금'이라 부를 정도로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염장 청어를 구매하기 위해 영국, 플랑드르, 북프랑스 상인들이 뤼베크로 몰려왔다. 이 현상은 대략 1250-1420년 기간동안 지속되었다... 사순절 중 육식을 금지하는 것을 비롯해 연중 여러 시기에 생선 소비를 장려한 가톨릭의 영향으로 생선 수요가 늘었다. 청어는 교역상품으로서 장점이 많았다. 염장청어는 3년동안 보존할 수 있다. 말린 대구stockfish는 며칠 동안 맑은 물에 담가둔 후에야 먹을 수 있지만 청어는 통에서 꺼내 바로 먹을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어부가 잡은 청어는 독일 상인이 판매했는데, 양과 질의 관리가 철저한 것으로 유명하다. 통 자체도 규격화되어 있고, 이 통에 최소 860마리를 넣어야 하며, 품질도 철저하게 관리했다. 현장에서 감독관이 검사한 후 통에 검수 표시를 해서 송출했다. 만일 파리에서 이상이 발견되면 이를 판매한 브뤼주로 돌려보내고 브뤼주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면 스칸디나비아로 돌려보내 그곳에서 손해를 배상하도록 했다. 만일 상인 속임수를 쓰다가 적발되면 파산을 면치 못했다.


1450년경 네덜란드인이 청어잡이에 달려들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빌렘 뵈켈스존Willem Beukelszoon이라는 인물이 개발했다고 알려진 방식에 의하면, 하링바위스haringbuis라는 둥근 배가 먼 바다에 머물며 청어를 잡은 다음 갑판에서 바로 생선의 내장을 따고 소금을 치는 처리를 하면, 정해진 때에 연락선ventjager이 찾아와서 보급품을 전해주고 청어를 싣고 항구로 돌아갔다... 이들은 또 청어를 통에 집어넣는 방식도 개선했다.


한자도시들의 성공요인 중 하나는 우수한 선박이다. 특히 발트해에서 사용하는 코그Cog선은 이 지역의 얕은 바다에 최적화한 선박으로 바닥이 평평하고 적재량이 큰 우수한 선박이다. 특기할 점은 1200년경 중앙타가 나온다는 점이다. 중앙타는 물고기로 치면 꼬리지느러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선박 조종을 혁신적으로 개선한 매우 중요한 발명이다... 가장 먼저 중앙타가 나온 곳은 중국인데...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1280년경 뤼베크시 인장에는 코그선에 두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 사람은 육상여행자 행색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선원 행색이다.


한자 상인들은 당시 지중해의 이탈리아 대상인이나 독일의 푸거Fugger 가문 같은 대규모 조직을 이루지는 못했다. 대신 베더레깅Wedderlegginge이라는 조직방식을 사용했다. 두 명의 동업자 중 한 사람이 자본의 2/3을 제공하고, 다른 사람이 자본의 1/3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업 활동을 하는데, 일정 기간 후 정산할 때 이익을 반씩 나눈다.


한자 동맹은 16세기에 이르러 국민국가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쇠락해갔다... 잉글랜드에서는 런던의 모험상인회사Company of Merchant Adventurers of London가 한자동맹과 충돌했다.


한자동맹의 쇠퇴는 유럽교역의 큰 흐름이 바뀐 사실도 반영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식민지 교역을 열었고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도 성장했다. 또한 지금까지 한자 동맹 사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청어잡이가 발트해에서 북해로 이전한 것도 특기할 요인 중 하나다.


11세기 이후 이슬람권과 비잔틴 제국 모두 해상력을 상실해갔다. 제노바와 피사는 티레니아해에서 이슬람 해적을 진압했고, 아드리아해에서는 베네치아가 비잔틴 제국에 함대 지원을 해주며 입지를 강화해갔다. 이슬람권과 비잔틴 제국의 분열과 약화가 이런 식으로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업 세력의 성장 배경으로 작용했다... 10세기를 경과하며 아바스왕조, 파티마왕조, 에스파냐 우마이야 왕조가 모두 자신만이 진실한 칼리프라고 주장하며 경쟁했다... 비잔틴을 위협한 것은 이슬람 튀르크 세력만이 아니다. 같은 기독교 세력 또한 위협을 가했다. 11세기에 노르만 기사들이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용병으로 많이 들어왔다.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자 지중해의 무슬림 지배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파티마왕조 이집트의 해군은... 960년대에 키프로스와 크레타를 비잔틴제국에 상실하여 약화된 상태였다... 파티마 왕조는 12세기 초중반 이스라엘 중부의 지중해에 면한 도시 아슈켈론Ashkelon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강력한 해상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제노바가 레콩키스타를 돕는 조건으로 특권을 받았다... 1147년 기독교 세력이 리스본을 탈환할 때에는 플랑드르, 노르망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 북유럽군의 도움을 받았다. 참가한 지역들 모두 교역 특권을 허락 받았다. 이처럼 지중해권은 전쟁과 교역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전쟁과 교역이 함께 진행되는 복잡다기한 과정에서 '중세 상업혁명'이라고 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277년 니콜로초 스피놀라Nicolozzo Spinola가 제노바에서 플랑드르로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지중해-대서양 항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역량 있는 배나 항해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업적 모티브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째는... 직물업에 필수적인 요소인 명만alum이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이탈리아 선박들이 이것을 북해 연안지역으로 수송했다. 둘째는 레반트 무역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십자군 세력의 공격을 받고 반대방향에서는 몽골세력이 침입해오는 상황에서 입지를 강화한 군부가 정권을 잡아 맘루크 제국을 개창한다...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점령했지만, 그 직후인 1260년 아인 잘루트Ain Jalut 전투에서 맘루크 군이 시리아 주둔 몽골제국군을 격파하고 축출했다. 이어서 서유럽의 침략세력들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반격을 가했다. 1291년에 아크레Acre를 점령한 후 이집트, 시리아, 아라비아 내의 성지들을 통제했다.


맘루크가 서구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항구들을 폐쇄하자 레반트 교역은 일시적으로 쇠락했다. 기존 무역로가 막히자 대신 떠오른 것이 흑해무역이었다. 대표적인 무역 중심지는 카파Caffa(우크라이나의 페오도시야)다.


1291년 비발디Vivaldi 형제의 모험 항해다. 레반트 교역이 몰락 직전이니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1291년 봄 제노바에서 우골리노 비발디와 바디노 비발디 형제가 남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으로 항해하려 한 것이다. 비발디 형제의 출항에 대해서는 연대기 작가 자코포 도리아Jacopo Doria의 기록이 있다.


맘루크 제국(1250-1517)은 조만간 이탈리아의 레반트 무역을 저해하는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 무역국으로 전환했다... 맘루크 제국이 필요로 하는 노예병사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이 공급했다. 노예는 주로 킵차크 초원 출신의 튀르크인과 코가서스 지방 출신의 시르카시아인Circassian이었다. 반대방향으로는 인도양에서 들어오는 향신료가 가장 비싼 상품이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수입상품은 원면이었다. 이탈리아로 들어온 원면은 남부 독일에서 받아 푸스티안fustian이라는 혼방 면직물을 대량 생산했다. 독일 상인들은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 근방에 상관fondaco을 두고 있었다. 남부 독일에서 개발한 은광에서 얻은 은을 가지고 와서 동방 상품을 구매하고 결제하면, 결국 이 은이 맘루크제국으로 들어갔다.


맘루크 제국의 등장으로 레반트 무역의 붕괴를 걱정했지만, 위기를 넘기자 오히려 맘루크 제국은 이탈리아 상업세력과 긴밀한 교역관계를 구축했다. 그와 동시에 이탈리아 상인이 새로 개척한 흑해 무역이나 대서양 항해는 그대로 발전했다... 외레순 항로***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소금과 포도주 같은 서유럽상품이 동유럽지역으로 가고, 대신 폴란드나 동프로이센의 곡물(밀과 호밀 등), 목재, 타르, 철, 대마, 아마 같은 원재료, 러시아산 모피 같은 사치품 등이 서유럽으로 들어왔다. 브뤼주 같은 도시는 상업과 직물업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그 다음 시기에는 안트베르펜이 유럽 내 교역과 해외 교역까지 중개하는 교역 및 금융 중심지로 성장한다.


*** 외레순(Oeresund, the Sound) 해협은 스웨덴 남단의 스코네 반도와 덴마크 동부 셀란섬 사이의 해협으로 길이 80킬로미터, 너비 약 5.6킬로미터이다... 덴마크의 국왕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는 이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하였는데, 이는 1857년까지 지속되었다. 지나는 선박의 단속을 위해 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요충지 헬싱괴르Helsingoer에 크론보르Kronborg성을 지었는데, 이 성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16-17세기에 통행세 수입은 덴마크 재정 수입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컸으나, 반대로 상인들과 선주들은 비싼 세금에 저항하곤 했다. 15-19세기 5세기에 걸쳐 보관된 통행세 장부는 북해와 발트해를 오간 선박과 상품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서유럽과 동유럽간 무역을 연구하는 데 핵심 자료이다.


13장 유럽의 해상 팽창


1321년 9월 24일 아비뇽. 베네치아인 마리노 사누도Marino Sanudo(일명 Torsello)가 교황 요한 22세에게 자신의 저서 <십자가에 충실한 자들의 비밀의 책>을 제시하며 예루살렘 회복계획을 제안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축적의 마파 문디mappa mundi(중세 세계지도)가 들어 있다. 제노바의 전문 지도 제작자인 피에트로 베스콘테Pietro Vesconte가 제작한 이 지도들은 지중해 너머의 세계를 자세히 그렸으며, 인도와 이집트를 포함해서 유럽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교역로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14세기에 유럽의 상인, 전략가, 모험가 등은 이미 전 지구적 차원의 사고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고를 더 발전시키는 데는 이슬람권에 보존되어 있던 고전의 재발견도 한몫했다. 대표적인 저작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수학자·지리학자·천문학자인데, 중세 서구의 지식인들은 잃어버린 그의 저서를 애타게 찾았다. 그책을 1409년 야코포 안젤리Jacopo Angeli(1360-1411)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여 소개했다.

비잔틴의 인문주의자 마누엘 크리솔라Manuel Chrysoloras(1345-1415)가 1390년대 외교 사명을 띠고 북부 이탈리아로 왔다가... <지리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제자인 안젤리가 이어받아 완수했다... 이 책의 라틴어 번역본은 15세기에 필사되어 학자들이 읽었고 15세기말에 베네치아, 울름Ulm 등 여러 곳에서 인쇄되었다.


이 책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지구 표면에 위도와 경도의 격자를 표시하는 법, 지구의 구형을 평면 위에 표시하는 방식 등 정밀한 방법론에 대해 숙고하게 해주는 동시에, 부록의 지도는 세계의 지리적 개관에 도움을 주었다. 피렌체에서는 이 책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대화 주제였다. 지구 크기, 대륙과 해양의 모습과 크기 비율, 더 구체적으로는 인도양의 규모, 열대 지역의 거주 가능성 여부, 이와 연관하여 새로운 해로 개척 가능성 등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다. 이와 관련된 정보들이 유럽의 기존 사고체계와 맞지 않아 논의를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가 크다... 지구 크기에 관해 콜럼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보다는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의 <이마고 문디Imago Mundi>의 주장을 따랐다.****


캉브레의 주교이자 추기경인 피에르 다이가 1410년경에 쓰고 1480-83년경 루벵에서 출판된 책으로, 제목은 '세계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세계 각지의 지리 정보를 제시하되 여기에 더해 책력, 천문, 점성술, 논증, 신학적 내용 등 다양한 정보를 망라하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다. 콜럼버스의 사고 형성에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450년경 베네치아에서 제작한 프라 마우로Fra Mauro의 지도... 를 보면 유럽이 이제 세계로 나아갈 지적·정신적 준비를 어느 정도 완수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프라 마우로 자신은 산미켈레섬에 있는 산미켈레 성당의 카말돌리회 수사라는 점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프라 마우로의 지도는 아프리카 회항으로 모든 바다와 모든 세계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지도에서 보여준 내용이 실제 서구의 해상팽창 항로가 된다. 프라 마우로는 디오고 카웅Diogo Cao,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이전에 이미 해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것이 가능하며 길이는 약 2,000마일이라고 '예언'한 셈이다.


1492년 극적으로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 계획안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콜럼버스의 기획이 성공 가능성은 낮으나, 혹시라도 이웃국가가 먼저 시도하여 성공하면 에스파냐에 타격이 클 것이라는 루이스 데 산탄헬(왕실서기로서 재정문제를 담당했던 관리)의 설득이 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곧이어 북아메리카에도 유럽선박이 찾아갔다. 처음 찾아간 유럽인은 카보토(조반니 카보토, 영국에서는 존 캐벗)였는데, 콜럼버스 1차 항해 이후 자신도 같은 모험을 시도하려 했다.

기대했던 금과 향신료는 못 찾았으나 대신 뉴펀들랜드 황금어장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1497년에 카보토가 돌아와서 전한 말에 의하면 물고기를 그냥 바스켓으로 건져 올리는 정도라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아메리카로 찾아가는 탐사도 이루어졌다. 1553년 3척의 배가 백해로 항해하여 중국으로 가는 북동 항로를 찾고자 했다... 리처드 챈슬러Richard Chancellor는 드비나Dvina강에 도착한 후 이곳에서 육로로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뇌제 궁정까지 찾아갔다.


'발견'은 호기심의 행위가 아니라 정복행위다... 그것은 눈으로 하는 게 아니라 칼끝으로 하는 행위다.


14장 유럽의 충격, 아시아의 대응


1571년에 이르면 소팔라와 나가사키 사이에 40여 개의 상관과 요새가 생겨났다. 포르투갈은 고아에 부왕이 자리잡고, 각 요새와 상관에 카피탄이라는 책임자가 부왕의 지시를 받으며 민정과 군사 문제를 집행했다.


1521년 지구 반대편의 멕시코에서는 소수의 에스파냐인이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하지만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반대로 포르투갈인이 처형당하는 결과로 끝났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첫 접촉부터 환영을 받았고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570년대부터 양국은 안정적으로 우호관례를 유지했다. 특히 중국 비단을 수입하고 은을 수출하는 것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중국이 왜구문제로 일본과 교역을 단절했고, 일본 역시 필리핀,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백으로 남겨진 중국과 일본간 교역을 포르투갈이 밀무역 형태로 대행한 것이다. 이를 안정적으로 하려면 일본내에 정착할 필요가 있었는데, 일본인의 호의를 얻는 방편 중 하나가 유럽산 화승총harquebus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중국교역에서 배제된 상태였으므로 중국해적들이 일본에 찾아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밀수행위를 했다. 이들이 찾는 중요한 상품은 은이었다... 역시 중국당국으로부터 배척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 사업에 끼어들어갔으며, 그래서 중국 '해적'과 함께 처음 일본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포르투갈은 1557년 중국으로부터 마카오 정주를 허락받기 전에 일본과 교역을 했고, 병풍, 라카, 부채 등 일본 상품을 알게 된다. 일본은 담배, 이베리아 과자 그리고 무기를 비롯한 신기술을 접하고 세계관을 넓혔다.


플랑드르에서 만든 시계는 리스본을 통해 고아를 거쳐 말라카까지 간 다음 이곳에서 스리랑카나 남인도에서 들여온 샌달우드와 교환된다. 이 나무는 마카오로 가져가서 금과 교환하고, 이 금은 일본 나가사키로 가져가서 병풍과 교환한다. 일본 병풍은 고아를 거쳐 리스본으로 간다.


1570년대 무렵부터 어려움을 겪었꼬 사업방식도 변화하였다. 이제 국왕은 사업 주체가 아니라, 다른 계약자에게 돈을 받고 사업권을 넘겨주는 계약자에 불과했다.

1578년 알 카사르 알 카비르 전투 패배의 결과 아비스 왕조가 단절되고 에스파냐에 합병된 것(1580-1640) 또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은 트리니다드Trinidad호를 비롯한 5척의 배에 2년치 보급을 싣고 237명의 선원을 데리고서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출항했다.

인도네시아의 티도레섬에 도착하여 출항후 처음으로 환대를 받고 상품을 교환하여 향신료를 실었다. 1522년 9월 6일 18명의 유럽인과 3명의 말레이인이 마침내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 도착했다. 2년 11개월 2주 결려 세계를 주항한 것이다.


1564년 2척의 갤리선과 2척의 소형선으로 구성된 선단이 멕시코의 나비다드를 떠났다. 선원 150명에 군인 200명이었다.

우그다네타(바스크 출신 Andres de Urdaneta, 1508-1568) 덕분에 경로를 잃지 않고 1565년 2월, 괌을 거쳐 필리핀의 사마르섬에 도착했다. 여러 섬을 탐사하다가 세부섬에 요새를 건설했다.

1656년 6월 1일... 산페드로San Pedro호가 세부에서 출항했다... 15주 항해 끝에 오늘날 로스앤젤레스 앞바다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섬에 도착했다. 이후 차가운 캘리포니아 해류를 타고 남동쪽으로 항해하여 10월 8일 아카풀코Acapulco에 도착했다.  


15장 제국과 플랜테이션


16장 동인도회사에서 제국으로


17세기에 포르투갈의 에스타도는 쇠퇴의 길을 겪었다. 1612년 시리암Syriam 항구의 상실로 버마와 인도 사이의 교역 주도권을 상실했다. 1622년에는 영국-이란 연합군에 의해 호르무즈를 상실하여 포르투갈 해외 사업의 전체 구조가 교란되었다... 결정타는 1641년 네덜란드의 말라카 점령이었다.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에스타도 대신 영향력을 확대해가서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대략 20여 곳의 상관을 차지하고 그곳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건설하게 되었다... 아시아 각지의 교역거점들을 통할하는 본부는 바타비아에 두었다.


찰스Charles 2세(재위 1660-85)가 1661년 포르투갈 공주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Catarina de Braganca와 결혼할 때 신부 지참금 명목으로 아프리카의 탕헤르와 인도의 봄베이 두 도시를 선물 받았는데, 잉글랜드 왕실은... 영국 동인도회사에 양도한 것이다. 이곳이 후일 영국동인도회사의 본부가 된다.


수입 캘리코 때문에 모직물, 견직물, 특히 린넨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종교탄압은 시마바라島原봉기(1637-1638)에서 정점을 맞았다.

다음해인 1639년 포르투갈인은 축출된 반면 네덜란드인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쇼군의 총애를 받았다.

1641년 나가사키의 작은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거류지를 옮겨가게 되었다. 이 즈음 일본의 쇄국정책이 틀이 잡혀서 일본의 대외교류는 쓰시마(조선), 사쓰마(류큐), 홋카이도의 마쓰마에(아이누), 나가사키(중국, 타이완, 바타비아) 이렇게 4곳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서구의 기술, 의학, 학문을 수입했다. 여러 제약이 있는 가운데에도 일본은 캠퍼Engelbert Kaempfer, 툰베리Carl Peter Thunberg,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 Franz von Siebold 같은 탁월한 서구 인물들과 교류가 가능했다.



4부 전 지구적 해양 네트워크의 발전

17장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18장 글로벌 경제의 성장


19장 제국주의의 바다


1859년 평화 우호 통상조약을 조인받기 위해 워싱턴에 대사를 파견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쇼군은 지난 5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일본도 근대 선박을 운용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간린마루호는 시험용 항해를 하고, 사절일행은 미국선박 포우하탄Powhatan호로 가기로 결정했다...

공식사절인 77명의 사무라이는 미국 배를 타고 태평양을 무사히 건넌 다음 기차를 타고 파나마 지협을 넘었다... 워싱턴에 도착해서 5월 17일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을 만났다. 이때 그들은 에보시烏帽子(남성이 쓰는 검은 모자)를 쓰고 비단 기모노 위에 사냥의상을 착용했으며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측 인사들이 소박한 프록코트를 입고 있고 여자들도 함께 따라 나온 데다가 식사 후에 남녀가 춤추는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후에는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자기네 같으면 벌써 칼을 뽑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미국 여러 도시를 돌며 병원, 천문대 등을 둘러보고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1860년부터 쇼군체제가 몰락하는 1867년까지 300명이 해외방문 경험을 했다.


20장 해군의 발전



5부 해양의 오늘과 내일

21장 바다의 현대사


22징 미래의 바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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