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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n 07. 2024

물류는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다마키 도시야키

다마키 도시야키, <물류는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시그마북스, 2020.7.15.



제1장 페니키아인이...


페니키아인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살며 내륙 무역을 담당했던 아람인과 종종 대비된다. 아람인은 시리아 사막 등에서 낙타를 이용한 대상무역을 했고 페니키아인은 해상무역으로 활약했다. 또 아람인은 히브리문자, 아라비아문자, 시리아문자, 소그드문자, 위구르문자의 모체가 될 아람문자를 만들었고 페니키아인은 아직 상형문자의 특징이 남아있는 고대 알파벳을 선문자로 개량해 오늘날 알파벳의 초석을 마련했다.


... 원래는 레바논 백향목으로 불리는 삼나무를 수출하다가 그것으로 배를 만들어 해운업을 시작한 것이다.


... 페니키아인의 무역네트워크는 전 지중해에 걸쳐 있었다. 전성기에는 서아프리카, 홍해를 거쳐 인도양까지 뻗어나가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이 홍해에서 아프리카 동부를 거치고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일주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페니키아인이 건설한 도시국가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시돈과 티루스다. 이 중 티루스는... 솔로몬왕(재위 기원전 965-926년경) 시대에 큰 발전을 이룩했다. 티루스가 (야훼의) 신전을 건설할 때 꼭 필요한 양질의 백향목을 솔로몬에게 보냈고 솔로몬은 그 보답으로 대량의 밀과 올리브유를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신전이 완공되기까지는 20년이 걸렸다. 그동안 티루스는 현장에 많은 노동자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목재의 벌채 및 운송과 내부 비품, 도구류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노하우를 제공했다.

티루스와 솔로몬의 공동사업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솔로몬왕이 대형선박을 만들어 홍해무역에 나서자 티루스가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어 홍해의 무역을 장악하고 다양한 도시를 왕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티루스의 활동범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아라비아 반도와 소아시아까지, 에게해부터 지중해 서쪽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런 무역 네트워크는 기원전 800년경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북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는 기원전 12-11세기에도 티루스를 압박한 적이 있는데, 그 정책이 계속 이어져 기원전 9세기가 되자 지중해 원정이 일상화 되었다. 따라서 티루스를 비롯한 모든 페니키아인의 도시가 지중해 서쪽으로 진출해 식민 도시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티루스는 이처럼 아시리아에 정복당했다가 이후 부활해 지중해 무역으로 다시 번영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전반에 또 한 번 신바빌로니아왕국(기원전625-539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13년간 포위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제국이 페니키아인의 무역활동을 보호한 덕분에 물류의 거점으로 다시 번영할 수 있었다...


티루스의 식민 도시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카르타고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20년에서 기원전 814년무렵에 건설된 도시로, 기원전 6세기부터 서지중해무역의 중심지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는 곡물이 부족해 다른 지역을 침략했다. 그중에서도 고대로마는 많은 노예를 부렸는데, 특히 속주의 대농장(라티푼디움)에서 노예의 노동력을 많이 이용했다... 만약 노예가 없었다면 그들의 경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시돈과 티루스를 함락시켰을 때 수많은 페니키아인이 카르타고로 이주했다. 그때부터 카르타고는 상업국가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카르타고 상선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브리튼섬까지 진출해 주석 등을 수입했다.


... 고대 로마는 카르타고의 물류시스템 덕분에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 물류측면에서 보면 로마가 카르타고의 후계자라고도 할 수 있다...



제3장 이슬람 왕조는...


인도양 해역사학자로 유명한 야지마 히코이치에 따르면,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 바그다드는 주변 지역에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상징으로, 또 부의 원천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무슬림 상인은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서 다양한 물자(향신료, 약물, 금, 납, 주석, 보석, 목재, 쌀, 콩, 열대산 과일, 동물 피혁, 상아, 가축, 섬유원료)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그 대가로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부의 도시에서 생산된 의료품, 깔개, 금속제품, 도기, 유리용기, 장신구, 금은 화폐, 무기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온 중개 무역 상품을 수출했다.


인도양에서 사용된 배는 일반적으로 다우선이었을 것이다...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은 아프리카 동해안과 인도 서해안으로 장거리 항해를 떠날 때 다우선을 썼으며 인도양 연안에 사는 사람들도 다우선으로 물건을 운반했다...

... 야지마에 따르면, 9-10세기부터 시라프(페르시아만 동해안의 중간쯤에 있는 항구) 출신의 무슬림 상인이 홍해, 동아프리카 해안, 인도 서해안에서까지 활약했다고 한다. 그들의 무역 네트워크는 중국 광저우에도 미쳤다...


이 시대(당-송-원)에는 해상을 중심으로 한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인도의 면직물이 홍해로, 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로 보내져 서아프리카의 세네갈과 감비아까지 도달했다. 아마도 이면직물은 도중에 카이로, 누비아(이집트 남부와 수단에 위치한 지역), 아비시니아(현 에티오피아)의 상품 집산지를 경유한 다음 사하라 사먁을 종단하는 대상에 합류해 육상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16세기에는 힌두교도인 구자라트 상인이 인도양 동부의 벵골만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동아프리카와 중동 사이의 무역을 확대해나갔다. 일본 연구진 야부시타 노부유키는... "15-16세기에 구자라트 왕국이 인도 내륙의 정치/ 경제적 지배의 속박을 벗어나 독립했다..."


구자라트 상인은 말라카에 독자적 공동체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자인 무슬림에게 항구 운영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 야지마에 따르면 당시 인도양 세계 내 교류의 핵심이었던 인도 말라바르 해안에 무슬림 상인은 물론 시리아 정교도, 유대교도, 조로아스터교도, 힌두교도 등 다양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16세기초 인도를 방문했던 토메 피레스는...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 왕국은) 거래가 매우 왕성한 곳이며 말라바르, 클링, 체티 등 다양한 지방에서 온 이슬람교도와 이교도 상인이 있는 곳이다."



제4장 바이킹이...


스톡홀름에서 서쪽으로 약 29킬로미터 떨어진 벼르크외섬의 비르카, 이윌란 반도의 뿌리 부분에 위치한 하데부(하이타부), 영국의 요크, 아이리시해의 더블린, 프랑스의 루앙 등이 바이킹의 도시적 집락이자 교역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자동맹은 일반적으로 13세기경 북부 독일에 새로 탄생한 상업 공동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은 바이킹의 상업 네트워크를 계승한 상업공동체였을지도 모른다...


바이킹이 썼던 배는 클링커 이음* 방식을 채용한 길쭉한 배로 물에 얕게 잠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 각 판재들을 서로 겹치게 해서 못을 박아 고정했다. 튼튼한 것이 장점... 바이킹의 배는 클링커 이음이 만들어낸 유선을 따라 물을 가르는 효과가 있어 당대 어떠한 배보다 기동성이 좋았다고 한다.


.. 뤼베크에서는 밀랍, 동, 동물기름, 피혁, 생선기름 등을 함부르크로 보냈고 함부르크에서는 모직물, 기름, 약재, 청어, 비누, 명반 등을 뤼베크로 보냈다.


뤼베크가 유통거점이었던 시대는 15세기말로 끝났다. 이 무렵 네덜란드가 항해의 난관이었던 외레순 해협의 해상경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 특히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 곡물이 발트해 지방에서 꾸준히 수출되었는데, 곡물은 부피가 커서 육상 운송에 적합하지 않았다... 발트해지방의 상품이 네덜란드 배로 지중해까지 보내진 셈이다. 결국 발트해가 지중해를 삼켜버린 셈이다.



제5장 중국은...


은이 신세계에서 중국으로 운반되는 경로는 세 가지가 있었다. 제일 중요한 첫번째 경로는 멕시코 서해안의 아카풀코와 필리핀제도를 지나는 태평양 경로였다. 스페인은 자신들이 1571년에 건설한 도시인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비단과 은을 교환했다... 18세기말에는 대량의 마닐라산 여송연**이 아카풀코를 경유해 북미의 스페인령으로 수출되었다.


**엽궐련(葉卷煙)은 담배의 한 종류이다. 시가(cigar), 잎궐련이라고도 한다. 말린 담뱃잎을 통째로 돌돌 말아 만들며, 모양에 따라 얇고 작은 시가, 길고 가느다란 엽궐련, 크고 퉁퉁한 코로나가 있다. 스페인어로는 시가로(cigarro), 혹은 뿌로(puro)라고 하며, 쿠바산을 따로 아바노(habano)라고 한다. 필리핀의 루손섬에서 나는 엽궐련은 "여송연(呂宋煙)"이라 부르는데, "여송"은 필리핀의 루손섬의 중국어식 표기이다.

... 1702년 멕시코 당국의 보고에 따르면 매년 14만 3,757킬로그램의 은이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 은이 중국의 비단, 도자기, 리넨 등과 교환된 것이다.


두번째는 멕시코에서 파나마지협을 거쳐 스페인의 세비야로 가는 경로인데, 이 경로로도 대량의 은이 포르투갈에 밀수되었다. 그 은과 함께 페루의 地金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밀수되기도 했다. 은은 여기에서 다시 출발해 희망봉을 거쳐 인도의 고아로 보내졌다. 이어 포르투갈인은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반사이에 그중 연간 6,000-3만 킬로그램의 은을 다시 마카오로 운반했다.


세번째 경로는... 신세계에서 스페인의 세비야로 합적적 또는 비합법적으로 운반된 은이 런던과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지고, 그것이 다시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동남아시아로 운반된 후 중국산 비단 및 도자기와 교환되는 경로였다.



제6장 지중해가 쇠퇴하고 발트해와 북해가 번영한 이유


발트해는 지구의 북쪽에 위치한 바다로 중심 위도가 북위 58도다... 일조 시간도 여름에는 길지만 겨울에는 매우 짧아서 동지무렵에는 약 6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또 바닷물이 증발하지 않아 염분농도가 낮기 때문에 발트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소금을 수입해야 한다. 한편 지중해는 물 유입량이 적은데다 덥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바닷물이 끊임없이 증발하므로 염분농도가 높다. 따라서 발트해와는 반대로 소금을 수출한다...


발트해는 사실 남북으로 긴 바다다... 근세이후 이 지방사람들은 보트니아만에서 중요한 해운자재인 타르를 생산했고, 그것을 스톡홀름을 거쳐 서유럽 제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또 발트해 연안에서는 밧줄에 사용되는 아마와 마, 해운 자재인 목재, 선박에 사용되는 닻과 못 등에 쓰이는 철을 생산해 서유럽으로 수출해왔다. 이것들은 서유럽의 해상발전에 꼭 필요한 자재였다...


... 지중해에서는 삼림이 한번 파괴된 후 다시 회복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발트해 지방에서 삼림이란 재생 가능한 자원이다...


... 1406년 제노바에 창설된 산조르조 은행이 세계 최초의 은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은행에서는 환전과 대출, 투자기능이 크다 발달했을 뿐 오늘날 은행의 금융중개 기능(개인에게서 받은 돈을 기업에 빌려주는 기능)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이 기능은 19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에서 발달했다.


18세기에 들어서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등장했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이 국채를 발행하고 의회가 그 변제를 보증하는 소위 '펀딩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다.


... 어떤 사고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일어날지 모른다면 진짜 보험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 확률론이 당시 이탈리아에 존재했다 해도, 보험회사의 사업이 영속할 것을 전제했다면 매우 유효했겠지만 영속화를 전제하지 않은 사업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 베네치아는 목재뿐만 아니라 선체까지 외국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성된 배를 외국에서 구입하는 것을 정부가 법률로 금했지만 결국은 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 영국은 북해연안의 덴마크(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에 석탄을 수출했다... 삼림자원이 풍부한 발트해 지방에서도 대량의 목탄이 생산되었다...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천연자원의 고갈이라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었다.


... 지중해에서는 오랫동안 노예가 노를 젓는 갤리선을 활용했다... 지중해의 상인이 이처럼 노동집약적인 선박을 활용한 것은 그들이 향신료 같은 고가의 상품을 거래했고 임금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번영은 저렴한 노동력이 사라지면 끝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제7장 새로운 희망봉 경로는...


1503년에는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캘리컷을 공격했고 1505년에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인도의 초대총독으로 부임해 탄자니아의 킬와를 식민지화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1509년에 알메이다가 디우해전으로 이슬람 맘루크 왕조의 함대를 격파한 후 포르투갈은 아라비아해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알부케르크는 1510년에 고아를 점령하고 견고한 요새를 건설했다... 1511년 말라카 왕국을 멸망시켜 포르투갈이 말루쿠 제도에서 쉽게 향신료를 수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16세기 후반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된 후추의 양... 초기에는 레반트 경로와 희망봉 경로 사이에 큰 차이가 없지만 1641년 이후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희망봉 경로만 활용하게 된 탓에 레반트 경로가 거의 소멸한 것을 알 수 있다.


포르투갈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스페인이 통일된 후 기독교도로 전향한 뉴크리스천 집단이 포르투갈의 대외 진출을 도왔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이전에 믿던 유대교를 그대로 믿고 있었다.


... 1690년대에 브라질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브라질-리스본 간의 무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무역에서 얻은 적자를 브라질에서 수입한 금으로 메웠다. 이렇게 영국으로 흘러들어간 금은 영국의 금본위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부의 지시에 따라 1692년부터는 인도에서 출항한 모든 포르투갈 선박이 브라질 북동부의 바이아를 거쳐 리스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들은 브라질에 들러 아시아에서 구입한 인도산 면, 중국산 도자기와 비단을 금으로 교환했다.


또 포르투갈인은 1580년대까지 인도산 면을 북아프리카와 레반트에 보냈다. 서아프리카에서는 인도의 구자라트, 신드, 캄바트에서 구입한 품질 낮은 직물과 노예를 교환했다. 노예무역에서 얻는 이익은 매우 컸다. 브라질에서는 서아프리카에서 구입한 가격의 다섯 배, 카리브해와 멕시코 시장에서는 여덟 배의 가격으로 노예를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면과 향신료를 교환했다. 또 서아프리카에서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의 리넨을 금이나 상아와 맞바꾸었다. 즉 유럽인이 16세기 후반부터 유럽과 아시아의 직물을 서아프리카까지 운송한 것이다.


포르투갈인은 브라질에서 금뿐만 아니라 아시아인이 좋아할 만한 물품들을 가져가서 판매했다. 예를 들어 마카오에서는 코담배와 설탕을 판매했다...



제8장 동인도회사의...


포르투갈이라는 국가는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아시아내 포르투갈 상인의 세력은 18세기까지도 여전했다. 그들은 18세기 중반까지도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에서 향신료를 수입했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301년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6년에는 구졸파에 살던 15만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사파비 왕조의 아바스 1세가 건설한 신졸파로 이주했다.

아르메니아인은 나라없는 민족이지만 17세기 이후 이란의 신졸파를 근거지로 삼아 육상무역에서 활약했다...

아르메니아인은 18세기까지 영국의 대리자가 되어 무굴제국, 사파비 왕조와의 외교 및 금융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9장 네덜란드가...


... 1570년경부터 지중해에 네덜란드 선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폴란드는 당시 발트해지방의 경제적 중심이자 유럽 제일의 곡창이었다. 토양은 생산성이 낮았지만 당시 세력이 강했던 귀족층(슐라흐타)이 남는 곡물을 외국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으므로 곡물 생산과 수출에 적극적이었다...

폴란드곡물의 대부분은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배에 실려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졌다... 이 무렵 네덜란드 선박이 유럽 선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에서 3분의 2쯤 되었다고 하니, 네덜란드는 이미 곡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관한 유럽 물류의 중심이 되었다.



제10장 팍스브리태니카가...


영국은 1651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항해법을 제정했다...

... 1651년 크롬웰이 항해법을 제정한 것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영국은 1660년에 일어난 왕정복고 이후 무역량-특히 유럽외 세계와의 무역량-을 크게 늘렸다. 랄프 데이비스는 이것을 '상업혁명'이라 불렀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말에 영국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유럽 최대의 해운국가로 발돋움했다고 한다...


1886년에 출간된 이탈리아 소설 <쿠오레>에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단편동화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19세기말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증기선 정기항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1850년대 중반에는 쾌속 클리퍼 범선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항해의 규칙성 측면에서 현저히 떨어졌다. 반면 증기선은 범선만큼 풍향에 좌우되지 않는다...


... 1900년경에는 세계 상선의 절반이 영국 선박이었다고 하니...


... 1710-1910년 사이 영국의 무역수지는 거의 적자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해운업으로 발생한 수입이 늘기 시작했다...



제12장 ... 세파르디


세파르디는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드는 법을 카리브해에 전파하고 힌두교도로부터 다이아몬드를 수입했으며 지중해에서 산호를 수줄하는 등 세계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78년 스페인내 유대인 20만명 중 10만명 정도가 개종을 거부하고 포르투갈로 떠났다... 포르투갈왕 마누엘... 은 1497년 3월 19일, 4-14세의 모든 아이에게 가톨릭 세례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이때 기독교로 전향한 사람을 '뉴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1500년대초 뉴크리스천은 지금 벨기에 땅이 된 안트베르펜에 정착해 무역업을 시작했다...

... 1579년 이후 세파르디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이베리아 반도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탈출해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세파르디는 함부르크에도 거주했다...


... 16세기말에는 브라질 북동부의 페르남부쿠와 바이아가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가 되었다. 둘 중 페르남부쿠는 17세기초에 잠시 네덜란드령이 되었다가 1654년에 다시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에 카리브해의 네덜란드령 식민지에서도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는 이곳에서 네덜란드인 농장주가 노예를 활용해 사탕수수를 재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네덜란드인이 아닌 세파르디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에서 탈출한 세파르디가 카리브해 일대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 리보르노에 사는 세파르디가 원래 포르투갈이 취급했던 동방의 다이아몬드를 수입하게 되었고 그대가로 지중해의 산호를 동방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제13장 영국의...


일본 역사학자 가와키타 미노루는 이때의 상황을 "동인도의 차와 서인도제도의 설탕이 찻잔 속에서 만나자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제14장 영국에서...


... '공업화 이전의 공업화'를 '프로토 공업화'라 한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프랭클린 멘델스... 가 1972년에 발표한 논문 '프로토 공업화-공업화의 첫 국면'은 경제사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 사이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의 일부 농촌이 곡물을 생산하는 농업지대와 아마, 마, 리넨 등 섬유제품을 생산하는 공업지대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멘델스는 플랑드르 지방이 리넨을 더 많이 생산하게 된 이후 근린지역에서 곡물을 수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구가 증가하면 농작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서 섬유제품을 생산하게 되고 그 결과 농업을 위한 땅과 공업을 위한 땅이 분리되므로 공업생산과 농업생산이 모두 증가한다는 것이다. 멘델스는 이런 현상이 자본주의적 경제를 성장시켰다고 주장했다.


멘델스에 따르면 프로토 공업화가 공업화의 첫번째 국면이고 산업혁명이 두번째 국면이다... 그러나 지금 프로토 공업화 이론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 프로토 공업화의 주 생산품은 아마, 마, 리넨 등이었다. 이것들은 선박의 로프나 돛 등에 쓰이는 해운 자재였으며 그중 리넨은 노예가 입는 옷에도 사용되었다... 유럽의 농촌이 공업지대와 농업지대로 나뉜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 공업지대란 유럽의 대외진출에 필요한 해운자재를 공급하는 지역이었다고 봐야 한다.


... 함부르크는 유럽에서 제당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였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직물 공업이 발달한 덕분에 일어났다. 신세계 식민지에서 재배된 면화를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다시 말해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었으므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대서양 경제의 형성에는 발트해 지방에서 생산된 해운자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반대로 영양이 부족하기 쉬운 발트해지방 사람들에게는 신세계에서 생산된 설탕이 중요한 열량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 유럽은 외부 지역의 소비재를 흔히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사회가 풍요롭다는 증거다. 유럽인은 이처럼 다양한 소비재를 구입하기 위해 시장에서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생활 수준을 끌어올렸다. 유럽 외의 다른 지역에는 아마도 이런 역동성이 없었을 것이다.



제16장 19세기...


<세계화와 역사>를 통해 19세기의 세계화를 논했던 오루크와 윌리엄슨에 따르면, 다양한 상품의 국가별 가격 차이가 없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세계화가 182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유럽과 아시아는 한층 가까워졌다...


앵거스 매디슨(1926-2010년)은... 1870년 아시아의 1인당 GDP가 1500년보다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 쓰노야마 사카에의 논문과 저서의 내용... 쓰노야마는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을 면공업이 주도한 단계(1760-1850년), 제철업이 주도한 단계(1850-1873년), 자본 수줄이 주도한 단계(1873-1913년)으로 나눈다...


... 유럽 전역에 철도망이 깔린 덕분에... 19세기에는 안데스 산맥에서 수입된 감자가 독일 각지에 공급되었다... 또 설탕의 원료가 열대산 사탕수수에서 유럽산 사탕무우로 바뀌었다... 철도 덕분에 유럽의 내륙까지 신선한 물고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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