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서양 철학에는 존재론이 있다. 그에 반해 동아시아 철학(유교, 도교)에는 존재론이 없다. 존재론이 없으면, 인식론이 없다. 서양 철학에는 신이 있다. 동아시아 철학에는 신이 없다. 신神 대신 도道가 있고, 이理와 기氣가 있다. 이렇게 표피적 지식을 쌓으면서 몇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이제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서의 차이임을... 이것이 바로 과학의 유무를 결정지은 지점임을... 그리고 그것은 죽음과의 정면 대결을 한 지역과 죽음의 사유를 회피한 지역 간의 차이임을...
서양 철학을 처음 배우게 되면, 존재론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그 존재론과 또 인식론을 왜 학문으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철학(동아시아 또는 중국 철학)에는 존재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재론이 없어도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며 잘 살아갈 수 있고, 또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존재론이 필요한 것일까? 이렇게 반문하곤 했다. 또 마찬가지로, 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에선 왜 신神이라는 개념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하는 반발심이 거듭 일었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은 그러한 절대신이 없어도 문제없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예전에 우리가 (우리 조상들이) 알지도 못했던 이국의 신에게 죄의식도 생기지 않는 원죄를 빌어야 하는 것일까? 의아해하며 살아왔다. 이 시절 나의 가장 좋은 논리적 후원자는 부처이었다. 부처는 신의 존재가 없이도 세상을 설명하며 허례허식으로 답답한 모든 전통적 담론을 공空의 세계관으로 일거에 날려버린다. 진정 시원하고도 명쾌한 가르침이었다.
어쨌든 과학에 의해 서양이 동아시아를 압도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이제 과학에 의해 기술이 발전하고, 급기야 그 금자탑인 인공지능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마당에 과학이 부재하였던 동아시아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지혜의 빛] 유튜브의 <존재론과 서양의 주류 철학적 전통>이라는 짧은 강의를 보게 되었다. 다음은 그 강의에서 내가 감명받은 주요 내용이다.
신칸트학파의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1882-1950)은 1935년에 발표한 <존재의 기초>에서 '정재Dasein'와 '상재Sosein'를 얘기한다. 정재定在란 무엇이 존재한다고 할 때의 단순한 '있음'이고, 상재相在란 그 있음의 계기인 내용이다. 즉 상재란 있는데 무엇이 있는가? 할 때의 그 '무엇'에 해당한다. 이처럼 존재란 '있음'과 '무엇'으로의 있음이라는 두 계기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통 존재론의 입장에서 번역하게 되면, 정재란 현존現存exitentia을 의미하고, 상재란 본질本質Essentia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인간에 적용하면, 인간이 살아 있다고 할 때의 외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삶 자체는 현존이며,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다. 이때 인간의 영혼은 어떤 인간(몸)을 내용으로서 규정하는 이데아가 되며, 따라서 서양에서 영혼은 영원불멸이다.** 이러한 불변의 영혼과 이데아를 정의하는 생각의 근저에는 파르메니데스(B.C. 510년경-450년경)의 철학이 있다. 그는 인간은 있는 것에 대해서만 탐구할 수 있고 없는 것은 없으므로 생각할 수 없고 탐구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유가 플라톤(B.C. 428년경-348년경)에게 이어져 현세의 변화를 거듭하는 생성과 소멸의 현상에서 진리를 탐구하려면, 현상의 표면에서 우리의 인식을 흐리는 '없음'의 이끼를 제거하고 영원불변하는 것(이데아)으로 사유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 그리고 영원불변의 절대자 또는 제1원인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유일신관과 접목하여, 후대에 교부철학의 완성을 본다. 이때 영원불변의 사유는 절대자를 믿는 유일신 기독교의 세력 확장을 통해 지중해와 유럽문명에 강력하게 자리잡게 되는데, 그 영향력은 결국 훗날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을 낳게 되는 또하나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과학자들 또한 신의 본질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구인들은 영원한 것들의 질서를 통한 논리학의 발전을 통해 필연과 개연을 구분하고, 연역적 사고로 귀납적 사고를 포섭하여, 기하학과 실증주의 그리고 나아가 과학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짚어보고 싶은 것은 '죽음'이다. '죽음'에서 육체(형식)의 소멸과 영혼(내용)의 불멸로 사유한 서양철학은 결국 검토할 수 있는 것(존재)과 검토할 수 없는 것(당위)의 구분을 통해 조금씩 우주의 비밀의 베일을 (천문학, 화학, 의학 등으로) 벗겨낸 반면, '죽음'에서 육체의 소멸뿐 아니라 영혼도 소멸한다고 본 동아시아 철학은 끝없는 있음과 없음의 혼합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과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도덕철학만을 구축하였다. 도덕철학은 존재를 탐구한 진리가 아닌, 한 집단이 생존하기 위해 그 해결책으로 경로의존을 거듭해온 문화적 선택의 당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리의 결집에 따른 힘의 크기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는 끝없는 당쟁의 혼란을 우리 역사에서 지겹도록 보게 된다.
논어의 술이편에서 공자는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통상 동아시아의 유교적 합리성의 출발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해 본다. 죽음에 대해 정면대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고, 주관과 객관 그리고 인식론 등에 대해 사유할 계기를 잃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유일신관이 없었기에 절대자에 대한 사유도 부족하였다. 결국 죽음에 대한 태도가 과학적 사유의 틀의 유무를 결정하였다.
Note:
이글은 유튜브 [지혜의 빛]의 <존재론과 서양의 주류 철학적 전통> 강의에서 존재론에 관한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소광희, <20세기 존재론의 두 기수 : N. 하르트만의 '비판적 실재론'과 M.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 한국하이데거학회, 2024, p.60.
**그에 반해 동아시아에서는 인간이 죽게 되면, 그의 영혼은 혼과 백으로 나뉘어져,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흩어져 소멸하게 된다. 그 소멸의 기간은 통상 100년으로 보며, 그리하여 우리는 4대 봉제사를 지낸다 ( [1대 : 25년] * 4 = 100년).
***괴력난신 : 주자는 이를 괴이, 용력, 패란, 귀신으로설명하였다. 괴이 : 괴이하고 기괴한 일들, 용력 : 믿을 수 없는 힘이나 폭력, 패란 : 난세의 반란이나 신하가 왕을 해치는 등 무도한 행위, 귀신 : 초자연적이라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일들. (나무위키 참조)
****노자 도덕경 4장에서 노자 또한 '나는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결국 유교에서나 도교에서나 중국철학은 제1원인에 대해서는 심오한 사유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 우리에게 인도게르만의 철학적 전통인 불교가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주기도 한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전통에서 자라난 불교이지만 불교는 영원불멸한 어떤 것도 없다고 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존재론이 없는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이 사상은 무리없이 격의되어 이해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