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선생
존 로(John Law)의 화폐 이론과 금융 정책: 현대 경제학에 선구적인 사상과 정책 실험
존 로(1671~1729)는 18세기 초 혁신적인 화폐 이론과 과감한 금융 정책 실험을 통해 경제사에 논쟁적 족적을 남긴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사상가이다britannica.com. 그는 프랑스에서 지폐 남발과 투기 열풍으로 악명높은 “미시시피 버블”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동시에 지폐 발행, 신용 창출, 중앙은행 개념 등 현대 금융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여러 아이디어를 선구적으로 제시하였다britannica.com en.wikipedia.org. 본 보고서는 존 로의 생애와 사상 형성 배경을 살펴보고, 그의 주요 저작인 『화폐에 관한 고찰』(Money and Trade Considered, 1705)의 내용을 요약한 뒤, 지폐 발행과 신용, 중앙은행 구상 등 화폐 이론 측면의 기여와 정책 실험을 분석한다. 아울러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관점에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시대를 앞서갔는지 평가하고, 경제사상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와 계몽주의 사조와의 연계성을 논한다. 끝으로 그의 체계에 대한 동시대의 비판(투기와 거품 문제)과 장기적인 영향(현대 금융 시스템과의 연속성)을 고찰한다.
1. 생애 및 사상 형성 배경
존 로는 1671년 에든버러의 금융업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세공인이자 은행가로, 로는 청소년기에 가문의 은행 업무를 배워 일찍부터 화폐와 금융에 접했다en.wikipedia.org. 이후 런던으로 건너가 수학, 상업, 정치경제학을 수학하며 금융이론의 기초를 닦았다britannica.com. 젊은 시절 그는 도박으로 명성을 얻을 만큼 확률 계산과 위험 관리에 능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경제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npr.org.
1694년 로는 런던에서 벌어진 결투 사건으로 살인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대륙으로 도피하였다en.wikipedia.org npr.org. 그는 망명지인 암스테르담에서 당시 유럽 금융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의 은행 운영과 지폐 제도를 연구하며 견문을 넓혔다britannica.com. 1700년대 초까지 유럽 각지를 돌며 금융 문제를 숙고한 로는, 1705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자신의 화폐 이론을 정리한 책 『화폐에 관한 고찰』을 출간하고 이를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하였다britannica.com. 이 제안서는 국가은행 설립과 지폐 발행을 통한 통화 공급 확대를 골자로 했으나, 보수적인 의회는 그의 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707년 잉글랜드와의 합병으로 스코틀랜드 자체 입법 기회를 상실하자, 로는 조국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럽 대륙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en.wikipedia.org.
여러 국가에서 구애 끝에 로는 1715년 프랑스로 무대를 옮겨 기회를 잡았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 치세의 전쟁들로 국채가 산더미처럼 쌓인 재정 파탄 상태였고britannica.com, 섭정공 필리프 도르레앙(어린 루이 15세의 섭정)은 로의 제안을 채무 해결책으로 주목했다. 로는 국가 부채를 상환하는 대가로 중앙은행 설립과 식민지 개발회사의 경영권을 부여받는 조건을 제시했고mapforum.com, 1716년 마침내 그의 계획을 시행할 공식 허가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로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이론을 시험해볼 역사적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2. 주요 저작 요약: 『화폐에 관한 고찰』
로의 대표 저작인 『화폐에 관한 고찰: 무역과 화폐에 대한 고찰, 그리고 국가에 화폐를 공급하기 위한 제안』(Money and Trade Considered, with a Proposal for Supplying the Nation with Money)은 1705년 간행된 초기 경제학 논설로서, 그의 혁신적 화폐 이론이 집약된 작품이다britannica.com. 이 책에서 로는 스코틀랜드 경제가 왜 stagnating(정체)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고민하며, 통화 부족이 무역 부진과 경제 침체의 원인이라고 진단하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17세기 말 식민투자 실패(다리엔 계획의 파산)와 연이은 기근으로 은화 유통이 극도로 부족했고en.wikipedia.org, 화폐 공급을 늘릴 혁신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로는 잉글랜드나 네덜란드 등 여타 국가들의 번영과 대비되는 스코틀랜드의 빈곤을 분석하며, 기존 금은 본위 화폐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방안으로 “토지 은행(land bank)”을 통한 지폐 발행을 제안했다en.wikipedia.org.
구체적으로, 로는 부동산 가치에 기반한 지폐를 발행하여 이것을 법정통화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통용되던 은화는 신대륙산 귀금속 유입으로 가치가 불안정하게 하락하고 있었고(16~17세기의 물가혁명 경험)en.wikipedia.org, 공급 부족으로 교환 매개 수단으로서 경제 활동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는 토지의 가치가 금은보다 안정적이며 보존 비용이 들지 않는 실물자산이므로, 토지를 담보로 한 지폐가 금은 화폐를 대체하면 통화 공급을 늘리면서도 화폐 가치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았다en.wikipedia.org. 나아가 이러한 신용화폐의 공급 확대가 생산과 고용을 늘리고 무역을 활성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저서에서 “화폐량이 증가함에 따라 교환의 불편이 해소되고, 놀고 있던 빈민이 일자리를 얻으며, 경작지와 생산물이 늘고, 제조업과 무역이 발전하였다”고 역설하면서, 화폐 공급 확대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역사적 사례로 설명했다tcd.ietcd.ie. 이러한 주장은 후일 케인스주의의 유효수요 이론을 방불케 하는 통찰로서, 공급 부족으로 인한 실업과 자원 유휴를 통화 정책으로 완화하려는 발상의 선구적 사례였다.
또한 『화폐에 관한 고찰』은 화폐의 본질에 대한 로의 철학을 담고 있다. 로는 화폐란 교환을 매개하는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내재 가치를 지닌 부가 아니며, 화폐의 가치는 희소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en.wikipedia.org. 그는 “돈은 그 자체의 가치 때문에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고 논하면서, 화폐에 대한 정부의 권위적 정의보다는 시장에서의 효용을 중시했다en.wikipedia.org. (다만 그는 실정법상으로 왕이 화폐 주조권을 갖는 현실도 인정했다.) 이처럼 화폐의 수단적 가치와 희소성 원리를 강조한 로의 통찰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예컨대 그는 물과 다이아몬드의 가치 역설을 들어, 상품의 가치는 그 필요 용도 자체가 아니라 수요 대비 공급의 희소성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했다tcd.ie. 이는 훗날 경제학에서 확립되는 주관적 가치론(한계효용 가치이론)의 선구적 표현으로 평가되며, 실제로 아담 스미스 등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으나 로에게 제대로 공로를 돌리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en.wikipedia.org tcd.ie.
로의 책은 당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채택되지 못했지만, 거기에 담긴 아이디어들은 이후 프랑스에서 그가 실행한 정책들의 청사진이 되었다. 현대 연구자 Gavin J. Adams는 **『화폐에 관한 고찰』이 단순한 지폐 발행 제안을 넘어, 은행제도 확립과 경기부양을 위한 신용창출 방안 등 여러 혁신적 개념을 처음으로 종합 제시한 천재적 저작으로 평가한다en.wikipedia.org. 특히 이 책에는 이후 아담 스미스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주창한 중요한 경제 개념들(희소가치 이론, 유효수요에 의한 경기부양 등)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발상 자체가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Adams는 나아가 이 저작이 “근대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가장 영향력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인정받지 못한 경제학 저작”이라고까지 평한다en.wikipedia.org. 비록 출판 당시에는 로의 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이후 프랑스에서 전개된 로의 체제(System)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는 평가대로en.wikipedia.org, 그의 아이디어는 현실 정책 실험으로 이어지게 된다.
3. 화폐 이론적 기여와 정책 실험
1) 지폐 발행과 신용 혁신: 화폐이론상의 기여
존 로의 가장 큰 공헌은 실물화폐 위주의 전통적 통화관을 깨고 신용과 지폐의 역할을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국가가 관리하는 은행을 통해 법정화폐인 지폐를 발행하고 신용을 창출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britannica.com en.wikipedia.org.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생각으로, 국가가 금·은 같은 귀금속 보유량에 얽매이지 않고 통화 공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로는 동시대 중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통화량 증가는 생산과 고용을 늘리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신념을 공유했지만, 중앙은행을 통한 대규모 지폐 발행을 그 수단으로 제시한 점에서 달랐다britannica.com. 그는 중앙은행을 **“은행권(banknotes)을 제조하여 금·은을 대체할 화폐를 공급하는 기관”**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개념은 현대 중앙은행 제도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britannica.com. 예컨대 브리튼 제도에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이 제한적 범위에서 어음 발행을 시작하긴 했으나, 로는 한발 더 나아가 국가 주도의 본격적인 신용팽창 정책을 구상했던 것이다.
로는 화폐 공급을 늘리면 이자율이 하락하고 투자가 촉진되어 경기진작 효과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금은을 캐내느라 자원을 낭비하기보다 지폐를 발행함으로써 사회적 비용 없이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다고 역설했는데, 이는 후일 아담 스미스가 *“금은 채굴에 드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며 부분지급준비은행제를 옹호한 논리와도 유사하다mises.org. 아울러 로는 해외로 금은이 유출될 것이라는 통화 팽창의 부작용 우려도 일축하였다. 그는 통화량 증가로 국내 생산과 수출이 늘어나면 오히려 무역수지 개선으로 금은이 유입될 것이라고 낙관하였는데mises.org, 이러한 주장은 후대에 “실물어음주의(real bills doctrine)” 논쟁으로 이어지는 신용창출 낙관론의 초기 사례로 볼 수 있다en.wikipedia.org. 정리하면, 로는 **“통화는 경제를 움직이는 윤활유”**이므로 부족할 때 인위적으로 공급을 늘려주면 경제 전체에 활력이 생긴다고 보았으며, 국가가 신용을 창출하여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최초로 이론/정책적으로 구현하려 했다en.wikipedia.org. 이런 면에서 그는 통화정책을 통한 경기관리라는 현대 거시경제학 개념을 18세기에 앞서 실천한 셈이다.
2) 프랑스에서의 실험: 최초의 중앙은행과 미시시피 계획
로의 이론은 1716년부터 프랑스에서 대담한 정책 실험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는 섭정정부의 승인을 받아 **민간 은행 형태의 “방크 제네랄”(Banque Générale)**을 설립하고, 예금과 어음 발행을 시작했다mapforum.com. 이 은행은 곧 국가 승인 은행으로 성장하여 1718년 왕립은행(Banque Royale)으로 국유화되었고, 프랑스 최초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게 되었다mapforum.com. 방크 제네랄은 설립 당시 자본금 600만 리브르를 5천 리브르짜리 1,200주로 모집했는데, 이 중 25%만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국채로 납입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국가부채를 자본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냈다mapforum.com. 은행은 금화를 예치받고 그에 상응하는 **은행권(지폐)**을 발행하여 대출을 실시하였고, 1717년에는 국민 세금 납부에 이 은행권 사용을 허용함으로써 지폐에 대한 신뢰와 수요를 높였다mapforum.com. 그 결과 지폐 유통이 원활해지면서 시장 금리가 5%에서 4.5%로 떨어지고, 불과 2년 만에 발행은행권이 6천만 리브르에 이르는 등 초기 성과를 거두었다mapforum.com. 이는 로가 기대한 대로 통화 공급 확대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례로 여겨졌고, 그의 명성은 덩달아 높아졌다.
한편 로는 은행 사업과 병행하여 **미시시피 회사(Compagnie d’Occident)**라는 초대형 독점 기업을 구상했다. 1717년 그는 국왕으로부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발 독점권을 부여받아, 미시시피 회사(일명 루이지애나 회사)를 설립하였다mapforum.com. 이 회사는 기존의 여러 해외 무역특권 기업(동인도회사, 중국회사 등)을 합병하며 규모를 키웠고, 식민지에서의 막대한 잠재 부를 내세워 투자자를 모았다mapforum.com. 로의 구상은 자신이 운영하는 은행과 이 거대 주식회사를 결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국가 부채를 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식 발행을 통해 경제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1719년 로는 미시시피 회사가 국가의 모든 채무를 인수하되, 대신 회사 주식과 식민지 수익으로 그 부채를 상환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국가 채권자들에게 국채와 회사 주식을 교환해주고, 국채 이자를 낮추는 대신 회사가 9년간 세입과 주조소 권한을 맡는 조건을 내걸었다mapforum.com. 이 혁신적 부채-자본 전환 계획은 투자자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미시시피 회사 주가는 발표 직후 폭등하기 시작했다.
로의 은행이 신용을 팽창시켜 대출을 늘리고, 그 자금이 미시시피 회사 주식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1719년 한 해에 회사 주가가 500리브르에서 10,000리브르로 20배 상승했다mapforum.com. 1720년 초에는 미시시피 회사가 40%의 고배당을 약속하자 주가가 18,000리브르까지 치솟아, 기업의 실질가치를 아득히 초월한 순전한 투기적 거품 상태에 이르렀다mapforum.com. 이른바 **“미시시피 열풍”**이라 불린 투기 붐 속에 파리의 캥캉푸아(Quincampoix) 거리에는 주식을 사려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단기간에 거부들이 속출하였다. (이때 생긴 신조어가 바로 **“백만장자(millionaire)”**인데, 미시시피 투기로 막대한 부를 쌓은 행운아들을 일컫는 말로 처음 쓰였다en.wikipedia.org.) 그러나 1720년 중반에 이르러 일부 투자자들이 고점에서 차익 실현을 시작하자, 거품은 걷잡을 수 없이 꺼지기 시작했다. 주가는 급락하고, 불안을 느낀 대중이 너도나도 은행권을 가져와 현금으로 바꾸려 했지만, 로의 은행은 지나치게 많은 지폐를 발행한 나머지 충분한 금은 준비금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mapforum.com. 결국 미시시피 회사와 은행 모두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 파산하고 말았다. 1720년 9월, 주가 폭락과 지폐 가치 붕괴로 프랑스 전역이 경제혼란에 휘말리자, 로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책임을 추궁받아 나라를 떠났다britannica.com. 불과 몇 년 전 유럽 최고의 갑부로까지 불렸던 그는 재산과 명예를 잃고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으며, 1729년 베네치아에서 빈손으로 생을 마감하였다britannica.com.
4. 미시 및 거시경제학 측면에서의 선구성
로의 이론은 미시경제와 거시경제 양 측면에서 동시대의 통념을 뛰어넘는 혁신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그는 가치 이론, 가격 및 이자에 대한 미시적 통찰부터 총수요, 고용, 경기순환에 대한 거시적 관점까지 포괄적인 경제관을 형성하였고, 이는 훗날 정립된 주요 경제학 설파들을 예견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래 표는 그의 핵심 사상을 현대 경제학의 개념과 대비시켜 정리한 것이다:
(존 로) 통화량 증대를 통한 경기 부양: 화폐 공급을 늘리면 생산·고용이 증가하고 무역이 활성화됨을 강조mises.org en.wikipedia.org
(현대경제학) 케인스주의 이전의 유효수요 이론: 유효수요 부족(언더컨섬션) 설을 선도하여 통화·재정 정책을 통한 경기부양 개념을 예견 (경기침체 시 통화완화 정책의 효용 강조)mises.org en.wikipedia.org
(존 로) 희소성에 기반한 가치 이론: 상품의 가치는 그 필요성보다 수요 대비 공급량(희소성)에 따라 결정됨을 분석tcd.ie en.wikipedia.org
(현대경제학) 주관적 가치론과 한계효용: 재화의 효용과 희소성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미시경제학의 가치 이론을 선구적으로 제시 (물가역설 해소에 기여)tcd.ie en.wikipedia.org
(존 로) 지폐 발행과 신용창출을 위한 중앙은행 구상: 국가가 토지 등 실물자산을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하여 통화 공급을 조절해야 한다는 구상britannica.com en.wikipedia.org
(현대경제학) 관리통화제도와 중앙은행의 탄생: 중앙은행을 통해 법정화폐로 경제를 조절하는 현대 관리통화제도의 원형을 제시 (국가의 통화정책 수단 확립에 기여)britannica.com en.wikipedia.org
(존 로) 국채와 주식회사의 결합을 통한 부채관리: 정부 부채를 기업 주식으로 전환하고, 주식시장과 은행신용을 연계하여 국가부채 문제 해결 시도britannica.com mapforum.com
(현대경제학) 공기업·민간금융 활용한 재정정책의 전조: 국채의 주식화, 공공·민간 파트너십(PPP)을 통한 부채관리 등 현대 금융공학적 재정운영의 초기 사례 (국가부채의 시장 흡수)britannica.com mapforum.com
로의 미시경제학적 선구성은 특히 가치와 가격 형성에 관한 그의 인식에서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재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 수요와 공급의 상호관계를 강조하여, 효용이 높더라도 풍부하면 값어치가 낮고, 쓸모가 적더라도 희귀하면 가치가 높아진다고 논증했다tcd.ie. 이러한 희소성 가치론은 18세기까지 지배적이던 노동가치설이나 중상주의의 귀금속 중심 사고와 구별되는 통찰로, 후에 한계효용이론으로 완성되는 근대 미시경제학의 가치이론을 예견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en.wikipedia.org.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자 F. A. 하이에크는 존 로의 저술에 담긴 통찰 중 하나로 **“근대의 주관적 가치론의 여러 요소를 앞서갔다”**는 점을 지목하기도 했다en.wikipedia.org. 또한 로는 이자율과 투자의 관계에도 선진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는 네덜란드의 번영을 연구하면서, 낮은 이자율이 경제호황의 결과이자 원인이라는 혼합된 판단을 내렸다mises.org. 즉, 그는 네덜란드가 부유해져서 이자율이 낮아진 측면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낮은 이자율과 풍부한 통화공급이 투자를 촉진하여 번영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고 해석했다. 이처럼 자본비용의 조절을 통한 경기진작 아이디어는 훗날 거시경제 정책에서 중요시되는 요소다. 로의 눈에 당시 네덜란드의 풍부한 통화 유동성은 원인과 결과의 순환고리 속에서 경제 활황의 촉매로 작용했고, 그는 이를 다른 나라에서도 인위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mises.org.
한편, 거시경제학적 측면에서 존 로는 현대적인 총수요 관리 정책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는 경제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으로, 돈이 돌지 않아 생산물이 팔리지 않고 실업이 발생하는 현상을 우려했다. 그의 진단은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유효수요 부족”이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그는 통화 공급의 확대와 신용 완화를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하면 경제가 잠재산출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는 150여 년 후 케인스가 일반이론에서 정식화한 논지와 닮아 있다. 실제로 케인스 이전에도 로와 같은 소비부족설(underconsumption theory) 전통이 있었으며,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지적 선구로 존 로가 종종 언급된다en.wikipedia.org. 예컨대 19세기 고전파는 공급 중심으로 과잉생산을 논했지만, 로는 수요(통화)가 부족하여 생산물이 팔리지 않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경제 침체의 원인을 수요 측면에서 파악한 선구적 사례였다en.wikipedia.org. 이러한 인식하에 정부(혹은 중앙은행)에 의한 통화 공급 조절을 통해 aggregate demand를 관리하려 한 그의 실험은 현대 거시경제 정책의 원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mises.org en.wikipedia.org. 물론 로는 정부 지출보다는 통화량 자체를 중시한 면에서 완전한 의미의 케인스주의자라기보다는 통화주의적 경기부양론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불경기시 통화 공급을 늘리고 이자율을 낮춰야 한다는 정책 권고는 이후 시대를 훨씬 앞선 것이었다. 요컨대, 존 로는 거시경제의 순환과 정책효과를 체계적으로 사고한 초창기 인물로서, 그의 이론과 정책은 미시적 가치이론에서부터 거시적 통화이론까지 다방면에서 선구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5. 당시 경제사상사에서의 위치 및 계몽주의 사상과의 연계
존 로의 사상은 18세기 초 경제사상사의 전환기에 위치한다. 그는 중세적 금속주의나 중상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국부 증진을 위한 국가 개입을 옹호했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전통을 깨는 새로운 접근을 제시했다. 중상주의자들이 주로 무역흑자와 금은 비축을 통해 부를 늘리려 한 반면, 로는 신용과 화폐의 내부 창출로 국내 경제를 진작시키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중상주의와 근대 거시경제학의 가교적 인물로 평가된다. 실제로 브리타니카 백과는 로를 두고 “당대 여타 중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화폐를 경제발전의 창조적 동력으로 보았으나, 중앙은행을 통해 지폐를 제조·공급하는 구상을 한 점에서 달랐다”고 지적한다britannica.com. 그는 국가의 부와 힘을 키우려는 중상주의적 열망을 공유하면서도, 금은과 같은 실물 귀금속의 축적에 집착하지 않고 신용화폐라는 추상적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런 이질적 요소들 때문에, 로의 사상은 경제사상사에서 하나의 독특한 분파를 이룬다. 일부 학자는 그를 **“최초의 근대적 금융이론가”**로 부르며, 또 일부는 그의 실험적 정책 수행을 들어 “프로토(원형) 케인스주의자” 혹은 **“프로토 통화주의자”**로 언급하기도 한다mises.org. 사실 로 자신의 이론에는 이후 상반된 흐름으로 갈라지는 여러 요소(국가 개입 vs. 시장 메커니즘 중시, 통화량 중시 vs. 신용 건전성 중시 등)가 혼재되어 있었고, 그의 명성과 악명이 동시에 전해지면서 후대 경제사상가들은 그의 유산을 다양하게 해석했다.
계몽주의와의 연계성 측면에서, 존 로의 등장은 계몽기 프랑스의 지적 풍토와 뗄 수 없다. 루이 14세 사후 섭정통치 기간은 사상과 문화가 비교적 자유로웠고, 전통적 권위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아이디어 실험이 용인되던 시기였다. 로의 합리적 금융체계 개혁 구상은 바로 이러한 계몽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현실 시도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에 따른 사회 개혁을 중시했고, 로는 이성적 계산과 경험에 근거해 국가경제를 혁신하려 한 인물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실험이 성공과 파국을 모두 경험하자 이를 지켜본 계몱사상가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 당대 지식인들은 저술에서 존 로 사건을 언급하며, 이성의 힘과 그 한계를 논하는 소재로 삼았다en.wikipedia.org. 볼테르는 『철학사전』의 “이성(Raison)” 항목에서 존 로를 예로 들며, 합리적 계획이라 믿었던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비이성적 투기로 변질되어 붕괴했는지를 풍자적으로 시사하였다. 몽테스키외도 1721년 출간한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어느 옛 신화학자의 단편”**이라는 장을 통해 로의 체제를 빗댄 알LEGORY(우화)를 제시했다en.wikipedia.org. 이렇듯 계몽사상의 거두들은 존 로의 흥망을 단순한 경제 사건이 아니라 계몽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였다. 합리적 인간이 설계한 시스템도 인간의 탐욕과 군중심리에 무너질 수 있음을, 로의 사례가 드러낸 것이다. 동시에 일부 계몽 사상가들은 로의 관점을 옹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듀토(Dutot)**나 멜롱(Melon) 같은 인물은 로의 이론을 옹호하거나 변형하여 합리적 경제운용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케네 등의 중농학파에게도 통화와 신용에 대한 로의 논의는 하나의 참고점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존 로는 계몽기의 사회개혁 실험 정신을 체현한 사례이자, 동시에 계몽 사조가 직면한 **현실적 한계(인간 욕망의 통제 문제)**를 드러낸 사례로서, 계몽주의 지적 운동과 밀접히 연결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6. 투기와 버블에 대한 비판
*1720년 당시 미시시피 주식 투기 열풍을 풍자한 네덜란드의 삽화.
‘바람의 독점 (Le Monopole des Vents)’이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하늘에서 **바람(실체 없는 자산)*을 쥐고 내려오는 투기광과 빈 궤짝만 남은 현실을 묘사하며, 로의 금융체제가 남긴 허상을 풍자하고 있다.
존 로의 체계는 단기간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듯했으나, 1720년 거품 붕괴로 막을 내리면서 동시대인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투기적 거품의 위험성과 무모한 신용팽창에 대한 경고가 쏟아졌다. 미시시피 버블이 한순간에 터지자, 프랑스 사회 전반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수많은 투자자가 파산하고 은행권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으며, 프랑스 경제는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mapforum.com. 이 사건은 곧 유럽 전역에 알려져, 영국의 남해회사 거품(동시에 진행되다 1720년 가을 붕괴)과 더불어 18세기 초 금융투기의 광기를 상징하는 교훈이 되었다en.wikipedia.org.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어리석음의 거대한 거울(Het Groote Tafereel der Dwaasheid)』(1720)에는 로와 그의 거품 사건을 풍자하는 수십 종의 시판(諷刺版화)들이 실렸다. 그 중 한 삽화에는 **“로는 돈을 손에 넣고, 우리에겐 남은 것이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raremaps.com, 이는 일확천금 뒤에 남은 상실감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투자자들의 탄식이었다. 이처럼 풍자화와 팸플릿을 통해 대중적 조롱과 분노의 표적이 된 존 로는, 1720년대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되다시피 했다en.wikipedia.org. 그의 프랑스 망명 귀국 시도는 여론의 거센 반대로 무산되었고, 영국에서도 그의 복귀를 두려워한 풍자문이 나돌 정도였다.
당대의 경제 논객들도 로의 실패를 날카롭게 분석하며 비판을 가했다. 영국의 경제사상가이자 금융가 헨리 손튼(Henry Thornton)은 1802년 저서에서 로의 체제가 실패한 원인을 한 마디로 짚었다. “그는 지폐 수요에는 한계가 없을 수도 있음을 잊었고, 지폐량 증가는 곧 상품가격 상승을 초래하며, 물가가 오르면 더 많은 지폐 발행이 요구되고 정당화되는 듯 보이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en.wikipedia.org 손튼의 지적대로, 로는 통화팽창이 인플레이션 기대를 부르리라는 위험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실제로 1720년 미시시피 버블 말기에 프랑스에서는 물가가 폭등하여, 로가 은행권의 금태환 정지를 선포하고 지폐 가치를 강제로 낮추는 조치를 취했지만 오히려 공황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화폐 정책의 실패는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거듭 회자되어, 로의 붕괴는 18세기 내내 화폐이론 논쟁의 반면교사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mises.org. 특히 과도한 신용창출에 대한 경계심이 형성되어, 프랑스에서는 이후 한 세기 가까이 중앙은행 설립이나 대규모 지폐 발행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1800년 프랑스은행을 설립하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중앙은행 제도가 재도입되기까지, 로의 망령은 프랑스 금융계에 오래 남아 있었다.)
또한 로 개인에 대한 비난도 거셌다. 일부 평론가들은 **로를 “사기꾼” 혹은 “미치광이 연금술사”**에 비유하며 그의 계획을 몰매질했다. 예컨대 18세기 영국의 풍자 작가들은 로를 “프로메테우스 흉내를 내다 몰락한 인물”로 조롱하거나, **“돈을 만들어내려다 종이에 불을 붙인 연금술사”**로 풍자하였다. 그의 적대자들은 로가 처음부터 국왕과 국민을 속이고 자신의 치부를 꾀했다고 매도하기도 했다. (물론 역사적 기록상 로가 개인적 부를 거두려 한 정황도 있으나, 그는 버블 붕괴 시 자신의 재산도 대부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동시대의 일부 경제사상가들은 보다 균형 잡힌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리처드 칸티용은 미시시피 버블에서 이득을 본 후 1730년경 정리한 『상업에 관한 일반적인 에세이』에서, 로의 실험이 지닌 합리성과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그는 로의 체계가 처음에는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나친 주가 상승을 방치한 점과 통화팽창의 통제를 실패한 점을 비판하였다. 결국 **“과유불급”**의 교훈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19세기 이후 경제학자들이 자유시장 내 투기적 버블의 위험성과 통화당국의 역할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요컨대, 존 로의 실험은 그의 의도와 달리 투기의 광란과 붕괴로 끝났고, 이는 동시대인들에게 금융에 내재한 위험과 정부 개입의 한계를 일깨우는 사건으로 기억되었다.
7. 장기적 영향과 현대 금융 시스템과의 연속성
비록 존 로의 체제는 단명하였으나, 그의 사상과 실험이 남긴 장기적 영향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지폐 남발의 위험성과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위력을 극명히 보여준 사례로서, 후대의 금융제도 설계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로의 실패 이후 각국은 중앙은행의 통화관리에 보다 신중을 기하게 되었고, 투기 거품에 대한 경계의식도 높아졌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로 사후 80년이 지나 프랑스혁명기 **과도한 지폐발행(Assignat 사태)**으로 또 한번 인플레이션을 겪기 전까지 국가 차원의 지폐 실험을 자제하였다. 이는 로의 경험이 경각심을 준 덕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로의 아이디어 중 상당수는 현대 금융 시스템에 계승되었다. 그의 구상대로 중앙은행을 통한 관리통화제도는 결국 전세계에 정착되었다. 오늘날 각국 중앙은행은 법정불환지폐(fiat money)를 발행하고 금리와 유동성을 조절함으로써 경기부양이나 안정화 정책을 편다. 이는 로가 “국가은행을 통한 통화량 조절”을 처음 상상으로 제안한 이후 수백 년간 발전시켜 온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로의 체제는 사상 최초의 대규모 지폐기반 경제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록 “화폐체제로서는 실패”했으나, **초기 법정화폐 제도의 실험장으로서 후대에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en.wikipedia.org. 경제사학자들은 로의 시도를 두고 현대 신용경제의 실험적 출발점으로 평가하며, “로의 실험이 없었다면 관리통화제도의 발전이 지체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한다. 예컨대 한 연구는 로의 체제가 완전히 근본적 결함이 있었다기보다, 운영상의 미숙과 정치적 압력으로 무너졌다며 로의 구상이 반드시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en.wikipedia.org. 이런 재평가 역시, 로의 아이디어가 기본적으로 현대 금융논리에 부합하는 면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또한 존 로는 주식회사와 국가재정의 관계에도 선구적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 정부는 공기업, 국부펀드, 민관합작투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국가 채무를 관리한다. 이는 국가 재정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던 과거와 달리 금융시장과 연결짓는 현대적 방법인데, 로가 미시시피 회사로 국가부채를 처리하려 한 발상은 바로 이러한 공공과 민간 금융의 결합을 처음 시도한 사례였다. 비록 그 거품이 꺼지며 프랑스 국채 문제는 근본 해결되지 못했지만en.wikipedia.org, 이후 영국 등은 보다 절제된 형태로 국채의 증권화와 중앙은행의 뒷받침을 결합한 재정운영(이른바 콘솔 공채 제도와 영란은행의 역할 정립)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로의 실험은 직접적으로든 반면교사로든 근대 금융시스템의 발전에 연속성을 제공했다. 그의 실패를 반영하여 주식회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영국의 버블법 제정 등), 중앙은행의 거시건전성 관리 개념이 싹트는 등 제도적 보완이 이뤄졌던 것이다.
학문적으로도 존 로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었으나, 현대에 들어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분명 케인스, 프리드먼 이전 시대에 통화와 유동성의 거시경제적 중요성을 설파했고en.wikipedia.org, 희소가치·실물담보 신용 등 여러 이론을 선제적으로 제시했다en.wikipedia.org. 앞서 살핀 것처럼, 그의 여러 사상은 한 세기 이상 뒤에야 정식 이론으로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일부 경제사학자들은 그를 **“현대 경제학의 숨은 개척자”**로 평가한다. 예컨대 The Trend of Economic Thinking에서 하이에크는 로의 통찰 각각은 새롭지 않을 수 있어도 “그것들을 한데 모아 그렇게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것은 로가 최초”였다고 평하였다en.wikipedia.org. 결국 로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질문들 – 화폐는 얼마나 공급되어야 적정한가, 신용은 경제에 무엇을 가져오는가, 투기는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 는 현대 경제학과 정책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과제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 로의 사상과 정책 실험은 단절보다는 연속의 관점에서 이해할 가치가 있다. 그의 이야기는 극적인 흥망성쇠로 유명하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아이디어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펴보아도 놀랍도록 현대적이며 사려 깊은 면이 있다. 존 로는 성공하지 못한 선구자였지만, 선구자였기에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남긴 인물로 경제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8. 참고 문헌:
존 로의 저작과 그의 생애에 대한 1차 사료 및 2차 연구는 다양하다. 주요 1차 자료로는 『화폐에 관한 고찰』 원문과 로가 남긴 메모 등이 있으며, 2차 문헌으로는 경제사학자 앙투안 뮈르피(A. Murphy)의 John Law: Economic Theorist and Policy-maker, 조킴 베르너(J. Werner)의 John Law: The History of an Honest Adventurer, Gavin John Adams의 연구서 등이 로의 사상과 영향을 심층 조명한다. 또한 Henry Thornton의 Paper Credit(1802)이나 Richard Cantillon의 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1755) 등은 로의 실험을 분석한 동시대 혹은 후대 초기의 견해를 제공한다. 이러한 문헌을 통해, 비극적 투기사건의 주역으로 흔히 소비되던 존 로가 사실은 근대 경제학의 여러 흐름을 예견한 사상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britannica.com en.wikipedia.org 등의 사료에서 보이듯, 로는 중앙은행을 통한 화폐공급과 경제성장의 연결고리를 최초로 설파했고, 이는 현대 경제체제의 기초 개념 중 하나로 정착되었다. 마찬가지로 tcd.ie en.wikipedia.org 등을 통해 확인한 그의 희소성 기반 가치론은 한계효용학파 이전에 그런 사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매우 선구적이다. 결국 존 로의 생애와 사상은 경험으로 빚은 이론이 현실 정책으로 시험되고, 그 실패로 다시 이론에 피드백을 준 예외적 사례로서, 경제사와 사상사 연구에 풍부한 교훈을 준다.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현대 금융의 가능성과 위험성 모두에 대한 경고를 읽을 수 있으며, 경제사상 발전의 복잡한 경로를 엿볼 수 있다.
존 로(John Law, 1671–1729)는 18세기 초 경제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경제학자이자 금융 혁신가로, 그의 이론과 실제 실험은 경제학뿐만 아니라 금융 역사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는 '화폐와 신용'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며, 근대 경제학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경제 사상은 주로 두 가지 중요한 분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화폐 이론과 경제의 신용 창출입니다.
존 로는 '화폐의 유통'과 '경제적 신용 창출'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그의 주요 이론은 **"화폐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근대 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가 제시한 이론 중 가장 중요한 점은 화폐의 실질적 가치는 금속(예: 금, 은)과 같은 실제 자산이 아닌, 그 화폐가 받아들여지는 신뢰에 기반한다는 것입니다. 즉, 화폐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상호 신뢰와 그것이 교환의 매개체로서 기능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로는 당시 금본위제에 의한 경제 체제를 비판하며, 신용 화폐의 발행을 통해 경제적 활동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화폐가 물리적인 금이나 은이 아닌, 상장 기업의 주식을 보증으로 발행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후에 "신용화폐"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며,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 가지 방법으로 간주됩니다.
존 로의 가장 큰 실험은 1716년에 시작된 프랑스의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 프로젝트였습니다. 로는 프랑스 정부의 재정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국채 발행을 통한 신용 창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국가 부채를 담보로 하는 화폐의 발행을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국가 재정을 강화하고 유동성을 공급하려 했습니다. 로는 **"화폐를 대량으로 발행하고, 그것을 상장된 주식으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활성화하려 했습니다.
로의 신용 화폐 발행 시스템은 '미시시피 회사' 주식으로 변환될 수 있는 국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로는 정부의 부채를 상장된 주식으로 대체하면서, 그 주식들이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방식은 당시 금융 시장에서 큰 충격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로의 이론과 실험은 경제적 거품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는 자산을 실제 가치 이상으로 과대평가하며, 신용 화폐의 발행량을 과도하게 늘려 경제를 급격히 팽창시켰습니다. 1719년과 1720년 사이, 프랑스 경제는 급격히 팽창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고, 가격은 급등했습니다. 하지만 주식 가치가 실제 경제적 기초를 뒷받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주식 가치가 붕괴하면서 경제적 대위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미시시피 거품(Mississippi Bubble)' 사건으로 불리며, 로의 신용 화폐 이론과 그의 경제적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상징적인 예시가 되었습니다. 신용 화폐의 발행량을 무제한으로 늘려 경제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려 했던 로의 방식은 결국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을 초래했습니다.
존 로의 경제 이론은 근대 경제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신용 화폐 이론은 나중에 케인스주의나 화폐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금융 시스템에서 신용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이론은 중앙은행의 역할이나 금융 위기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의 실패는 과도한 신용 창출과 그에 따른 거품 형성이 경제에 미치는 위험을 잘 보여주었지만, 그가 제시한 신용화폐 이론은 여전히 오늘날의 중앙은행 시스템이나 화폐 정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존 로는 현대 경제학과 금융 시스템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선구적인 경제학자였으며, 그의 신용 화폐 이론과 화폐의 신뢰성에 대한 관점은 경제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그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오늘날의 금융 시스템, 특히 중앙은행과 신용 창출의 이해에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