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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덤 문제

챗선생

by 조영필 Zho YP

1. 서론

니덤 문제(Needham Puzzle)는 영국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이 제기한 역사적 물음으로, **“왜 중국에서는 근대 과학과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를 뜻합니다tsinghua.edu.cn. 니덤은 방대한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시리즈(1954년부터 간행)를 통해 중국이 한때 세계를 앞설 만큼 뛰어난 과학기술을 보유했음에도, 17~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탐구했습니다atlantis-press.com. 이 질문은 “중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15세기경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자연 지식을 실용에 적용한 문명이었는데, 왜 이후 주도권을 서양에 내주었는가”라는 의미로 해석되며tsinghua.edu.cn, 과학사 및 경제사 분야에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니덤 자신의 문제 제기 의도는 중국의 과학적 업적을 재평가하고, 근대 과학이 오직 서구에서만 나온 것처럼 보는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 있었습니다atlantis-press.com. 그는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단일한 해법을 찾기보다는, 중국과 서양 문명 간 과학 발전의 경로 차이를 설명하려는 다양한 요인을 검토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서양과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정치·경제 제도, 사회문화, 인구·지리 환경 등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답을 시도해 왔습니다tsinghua.edu.cn. 아래에서는 니덤 문제와 관련된 주요 학자들의 견해와 핵심 요인, 해당 학자들의 주요 저작, 그리고 이들이 주장한 요인의 비교 분석을 정리하겠습니다.


2. 조지프 니덤의 견해 (원 제기자)

조지프 니덤은 니덤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로서, 방대한 중국 과학 기술사의 연구를 남겼습니다. 그의 주요 저작은 앞서 언급한 『중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와 에세이 모음집 『대논쟁(The Grand Titration)』 등이 있습니다. 니덤은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부재했던 원인으로 정치·사회·지리 세 가지 측면을 들었습니다atlantis-press.com. 그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지적했습니다.


1) 전통 정치제도

중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과거 제도가 지식인들을 경직된 틀에 가두고 상공업과 기술 혁신을 경시하도록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관료제 사회에서는 민간 기술자와 학자의 협력이 부족하고, 상인 및 기업가 계층의 지위가 낮아 과학기술이 실용으로 연결되지 못했습니다atlantis-press.com. 니덤은 상공업을 중시한 서양의 자본주의 체제가 과학 기술 혁신에 더 유리했으며, 중국의 전통체제는 이를 저해했다고 분석했습니다atlantis-press.com. 특히 명·청 시대의 과거 시험은 경전 암기를 중시하여 창의적 사고를 억압했고, 학자들이 관직 추구 외에 독자적인 과학 연구를 하기 어려웠습니다chinasage.info.


2) 사회경제적 요인

니덤은 경제 구조와 사회 의식도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농업을 중시해 농업 생산과 인구부양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고, 해외 무역이나 공업 발전은 부차적이었습니다atlantis-press.com. 넓은 국토와 풍부한 농업 자원 덕분에 굳이 해외로 진출하거나 새 산업을 일으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유럽은 상공업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 시민계급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과학 연구와 기술 혁신에 대한 수요가 높았습니다chinasage.info.


3) 지리적 환경

니덤은 지리·환경적인 조건도 거론했습니다. 중국은 광대한 농경 지대를 바탕으로 내륙 중심의 발전을 이뤘지만, 이는 동시에 해외 팽창의 동기 부족으로 이어졌습니다atlantis-press.com. 반대로 유럽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자원이 한정되어 신항로 개척과 해외 식민지 획득에 나섰고, 이는 과학기술 진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 항해술 발달, 신대륙 작물 도입 등). 또한 산업혁명기에 결정적이었던 지하자원(석탄 등)의 분포에서도 중국의 주요 경제권은 연료 공급이 제한되었지만, 영국 등 서유럽은 가까운 탄전(炭田)을 활용하여 에너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techratchet.com.


니덤은 이상의 여러 요인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중국이 내적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자급자족형 발전 경로”에 안주한 반면, 유럽은 경쟁과 위기 속에서 근대과학과 산업혁명이 촉발되었다고 보았습니다chinasage.info. 다만 그는 이 물음에 단정적 해답을 내리기보다, 이 주제를 통해 서양 중심의 과학사 서술을 비판하고 동서 과학 전통의 통합적 이해를 추구했습니다atlantis-press.com.


3. 문화 및 사상적 요인: 유교 문화 vs 서구 사상

니덤 문제에 대한 설명 중 문화적·사상적 요인을 강조하는 견해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1) 펑유란(馮友蘭, Feng Youlan)

중국의 철학자이자 사상사가 펑유란은 1920년대에 이미 “중국에는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부재했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지리·경제 같은 물질 조건이 아니라 중국인의 가치관과 철학에서 찾았습니다tsinghua.edu.cn. 그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전통 세계관이 자연 현상을 탐구하기보다는 도덕 수양과 사회질서 유지에 치중했고, 그 결과 과학정신이 성장할 토양이 부족했다고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 중국 사상은 *“인간과 도덕”*에 관심이 컸지 서양처럼 *“자연의 법칙 발견”*을 궁극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2) 막스 베버(Max Weber)

서구 사회학자인 베버도 저서 『중국의 종교: 유교와 도교』 (1915)에서 유교 문화가 합리적 자본주의나 근대 과학의 탄생에 불리한 환경이었다고 논했습니다. 베버에 따르면 유교는 현세적 조화와 관료제적 질서를 중시하여 관습의 혁신을 억제했고, 서양의 개신교 윤리가 촉발한 근대적 진취성을 결여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베버의 논점은 주로 경제발전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의 분석은 과학 발전에도 응용되어 중국의 문화가 과학 혁명을 불러일으킬 내적 동력이 부족했다는 시각을 보여줍니다.


3) 조지프 니덤

니덤 자신도 중국과 서양의 사상적 차이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중국 전통 사유를 *“유기적 세계관”*으로, 서양을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비시켰는데atlantis-press.com, 중국은 자연을 인간과 조화된 유기체로 보고 경험적인 기술 활용에 집중한 반면, 서양은 자연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추상적 이론화에 힘썼다는 분석입니다. 예컨대 중국의 도교·음양오행설 등은 자연 현상을 질문하고 해부하기보다는 전체적 조화로 관찰했고, “왜 그런가”보다는 “어떻게 활용할까”에 관심을 두었다는 지적입니다chinasage.info. 이러한 인식론의 차이가 근대 과학(특히 물리학 중심의 보편 법칙 탐구)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니덤의 견해였습니다.


4) 토비 허프(Toby E. Huff)

미국 사회학자 토비 허프는 저서 『근대과학의 발흥: 이슬람, 중국과 서구』(1993)에서 니덤 문제를 문명권 간 제도·사상의 비교로 접근했습니다. 허프는 “근대 과학혁명은 서양에서만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 배경으로 **서구 중세 대학(university)**의 존재를 강조합니다escholarship.org. 그는 서양에서는 12세기 이후 대학이라는 자율적 지적 공동체가 등장하여, 합리적 토론과 자연철학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escholarship.org, 중국과 이슬람권에는 이런 독립된 고등교육 기관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국가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가 되는 길 외에는 학문 활동의 전문 경로가 거의 없었고, 국가 권위에 도전하는 자유로운 사상 탐구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chinasage.info.


또한 허프는 서양의 법문화(예: 로마법 전통에서 발전한 법인(法人)의 개념 등)가 대학·길드 같은 자율기관의 성립을 허용한 반면, 중국 법은 국가 질서 유지를 중시하여 그런 민간 자치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봅니다chinasage.info. 요컨대 사상적 개방성과 지적 제도의 차이가 중국과 서양의 과학 발전 경로를 갈랐다는 해석입니다. (허프는 한 발 더 나아가 이슬람권의 신학적 제약도 비교하지만, 여기서는 중국에 집중하겠습니다.)


5) 기타 문화적 설명

한편 일부 학자들은 종교관의 차이도 거론합니다. 예를 들어, 과학사가들 중에는 유일신 신앙이 준 합리적 우주관이 서양 근대과학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즉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자연이 신이 부여한 일관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기에, 이를 밝히려는 동기가 강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중국은 전통적으로 다신교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강해, 자연법칙 탐구보다는 경험적 기술에 만족했을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과학자였던 니덤 자신도 부분 공감하여, 17세기 유럽 과학혁명 배경에 기독교 사상이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니덤은 종교개혁과 과학의 발전이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보며,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 논지를 과학 영역에 연결짓기도 했습니다indieskriflig.org.za).


다만 문화·종교적 설명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화평론가들은 “인류라면 본질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호기심과 이성을 갖추었다”며, 어느 한쪽 문화가 ‘본질적으로’ 과학적이고 다른 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sacu.org. 실제로 중국에서도 송대에 주희 등의 *이학(理學)*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려 했고, 명말 청초에 서양 과학을 적극 수용한 지식인들이 있었던 만큼 문화 자체를 우열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요약하면, 문화적 관점의 학자들은 중국의 전통 유교 이념, 세계관, 교육 내용 등이 과학 혁신에 동기 부여를 약화시켰다고 봅니다. 반면 서구에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며 개인의 호기심과 비판정신이 살아나고 지적 공동체가 형성된 덕분에 과학혁명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techratchet.com. 이러한 설명은 사회 구조보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뒤에 살펴볼 제도적·경제적 설명들과 대비됩니다.


4. 제도 및 정치적 요인: 관료제 사회 vs 경쟁국 체제

두 번째로 많은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정치·사회 제도의 차이입니다. 중국과 유럽의 국가 체제 및 사회 구조가 과학 기술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들로, 다음과 같은 핵심 요인들이 지목됩니다.


1) 중앙집권 관료제

중국은 진·한 이래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되어 황제와 관료 체제가 사회 전반을 통제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중앙집권은 한편으로 장기간 사회 안정을 이끌었지만, 다른 한편 지방분권적 창의성을 저해했습니다. 명·청대에는 관헌의 허가 없이는 천문학이나 수학 같은 학문 연구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공인된 관학(官學) 이외의 민간 학술 조직은 발전하기 어려웠습니다chinasage.info. 예를 들어 1600년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한 신수학(기하학 등)이 일시적으로 황실의 관심을 받았으나, 곧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chinasage.info. 양쩐닝(杨振宁, Chen-Ning Yang) 등 중국 출신 노벨상 수상자도 “청조의 과거 제도가 근대 과학의 맹아를 짓눌렀다”고 지적했는데, 그는 전통 관료제 하에서 서구 과학기술에 대한 체계적 교육과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외래 과학을 불온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했습니다atlantis-press.com.


2) 과거 시험과 성리학 교육

위의 관료제와 관련하여, 과거시험 제도는 중국 엘리트 선발과 교육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수세기 동안 학문의 방향을 경전 암기와 유교 경학으로 한정시켰고, 수재들이 실용학문이나 자연과학에 관심을 돌릴 여지를 좁혔습니다chinasage.info. 창의적 사고보다는 주자학 교리 암송 능력이 출세에 절대적이었기에, 자연의 원리 탐구나 새로운 기술 발명 같은 것은 지식인 사회의 주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근대 과학에 필수적인 혁신, 비판적 실험정신이 싹틀 토양이 부족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실제로 19세기 말 중국에서 양무운동 등의 과학기술 근대화 노력이 있었지만, 과거제 기반의 기존 관료들이 이를 냉담하게 대하거나 **“기술은 외국 것일지라도 도는 우리의 도”**라는 식으로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쳤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육제도와 관료 선발 방식의 보수성이 과학 혁신을 둔화시켰다는 것입니다atlantis-press.com chinasage.info.


3) 독립된 시민계층과 학회 부재

유럽에서는 중세 후기부터 **상공 시민계층(부르조아)**이 성장하고 이들이 상업과 학술의 후원자로 등장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도시의 후원 문화나, 17세기 영국의 왕립학회(Royal Society) 설립은 비교적 자유로운 지식인 모임과 민간 연구의 활성화를 보여줍니다chinasage.info. 반면 중국에서는 상인은 사회적으로 농민보다도 낮은 신분으로 여겨졌고, **“귀천업필(貴賤業匹)”**이라 하여 직업 간 위계가 엄격했습니다chinasage.info. 돈을 벌어도 함부로 과시하지 못하고, 민간에서 학술 모임을 조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은둔하거나 관직을 버리고 학문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자유지식인의 전통이 일부 있었으나 (예: 고증학자나 본초학자 등), 이들은 체계적인 기관이나 협회의 지원 없이 개인 수준에서 활동했습니다. 결국 유럽의 과학자들이 민간 학회, 대학, 살롱 등을 통해 아이디어 교류와 공동 탐구를 한 데 비해, 중국은 국가 관할 아카데미(한림원 등) 외에는 그런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이 점을 지적하는 대표적 학자가 앞서 언급한 토비 허프로, **“서양의 대학 제도와 법적 관용이 과학혁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강조합니다escholarship.org.


4) 다원적 경쟁체제 vs 대일통 제국

정치적으로, 유럽의 분할된 국가체제도 중요 요인으로 거론됩니다. 유럽은 중세 이후 수십수백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나뉘어 끊임없는 경쟁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러한 국가 간 경쟁이 기술 혁신을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chinasage.info. 예컨대 포르투갈이 신항로 개척으로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면, 스페인·네덜란드·영국 등이 앞다투어 더 나은 항해술과 무기를 개발하는 식입니다. 군사적・경제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발명의 촉매가 되었다는 이론으로, 이를 일종의 다윈식 발전 모델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chinasage.info. 반면 중국은 거대한 단일 제국으로 주변에 맞설 대등한 경쟁자가 없었고, *“천하 통일”*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혁신 압력이 적었다는 분석입니다chinasage.info. 명나라가 한때 정화의 대항해를 통해 해양 진출을 시도했지만, 굳이 해외팽창을 하지 않아도 국내 질서 유지에 문제가 없자 스스로 이를 중단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장 골드스톤(Jack Goldstone)이나 경제사학자 이안 모리스(Ian Morris) 등은 이러한 장기적 요인(중국의 통일 vs 유럽의 분열)이 근대 이전에는 큰 차이를 만들지 않았지만, 근대 초에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sacu.org. 특히 모리스는 18~19세기 서양의 산업화를 가른 *“결정적 분기 요소는 지리적 우연”*이며, 유럽의 대서양 진출과 중국의 서북 방어 안정이라는 상반된 사건이 결국 양 지역의 운명을 갈랐다고 분석합니다sacu.org. 이는 국가경쟁과 지리 요인이 결합된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법과 재산권 제도

최근 경제사학자들은 제도적 디테일로서 “지적 재산권과 상업적 권리의 보호” 여부도 지목합니다. 일례로, 일부 연구는 청대 중국에서는 발명에 대한 특허권이나 기업 투자 보호가 미약해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와도 이를 상업화하여 이윤을 축적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합니다researchgate.net techratchet.com. 반면 영국 등은 특허법 등의 정비로 발명가나 자본가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체제여서 모험적인 기술 개발이 활발했단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기술자들은 새로운 기계를 발명해도 얼마 안가 모방되거나 국가에 흡수되기 일쑤였고(예: 화약, 나침반, 인쇄술 모두 결국 국가 이익 위주로 활용됨), 시장 메커니즘에 의한 혁신 인센티브가 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청 조정이 19세기 말 근대적 특허 제도를 일부 도입하려 했으나 시기상 늦었고, 전통 사회에서는 국가 주도의 기술확산이 중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환경 차이 역시 니덤 문제의 퍼즐 조각 중 하나로 거론됩니다.


정리하면, 제도·정치적 관점의 학자들은 중국이 장기간 중앙집권 안정을 누린 대가로 자생적 혁신의 탄력성을 잃었다고 보고, 유럽은 분권과 경쟁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발전의 역동성을 얻었다고 해석합니다chinasage.info. 또한 교육, 법, 조직 측면의 차이 – 중국의 과거제·관제 교육 vs 유럽의 대학·학회, 중국의 국정 운영 vs 유럽의 상공시민 사회 – 가 과학 혁신의 토양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chinasage.info escholarship.org. 이는 문화적 설명이 “왜 그 사회에 과학정신이 부족했나”를 묻는 데 비해, “누가 과학을 육성하고 지원했는가” 또는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였는가”에 초점을 맞춘 접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경제적·과학기술적 요인: 인구, 자원, 수요의 차이

세 번째로, 경제적 조건과 자원 환경에 주목한 설명들이 있습니다. 이는 과학이나 발명도 결국 사회의 물질적 필요와 보상체계에 따라 좌우된다는 관점입니다. 주요 주장과 학자를 살펴보면:


1) **마크 엘빈(Mark Elvin)**의 “고수준 균형 함정”(High-Level Equilibrium Trap) 이론

영국 학자 엘빈은 저서 『중국역사상의 구조와 변동』(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 (1973)에서, 송~명대 중국 경제가 매우 효율적인 균형 상태에 도달하여 오히려 산업혁명으로의 이행이 가로막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송원시대에 중국이 농업 생산성과 수공업 기술을 극대화하여 인구를 부양하고 상업도시까지 발전시켰지만, 그 성공 때문에 잉여 자본이나 노동을 혁신에 투입할 여력이 없어진 상태를 맞이했다고 봅니다public.wsu.edu. 다시 말해, 농업과 수공업이 이미 인구부양에 충분한 생산성을 달성했고 노동임금은 한계까지 떨어져 *“노동 절약형 기술 혁신의 수요”*가 줄어든 함정에 빠졌다는 것입니다public.wsu.edu.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지만 개간할 토지는 한정되어 생산당 수익은 줄고, 가족들은 기술 혁신보다는 조혼과 출산으로 노동력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public.wsu.edu. 그 결과 18세기경 중국 경제는 거대한 인구를 간신히 부양하는 균형 수준에 머물렀고, 추가로 생산력을 높일 혁신(예: 증기기관 도입 등)은 투자 대비 이득이 없거나 불필요한 상황이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엘빈의 이론은 인구압과 경제 균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왜 산업혁명 직전에 중국 사회의 기술 진보 속도가 둔화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영향력이 컸습니다public.wsu.edu. 이후 경제사학자 탕 안쥔(唐安君)이나 조강(趙剛) 등이 엘빈의 함정 이론을 수정·보완하며, 인구비율·토지제의 미시적 분석을 더하기도 했습니다public.wsu.edu.


2) 인구와 기술 수요

중국 경제의 인구과잉과 낮은 임금은 위 엘빈의 이론뿐 아니라 여러 경제사학자들의 공통 지적입니다. 반대로 유럽은 인구가 비교적 적고 임금이 높았기에,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 발명의 경제성이 높았다는 견해입니다techratchet.com. 영국의 산업혁명이 섬유산업 등의 노동절약형 기계로 시작된 것은 임금이 비싼 환경에서 자본을 투입해 기계를 만드는 편이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Robert Allen) 등이 이러한 임금-자본 비율로 산업혁명을 설명한 바 있으며, 이는 니덤 문제의 연장선에서 **“왜 그 발명이 그곳에서 채택되었나”**를 해명해줍니다. 중국에서는 값싼 인력으로도 충분히 생산을 늘릴 수 있었으므로, 굳이 비싼 증기기관이나 방직기를 도입할 유인이 약했다는 것입니다chinasage.info. 이를 좀 더 일반화하여, **“기술 발전은 그 사회의 희소자원 절약을 향한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즉 노동이 희소하면 노동절약 기술이, 토지가 희소하면 집약농법 기술이 발달한다는 것으로, 중국은 토지집약적 농업 혁신에 강점을 보였지만 (예: 품종 개량, 다모작), 유럽은 노동절약형 공업 기술에 치중하게 된 차이가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3) **저스틴 린(Justin Yifu Lin)**의 종합 가설

중국 출신 경제학자 린이푸(林毅夫, Justin Y. Lin)는 1995년 논문 「Needham Puzzle: Why the Industrial Revolution Did Not Originate in China」에서, 니덤 문제를 **“수요 측면과 공급 측면 실패”**로 구분해 고찰한 뒤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습니다public.wsu.edu. 린 교수는 과학혁명의 유무가 결정적 차이라고 보았는데, 중국은 경험에 입각한 기술개발 단계에서 앞섰으나 실험과 과학에 입각한 발명 단계로 이행하지 못해 뒤처졌다고 분석합니다techratchet.com. 그는 “전근대의 기술 혁신은 경험적 시행착오에서 나오지만, 근대의 혁신은 과학적 실험에서 나온다”고 전제하고, 중국이 초기엔 방대한 인구로 다양한 경험 지식을 축적해 발명이 활발했으나(예: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 일찍 발명)public.wsu.edu, 17세기 이후 서구에서 과학적 방법론이 등장하면서 기술 발전이 가속될 때 중국은 이 패러다임 전환을 놓쳤다고 주장합니다techratchet.com.


결국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부재가 산업혁명 부재로 이어졌다는 논지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 원인으로 린 교수는 제도적 측면을 지목하는데, 중국의 통일 왕조 체제와 유교 이념, 과거제 등이 이질적인 새로운 과학 사조를 수용하지 않는 폐쇄성을 가져와 사상 전환의 계기를 만들지 못했고techratchet.com, 유럽은 다양한 이념과 종교가 경쟁하는 가운데 실험 과학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techratchet.com. 요컨대 린 교수는 **인구·경제적 요인(경험기술의 축적)**과 **제도·사상적 요인(과학혁명 수용 여부)**을 결합하여 니덤 문제에 답한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필요한 것은 중국이 못해서가 아니라, 서양이 새롭게 만들어낸 과학적 방법의 등장이 변곡점이었다”는 다소 상호보완적 시각으로 평가됩니다techratchet.com.


4) **켄넷 포메란츠(Kenneth Pomeranz)**의 ‘대분기’(Great Divergence) 논점

미국 역사학자 포메란츠는 저서 『대분기: 중국, 유럽, 근대세계경제의 형성』 (2000)에서 니덤 문제와 밀접한 경제사적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18세기까지 중국과 서유럽의 경제발전 수준이 대체로 비슷했으며, 19세기에 영국을 필두로 한 서양만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몇 가지 우연한 자원적 이점 덕분이라고 주장합니다. 핵심적으로, 영국은 지리적으로 풍부한 지하자원(특히 양질의 석탄)을 산업 중심지 인근에서 확보했고, 아메리카 식민지를 통해 방대한 토지와 원료, 시장을 얻었지만techratchet.com, 중국은 그러한 행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영국은 목재 고갈 문제를 석탄으로 해결하여 에너지 혁신을 이뤘고, 대서양 무역으로 설탕·면화 플랜테이션의 생산물을 들여와 본국 공업의 원료와 소비재 시장으로 활용했지만techratchet.com, 중국은 청대 인구 증가로 목재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석탄 산지가 경제 중심지에서 멀어 활용이 어려웠고(산둥·양쯔 삼각주 등 동부 지역에서 석탄 산지인 산시성까지 거리가 멀었음), 해외 식민지는커녕 자국 서남부 변경 개척에 겨우 대응하는 처지였다는 것입니다sacu.org. 그 결과 영국은 에너지와 자원의 돌파구를 마련해 Malthusian 한계를 돌파했지만, 중국은 내적 자원으로 한계에 직면하여 산업혁명으로 못 나아갔다는 설명입니다techratchet.com.


포메란츠는 이를 *“외부로부터의 생태학적 해방(ecological relief)”*이라고 부르며, 문화나 제도보다 환경 제약의 해소 여부가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techratchet.com. 이러한 주장은 니덤 문제를 전 지구적 경제 연결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서양이 단독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얻은 신세계의 부와 지하자원이 돌파구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techratchet.com. (포메란츠도 완전히 문화·제도를 배제하진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중국도 내부 발전에서는 뒤지지 않았음을 자료로 입증하려 했습니다.)


5) 데이비드 랜디스(David S. Landes) 등의 견해

한편 경제사학자 랜디스는 *『국가들의 부와 빈곤』(1998)*에서 중국의 산업화 지연을 문화와 제도의 복합적 실패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중국은 15세기 이후 자만에 빠져 변화를 거부했다”**고 평하며,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과 정화 함대의 갑작스런 중단, 청대 기술공정에 대한 무관심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랜디스는 중국 지도층의 관료적 완고함과 기술 경시 풍조(예: 시계 제조 기술 도입 좌절, 증기선 도입 반대 등)를 강조하며, 이는 유럽의 개방적 모험 정신과 크게 대조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중국의 과학자는 천문시계(自動機械)를 만들었지만 결국 정부 창고에 봉인되었고, 유럽의 과학자는 그 시계를 보고 영감을 받아 개량했다”는 식으로 동서의 태도 차이를 묘사합니다downtoearth.org.in. 랜디스의 견해는 어느 한 요인이라기보다 문화적 자부심이 제도적 폐쇄로 이어진 악순환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니덤이나 포메란츠보다 서구 중심의 평가라는 논쟁도 있지만, 그의 저작은 대중적 파급력이 있어 니덤 문제 토론에서 자주 인용됩니다.


정리하면, 경제·환경적 관점의 설명은 기술발전의 **“수요와 공급”**을 물질 조건에서 찾습니다. 중국은 거대인구 사회로 생활수준 균형에 갇혀 공업화의 촉매가 부족했고public.wsu.edu, 결정적으로 에너지 및 자원의 추가 공급(석탄·해외식민지)이 없어 산업혁명으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techratchet.com. 반면 유럽(특히 영국)은 임금 상승-자본 축적-발명 투자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해외 영토와 광물자원의 획득으로 전근대 경제의 한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techratchet.com. 이러한 시각은 **문화나 제도보다 “객관적 조건”**에 무게를 두며, 니덤 문제를 세계 경제사 속 사건으로 파악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6. 비교 및 종합 분석: 여러 요인의 교차

위에서 정리한 문화적, 제도적, 경제적 요인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화 vs. 제도

펑유란이나 베버, 랜디스 등이 강조한 사상 문화는 허프나 니덤이 지적한 제도 구조와 떼어놓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유교적 가치관 (문화)은 과거시험 중심 교육 (제도)으로 구현되었고, 이는 다시 관료엘리트의 구성과 과학 경시 풍조로 이어졌습니다atlantis-press.com chinasage.info. 그러므로 문화와 제도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작용했습니다. 서양도 마찬가지로, 개인의식의 성장 (문화)이 대학과 학회의 설립 (제도)을 도왔고, 이 제도가 다시 과학정신을 북돋았습니다escholarship.org.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문화와 제도를 통합적으로 고려합니다. 니덤 역시 관료제(제도)가 상공업 경시(문화)를 낳았다고 지적했고atlantis-press.com, 허프도 **법제도(제도)와 지적풍토(문화)**의 결합을 논했습니다.


2) 중국 학자 vs. 서양 학자

니덤 문제에 대한 중국 측과 서양 측 시각 차이도 흥미롭습니다. 초창기인 20세기 초 중국 지식인들은 오히려 자국 문화의 부진을 통렬히 비판하며 “과학 없는 중국”을 자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tsinghua.edu.cn. 펑유란이나 후스(胡適) 등이 그런 예로, 이들은 전통을 극복하고 서구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반면 니덤을 비롯한 서구의 친중국 학자들은 “중국에도 과학정신이 있었고 기초 발명에서 앞섰다”는 것을 보여주며 중국 문명을 옹호했습니다atlantis-press.com.


최근 들어서는 중국과 서양 학자 모두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취하는 경향입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니덤 문제를 하나의 **“역사적 테마”**로 보고,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동서 상호 보완과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tsinghua.edu.cn. 예컨대 유럽 경제사 연구로 니덤 문제를 재조명한 포메란츠는 서구 우월이나 중국 실패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공통의 제약과 우연을 강조했으며techratchet.com, 중국 출신의 저스틴 린 역시 과거의 지체를 오늘의 발전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낙관을 비추었습니다. 실제로 20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과학기술 급성장은, 니덤 문제를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기지 않고 역사적 맥락의 산물로 이해하게 해줍니다chinasage.info. *“중국인은 과학에 부적합하다”*는 식의 인종적 편견은 오늘날 완전히 폐기되었고chinasage.info, 대신 시대와 조건의 조합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 격차로 보는 시각이 주류가 되었습니다tsinghua.edu.cn.


3) 근본 원인 vs. 촉발 계기

학자들마다 근본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 차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허프나 베버는 정신문화(가장 깊은 원인)를 들고, 엘빈이나 포메란츠는 물질조건(경제/환경 기반)을 더 근본적인 제약으로 봅니다. 한편 니덤이나 린은 여러 층위의 원인들이 상호작용했음을 강조했습니다atlantis-press.com techratchet.com. 또한 과학혁명 자체를 **“우연한 촉발 계기”**로 보느냐 **“필연적 산물”**로 보느냐도 갈립니다. 허프는 서구 중세 대학의 존재 등 필연적 준비가 있었기에 과학혁명이 일어났다고 보는 반면escholarship.org, 포메란츠 등은 산업혁명은 상당한 우연성에 기대었다고 보기도 합니다sacu.org. 이런 논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결국 단순한 답은 없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인식입니다.


7. 결론: 니덤 문제에 대한 종합적 고찰

“왜 중국에서는 근대적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니덤 문제는 단일 학설로 결론짓기 어려운 복합적 주제입니다. 문화적 요인(유교적 학술 전통과 인식의 틀), 제도적 요인(관료제와 통일제국의 사회구조), 경제적 요인(인구 압박과 자원 분포) 등이 두루 작용하여 중국과 서양의 과학 발전 경로에 차이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학자들의 논의를 종합하면, 중국이 뒤처진 것이 아니라 서양이 새로운 길을 개척한 측면이 크다는 점도 부각됩니다techratchet.com. 15세기 이전까지 중국은 세계 선두의 과학기술 문명이었고, 이후 서양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은 여러 우연한 조건들이 맞아떨어져 촉발된 사건이었습니다techratchet.com. 그런 의미에서 니덤 문제는 **“서양은 어떻게 앞서갔나”**와 “중국은 왜 제자리에 머물렀나” 두 측면을 모두 포함합니다.


궁극적으로 학자들은 하나같이 단일 요인으로 이 질문을 풀 수 없으며, 여러 역사적 요소들의 복합적 산물이라는 데 동의합니다chinasage.info. 중국의 사례는 과학과 사회발전이 문화·제도·경제의 상호작용 속에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줍니다. 니덤 문제를 통해 얻은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용합니다. 세계 각 문명이 이룩한 성과를 서로 배우고 결합할 때 인류 전체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니덤의 신념처럼tsinghua.edu.cn, 동서양의 경험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요구됩니다. 결론적으로, **니덤 문제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해답은 “복합 요인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전통 사회에서는 문화적으로 실용학문을 중시하고 (문화) 정치적으로 중앙 권위가 강했으며 (제도) **경제적으로 거대한 인구를 기존 기술로 부양할 수 있었던 환경 (경제)**이었던 만큼, 혁신의 긴박성이나 체계적 과학 방법론의 탄생이 지연되었습니다. 반면 서유럽은 사상적 다원성과 (문화) 국가 간 경쟁 (정치), 신대륙과 자원 획득 (경제) 등의 특수한 상황이 결합되어 근대 과학과 산업이 꽃필 토양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techratchet.com.


이처럼 다측면적 이해가 니덤 문제를 풀 열쇠이며, 이러한 접근은 특정 문명을 우열 평가하기보다 역사적 조건의 차이를 인식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이미 과학기술 강국으로 부상하여 우주개발이나 입자물리 등 최첨단 분야에서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chinasage.info, 이는 과거의 격차가 영속적인 것도, 어떤 민족의 본질 때문도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니덤 문제가 던진 “동서 과학 발전의 수수께끼”는 이제 서로의 강점을 통합해 인류 공동의 과학 문명을 풍부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tsinghua.edu.cn.


8. 참고문헌 (주요 학자 및 저작)

Joseph Needham –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시리즈 (Vol.1~7, 1954-), The Grand Titration (1969) 등. 니덤의 중국과학사 연구 총서atlantis-press.com.

Feng Youlan (馮友蘭) – 中國哲學史 등 저술. 1920년대 “중국에 과학없음” 발언tsinghua.edu.cn.

Max Weber – The Religion of China: Confucianism and Taoism (1915). 유교 문화와 경제발전 논의.

Toby E. Huff – The Rise of Early Modern Science: Islam, China and the West (1993). 비교문명권 과학 발전 연구escholarship.org.

Mark Elvin –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 (1973). 고수준 균형함정 이론 제시public.wsu.edu.

Justin Yifu Lin (林毅夫) – “Needham Puzzle: Why the Industrial Revolution Did Not Originate in China” (경제발전 & 문화변동 저널, 1995). 린의 경제사 논문techratchet.com.

Kenneth Pomeranz – The Great Divergence: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conomy (2000). 대분기와 자원 요인 강조techratchet.com.

David S. Landes – The Wealth and Poverty of Nations (1998). 문화 및 정책적 요인 서술.

기타: Ian Morris – Why the West Rules–For Now (2010); Jack Goldstone – Why Europe? (2008) 등 비교사적 저작들. 이러한 연구들도 니덤 문제와 유사한 쟁점을 다룸.



[주요 학자 주장 정리]


1.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의 “Needham Puzzle”

주장 요지
조지프 니덤(19001995)은 방대한 저술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1954)* 시리즈에서, 고대·중세 중국이 인류 과학기술(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을 선도했던 흔적을 지적하며, 그럼에도 왜 근대적 과학혁명(Modern Science)은 중국에서 발생하지 않았나라는 문제를 제기함. 이를 “니덤 문제(Needham Puzzle)”라고 부름.

니덤의 설명

니덤은 단순히 “중국 전통사회의 보수성”만을 이유로 들기보다, 중국의 유교적 관료체제와 자연철학(도교·음양오행론) 등 전통 사유체계가 서구 과학혁명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음을 강조.제도·사회구조적 요인(황제·관료 지배, 상인의 지위 취약, 학문의 실용성 강조, 인문·기술 분화 미약 등)으로 인해, 근대식 과학 패러다임(수학화, 실험·반증, 과학자 집단의 독립성)이 생기기 어려웠다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함.

주요 출처
Joseph Needham,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1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4.

Joseph Needham, 「The Grand Titration: Science and Society in East and West」(1969), 등


2. 막스 베버(Max Weber)와 관료제·종교 윤리 요인

베버의 ‘합리화’·‘프로테스탄트 윤리’ 이론
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05)에서 서구 근대 자본주의·과학이 발흥한 배경 중 하나로 개신교의 합리화 정신을 지목. 동아시아(특히 유교·도교·불교가 혼합된 중국)에서는 이러한 “초월적 신 앞에서 개인이 책임지는” 종교윤리가 미약했으며, 관료제적 질서가 과학혁명을 추동하는 독립된 학문 공동체의 성립을 막았다고 보았다.

평가

베버의 시각은 종교·윤리 차원에서 동서 문명의 차이를 해석했다는 점에서 큰 영향을 주었으나, 과학 기술 자체의 세부 발전 과정을 충분히 분석하지는 않았다는 평이 있음.
주요 출처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1920~1921).
국내 번역 예: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등.


3. 토비 허프(Toby E. Huff)의 제도·법체계 분석

Huff의 핵심 논지
토비 허프는 「The Rise of Early Modern Science: Islam, China and the West」(1993)에서, **서유럽 중세 대학(University)**과 로마법 전통이 학문의 자유와 과학혁명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 반면 이슬람권·중국에서는 국가·종교 권위가 학문에 독립된 ‘법인(corporation)’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 과학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어려웠다고 분석.

동아시아 맥락

중국·조선·일본 등 유교 관료체제는 시험(과거)·관학 중심으로 운영돼, 대학·학술 공동체가 자유로운 연구를 전개하기 어려웠다고 봄. 이는 정통 유교적 교화와 국가 관리기구에 흡수된 “학자-관료”들이 ‘독립된 자연철학’ 발전보다는 실용적 치국기술(농서, 역법) 위주로 치중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

주요 출처
Toby E. Huff, The Rise of Early Modern Science: Islam, China, and the We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증보판 2003).


4. 마크 엘빈(Mark Elvin)의 고수준 균형 함정(High-Level Equilibrium Trap)

‘고수준 균형 함정’ 이론
엘빈(1938~ )은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1973)에서, 송~명대 중국이 이미 농업·상업·수공업이 효율적 수준에 도달한 나머지, 근대 기술혁신을 강하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설명. 사회·경제가 일정 수준에서 안정된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에, 서구와 같은 과학·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동력이 약했다는 주장이다.

과학 미발달 원인

즉, 노동력이 풍부하고 전통 기술이 수요를 충분히 충족하니, 굳이 새로운 과학적 방법(기계화, 실험학 등)을 추구하는 유인(이윤 압박)이 적었다는 것. 학문적으로도 관료·사대부가 실용적·경세적 지식을 우선시해, 자연현상의 기계론적·수학적 해석으로 이어질 동기가 작았다고 보는 맥락이다.

주요 출처
Mark Elvin,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3.

국내 번역본: 『중국사의 패턴』(삼지원, 1997) 등.


5. 케네스 포메란츠(Kenneth Pomeranz) 등 경제사 관점

『The Great Divergence』(2000)
포메란츠는 18세기까지 동아시아(특히 중국 양쯔강 하류)와 서유럽의 경제·기술 수준이 유사했다고 주장. 이후 석탄·신대륙 자원 등의 요인으로 유럽이 산업혁명을 먼저 이룩했다고 설명. 이는 주로 경제사적 원인(자원, 무역망, 식민지, 국제분업)으로 서구가 근대 기술·산업을 선도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지만, 순수 과학(Scientific Revolution)의 발흥과는 직접적 관련이 다소 떨어진다.

과학 vs. 경제 발전

포메란츠 계열 연구는 “동아시아가 전혀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경제·사회 구조 측면에서 산업화로 연결되지 않았다”고 분석. 근대 ‘자연과학’이 일어나는 제도·사상적 배경(허프, 니덤의 논리)과는 조금 결이 다르나, 왜 서양이 먼저 산업화→근대 과학체계로 확장했는지 뒷받침하는 맥락을 제공한다.

주요 출처
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conom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6. 기타 요인 및 학자들의 보충 의견

1) 과거제도(科擧制度)와 관료 엘리트주의
동아시아(특히 중국·조선)에서 문(文) 중심 과거시험이 관료 등용의 핵심통로였고, **경학(경전)·사장(글쓰기)**을 우선시하는 시험구조가 자연학·수학·천문·기술을 부차적으로 밀어냈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많다.

예: Benjamin A. Elman (엘만)의 “A Cultural History of Civil Examinations in Late Imperial China” (2000)에서, 과거제도가 학술 지향을 ‘문사(文士)형 지식’으로 고착시켰음을 설명.
한국학 연구자 이현우, 『조선의 과거제도와 과학기술』 논고 등에서도 유사 지적.


2) 중화사상과 문화적 자족
일부 전통 지리학·사상사 연구(예: William Rowe, Patricia Ebrey)에서는, 중국이 ‘천하(天下)’를 중심으로 외부 문명(특히 서양 과학) 수용에 소극적이었다고 주장. 자족적·우월적 세계관 속에서, 근대식 과학 공동체가 만들어질 사회적 계기가 적었다고 본다.


3) 실용기술과 학술의 분리

고대·중세 동아시아에는 풍부한 **실용 기술(농업, 제지, 화약, 금속가공 등)**이 있었지만, 추상적 이론(수학·물리학)과 체계적 실험·검증을 결합하는 근대 과학 모델을 형성하는 데 제도·사상적 제약이 컸다는 분석도 있다(니덤, 허프 등과 맥락 공유).


7. 요약

동아시아 문명(중국·조선·일본 등)에서 근대 과학혁명이 서구만큼 일찍 혹은 급진적으로 일어나지 못한 이유를 두고, 여러 학자가 다양한 요인을 제시해 왔다. 대표적으로,


조지프 니덤: 유교 관료체제·전통사유 체계 속에서, 근대 과학 모델이 태동하지 못했다는 “니덤 문제” 제기.

막스 베버: 종교윤리·합리화 과정에서 서구와 동아시아가 달랐다고 봄.
토비 허프: 서구 대학·법인(University)과 달리 중국·이슬람권은 국가·종교 권위에 예속되어 과학자 공동체의 자율성이 없었다고 설명.

마크 엘빈: “고수준 균형 함정” 이론(중국이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돼 혁신 동인이 부족).
포메란츠 등 경제사학자: 자원·무역·식민지 등 외부 요인이 서구의 산업혁명(→ 근대 과학 체계 정착)을 가속했다고 분석.

이 밖에도 과거제도, 문화적 자족, 실용기술과 이론 분리 등의 요인이 지적된다.

다만, **“왜 동아시아 자연과학이 (서구와 같은 방식으로) 근대화를 못했는가”**라는 질문은 한 가지 요인보다는 다층적·복합적 원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학계 내에서도 여러 해석이 공존한다.


8. 대표 학술 출처(원문)

Joseph Needham,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s. 1–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4–).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1920–21). (국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

Toby E. Huff, The Rise of Early Modern Science: Islam, China, and the West, Cambridge Univ. Press, 1993.
Mark Elvin,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 Stanford Univ. Press, 1973.

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conomy, Princeton Univ. Press, 2000.
Benjamin A. Elman, A Cultural History of Civil Examinations in Late Imperial China, Univ. of California Press, 2000.


위 저작들과 함께, 전통 동아시아 사상사·과학사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정치·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친 구조적·제도적 차이가, 동아시아가 서구와 같은 근대 자연과학 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주된 배경으로 지적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