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챗선생 designed by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두 거장이며, 중세 스콜라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흔히 스승(플라톤)은 “이상적”이라고 하고, 제자(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이라고 비교하지만, 실제로 둘의 사상은 더 복합적이고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형상(Form)과 질료(Matter)**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Form) 이론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아래에서는 두 철학자의 사상을 간략히 비교하고, 중세 스콜라철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1.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비교

1.1. 플라톤의 이데아론

1) 초월적 실재(Transcendent Reality)

플라톤에게 이데아(이념, Idea)는 감각 세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 대상(“감각 세계”)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모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진정한 “참된 지식”은 감각 세계를 넘어서 이데아 세계를 직관(이성적 통찰)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2) 이원적 세계관(Dualism)
플라톤은 세계를 크게 이데아 세계(완전·영원·변화 없음)와 감각 세계(불완전·일시·끊임없이 변화)에 의해 이원적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데아 세계가 실재이며, 감각 세계는 이를 반영하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3) 인식론
플라톤에게 진정한 앎(epistēmē)은 이데아를 직접 접하는 것으로, 학습은 곧 영혼이 원래 알던 이데아를 떠올리는 “상기(anamnesis)”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1.2.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hylomorphism)

1) 내재적 실재(Immanent Reality)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Form)”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 내재합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항상 형상 + 질료의 결합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개념입니다(이른바 질료형상론, hylomorphism).


2) 형상(Form)

사물이 “무엇(What it is)”인지를 결정하는 원리.

예: 나무 책상이라는 구체적 사물은 ‘나무(질료)’와 ‘책상이라는 형상’의 결합으로 존재합니다.


3) 질료(Matter)

사물이 “무엇으로(What it is made of)” 구성되는지 결정하는 재료적 원리.

질료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특정한 “무엇”이 아니며, 형상을 부여받아야만 구체적인 사물이 됩니다.


4) 변화(운동)의 설명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생성·소멸, 변화 등을 형상과 질료 개념을 통해 설명합니다.

이때 형상은 사물의 목적(텔로스, telos)과도 관련이 있어, 자연적 존재자들은 그들 나름의 완성을 향해 작용한다는 점(“목적론적” 세계관)을 강조했습니다.


5) 인식론

진정한 지식이란 사물에 내재하는 원리(형상)를 “추상화(abstractio)” 과정을 통해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감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성적 작용을 통해 형상 자체를 인식하게 됩니다.


1.3. 플라톤 이데아 vs. 아리스토텔레스 형상 정리

존재 방식

(플-이데아) 감각 세계를 초월하여 독자적으로 존재

(아리-형상) 개별 사물 속에 내재하며, 질료와 결합하여 실제 사물이 됨

사물과의 관계

(플-이데아) 사물은 이데아의 모방(불완전한 반영)

(아리-형상) 사물 자체가 형상+질료로 구성 (이데아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음)

인식론

(플-이데아) 이데아 세계로의 정신적 상승(상기)

(아리-형상)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추상화 → 일반적 원리에 대한 이성적 파악

세계관

(플-이데아) 이원론(이데아 세계와 감각 세계)

(아리-형상) 일원론(형상+질료로 된 구체적 존재가 실제, 초월적 세계를 가정하지 않음)

목적론/운동 설명

(플-이데아) 신화·수학적 형이상학적 설명(“동굴의 비유” 등)

(아리-형상) 형상이 가지는 텔로스(목적) 개념을 통해 자연스러운 변화와 완성을 설명


2. 중세 스콜라철학에 대한 영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각각 다르게 중세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에 스며들어, 신학과 결합하면서 유럽 사상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2.1. 플라톤적 전통의 영향

1)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년)

초기 교부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플라톤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의 관념(Truth)은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라는 생각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적인 플라톤주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고, 중세 신학자들에게 플라톤 사상이 “신에 대한 합리적 사유”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통한 유입

플로티노스(Plotinus, 3세기) 등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이 기독교 세계관과 결합하면서, 중세 신학은 신을 “최고선, 완전한 존재(플라톤의 최고 이데아)”로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영혼-육체, 영원-일시 등)에 대한 이해도 플라톤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콜라철학의 영혼론과 신론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2.2.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영향

1)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년)

아퀴나스는 13세기 파리 대학 등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 체계에 본격적으로 통합했습니다.

형상+질료 개념은 인간의 **육체(질료)**와 영혼(형상)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 채택되어, **영혼이 신체의 ‘형상’**이라는 정의로 이어졌습니다.

신학적 문제를 다룰 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인식론을 적극 활용해, “믿음(fides)과 이성(ratio)의 조화”를 시도했습니다.


2) 중세 대학교 내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tradition’

12~13세기에 걸쳐 아랍어 및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특히 형이상학, 자연학, 영혼론 등)이 대규모로 번역·전파되었습니다.

스콜라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대한 해설서를 저술하며, 형이상학, 자연학, 윤리학 등을 신학과 결합하는 연구를 발전시켰습니다.


3) ‘자연적 질서’ 및 ‘목적론’ 해석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목적론(텔로스)은 세계 안의 모든 것이 특정 목적을 향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는 시각으로, 창조주(신)의 섭리와 쉽게 결합했습니다.

세계를 관찰하여 신의 지혜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스콜라철학의 “이성적 신학” 발전에 큰 기반이 되었습니다.


3. 결론 요약

1)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개별 사물(질료) 안에 내재하며, 둘이 결합함으로써 구체적인 존재가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 플라톤은 감각 세계를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모상으로 간주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 세계 자체가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경험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파악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 중세 스콜라철학에의 영향

- 플라톤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신(神)을 초월적이고 완전한 실재(이데아)로 보는 관점, 영혼-육체의 이원론적 이해, 영원과 일시의 구분 등을 중세 기독교 신학에 제공했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신학의 합리적·체계적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형상과 질료 개념이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해명하는 도구가 되었고, 목적론과 자연학은 “신의 섭리”를 설명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단순히 “이상적·경험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각각의 형이상학적·인식론적·윤리적·정치적 측면에서 서양 철학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중세 스콜라철학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두 사상은 신학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주요 철학적 도구로 활용되며, 서구 사유 전통을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4. 참고 문헌(영문/라틴어 원전 및 2차 문헌 예시)

Plato, Republic, Phaedo, Timaeus 등.

Aristotle, Metaphysics, Physics, De Anima, Nicomachean Ethics 등.

Augustine, Confessiones, De Civitate Dei 등.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Summa contra Gentiles 등.

Copleston, Frederick. A History of Philosophy, Vol. 1 & 2 (Image Books).

Gilson, Étienne. History of Christian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Random House).

Kretzmann, Norman & Kenny, Anthony & Pinborg, Jan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Mediev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나의 말:

기독교와 결합시 플라톤 철학은 천상계와 지상계를 나눌 때 유용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지상에서 역사하는 신을 이야기할 때 유용했다고 할 수 있나요?

ChatGPT의 말:

대체로 그런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조금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띱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각각 ‘천상계-지상계’의 구분 혹은 ‘지상의 역사 속에서 작용하시는 신’이라는 관점에서 단순히 이원적으로 나누어 차용하기보다는, 두 철학 체계 각각의 핵심 개념을 필요에 따라 선택·재해석하여 폭넓게 활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경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1.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결합

-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완전·영원·초월)와 감각 세계(불완전·유동·모상)를 이원적으로 구분했으며, 영혼이 원래 ‘위(이데아 세계)’에 속해 있다가 ‘아래(감각 세계)’에 떨어진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를 기독교가 받아들였을 때, ‘하늘나라(천상계)와 지상 세계’라는 구분을 사유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神)을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로, 지상계(이 땅)를 ‘불완전하고 유한한 세계’로 대조하며 플라톤적 초월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 따라서 천상 세계(신적·영원)와 지상 세계(인간적·일시)를 구분하고,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사유는 중세 기독교가 ‘두 도시’(천상도시 vs. 지상도시)로 세계를 파악하는 시각과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의 결합

-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가 결합한 구체적 사물이 ‘실재’한다고 보고, 자연 세계 속에서의 목적론(텔로스)과 운동 원인을 해명했습니다. 신은 ‘우주를 운동하게 하는 최고 원인(제1 원인)’으로서 사물의 질서와 목적을 보장하는 존재입니다.

- 이러한 사유는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작용하시는 창조주·섭리자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철학적 도구로서 매우 유용했습니다.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인과론(제1 원인, 4가지 인(因) 이론)을 끌어와, 세계를 ‘신의 섭리’ 아래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 즉, 자연과 역사를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함으로써 신의 존재나 속성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반으로 한 스콜라 신학(특히 토마스주의)에서 강조되었습니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자연학은 ‘현실 세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신’을 규명하고 변호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플라톤적 전통은 ‘초월·영원·이원론’이라는 구도로 기독교의 내세관, 천상과 지상의 구분을 사유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은 ‘내재·목적론·인과론’을 통해 창조·섭리·역사 속 신의 작용을 보다 논리적·자연철학적으로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실제 교부들(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이 둘을 각각 독립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주제에 따라 서로 다른 개념을 절충하거나 보완하는 형태로 기독교 신학 체계를 발전시켰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알레고리)는 흔히 인식론을 설명하는 예시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존재론의 함의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플라톤에게서는 존재론(형이상학)과 인식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동굴의 비유 역시 이 둘을 분리해서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어떤 측면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인식론적 독해와 존재론적 독해가 가능합니다.


1. 인식론적 측면

1) 무지에서 지식으로의 여정

동굴 속에 묶여 있는 죄수들이 오직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실재’로 착각하다가, 동굴 밖 빛(태양)을 직접 보면서 참된 실재를 깨닫는 과정은 인간이 어떻게 무지(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식(이데아 세계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가를 보여줍니다.


2) 상기(想起)와 철학적 통찰

플라톤에게 ‘배움’이란 궁극적으로 이데아 세계를 ‘상기(Anamnesis)’하는 것으로, 감각으로 주어지는 현상(동굴 벽에 투영된 그림자)은 불완전한 모상(模像)에 불과합니다.

동굴을 벗어나 ‘태양(선의 이데아, Form of the Good)’을 보는 비유는, 철학적 성찰과 이성적 통찰을 통해 참된 이데아를 파악함으로써 지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정리하자면, 동굴 안과 밖을 오가는 여정이 바로 인간의 인식 과정에 대한 은유가 되므로, 동굴의 비유는 인식론적 의의를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2. 존재론(형이상학)적 측면

1) 이데아와 현상의 위계

플라톤은 감각적으로 접하는 세계(동굴 속 그림자)와 이데아 세계(동굴 밖 실제 사물, 그리고 빛의 원천인 태양)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이는 곧 존재 계층(Hierarchy of Being)을 설정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림자(감각 세계)는 불완전·유동적인 반면, 이데아 세계는 영원·불변·완전한 실재로서 ‘보다 높은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고 봅니다.


2) 실재의 본질

플라톤 철학에서 진정한 실재는 이데아이므로, 동굴 안 그림자(현상)는 이데아(실재)를 모방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반영한 것에 불과합니다.

동굴의 비유를 통해 플라톤은 ‘보이는 세계(현상)는 더 높은 차원의 실재(이데아)에 의해 규정된다’는 존재론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동굴의 비유는 단지 “어떻게 알 것인가”라는 인식론적 고민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엇이 진정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주장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3. 결론: 인식론과 존재론, 둘 다를 함의한다

1) 인식론적 측면:
무지-의견(감각/그림자)에서 지식-진리(이데아/태양)로 나아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인간 정신이 어떻게 ‘보이는 것’을 넘어 ‘참된 실재’를 알 수 있는지 설명한다.


2) 존재론(형이상학)적 측면:

감각 세계와 이데아 세계의 존재 위계를 제시한다.
이데아(태양, 실제 사물)가 보다 실재성이 높고, 감각적 대상(그림자)은 이를 부분적으로 모사하는 수준일 뿐이다.


결국 동굴의 비유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인 존재론과 인식론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존재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 이데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식론인가, 존재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둘 다를 포괄하는 핵심 은유”라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élēs)는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목적론(teleology)**과 **인과론(causation)**을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사물이 왜 존재하고 움직이는가?”라는 물음에 단순히 물리적인 원인(“어떻게”)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왜) 그렇게 되는가?”라는 목적(목적인, final cause)까지 포함해야 비로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래에서는 그의 목적론과 인과론을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teleology)

1.1. 자연의 ‘목적성’ 혹은 ‘지향성’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물은 단순히 우연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목적(telos)을 향해 나아간다고 여겨집니다.

예: 도토리는 스스로 참나무가 되기 위한 잠재성(potentiality)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목적(완성된 형태, actuality)을 향해 성장해갑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자연물에게 **고유한 본성(physis)과 완성 상태(entelecheia)**가 있다고 봤습니다.


1.2. 자연적 목적과 인위적 목적의 구분

1) 인위적(artificial) 대상:

인간이 어떤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예: 책상, 의자 등)은 외부에서 목적이 주어집니다(제작자의 의도).


2) 자연적(natural) 대상:

식물, 동물, 인간 같은 자연물은 스스로의 내부에 **목적(완성 상태)**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목적을 향해 발달·변화합니다.

예: 씨앗(질료)은 형상으로서의 완성된 식물(목적)을 지향하며, 내부 원리에 따라 스스로 자라납니다.


1.3. 목적론과 자연의 질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목적론은 “자연은 합리적·질서 있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믿음을 뒷받침합니다. 자연물 각각이 **고유한 기능(ergon)**과 **완성(entelecheia)**을 지니므로, 자연 전체 또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입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four causes)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무엇이 왜 그렇게 되는가?”를 네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4가지 인(因) 또는 4원인설이라고 부릅니다. (주요 출처: Physics(자연학), Metaphysics(형이상학))


1) 질료인(質料因, Material Cause)

어떤 사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

예: 동상(塑像)을 예로 들면, ‘청동(bronze)’이 질료인입니다.


2)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

사물의 본질적 ‘형태’ 또는 ‘구조’, **“무엇이 되게 하는가?”**에 대한 설명.

동상의 경우, 실제로 조각된 사람(또는 신)의 모습, 즉 형태(Form)가 형상인이 됩니다.

자연물의 경우, 그 종(species)을 정의하는 ‘형상’이 곧 그 사물의 본질을 결정합니다(예: 참나무라는 ‘형상’).


3) 작용인(作用因, Efficient Cause)

“무엇(누가) 이 사물을 만들어내거나 변화시켰는가?” 즉, 작용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동인(動因)’입니다.

동상이라면 조각가가, 건물이라면 건축가가 작용인입니다. 자연물의 경우, 부모(씨앗을 제공하는 생명체)나 외부 환경, 또는 스스로 갖춘 내재적 본성 등이 작용인이 됩니다.


4)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

**“무엇을 위해(왜) 이 사물이 존재하거나 움직이는가?”**에 대한 설명. 즉, 사물이 지향하는 목표·목적(telos)입니다.

동상이라면, “이것은 예술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또는 “기념비로서 세워지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연물의 경우, ‘완성 상태’(씨앗→참나무)나 ‘기능(ergon)’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인이 됩니다.


2.1. 왜 네 가지 모두 필요한가?

아리스토텔레스 이전(특히 자연철학자들 시기)에는 물질(질료)만 강조하거나, 혹은 작용인만 중시하는 식으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 사물의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예: 청동 동상을 예로 들자면,

“청동이니까 동상이네”라고만 말하면, 그 **재료(질료)**만 언급한 것.

“조각가가 만들었으니 동상이네”라고 하면, 그 작용인만 언급한 것.

“왜 만들었는가?”(기념 혹은 예술)라는 목적인을 모르면 ‘이 동상의 참된 의미나 역할’을 놓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이 동상은 인간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형상 또한 설명해야, 비로소 모든 차원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한 4원인은 서로 다른 질문(무엇으로, 무엇이, 어떻게, 왜?)에 대한 대답을 결합해 사물과 현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목적론과 인과론의 결합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목적론은 주로 **‘목적인(최종 원인, final cause)’**에 해당합니다. 즉, 자연물이나 인공물이나 모두 왜 그 모습으로 생성·변화했는지, 어떤 궁극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곧 완전한 설명이 되며, 이것이 자연은 스스로 목적을 지향한다(자연물은 내부 목적을, 인공물은 외부 목적을)에 대한 그의 핵심 논지입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변화(예: 동물이 성장한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등)는 우연이 아니라 고유한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서는

① 물질적 측면(질료)

② 형식적 측면(형상)

③ 발생·변화에 대한 작용(효율) 원인

④ 궁극적 지향(목적) 원인
이 네 축을 통해 사물을 파악하게 되며, 이는 자연학에서 윤리학, 정치학까지 포괄하는 커다란 틀을 형성합니다.


4. 맺음말

목적론: 모든 자연물은 “스스로의 완성 상태”를 향한 내재된 목적을 갖는다는 사고방식.

인과론(4원인): 사물(혹은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질료인·형상인·작용인·목적인의 네 측면을 모두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인과론은 이후 고대·중세 철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중세 스콜라 철학(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자연은 신의 섭리에 따라 합리적 목적으로 향한다”**는 이론을 정교화하는 데 핵심 개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목적인’을 배제하고 기계적·물리적 원인만 중시하는 흐름이 대두했음에도, 오늘날 생물학·윤리학·목적론적 해석 등에 대한 논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여전히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5. 참고 문헌 (주요 원전 및 2차 문헌 예시)

Aristotle, Physics (특히 Book II에서 네 가지 인과론과 자연철학 논의)

Aristotle, Metaphysics (특히 Book Α(Alpha) 및 Ζ(Zeta), Θ(Theta) 등에서 형상과 질료, 존재론)

Aristotle, De Anima (영혼의 형상-질료 구조 논의)

Aquinas, Thomas, Commentary on Aristotle’s Physics

Jonathan Barnes (ed.), The Complete Works of Aristotle: The Revised Oxford Translation

Frederick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Vol. 1 (Greece and Rome)



나의 말:

보통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제가 대조적인 철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데아와 현실의 간극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그의 철학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제를 훌륭히 수행하였다고 본다. 그것의 한 사례가 스콜라철학이다. 어떠한가?

ChatGPT의 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 문제(특히 이데아와 현실 세계의 간극)를 한층 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려 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 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정형화된 도식만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나 학문적 연속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1.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현실 간극” 문제

1) 이데아(형상)와 감각 세계의 관계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는 초월적 실재입니다. 감각적 대상(현실 세계)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模寫) 또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이데아와 현상 세계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 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구도(이데아/현상)는 한편으론 형이상학적·인식론적으로 매우 혁신적인 통찰을 제공하지만, ‘어떻게 초월적 이데아가 개별 사물(현상)에 참여하게 되는가?’ 하는 설명상의 난점을 남깁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 의식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 플라톤이 제기한 ‘보편적 실재(이데아)의 중요성’ 자체는 유효하다고 인식했을 것입니다. 다만 ‘이데아가 세계 바깥 어딘가에 따로 존재한다’는 점은 자연과학적·철학적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Form)이 사물 속에 내재한다고 주장(내재적 형태론, hylomorphism)함으로써, “보편(형상)”과 “개별자(질료, 물질)”가 어떻게 결합하여 실제 세계를 이룰 수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했다는 관점

1) 형상(이데아)의 내재화

플라톤이 ‘따로 존재하는 이데아’를 상정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은 구체적 사물(질료) 안에 이미 들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사물이 ‘무엇인지(essence)’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이데아-현실’의 간극을 “형상-질료”의 결합 구조로 재설정하여, 이 둘을 하나의 실제적 존재(ens) 안에 통합해 냅니다.


2) 사물의 운동(변화)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

플라톤의 세계관에서는 감각 세계의 변화가 이데아 세계(영원불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소 모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이데아는 변화하지 않으므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인론(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및 목적론을 통해 사물이 자연스럽게 완성(형상의 실현)을 향해 간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이 “왜 사물은 그런 ‘꼴(형상)’을 가지도록 되어 있는가?”에 대한 합리적 해명이 되어, 플라톤이 남긴 숙제를 보다 구체화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3) 인식론적·논리학적 도구의 발전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형이상학, 분석론(논리학) 등에서 체계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여, “개별 사물로부터 보편적 형상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경험적 관찰과 이성적 추론을 결합하는 모델을 내놓았습니다.

플라톤의 “상기(想起)” 이론이 직관적·신비적 뉘앙스를 띠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현실 세계의 관찰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봤습니다(추상화 과정).


3. 스콜라철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적 해법 수용

1) 중세 신학과의 결합

중세 스콜라철학은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 중심의 플라톤·신플라톤주의 전통이 강했지만, 12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 대거 라틴어로 번역·소개되면서 기독교 신학과 결합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같은 대표적 스콜라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개념을 바탕으로, **영혼(형상)**과 **육체(질료)**가 하나의 ‘사람’을 이룬다고 설명했습니다(합리적 신학 체계화).


2) 유신론적 세계 해석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 개념은, 신을 ‘완전한 이데아의 근원’으로 비유하기 용이했지만, 사물 하나하나가 어떻게 신과 결부되는지 좀 더 ‘실제적·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과 목적론이 유리했습니다.

“세계 안에서 관찰되는 자연 질서와 목적성(텔로스)이 신의 섭리를 반영한다”는 해석은 스콜라철학에서 대표적인 주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곧 “현실 세계의 구체적 존재들을 탐구하는 것 자체가 신(神)의 섭리와 창조의 원리를 이해하는 길”이라는 사상을 뒷받침했고, 그 철학적 기반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크게 기여했습니다.


3) 플라톤적·아리스토텔레스적 유산의 종합

스콜라 신학자들이 플라톤을 완전히 버렸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 세계(‘이 땅’)의 구체성과 생동감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론이 탁월했고, 이 점에서 ‘보다 합리적으로 이데아와 현실을 연결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4. 결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간극’을 성공적으로 해소했는가?”

1) 연속성과 변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흔히 극적으로 대조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이 제기한 핵심 사유(‘보편-개별’의 문제, 초월-내재의 문제 등)를 이어받아 더 ‘자연철학적·분석적’ 틀로 재설정했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지닌다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2) ‘이원론→일원론’ 전환:

플라톤의 초월 이데아와 현상 세계 사이의 격차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 내부의 형상(이데아)과 질료의 결합으로 설명함으로써, 그 간극을 좁히고 일원론적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3) 스콜라철학의 한 사례: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널리 재수용되어, 기독교 신학과 결합한 ‘합리적’ 체계 구성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플라톤식 초월론을 배제하기보다 현실 세계 안에서 통합하려 한 그의 기획이 성공적으로 확장·응용된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실 사이 간극을 보다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그 과제를 스콜라철학 같은 구체적 사상 전통이 훌륭히 계승했다”라는 견해는 학계에서도 충분히 논의되는 해석입니다. 물론 두 철학자는 세부적으로 상당히 다른 입장을 취하지만,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문제의 계승과 새로운 해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플라톤 사상을 일면 확장·보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가지 인(因)(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서 **형상(Form)과 질료(Matter)**가 특히 두드러지게 강조되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으로 여겨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실체(우시아, οὐσία)’ 이해의 중심축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피직스(형이상학)*에서 **실체(우시아, substance)**를 ‘형상과 질료가 결합한 구체적 개별자’로 정의합니다.


1) 형상+질료 = 구체적 존재

사물을 결정짓는 “본질(무엇임)”(형상)과 사물을 구성하는 “재료(무엇으로)”(질료)가 결합해서 현실 세계의 개별 사물을 이룬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나무(질료)’와 ‘책상이라는 형상’의 결합이 책상이라는 실체를 만든다는 식입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창성

플라톤이 ‘이데아(Forms)’를 감각 세계와 분리된 초월적 실재로 두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사물 안에 내재시킴으로써 사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점이 그의 형이상학을 대표하는 특징으로 자리 잡았고, 이를 한 마디로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형상과 질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엇이 진짜 실체(우시아)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핵심적인 틀이고, 그의 철학 전반(자연학·형이상학·생물학·심리학 등)을 관통하는 기초 도구가 됩니다.


2. 다른 두 인(因)과의 차이점: 작용인·목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은 각각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작용인(효율인, efficient cause)**과 **목적인(최종인, final cause)**은 주어진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발생 과정’이나 ‘목표·완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1) 작용인(효율인)

“무엇에 의해(누가) 이 사물이 만들어지거나 변화했는가?”

예: 책상의 경우 목수(제작자)가 작용인, 나무의 경우 씨앗·부모 식물이 작용인.

사물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일으키는 외부·내부 동인’에 해당합니다.


2) 목적인(최종인)

“무엇을 위해(어떤 목적을 향해) 이 사물이 존재하거나 변화하는가?”

책상의 목적은 (앉아서 책을 올려놓고 쓰는) 용도를 위해, 나무의 목적은 성장을 통해 종(種) 고유의 완성 상태에 이르기 위해.

사물의 지향점이자 완성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이들 작용인·목적인은 사물의 발생·변화 과정을 설명하고, 특히 자연물에서의 ‘목적론적 질서(teleology)’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물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점(실체론)의 가장 직접적인 설명틀은 형상과 질료이므로, 자연히 이 둘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3. 역사적·학문적 전통에서의 강조

1) 중세 스콜라철학 수용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 체계에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형상(forma)과 질료(materia) 개념을 인간 존재(영혼과 육체), 자연만물(자연적 형상과 물질) 설명의 기본 골격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서구 학문 전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 핵심·대표 이론으로 더욱 굳어졌습니다.


2) 근대 과학 혁명 이후

근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리적·기계적(작용인 위주) 설명이 부상했으나, 오히려 학계에서는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가 현대 사상과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를 비교·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철학사나 학파 형성이론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 질료형상론’이라는 표상이 강하게 남아, 그는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체계적 대답을 준 고대 철학자로 계속 소개되었습니다.


3) 형상·질료가 ‘메타철학’적 구분의 시발점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보편과 개별, 초월과 내재의 문제, 형이상학적 실재와 경험 세계의 관계 등을 정식으로 구체화한 결과물이 바로 ‘형상–질료’ 프레임입니다.

이후 서양 철학사에서 ‘형상과 질료’의 구도가 보편–개별, 본질–현상, 이성–감각 같은 커다란 틀로 재해석되곤 했습니다.


4. 결론: 왜 형상과 질료가 대표하는가?

1) 실체론의 핵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궁극적 목적 중 하나는 “실체(우시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고, 이를 위해 사물 내부 구조(형상과 질료)를 해명하는 게 본질적이었습니다.


2) 내재적 형상론이라는 플라톤과의 차별성:
플라톤은 ‘이데아’를 사물과 분리된 초월적 세계에 두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사물 속에 내재시키며, 현실 세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체계적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자 그의 독자적 업적이었고, 자연스럽게 형상–질료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상징하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3) 작용인·목적인의 상대적 위상:
작용인과 목적인 역시 중요하지만, 그 둘은 어디까지나 사물이 생겨나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충 설명하는 인(因)이어서, “사물 자체의 존재론적 구조”를 가장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은 바로 ‘형상과 질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 전체가 그의 철학을 풍부하게 보여주지만, 형상과 질료라는 ‘내재적 구조’를 통해 구체적 사물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해명한 점이야말로, 플라톤과 구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결정적이고 독창적인 공헌입니다. 이 때문에 형상–질료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대표 아이콘처럼 널리 알려지고 강조되는 것입니다.



나의 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질료가 형상이 되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목적적인데, 따로 목적인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ChatGPT의 말:

논리적 설명 마침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질료(Matter)**는 스스로 **형상(Form)**을 받아들여 “어떤 것(실체)”이 되고자 하는 **잠재성(potentiality)**을 지닌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때 겉보기에는 “질료가 이미 형상을 향해 움직이려는 ‘목적지향성’을 갖고 있다면, 굳이 따로 ‘목적인(final cause)’을 상정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형상(Form)**과 **목적인(Final Cause)**은 각각 다른 차원의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에, “형상이 되고자 하는 질료”라는 잠재적 목표만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목적인이 별도로 강조됩니다.


1. 형상과 목적인의 구분: “무엇이 되는가?” vs. “왜 그렇게 되는가?”

1) 형상(Form) = ‘무엇(What)’

사물 또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essence, 본질)’를 결정하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도토리가 잠재적으로 ‘참나무’가 될 수 있다면, 그 ‘참나무’라는 형상이 곧 도토리가 지향하는 “무엇”입니다(사물이 어떤 종(species)으로 완성되는가).


2) 목적인(Final Cause) = ‘왜(Why, For what)’

사물이 그 형상으로 실현되고자 하는 **궁극적 이유(의미, 목적)**를 설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그 형상을 향해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을 단지 “그냥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로 끝내지 않고, “사물이 그렇게 존재하거나 변화하는 목적이 무엇인지”까지 설명해야 완전한 인과 설명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질료가 형상을 향해 가는 잠재성”은 분명 ‘무엇이 될 것인가(형상)’ 차원의 설명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왜 그것이 그 특정한 형상을 향해 작용하는가?”(‘목적인’)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고 보았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별도의 ‘최종 원인(목적인)’을 설정합니다.


2. 질료의 ‘목적지향성’과 목적인의 역할

1) 질료는 ‘수동적 잠재성’, 목적인은 ‘왜 그런 방향인가’에 대한 설명

질료(Matter)는 스스로 “이러이러한 형상을 지닌다!”고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갖기보다는, “그 형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태”로서 수동적입니다.

도토리에 내재된 생장 원리(식물의 형상)는 “참나무가 된다”는 방향성을 보여주지만, 이것이 곧 “왜 참나무가 되는가?” 혹은 “참나무가 됨으로써 실현되는 목적(기능)은 무엇인가?”를 완전히 말해주지는 못합니다.


2) 목적론적 세계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물도 저마다 **자기 완성(entelecheia)**을 지향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곧 ‘목적인(final cause)’입니다.

예컨대, 참나무가 되어 스스로 종족을 유지·번식하며 자연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완성된 참나무의 기능’)이 목적인에 해당합니다.

질료가 ‘형상’을 향해 가는 현상(변화)이 실제로는 “참나무로서 기능하고 완성되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할 때, ‘목적인’이라는 개념이 필요해집니다.


3) 형상 vs. 목적인: 개념적 범위의 차이

형상은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본질을 지니게 되었는가?”라는 존재론적 차원의 설명.

목적인은 “그 모습(형상)으로 나타나는 행위·작용·완성의 궁극적인 이유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목적론적·기능적 설명.

따라서 질료가 형상에 잠재적으로 지향성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지향이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機能)을 수행하기 위해 설정된 것인가?”**를 해명하기 위해 목적인이 별도로 필요합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과 ‘충분한 설명’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자체가 “사물을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서로 다른 차원의 원인들을 모두 따져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① 질료인(Material Cause):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② 형상인(Formal Cause): 무엇이 되게 하는가(본질은 무엇인가)?

③ 작용인(Efficient Cause): 누가(무엇이) 그것을 발생·변화시키는가?

④ 목적인(Final Cause): 무엇을 위해, 왜 그렇게 되는가?


‘질료가 형상을 향해 가고 있다’는 설명은 크게 보면 질료인과 형상인의 결합 차원에서 이뤄지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요구하는 “사물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는 **“왜 그 형상을 향해 변화하는가?”**에 대한 답, 곧 목적인 개념이 필수입니다.


4. 결론

질료가 형상을 향해 지닌 “목적지향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유 안에서 **‘형상이 되고자 하는 잠재성’**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왜 그 형상이 곧 최종 목표인지, 그 형상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목적인)이 충분치 않습니다.

목적인은 “사물이 완성된 형상 상태에서 수행하는 기능·목적(텔로스)”을 해명하고, 사물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그렇게 형상화되는가를 알려주므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의 핵심인 4원인론에서 빠질 수 없는 설명 축이 됩니다.

정리하면, 형상은 “사물이 무엇이 되는가?”, 목적인은 “그렇게 됨으로써 어떤 최종 목적·기능이 실현되는가?”라는 상이한 차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므로, 둘 다를 구분하여 설명해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충분한 원인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말:

목적인이 별도의 목적이 존재한다면 모르되, 형상이 되고자하는 것이 질료의 존재 이유인데, 목적인을 왜 따로 떼어내서 설명하는가? 또한 질료가 모든 존재에서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질료가 각각의 존재에서 다른 것이면, 질료에 이미 형상이 있고, 질료의 존재 자체가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에서 질료(Matter), 형상(Form), **목적인(Final Cause)**은 각각 ‘사물의 존재를 설명하는 서로 다른 관점’입니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특정 개념이 다른 개념을 전부 포괄하거나 대체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에서 제기하신 “질료가 이미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목적이라면, 굳이 ‘목적인’을 따로 떼어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질료와 형상의 관계: “형상이 되고자 하는 질료”란 무엇인가?

1.1. 질료는 “가능태(potentiality)”이며, 형상은 “실제태(actuality)”

질료는 자기 안에 다양한 가능성을 수동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

형상은 질료가 실현하게 되는 **구체적 모습(본질)**입니다.

예컨대, 대장간의 “쇳덩이(질료)”는 ‘칼, 낫, 도끼, 톱’ 등 여러 형상 중 하나를 받아들여 특정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료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무정형)” 가능성이 있고, 형상은 그것을 “어떤 것으로 규정(정형)”하는 원리입니다.

질료가 “형상이 되고자 한다”라고 표현할 때, 이 말은 “질료가 그 자체로 형상을 향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기보다는, 질료는 ‘형상을 담아낼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2. 목적인(Final Cause)을 따로 설명하는 이유

2.1. “무엇이 되는가?”와 “왜 그렇게 되는가?”는 다른 질문

형상은 “결과적으로 무엇이 되는가?”(본질, 종(種)의 특징)를 말해주고,

목적인은 “왜 그런 모습(형상)을 향해 움직이는가?”, 혹은 “그 형상으로 실현됨으로써 어떤 최종 목적이 달성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씨앗(질료)에 ‘참나무라는 형상’이 잠재되어 있다면, 그 씨앗은 참나무가 되는 방향으로 발아·성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씨앗이 왜 참나무를 지향하는가?”, “참나무가 되어 어떤 기능·목적을 수행하게 되는가?”까지 설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설명을 위해 4원인(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을 모두 언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질료가 형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말은 주로 형상인(Form)을 받는 가능태를 지칭하는 것이고, “그 형상을 통해 달성되는 궁극적 목표(완성 상태, 기능 등)”는 목적인으로 구분해서 다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2.2. 목적론적(worldview) 특징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물은 단순히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완성(entelecheia)’**을 향해 간다는 목적론적 성격이 있습니다.

예컨대 동물이라면 자기 생존·번식, 식물이면 종자로서의 발아와 자라남 같은 방향성이 최종적으로 달성되어야 할 목적이죠.

이는 단순히 “질료가 형상을 받아들이는” 물질적·형상적 구조 설명을 넘어, **‘왜 그렇게 완성 형태로 나아가는가?’**라는 목적 차원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3. 질료가 “모든 존재에서 동일한가, 다른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보편 질료’**라는 개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각 사물 혹은 각 종(species)에 따라 서로 다른 질료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즉,

1) 1차 질료(prime matter)

이론적으로 “어떠한 형상도 갖지 않은 완전한 잠재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1차 질료”는 실제 세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어렵고, 어디까지나 논리적·추상적 개념으로만 상정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재료’는 이미 어떤 형상을 부분적으로라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쇳덩이, 나무토막, 물, 흙 등).


2) 2차 질료(secondary matter)

실제로는 “칼(형상)이 될 수 있는 쇳덩이”, “책상(형상)이 될 수 있는 나무토막”처럼, 어느 정도 규정된 ‘물질+형상’ 상태가 다시 다른 형상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각 존재마다 특정 질료가 있고, 그 질료는 이미 이전 단계의 형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질료가 “각 존재에 대해 전혀 다른 것”은 아니지만, 현실 차원에서 보면 ‘나무 질료’, ‘쇠 질료’, ‘살과 뼈 질료’ 등등 구체적인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완전히 순수한 1차 질료(무정형)는 추상 개념에 가깝고, 구체적인 개별 사물에서는 “2차 질료”로서 이미 어떤 형상을 담고 있습니다.


4. “질료에 이미 형상이 있고, 질료의 존재 자체가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목적이 있는가?”에 대한 답변

1) ‘질료에 이미 형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 사물은 (이미 어떤 형상을 입은) 질료입니다. 예컨대 쇳덩이도 분자 구조나 고체라는 성질 등 ‘형상’이 부분적으로 작용한 상태이며, 또 다른 형상을 새롭게 부여받을 수 있는 가능태 역시 지닙니다.


2)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목적’

질료가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사물 내부의 형상(본성)’과 ‘외부 작용인(효율인)’이 함께 작용하여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4원인론).

이 과정에서 “왜 그 특정한 형상을 향해 변화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목적인의 영역입니다(예: 참나무는 씨앗 상태에서 자라나 참나무가 되면 종족 보전과 같은 자연적 목적을 실현).

결국 “질료가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목적성”은 사실상 사물의 형상과 목적인(그리고 효율인)이 함께 작동한 결과입니다.


3) 목적인과의 구분

질료가 형상을 받아들이려는 ‘가능태’와, “그 형상으로 완성됨으로써 이루는 목적(기능, 완성 상태)”은 설명의 초점이 다릅니다.

질료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형상+목적인이 질료의 잠재성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내어, 결국 사물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게 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 그 자체에 이미 목적이 내재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질료는 잠재성과 가능태를 가지고, 목적은 형상을 통해 실현된다”라고 구분합니다.


5. 맺음말

1) 질료가 형상을 향해 움직인다는 사실과 목적인이 별도로 강조되는 이유:

질료-형상 관계는 “무엇이 되고,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존재론적 초점이고,

목적인은 “왜 그렇게 변화·완성되는가?”(궁극적 목적, 기능, 텔로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2) 질료가 모든 존재에서 동일한가?

이론적으론 1차 질료가 완전히 동일하게 설정되지만, 실제로는 그런 순수 질료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사물들은 이미 어떤 수준의 형상을 갖춘 2차 질료 상태에 있으며, 각 존재마다 그 구체적 질료가 다릅니다(나무, 금속, 동물의 세포 등).


3) 결론

질료가 형상을 향해 ‘목적적으로’ 나아가는 듯 보이는 것은, 사실상 질료-형상-목적인-작용인이라는 4원인 체계 전반이 작동한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질료 스스로 목적을 ‘따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질료에 잠재된 가능성을 형상과 목적인(그리고 외부/내부 작용인)이 함께 현실화시킨다고 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질료 그 자체가 목적을 지닌다”는 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지는 않으며,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잠재성과 목적인은 서로 다른 질문(“무엇이 되는가?” vs. “왜 그렇게 되는가?”)을 다루기 때문에, 그 둘을 분리해 설명하는 것이 그의 철학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나의 말:

목적인이 의미가 있으려면, 질료가 형상이 될 수 있는 여러 형상이 있고, 선택지가 많이 있고, 그 중에 특정 형상을 향해 나아갈 때, 그것에는 목적인이라는 설명에 필요할 듯하다. 이때, 목적인이 과연 무엇인가? 자유의지인가? 신의 섭리인가? 동물적 본성인가? 합리적 이성인가? 하는 문제들이 개재해 있다고 본다. 어떠한가?

ChatGPT의 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Final Cause, 목적, 텔로스) 개념은 “사물이 왜 그 형상으로 실현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 요소이지만, 실제로는 해당 사물(혹은 현상)의 종류나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많습니다.

- 예컨대, 자연물(식물·동물·무생물)에서는 **내재된 본성(nature)**이 곧 그 사물의 목적을 정하며,

- 인공물(도구·작품)에서는 제작자의 의도가 그 목적이 됩니다.

- 인간의 경우라면, 윤리학 차원에서 **‘행복(eudaimonia)’**이나 **덕(virtue)**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질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질료가 형상이 될 수 있는 선택지 가운데 왜 특정 형상을 향해 나아가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잠재성(potentiality)’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물이 어떤 목적(최종 원인)을 지향한다는 목적인 개념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목적인이 과연 무엇인지, 누가(무엇이) 설정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자체가 갖는 여러 해석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입장: 자연의 목적론

1.1. 자연물의 경우: 내재적 본성

자연물(식물·동물 등)에서는 해당 종(species)이 이미 내부에 **본성(physis)**과 **형상(forma)**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어, 그것이 스스로 목적을 향해 전개된다고 보았습니다.

예: 도토리는 ‘참나무’가 될 수 있는 형상을 잠재적으로 지니며, 자연적 조건이 맞춰지면 그 완성 상태(참나무)로 발달합니다.

여기서 목적(목적인)은 “참나무라는 완성·기능”이라 할 수 있고, 그 내재적 본성이 자연적으로 방향을 결정합니다.

어떤 초월적 신(神)의 섭리나 자유의지라는 것보다는, 각 사물 고유의 본성이 목적을 제공한다는 식입니다.


1.2. 인공물의 경우: 제작자의 의도

인공물(예: 책상, 칼, 항아리)은 그것을 만든 사람(작업자, 작가)의 의도가 곧 목적이 됩니다.

예: 칼을 만들 때, “잘 베는 도구”라는 용도가 최종 목적이 됩니다(“칼답게 하는 형상”을 부여).

이 경우 질료(쇳덩이)는 여러 가지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제작자의 선택에 따라 특정 형상(칼)으로 완성됩니다.


1.3. 인간의 경우: 합리적 이성, 윤리적 목적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인간만이 이성적 능력을 지니고 있고, 이 이성에 따라 최고선(善) 혹은 **행복(eudaimonia)**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라 봅니다.

여기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선택’이 작용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성적 삶을 통해 행복을 완성한다’**는 보편적 목적을 모든 인간이 공유한다는 전제입니다.

즉, 생물학적 본성을 넘어선 합리적·윤리적 목적론이 추가되는 것이 인간에게만의 특별한 특징입니다.

2. “목적인”을 둘러싼 여러 해석 가능성

질문에서 말씀하신 “목적인이 곧 자유의지인가, 신의 섭리인가, 동물적 본성인가, 합리적 이성인가?” 같은 문제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후대에 어떻게 해석·수용되었는지에 따라 다양한 입장이 나타납니다.


1) 고대·헬레니즘·중세 해석

아리스토텔레스 본래의 목적론은 우주가 ‘제1원동자(부동의 동자, Prime Mover)’에 의해 영원한 운동을 유지하지만, 그 원동자가 구체적으로 각 사물의 목적을 설정한다기보다는, 사물 고유의 본성이 자기 목적을 향해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특히 토마스 아퀴나스 등)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기독교 신학과 결합하여, “자연의 목적은 신(神)의 창조 질서·섭리에 의해 부여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 결과, 자연 목적론이 일종의 신적 섭리 개념과 연계되었습니다.


2) 근대 이후 해석

근대 자연과학은 기계론적·물리적 인과관계를 강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배제하거나 크게 축소했습니다.

하지만 생물학 영역에서는 ‘발생학적 목적론’, 진화론 초기 논의 등에서 “생물은 왜 특정 형질을 갖도록 발달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며, 어떠한 형태로든 목적론적(혹은 기능론적) 설명이 여전히 중요하게 논의됩니다.


3) 자유의지 문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은 ‘습관, 실천적 지혜(phronesis), 덕(aretē)’ 등을 강조하며,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도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자유의지’와는 온전히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합리적 숙고’를 통해 목적(행복, 탁월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정도로 이해됩니다.


결국 목적인은 “각 존재가 지향하는 최종적 완성 상태나 기능”을 일컫지만, 그 정체가 “신의 섭리인지, 내재된 본성인지,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이성인지”는 **존재 유형(자연물, 인공물, 인간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사상사적으로도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3. 선택지가 있을 때, 왜 특정 형상을 택하는가?

질료가 여러 가능한 형상을 담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여 최종적으로 특정 형상에 도달하는가?”의 문제에서 목적인이 작용합니다.


1) 인공물:

제작자의 의도가 명확한 ‘최종인’이 됩니다(“이 칼은 베는 도구가 될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이 쇳덩이를 갈고닦는다”).


2) 자연물: 그 종(種)의 고유 본성이 지향하는 형상이 있고(‘참나무 종’은 참나무라는 형상으로 완성됨), 그 목적이 자연적·내재적이다. 외부(환경)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참나무로 자라는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참나무가 되기 위한 목적”).


이런 설명은 오늘날 생명과학적으로 보면 “유전자 정보+환경 조건”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고대 철학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내재된 목적론”이라는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4. 결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은 ‘누가 결정하는가?’에 대한 중층적 답변

1) 자연물:

내재된 본성(자연적 형상)이 목적을 정한다.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랄 수 있는 이유는 종이 갖는 본질적 형상과 목적 때문이다.”


2) 인공물:

외부의 제작자(인간)가 설정한 목적을 따른다. “쇳덩이는 기술자의 의도에 따라 칼이 될 수 있고, 낫이 될 수도 있다.”


3) 인간:

생물학적 본성을 넘어, 이성을 통해 윤리적·정치적 목적(행복, 선, 탁월함 등)을 설정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자율적 결정이 들어가는 영역.


이렇듯 목적인이 자유의지, 신의 섭리, 동물적 본성, 이성 등으로 구체화되는지는 그 대상(또는 해석자가 속한 철학·신학 체계)에 따라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주로 “자연적 본성 vs. 인위적 목적” 구도를 강조했으며, 신학적 해석(신의 섭리)이나 근대적 해석(자유의지, 유전자 정보 등)은 후대가 덧붙인 해석의 폭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핵심 정리

-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각 존재가 왜 특정 형상으로 완성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필수적인 설명 축이다(4원인 중 최종 원인).

- **목적인의 ‘정체’**는 자연물의 경우 내재적 본성에, 인공물의 경우 제작자의 의도에, 인간의 경우 윤리적·이성적 숙고에 달렸다.

- 후대(중세 스콜라, 근대 철학, 현대 생물학 등)에서는 “목적인=신의 설계” “목적인=인간의 자유의지” “목적인=종의 본성” 등 다양한 해석이 나타났다.

-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가 여러 형상을 가질 가능성 중 특정 것을 향해 실제로 나아가는 이유”를 물으며, ‘목적론적 설명’을 별도로 구분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상 세계를 **“왜”**라는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철학의 특색이다.



나의 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의 설명에 덧붙여 목적인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학자나 이론은 없는가? 의문을 제기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이론은 없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기만 한 것인가?

ChatGPT의 말: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원인론(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가운데 목적인(Final Cause)—즉 자연물 혹은 사물이 ‘왜’ 특정 방향으로 완성되는가를 설명하는 목적론(teleology)—이 과연 꼭 필요한 설명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고대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에서 크고 작은 의문 제기가 있어 왔습니다. 특히 “형상(Form)과 질료(Matter)의 결합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목적인은 비(非)과학적이거나 불필요한 신설(神設)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나 문제제기는 다양한 철학·사상 전통에서 발견됩니다.

아래에서는 대표적으로 (1) 고대 자연철학의 반(反)목적론 전통, (2) 근대 기계론적 세계관과 (3) 그 밖의 현대적 시각을 중심으로, “목적인” 개념에 대한 회의나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 시기: 아리스토텔레스 동시대 및 직후의 반목적론 전통

1.1. 원자론(Atomism)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나 에피쿠로스(Epicurus) 같은 원자론자들은 우주 만물이 원자의 우연적 충돌과 결합으로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본질적으로 기계적 인과(원자의 충돌·이동)로 설명되며, 따로 어떤 ‘최종 목적(목적인)’을 설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신이든 자연 자체든, 사물이 ‘왜 그 형상을 향해 가는가?’라는 질문에 특별한 목적이나 계획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고 봤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분명 대조적입니다.

물론 “형상-질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식의 직접적 표현은 찾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목적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식 목적론에 대한 가장 오래된 대립각이 되었습니다.


1.2. 스토아 학파(Storics)의 변주

스토아 철학은 어느 정도 목적론(신적 섭리, 로고스)에 우호적이었으나, 그 목적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적 목적론”보다는 **우주적 로고스(이성)**와 신적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직접적으로 “형상-질료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사물 내부에 목적이 내재)은 스토아식 신적 섭리와 거리가 있었습니다.


결국 고대에도, 목적론을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하더라도 전혀 다른 방식(신적 섭리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흐름이 있었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인’ 개념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 중세·근대: 스콜라철학의 수용과 근대 과학의 비판

2.1. 중세 스콜라철학의 (상대적) 비판·토론

중세 유럽에서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체로 ‘공인된 철학자’(Philosophus)로 추앙받았고, 목적인(최종인)은 신학적·섭리적 목적과 쉽게 결합되었습니다(특히 토마스 아퀴나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을 비롯한 노미날리스트(nominalist) 계열 철학자들은 보편적 형상, 목적 등 초월적·추상적 존재를 ‘개념상의 편의일 뿐’이라며 상당히 축소해 버리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궁극적으로 “목적론”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이 서서히 해체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2.2. 근대 기계론적 세계관: 갈릴레오, 데카르트, 베이컨, 홉스 등

과학혁명(17세기 전후) 시기에 갈릴레오, 베이컨, 데카르트 등은 자연 현상을 기계적 인과(mechanical causation), 즉 ‘물체의 운동, 충돌, 힘과 저항 등’으로 설명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베이컨(Francis Bacon)은 새로운 아틀란티스나 학문의 진보에서 “목적론적 설명은 자연과학 연구에서 ‘마르지 않는 처녀(sterile virgin)’처럼 생산성이 떨어진다”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역시 동물·신체 작동을 기계장치로 비유하며, 생명현상이나 자연변화를 기계적 원리로 충분히 설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런 입장은 간단히 말해 “자연 사물의 변화에 별도의 목적(최종인)을 상정하는 것은 과학적 법칙(물리적·수학적 인과)을 세우는 데 불필요하다”라는 주장입니다.

이 시기부터 목적론은 과학적 탐구에서 배제되거나 적어도 매우 축소되어 갔습니다. (→ 유물론, 기계론의 성장)


따라서 17세기 이후 근대과학의 형성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굳이 필요한가?” 혹은 “왜 목적론이 자연 설명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더욱 직설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3. 현대: 진화론·분석철학의 시각

3.1. 다윈 진화론(19세기)과 “의사(擬似)목적론”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자연선택 이론은, 생물의 형질과 존재양상이 기계적 변이·적응·선택의 축적 결과로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본성 그 자체가 ‘왜 이 방향으로 진화하는가?’에 별도의 목적론을 도입할 필요가 줄어듭니다.

다윈 이후 생물학에서는 ‘텔레오니(teleonomy)’라는 표현(=목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계적·진화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을 쓰기도 하고, 전통적 의미의 ‘최종 목적’(텔로스) 대신 기능적·적응적 설명을 많이 활용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내재적 목적(causa finalis)”을 적극 부정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근대·현대 과학적 어법으로 해석하면, 굳이 목적론을 전제하지 않아도 생물의 형상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는 흐름이라 볼 수 있습니다.


3.2. 분석철학·과학철학에서의 ‘목적론’ 검토

현대 분석철학이나 과학철학자들(예: 칼 포퍼, 어니스트 네이글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을 *“설명 방식의 한 형태”*로 간주하며,

“심리학·생물학·행동 이론 등에서 ‘목적론적 서술’(기능 혹은 목적을 이야기하는)이 편의적으로 쓰일 순 있지만, 실제로는 물리-화학적 인과가 기반을 이룬다”라고 주장합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목적인을 본질적·실재적 ‘원인’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수준이 다른 기술(記述)**로 다루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 “이 동물이 이 형질을 ‘목적’으로 진화했다고 말하기보다, 자연 선택의 결과로 유리한 형질이 고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식.)


이처럼 현대 과학과 철학계에는 “목적론은 과학적 설명에 꼭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상당히 뿌리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형상-질료 중심의 ‘형이상학적 설명’으로도 불충분하다는 지적, 혹은 목적론 자체의 유효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4. 결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결코 ‘무비판적’으로만 수용되지 않았다

- 고대: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 등 원자론자들은 “우연적·기계적 인과”를 주장하며 목적론을 부정했다.

- 중세: 전반적으론 스콜라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신학적으로 통합했지만, 노미날리스트들은 목적론을 최소화하거나 형이상학적 실재성에 회의적 태도를 보였다.

- 근대: 갈릴레오, 데카르트, 베이컨, 홉스 등 기계론·합리론자들은 자연과학에서 ‘최종인’을 거의 배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 현대: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분석철학계에서도 목적론을 유용한 은유나 설명 양식의 하나로 제한하려는 흐름이 있지,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듯 “형상-질료”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혹은 “목적인 자체가 과학·철학적으로 설명력을 갖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오랜 논쟁 중 하나입니다. 결코 무비판적으로만 수용되어 온 것은 아니며, 시대마다 그 필요성과 한계가 재평가되어 왔습니다.


정리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목적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없이 논쟁·비판받아 왔으며, 특히 근대 과학혁명 이후로는 기계론적·물리적 설명을 선호하는 경향에 따라 그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학·생물학·형이상학·행위 이론 등 일부 영역에서 목적론적 접근(“왜, 무엇을 위해?”)이 여전히 유용하다는 주장도 계속 존재하여, 완전히 사장되지 않고 철학사와 과학사에서 다양하게 해석·적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