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선생
1. 네코 2세의 페니키아 원정 (기원전 610–595 BC 권역)
이집트 파라오 네코 2세가 페니키아 함대를 고용하여 홍해에서 출발, 아프리카를 돌아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3년 만에 귀환했다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입니다. 특히 "태양이 오른쪽에 있었다"는 묘사는 남반구에서의 태양 위치와 일치하여 이 주장의 신빙성을 높이는 요소로 자주 언급됩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일주(circumnavigation) 기록이 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보다 훨씬 앞선 업적이 됩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고, 고고학적이나 다른 문헌학적 근거가 부족하여 현대 학계에서는 대부분 회의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태양이 오른쪽에 있었다'는 증언은 흥미롭지만, 이것만으로 대규모 항해의 성공을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당시의 항해 기술과 보급 능력으로는 3년 간의 대륙 일주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2. 한노(Hanno)의 서부 아프리카 연안 탐사 (기원전 5세기경)
카르타고의 항해사 한노가 약 기원전 500년경 서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오늘날 세네갈·감비아 연안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입니다. 탐사 목적은 식민지 개척과 무역로 확보에 있었으며, 완전한 대륙 일주는 아니었습니다.
한노의 항해는 《한노의 항해기》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어 신뢰도가 높은 편입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대한 고대 세계의 지리적 지식을 크게 확장한 중요한 탐험으로 평가됩니다. 그가 만난 원시 부족과 "털이 많은 여자들(고릴라)"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남단까지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아프리카 '둘레 항해'는 아니었습니다. 탐험의 한계는 당시의 선박 기술, 항해술, 그리고 거친 해류와 몬순 바람의 영향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3. 히밀코(Himilco)의 북대서양 연안 탐사 (기원전 5세기 중반)
내용: 동시대 카르타고 탐험가 히밀코가 이베리아 반도 북쪽 혹은 심지어 영국 제도 연안까지 항해했다고 전해지는 내용입니다. 이는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려 한 시도는 아니었습니다.
히밀코의 탐험은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넘어 북대서양 무역로, 특히 주석(tin) 무역로를 개척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주석은 청동기 시대에 매우 중요한 금속이었으며, 브리튼 섬은 주석의 주요 공급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노와 마찬가지로 대륙 일주와는 무관한 탐험이었으며, 주로 북대서양 연안의 무역과 자원 확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의 기록은 주로 플리니우스와 같은 후대 로마 작가들의 인용을 통해 전해지므로, 그 상세함과 정확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노의 탐험 (기원전 5세기 또는 6세기)
1. 목적: 새로운 무역로 개척 및 식민지 건설.
2. 출발: 60척의 배와 많은 인원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출발했습니다.
3. 경로 (추정): 지브롤터 해협(당시 헤라클레스 기둥)을 지나 대서양으로 향했습니다. 모로코 해안을 따라 여러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재건했습니다. 남쪽으로 계속 항해하며 오늘날의 서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했습니다.
4. 도달 지점 (논란의 여지 있음):
(세네갈 강) 많은 학자들이 최소한 이 정도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감비아,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더 남쪽까지 항해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카메룬 산 또는 카쿨리마 산) 한노가 기록한 화산에 대한 묘사를 근거로 더 남쪽까지 갔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봉까지 도달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5. 기록: 한노의 항해 기록은 카르타고의 신전 벽에 새겨졌다고 전해지며, 후대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한노의 항해기 (Periplus of Hanno)》**를 통해 일부 내용이 전해집니다. 이 기록에는 그가 만난 토착 부족, 야생 동물 (고릴라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 화산 등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어 번역본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존재했으며, 후대의 그리스 및 로마 작가들에 의해 인용되었습니다.
6. 한노의 항해 연대: 정확한 연대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기원전 5세기 (주로 기원전 480년경) 또는 기원전 6세기 (기원전 520년경)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고대 작가들의 언급과 카르타고의 역사적 맥락을 분석하여 추정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부족합니다.
7. 주요 인용 작가 및 문헌 (그리스어 번역본 언급)
플라톤 (Plato): 《크리티아스 (Critias)》에서 헤라클레스 기둥 너머의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이는 카르타고의 탐험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한노를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그의 저서에서 카르타고의 해외 식민 활동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한노를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스트라본 (Strabo): 《지리학 (Geographica)》에서 한노의 항해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기원전 1세기 ~ 서기 1세기 초)
플리니우스 (Pliny the Elder): 《박물지 (Naturalis Historia)》에서 한노의 항해와 그의 기록에 대해 언급합니다. (서기 1세기)
아리아노스 (Arrian):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기 (Anabasis Alexandri)》에서 다른 탐험가들과 함께 한노를 언급합니다. (서기 2세기)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의 기록을 기반으로 전해지는 내용에 따르면, 에우독소스(Eudoxus of Cyzicus)는 두 차례 인도 항해를 마친 뒤, 아프리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려는 항해를 두 번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에우독소스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Ptolemy VIII Euergetes II)의 후원으로 홍해를 거쳐 인도로 떠나 향료, 보석 등의 귀중품을 가지고 귀환했습니다. 두 차례 모두 성공적으로 인도까지 갔으나, 왕이 화물을 몰수하거나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해상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두 차례의 중요한 항해 시도를 했습니다.
1차 항해 시도 (기원전 118년)
1. 배경: 인도에서 귀환하던 배가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난파되었고, 그 잔해가 해안가로 떠밀려 왔습니다. 에우독소스는 이 잔해를 발견하고, 이 배가 서쪽에서 왔을 가능성을 추론했습니다. 특히 그 배의 돛대에는 가데스(카디스, 현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항구도시,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개척)에서 온 배임을 나타내는 조각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에우독소스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갈 수 있는 해상 항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
2. 준비: 에우독소스는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고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배를 건조하고 항해를 준비합니다.
3. 경로: 그는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 결과: 이 1차 항해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항해의 정확한 경로나 실패 원인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거친 해류, 예측 불가능한 날씨, 보급 문제, 또는 현지 부족과의 충돌 등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에우독소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2차 항해 시도 (기원전 116년)
1. 배경: 1차 항해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에우독소스는 아프리카 주항 항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철저한 준비를 거쳐 다시 한번 항해를 시도합니다.
2. 준비: 이번에는 더 많은 자금과 배를 확보하고, 항해 경험이 풍부한 선원들을 모집하는 등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항해를 준비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족까지 데리고 항해에 나섰다고 합니다.
3. 경로: 2차 항해 역시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차 항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남쪽까지 도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4. 결과: 불행히도 2차 항해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번 항해의 구체적인 경로나 최후는 더욱 불분명합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아프리카 남단 근처까지 도달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거나, 항해 도중 조난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5. 주요 문헌 출처:
스트라본 (Strabo)의 《지리학 (Geographica)》: 스트라본은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 초까지 활동한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입니다. 그의 저서 《지리학》에는 에우독소스의 항해 시도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에우독소스가 가데스에서 온 배의 잔해를 발견하고 아프리카 주항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Strabo, Geographica, Book II, Chapter 3, Sections 4-5)
대(大) 플리니우스 (Pliny the Elder)의 《박물지 (Naturalis Historia)》: 서기 1세기 로마의 박물학자인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도 에우독소스의 항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는 에우독소스의 탐험과 그가 가져온 정보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Pliny the Elder, Naturalis Historia, Book II, Chapter 67; Book VI, Chapter 36)
아테나이오스 (Athenaeus)의 《식탁의 현인들 (Deipnosophistae)》: 서기 2-3세기 그리스의 작가인 아테나이오스의 《식탁의 현인들》에도 에우독소스와 관련된 일화가 짧게 언급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지리상 개척자들]
헤로도토스 (Herodotus, 기원전 5세기)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저서 《역사》에는 이집트, 페르시아, 스키타이 등 다양한 지역의 지리, 풍습, 역사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한 탐험가라기보다는 탐험가들의 보고를 종합하고 기록한 역사가에 가깝습니다.
피테아스 (Pytheas, 기원전 4세기)
마살리아(현재의 마르세유) 출신의 항해자이자 지리학자입니다. 그는 북서 유럽을 탐험하며 브리튼 섬 (Britannia)과 전설적인 섬 툴레 (Thule)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북유럽에 대한 초기 그리스인들의 지식을 넓히는 데 기여했지만,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 기원전 4세기)
비록 정복 전쟁의 일환이었지만, 그의 동방 원정은 그리스인들에게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지리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그의 원정에 참여한 학자들은 새로운 지역의 지리, 동식물, 문화를 기록했습니다.
스트라본 (Strabo, 기원전 1세기 ~ 서기 1세기)
그의 방대한 저서 《지리학》은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의 지리, 역사,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 탐험가들과 학자들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정리하여 후대에 귀중한 지리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히팔루스(Hippalus, 기원전 1세기 또는 서기 1세기)
그리스인 항해사이자 상인으로 그는 특히 인도양의 몬순(계절풍)을 이용하여 홍해에서 인도 남부(타밀라캄)까지 직접 항해하는 바닷길을 발견(또는 활용법을 대중에 알린 것)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다음과 같습니다.
(몬순 바람의 활용) 히팔루스 이전에는 인도양 항해가 주로 해안선을 따라 이루어져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도양의 남서 계절풍(여름 몬순)이 특정 계절에 불어온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 바람을 이용하여 홍해에서 인도 서해안까지 대양을 가로질러 직항하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반대로 겨울에는 북동 계절풍을 이용하여 인도를 떠나 홍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교역의 혁명) 이 직항로의 발견은 로마 제국과 인도 간의 무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항해 시간이 크게 단축되고, 해적의 위협도 줄어들어 교역의 효율성과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실제로 로마 시대에는 120척 이상의 선박이 인도양 무역에 투입될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지리적 지식의 확장) 그는 인도의 서해안이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서양에) 인식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이는 당시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인도의 해안선이 동서로 뻗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대비됩니다.
히팔루스의 이름은 **《에리트라해 항해기》**와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저서 등에서 언급됩니다. 플리니우스는 그가 몬순 바람 자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몬순 바람은 이미 인도양 지역의 아랍 항해사들이나 인도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히팔루스는 이 바람을 서양인들에게 실질적인 항해에 적용하는 방법을 가르쳤거나 대중에 널리 알린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바람을 '히팔루스 바람(Hippalian winds)'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발견은 고대 세계의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아시아와 유럽 간의 상업적 교류를 크게 활성화시켰습니다.
에라트라해 항해기(Periplus of the Erythraen Sea, 서기 1세기 중반, 약 40-70년경)
이 문헌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집트에 거주했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익명의 상인이거나 항해사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페리플루스(Periplus)'는 고대 그리스어로 '주항(周航)' 또는 '해안 일주 항해기록'을 의미하는 항해 일지 또는 안내서입니다. '에리트라해(Erythraean Sea)'는 당시에는 오늘날의 홍해뿐만 아니라 아라비아해, 페르시아만, 그리고 더 넓게는 인도양 서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해역을 지칭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역 안내서) 에리트라해 항해기의 핵심 목적은 당시 로마 제국(주로 이집트)과 아프리카 동해안, 아라비아, 인도 간의 해상 무역에 대한 실질적인 안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항구와 무역품) 항해 경로는 이집트의 로마 항구(예: 베레니케)에서 시작하여 홍해를 따라 남하하며, 아프리카의 뿔(오늘날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해안), 아라비아 반도 해안, 그리고 인더스 강 유역부터 인도 남부까지의 주요 항구들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각 항구에서 거래되는 **수출품(향신료, 유향, 몰약, 상아, 진주, 직물 등)과 수입품(와인, 유리, 금속 제품, 곡물, 로마 주화 등)**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항해 정보) 각 항구 간의 거리, 항해에 필요한 시간, 계절풍(몬순)의 활용법, 위험한 해역, 피해야 할 암초 등에 대한 실용적인 항해 정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리 및 문화) 각 지역의 지형, 주민들의 풍습, 정치적 상황, 주요 도시 등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동해안의 '아자니아(Azania)' 지역에 대한 묘사는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서양 기록 중 하나입니다.
(중국 언급) 인도양 무역의 끝자락에서 간접적으로 '티나(Thina)'라는 내륙의 거대한 도시를 언급하는데, 이는 당시 로마인들이 중국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초기 기록 중 하나입니다. (주로 생사(生絲)의 공급지로 언급됨)
역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 해상 무역의 창) 이 문헌은 고대 로마-인도 교역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동시대 기록입니다. 당시 세계 경제의 중요한 축이었던 인도양 무역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입니다.
(지리적 지식의 보고) 당시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동해안, 아라비아, 인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아프리카 동해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항해술의 발전) 몬순을 이용한 직접 항해법의 발견과 그 활용에 대한 언급은 당시 항해술의 발전을 증명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Ptolemy, 서기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입니다. 그의 저서 《지리학》은 지도 제작법과 당시의 세계 지리 지식을 집대성한 것으로, 후대 유럽의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슬람/페르시아 항해자 및 지리상 개척자]
이들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앞서거나 동시에 활동하며 세계 지리 지식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슬람과 페르시아 제국은 광대한 영토와 진보된 지리학,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미지의 지역을 탐험하고 귀중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특히 이슬람 황금기(8세기~13세기)에 활발한 탐험이 이루어졌습니다.
알-마수디 (Al-Mas'udi, 9세기 말 바그다드 출생 ~ 956년 사망)
"아랍의 헤로도토스"로 불리는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입니다. 페르시아, 인도, 동아프리카, 중국 등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했으며, 그의 저서는 역사와 과학 지리학, 사회 해설 등을 결합한 형태입니다. 특히 동아프리카의 황금 교역과 진주 채집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황금 목초지 (Muruj al-dhahab wa ma'adin al-jawhar)》, 《시간의 역사 (Akhbār al-zamān)》 (대부분 소실), 《경고와 수정의 책 (Kitāb al-tanbīh wa al-ishrāf)》이 있습니다.
알-이드리시 (Al-Idrisi, 약 1100년 출생 ~ 1165/66년 사망)
무슬림 지리학자, 지도 제작자, 여행가입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 로저 2세의 후원을 받아 세계 지도를 제작하고 지리 백과사전인 《세계 지리서 (Nuzhat al-Mushtāq fī Ikhtirāq al-Āfāq)》 또는 《로저의 책 (Kitāb Rujār / Al-Kitāb al-Rujārī)》를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의 지리 정보를 집대성했으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지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게 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했으며,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븐 바투타 (Ibn Battuta, 1304년 출생 ~ 1368/69년 또는 1377년 사망)
모로코 출신의 베르베르족 학자이자 탐험가로, **"이슬람 세계의 마르코 폴로"**로 불립니다. 약 30년간 총 120,000km에 달하는 거리를 여행하며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탐험했습니다. 그의 여행은 육로와 해로를 모두 포함하며, 미지의 지역과 이국적인 사회, 문화, 풍습에 대한 상세하고 생생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의 여행기는 《리흘라 (Riḥla)》 또는 《세계를 관찰하는 자들을 위한 경이로운 도시와 여행에 대한 선물 (Tuhfat al-anzar fi gharaaib al-amsar wa ajaaib al-asfar)》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가 모로코 술탄의 명에 따라 학자에게 구술한 기록입니다.
아흐마드 이븐 마지드 (Ahmad ibn Mājid, 약 1421년 출생 ~ 1500년 사망)
"아라비아의 사자" 또는 **"인도양의 대항해사"**로 불리는 유명한 아랍 항해사입니다. 서구에서는 그가 말린다(현 케냐)에서 바스코 다 가마를 만나 캘리컷(인도)까지의 항해를 도왔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그가 바스코 다 가마를 직접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도양의 해양 지식, 항해술, 몬순 바람, 해류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집대성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저서 《항해의 원칙과 규칙에 관한 책 (Kitāb al-Fawāʾid fī Uṣūl ʿIlm al-Baḥr wa al-Qawāʿid)》는 나침반, 해상 지도, 천문 항법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피리 레이스 (Piri Reis, 1465년경 출생 ~ 1553년 사망)
오스만 제국의 제독이자 지도 제작자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1513년에 제작된 **《피리 레이스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콜럼버스의 항해 정보를 포함하여 당시 알려진 세계의 지리 정보를 담고 있으며, 특히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선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지도가 미지의 대륙에 대한 고대 정보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주요 저서는《바흐리예 (Kitab-ı Bahriye)》(지중해 항해 안내서)입니다.
실용적인 지식과 종교적 동기: 이슬람 항해자들은 무역과 순례라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이슬람의 확산이라는 종교적 동기를 가지고 탐험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학적 접근: 천문학, 수학, 지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항해술을 발전시켰고, 정확한 지도와 해도, 항해 도구를 제작했습니다.
다양한 지역 탐험: 인도양, 홍해, 지중해는 물론, 대서양 연안과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국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탐험했습니다.
방대한 기록: 그들의 여행기는 당시 세계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며, 종종 직접 경험한 미지의 땅과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와 아랍 항해사의 만남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Malindi)**에서 현지 아랍·인도양 항해사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진입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아랍 항해사들은 이미 수 세기 동안 인도양을 무대로 활발한 무역 활동을 펼쳐왔으며, 몬순 바람을 이용한 항해법, 인도양의 해류, 항구 위치, 위험 요소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희망봉 너머 인도양으로 가는 방법'에 대한 지식
증언에 따르면, 말린디의 아랍 항해사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넘어 인도양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시사합니다.
아프리카 남단 항로 인지: 비록 그들이 직접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으로 나아갔다는 증거는 부족하지만, 아프리카 남단의 지리적 특성과 그곳을 지나면 인도양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적 네트워크: 이 지식은 단순히 개인의 탐험이 아니라,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와 항해 정보를 통해 축적된 것이었습니다. 아랍 상인들은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깊숙이 내려가며 현지 부족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의 형태와 끝에 대한 정보가 암암리에 전해졌을 수 있습니다.
실질적 탐험보다는 정보 교환: 아람코 월드(aramcoworld.com)의 언급처럼, 이는 아랍 항해사들이 직접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건너는 대규모 탐험을 감행했다기보다는, 기존의 무역 활동을 통해 얻은 지리적 정보나 소문을 유럽인에게 전달한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확립된 인도양 무역로가 있었으므로, 굳이 대서양을 건너는 미지의 항로를 개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사적 의의
이 아랍 항해사의 간접적인 증언은 유럽 중심의 대항해 시대 서술에 중요한 균형점을 제공합니다. 유럽인들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할 때, 이미 아랍과 페르시아 항해사들은 수백 년 동안 인도양을 지배하며 방대한 해양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도착은 아랍 항해사들의 지식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웠거나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서양과 동양 문명 간의 지식 교류가 어떻게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라흐나마그(Rahnāmag)'는 페르시아어로 된 항해 안내서 또는 해도(海圖)를 의미하는 전통입니다. 12세기경부터 이러한 문서들이 존재했으며, 이는 이슬람 및 페르시아 항해사들의 깊이 있는 해상 지식을 보여줍니다.
이 '라흐나마그 전통'은 특히 인도양 항해에 대한 중요한 정보와 경고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라흐나마그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 문구가 등장합니다:
"인도양은 ‘둘러싸인 바다’(circumambient sea)라서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다"
이 경고는 당시 이슬람 및 페르시아 항해사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아 대서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항로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들에게 인도양은 몬순과 해류, 그리고 미지의 위험으로 인해 한번 진입하면 방향을 틀어 다시 대서양으로 돌아오기가 극히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에우독소스와 같은 고대 탐험가들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려는 시도가 왜 그토록 어려웠고 궁극적으로 실패했는지에 대한 당시 해상 지식의 관점을 제공합니다. '라흐나마그 전통'은 특정 학파나 학술적 용어라기보다는, 이슬람 항해 문화권에서 전승되고 기록된 항해술과 지리 지식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푼트(Punt)' 원정 기록 중 가장 유명하고 상세한 것은 **신왕국 제18왕조의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Hatshepsut, 재위 약 기원전 1479-1458년)**의 원정입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푼트 원정
시기: 하트셉수트 여왕의 재위 9년째 (약 기원전 149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목적:
(신성한 상품 확보) 푼트는 "신의 땅(God's Land)"으로 불리며, 이집트에서는 나지 않는 진귀한 물품, 특히 신전 의식에 필수적인 유향(frankincense)과 몰약(myrrh) 수지를 얻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미르(몰약) 나무는 살아있는 채로 운반되어 이집트 신전 정원에 심겨지기도 했습니다.
(풍요로운 자원) 그 외에도 금, 상아, 흑단(ebony), 야생 동물(개코원숭이, 원숭이, 개 등), 표범 가죽 등 다양한 고급 사치품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왕의 위상 강화) 당시 여성 파라오로서 자신의 통치 정당성과 신성한 권위를 드높이고 국가의 번영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컸습니다.
경로: 원정대는 홍해에 면한 이집트 항구(아마도 오늘날의 쿠세르 또는 사우아킨 근처)에서 출발하여 홍해를 따라 남쪽으로 항해했습니다. 푼트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오늘날의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북부, 소말리아 해안 지역 등으로 추정됩니다.
기록: 하트셉수트의 푼트 원정은 그녀의 장제전인 데이르 엘-바하리(Deir el-Bahari) 신전의 벽화와 비문에 매우 상세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잘 기록된 원정 중 하나입니다.
벽화 묘사: 벽화에는 원정대가 푼트의 해안에 도착하는 모습, 푼트 사람들의 모습(푼트 여왕 아티의 비만 체형이 특징적으로 묘사됨), 푼트의 가옥(말뚝 위에 지어진 집), 미르 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동식물, 이집트인들이 물품을 배에 싣는 과정, 그리고 이집트로 귀환하여 여왕에게 전리품을 바치는 모습 등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문헌 내용: 비문에는 원정대가 "신의 땅"에 도착하여 환영받았고, 이집트 파라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푼트인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져온 물품의 목록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시아 문명권의 탐험 (B.C. ~ A.D. 15세기)
중국 문명
장건의 서역 탐험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시대, 한나라의 사절이었던 장건은 서역(중앙아시아)을 탐험하여 대월지, 파르티아 등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서방 국가들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비단길(Silk Road)의 개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육로 탐험: 후대의 승려(법현, 현장)들도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까지 육로로 여행하며 광범위한 지리적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화의 대항해 (명나라, 15세기 초): 명나라 영락제 시기 환관 정화(Zheng He)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대규모 함대(최대 300척 이상의 선박과 2만 7천 명의 승무원)를 이끌고 서태평양, 인도양을 넘어 아프리카 동해안(케냐, 소말리아 등)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는 콜럼버스보다 훨씬 앞선 대규모 해상 탐험으로, 항해 기술과 선박 규모 면에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조공국 확대, 명나라의 위신 과시, 무역 활성화 등이었습니다.
인도 문명
동남아시아 및 해상 실크로드: 인도 상인과 종교인들은 일찍부터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로 항해하여 무역과 불교/힌두교 문화 전파에 기여했습니다.
아프리카 동해안: 아프리카 동해안의 스와힐리 해안까지 교역을 위해 항해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탐험
바이킹 (노르드인, 9세기 ~ 11세기)
대서양 북부 탐험: 뛰어난 롱십(longship)을 이용하여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에 정착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 도달: 레이프 에이릭손(Leif Erikson)은 1000년경 그린란드에서 서쪽으로 항해하여 북아메리카 대륙(현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랑스 오 메도스L'Anse aux Meadows로 추정되는 '빈란드 Vinland')에 도달하여 잠시 정착촌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앞선 아메리카 대륙 도달 사례입니다.
십자군 전쟁과 몽골 제국의 등장은 유럽인들에게 동방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탐험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 13세기): 프랑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로,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여행하여 몽골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중요한 지리적, 문화적 정보를 유럽에 전달했습니다.
마르코 폴로 (Marco Polo, 1254–1324): 베네치아 상인으로, 약 20년 동안 몽골 제국의 원나라에서 활동하며 중국과 아시아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Il Milione)》**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상세하고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여 지리적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고, 훗날 콜럼버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발디 형제 (Vivaldi brothers, 1291년): 제노바 출신 상인으로, 아프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인도로 향하는 서회 항로를 개척하려 시도했습니다. 이는 대서양을 통한 동방 항로 개척의 첫 번째 구체적인 유럽인의 시도 중 하나로 기록되지만, 이들은 실종되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