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선생
일본 성리학의 독자적 전개와 조선 성리학과의 비교 연구: 주요 논쟁과 사상적 연관성을 중심으로
서론: 동아시아 성리학의 지형과 일본 성리학 연구의 중요성
성리학은 송나라 시대에 훈고학에 대한 반발과 불교의 영향력 증대 속에서 탄생하여 주희(朱熹)에 의해 집대성된 사상 체계이다.1 이 학문은 우주와 인간의 생성 및 구조를 이기(理氣) 개념을 중심으로 해명하고, 사회에서의 인간의 참된 도리를 깊이 사색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보편과 특수를 일관하는 방대하고 심오한 철학적 틀을 구축하였다.2 성리학은 중국을 넘어 조선,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되었으며, 각 지역의 고유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수용되고 변용되었다.1 특히 조선에서는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으며 이기론, 심성론 등 철학적 심화가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는 무사 계층의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통치 이념으로 활용되면서도 다양한 학파가 등장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일본 성리학은 단순히 중국 성리학의 수용에 그치지 않고, 일본 고유의 사회 구조와 문화적 특성, 특히 무사 계층의 지배라는 맥락 속에서 독특한 변용을 겪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이 관학으로서 심오한 철학적 논쟁을 심화시킨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일본 성리학의 전개 과정, 주요 논쟁의 논리적 쟁점, 그리고 조선 성리학과의 비교를 통해 동아시아 성리학의 다층적인 지형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일본 성리학의 전래와 발전 양상
1.1. 유교의 초기 전래와 성리학의 도입
일본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513년 게이타이 천황 때 백제에서 오경박사가 도일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불교보다도 이른 시기였다.4 『고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왕인이 『논어』를 가지고 도일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4 유교 사상은 다신교를 신봉하던 신토가 포용하기 수월했기에 빠르게 일본에 녹아들었고, 도교 및 음양오행설과 함께 훗날의 음양도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었다.4 아스카 시대에는 소가씨의 불교 보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을사의 변 이후 황실이 유교를 중시하기 시작했으며,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율령제가 발포되고 관리 양성에도 응용되었다.4 식부성에 대학료를 설치하여 국가 통치 학문으로서 묘교도를 연구토록 한 것이 그 예이다.4 그러나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는 과거제가 도입되지 않았기에 유교 본래의 가치, 즉 관료 선발을 위한 학문으로서의 위상이 제대로 정착하기 어려웠다.4 결국 유교의 역할은 기덴도와 음양도로 이어지거나 신불습합(神佛習合)을 계기로 불교에 융성해지는 경향을 보였다.4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1199년 승려 슌조(俊芿)가 남송을 방문하여 유교 서적 250권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일본에 전래되었다.4 이후 엔니(圓爾) 등 선승이나 원나라의 침공을 피해 송나라에서 넘어온 지식인들 사이에서 성리학이 유행했으며, 1299년 원나라에서 건너온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가 가져온 주석서를 계기로 일본의 성리학이 완성되었다.4 이 시기의 성리학은 주로 교토5산이나 가마쿠라5산 등 임제종의 선종 사원 내에서 연구되었으며, 송나라에서 건너왔기에 일본에서는 '송학(宋學)'이라고도 불렸다.4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포로로 끌려간 강항(姜沆)은 일본 성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1 강항은 일본의 유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교류하며 성리학의 해석과 조선의 과거 절차, 유교 경전 등을 가르쳤고, 이는 일본 주자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1 강항의 저서인 『간양록』은 일본의 역사, 지리, 군사정보, 문화를 망라한 보고서로서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13 강항의 영향은 일본 학문에 다양성을 더하고 일본인들이 학문 세계에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고 평가된다.12
1.2. 에도 막부 시대의 성리학 발전과 관학화
에도 막부는 오랜 전란 후의 질서와 안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성리학을 통치 철학으로 채택하고 장려했다.9 이는 무사들을 통제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데 성리학이 유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7 막부는 에도의 유시마에 학문소를 설치하고 여러 번(藩)에서는 무사들의 자제를 교육시켰으며, '상하 정분(定分)의 이(理)'를 바탕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 사회의 틀을 강화하는 데 성리학을 활용했다.9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최초의 성리학자로 평가되며,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9 그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도쿠가와 막부의 어용 유학자 가문의 시조가 되었고, 4대 쇼군에 이르기까지 쇼군의 스승인 시강(侍講)을 역임하며 성리학의 관학화(官學化)를 주도했다.9 라잔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에도 막부의 각종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고, '상하 정분(定分)의 이(理)'를 강조하여 사회 안정에 기여했다.9 그는 또한 불교와 천주교를 비판하고 신도와 유교의 조화를 주장하며 '신유합일(神儒合一)'의 선구자가 되었다.1
1.3. 주요 학파의 등장과 사상적 특징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주자학이 통치 철학의 지위를 굳혔지만, 동시에 다양한 학파들이 출현하며 사상적 지형을 풍부하게 만들었다.21 이는 조선에서 주자학이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표 1: 일본 성리학 주요 학파 비교
주자학파
(주요 인물) 하야시 라잔, 후지와라 세이카, 야마자키 안사이
(핵심 사상) 이기이원론 (하야시 라잔의 이기합일 경향 포함), 성즉리, 상하 정분, 관학화
(사회적 영향) 통치 이념 활용, 무사도 영향, 사회 안정 기여, 심오한 철학적 논쟁보다 현실적 적용 중시
양명학파
(주요 인물) 사토 잇사이 (후대)
(핵심 사상)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 사상마련, 주체성, 자발성
(사회적 영향) 막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발전, 근대 국가주의 및 부국강병 이념과 연계, 실천성 강조
고학파
(주요 인물) 이토 진사이 (고의학), 오규 소라이 (고문사학)
(핵심 사상) 주자학 형이상학 비판, 고전 원뜻 추구, 실질 중시, 예악형정 등 제도적/실천적 측면 강조
(사회적 영향) 주자학의 관념성 비판, 현실 개혁 지향, 유학의 '일본화' 가속화, 사상적 다양성 증대
국학파
(주요 인물) 모토오리 노리나가
(핵심 사상) 외래 사상(유불) 배격, 일본 고유 문화/정신(신토, 천황) 강조, 모노노아와레
(사회적 영향) 국수주의적 지향, 일본 제국주의 사상적 토대 형성, 천황 중심 국가관 강화
신유합일
(주요 인물) 하야시 라잔, 야마자키 안사이 (수가신도)
(핵심 사상) 신도와 유교의 조화, 신도적 세계관으로 유학 해석
(사회적 영향) 일본 고유의 종교적, 문화적 토양에 유학 뿌리내림, 국가주의와 연계
주자학파
에도 시대에 하야시 라잔의 공헌으로 통치 철학의 지위를 굳혔다.21 주자학은 이기이원론에 기반하여 리(理)를 근본적 실재로, 기(氣)의 운동에 질서를 부여한다고 보았다.20 하야시 라잔은 이기 합일을 주장하며 "태극(太極)이란 이이고, 음양(陰陽)이란 기이다. 태극 중에 본래 음양이 있으며 음양 중에 역시 태극이 있다"고 논했으며, "이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송유(宋儒)의 뜻을 계승하려 했다.8 '성즉리(性即理)'를 실천론으로 도출하며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강조했다.20 그러나 일본의 주자학은 중국이나 조선처럼 과거제가 없었기에 관료 선발의 주요 수단이 되지 못했고 4, 주자학의 본래적 가치인 격물치지(格物致知)나 심성론의 심화보다는 사회 질서 유지와 통치 이념으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17
양명학파
에도 막부는 양명학을 탄압했지만 1, 성리학과 비슷한 시기에 양명학 등 다른 유학 사상도 일본에 들어와 서로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23 양명학은 왕수인(王守仁)이 집대성한 유학으로,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을 3강령으로 한다.24 '심즉리'는 마음 그 자체가 리와 다름없다는 사상이며, '치양지'는 인간이 본래 타고난 참된 앎인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24 '지행합일'은 앎과 실천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사상이며,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일상생활 속에서 양지를 닦는 수양 방법을 강조한다.24 일본의 양명학은 주체성과 자발성을 특징으로 하며, '자력에 의한 자기실현, 자기구제'를 적극적으로 긍정했다.26 이는 메이지 유신 시기 '부국강병'을 위한 '덕육'과 결합되어 국가주의 고취에 동원되기도 했다.26
고학파 (古學派)
18세기에는 성리학을 비판하며 과거 성인들의 유학으로 돌아가자는 '고학'이 나타났다.28 이토 진사이(伊藤仁斎)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가 대표적인 인물이다.29 이들은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풀이를 비판하고, 『논어』, 『맹자』 등 고전의 원뜻을 직접 구하려 했다.29
이토 진사이의 고의학(古義學): 진사이는 주자학의 '경(敬)' 수양론에 심취했으나, 이후 『논어』의 핵심 사상인 '인(仁)'을 추구하며 '진사이(仁齋)'로 호를 바꾸었다.30 그는 주자학의 관념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실(實)', 즉 '실질적인 것'을 강조했다.30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古文辭學): 소라이는 주자학의 독단성과 내면주의적 형이상학적 태도를 비판하고 33, 유학 경전을 선진(先秦) 시대의 의미에 따라 풀이하여 예악형정(禮樂刑政) 등의 제도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을 중시했다.29 그는 '성인'이 오직 중국 고대에만 존재했으며, 현재는 선왕이 남긴 육경을 통해 성인의 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며, 도(道)를 인간과 사회생활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질서, 즉 문화 속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33
국학파 (國學派)
에도 시대 중반인 17세기 말에 생겨난 학문으로, 불교나 유학과 같은 외래 종교와 학문을 배격하고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찾으려는 학문이다.28 이들은 일본 고유의 것으로 신토와 천황에 주목했으며, 이는 현대의 신토와 천황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35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대표적인 국학자로, 그는 중국의 철학을 부정하고 일본 고유의 문화를 숭상하며, 성리학적 합리주의로 일본인의 정서인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를 억누르는 것을 위선이라고 주장했다.28 국학은 인간의 유한성과 동요하는 마음에 주목하며, 성즉리와 같은 보편적이고 도덕 일색의 세계관을 부정했다.37 국학은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고 주변 국가들을 폄하하는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35
신유합일(神儒合一) 사상
일본에서는 신토와 불교의 혼합인 신불습합처럼 4, 후지와라 세이카 이후 신토를 이기론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하는 등 성리학의 일본 토착화가 이루어졌다.1 하야시 라잔은 "신도(神道)는 바로 왕도다"라고 말하며 신도와 유교의 합일을 주장했고 8,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는 승려 출신으로 주자학과 신도를 접합한 수가신도(垂加神道)를 창설했다.8 이는 일본 특유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유학이 변용된 중요한 사례이다.
1.4. 일본 성리학 발전의 특성과 함의
일본 성리학의 발전 과정은 조선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인다. 유교가 513년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는 과거제가 도입되지 않아 유학이 관료 선발의 필수적인 경로가 되지 못했다.4 이러한 제도적 차이는 일본 성리학이 심오한 철학적 탐구나 관념적 논쟁보다는, 일본의 특수한 정치적, 사회적 필요에 따라 실용적이고 현실 지향적으로 변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에도 막부가 성리학을 관학으로 장려한 목적은 주로 오랜 전란 후의 질서와 안정을 정착시키고, 사농공상이라는 신분 질서를 강화하며, 각종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는 등 현실적 통치와 사회 안정에 있었다.9 이는 일본 성리학이 '천리(天理)'의 심층적 탐구보다는 '현실 질서'의 확립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의미한다.17 이러한 실용주의적 변용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문물을 수용할 때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구호처럼 기술과 정신을 분리하여 실용적 측면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40 이는 조선이 성리학적 관념성에 매몰되어 근대화 속도가 늦어졌다는 비판과 대비되는 지점이다.43
또한 일본 성리학은 '일본화' 과정을 거치며 국가주의적 잠재력을 내포하게 되었다. 하야시 라잔이 신도와 유교의 합일을 주장하며 "신도(神道)는 바로 왕도다"라고 말하고 8, 야마자키 안사이가 주자학과 신도를 접합한 수가신도(垂加神道)를 창설한 것은 11 유교가 일본 고유의 신토 사상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국학파는 불교나 유학과 같은 외래 학문을 배격하고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신토, 천황)을 찾으려 했다.28 야마자키 안사이의 일화에서 "중국이 공자와 맹자를 대장으로 삼아 일본을 공격한다면 공맹의 도를 배운 우리들은 몸에 갑옷을 입고 병기를 잡고 그들과 일전을 수행하여 공맹을 잡아 국은에 보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11 유교적 대의보다 '국은(國恩)'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양명학은 '신도와 합일하여' '국가적 정신을 근본으로 하는' '일본의 양명학'이 되었으며, '천황'을 최고의 권위로 앉히고 충성을 강조하는 데 동원되었다.26 국학은 천황제 국가 건설의 기초를 형성했다.35 이러한 변용은 유교의 보편적 도덕 원리보다 '국가'와 '천황'이라는 특정 공동체와 최고 권위에 대한 충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메이지 유신과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로 작용할 수 있는 국가주의적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 성리학의 '일본화'는 유학의 보편적 가치보다 특정 국가의 이념적 필요에 따라 사상을 재구성하는 사례를 보여주며, 이는 근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제국주의에 대응하며 자국 중심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상적 변용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2. 일본 성리학의 주요 논쟁과 논리적 쟁점
2.1. 이기론(理氣論) 및 심성론(心性論)의 변용과 논쟁
주희의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의 개념을 중심으로 우주와 인간의 생성과 구조를 해명한다.2 일본 주자학의 핵심 인물인 하야시 라잔은 이기 합일을 주장하며 "태극(太極)이란 이이고, 음양(陰陽)이란 기이다. 태극 중에 본래 음양이 있으며 음양 중에 역시 태극이 있다"고 논했다.8 그는 이와 기를 나누어 말할 수 없다고 보면서도, "이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송유(宋儒)의 뜻을 계승하려 했다.8 이는 조선 성리학에서 이황이 이기이원론을, 이이가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며 심오한 이기 논쟁을 펼친 것 1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이기론 자체가 조선만큼 심층적인 철학적 쟁점으로 발전하기보다는 통치 이념의 정당화에 활용되는 경향을 보였다.17
조선 성리학은 사단칠정 논쟁 1과 호락 논쟁 49 등을 통해 인간의 심성(心性) 문제를 깊이 탐구하며 철학적 경지를 높였다.2 그러나 일본 성리학은 조선 성리학의 중심인 심성론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51 일본 유학의 목적은 인간 본성의 구현보다는 '사회 안정'에 있었고, 퇴계학을 연구하면서도 '천리'에 대한 내용은 배제하고 '도덕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17 이는 일본 유학이 관념적인 내용을 철저히 탈락시키고 현세의 구체적인 도덕 행위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습합'의 특성을 보였음을 의미한다.17
2.2. 예학(禮學)의 현실적 적용과 사회적 의미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발달로 예학(禮學)이 크게 발달했으며, 이는 도덕 윤리를 중시하고 명분 중심의 가치를 강조했다.46 특히 상장 제례에 관한 예학이 이기론과 함께 발달했으며, 주자가례를 따르는 가정의 의례가 중요시되었다.3 예학은 유교적 가족 제도를 만들고 양반 문벌 제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지나친 형식에 치우치고 예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붕당 간의 정치적 다툼(예송논쟁)으로 이어지는 폐단도 있었다.47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성리학을 통해 각종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고 '상하 정분'을 강조하여 사농공상 신분 사회의 틀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9 이는 조선의 예학이 철학적, 도덕적 명분론에 기반하여 발전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막부의 통치 안정과 신분 질서 유지라는 현실적 목적에 더욱 직접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17 일본의 전통적 의례는 결혼 등은 신토에 따라, 장례와 제사는 불교식으로 지속되는 등 성리학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3
2.3. 주자학, 양명학, 고학, 국학 간의 사상적 대립과 논리적 쟁점
일본 성리학의 역동성은 다양한 학파 간의 사상적 대립에서 두드러진다. 에도 막부는 양명학을 탄압했으나 1, 일본에서는 성리학과 비슷한 시기에 양명학 등 다른 유학 사상도 들어와 서로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23 조선에서는 17세기 윤휴(尹鑴)가 '세상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고 했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찍히는 등 11 주자학이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던 것과 대조된다.29 일본에서는 주자학이 '정체'의 논리로 중세 봉건사회의 이념 원형으로 파악되기도 했으나 56, 양명학은 주자학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실천과 주체성을 강조하며 일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23
고학파는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오규 소라이는 조선통신사절 원중거(元重居)와의 필담에서 "성리학은 이단"이라고까지 말하며 정주(程朱)를 배척하고 '복고지학(復古之學)'을 창도했다고 밝혔다.29 소라이학은 유가 경전을 선진(先秦) 시대의 의미에 따라 풀이해 예악형정(禮樂刑政) 등의 제도적, 실제적 측면을 중시했다.29 이는 주자학의 관념주의적, 형이상학적 태도를 비판하며 '도(道)'를 구체적인 삶의 질서, 즉 문화 속에 깃든 것으로 보았다.33 이토 진사이 역시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풀이를 비판하고 '실질적인 것'을 강조하며 '고의학(古義學)'을 창시했다.30
국학파는 유교와 불교 같은 외래 학문을 배격하고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신토, 천황)을 찾으려 했다.28 국학자들은 유교의 가르침이 인간 마음의 깊은 본질적 부분에는 다다르지 못하며, 도(道)는 도리에 의한 가르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37 이는 성즉리(性即理)와 같은 보편적이고 도덕 일색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인간의 유한성과 동요하는 마음에 주목했다.37 국학은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고 주변 국가들을 폄하하는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35
2.4. 일본 성리학 논쟁의 지향성
일본 성리학의 주요 논쟁은 조선처럼 '이(理)'와 '기(氣)'의 존재론적 관계나 '사단칠정'의 심성론적 본질을 파고들기보다는, '어떻게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 제도를 확립할 것인가'라는 실천적이고 제도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조선 성리학은 이기론, 심성론 등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적 논쟁을 심화시켰다.1 반면 일본 주자학은 이기 합일을 주장하면서도 조선만큼 심오한 이기 논쟁을 펼치지는 않았으며 8, 심성론 또한 조선처럼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도덕의 실천에 중점을 두었다.17 고학파(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고전의 실질적인 의미를 추구하며, 예악형정과 같은 제도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을 중시했다.29 오규 소라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바둑판에 줄을 긋는 것과 같다'며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34 이러한 실천적 지향성은 일본 사회에 과거제가 부재하고 무사 계층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유학이 '통치 기술'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 지향성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제도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회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즉, 추상적인 이념 논쟁에 매몰되기보다 현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학문적 경향이 근대적 실용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또한 일본 성리학 논쟁은 '탈(脫)주자학' 경향과 사상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조선에서는 성리학, 특히 주자학이 '공인된 학문'이자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으며, 주자를 벗어나면 '이단'으로 간주될 정도로 교조주의적 경향이 강했다.11 그러나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양명학을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1, 성리학과 비슷한 시기에 양명학 등 다른 유학 사상도 한꺼번에 들어와 서로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23 고학파는 주자학을 '배척'하고 고경(古經)을 종주로 삼으며, 주해에 의지하지 않는 '복고지학'을 창도했다.29 국학파는 아예 유교와 불교 같은 '외래' 학문을 배격하고 '일본 고유의 문화'를 찾으려 했다.28 이러한 사상적 다양성과 비판적 태도는 일본 지성사의 역동성을 보여주며, 조선의 상대적으로 경직된 학문 분위기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사상적 독점 없이 다양한 학문적 흐름이 공존하고 경쟁하는 환경은 지적 유연성을 높이고, 새로운 사상과 기술의 수용에 대한 저항을 줄이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이는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문물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자국화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3. 한국 성리학과의 연관 관계 및 비교 분석
3.1. 조선 성리학의 일본 전파 경로 및 영향
임진왜란(정유재란) 시기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 유학자 강항은 일본 성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 그는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성리학의 해석과 경전을 가르쳐 일본 주자학의 기틀을 마련하게 했다.11 강항의 영향은 일본 학문에 다양성을 더하고 일본인들이 학문 세계에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고 평가된다.12
조선통신사는 1428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 쇼군에게 파견된 외교 사절로, 양국 간 문화 교류의 상징이었다.57 통신사 일행과 일본 학자들 간에는 활발한 시문(詩文) 및 필담(筆談)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29, 조선의 유학은 일본 학문의 정신적 바탕이 되고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58 특히 퇴계 이황의 학덕과 저작(『퇴계집』, 『성학십도』)은 일본 유학자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받았으며 19, 에도 막부 초기에 퇴계학이 정착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8 전 쓰쿠바대학 다카하시 스스무 교수는 퇴계학이 근대에 이르러서도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60
그러나 일본 유학자들은 퇴계학을 연구하면서도 '천리(天理)'의 구현과 같은 관념적인 내용은 배제하고, '도덕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17 이는 일본 유학의 목적이 '인간 본성의 구현'보다는 '사회 안정'에 있었기 때문이다.17 즉, 퇴계학의 '경(敬)' 공부는 강조되었으나, 그 목표는 '하늘과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륜(五倫)'과 같은 구체적인 도덕 덕목의 실천으로 대체되었다.17 조선 성리학은 일본으로 '수출'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수입자'인 일본 사회의 특성과 필요에 맞게 재해석하고 변용하는 능동적인 과정을 거쳤다. 이는 단순히 사상을 전수받는 것을 넘어, 자국의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 맞춰 사상의 핵심 가치를 재구성하는 '습합'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조선의 성리학이 '무사 근성'과 '사회 안정'이라는 일본적 특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 것이다.18 이러한 현상은 사상 전파가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수용하는 측의 주체적인 해석과 변용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주며, 이는 동아시아 사상 교류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3.2. 한국 성리학의 특징과 철학적 심화
조선의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에 의해 전래되었고, 신진 사대부들이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사회 개혁을 위한 사상적 기반으로 수용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9 조선은 성리학을 유일한 학문(관학)으로 삼아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활용했으며 20, 삼강행실도, 향약 등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를 확산시켰다.9
조선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의 이기 논쟁 1과 사단칠정 논쟁 1을 통해 심오한 이기 철학과 심성론을 성립시켰다.2 이황은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론을, 이이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론을 주장하며 관념적 도덕 세계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동시에 탐구했다.9 이러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독특한 사상적 특징을 완성하며 인간과 우주 자연에 대한 높은 철학적 경지를 보여주었다.2
조선의 예학은 성리학적 이기론이 공허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예의 실천을 통해 체득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62, 명분론적 예학을 꽃피웠다.46 예학은 가족과 종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 양반 문벌 제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지나친 형식화로 예송논쟁과 같은 정치적 다툼을 야기하기도 했다.47
3.3. 일본 성리학과 한국 성리학의 차이점
한국과 일본의 성리학은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각기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걸으며 상이한 특성을 형성했다.
표 2: 한국 성리학과 일본 성리학의 주요 특징 비교
전래 경로 및 초기 수용
(한국) 안향에 의해 전래, 신진사대부의 사회 개혁 이념으로 수용, 불교 비판
(일본) 승려 슌조에 의해 전래, 임진왜란 후 강항의 영향, 선종 사원 내 연구
국가적 지위 및 활용
(한국) 관학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과거제와 연계된 관료 선발의 주요 수단, 붕당 정치의 이념적 배경
(일본) 에도 막부의 관학화 시도, 과거제 부재로 관료 선발 수단 아님, 무사 통치 이념 및 사회 질서 유지의 실용적 도구
이기론/심성론 특징
(한국) 이황-이이의 이기 논쟁, 사단칠정 논쟁 등 심오한 철학적 논쟁 심화, 관념적 탐구 중시
(일본) 이기 합일 경향 (하야시 라잔), 심성론보다 도덕 실천 및 제도적 측면 중시, 관념성 배제 경향
예학의 역할
(한국) 명분론적 예학 심화, 가족/문벌 강화, 예송논쟁 등 정치적 갈등 야기
(일본) 막부의 제도/의례 정비에 활용, 신분 질서 강화, 전통 의례(신토/불교)와의 습합
학문적 경향
(한국) 학문적/사변적, 교조주의적, 정통성 강조, '천리' 탐구
(일본) 실용적/현실 지향적, '탈주자학' 경향, 사상적 다양성, '오륜' 등 구체적 실천 강조
종교/문화적 융합
(한국) 불교 극복 및 유교 중심의 학문 체계 확립
(일본) 신토/불교와의 습합, 신유합일(神儒合一) 사상 발달, 유학의 '일본화'
근대 사상과의 연계
(한국) 실학의 등장 (성리학 내부 비판), 민족주의와 서구 사상 수용 (주로 선교사 통해)
(일본) 메이지 유신 사상적 배경 중 하나, 국가주의, 부국강병 이념과 연계, '화혼양재'
사회적 영향
(한국) 양반 중심의 신분 사회 강화, 높은 교육열, 붕당 정치의 폐단
(일본) 무사도 형성 영향, 조닌(町人) 문화 발달, 실용주의적 사회 분위기 형성
관념성 vs. 실천성
한국 성리학은 우주 만물의 보편타당한 원리, 불변의 진리인 '천리(天理)'를 중시하며, 이를 깨닫고 실현하기 위한 학문적, 사변적, 관념적 탐구에 진력했다.17 '리(理)'를 중시하는 주리론이 우위를 점하며 이념적 가치에 경도된 관념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했다.17 반면 일본 성리학은 '천리'와 같은 관념적인 내용은 배제하고, '도덕의 실천'과 '사회 안정'이라는 현실적, 실용적 목적에 중점을 두었다.17 하늘처럼 섬겨야 할 대상을 임금(쇼군)과 부모로 구체화하고, '경(敬)'을 '오륜(五倫)'과 같은 구체적인 도덕 덕목의 실천으로 대체하는 등 철학적 관념성을 탈락시키는 '습합'을 보였다.17
정치적/사회적 활용
한국 성리학은 과거제를 통해 관직 진출의 주요 수단이자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7 성리학은 신하가 왕에게 군왕의 자세를 요구하고 왕 또한 신하에게 의무를 강요하는 '신하의 무기이자 국왕의 무기'로 작용하며 64, 붕당 정치의 이념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1 지나친 도덕주의로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46 반면 일본 성리학은 과거제가 없어 관료 선발의 주요 수단이 되지 못했고 4, 막부의 통치 안정과 신분 질서 유지(사농공상)를 위한 실용적 도구로 활용되었다.9 조선과 달리 성리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웠고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는 평가도 있다.64 무사 계층의 문화적 배경과 결합하여 '무사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10
근대적 변용 및 영향
한국 성리학은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비판적 움직임으로 나타났으나 7, 성리학적 교조주의에 매몰되어 성리학 외의 학문과 문화를 무시했다는 비판도 있다.43 근대 교육으로의 전환이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한글 교육을 통해 근대 사상과 평등 사상이 확산되었다.67 반면 일본 성리학은 조선 성리학을 변형시켜 조직화, 이론화, 내재화한 힘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하게 한 근간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68 특히 양명학의 '주체성과 자발성'은 메이지 유신 시기 '부국강병'과 '국가주의 고취'에 동원되어 천황제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26 국학은 일본 고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35 일본은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면서도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내세워 일본의 정신을 고수하려 했다.40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성리학적 유산의 상이한 발현은 두 나라의 다른 경로를 설명한다.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적 도덕주의에 치우쳐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46, 성리학 교조주의에 매몰되어 다른 학문과 문화를 무시했다는 지적도 있다.43 반면 일본 성리학은 조선 성리학을 자신과 시대 변화에 맞도록 변형시켜 조직화, 이론화, 내재화한 힘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하게 한 근간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68 특히 양명학의 주체성과 자발성은 메이지 유신 시기 부국강병과 국가주의 고취에 동원되었다.26 일본의 교육은 실용적인 농업교본, 상업교본을 가르쳤으며, 출판 문화가 발달하여 평민들의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지는 등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42 반면 조선은 이공계 인재의 성장이 쉽지 않았고, 서양 학문 수용이 선교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등 근대 교육 전환이 늦었다.67 이러한 비교는 한국과 일본의 성리학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이한 유산으로 발현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성과 교조주의로 인해 현실 개혁과 실용적 학문 발전에 제약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일본의 성리학은 실용성과 주체적 변용을 통해 근대 국가 건설의 이념적 기반 중 하나로 활용되었다. 특히, 일본은 유학을 '통치 기술'로 받아들이면서 '무사도'와 '신도' 등 자국 고유의 문화와 융합시켜, 근대 국가주의와 부국강병의 논리로 발전시켰다. 이는 특정 사상이 한 사회에 뿌리내릴 때, 그 사회의 기존 문화, 정치 체제, 그리고 역사적 맥락이 어떻게 사상의 변용과 그 사회적 영향력을 결정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결론: 일본 성리학의 독자적 의의와 동아시아 사상사적 함의
일본 성리학은 가마쿠라 시대 선종 사원을 통해 전래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의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4 에도 막부 시대에 관학으로 장려되었으나, 그 목적은 주로 사회 안정과 신분 질서 확립 등 현실적 통치에 있었다.9 주자학 외에 양명학, 고학(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국학(모토오리 노리나가) 등 다양한 학파가 등장하여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관념적 측면을 비판하고 실용성, 제도 개혁, 일본 고유의 정신을 강조하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23 특히 신도(神道)와 유교의 융합(신유합일, 수가신도)은 일본 성리학의 독특한 변용 양상을 보여주며, 이는 유교가 일본 고유의 종교적, 문화적 토양에 깊이 뿌리내리는 과정을 의미한다.1
조선 성리학은 강항과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 영향을 미쳤으나 9, 일본은 이를 자국의 실용적, 현실적 필요에 맞게 재해석하고 변용했다.17 한국 성리학은 이기론, 심성론, 예학 등에서 심오한 철학적 논쟁을 통해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고 국가 통치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1 이는 관념적, 학문적, 교조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17 일본 성리학은 과거제 부재와 무사 계층의 지배라는 특수성 속에서 실용적, 제도적 측면에 집중하고, 주자학에 대한 비판과 자국 고유 사상과의 융합을 통해 사상적 다양성을 확보했다.4 두 나라의 성리학은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각기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걸으며 상이한 특성을 형성했다.
일본 성리학의 실용주의적, 현실 지향적 특성과 국가주의적 변용은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과정에서 '부국강병'의 이념적 토대 중 하나로 작용했다.26 특히 '화혼양재'와 같은 구호는 서양 기술 수용과 일본 정신 고수의 이분법적 사고를 반영하며, 이는 현대 일본 사회의 특정 측면에서도 잔재를 찾을 수 있다.40 일본의 교육열과 조직 문화, 상하 위계 질서 등은 유교 윤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으나, 개인의 자유와 평등 문제에서는 현대적 가치와 충돌하는 지점도 존재한다.72 결론적으로, 일본 성리학은 단순한 외래 사상의 수용을 넘어 일본 사회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적인 형태로 변용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근대화와 국가 정체성 형성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이는 동아시아 각국이 근대 전환기에 전통 사상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활용했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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