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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과 여진

젬선생

by 조영필 Zho YP

동아시아 역사 속 말갈-여진족의 변천과 영향: 정체성, 상호작용, 그리고 유목민족의 분류


I. 서론: 말갈-여진족 연구의 중요성

말갈-여진족은 동아시아 북방 지역의 주요 민족 집단으로,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국가들과 중국 왕조, 그리고 다른 북방 유목민족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동아시아사의 흐름을 형성해왔다. 이들의 정체성 변화, 역사적 역할, 문화적 특성, 그리고 한민족과의 관계는 동아시아 민족 형성사와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


본 보고서는 말갈-여진족의 시대별 명칭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각 시대에 특기할 만한 역사적 사건과 풍습을 조명한다. 특히, 고려시대 서희의 거란과의 협상 시 여진족의 상황, 여진족이 한민족의 일원으로 편입된 연유와 백정으로 사회에 편입되었다는 설, 조선과 여진의 전투 및 상호 인식과 대응 관계, 그리고 여진의 청 건국 이후의 상황 등을 상세히 조사한다. 또한, 말갈 또는 여진족의 조상 신화 중 한민족과 공통적으로 연관되는 요소를 탐구하고, 명칭이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여진족이 돌궐족, 몽골족, 흉노족, 거란족 등 다른 동아시아 유목민족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언제부터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등 동아시아 전반의 유목민 분류 및 민족 구성에 대한 종합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II. 시대별 명칭 변화 및 역사적 사건

말갈-여진족의 정체성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변화해왔다. 이는 이들이 지리적, 정치적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재편되고 재정의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신 (肅愼)

숙신은 주나라 이전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동아시아 북방 지역에 존재했던 민족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1 이들은 퉁구스계 민족의 조상으로, 주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거주했다.2 일부 학자들은 숙신의 활동 지역이 산둥반도와 허베이 일부 지역까지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 숙신은 주로 사냥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농경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1 또한 활을 매우 잘 쏘았다고 전해진다.2 이들은 뚜렷한 수도가 없는 부족국가 형태를 유지했으며 2, 고조선과 관련성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조선'이라는 명칭이 '숙신'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2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일부 숙신이 고구려에 토벌되어 복속되기도 했다.2


숙신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분포하며 수렵을 주 생업으로 삼았던 초기 퉁구스계 집단으로, 그들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다양한 고문헌에서 숙신을 '조선'의 별칭으로 언급하거나 지리적 위치를 다르게 비정하는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기록이 외부 민족의 정체성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준다.1


읍루 (邑婁)

읍루는 한나라 때부터 위진시대(기원후 300년경-500년경)에 걸쳐 존재했던 민족으로, 옛 숙신국으로 불리기도 했다.1 이들의 본거지는 목단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이었다.8 읍루족은 부족 자체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읍락마다 추장들이 통치하는 분산된 형태를 유지했다.8 한때 부여에 종속되었으나, 부여의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을 쟁취하기도 했다.10 읍루족의 독특한 풍습으로는 몸에 돼지기름을 발라 추위를 막고,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점이 있다.10 또한 땅에 구덩이를 파고 사다리로 드나드는 혈거(穴居) 생활을 했으며 10, 독화살 사용에 능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10


읍루는 숙신의 후예로 추정되지만, 정치적 통일 없이 분산된 부족 형태로 존재했다. 이는 이후 여진족이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과 대비되며, 초기 북방 민족의 분열된 사회상을 반영한다.8


물길 (勿吉)

물길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기원후 400년경-600년경)에 쑹화강 유역을 지배했던 집단이다.3 읍루의 후예로 추정되며 8,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르게 되었다.13 물길은 읍루와 말갈을 잇는 과도기적 명칭으로, 이 시기 북방 민족의 세력 변동과 재편 과정에서 새로운 집단 명칭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8


말갈 (靺鞨)

말갈은 6세기부터 10세기경(수·당대)에 만주 동북부 지역에 거주했던 주민 집단이다.3 물길의 세력 약화 후 자립한 부족들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등장했으며 13, 만주 동북부 및 한반도 북부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다.12 이들은 반농반수렵의 삼림 민족으로 4, 속말부, 백돌부, 흑수부 등 7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4 말갈은 고구려와 대립과 복속 관계를 반복하며 복잡한 상호작용을 이어갔다.4 특히 고구려군에 편입되어 수·당과의 전쟁에서 전초병, 기습부대, 유격부대로 활약하며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15 고구려 멸망 후에는 전란의 여파로 사회적 혼란과 기존 질서의 와해를 겪었으며 15, 발해 건국에 참여한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 주민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4 신라 통일기에는 9서당 중 흑금서당에 말갈인이 편제되어 중앙군에 포함되기도 했다.2


말갈은 고구려와 발해의 주요 구성원이자 주변 세력으로, 한반도 국가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동아시아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다. 특히 신라의 9서당 편제는 통일 신라가 이민족을 포용하여 국가적 통합을 꾀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단순히 배타적인 민족 국가가 아닌 다민족적 통합을 시도했음을 시사한다.2


여진 (女眞)

여진은 10세기(요나라 때)부터 17세기(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명칭으로, 발해 멸망 후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여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3 만주어로는 '주선(jusen)'으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20 여진족은 독립적인 '생여진'(예: 흑수말갈)과 거란에 복속된 '숙여진'으로 분류되기도 했다.21 완안함보라는 신라 출신 인물이 여진족의 추장이자 시조가 되어 완안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으며 13, 그의 7대손인 완안아골타가 1115년 여진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건국했다.14 금나라의 국호는 완안함보의 신라 김씨 성과 연관된다는 주장도 있다.13


여진족은 초기에는 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상국으로 떠받드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22 그러나 완안부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을 교란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고려는 1033년 천리장성을 착공하고 1108년 윤관의 여진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22


여진족은 발해 멸망 후 분열된 상태에서 점차 세력을 규합하여 금나라를 건국하며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신라 출신 인물(완안함보)을 시조로 삼는다는 주장은 금나라가 주변 문명국과의 연결성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시도였음을 보여준다.13


만주족 (滿洲族)

만주족이라는 명칭은 1635년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6 홍타이지는 '여진족'이라는 명칭이 '노예'라는 비칭의 뜻으로 사용되던 현실을 피하고, '주선'이라는 호칭이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것과 무관함을 강조하며 '만주족'으로 개칭했다.20 '만주'는 원래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이 자신들을 일컫던 명칭이었다.26 누르하치는 만주 지역의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했으며, 이후 홍타이지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변경했다.14 만주족은 주로 농업과 수렵에 집중했던 반농반수렵 민족이었다.26


'만주족'으로의 명칭 변경은 단순히 이름의 변화를 넘어, 홍타이지가 분열된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고 새로운 제국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전략적 행위였다. 이는 민족 명칭이 시대적 상황과 지배층의 필요에 따라 재정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20


III. 문화와 풍습

말갈-여진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발전시켜왔으며, 이는 주변 민족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도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숙신

숙신은 주로 사냥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활 솜씨가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 이들의 신앙은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했다.2 흥미롭게도,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정교한 옥기와 대량 생산된 유물들은 숙신인들이 이미 '초기 국가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단순한 수렵 민족을 넘어선 문화적 복합성을 보여준다.13


읍루

읍루족은 혹독한 북방 기후에 적응하며 독특한 생활 방식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매우 추운 지방에 거주하며 땅에 무덤 같은 굴을 파고 출입구를 위로 낸 혈거(穴居) 생활을 했다.10 추위를 막기 위해 몸에 돼지기름을 발랐으며, 돼지고기를 즐겨 먹고 돼지 가죽과 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10 생업은 목축과 소규모 농경을 병행했으며 10, 집 한가운데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모여 사는 등 위생 관념이 독특했다.10 또한 옥구슬을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거나 목걸이, 귀걸이로 사용했으며 10, 소나 말을 타는 법을 모르고 장례용으로 소진했다는 기록은 이후 유목민족들의 기마 문화와 대비되는 초기 수렵-농경 민족의 특징을 보여준다.10


말갈

말갈족은 삼림에 거주하며 수렵 활동을 통해 뛰어난 기동성을 가졌다.15 이들은 보리, 조, 기장 등을 재배하며 농경을 병행했다.15 물질문화로는 반지하식 주거지, 토광묘, 그리고 아가리가 바깥으로 구부러지고 깊이가 깊으며 편평한 바닥을 특징으로 하는 '말갈관'이라는 독특한 토기가 대표적이다.30 속말말갈 유적에서는 부여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토광목관묘, 석축묘, 그리고 물레를 사용한 토기 제작 기술 등이 발견되어, 이들이 주변 강대국의 문물을 수용하며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31


여진

여진족의 종교는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불교, 조상 숭배, 하늘 숭배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형태를 띠었다.29 1120년에는 완안희윤에 의해 거란 문자에 기반한 초기 여진 문자가 발명되었으나, 금나라 멸망 후 급속히 소멸되었다.29 이후 16세기 말까지 몽골어를 사용하다 만주어가 문어로 정리되면서 만주어를 사용하게 된다.29 식생활에서는 돼지고기를 즐겨 먹고 돼지 사육을 널리 했으며, 옷차림은 돼지 가죽과 개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입었다.29 농업(대두, 밀, 수수, 쌀)과 사냥을 병행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29


만주족

만주족은 청나라 건국 이후에도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개 식용을 금지하는 풍습이 있으며, 이는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26 머리를 거의 다 밀고 한 갈래의 머리카락만 땋는 '퉁구스식 변발'을 선호했는데, 이는 몽골인이나 튀르크인들의 변발과는 형태적으로 차이가 있다.26 음력 8월 26일 '절량일'에는 깻잎에 밥과 고기를 싸 먹는 '다판바오'를 먹는 풍습이 있다.26 인사법으로는 오른무릎을 꿇고 오른주먹을 땅에 짚는 '타천'이나 황제에게 행하는 '삼궤구고두례' 등이 있었다.26


종교적으로는 고대부터 샤머니즘을 숭상했으며, 대승불교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청나라 황제는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으며, 유교는 건륭제 시절에 만주족 사회에 정착되었다.26 만주족은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중국 고전을 만주 문자로 번역했다.26 전통 악기와 복식(치파오, 강시 복장, 청 관모 등)을 보유했으며, 물만두가 주식이었다.26 청나라 지배층이 된 후에는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하여 현대 중국의 학계와 예술계에 많은 인사를 배출했다.26


IV. 한민족과의 관계: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말갈-여진족과 한민족 국가들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신라

통일 신라는 국가적 단결과 민족적 융합을 꾀하기 위해 백제와 고구려의 잔민뿐만 아니라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중앙군인 9서당을 조직했다.18 특히 말갈인으로 구성된 '흑금서당'이 설치된 것은 신라가 이민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려 했음을 보여준다.2 그러나 이러한 이민족 포용 정책은 전제 왕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귀화민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수단으로 변모하기도 했다.18


발해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을 이루고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였다. 말갈족은 발해 건국에 참여한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 주민의 주요 구성원이었다.4 『금사』에는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渤海本同一家)"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7,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인들이 금 황실의 고위 관료층과 왕비족을 형성하여 금나라가 발해인과 여진족의 연합 정권 성격을 띠게 되었다.17 금나라 시조 완안함보의 선대인 금행이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대조라는 기록도 존재하여 25, 발해와 여진족의 깊은 연관성을 시사한다.


고려

발해 멸망 후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초기에는 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상국'으로 떠받드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22 그러나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족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을 교란하는 일이 잦아졌다.22 이에 고려는 1033년 천리장성을 착공하여 1044년에 완공하며 북방 방어선을 구축했다.22 1108년(예종 2년)에는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서 9성을 축조했으나, 완안부의 강력한 약탈과 반환 요청으로 결국 9성을 돌려주기도 했다.22 고려와 여진족의 관계는 여진족의 세력 변화에 따라 '조공-상국' 관계에서 '군사적 대립' 관계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북방 민족의 성장이 기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22


조선

조선은 건국 초부터 여진족과의 복잡한 관계를 이어갔다. 조선 초에는 여진족과의 냉랭한 관계가 지속되었으며 34, 태종 이방원의 외교 정책의 연장선에서 세종대왕은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했다.34 조선은 귀순하는 여진족에게 관직과 토지, 주택을 제공하고 국경 무역을 허용하는 등 회유책을 폈다.35 경성, 경원, 만포 등지에 무역소를 열어 곡물, 소, 철제 농기구 등을 팔고 모피와 말을 구입하는 교역을 벌였다.38 그러나 이러한 무역은 역설적으로 여진족의 농경화와 경제력 발전에 기여하여 오히려 조선의 통제력 약화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38


16세기 중반 이후 압록강 방면 여진족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조선의 통제력은 점차 저하되었다.38 조선은 여진족을 '견양지배(犬羊之輩)', 즉 '개나 양 같은 무리' 또는 '오랑캐'로 여기는 등 멸시하는 시선이 존재했다.38 그러나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후유증과 누르하치 세력 확장에 직면하여, 여진족을 '노추(老酋)' '견양'으로 멸시하면서도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자극을 피하고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며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41 조선과 여진족의 관계는 초기 영토 확장과 국경 안정화 노력에서 시작하여, 여진족의 성장과 함께 조선의 정책이 회유와 정벌 사이를 오가며 변화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38


V. 서희와 거란의 협상 시 여진족의 상황

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했다.43 이때 고려의 외교관 서희는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언변과 통찰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서희는 거란의 침공 목적이 고려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 송나라 침공에 앞서 고려가 배후를 기습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임을 간파했다.44 그는 소손녕과의 협상에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거란의 동경(현 요양)도 본래 고려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44


이 협상에서 서희는 여진족을 중요한 외교적 카드로 활용했다. 그는 고려와 요나라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은 이유가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44 그러면서 만약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땅(압록강 동쪽의 여진족 거주지)을 고려에 준다면 요나라와 교류하겠다고 제안했다.44 이러한 제안은 거란에게도 명분과 실리를 제공하는 '제3의 핑계거리'가 되었다.43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고려의 후방 위협을 제거하고, 여진족을 정리하여 안정적인 국경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서희의 외교적 수완으로 거란은 철군했으며,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 거주지를 확보하여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다.43 이 사건은 여진족의 존재가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역학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며, 뛰어난 외교술이 군사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음을 입증한 역사적 사례로 평가된다.43


VI. 여진족의 한민족 편입과 백정 설

여진족은 한반도 국가들과의 오랜 상호작용 속에서 일부가 한민족 사회로 편입되는 과정을 겪었다.


한민족 편입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수많은 여진족이 한반도로 귀화하여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28 특히 조선 함경도 북부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은 점진적으로 한민족에 동화되었으며, 20세기 초까지 '재가승'이라 불리는 여진족 집단이 존재하다가 1960년대에 공식적으로 한민족으로 편입되어 그 정체성이 사라졌다.29 이러한 여진족의 한민족 편입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문화적 동화 과정이었다. 이는 한민족의 정체성이 단일한 혈통에 기반하기보다, 다양한 이민족을 포용하며 확장되어 왔음을 시사한다.28


백정 설

조선시대 천민 계층인 '백정'의 기원과 관련하여 유목민족과의 연관성이 제기된다. 조선시대 백정의 기원은 신라 말 고려 초 혼란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양수척'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던 거란인, 말갈인 등 북방 유목민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45 이들은 유목민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 농사짓는 일에 적응하지 못했고, 대신 버들고리짝 제작, 사냥, 도축업 등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45


조선 세종 때 정부는 이들을 양인으로 대우하고 호적에 편입시키려는 동화 정책을 추진하며 '백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했다.45 이는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가진 이들을 정착시키고 국가의 통제 하에 두려는 시도였다.47 그러나 일반 농민들은 이들을 '신백정'이라 부르며 기존 백성들과 철저히 구분하는 등 사회적 차별이 지속되었다.46 백정들은 특정 지역에 모여 살도록 강제되거나, 자유로운 이동이 통제되었고, 혼례나 상례에서도 차별을 받았다.48 또한, 이들은 사실상 국가의 통제 밖에 있었으며, 정착을 거부하고 떠돌이 생활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았다.46 이러한 사회적 차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45


백정 기원설은 유목민족이 농경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갈등과 차별의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 정부의 동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의 생활 방식과 기존 농경 사회의 구조적 차이로 인해 완전한 통합이 어려웠음을 시사한다.45


VII. 조선과 여진의 관계 및 전투

조선은 건국 초부터 북방의 여진족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조선의 대외 정책과 국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 관계 및 인식

조선은 여진족을 '오랑캐' 또는 '개돼지'로 여기는 등 하대하는 시선이 존재했다.38 그러나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여진족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조선의 인식은 단순히 '이적'에서 '방비 대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40


외교 및 경제 관계

조선은 여진족에 대해 귀순을 장려하고, 귀순자에게 관직, 토지, 주택을 제공하는 등 회유책을 폈다.35 또한 국경 지역에 무역소(경성, 경원, 만포)를 설치하여 정기적인 교역을 허용했다.37 조선은 이 무역을 통해 여진족으로부터 모피와 말을 얻고, 곡물, 소, 철제 농기구 등을 제공했다.38 이러한 교역은 여진족의 농경화와 경제력 발전에 기여하여, 역설적으로 여진족의 세력 강화를 돕고 조선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38


주요 전투 및 정책 변화

조선은 북방 국경의 안정을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세종대왕은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했으며 34, 1433년에는 최윤덕의 1차 파저강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34 이후 세조 시기인 1460년에는 모련위 정벌을, 1467년에는 명군과 함께 건주위를 협공했으며, 1479년에도 명의 요청으로 윤필상을 파견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하는 등 정벌 정책을 강화했다.38


1587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관련된 녹둔도 전투가 발생하여 여진족의 습격을 방어하기도 했다.50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전란의 후유증과 누르하치 세력의 급격한 확장에 직면하여, 여진족을 멸시하면서도 현실주의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는 여진족을 자극하지 않고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며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군사적 대비책 마련에도 힘썼다.41


조선과 여진족의 관계는 초기 영토 확장과 국경 안정화 노력에서 시작하여, 여진족의 성장과 함께 조선의 정책이 회유와 정벌 사이를 오가며 변화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특히 조선의 경제적 지원이 여진족의 군사적 성장을 촉진한 것은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이다.38


VIII. 여진의 청 건국 이후의 상황

여진족의 청나라 건국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기존의 중화 중심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힘의 균형이 형성되는 전환점이었다.


후금 건국과 청으로의 전환

17세기 초, 누르하치가 만주 지역의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했다.14 후금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조선 연합군을 격파하며 요동 지역으로 진출했다.51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여진족'이라는 명칭이 '노예'라는 비칭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모든 여진족을 '만주족'으로 개칭했다.14


청의 지배 정책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장악한 후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다양한 지배 정책을 펼쳤다. 회유책으로는 만주인과 한인을 고위 관직에 함께 등용하는 만한병용정책을 시행하고 52, 명 황실에 제사를 지내고 명 문화를 존중하며 백성들에게 세금을 경감하는 등 한족의 반발을 최소화하려 했다.52 또한 주자학을 정통 교학으로 인정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했다.52


동시에 강경책도 병행했다. 반청 운동을 진압하고, 모든 한족에게 만주족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했으며 52, '문자의 옥'을 통해 반청 사상을 억압했다.52 군사적으로는 여진족의 전통적인 조직인 '니루'를 기반으로 한 '팔기군' 제도를 발전시켜 군사 조직이자 사회 조직으로 활용했으며, 여기에는 몽골족과 한족도 다수 포함되었다.28 또한 군기처를 설치하여 중추적인 정책 결정 기구로 삼았다.52


동아시아 정세 변화

청나라의 건국은 명나라의 멸망(1644년)과 중국 전역 장악으로 이어졌다.28 특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쳐 '강건성세'라 불리는 전성기를 누리며 13, 티베트, 신장, 몽골, 타이완 등을 정복하여 오늘날 중국의 영토를 확정했다.52


조선에 대해서는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군신 관계를 강요하고 조공 체제에 편입시켰다.51 청나라의 등장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과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새로운 국제 체제가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54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다.54


청나라의 건국은 비한족 왕조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만주족의 문화가 중국 사회에 강제적으로 이식되는 등 새로운 형태의 지배와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는 기존의 중화 중심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힘의 균형이 형성되는 전환점이었다.51


IX. 말갈 또는 여진족의 조상 신화 등 한민족과 공통적으로 연관되는 것

말갈-여진족의 조상 신화와 문화적 요소에는 한민족과의 공통적인 연관성이 발견되어, 양 민족 간의 깊은 역사적 유대감을 시사한다.


금나라 시조 신화

금나라의 시조 완안함보가 신라 출신이라는 기록은 『고려사』와 『송막기문』 등 여러 사서에 나타난다.13 금 황실의 성씨인 '아이신 줘러(愛新覺羅)'는 만주어로 '금(金) 부족' 또는 '김(金)씨'를 뜻하며, 이는 신라 왕족 경주 김씨와 연관 짓는 주장으로 이어진다.13 또한 『삼조북맹회편』에는 "여진은 옛 숙신의 나라이고, 원래 고구려 주몽의 후예이다"라고 명기되어 있어 20, 여진족이 고구려와도 혈통적 연결성을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금나라 시조 신화와 청나라 시조 신화 모두 한인(韓人)과 여진(女眞)이 남녀로 결합하여 조상이 되었다는 공통된 서사 구조를 지닌다.57


금나라의 시조 신화에서 신라, 고려, 고구려 등 한반도 국가와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것은, 금나라가 자신들의 정통성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주변의 선진 문명국과 혈연적, 역사적 관계를 의도적으로 구축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혈통적 연결을 넘어 정치적, 문화적 명분 확보를 위한 전략적 서사였다.13


청나라 시조 신화 (만주 건국 신화)

청나라의 시조 신화는 '삼천녀 신화'로 불리는 난생설화의 형태를 띤다.59 백두산 동쪽 부쿠리 산 기슭의 불후리 연못에서 선녀 퍼쿨런이 신령스러운 까치(神鵲)가 물어다 준 붉은 과일을 삼켜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을 낳았고, 그가 만주국을 세웠다는 내용이다.59 이 신화는 고구려 주몽 신화 등 동아시아 전반에 나타나는 난생설화와 유사한 구조를 공유한다.59 만주족의 건국 신화가 동아시아 전반에 나타나는 난생설화의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은, 이들이 주변 민족들과 문화적 교류를 통해 공통된 서사적 요소를 발전시켰음을 시사한다. 이는 민족 간의 심층적인 문화적 연결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59


공통 문화적 요소

한민족과 말갈-여진-만주족은 여러 문화적 요소를 공유한다. 백두산을 영산으로 숭배하는 풍습은 조선, 여진, 만주족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7 또한 수도를 건설할 때 강을 끼고 도읍을 정하는 풍습도 공유한다.7 읍루의 칠성제단 유적과 한민족의 삼신/칠성 신앙의 연관성도 발견된다.61 이러한 공통 문화적 요소들은 지리적 근접성과 오랜 기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공통의 문화적 기반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7


X. 동아시아 유목민족 분류 및 여진족의 특징

동아시아 북방 지역에는 흉노족, 선비족,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등 다양한 유목민족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동아시아사에 영향을 미쳤다.63


주요 동아시아 유목민족

흉노족 (匈奴):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과 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유목 제국을 세웠다.63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실크로드를 장악하며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64 서양에서는 '훈족'으로 알려져 있다.63


선비족 (鮮卑):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발원하여 북위를 건국하고, 이후 수·당 왕조의 지배 민족이 되었다.63

거란족 (契丹): 5세기 이래 요하 상류 지역에 거주했으며, 916년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건국하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다.63 몽골계 유목민으로 분류되지만, 느슨한 부족 연합 형태를 띠어 주변 강대국에 자주 복속되기도 했다.64


몽골족 (蒙古): 징기스칸에 의해 세계 최초의 세계 제국을 건설했으며, '파스 몽골리카'라 불리는 번영을 누렸다.63


돌궐족 (突厥):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하던 투르크계 민족으로, 흉노족의 일파로도 불린다. 6세기 중엽 돌궐 제국을 이루고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66


여진족의 특징 및 다른 유목민족과의 차이

여진족은 다른 북방 유목민족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다.


생활 방식: 흉노, 몽골, 돌궐 등 광활한 초원을 기반으로 한 '순수 유목민족'과 달리, 여진족은 만주의 삼림 지역에 거주하며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에 집중한 '반농반수렵 민족'이었다.26 이들은 순록 방목 및 유목에서 점차 가축 목축과 소규모 농업으로 생업을 변화시켰다.2 이러한 생활 방식은 그들의 사회 조직과 군사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26


사회 조직: 초기 여진족 사회는 부족장이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빈부 격차가 적은 원시 부족 사회의 특징을 보였다.28 그러나 누르하치에 의해 '니루'를 기본 단위로 하는 '팔기군'이라는 군사-사회 통합 조직으로 발전했으며 28, 금나라 시기에는 '맹안모극제'와 같은 이중 지배 체제를 시도하기도 했다.67


문화적 특징:

변발: 여진족의 변발은 머리 앞부분을 밀고 뒷부분을 길게 땋아 어깨에 늘어뜨리는 '퉁구스식 변발'이었다.32 이는 얼굴 양측을 남기는 거란족의 변발이나 몽골족의 변발과는 형태적으로 차이가 있었다.32 변발은 흉노에서 기원하여 북방 민족에 확산된 풍습이지만, 여진족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71

언어: 여진족은 퉁구스어족에 속하며, 몽골어족이나 튀르크어족과는 다른 계보를 가진다.27


정체성 재정의: '만주족'으로의 개칭은 단순히 '노예'라는 비칭을 피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주선'이라는 호칭이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것과 무관함을 강조하며 새로운 통합된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도였다.20 이는 여진족이 단순한 부족 연합을 넘어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20


언제부터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는가

여진족은 1635년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시기에 '만주족'으로 공식 개칭되었다.13 '만주'는 원래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이 자신들을 일컫던 명칭이었다.26 이 명칭 변경은 청나라의 건국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정치적,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XI. 결론

말갈-여진족은 고대 숙신에서 시작하여 읍루, 물길, 말갈을 거쳐 여진, 그리고 최종적으로 만주족으로 명칭이 변화하며 정체성을 재구성해 왔다. 이들은 한반도 국가(고구려, 발해, 신라, 고려, 조선) 및 중국 왕조(요, 금, 명, 청)와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동아시아사의 주요 행위자로 기능했다.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복속하며, 때로는 연합하거나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는 다층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금나라와 청나라의 건국 신화에서 신라, 고려, 고구려 등 한민족과의 연결성을 강조한 것은 정치적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전략적 시도였으며, 조선시대 백정 기원설은 유목민이 농경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의 사회적 갈등과 차별의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여진족은 초원 지대의 유목민족과는 다른 삼림 지역의 환경에 적응하여 반농반수렵 생활을 영위했으며, 이는 그들의 사회 조직과 군사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독자적인 변발 양식과 언어 계보를 통해 다른 유목민족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만주족'으로의 개칭은 이러한 독자성을 강화하고 새로운 제국적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들의 역사는 동아시아 민족 간의 경계가 유동적이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며, 이는 단일 민족 중심의 역사 이해를 넘어선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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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흉노에서 만주족까지 유목민족사 한번에 다보기 (25분 순삭ver.)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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