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선생
고려는 세계 인쇄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특히 목판 인쇄술의 발전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 고려의 목판본 (목판 인쇄술) 기록
고려는 신라의 목판 인쇄술을 계승하여 크게 발전시켰으며, 특히 불교의 융성과 함께 대규모 목판 인쇄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초조대장경 (初雕大藏經):
시기: 11세기 (현종 2년, 1011년)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판각을 시작하여 약 76년 만인 선종 4년(1087년)에 완성된 고려 최초의 대장경입니다.
특징: 엄청난 규모와 정교함을 자랑하는 목판 인쇄물로, 당시 고려의 목판 인쇄 기술이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입증합니다.
현존 여부: 아쉽게도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는 판본이 없습니다. 다만, 당시 인쇄되었던 인경본(印經本, 목판으로 찍어낸 책) 일부가 국내외(특히 일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의: 이 대장경의 제작은 이후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제작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고려의 목판 인쇄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재조대장경 (再雕大藏經) 또는 팔만대장경:
시기: 13세기 (고종 23년, 1236년)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탄 후, 다시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판각을 시작하여 약 16년 만인 고종 38년(1251년)에 완성되었습니다.
특징: 총 8만여 장의 목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에는 정교한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탈자가 거의 없고 글씨체가 아름다워 현존하는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현존 여부: 현재 합천 해인사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의의: 고려 목판 인쇄술의 최고봉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방대한 목판 인쇄물입니다.
그 외 목판본: 불교 경전 외에도 유교 경전, 의학 서적, 역사서, 시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2. 고려의 금속활자 기록 및 유물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목판 인쇄술의 한계(판각의 어려움, 수정의 어려움, 대량 인쇄 시 마모 등)를 극복하기 위해 발명된 혁신적인 기술입니다.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시기: 1234년 기록: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이 책을 금속활자로 28부를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기록은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음을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입니다.
현존 여부: 아쉽게도 현재 『상정고금예문』의 금속활자본 실물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헌 기록만으로도 고려 금속활자의 존재를 확고히 합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
시기: 1239년
특징: 이 책 끝에 진양공 최이가 쓴 발문을 보면, 원래 금속활자본으로 인쇄되었던 것을 몽골 침입으로 유실될까 염려하여 목판에 다시 새겨 인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13세기 중반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현존 여부: 금속활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이를 다시 새겨 인쇄한 목판 번각본(覆刻本)이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번각본을 통해 금속활자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직지심체요절』 (直指心體要節, 약칭 '직지'):
시기: 1377년 (우왕 3년)
특징: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 화상이 엮은 불교 서적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입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1455년)보다 78년 앞서 인쇄되었습니다.
현존 여부: 상·하 2권으로 간행되었으나, 현재 하권 1책(첫 장 결락)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의의: 고려 금속활자 인쇄술의 실체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자 인류 인쇄사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정적인 유물입니다.
실물 금속활자:
고려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몇 점이 전해지지만, 『직지』를 인쇄하는 데 사용된 활자 자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북한 개성박물관에 소장된 몇 점의 금속활자가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의 목판 인쇄술은 대장경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절정에 달했으며, 금속활자 인쇄술은 『상정고금예문』의 기록과 현존하는 『직지』를 통해 그 선구적인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기술은 고려가 세계 기록문화에 기여한 위대한 유산입니다.
중국에서 활판 인쇄술은 이미 11세기 북송 시대에 **필승(畢昇)**이라는 인물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그는 진흙 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하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기록은 송나라의 학자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필승의 진흙 활자는 깨지기 쉽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원나라 시기에는 **왕정(王禎)**이 목활자를 개발하여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현존하는 실물 인쇄본은 찾기 어렵습니다.
금속 활자의 경우, 중국에서 금속 활자 사용이 입증되는 시점은 **명나라 홍치(弘治)·정덕(正德) 연간(1488~1521)**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 화수(華燧) 등이 금속 활자를 제작하여 책을 출판했다는 기록과 실물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때의 금속 활자는 민간에서 이루어졌고, 글자 모양이나 인쇄 품질이 고려의 금속 활자에 비해 미숙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일부에서는 1154년에 지폐 인쇄에 동활자가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증적인 자료는 부족합니다. 또한,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원나라 때인 1341~1345년에 구리 활자본 『어시책(漁詩策)』이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객관적으로 금속 활자본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어서 논란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중국에서 최초로 활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11세기 필승의 진흙 활자이지만, 현존하는 실물 증거를 통해 확인되는 금속 활자 인쇄는 고려보다 훨씬 후대인 명나라 시기입니다. 고려의 『직지심체요절』(1377년)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나의 말: 고려의 금속활자는 활판 인쇄술은 있었으나, 와인 프레스가 없었다고 보면 타당한가?
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는 활판 인쇄술의 원리를 사용했지만, 서양의 '와인 프레스'와 같은 압착 인쇄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활판 인쇄술의 원리
활판 인쇄술은 글자를 한 글자씩 새긴 활자를 조합하여 인쇄판을 만들고, 그 위에 먹물을 칠한 후 종이를 덮어 찍어내는 방식입니다. 고려의 금속활자 역시 이러한 활판 인쇄술의 기본 원리를 따랐습니다. 필요한 글자를 주조하여 활자를 만들고, 이를 조판하여 인쇄하는 방식이었죠.
고려의 인쇄 방식과 서양의 와인 프레스
하지만 인쇄하는 방식에서 서양의 '와인 프레스(wine press)'와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고려의 인쇄 방식: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는 주로 수동식 마찰 압력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조판된 활자 위에 먹물을 칠한 후 종이를 얹고, 그 위에 깨끗한 천이나 말털 브러시 같은 도구를 이용해 문질러서 인쇄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이는 목판 인쇄에서 사용하던 방식과 유사하며,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지만 대량 인쇄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서양의 와인 프레스: 서양에서는 15세기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전시키면서, 포도주를 짜는 데 사용하던 **스크루 프레스(나사 압축기)**를 인쇄기에 응용했습니다. 이 기계는 상하로 움직이는 압력판이 있어, 조판된 활자와 종이를 강하게 눌러 대량의 인쇄물을 균일하고 빠르게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와인 프레스' 방식은 인쇄 효율을 혁신적으로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차이점의 의미
이러한 인쇄 방식의 차이는 동서양 인쇄술 발전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는 금속활자라는 혁신적인 활자를 개발했지만, 인쇄 과정 자체는 여전히 수작업에 의존했습니다. 반면 서양은 활자와 함께 기계적인 압력을 가하는 인쇄기를 발전시켜 대량 인쇄 시대를 열었습니다.
따라서 "고려의 금속활자는 활판 인쇄술은 있었으나, 와인 프레스가 없었다"는 표현은 고려 인쇄술의 특징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쇄기 설계는? 언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인쇄술의 발명가나 선구자는 아니지만, 기존 구텐베르크식 인쇄기를 연구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려는 개선된 인쇄기 설계를 남겼습니다.
시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쇄기 설계를 한 정확한 시기는 그의 코덱스(노트북)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대략 1490년대 후반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대표적인 노트 중 하나인 **『아틀란티쿠스 코덱스 (Codex Atlanticus)』**의 일부 페이지(예: sheet 995 recto)에 이 설계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코덱스의 관련 부분은 1497년경의 것으로 여겨집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태어나기 전인 1450년대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고 상용화했으며, 레오나르도가 10대 때 이미 이 새로운 기술은 이탈리아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다양한 기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의 주요 기술 혁신 중 하나였던 인쇄기가 그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쇄기 설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한 인쇄기는 기존의 구텐베르크식 핸드프레스(수동 프레스)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자동화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돋보입니다.
자동화된 조작: 일반적인 구텐베르크 프레스는 인쇄공 두 명이 필요했습니다. 한 명은 활자판에 잉크를 칠하고, 다른 한 명은 인쇄물을 프레스에 넣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설계는 이 과정을 반자동화하여 한 명의 인쇄공만으로도 작동이 가능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그의 설계에는 레버를 돌리면 나사를 통해 프레스가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커다란 톱니바퀴가 도르래를 회전시켜 종이를 고정한 인쇄판(타이프 새들)을 자동으로 앞뒤로 움직이게 하는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종이를 프레스 아래로 밀어 넣고 빼내는 작업을 자동화한 것입니다.
기울어진 표면: 활자판을 고정하는 부분이 기울어진 표면을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작업자가 더 편리하게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존 기술의 개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완전히 새로운 인쇄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이미 존재하던 포도 압착기나 올리브 압착기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인쇄 프레스를 더욱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개선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활자에 대한 언급 부족: 흥미로운 점은, 레오나르도가 인쇄기의 기계적 개선에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의 핵심 발명품인 금속 활자(movable type)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나 개선 설계는 그의 노트에서 찾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의 관심은 주로 기계적인 작동 방식과 효율성 증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레오나르도의 인쇄기 설계는 그가 얼마나 다양한 분야의 기술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기존의 기술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 끊임없이 개선하려 노력했던 진정한 엔지니어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비록 그의 많은 설계처럼 실제로 제작되어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노트 속에 담긴 아이디어들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성의 증거로 남아있습니다.
질문: 이란의 구텐베르크라는 가차투르 바르다페트와 그의 인쇄기에 대해서 설명하라
이란의 구텐베르크라고 불리는 **가차투르 바르다페트(Khachatur Vardapet, 아르메니아어로는 Խաչատուր Վարդապետ)**는 17세기 아르메니아인 인쇄업자로,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에 최초로 인쇄술을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단순히 인쇄기를 들여온 것을 넘어, 페르시아에서 아르메니아어와 페르시아어 서적을 인쇄하며 문화 및 지식 확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가차투르 바르다페트의 생애와 업적
생몰 연도: 1590년 – 1646년 (대략적인 연도)
신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수도사이자 학자, 인쇄업자.
배경: 17세기 초, 사파비 왕조의 샤 압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중 전략적 목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페르시아 내륙, 특히 이스파한 근교의 신 줄파(New Julfa)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들은 숙련된 상인과 장인들이었으며, 이주 후에도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형성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가차투르 바르다페트도 이 신 줄파 공동체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인쇄술 도입의 계기: 아르메니아는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인쇄술을 비교적 일찍 접했습니다. 16세기 초반부터 베네치아 등 유럽 도시에서 아르메니아어 서적이 인쇄되기도 했습니다. 가차투르 바르다페트는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종교 서적과 교육 자료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직접 인쇄술을 배워 페르시아에 도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인쇄기 제작 및 인쇄 활동
자체 제작: 그는 유럽에서 인쇄 기술을 습득했거나, 혹은 유럽에서 들여온 지식과 도구를 바탕으로 스스로 인쇄기를 제작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기술 도입자를 넘어선 탁월한 장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인쇄기는 목재와 금속 부품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복잡한 기계였습니다.
최초 인쇄: 1636년에 **신 줄파의 반크 성당(Vank Cathedral)**에 인쇄소를 설립하고, 최초로 인쇄한 책은 『요한의 금언록』(Psalter of David) 또는 『선지서』(Prophecies)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아르메니아어로 인쇄되었습니다.
페르시아어 인쇄: 이후 그는 아르메니아어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어 서적도 인쇄했습니다. 이는 페르시아 사회 전체에 인쇄술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페르시아어 서적의 인쇄는 아랍 문자 기반의 활자를 제작하는 난이도 때문에 더욱 도전적인 과제였습니다.
활자 주조: 인쇄기를 제작하는 것 외에도, 그는 인쇄에 필요한 아르메니아어 활자와 페르시아어(아랍어) 활자를 직접 주조했습니다. 이는 금속 주조 기술과 서예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란의 구텐베르크'라 불리는 이유
가차투르 바르다페트가 '이란의 구텐베르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의 인쇄술 도입: 그는 페르시아 땅에서 최초로 인쇄기를 제작하고 사용하여 책을 인쇄함으로써, 페르시아에 인쇄술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구텐베르크가 유럽에서 인쇄술의 혁명을 일으켰듯이, 그는 페르시아에서 유사한 혁명을 시작했습니다.
독립적인 기술 개발: 유럽의 구텐베르크처럼, 가차투르 바르다페트도 외부의 도움 없이 인쇄기를 직접 제작하고 활자를 주조하며 인쇄 공정을 자체적으로 확립했습니다. 이는 그의 뛰어난 기술력과 헌신을 보여줍니다.
문화 및 지식 확산 기여: 그가 인쇄한 책들은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종교적,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어 서적의 인쇄를 통해 페르시아 사회 전반의 지식 보급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글과 지식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의 인쇄기와 기술적 특징
가차투르 바르다페트가 사용한 인쇄기는 활판 인쇄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활자 (Movable Type): 금속으로 주조된 개별 활자를 사용하여 단어를 구성하고 페이지를 조판하는 방식입니다. 아르메니아어와 페르시아어의 복잡한 서체 특성을 고려할 때, 활자 제작은 매우 정교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프레스 (Press): 인쇄판에 잉크를 바른 후 종이를 얹고, 나사나 지렛대를 이용하여 압력을 가해 활자의 글자를 종이에 전사시키는 방식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와 유사한 형태의 프레스였을 것입니다.
잉크 및 종이: 당시 사용되던 전통적인 잉크(탄소 기반)와 종이(주로 뽕나무 껍질이나 식물 섬유 기반)를 활용했을 것입니다.
가차투르 바르다페트의 인쇄술 도입은 페르시아 역사상 중요한 기술적, 문화적 전환점이었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이란에서도 인쇄된 책들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