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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와 삿초 동맹

젬선생

by 조영필 Zho YP

사카모토 료마는 누구인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년 1월 3일 ~ 1867년 12월 10일)는 일본 에도 막부 말기(막말)에 활약한 무사 겸 사업가이자 일본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특히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를 통해 국민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주요 활동 및 업적

탈번 지사(脫藩志士): 도사번 하급 무사 출신으로, 막부 체제에 반대하여 탈번한 후 자유롭게 각지를 떠돌며 개혁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삿초 동맹(薩長同盟):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을 중재하여 막부 타도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메이지 유신의 핵심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구상: 도쿠가와 막부의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제안하여, 피를 흘리지 않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해원대(海援隊) 설립: 일본 최초의 해운회사이자 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는 '해원대'를 설립하여 해운업과 무역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는 훗날 미쓰비시 그룹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중팔책(船中八策) 구상: 새로운 일본의 모습을 구상한 정치 강령으로, 신정부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생애 및 특징

도사 번의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 무사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울보에 겁쟁이였다고 전해지지만, 검술을 익히며 심신을 단련하고 성장했습니다.

서양 문물에 대해 굉장히 진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일본 최초로 서양식 신혼여행을 다녀온 인물이기도 합니다.

에도 막부의 공식 문서에는 그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삶은 훗날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재창조된 부분이 많습니다.

1867년, 대정봉환 약 한 달 후 교토에서 암살당하며 31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일본 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혁신적인 사상과 행동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삿초동맹에 도사번은 왜 없는가?


삿초 동맹은 이름 그대로 **사쓰마 번(薩摩藩)**과 **조슈 번(長州藩)**이라는 두 유력 번이 에도 막부 타도를 위해 맺은 군사 동맹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도사 번(土佐藩)**이 직접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동맹의 핵심 주체와 배경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특수 관계: 이 두 번은 막부 말기에 개혁 세력의 핵심이었지만, 과거 '금문의 변'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해 서로 극심한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삿초 동맹은 바로 이 오랜 앙숙 관계를 해소하고 연합하여 막부를 타도하는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 도사 번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 같은 인물들이 바로 이 두 번 사이를 중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출신 번인 도사 번의 이해관계를 넘어, 일본 전체의 미래를 위한 더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2. 도사 번의 정치적 상황

번 내부의 복잡성: 도사 번은 다른 번들과 달리 번 내부의 상하 신분 차별이 매우 심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 역시 하급 무사 출신으로, 이런 신분 문제와 번의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번을 탈출하여 낭인(脫藩志士)이 되었습니다.


도사 번의 독자적 움직임: 삿초 동맹이 체결된 이후, 도사 번은 독자적으로 막부와의 관계를 조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특히 번의 실력자인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는 사카모토 료마의 대정봉환 구상에 영향을 받아 막부의 쇼군에게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제안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는 것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이양받으려는 도사 번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3. '삿토 맹약'의 존재

삿초 동맹 이후, 사쓰마 번과 도사 번은 **삿토 맹약(薩土盟約)**이라는 별도의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는 삿초 동맹이 체결된 이후 도사 번도 막부 타도 세력에 합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즉, 도사 번이 삿초 동맹에 처음부터 직접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해 협력하게 된 것이죠.


결론적으로, 삿초 동맹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라는 두 주체 사이의 화해와 연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도사 번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 역할은 있었지만 초기 동맹의 직접적인 주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삿토 맹약'을 통해 막부 타도 세력에 중요한 일원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금문의 변은 무엇인가?


**금문의 변(禁門の変)**은 일본 에도 막부 말기인 1864년(겐지 원년)에 교토 황궁 주변에서 벌어진 중요한 무력 충돌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하마구리 어문의 변(蛤御門の変)'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황궁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던 '하마구리 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사건의 배경

금문의 변은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서구 세력의 압박과 내부 개혁 요구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천황을 존중하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사상이 확산되면서, 막부 체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조슈 번의 영향력 상실: 조슈 번(長州藩)은 존왕양이 사상의 중심에 있었으나, 1863년 '8.18 정변'으로 인해 교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 1864년 7월(음력)에 신센구미(新選組)가 교토의 이케다야 여관에서 조슈 번의 급진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습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슈 번 지사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고, 무력으로 교토에 재진입하려는 움직임에 불을 지폈습니다.


사건의 전개

이케다야 사건 이후, 조슈 번은 교토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치적 우위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진군했습니다. 1864년 8월 20일(음력 7월 19일), 조슈 번 군대는 황궁의 여러 문을 공격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황궁 공격: 조슈 번은 황궁의 여러 문 중 하마구리 문을 중심으로 막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의 참전: 당시 막부의 편에 서있던 **사쓰마 번(薩摩藩)**과 아이즈 번(会津藩) 군대가 황궁 방어에 나서 조슈 번을 격퇴했습니다. 특히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앙숙 관계였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조슈 번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교토 대화재: 전투가 격화되면서 교토 시가지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고, 넓은 지역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과와 영향

금문의 변은 조슈 번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조슈 번의 피해: 조슈 번의 많은 지도자들이 전사하거나 할복했으며, 교토에서 완전히 추방당했습니다. 조슈 번은 조정의 역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제1차 조슈 정벌: 막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조슈 번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는 **제1차 조슈 정벌(第一次長州征伐)**을 단행했습니다.


삿초 동맹의 계기: 금문의 변은 훗날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삿초 동맹(薩長同盟)**이 맺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 사건으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적대 관계는 극에 달했지만,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중재자들의 노력으로 막부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손을 잡게 되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금문의 변은 에도 막부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존왕양이 운동과 막부 타도 움직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삿초 동맹을 성공시킨 이유는?


사카모토 료마가 삿초 동맹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뛰어난 통찰력과 비전: 료마는 당시 일본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서구 열강의 압박 속에서 막부 체제로는 더 이상 나라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존왕양이(尊王攘夷)나 막부 타도(倒幕)라는 단편적인 구호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기 위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전은 사쓰마와 조슈 양측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명분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양측 모두 막부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는 가지고 있었으나, 서구 문물 수용이나 정치 체제 개편 방향에 대해서는 미묘한 시각차가 있었습니다. 료마는 이러한 간극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치: 료마는 도사 번 출신이었지만, 번을 탈출한 **탈번 낭인(脫藩浪人)**의 신분이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어떤 특정 번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쓰마와 조슈 양측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강력한 장점이 되었습니다. 만약 특정 번에 소속된 인물이 중재에 나섰다면, 상대방 번의 의심과 경계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료마는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기 쉬웠습니다.


사쓰마와 조슈는 '금문의 변'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해 오랜 숙적 관계였습니다. 이들의 적대감은 뿌리 깊었기 때문에, 단순히 설득만으로 동맹을 맺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료마는 양측 지도자들을 수없이 찾아가 설득하고, 서로의 오해를 풀고, 공통의 이익을 강조하며 끈질기게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등 핵심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통해 신뢰를 쌓았습니다. 그는 양측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점을 명확히 제시하여 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실리적 접근과 무역 배경: 료마는 해원대(海援隊)를 운영하며 무역과 상업 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당시 서구 문물과 기술, 그리고 군수품의 유통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제공했습니다. 삿초 동맹의 실질적인 협력 내용 중 하나는 군수품 교환이었습니다. 조슈 번은 막부로부터 징벌을 받아 무기 수급이 어려웠고, 사쓰마 번은 자체 무기 생산 능력이 있었지만 이를 판매할 경로가 필요했습니다. 료마는 자신의 인맥과 해원대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사쓰마의 군수품이 조슈로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실리적인 이해관계를 엮어줌으로써 동맹의 결속력을 강화했습니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사고: 료마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상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능했습니다. 사쓰마와 조슈가 당장 화해하기 어렵다면, 일단 막부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를 중심으로 협력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먼저 큰 적을 물리치고, 그 다음에 내부 문제를 해결하자"는 실용적인 접근법이 주효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결합되어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동맹 중 하나인 삿초 동맹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료마는 어떤 인생행로를 겪었기에 사츠마번과 조슈번의 실력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는가?


사카모토 료마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실력자들과 교류하고 삿초 동맹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인생 행로와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 그리고 형성된 인맥 덕분입니다.


다음은 료마가 걸어온 주요 과정들입니다.

에도 유학 및 검술 수련 (1853년경부터): 료마는 19세(1853년)에 에도로 유학하여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도장에서 검술을 익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면허개전(免許皆傳)을 받기도 했습니다. 에도 유학 중이던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이끌고 우라가에 내항하는 사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는 료마에게 일본이 처한 위기 상황과 서양 문물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었고, 단순한 검객에서 벗어나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에도에 모인 다양한 번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탈번(脫藩)과 낭인 생활 (1862년): 료마는 도사 번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번 내부의 신분 차별과 보수적인 분위기, 그리고 도사 근왕당의 급진적인 양이론에 한계를 느끼며 1862년에 번을 탈출했습니다. 당시 탈번은 중죄였지만, 그는 소속 번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분으로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상과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시야를 넓히고 특정 번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낭인이 된 후에도 그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생각하며 무력을 통한 막부 타도에는 처음에는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쓰 카이슈(勝海舟)와의 만남과 해군 구상 (1862년 말): 탈번 후 료마는 막부의 해군 부교(奉行)이자 개국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가쓰 카이슈를 만나게 됩니다. 료마는 처음에는 가쓰 카이슈를 암살할 생각으로 찾아갔으나, 오히려 그의 진보적인 개국 사상과 해군력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깊이 감명받아 그의 제자가 됩니다. 가쓰 카이슈는 료마에게 단순히 검술을 넘어선 세계 정세와 해군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료마는 고베 해군 조련소에 입학하여 항해술과 서양식 해군 기술을 배우며 근대적인 시야를 갖게 됩니다. 이 경험은 훗날 해원대 설립의 바탕이 됩니다. 가쓰 카이슈는 료마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가메야마 조합(龜山社中) 및 해원대(海援隊) 설립 (1865년): 고베 해군 조련소가 해산된 후, 료마는 사쓰마 번의 지원을 받아 나가사키에 **가메야마 조합(훗날 해원대로 발전)**을 설립합니다. 이는 일본 최초의 상업 회사이자 사설 해군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습니다. 해원대는 단순한 무역 회사가 아니라, 서양식 무기 및 선박을 조달하고 해운업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며, 필요할 경우 군사 작전에도 참여하는 다목적 조직이었습니다. 나가사키는 당시 일본의 몇 안 되는 개항지였고, 료마는 이곳에서 서양 상인들과 직접 교류하며 국제 정세와 서양 기술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했습니다. 해원대의 활동은 사쓰마와 조슈 간의 군수품 거래를 중개하는 실질적인 채널이 되었습니다.

사쓰마와 조슈와의 개별적인 관계 형성: 료마는 가쓰 카이슈의 추천을 받거나 해원대의 활동을 통해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같은 실력자들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사쓰마 번은 료마의 비전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해원대 설립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편, 조슈 번과는 이케다야 사건과 제1차 조슈 정벌 등으로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지만, 료마는 조슈 번의 지도자였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와도 꾸준히 접촉하며 그들의 개혁 의지를 확인하고 막부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를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인생 행로를 통해 료마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강점을 가질 수 있었고, 이는 삿초 동맹 성공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광범위한 인맥: 막부 측, 존왕양이 지사, 서양 상인, 그리고 각 번의 실력자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과 교류했습니다.


객관적인 시각: 특정 번이나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일본 전체의 미래를 위한 최적의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습니다.


실리적인 접근: 무역과 사업 경험을 통해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군수품 거래와 같은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시대를 앞서는 비전: 무혈 대정봉환과 선중팔책 등 단순한 막부 타도를 넘어선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하여 양측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료마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 과정에서 쌓은 경험, 그리고 형성된 인맥은 그를 사쓰마와 조슈라는 거대한 두 세력 사이의 다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신센구미는 무엇이고 어떤 배경으로 이케다야 사건을 일으켰는가?


신센구미(新選組)는 일본 에도 막부 말기(막말)에 교토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결성된 무장 집단입니다. '신센구미'라는 이름은 '새롭게 선택된 자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센구미의 배경과 결성

막부 말기의 혼란: 19세기 중반 에도 막부 말기, 일본은 서구 열강의 압력과 내부적으로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존경하고 외세를 배척함) 운동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는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활동 거점이자 막부와 반막부 세력의 충돌이 빈번한 곳이었습니다.


로시구미(浪士組)의 형성: 186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가 상경하는 것을 경호하기 위해 막부의 지원을 받아 무사들을 모집하여 '로시구미(浪士組)'라는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는 존왕양이파의 기세가 거세지던 교토의 치안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로시구미는 대부분 각 번을 떠나 낭인(浪士)이 된 자들이나, 하급 무사 또는 농민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신센구미로의 전환: 로시구미의 핵심 멤버였던 곤도 이사미(近藤勇), 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歳三) 등 시위관(試衛館) 일파는 로시구미가 에도로 돌아가자 교토에 남아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이즈 번주이자 교토 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의 휘하에 편입되어 '신센구미'라는 이름을 받고, 교토의 치안 유지와 존왕양이파 숙청을 담당하는 공식적인 무장 조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신센구미는 엄격한 규율과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주로 존왕양이파나 막부에 반대하는 지사들을 색출하고 진압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케다야 사건의 배경

신센구미가 이케다야 사건을 일으킨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존왕양이파의 과격화: 당시 교토에는 조슈 번(長州藩)을 비롯한 급진적인 존왕양이파 지사들이 대거 모여 막부 타도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외국인 습격, 막부 관리 암살, 황궁 점거 등의 과격한 테러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등 교토의 치안을 심각하게 위협했습니다.

'8.18 정변' 이후 조슈 번의 불만: 1863년 '8.18 정변'으로 존왕양이파, 특히 조슈 번 세력이 교토에서 축출당했습니다. 조슈 번은 이에 대한 강한 불만을 품고 교토 재진입과 천황 직소(直訴)를 통해 실지 회복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신센구미의 정보 입수: 신센구미는 교토 시내에 잠입한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동향을 감시하던 중, 이들이 교토의 여관 '이케다야(池田屋)'에 모여 중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교토에 불을 지르고 혼란을 틈타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 주요 인물을 암살하며, 천황을 납치하여 조슈 번으로 데려가려 했다고 합니다. 이 계획은 '야마토 행행(大和行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치안 유지와 명분: 신센구미에게 이케다야 사건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이자 막부와 교토 수호직에 대한 충성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과격한 존왕양이파의 음모를 분쇄함으로써 교토의 치안을 수호하고 막부의 권위를 유지하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864년 7월 8일(음력 6월 5일) 밤, 신센구미는 이케다야 여관을 급습하여 조슈 번 등 존왕양이파 지사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이는 막부 말기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이케다야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8.18 정변은 무엇인가?


**8.18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은 일본 에도 막부 말기인 1863년(분큐 3년) 8월 18일에 교토에서 발생한 정치적 쿠데타를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당시 교토 정국을 주도하던 급진적인 존왕양이(尊王攘夷) 세력을 교토에서 축출하고, 막부와의 협력을 주장하는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가 정권을 장악하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8.18 정변의 배경

존왕양이 운동의 격화: 당시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서구 열강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천황을 존경하고 외국 세력을 물리치자는 존왕양이 사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조슈 번(長州藩)**은 이 존왕양이 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선봉에 서 있었고, 교토에 많은 지사들을 보내 천황을 중심으로 막부를 압박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천황의 양이 칙명: 고메이 천황(孝明天皇)은 외국 세력을 배척하려는 양이론에 강하게 동조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막부에게 양이를 실행하라는 칙명(攘夷勅命)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조슈 번은 이 칙명을 이용하여 막부를 압박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막부의 위기감과 공무합체파의 등장: 막부는 존왕양이 운동의 확산과 천황의 양이 칙명으로 인해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에 막부와 협력하여 서양 세력에 대항하고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 조정과 막부의 협력을 주장하는 세력)'가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막부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천황의 권위를 존중하는 절충적인 노선을 지향했습니다.

조슈 번의 독주에 대한 견제: 조슈 번의 급진적인 존왕양이 정책과 그로 인한 교토 정국의 혼란은 다른 유력 번들, 특히 **사쓰마 번(薩摩藩)**과 **아이즈 번(会津藩)**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사쓰마 번도 존왕양이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슈 번처럼 급진적이지 않았고, 교토에서 조슈 번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정변의 전개

8.18 정변은 아이즈 번의 번주이자 교토 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와 사쓰마 번의 핵심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이 주도했습니다.


비밀 동맹: 아이즈 번과 사쓰마 번은 조슈 번을 교토에서 축출하기 위한 비밀 동맹을 맺었습니다.


황궁 봉쇄 및 조치: 1863년 8월 18일 새벽, 아이즈 번과 사쓰마 번의 군대가 교토 황궁의 주요 문들을 봉쇄하고 경비를 강화했습니다.


존왕양이파 귀족 및 지사 축출: 이들은 천황의 명의를 이용하여 조슈 번을 비롯한 급진적인 존왕양이파의 귀족들(대표적으로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등 7명의 귀족)과 지사들을 교토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조슈 번 병력은 황궁 수비 임무에서 해제되고 교토에서 쫓겨났습니다.


결과와 영향

조슈 번의 실각: 8.18 정변으로 조슈 번은 교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역적의 낙인이 찍힌 채 쫓겨났습니다. 이는 조슈 번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으며, 훗날 조슈 번이 무력으로 교토에 재진입하려 시도하는 '금문의 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공무합체파의 권력 장악: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을 중심으로 한 공무합체파가 교토 정국을 장악하게 되면서, 막부의 권위가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사쓰마-조슈 관계 악화: 8.18 정변은 오랜 라이벌 관계였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사이의 적대감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사쓰마 번이 조슈 번을 교토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삿초 동맹의 간접적 계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으로 인한 두 번의 극심한 대립은 훗날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중재자의 노력이 더욱 절실해지는 배경이 되었고, 결국 막부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삿초 동맹'이 맺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8.18 정변은 막부 말기 교토의 복잡한 권력 다툼 속에서 **급진 존왕양이파(주로 조슈 번)**가 축출되고 **온건파(공무합체파)**가 주도권을 잡게 된 중요한 정치적 사건입니다.



사쓰마번은 왜 존왕양이에 반대했는가?


사쓰마 번이 '존왕양이' 자체에 반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사쓰마 번도 기본적으로 '존왕(尊王, 천황을 존경함)' 사상에는 동조했으며, '양이(攘夷, 외세를 배척함)'에 대해서는 조슈 번과는 다른 현실적인 노선을 취했습니다.


사쓰마 번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적인 배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초기에는 존왕양이와 '공무합체(公武合体)' 지향: 사쓰마 번은 초기에는 천황의 권위를 존중하고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슈 번처럼 극단적인 '즉시 양이'를 주장하기보다는, 막부와 조정이 협력하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공무합체' 노선을 지지했습니다. 이는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국력을 기르고, 최종적으로는 서양 세력에 대항할 힘을 키우자는 실리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의 경험: 1863년, 사쓰마 번은 영국인 살해 사건(나마무기 사건)을 계기로 영국 함대와 직접 충돌하는 사쓰에이 전쟁을 겪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사쓰마 번은 비록 분전했지만, 압도적인 영국 해군의 화력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사쓰마 번의 지도자들(특히 시마즈 히사미쓰,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무작정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양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오히려 서양의 군사 기술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사쓰마 번은 양이론에서 벗어나, 서양 문물을 배우고 군사력을 근대화하는 데 주력하게 됩니다. 비밀리에 유학생들을 영국으로 파견하고, 서양식 무기를 도입하며 자체적인 근대 산업을 육성하는 등 '부국강병(富國強兵)'에 집중했습니다.

조슈 번의 급진적 노선에 대한 견제: 사쓰마 번은 조슈 번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양이론과 막부 타도 노선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조슈 번이 교토에서 천황을 독점하고 막부를 압박하는 방식은 사쓰마 번이 생각하는 '질서 있는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특히 1863년의 8.18 정변에서 사쓰마 번이 아이즈 번과 협력하여 조슈 번 세력을 교토에서 축출한 것은 이러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1864년의 금문의 변에서도 사쓰마 번은 막부 편에 서서 조슈 번을 격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로 인해 사쓰마와 조슈는 극심한 적대 관계로 치닫게 됩니다.

막부 개혁의 한계 인식과 노선 전환: 사쓰마 번은 처음에는 막부와의 협력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막부가 보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효과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하자 점차 막부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됩니다. 특히 제2차 조슈 정벌(막부가 조슈 번을 다시 정벌하려 한 전쟁)에서 막부군이 무능함을 드러내고 조슈 번의 군사력이 오히려 막부를 압도하는 것을 보면서, 사쓰마 번 내부에서도 '막부 타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강경론이 고조됩니다.


결론적으로, 사쓰마 번은 '존왕'에는 동조했으나, '양이'에 대해서는 조슈 번과는 다른 실리적이고 유연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사쓰에이 전쟁을 통해 양이의 무모함을 깨달았고, 서양 문물 수용과 국력 강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우선시했습니다. 또한 조슈 번의 급진적인 행보에 대한 견제 심리도 강했습니다.


그러나 막부가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자, 결국 사쓰마 번도 막부 타도로 노선을 전환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과거의 숙적이었던 조슈 번과 손을 잡는 '삿초 동맹'을 맺게 됩니다.



아이즈번이 교토를 수호하기에는 너무 멀지 않을까?


아이즈번과 교토의 거리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지도를 보면 **아이즈번(会津藩)**의 중심인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에서 **교토(京都)**까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현대적인 교통수단으로도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죠.


왜 아이즈번이 교토 수호직에 임명되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즈번이 교토 수호직에 임명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막부와의 강력한 신뢰 관계: 아이즈번은 도쿠가와 가문(막부를 이끈 가문)의 방계로, 막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유명했습니다.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막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번에게 교토의 치안을 맡기고 싶어 했습니다. 거리가 멀더라도 충성심이 확실한 번이 필요했던 것이죠.


군사적 역량: 아이즈번은 강력한 무사 정신과 우수한 군사력을 가진 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고 급진적인 존왕양이파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 에도 막부 말기에는 각 번들의 정치적 입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교토 수호직이라는 중책을 맡을 수 있는 번은 한정적이었고, 특히 사쓰마번이나 조슈번처럼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거나 막부와 갈등을 빚던 번들에게는 이 임무를 맡기기 어려웠습니다. 아이즈번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막부의 이해관계와 가장 부합하는 선택지였습니다.


거리의 한계점

물론 거리에서 오는 한계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교토와 아이즈번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있다는 것은 병력과 물자의 신속한 이동에 제약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막부는 이러한 물리적 제약보다는 아이즈번의 정치적 신뢰성과 군사적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즈번은 교토 수호직으로서 신센구미와 협력하며 8.18 정변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지만,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지면서 신정부군과 마지막까지 맞서 싸우는 비극적인 역사를 맞게 됩니다.



도쿠가와 가문으로서 교토에 가까이 있었던 번도 있었지 않은가요?


네, 맞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직계 혹은 혈연적으로 가까운, 소위 **신판 다이묘(親藩大名)**라고 불리는 번들 중에는 교토에 훨씬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번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번은 막부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기 때문에, 아이즈 번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을 잠재력이 충분했습니다.


교토 근처의 주요 신판 다이묘 번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번들이 있었습니다.


오와리 번(尾張藩): 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에 위치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를 시조로 하는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였습니다. 교토와 비교적 가까운 도카이도(東海道)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기슈 번(紀州藩): 현재의 와카야마현에 위치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열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를 시조로 하는 또 다른 고산케였습니다. 교토와 오사카와도 인접한 지역에 있었습니다.


미토 번(水戸藩): 현재의 이바라키현에 위치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열한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후사(徳川頼房)를 시조로 하는 고산케 중 하나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교토와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막부 말기에는 존왕양이 사상의 발원지 중 하나가 되면서 복잡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왜 아이즈 번이 교토 수호직에 임명되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즈 번이 교토 수호직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수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중립성과 신뢰성:

막부 말기, 오와리 번이나 기슈 번 같은 고산케는 번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쇼군 계승 문제 등에 얽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막부 말기에는 오히려 이들이 막부의 개혁에 비판적이거나, 자체적인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반면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막부의 입장에서 볼 때, 순수하게 도쿠가와 본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유명했습니다. 정치적 야심보다는 막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성격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교토 수호직은 극도로 민감하고 혼란스러운 임무였기에, 이러한 순수한 충성심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공무합체(公武合体) 노선의 상징성: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어머니는 교토의 구게(公家, 귀족) 출신이었고, 누이는 오와리 번주와 결혼하는 등 조정-막부-유력 다이묘 가문 간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공무합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적합하다는 정치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군사적 역량과 지휘 능력:

아이즈 번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본인도 뛰어난 지휘관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교토 수호직은 단순한 행정직이 아니라, 치안 유지를 위한 강력한 무력을 동반하는 자리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지리적 근접성만으로 중요한 임무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도 막부 말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각 번의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 막부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과 인물의 정치적 중립성, 그리고 군사적 역량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어 아이즈 번이 교토 수호직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