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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일본책

박훈

by 조영필 Zho YP

56/ ... 7세기 후반... 백제 부흥이라는 구실을 앞세워... 당나라 수군에게 백강(현재의 금강 하구) 앞바다에서 참패했다... 약 600년 후인 13세기 후반 몽골이 일본을 침공할 때도 한반도는 그 전진기지였다. 또 300년 후인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으로 한반도에 침략해 조선·명나라군과 7년 동안 참혹한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다시 400년 후인 19세기말 벌어진 청일전쟁 역시 한반도가 주 전장이었다.


57/ ... 일본열도가 지질학적으로 불안한 곳이라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곳이다.


64/ ... 17세기 초 1200만 명 정도였던 인구는 18세기 초 3000만 명을 넘어섰다...


중요한 것은 도시의 인구 비율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에도(100만 명) 이외에도 오사카(38만 명), 교토(34만 명) 등 초대형 도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 5만~6만 정도의 인구 밀집 도시들이 산재해 있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들은 입을 모아 풍족한 물자와 많은 인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경제 사정이 이러하니 문화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던 도시 인구를 기반으로 세련된 도시 문화가 성장했다. 수많은 교육기관 설립과 출판·인쇄업의 발전은 사무라이 나라를 점점 지적인 사회로 바꿔갔다.


72/ 혁명이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준말이다...


73/ ... 감히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가를 역성하여 혁명하다니,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긴 천황가에는 성이 없으니, 바꿀 일도 없지만.


... 대신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유신이라는 말의 출전은 <시경> 대아편大雅篇이다.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새로운 것이다(周雖舊邦 其命維新)."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천명이 옮겨진 것을 말한다... 막말유신기幕末維新期(1850~70년대)에는 유신과 함께 '일신一新'이라는 용어도 많이 쓰였다. 그러다가 유신으로 정착되었다.


74/ 그러나 그 변혁의 폭은 혁명에 버금갔다. 변혁을 주도한 하급 사무라이는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무라이 신분 자체를 없애버렸다. 수백 년간 내려온 번도 일거에 철폐했다(폐번치현廢藩治縣). 농업국가였던 일본은 반세기 만에 세계 유수의 공업국이 되었다. 단 7년 만에 음력은 양력으로 바뀌었다.


77/ 1867년 초 막부의 수장인 쇼군에 새로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오사카성에서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를 장시간 면담했다...


이 대화에서 로슈는 요시노부에게 개국의 방침을 서양 열강에 공지하라고 제안한다...


78/ ... 앞의 대화를 보면 두 세력은 개혁 경쟁만 한 게 아니라 동시에 '개방 경쟁'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자기들의 수도인 가고시마와 하기를 개항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막대한 무역이익이 탐났던 것이다. 이에 대해 로슈는 막부가 선제적으로 이 두 도시를 개항시키고 무역 관리를 독점하라고 제안했다...


이렇게 보면 메이지 정부가 출범 직후 많은 지지 세력의 기대를 배신하고 서둘러 대외 화친을 선언한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개국의 방침을 서양 열강에 공지'하라고 했던 로슈의 생각을 막부 대신 메이지 정부가 실천한 것이다...


84/ 일본 홋카이도 남단 하코다테에 가면 고료가쿠五稜郭라는 성이 남아있다. 1868년 궁정 쿠데타로 천황을 빼앗기고 한순간에 '조적朝敵'이 된 도쿠가와막부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이다...


85/ ... 중과부적,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는 1869년 5월 투항했다(손일,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유신>).


... 천황군 사령관이 구명에 나선 것이다. 이유는 그가 죽이기 아까운 탁월한 인재라는 것이다. 에노모토는 1861년 몇 명의 막부 가신들과 함께 네덜란드에 유학해 무려 5년간 선박항해술, 증기기관, 화학, 국제법 등을 맹렬히 공부했다. 당시 해군과 화학에 관한 한 일본에서 그와 다툴 자는 없었다...


... 에노모토뿐만이 아니라 막부의 유신들이 메이지 정부에서 활약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100/ ... 세종은 한글 창제만 한 게 아니다.


중국의 역법을 소화하여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천문 계산서를 편찬했고 자동 물시계, 해시계를 만들었으며 아악雅樂을 제정했다...


101/ ... 한글 창제는 한자를 더 정확하게 읽기 위한 '발음기호'를 만들려는 동기도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


세종의 최대 목표는 조선을 중국과 다른 '조선적'인 나라로 만드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국'을 조선의 힘으로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메이지 시대 일본의 '문명개화' 같은 것이었다...


102/ ... '전통 수호가 일본 수호'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메이지 정부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오쿠보 등은 '서구화가 일본 수호'라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자의 세력은 '존왕양이'로 대중을 선동했지만, 정작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의 독립과 근대화를 이룬 것은 오쿠보 세력이었다. 돌이켜보면 또한 서양 문물을 배워 '선진국'을 이 땅에 건설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해온 대한민국의 고투도 이 방향과 역사적 맥락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 내내 사대부들은 세종을 조선에 중화 문명의 초석을 놓은 군주로 떠받들었다... 민족주의가 세상을 석권한 근대 이후 한국인들은 세종을 '민족문화의 창달자'로 바꾸어 추앙했다...


세종은 '민족문화'를 창달했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를 따라잡고자 총력을 다하고 그것을 마침내 조선 땅에 실현시켰기에 위대한 인물이다. 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민족적 독자성'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세계 수준의 문명을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던 그 불타는 야망이다. 문명의 수준이 확보되지 않은 '민족적 독자성'이란 우리 민족을 열등한 지경으로 몰아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이 감행했던 그런 노력이 오랜 기간 쌓여갈 때, 우리 민족은 이 땅에 새로운 중화,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105/ 거물 사절단을 맞아 신헌, 강위, 오경석 등 조선 외교관들은 분전했다... "그들은(일본인들은) 조선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선이 쉽게 허락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해리 파크스Harry Smith Parkes 주일 영국 공사의 말은 과장이겠으나... "당시 일본은... 실제로는 교섭이 결렬됐을 경우 조선 정벌을 단행할 능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김종학, <조일수호조교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120/ 1898년은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이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의지하려고 했지만, 독립협회에 집결한 개화파들은 그 러시아마저 밀어내고자 했다. 러시아가 절영도 조차와 군대 주준을 계획하자 독립협회는 종로에 초유의 대중 집회를 조직했다(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여기에슨 서울 시민의 17분의 1인 1만여 명이 운집했다.


121/ 만민공동회는 그 후로도 숭례문, 종로 등지에서 연일 개최됐다... 개화파 지식인뿐 아니라 백정을 포함한 서울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야말로 관민 일체의 개혁운동이었다(한철호, <친미개화파연구>). 개혁파 정부와 독립협회는 기존의 중추원을 개편해 11월 5일 의회를 설립한다는 내용의 중추원 신관제新官制, 즉 의회설립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의회 개원 전날 밤, 즉 11월 4일부터 5일 새벽에 걸쳐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의회 설립을 취소해버렸다... 고종은 2000명의 보부상들과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기습하고 430여 명의 개화파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신편 한국사> 41권).


122/ 1898년의 좌절 이후 이 '1870년대생'들의 행방은 자못 상징적이다. 이승만(1875년생)은 이듬해 1월 투옥되어 5년 7개월을 복역했고, 안창호(1878년생)는 미국으로 떠났다. 김구(1876년생)는 절에 들어갔고, 천주교 신자들의 재판 사건에 간여하던 안중근(1879년생)은 '서울 놈'들의 학정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황재문 <안중근 평전>, 103~5쪽)...


149/ 최근 이승만이 쓴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를 읽었다...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Pearl Buck 여사는 서평에서 "... 미국이 1905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을 수치스럽게 파기했고..."...


150/ 그는 개항 이후 한동안은 일본이 "한국 개화파의 친구"였다고 인정한다(30쪽). 사실 이런 인식은 김구의 <백법일지>에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개항 이후 한국 근대사의 좌절을 모두 일본 탓으로 돌리는 '일본 환원주의'는 수정되어야 한다. 당시를 살았던 최고의 '반일투사'들이 한결같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런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 개화파들을 배신한 것을 시종일관 규탄하고, 미국이 그런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미수호조약에서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길 때는 중재권을 행사하겠다use its good offices고 했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을 집요하게 질타한다...


151/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드넓은 국제정치적 시야다... 그런 거대하고 장기적인 시야에서 한국 독립이란 게 어떤 인류사적 의미가 있는지를 웅장한 어조로 갈파한다...


168/ 일제 치하 조선 민족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와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 작가 상허 이태준은 일갈했다고 한다. "주기율표대로 하라. 연금술은 반대한다."


169/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단단한 논리와 팩트로 무장한 사람일지라도 큰 목소리 한 방에 묻혀버린다. 큰 목소리가 가짜란 게 드러나도 더 큰 소리를 내면 상관없다. 이런 판국에 누가 논리와 팩트에 공을 들이겠는가. '아니면 말고'는 퇴장해야 한다.


172/ 일본의 자유주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은... 식민지를 다 포기하고 무력이 아니라 무역으로 더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일축했다.


179/ 일본이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되어오면서 취한 조선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세기 초중반까지 나타난 태도로 '조선 언급하지 않기'다. 이 시기에 쓰인 많은 세계지리서나 국제정세론에는 조선에 대한 언급이 아주 적다. 그 이유는 "조선은 소국이므로 논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180/ 근대에 와서는 반대로 소국 조선, 후진국 조선을 열심히 언급함으로써 일본의 높은 국제 서열을 입증받으려 했다...


276/ 근대 일본은 철도에 모든 걸 걸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22세에 영국 유학 중, 철도를 목격하고 경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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