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요시타카
18/ 일본 지배층이 물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근대과학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 말기다. 그간의 난학蘭學은 의학과 그에 따르는 본초학, 화학과 역산曆算을 위한 천문학 정도였다...
서구 과학과 기술이 '의사의 난학'이 아닌 '무사의 양학'으로 본격 수용된 것은 1842년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직후부터였다... 도사土佐번의 요시다 도요吉田東洋는 1852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 ... 생각해보면 서양인의 학예에 대한 궁리는 나날이 더욱더 정묘하게 진보하고 있다. 천문, 지리, 역산술도 예전엔 조잡했지만 지금은 정밀하게 진보하고 있다...
20/ ... 막부는 열강의 위협 속에서 1855년 국방 교육과 정보 수집을 위해 양학소(이듬해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로 개칭)를 급히 설립해 서구 군사기술서 수집과 번역에 착수했다. 거의 동시에 서양식 해군 창설을 위해 나가사키에 해군 전습소를 세우고, 네덜란드 해군 사관을 교수로 초빙해 조선 기술과 항해술 교육을 개시했다...
... 1854년에는 오카다 고안의 데키주쿠에서 네덜란드 으학을 배우던 반슈의 의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서양병학 학습을 위해 에도로 떠났다.
21/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 서구 과학기술은 오로지 군사기술 측면에서 습득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근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이 아닌 과학을 통해 인식했다. 그 과학은 증기로 움직이며 강력한 대포를 갖춘 군함, 다시 말해 군사기술로 구체화됐던 것이다.
23/ ... 막부사절단은 1860년에 증기선 포하탄호를 타고 도미했다...
증기선 자체도 그렇지만 파나마 지협에서 경험한 증기차, 미 본토 공장에서 접한 각종 증기동력 기계, 사진을 비롯한 근대 기술에 대해 다마무시(사다유)는 관층 가능한 대로 구조와 기능을 기술했지만 "그 기교의 정밀함, 그저 놀라울 뿐", "그 정밀함, 이해할 수 없다"고 반복할 뿐 원리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포기했다...
25/ 다마무시가 무엇보다 주목한 생력화省力化, 뒤집어 말해 작업 능력은 단순한 기계화가 아니라 증기기관 도입이라는 동력혁명의 성과였다...
포하탄호를 수행한 막부의 군함 간린마루 편으로 함께 도미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도...
26/ 그러나 다마무시와 달리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이미 마스터한 후쿠자와는 <자전>에서 "이학상의 것에서는 조금도 놀랄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후쿠자와가 감탄했던 것은 열을 동력에 사용하고, 전기를 통신에 사용하는 에너지혁명이었다...
27/ 증기기관과 전신기의 등장으로 세계가 '별건곤別乾坤(별세계)'이 됐다는 후쿠자와의 지적은 에너지혁명이라는 서구 근대의 변화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28/ ... 신정부의 중심인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구미의 군대와 직접 싸운 경험이 있었다. 조슈번은 시모노세키전투에서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 연합군과 싸웠고, 사쓰마번은 사쓰에이전투에서 영국군과 싸웠다. 사쓰마는 그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조슈는 완패했다. 그들이 서구 군사력의 우월성을 직접 체험한 만큼 메이지 신정부의 위기감은 상상 이상으로 절박했던 것 같다.
29/ 특명전권대사 이마무라 도모미를 비롯해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츠, 이토 히루부미 등 수십 명 규모의 메이지 정부 사절단은 유신 직후인 1871년부터 2년 가까이 미국과 서유럽 시찰에 나서 그들의 문명을 속속들이 돌아봤다...
35/ 서구 각국이 제국주의로 향해가던 이 시대에 후쿠자와와 구메 등이 본 것은, 과학이 기술에 직결되고 산업 발전과 군사력 강화에 불가결한 요소가 될 뿐 아니라 국가가 과학기술의 진흥과 혁신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점이었다...
37/ ... 1874년부터 집필된 후쿠자와의 <문명론의 개략>에도 "사족이 이재[경제]를 논함은 사군자의 일에 어긋난다면서 이를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고"라고 돼 있다...
41/ "누군가 다이하치구루마大八車(에도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쓰였던 목제 짐수레)와 증기차를 비교하고, 일본도와 소총을 비교하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음양오행의 설을 주창하지만 그들에게는 육십원소의 발명이 있다. 우리는 천문으로써 길흉을 점치지만, 그들은 이미 혜성의 력曆을 만들고, 태양태음의 실질을 연구한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평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들은 그것이 둥글고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개략>의 개탄이야말로 메이지 초기 후쿠자와가 솔선해서 물리학-당시 용어는 '궁리학'- 계몽에 힘쓴 이유였다.
48/ 단순한 계몽서 출현을 넘어선 이 특이한 붐을 거쳐 에도 '양학'의 유산은 상당히 부풀려진 형태로나마 대중화됨으롰 막부 금제禁制의 비교秘敎에서 신시대의 교양으로 탈바꿈했다. 도쿠가와 막번 체제가 붕괴한 이후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모르던 유신 직후의 짧은 에어포켓(침몰한 선박의 선체 내에 공기가 남은 공간으로 여기서는 불안한 상황을 나타냄-역주) 시대에 민중은 서구 근대과학 사상의 세례를 받아 자연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며 그 지식에 근거해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지금까지 익숙지 않던 자연관과 자연에 대한 대처방법을 피상적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메이지 신정부가 추진한 '식산흥업·부국강병'의 회로로 민중을 유인하는 정지작업이 됐다.
51/ 서구 중세에서 문자 문화는 오로지 라틴어로 표기됐고, 아카데미즘 학자와 교회 성직자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인쇄 서적 출현과 종교개혁 영향으로 속어의 국어화 움직임과 함께 성직자와 대학 지식인의 문자 문화 독점에 구멍이 뚫렸고, 직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속어 서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는 '16세기 문화혁명'이라고 할 지적 세계의 지각변동이었다. 이런 변동에 호응해 아카데미즘 내부에서도 수작업을 꺼려하지 않고, 실험장치를 조립해 관찰과 측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유형의 학자들이 등장했다. 갈릴레오나 토리첼리, 훅이나 보일 등으로 이들에 의해 관측과 실험에 근거한 실증과학이 등장했다. 이것이 '17세기 과학혁명'이다.
55/ ...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도 "학문과기술의 상호 의존 관계는 19세기 후반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56/ 일본이 서구의 기술에 눈을 뜬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58/ 서양에서는 대개 기술이란 기술은 극히 일상적인 것까지 모두 과학 이론, 특히 물리학에 근거해 형성됐다고 후쿠자와는 간주했던 것이다...
60/ ... 후쿠자와에게 서구에서 태동한 과학 이론의 진리성과 우월성을 담보하는 것은 실제적 응용 가능성과 현실성 그 자체다. 실용성에서 가치를 찾는 이런 학문관 자체가 메이지 초기 일본이 서구 과학을 수용하는 기조였다.
61/... 이는 일본이 근대화에 재빨리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일본 근대화의 바닥이 얕은 원인이기도 했다.
서구 기술을 과학기술로 인식한 메이지 일본은 과학을 기술을 위한 것, 즉 기술 형성의 묘방쯤으로 왜소화하지만, 반대로 기술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합리적이고 강력·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63/ 중세적인 자연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계기는 17세기 서구 근대 자연과학의 탄생이다... 돌멩이는 쿵 하며 낙하하지만, 나뭇잎은 하늘하늘 춤추며 떨어진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 보는 그대로의 현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머릿속에서 자연을 재구성했다...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공기저항이나 마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공기가 없는 세계를 본 이는 없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속도와 동시에 증가하는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경사면을 이용해 속도 증가의 비율을 작게 유지하고, 마찰의 영향을 없애기 위해 금속 구체를 만들었다...
65/ ... 18세기 철학자 칸트는 갈릴레오의 낙하물 법칙 실험을 들어 "근대과학은 갈릴레오에 의해 시작됐다"고 했다...
68/ 19세기 과학기술은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있다는 근대과학의 입장에 기반한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러한 환상은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비대해졌다...
바로 이 시대에 일본이 서구 과학기술과 마주친 것이다...
70/ 후쿠자와 자신이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환상은 이후 150년에 걸쳐 일본을 옭아매게 된다.
95/ 물리학도 그렇지만 기술에서도 일본이 비교적 단기간에 서구기술 습득과 이전에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96/ 오히려 일본은 후발국인 만큼 증기기관을 예로 들면 세이버리와 뉴커먼의 대기압 기관에서 시작해 와트에 의한 개량, 19세기 전반의 증기기관차와 증기선 같은 다방면 응용에 이르는, 1세기를 넘는 영국의 모색과 시행 과정을 건너뛰었다. 즉 결말부터 습득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런 의미에서 유리한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진국에서 기계 수출의 제한은 없었고, 일본은... 모든 선진국으로부터 최신 기계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었다"는 사정도 있었다.(스즈키鈴木 1996) 한 술 더 떠 "선진국은 완성된 기계 기술을 일본에 판매하는 것에 열심"(우치다內田 1974)이었을 정도였다.
97/ 결정적인 차이 혹은 늦었던 것은 민간의 자본 축적이 너무도 빈약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는 당장의 거의 100% 정치권력 주도로 추진됐고, 군과 관료기구가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됐다...
103/ 그러나 일본 제사업의 근대화와 발전은 외국 기술의 도입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고 100% 정부 주도였던 것도 아니다...
105/ 제사업과 달리 방적업(면사방적업)은 메이지 중기에 급성장했다...
109/ 결국, 일본 메이지 시대 기계공업 발전은 군의 근대화가 이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입된 최신예 플랜트의 저변에 재래의 의욕적인 직인들이 수입된 기계를 모델로 인력이나 수력 구동, 목재 내지 일부 금속제의 비교적 저렴하고 재래 직인이 사용하기 좋은 양화洋和 절충의 기계, 또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형화된 모방품을 만들어낸 데 있다. 또 이런 국산 기계 제조 혹은 수입 기계 부품 제조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이 지방도시에 속속 생겨난 것에 의해 달성됐다. 이 점은 특별히 강조돼야 할 것이다.
130/ ... 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성공'과 '기적'은 개국과 근대 과학기술 습득 개시의 적시성,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진취적 경영자의 출현, 에도 시대 이래 민중의 높은 문자해독률, 능력도 의욕도 있던 사족의 자제가 능력을 발휘토록 한 효과적인 교육제도의 형성, 재래 직인층 내부 '풀뿌리 발명가'의 탄생 등을 원인으로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농촌 노동력의 가혹한 수탈과 농촌 공동체의 무참한 파괴도 불가결의 요인이 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37/ ... 일찍이 '문명개화'를 열심히 설파해온 후쿠자와는 1882년 <조선의 교제를 논함>에서... 조선의 친일개화파에 대한 지원을 주장했다. 그러나 개화파가 패배한 뒤인 1885년 <탈아론>에서는... 지나와 조선은 "고풍구습에 연연"할 뿐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들이 이 두 나라를 보면, 지금의 문명동점 풍조에서 도저히 독립을 유지할 방도가 있지 않다"고 단정했다.
138/ 후쿠자와는 이 시점에서 중국, 조선의 근대화가 가망 없다고 단념한 것이다. 이런 자타에 대한 현상인식에서 나온 결론이 '탈아입구'였다.
153/ 일본은 청일·러일 전쟁 승리로 만주의 이권을 손에 넣고, 조선을 식민지로 획득해 제국주의 국가가 된 시점에서 산업혁명도 달성했다...
174/ 제1차 대전은 최초의 과학전으로 불린다. 첫째 당시 최첨단 고도 과학기술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사용됐다는 점, 둘째 과학자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175/... 독일에서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한 프리츠 하버와 후일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는 오토 한 등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일류 화학자들이 모두 독가스 연구에 종사했다. 영국에서도 조셉 존 톰슨과 어니스트 러더퍼드 같은 초일류 물리학자들이 무선전신과 잠수함 탐지 등 군사 연구에 종사하며 모두 '유능함'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전쟁 직전까지 서구 각국의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국제 협력이 이뤄졌다...
176/ ... 물리학자인 데라다 도라히코寺田寅彦는 당시 일본에서 '구주대전'으로 불린 대전의 말기인 1918년 수필 '전쟁과 기상학'에서 "구주대전이 시작된 이래 모든 과학이 징발됐다"고 했다...
191/ 서구에 비해 크게 뒤처진 일본 자동차산업의 성장을 촉진한 것은 시장 원리가 아니라 군사 요인이었다. 육군은 자동차에 "집념을 불태웠던" 것이다.(마카오카中岡 2013)...
192/ 결국 일본에서는 자동차산업도 항공기 생산도 무기 생산 차원에서 육성됐던 것이다...
203/ 1930년대 초 자본주의 각국이 세계 공황에 시달린 반면 소련에서는 일국사회주의 계획경제하에서 1928년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이 나름대로 성과를 보이자 자본주의 국가는 일국 사회주의의 계획경제를 모범으로 국가의 경제 개입을 강화했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나치즘), 미국의 뉴딜, 일본의 통제경제가 그것이다...
217/ 이 배경에는 급속히 파시즘으로 기울어가던 쇼와의 역사를 들 수 있다. 1928년 3·15와 1929년의 4·16 등 두 차례에 걸친 공산당원 일제검거, 1930년 5·20의 미키 기요시三木淸 등 공산당 동조세력 검거 같은 일련의 탄압으로 좌익이 힘을 잃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륙에서 군이 폭주하던 1, 2년간 일본사회는 일거에 우경화했고 광신적인 우익 국수주의가 세력을 확대했다...
219/ ... 천황과 국체를 내세우면 어떤 부조리도 당당히 통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254/ 미타니 다이치로三谷太一郞는 최근 저서 <일본의 근대란 무엇이었던가>에서 "당시 일본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대국 소련의 경제 건설 과정에서 단련된 가장 실용적인 계획경제 이론으로 간주됐다"고 했다. 통제경제는 이런 입장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됐던 것이다...
268/ ... 이렇게 해서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전반의 총력전 체제에 의해 사회관계의 평등화, 근대화, 현대화가 진행됐다'(아메미야雨宮昭一 2008)
이는 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內靖가 말한 "전시동원 체제warfare-state와 복지국가 체제welfare-state의 동일성이라는 패러독스"다...
280/ ... 야마노우치가 말하듯 "미 점령군 권력은 실제로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정비된 일본 중앙집권적 관료기구와 서로 긴밀히 연계했고... 민주화를 향한 움직임을 일그러뜨렸다"는 것이다...
287/ ... 일본군은 중국 대륙의 진흙탕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전에서 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일본은 중국에 대한 패배에는 눈을 감고, 동시에 아시아 침략의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외면한 것이다...
298/ 경제학자 나카무라 다케후사中村隆英는 책에서 "전시에 만들어진 여러 제도가 그대로 전후 경제제도로 계승됐고, 전시에 발전한 산업이 전후 주요 산업이 됐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내무성 외에는 거의 상처 없이 살아남은 관료기구다... 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전후판 총력전이었다.
299/ 이를 가능하게 한 국내 조건으로 첫째, "1920년대에 시작돼 전시에 급속히 추진된 중화학공업이 전후 생산의 기조가 됐다...
둘째로 전시하 과학 동원과 이공계 붐으로 급팽창한 군사 부문에서 성장·축적된 기술과 기술자층의 존재다...
301/ 세 번째, 전전부터 교육 수준이 높았던 노동자층과 전후의 급속한 인구증가를 들 수 있다...
... 당시의 국제 환경도 그만큼 중요했다. 전후 경제성장의 외적 조건으로는 미 점령군이 배상 보류 내지 연기 조치를 취한 것, IMF·GATT 체제하의 국제교역 확대 흐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가격 대폭 인상에 따른 제1차 오일쇼크(1973년) 이전까지 석유값이 매우 저렴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그와 함께 혹은 그 이상으로, 다음의 사실이 중요하다. 1950년대 일본 본토가 부흥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키나와가 미 군정에 편입되면서 섬 전체가 군사기지가 됐고, 한국에서 미군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군사정권이 존재하고 있었던 데 있다. 미 점령군이 일본을 비군사화·민주화한 것은 '성공한 점령'의 흔치 않은 예로 종종 거론되곤 하지만, 이는 오키나와와 한국에서 미군 또는 독재정권에 의한 가혹하고 비민주적인 군정 지배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군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303/ 한국전쟁 특수야말로 일본 경제가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이다... 1950년부터 5년간의 특수로 일본에는 30억 달러가 유입됐고...
고도성장이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 철강, TV 수출의 호조세와 함께 1965년 본격화된 베트남전쟁 특수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과 베트남 인민들을 살육하기 위한 많은 무기가 '평화헌법'이 지배하는 일본에서 제작됐다...
304/... 그러나 1948년 "미국의 대일정책은 배상보다 '경제안정'으로 크게 변경"됐고, 그 결과 "잠재적 군사공업의 대부분은 파괴와 철거를 면하게 된" 것이다.(고야마小山 1972)...
306/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휴전에 들어갔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창설된 경찰예비대가 1952년 독립 뒤 보안대로 바뀌었다. 또 방위청(현 방위성)이 설치되면서 자위대로 바뀐 것이 1954년 7월이다...
310/ 전후의 항공기산업은 자위대에 의존해 부활을 달성한 것이다...
311/ 이렇게 해서 일본은 고도성장과 더불어 세계 유수의 기술대국이 됐지만, 그와 동시에 선진적인 군사기술을 보유하며 잠재적 군사대국이 돼갔다...
315/ 이렇게 해서 일본은 1968년에는 GNP가 미국에 이어 자유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메이지 100년을 맞아 대량 생산·판매·소비 사회가 된 것이다... 1970년대에는 세계 2위의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1960년대 중기에는 '3종의 신기'로 불린 TV와 냉장고, 전기세탁기가 대부분의 가정에 구비됐다... 1960년대 말에는 '3C'로 불린 쿨러(에어컨-역주), 컬러TV, 자동차도 많은 가정에 보급됐다. 마이카의 보급은 도로 포장이 그만큼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1950년대 중기만 해도 그것들을 갖추는 것은 일본인에게 꿈같은 얘기였다.
332/ 공해 소송이 일제히 시작되고, 고도성장이 일본 전역에서 공해를 유발했다는 점이 명백해지던 1960년대 말은 패전 때도 상처 없이 살아남은 '과학기술 성선설'과 '성장신앙'을 재검토해야 할 시기였다. 1968-1969년에 벌어진 학원 투쟁은 그것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335/ ... 공해 규제가 느슨한 국외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일본은 자본을 공해를 끼워 수출한 것이다. 이는 '전시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전후 복제'라고까지 할 수 있다.(쓰루미鶴見 1982)
336/ 덧붙여 일본은 대일 무배상을 원칙으로 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이의를 제기했던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현 미얀마), 남베트남 등 4개국과 과거 전쟁에 대한 배상 협정을 맺어 1976년까지 총액 10억 달러 남짓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하지만 지불은 현금이 아니라 공장과 발전소 건설, 항만과 철도 등 인프라 건설공사 서비스, 또는 기계와 플랜트 제공 방식으로 행해졌고, 이후 일본 기업 및 상품의 동아시아 진출 거점이 됐다. 전시 아시아 군사 침략에 대한 배상이 전후 아시아 경제 진출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340/ 실제로 지금의 많은 노동자들은 결혼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다... 미즈노 가즈오水野和夫의 책에 있듯이 "기술혁신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21세기에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재 일본 정부와 재계가 획책하고 있는 것이 원전 수출과 '경제의 군사화', 즉 군수 생산의 확대와 무기 수출이다...
387/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대책의 특단의 카드로 시작한 동토차수벽에 대해 2016년 여름 완전히 동결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녹아내린 핵연료의 상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완전히 '속수무책'인 것이다.
388/ 반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발생 직후 6년 넘게 지난 지금도 도무지 방법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