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성술

나카야마 시게루中山茂

by 조영필 Zho YP

19/ 고대에는 점성술은 제왕의 학이었다...


오늘날처럼 생물과 무생물의 구별을 똑바로 알지 못하였던 원시미개인의 마음에는 나무도 돌덩이도 모두가 살아있는 것, 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더우기 천체와 같이 빛나고 천공에서 움직이는 것은 당연히 살아있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20/ 그러나 미개인의 신화전승에는 별의 관측에 관한 것은 의외로 나오지 않는다. 석기시대에는 천체관측의 필요도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즉 어느 정도의 문명이 이루어진 곳이 아니면 천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천문학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하였다든가, 원시인은 우주에 대하여 굉장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현대인의 향수나 동화취미에 의한 과대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점성술도 마찬가지여서 일련의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일부 엘리트가 갖는 정도의 높은 지식이었다. 즉 별의 지식과 천체신앙은 잡다한 민간신앙보다 고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점성술로서 정리된 지식은 星辰신앙보다 더 고상한 것이었다.


... 프로클루스Proclus(410?-485)를 비롯하여 고전그리스나 헬레니즘시대의 저술에는 점성술이나 마술은 모두 바빌로니아(칼데아 Chaldea)로부터 흘러왔다고 써 있다. 그러므로 바빌로니아는 <동양의 신비>의 근원이고 종가이며, 점성술은 그의 전매특허라고 서양문명 속에서는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금세기에 들어와서 설형문자에 대한 해독이 활발하여지자 그 문헌의 거의가 금전상의 문제에 관한 것이고, 점성술에 대한 것은 극히 적다는 것이 알려졌다...


21/ 설형문자의 해독이 진행됨에 따라서 이 시적 공상은 환멸을 맛보게 되어 오늘날에는 '범바빌로니아주의'의 신봉자는 거의 볼 수 없다. 문헌으로 입증되는 한도에서는 체계적인 바빌로니아 천문학, 점성술을 볼 수 있는 시기는 기원전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고, 겨우 기원전 7세기쯤부터 체계가 선 경험적 지식의 집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기원전 5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바빌로니아의 천문학, 점성술은 절정에 달하였다.


22/ 중국에서도 바빌로니아와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바빌로니아보다는 조금 늦고, 기원전 4세기 쯤에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문관측기술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과학적'이란... 원시민족의 신화전승적, 주술적인 사고방법에서 벗어난 '의식적으로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하여 두자...


중국의 점성술이 체계가 서 있는 지식이 된 것은 아마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기원전 100년 경에 씌어진 사마천의 <사기> 안의 '天官書'라는 장에는 벌써 중국 점성술이 잘 체계화되어 있다. 이것을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 씌어있는 점성술[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B.C. 669-626)왕의 도서고에서 나온 기원전 7세기 경의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매우 닮은 점이 있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서 비교하여 보자.


(1) [바빌로니아]

화성이 역행운동을 한 후에 전갈자리에 들어가면 왕은 조심하여야 한다. 이 날은 심히 나쁜 날이므로 왕은 궁전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중국]

화성이 角宿에 들면 전쟁이 일어난다. 房宿이나 心宿에 들면 왕에게 불리한 일이 생긴다.


(2) [바빌로니아]

화성이 금성의 왼쪽에 오면 아카드Akkad 市街가 황폐하게 된다.

[중국]

화성이 금성을 쫓아가고 있을 때는 군대에 소통이 일어나고 土機가 침체한다. 화성이 금성을 아주 벗어나면 군대는 퇴각한다.


(3) [바빌로니아]

화성이 달의 宮에 있고, 그때 월식이 일어나면 왕은 죽고 그 나라는 좁혀진다.

[중국]

달이 大角星의 옆에서 食이 되면 황제에게 나쁜 결과가 온다.


(4) [바빌로니아]

수성이 금성에 접근하면 왕의 권력은 강하여지고 그의 적을 압도한다.

[중국]

수성과 금성이 東天에서 접근하고 둘 다 붉게 빛날 때는 외적은 대패하고 중국군은 승리를 얻는다.


이와 같은 예는 그밖에도 많다.


23/ 이들은 모두 일월식, 달무리, 여러 행성의 이합집산, 혜성의 출현 등 하늘의 이상현상을 가지고 직접 천하국가의 대사, 수확, 홍수, 한발, 폭풍이나 왕의 죽음, 반란, 군사 등을 점치는 것이다. 그 방법은 天變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천변점성술이라고 부른다. 예언이란 복권이 당첨될까 안될까, 어여쁜 연인을 만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개인의 조그마한 소망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한 나라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제왕만이 쓰는 제왕학의 첫째 단계이다.


우리가 말하는 '天文'이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겠다. 천문이란 현대의 과학적 천문학과 달라서 본래 '천변점성술'을 가리킨다. 중국의 대대의 왕조사에 있는 <천문지>의 장에는 처음에는 우주론에 관하여 조금 씌어있지만, 대부분을 '천변'의 연대기적 기록에 충당하고 있다. 오늘날의 천문학에 해당하는 과학적, 수학적인 부분은 曆學이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천문과 역학과는 보통 같은 사람이 겸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점성술자라고도 천문학자라고도 부를 수 있다. 또 <五行誌>는 주로 '地異'를 기록하고 있다.


24/ 천변점성술은 경험주의에서 출발하였다.

고대인에게는 천둥과 번개와 같은 기상현상과 일월식이나 혜성의 출현과 같은 태양계 안의 천문현상을 구별할 만한 의식은 없다. 지진조차도 하나의 천변이라고 보기도 한다. 대낮에 눈깜짝할 사이에 태양이 까맣게 되는 일식을 보고 고대인은 지진이나 천둥 이상으로 놀랐을 것이다. 그 놀람을 말로 전하여 내려오고, 문자를 가졌으면 이것을 기록한다.


때마침 외적이 쳐들어왔다고 하자. 天災와 人災를 구별할 수 없었으므로 누구나 일식이 외적을 끌어 들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일식이 일어나면 또 외적이 쳐들어 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25/ ... 별자리는 언제나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항상 움직이고 있는 천체가 있다. 행성이 그것이다. 그래서 행성에 대하여 주의를 하게 된다. 행성과 행성이 어떤 별자리에서 접근한다는 것을 천변의 한 사항으로 간주하게 된다.


한편 땅위의 현상도 지역성이 문제가 된다... 그러면 이 별자리는 그 지방에 관계된다고 하는 지리적 대응이 생기게 된다. 이 地理점성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 옛부터 발달하였다.


26/ 이리하여 어느정도 경험적 지식이 쌓인다. 어떤 별자리에 어떤 천변이 일어났다. 이때 점성술사는 마치 오늘날의 판사가 과거의 판례를 찾아보듯 그때까지의 기록을 조사하고 이 천변은 지상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한다.


... 17세기에 뉴튼이 중력법칙을 제출하였을 때, 서로 떨어진 두 물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손-보이지 않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것은 摩訶불가사의한 힘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비과학적이라는 반론이 매우 강하였다...


17세기 초에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사용하여 처음으로 태양의 흑점을 발견한 이래 전문적인 천문학자도 흑점에 관하여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점의 활동상황, 그 수가 10년 남짓한 주기로 변화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19세기 중엽인 1843년 도이칠란트의 아마추어 천문가 슈바베Heinrich Samuel Schwave(1789-1875)이다. 그는 43년간이나 매일매일 흐린 날과 병이 났을 때 외는 꾸준히 태양의 흑점의 수를 세어보고 이와 같은 성과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한편 같은 시대에 훔볼트Friedrich Heinrich Alexander von Humboldt(1769-1859)가 1828년에 시작한 지자기의 국제적 공동연구의 성과가 거두어지고 1851년에는 지자기에도 10년 남짓한 주기적 변화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을 흑점주기와 비교하여 보면 그 변화의 위상이 전적으로 일치한다... 天과 地의 법칙이 순경험적으로 결부된 것이다.


27/ 흑점활동은 태양의 복사량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이 흑점주기를 땅위의 기상과의 관계를 알아보려는 시도는 1901년에 윌리엄 허셀Sir William Herschel(1738-1822)이 처음으로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직 기상통계의 종합된 기록은 없었으므로 별 수 없이 매년 밀의 時勢에 관한 기록으로 代用하였다. 흑점이 많은 때에는 태양의 복사량도 많아지고, 따라서 밀이 풍작이 되어 그 시세는 떨어진다고 그는 예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게 흑점과 풍작과의 상관관계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오늘날에도 흑점주기가 暖冬이변과 같은 기상의 장기변화에 관계된다든가, 수목의 나이테에 그 영향이 나타나든가, 청어의 어획고에도 관계된다든가 등등 말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천변점성술과 같은 방법에 의하여 경험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 '경험주의'가 천변점성술의 큰 특징이다.


천변점성술은 동양적 전제주의 아래서 발달한다.

바빌로니아와 중국에 동양적 전제주의가 발달한 것은 대규모적인 치수사업을 필요로 하는 관개농경과 외적방어를 위한 군사력의 필요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28/ 천변은 신의 계시이다. 이 '하늘에 적힌 문자'를 읽고 신의 뜻을 인간에 전하는 術이 점성술이다. 중국에서는 바빌로니아의 신관념과 다소 다르지만, 신 대신에 天은 절대이다. 천자는 천의 의지를 대행한다. 천변은 천의 의지의 표현이므로 그는 재빨리 이것을 알아차리고 그 의지에 따르도록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


... 점성술사는 최고정치고문이다... 그들의 궁정 안에서의 발언권과 권력은 보통 관리와는 달리 월등한 것이었다.


29/ 점성술을 이용한 군주비판

... <前漢書>에 나타난 천변기록의 통계를 잡아보면 군주의 代에 따라 그 빈도가 다르다... 다른 해석을 한다면 점성술은 천변을 핑계로 천변의 수를 적당히 가감하여 늘리거나 줄여 간접적으로 천자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32/ 천변점성술은 일국의 최고 기밀이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비밀은 大神官 외는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33/ 중국에서는 사관(역사가=점성술사)은 반드시 세습이었던 것 같지 않지만 천변점성술에 관한 서적은 門外不出이었고 함부로 私用에 쓰면 엄벌에 처해졌다. 또 군주에 상주하는 보고서는 밀봉하여 제출하는 것이 상례였다...


35/ 경험적 방향과 도그마적 방향

... 경험주의적인 천변점성술은 지식이 조직화함에 따라서 두 방향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그중 하나는 경험주의적 발전으로 과학, 천문학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도그마dogma적 발전으로서 자연철학적 해석의 방향이다.


36/ ... 천변에 관한 기록은 천문지, 기상사의 자료가 되고 지상의 사건은 왕조사, 군사사, 재해사의 기본적 자료가 된다... 오랫동안 자료가 누적되면 그 사이에 규칙성이 발견되는 것이 있다... 일월식 같은 것도 얼마 안가서 주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는 근대천문학에서 말하는 혜성의 회귀성과 유성우의 주기성도 알게 된다...


38/ 천체운행의 규칙성은 먼저 曆에서

... 달의 삭망이 29일이나 30일의 주기로 생긴다는 것은 일찌기 고대인도 알고 있었다. 사계절의 변동, 즉 1년의 길이를 정하려면 막대(gnomon)를 세워서 그 그늘의 길이가 가장 짧아졌을 때, 즉 하지의 정오에서 다음해 하지의 정오까지의 일수를 세어보면 된다...


39/ 이와같이 하여 曆이 생긴다... 달의 삭망은 밤중에도 이동하는 유목민에게는 중요하다... 그보다도 그해의 기상상황이 더 중요하다...


정확한 曆이 필요하였던 것은 문명이 다소 발달되어 지배계급의 종교적/정치적 의식에 역을 쓰면서부터이다. 즉 作爲의 문화가 역을 필요로 한다. 신하를 궁정에 모아놓고 달맞이 잔치를 베풀 때 만월인 줄 알고 기다렸더니 떠오른 것이 그렇지 못하였다면 난처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천자의 권위에 관한 일이다...


40/ 일월식도 예보되다

'천변'으로서의 인상이 강한 것은 무엇보다도 일월식일 것이다. 천변점성술의 조직적인 기록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 기록은 풍부하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B.C. 100-70)의 <알마게스트Almagest>에 기록된 바빌로니아의 기록은 기원전 721년, 그리고 <左傳Tso chuan>에 남은 중국의 기록은 기원전 720년 경에서 시작된다.



행성의 운행은 밤마다 보이는 현상이므로 비교적 빨리 그 운행의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일월식은 돌발사건이어서 연속적으로 관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규칙성도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일월식의 기록이 모아지면 그 기록에서 어떤 규칙성을 알게 된다. 우선 일식은 新月 때에, 월식은 滿月 때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양과 달의 운행을 지상의 관측자가 관찰할 경우 이 두 천체가 같은 방향에 오면 신월, 정반대에 오면 만월로 된다. 그러나 만월과 신월 때에는 언제나 일월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은 경험에 의하여 잘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달이 움직이는 白道와 태양이 움직이는 黃道가 그림 4와 같이 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까닭이며 이 두 길의 교점에 달과 태양이 오지 않으면 食이 되지 않는다. 달의 삭망이 223회 있는 동안에 달은 황도와 거의 242회 만난다. 이것을 사로스주기Saros period라고 말하며 바빌로니아인이 기원전 6세기 경에 발견한 것으로 이 기간의 처음에 식이 있었다고 하면 1사로스주기를 지난 후에도 같은 식이 나타나게 된다. 즉 이 주기(6585.3일)로 일월식이 반복된다.


달의 위상 변화 주기(삭망월)와 달이 황도(지구 궤도면)를 통과하는 주기(교점월)는 서로 다르지만, 이 두 주기가 정수 배에 가깝게 일치하는 시점이 바로 사로스 주기입니다.

삭망월Synodic Month, 달의 모양이 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또는 삭에서 다음 삭)로 변하는 주기 = 약 29.53059일 : 223 삭망월 = 223×29.53059일≈6585.321일 (18년 11일 8시간)

교점월Draconic Month, 달이 황도면을 한 번 통과한 후 다시 같은 방향의 교점(노드)으로 돌아오는 주기 = 약 27.21222일 : 242 교점월 = 242×27.21222일≈6585.357일 (18년 11일 8시간 35분)


⇒ 223 삭망월 ≈ 242 교점월 ≈ 6585.3일

즉, 달의 위상이 같은 상태(삭망)이면서 동시에 황도면과 만나는 위치(교점)까지 똑같아지는 시간이 약 6585.3일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8시간의 차이: 6585.3일에서 '.3'에 해당하는 약 8시간(1/3일)의 차이 때문에, 다음 사로스 주기의 식은 지상에서 보았을 때 약 120도 서쪽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41/ 이로써 월식의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식의 경우는 더욱 복잡하게 된다. 그것은 그림 5와 같이 월식의 경우는 지구상의 어디서든지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일식일 때는 관측하는 장소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달이 지구에서 비교적 가깝기 때문이므로 달의 '視差'를 算定하지 않으면 충분히 계산해 낼 수 없다.



42/ ... 일식을 계산하게 된 것은 서력기원 이후인 후한 때이다.


천변점성술은 천상의 이상현상을 다루는 것이다. 한편 천문학은 천상의 현상에서 규칙성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점성술과 천문학은 아주 반대방향으로 향하여 등을 맞대고서 있다...


43/ 바빌로니아에서 그리스로

서양에는 '칼데아의 지혜'라는 말이 있다...


칼데아인은 최후의 바빌로니아제국을 세워서 바빌로니아 문명의 전성기를 이룩한 셈족Semite의 일종이다... 그들은 기원전 747년부터 360년 간에 걸친 장기관측기록을 남기고, 당시 최고의 지식계급을 낳아 점성술의 본산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저술에는 이집트로부터 점성술을 배웠다고 적혀있는 것도 있어서 이집트가 점성술의 본가라고 믿어왔으나 최근의 연구로는 이것은 그리스인이 칼데아와 이집트를 혼돈하였던 것으로서 이집트에는 점성술로서 체계화된 것은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44/ 그들이 만든 제국은 기원전 538년에 페르샤에 의하여 멸망되었지만, 문화사상 그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바빌로니아정복이다. 여기에서 실로 그리스적인 것과 오리엔트적인 것이 융합하는 기회가 얻어졌다...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은 이리하여 그리스/로마 문화에 침투되었고, 다시 그리스/로마의 영향 밑에 들어간 이집트에도 흘러 들어갔다.


여기서 바빌로니아점성술은 그리스의 과학사상과 접촉하게 되었다. 단순히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그 운행을 수치적으로 나타낸 바빌로니아의 경험주의적 천문학이 그리스의 우주론, 기하학적 방법을 가진 이론적 경향과 결합한다. 경험주의에서 출발한 천변점성술에 그리스, 이집트 등의 추상적인 도그마가 첨가된다. 전승적 과학으로서 무명의 점성술사들의 전제군주에 대한 봉사로 성립된 바빌로니아과학이, 그리스의 개인주의적인 공개논쟁의 기풍에 노출된다. 초야의 미신微臣 점성술사 某某가 군주에게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되는 바빌로니아의 점성보고가, 그의 설은 이렇지만 내 설은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 그리스인의 자기주장으로 변해갔다. 그리하여 꾸준하던 경험적 천변자료의 집적도 여기서 단절된다.


그럼 점성술사 겸 천문학자라는 바빌로니아의 전통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전제군주라는 스폰서를 잃고 서쪽으로 흘러간 듯하다... 오늘날 구미에서 볼 수 있는 점성술사는 주로 집시gipsy이지만 그들은 칼데아인의 후예라고 자칭하고 있다.


45/ 헬레니즘 시대에는 바빌로니아의 동양적 전제주의와 다소 달라져 점성술사를 고용할 만한 개인이 발생하였고, 또 그 재력에 바탕을 둔 개인주의의 성장 때문에 천하국가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우기 바빌로니아의 천문학도 그리스사상과 융합하여 더욱 발전하여 행성의 운행도 충분히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쯤되자 이미 '천변'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의 운명사상이나 그밖의 교설과 결부되어 개인이 탄생할 때 별의 모양으로 그 사람의 생애를 점치는 운수점성술, 숙명점성술로 되었다. 이것은 천변점성술과는 방법도 목적도 매우 다른 것이므로...


그리스에서는 행성에 대한 관심이 플라톤시대까지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것이 바빌로니아와의 접촉에 의하여 그들이 제공한 관측데이터에 그리스의 기하학적 우주론을 첨가함으로써 헬레니즘시대에는 숙명점성술의 바탕이 되는 뛰어난 행성이론이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행성은 천변의 자격을 거의 잃었다.


46/ 그러나 일월식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보통의 철학사 책을 들춰보면 먼저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하였다고 써 있다. 이것은 나중에 헤로도토스가 쓴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천문학사상 당시 그리스에서 일식을 계산하여 예보할 수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일식이 보였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므로, 그 기록을 가지고 현대의 천문학에 의하여 계산하면 기원전 585년이 된다.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토론을 몹시 좋아하였다. 그리고 자연현상에 관하여 과학적으로 논하는 센스가 매우 발달하였다. 그들은 일월식을 예보할 수 없었지만 그 원인에 대하여는 논의하여 일식은 달이 해를 가려서, 월식은 달이 지구의 그늘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올바른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빌로니아나 중국에서도 일월식의 예보를 하였으니 전문적인 천문학자는 이것을 알았어야 하였는데 그들은 대지가 구형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월식에 대한 올바른 이론을 제출한 사람은 없었다. 전문적 천문학자는 관측과 계산에만 열중하였고 원인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의 소관 밖이며 가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일식은 계산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공포심을 주고, 장차 닥쳐올 큰 사건의 전조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이것은 우주의 기하학적 모델을 생각한다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라는 뜻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일식 계산방법에서는 視差를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예보는 10중 1,2가 맞으면 좋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보한 일식이 실제와 맞지 않았을 때는 좋은 전조라고 보고하였다. 이런 일은 로마에서도, 중국, 일본에서도 있었던 일로서 예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일식의 규칙성에 대한 인식이 확립되지 못하고 '천변점성술'적 의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47/ 바빌로니아 점성술은 이질적 문화에 접촉하여 그 정치적, 사회적 기반도 뒤집혀지고 변질하여 버렸지만 중국에서는 '천변점성술'의 전통이 연면하게 이어져서 근세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세계사상 유례없는 놀랄 만한 장기에 걸친 연속적이며 풍부한 관측기록을 남겨 놓았다.


49/ ... 그런데 중국의 역사에서는 일식은 톱 뉴스로서 대대로 왕조사의 <帝紀>를 장식한다. 이것을 기록하는 '사관'이나 사마천과 같은 '太史令'이란 직위는 역사가인 동시에 점성술사의 직분도 겸한다. 즉 천변을 기록하는 것은 역사가의 중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사기천관서>에는 월식의 계산법을 기술하고 "그러므로 월식은 보통 있는 일이다."라고 하였지만, 일식의 예측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었던지 "일식은 좋지 않다."라고 적혀 있다...


<사기천관서>에는 천변해석의 이론만을 기술하고 있는데 다음의 <前漢書천문지>는 개개의 경우를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지상의 인간사회에 일어난 사건과 일일이 관련시키고 있다. 이 태도는 후세의 역대왕조사의 <천문지>에까지 계승되지만 그 해석은 점차로 축소되어 구양수가 엮은 <唐書>에서는 다만 천변의 기록만으로 그치고 해석은 전연 자취를 감추었다. 이 경향은 과학적 정신, 실증적/비판적 정신의 표현이라고도 이해되지만, 후세에는 천변의 해석은 고전을 들춰보고 그것에 따르면 되었으므로 새로운 해석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50/ 기원전의 중국에서 일식을 계산한 증거는 없지만, 후한에 들어서서 서기 26년 2월 16일의 일식은 아무래도 계산상의 것이었던 듯하다. 근대 천문학의 계산에 의하여 이 일식을 알아보면 알래스카, 미국서부, 동태평양에 걸쳐서 일어나고 아시아에서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조잡한 계산상으로만 나온 일식예보를 그대로 일식으로 기록한 것 같다...


중국의 당조에서나 또 그것을 본딴 일본의 왕조기에도 일식이 예보된 날에는 조정은 房帳을 치고, 관청은 휴무하고, 군주는 들어앉아서 근신하면서 지성껏 재액을 면하려고 하였다. 일식의 기에 몸을 쬐이면 이상한 輻射라도 받게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승려나 음양사를 불러 독경이나 주문을 외워 액을 면하려고 하였다.


51/ ... 도쿠가와 시대의 비교적 근대적 감각을 가졌던 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徂來(1666-1728)조차 天은 活物이므로 미미한 인간이 그 운행을 예측한다는 것은 외람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52/ 혜성도 주기적 현상이다... 다만 反점성술사상이 처음으로 일본에 나타난 도쿠가와 시기에, 이미 이구치 쓰네노리井口常範가 <천문도해天文図解(원제: 운기력술천문도해, 運気暦術天文図解)텐몬즈카이>(1689)에 "옛날에는 일식을 천변이라고 믿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연의 필연적 과정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라고 믿게 되었다. 혜성도 이와같이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장래의 연구를 기다려야 하겠다."라고 한 것은 핼리Edmund Halley(1656-1742)에 의한 혜성의 회귀성에 대한 예측(1705) 이전의 일이었던 만큼 주목할 만한 견해이다.


53/ 천변기록을 많이 모아 놓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관청의 서류더미와 같은 것이다. 서류더미가 늘었다고 하여 그만큼 학문이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4/ 그런데 천변과 지상현상 사이의 관계를 이론화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다... 이렇게 天과 人事와의 관련을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과의 대조를 충분히 하지 않은 채 이론을 부여하므로 이 이론은 사실을 떠나서 독주하는 경향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점성술이론은 여러 가지 학문의 이론 중에서도 가장 결실이 적고 가장 해로운 역할을 한 예이다.


55/ ... 음양이 이와 같이 공식화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초기(기원전 4세기)였고, 원리로서 확립된 것은 前漢시대(기원전 2~1세기)였다고 한다.


오행설은 음양설보다도 더 자연의 관찰에서 먼 작위적인 것이다. 아마 더 옛날에는 사행설도 육행설도 있었을 것이다. 은허에서 캐낸 갑골문(기원전 14-11세기)에서 구행설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신죠 신조新城新藏(1873-1938)의 설에 의하면 기원전 360년경 행성의 수가 다섯개였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되고 그 때문에 그때까지의 모든 x行說중 5행설이 다른 것을 누르고 우위로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5행설과 5행성과의 밀접한 관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Gemini 참조]

오행설의 성립 시기: 전단설(前段說)

신조는 오행설이 한꺼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 초기 단계: 전국시대 이전에는 단순히 '다섯 가지 유용한 물질(五材)'이라는 실용적 개념이었습니다.

- 발전 단계: 전국시대 중기 이후, 추연(鄒衍)과 같은 제자백가에 의해 천문 관측 데이터와 철학적 논리가 결합되면서 비로소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오행설'로 체계화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의 저서인 『동양천문학사 연구(東洋天文學史硏究)』를 보면 오행뿐만 아니라 십간십이지와 역법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정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죠 신조는 오행의 순환 원리인 상생(相生)과 상극(相克) 역시 단순한 철학적 유추가 아닌, 행성의 관측 주기와 역법(달력)의 수리적 결합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천문학적 근거를 구체적으로 풀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상생(相生)의 근거: 행성의 순차적 출현

신죠 신조는 상생의 원리가 밤하늘에서 행성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눈에 띄거나 특정 위치에 도달하는 순서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목 → 화 → 토 → 금 → 수: 이는 목성의 12년 주기 등을 기준으로 하늘의 구역(방위)을 나눌 때, 계절의 흐름에 따라 행성들이 힘을 얻는 순서와 일치합니다.

그는 이를 '오성의 운행 방향'과 연결 지었습니다. 행성들이 황도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는 순행(Direct motion) 과정이 지상의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상생'의 이미지로 투영되었다는 것입니다.

2. 상극(相克)의 근거: 행성 간의 '역행'과 '가림'

상극의 원리에 대해서는 보다 역동적인 천문 현상을 근거로 듭니다.

행성의 역행(Retrograde): 행성이 정상적인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 고대인들은 이를 '질서를 깨뜨리는 침범'으로 보았습니다.

오성 범절(五星犯截): 한 행성이 다른 행성의 궤도 근처로 다가가거나 가리는 현상을 관측하며, 특정 기운이 다른 기운을 억제하거나 이기는 '상극'의 논리를 도출했습니다.

예를 들어, 붉은 빛의 **화성(火)**이 유독 밝아지며 다른 별의 영역을 침범할 때, 이를 **금(金)**의 기운을 억제하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식입니다.

3. 수리적 모델: 72일 주기설

신죠 신조는 오행이 1년(약 360일)을 72일씩 다섯 구간으로 나눈 역법적 모델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오행 기간 (일) 천문적/계절적 의미

목(木) 1~72일 봄의 기운이 왕성한 시기

화(火) 73~144일 여름의 열기가 절정인 시기

토(土) (환절기) 각 계절 사이의 전환점 (중앙의 조화)

금(金) 217~288일 가을의 결실과 숙살(肅殺)의 시기

수(水) 289~360일 겨울의 응축과 저장의 시기

신조의 관점에서 상생은 이 72일의 구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을 의미하며, 상극은 이 주기적 균형이 깨지거나 행성의 불규칙한 움직임이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충돌'을 기호화한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오행'이 승리하기 전까지 존재했던 대표적인 경쟁 모델들과 그 탈락 이유를 정리해 드립니다.

1. 4행설 (방위와 계절 중심)

초기에는 동서남북 사방(四方)과 사계절에 맞춘 4행설적 사고가 강했습니다.

근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명확한 순환 체계입니다.

한계: 평면적인 방위(동서남북)는 설명할 수 있지만, 만물의 근원이 되는 '중앙(Center)'이나 '바탕'을 설명하기 부족했습니다. 결국 중앙에 '토(土)'가 추가되면서 5행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 6행설 (육부, 六府)

『좌전(左傳)』이나 『상서(尙書)』 등 초기 문헌에는 수, 화, 목, 금, 토에 곡(穀, 곡식)을 더한 '육부(六府)' 개념이 등장합니다.

특징: 철학적 원리라기보다는 백성의 삶에 꼭 필요한 '여섯 가지 자원'이라는 실용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물과 불은 음식을 만들고, 나무와 쇠는 도구를 만들며, 흙은 곡식을 기른다."

탈락 이유: '곡식'은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결과물이지, 천체 운행이나 자연의 근본 원소로 보기에는 보편성이 떨어졌습니다. 천문학적으로도 하늘에 '여섯 번째 행성'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던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3. 9행설 (홍범구주, 洪範九疇)

『상서』의 「홍범」 편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 가지 원칙인 '구주(九疇)'가 등장합니다.

특징: 오행은 이 아홉 가지 중 첫 번째 항목일 뿐이었습니다. 즉, 초기에는 오행이 우주 전체를 설명하는 독립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통치 원리의 하위 개념 중 하나였습니다.

홍범은 상나라(은나라)의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에게 전해준 통치 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핵심 내용: 하늘이 우(禹)임금에게 내린 9가지 큰 법이라는 뜻으로, 첫 번째가 오행(五行), 마지막이 오복과 육극입니다.

갑골문 연구에 따르면, 상(殷)나라 사람들은 세상을 중앙과 그 주변을 둘러싼 8개의 방위, 즉 총 9개의 영역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구방(九方): 왕이 다스리는 '대읍상(大邑商)'을 중심으로 사방(四방)과 그 사이의 간방(사유, 四維)을 합친 개념입니다.

구주(九疇)의 기원: 『상서(尙書)』 「홍범(洪範)」에 나오는 '홍범구주'의 '구(9)'가 바로 이 갑골문 시대의 9구역 공간 분할론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9라는 공간적 틀보다, 실제로 움직이며 지상에 영향을 미치는 5개 행성의 '역동성'이 더 강력한 설명력을 가졌습니다. 결국『여씨춘추(呂氏春秋)』나 『회남자(淮南子)』 단계에 이르면 9의 공간 체계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5의 원소 체계(오행)가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변화: 이후 음양론과 결합하면서, 아홉 가지의 복잡한 분류보다 5라는 숫자가 주는 수리적 안정감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4. 왜 '5'가 최종 승자가 되었는가? (신죠 신조의 견해)

신죠 신조는 오행설이 승리한 이유를 철저히 '오성(五星)의 발견'에서 찾습니다.

관측의 한계: 고대 망원경이 없던 시절,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적인 행성은 딱 5개(목, 화, 토, 금, 수)였습니다.

역법과의 일치: 5라는 숫자는 1년을 72일씩 나눌 때 딱 떨어지는 수치였으며, 이는 360도 원형 궤도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리적 모델이었습니다.

정치적 통합: 전국시대 추연(鄒衍)이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을 주장하며 왕조의 교체를 오행의 순환으로 설명하자, 통치자들에게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 선택되었습니다.

나가야마 시게루의 설명에 따르면, 9행설은 '공간' 중심의 우주관이었고, 5행설은 '시간(주기)' 중심의 우주관입니다.

나카야마 시게루(中山 茂)는 5행성의 명칭이 오늘날의 '수·화·목·금·토'라는 오행(五行) 명칭으로 고정된 이유를 단순한 작명이 아니라, 천문학적 관측과 정치 철학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 변천의 핵심 이유 3가지를 정리해 드립니다.

1.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에 의한 속성 부여

전국시대의 전략가 추연(鄒衍)은 왕조의 교체를 설명하기 위해 오행 사상을 정치에 도입했습니다. 이때 하늘의 별들은 단순히 빛나는 점이 아니라, 지상의 특정 성질을 지배하는 '기운(Energy)'의 상징이 되어야 했습니다.

세성(歲星) → 목성(木星): 12년을 주기로 돌며 봄의 소생을 담당한다고 보아 '나무(木)'의 속성을 부여.

형혹(熒惑) → 화성(火星): 붉은 빛과 불규칙한 움직임이 전쟁과 열기를 상징하므로 '불(火)'의 속성을 부여.

진성(鎭星) → 토성(土星): 28수(宿)를 진압하듯 천천히 돌며 중심을 잡는 모습에서 '흙(土)'의 속성을 부여.

태백(太白) → 금성(金星): 가장 밝은 빛 + 가을의 결실과 살기(殺氣), 날카롭고 하얀 빛은 단단한 금속과 가을의 肅殺(서늘한 기운)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진성(辰星) → 수성(水星): 태양 근처의 짧은 주기 + 겨울과 물의 응축성, 태양과 가까워 새벽이나 저녁에 잠깐 보이며, 유동적인 움직임이 물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별의 겉모습과 운행 특징을 지상의 오행 물질과 일치시키는 과정에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2. 역법(달력) 체계와의 수리적 결합

나카야마 시게루는 역법의 정교화가 명칭 변경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분석합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1년 365.25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5일(1후), 10일(1순), 72일(1기) 등의 수리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별들의 명칭을 '세성', '태백' 등 고유 명사로 부르는 것보다, '목·화·토·금·수'라는 기호적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의 논리를 적용해 계절의 순환을 설명하기에 훨씬 유리했습니다. 즉, 별의 이름이 계산 가능한 기호로 변모한 것입니다.

3.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의 영향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 등에 의해 '하늘과 인간은 서로 통한다'는 천인감응설이 확립됩니다.

이제 하늘의 별은 지상의 물질과 공명(Resonance)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늘에 화성(火星)이 나타나면 지상에는 불의 기운이 강해져 가뭄이나 전쟁이 일어난다"는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 별의 이름 자체를 지상의 물질 명칭과 일치시킨 것입니다.

나카야마 시게루는 이 과정을 "지상의 언어(오재)가 하늘의 데이터(오성)를 만나 우주의 법칙(오행)으로 승격된 사건"이라고 평가합니다.

오재는 물질 그 자체보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효능에 집중했습니다. 『상서(尙書)』 「홍범」 편은 오재가 오행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는데, 각 물질의 '성질(Function)'을 정의합니다.

수(水): 아래로 흘러가 적셔주는 것 (윤하, 潤下)

화(火): 위로 타오르는 것 (염상, 炎上)

목(木): 굽고 곧게 뻗어 나가는 것 (곡직, 曲直)

금(金): 변혁하고 따르는 것 (종혁, 從革)

토(土): 씨 뿌리고 거두는 것 (가색, 稼穡)


5장6부에서 장은 5개로 줄였으면서 왜 부는 6개를 유지했을까요? 여기에는 고대인들의 실용적인 해부학적 인식이 걸려 있었습니다.

삼초(三焦)의 특수성: 삼초는 전신의 수액 대사와 기운을 소통시키는 통로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를 없애면 인체의 순환 시스템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뺄 수 없었습니다.

수리적 타협: 『황제내경』 등에 따르면, 장은 '정기(精氣)를 저장'하므로 하늘의 오성(5)을 닮아야 하고, 부는 '찌꺼기를 내보내는' 실용적 기관이므로 지상의 숫자(6)를 유지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11경맥에서 12경맥으로의 역설

흥미로운 점은 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초기 문헌에는 '11경맥'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6장 6부에서 하나가 모자란 상태로 5행과 6행 사이에서 갈등하던 흔적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심포'를 장의 반열에 다시 슬그머니 올려놓아 12경맥(6장 6부 체계)을 완성하면서도, 겉이름은 여전히 '오행'을 존중하여 '5장 6부'라 부르는 복잡한 동거 체제가 굳어진 것입니다.


순수하게 논리적 정합성만 따진다면, 평면적인 방위(동·서·남·북)와 수평적인 시간(춘·하·추·동)에 대응하는 '4행설'이 훨씬 직관적이고 완벽한 대칭을 이룹니다.

나카야마 시게루(中山 茂)와 신죠 신조(新城新藏)는 바로 이 지점에서 "왜 고대 중국인들은 명쾌한 4를 버리고 복잡한 5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다음 세 가지 '강제적 요인'에서 찾았습니다.

1. 공간의 논리: '중앙(Center)'의 정치적 필요성

4방위는 중심이 비어 있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고대 중국의 천하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이 거주하는 중앙이었습니다.

4방 + 1: 동서남북이라는 외부 세계를 통제하고 통합하는 '중앙 토(土)'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정치적 상징: 4행설이 자연의 논리라면, 5행설은 '중앙 집권적 제국'의 논리입니다. 모든 계절과 방위가 결국 중앙(황제)을 거쳐 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4를 5로 확장시킨 주된 동기였습니다.

2. 시간의 논리: '환절기'의 수리적 처리

4계절로 나누면 각 계절 사이의 전환기(환절기)를 설명하기가 모호해집니다.

토(土)의 중재: 고대 역법가들은 각 계절의 끝에 18일씩을 떼어내어 '토(土)'의 기운이 지배하는 시기로 설정했습니다.

수리적 완결: 이를 통해 1년을 72일(4×18)씩 다섯 구간으로 나누는 5진법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나카야마 시게루는 이것이 단순히 계절을 나누는 것보다, 360일이라는 원형의 시간을 순환시키기에 수리적으로 훨씬 안정적이었다고 분석합니다.

3. 결정적 요인: 하늘의 숫자는 5였다 (천문적 강제)

신죠 신조가 가장 강조한 대목입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아무리 4행설이 논리적이라고 주장해도, 하늘을 보면 반박할 수 없는 실증적 데이터가 있었습니다.

오성(五星)의 존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라는 다섯 행성은 고대인들에게 '하늘의 의지' 그 자체였습니다.

천인상응(天人相應): "하늘에 5개의 별이 있으니, 땅에도 5개의 행(行)이 있어야 하고, 몸에도 5개의 장기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모든 학문을 지배했습니다.

논리의 패배: 즉, 지상의 4방위 논리가 하늘의 5행성 사실에 굴복한 것입니다. 9행설이나 6재설이 탈락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4행설 역시 '별의 숫자'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맞춰 수정되었습니다.



56/ 점성술이 과거의 구구한 경험에 따르고 있는 동안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려 하여도 소용없다. 이론적 요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이론이 들어가면 도리어 경험에서 더욱 더 멀어져 가고 만다.


천상의 세계와 중국의 여러 지방과의 사이에 지리적 대응을 본 分野說이란 것이 있다. 천의 어떤 방향에 큰 유성이 나타나면 그 밑의 나라에 變事가 있을 것이다...


57/ 두 개 이상의 행성이 한 별자리에 있는 것도 점성적 영향을 크게 미친다. 목성이 토성과 만날 때에는 내란, 기근이 일어난다. 화성과 만날 때에는 가문다 등등...


행성에는 옛부터 세성, 태백 등의 고유명이 있는데 오늘날 쓰고 있는 목성, 금성 등의 이름은 확실히 오행설과의 대응에서 왔다...


<天官書>에서는 이론화, 도그마화로 향하는 싹이 보이지만 아직 대부분은 천변의 관측을 기초로 한 경험적 방법에 따르고 있다. 그런데 曆學이 진보하고 曆도 일반에게 보급되자 행성의 위치 등은 계산하여 曆에 실으면 된다. 천을 더 관측하지 않아도 된다. 더우기 십간십이지 등은 원래 천상의 현상과는 관계없이 처음부터 역에 적어넣은 것이었다.


58/ 나아가서는 점성적 해석을 할 때에도 행성의 실체를 떠나서 추상화되어 그 대응하는 5행에 관련된 속성이나 계절, 방위, 主德, 그밖의 것으로 주로 해석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천체를 관측하는 번잡스러운 일을 그만두고 역에 달아둔 曆註로 때워 버린다는 간편법이 쓰이게 되어 결국은 탁상공론으로 된다. 역주에 의하여 방향이나 날의 길흉, 그밖의 모든 일상신변사를 규제하게 되면, 실제의 별을 보고 점치는 점성술로부터 떠나고, 더우기 천문학과는 아주 멀어져 버린다.


5행성보다 오행쪽이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되고 행성에의 점성술적 관심도 점점 엷어진다. 일단 오행이 원리로 받들어지자 겉보기 현상은 보다 근본적인 원리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고, 거꾸로 원리는 현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천문관측을 거듭하여도 중국의 자연철학이론, 음양오행설 등은 改變을 받는 일 없이 절대적인 도그마로 된다.


61/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 점성술은 크게 변모하였다. 그리스사상에 의하여 고도로 이론화, 도그마화되는 한편 대중에의 침투도 강하였던 것 같고 점성술을 둘러싸고 찬부양론이 맞섰다.


62/ 키케로도 헬레니즘 점성술의 이론적 뼈대를 요약하여 기술하였지만 그리스 점성술로서 가장 체계가 서 있는 대표적 저작은 기원전 2세기의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이다. 이 책은 현재까지도 서양의 점성술사의 바이블이 되어있는 고전이다.


63/ ... 이에 대하여 천상의 현상의 지상에 대한 영향을 논하는 점성술은 이류과학이고 제1의 과학(천문학)의 응용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목적하는 바는 바빌로니아의 천변점성술과 같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그리스 자연철학의 전통과 헬레니즘 천문학의 성과가 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사상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하면 바빌로니아의 군주중심주의와는 다른 자연중심주의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의 영향에 관한 문제도 전쟁이라는 순전한 人災와는 달리 기근, 厄病, 지진, 홍수 등의 천재 특히 기온의 변화, 더위나 폭풍의 강도변화, 풍작과 흉작 등 거의가 기상학적 테마들이다.


64/ 중국이나 바빌로니아의 천변점성술에서는 번개나 지진도 천변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학문적으로 더 확실한 정의를 내렸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정의에 의하면 지구중심의 우주상(그림 7 참조)에서 달 위의 세계는 하늘이고, 거기에서 천체는 원운동을 한다... 한편 달 아래의 땅의 세계에서는 물질은 직선운동을 한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이 지상계를 다루는 것이 기상학이나 물리학이다.



65/ ... 특히 근대의 우주관처럼 하늘의 까마득한 거리를 생각하지 못한 고대인은 옥파의 껍질과 같이 겹겹으로 천구가 밀접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향은 현대인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상의 기상현상도 천체의 영향을 받아서 규칙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점성기상학의 근본사상이다.


69/ 여러 별자리 중에서도 1년에 천구상을 한 바퀴씩 운행하는 길 즉 황도상의 별자리는 특히 주의를 끌었다... 황도를 12로 나눠서 그 하나하나의 宮에 이름을 붙였다. 황도12궁이 확립된 것은 그다지 오랜 일은 아니다. 기원전 5세기까지도 올라가지 않는다...


73/ 점성연대학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도 천하국가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첨가하겠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태양, 달, 여러 행성이 천공의 한 곳에 모이면 천변점성술적인 의의가 있다...


74/ 목성과 토성뿐만 아니라 그밖의 모든 태양계의 성원이 한 곳에 모인다고 하면 이것은 당당히 중대한 점성술의 의의를 가지게 된다... 천문관측이 진행되고 주기적 상수의 정밀도가 향상되면 최소공배수는 엄청나게 증가하고 상상을 넘는 큰 값이 된다.


75/ 紀年法이 확립되지 않았던 고대사를 검토하는 경우 설화시대의 연대 결정에 이 점성연대학이 들어 있어서 역사가를 괴롭힌다. 바빌로니아의 천체관측이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도 72만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집트의 천문기록도 6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선전한다...


행성의 회합주기를 구하는 일은 천체력을 만드는 데에 필요하다. 그리스의 메톤Meton(B.C. 5세기경)이 알아낸 19년에 7회의 윤월을 두는 이른 바 메톤주기Metonic cycle는 태음태양력을 만들 때 기초가 되었고 사로스주기도 일월식의 예보에 이용된다. 모든 행성의 회합주기를 체계화하여 정리한 것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원후 4세기 이후인 인도의 유가瑜珈yuga 천문학이다. 그들은 바빌로니아나 그리스천문학의 성과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432,000년의 칼리 유가kali yuga 주기를 토대로 하면서 43억 2,000만년의 칼파kalpa 주기로 정리한 것이다.


76/ 페르샤의 사산Sassan 왕조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목성과 토성의 회합주기에서 역사가 전개된다는 것인데 그 배수인 240년마다 왕조가 바뀌고, 다시 이것의 4배인 960년마다 마호메트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서 인류사상의 큰 변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103/ 숙명점성술의 숨통을 법적으로 끊은 것은 그리스도교이다. 숙명사상으로 보면 일체가 모두 운명이고 선악의 구별은 없다. 전지전능한 신도 인정하지 않고 자유의지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래서야 그리스도교사상과 서로 용납할 수는 없다... 5세기 이후 서로마제국의 붕괴로 과학적 점성술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고 이후 100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서양중세에서는 점성술이 탄압을 받았다.


106/ ... 이슬람권에서는 왕에 필요한 측근은 4명인데 사무를 위한 서기, 왕권의 선전을 위한 시인, 건강관리를 위한 의사, 행정고문으로서의 점성술사라고 알려져 있다...


116/ 점성술 비판의 네 가지 型

(1) 현상적/실용적 비판

어느 특정 점성술사의 예보가 맞지 않으면 대중은 그 점성술사를 믿지 않게 된다...


(2) 실증적/과학적 비판

지상의 사건도 무언가 하늘로부터의 영향에 따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다지 간단하게 일반화, 법칙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천체가 지상에 미치는 영향이 과학적으로 입증될 때가 올 것이다. 다만 현재의 점성술적 이론이나 기술로는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점성술의 현상에 대한 불만에 바탕을 둔 '건설적'인 技術비판이 있다...


(3) 이론적/방법론적 비판

... 숙명의 본질, 우주론적 기초, 그 논리성, 합리성 등등 주로 점성술적 해석의 의의를 밝히자는 것으로서 철학자들이 주로 부르짖는 것이다...


(4) 사상적/이데올로기적 비판

점성술이 맞고 안 맞고를 고사하고 점친다는 행위 자체가 자유의지나 신의 존엄성을 침범하는 것이다...


117/ 이상의 네 가지 중에서 (1)의 비판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4)의 비판은 특히 중세 그리스도교 교회에 의하여 취하여진 입장이다.


118/ ...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순전히 천문학적으로 다룬 것이고 점성술에 관하여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해설자 레티쿠스Rheticus(1514-1576)는 점성술에 열심이어서 태양중심설의 기초 위에 점성술을 놓으려고 하였다...


119/ 케플러가 천문학과 점성술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점성술은 천문학의 어리석은 딸이지만 그 딸이 화류계에 나가서 돈벌이 함으로써 어버이인 천문학을 봉양한다."라고 한 말은 잘 인용되는 말이다...


121/ 운명사상은 중국에서도 그리스에 못지 않게 옛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호로스코프점성술에까지 발전하기에는 중국천문학은 행성의 운행에 관한 지식이 너무나 빈약하였다...


122/ 이 중국식曆註에 의한 운수판단이 당송시대에 정리된 것이 점장이가 말하는 사주垂命설이다...


140/ 과학적 천문학이 일본에 뿌리박게 된 것은 도쿠가와시대에 들어서서이다. 1685년 시부카와 하루미渋川春海(1639-1715)가 상주한 貞亨曆이 채용되었다. 그 내용은 원의 수시력과 거의 다른 바가 없지만 자력으로 역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본 천문학상의 획기적인 것이다.


141/ 나가사키에 살면서 서양사상의 세례도 받은 警世家적 평론가인 니시카와 죠켄西川如見(1648~1724)은... <괴이변단怪異辨断>에는 옛날에 일식을 變災라고 보았던 것은 추산법이 미숙하여서 맞지 않았던 까닭이며... 분야설도... 넓은 하늘을 한 나라의 독점물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며...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한 그도 오운육기의 운기설은 믿었다...


151/ 천변점성술의 경우는 과거의 경험에 비춰보고 해석을 내리는 경험지상주의에 의한 것이지만, 그 경험은 이상현상의 경험이고 천체운행의 규칙성을 구하는 천문학과는 다루는 영역이 전연 겹치지 않는다...


역과 점성술 이외에 천체에 관한 고대인의 또 하나의 문제는 우주관이다. 우주관은 원래 과학도 주술도 아니고 종교적 욕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신화전승 속에 구현된 것이다. 曆算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과학적 천문학과 결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나 코페르니쿠스의 과학적 우주관으로 止揚되었지만 천변점성술은 과학과 연결되지 못한 채 시들어져 갔다.


숙명점성술은 천변점성술과 달라서 천문학에서 발생한 것이다. 개인의 출생시의 행성의 위치로부터 운수를 점친다는 것은 행성의 운행의 규칙성에 관한 인식이 확립되고, 그 위에 행성운행을 계산에 의하여 예측하는 과학적 천문학이 발달하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153/ ... 보통의 점성술사는 천문학의 진보에는 무관심하고, 다만 아마추어의 눈을 가리는 낡은 천문표(호로스코프)로 적당히 얼버무리면 그만이었으므로 천문학에의 공헌 운운은 얼토당토 않다.


더우기 중국류의 九星法 등 운수판단은 벌써 원리가 전적으로 추상화되어서 천체의 운행과는 원칙적으로 관계없게 되어버렸다...


158/ 1951년 미국의 기상학자 넬슨Nelson은 電離圈에 대한 천체의 영향을 조사하여 기상예보의 精度를 높이고자 하였다. 전리권의 상태가 천체의 영향에 의하여 교란되는 것은 태양의 흑점활동의 경우에는 잘 알려져 있지만 2년동안에 걸쳐 그는 다른 영향도 생각하고 더욱 상세히 계산하여 그때까지 65%의 확률이었던 예보를 90%까지 높였다...



173/ 하늘과 땅 사이를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사상 이외에 또 하나 점성술의 뉴튼역학에의 공헌은 원격작용의 사상이다. 13세기에 이미 로저 베이컨Roger Bacon(1214-1294)은 천체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서 빛이나 중력과 마찬가지로 점성술적 작용이라는 원격작용을 인정하고 있다. 이 생각은 케플러에게도 인계되었다. 뉴튼의 만유인력은 지구와 달과 같이 서로 떨어져있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원격작용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177/ 1781년 월리엄 허셸 경이 천왕성을 발견하였다... 점성술이 이 천왕성의 영향도 도입하여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5행성에 기원을 둔 중국의 5행설도 6행설로 고쳐야 하였다...



역자후기

209/ ... 일식기록만 헤아려도 <삼국사기>에는 신라에서 29회, 고구려에서 11회, 백제에서 26회, <고려사천문지>에는 고려 475년 동안에 132회, <증보문헌비고>에는 이조 505년 동안에 190회로 기재되어 있다...(역자 이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