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서학사연구

이원순

by 조영필 Zho YP

8/ 유불의 전통가치에 터전한 전통문화사회인 조선후기사회는 또 다른 새로운 이질가치체계의 역사적 충격을 받게 되는 바,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입각한 서구적 문화체계인 서학의 충격이었다.


서학은 명/청으로부터 선조대 이래 조선왕조에 도입된 유럽적/그리스도교적 문화체계로, 조선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촉구하는 역사변수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서학이라는 말이 우리 역사에서 쓰여진 것은 이미 신라시대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원광서학'이라는 제하에 원광법사의 행적이 적혀 있다. 또한 '時義湘師 서학입당'의 기사가 보인다. 이때의 서학은 서국/서방에 가서 불법을 학습 연구한다는 뜻이니, 불교 자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사용되고 있다...


9/ 동양세계에서 먼저 구라파의 학을 서학으로 적은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 난학의 선구자이던 大槻玄澤은 그의 저서인 <하루마와게法爾末和解>에서 서학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바, 이 경우의 서학은 화란학인 난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서의 난학은 어학과 의학/천문학/병학/박물학 등의 과학이 그 내용의 주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그리스도 신앙과는 무관한 점에 특색이 있다...


그리스도교 가치관을 담은 구라파의 학문이라는 특성을 가진 서양학을 서학이라는 말로 사용하게 된 것은 명말/청초 중국에서의 일이었다.


... 피스터Aloys Pfister費賴之의 <入華耶蘇會士列傳>을 중국어로 번역한 馮承鈞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명나라 만력으로부터 청나라 건륭까지 200년간은 옛 야소회사들이 중국에서 활동한 시기가 되는 바, 그들은 종교를 전하고 포교하는 일 이외에도 중국과 서양의 학식을 연관적으로 겸통하여 무려 수백종의 책을 찬역하였다. 야소회사로 그 일에 관계되는 자가 500명에 가깝다.


10/ 명말/청초에 걸쳐 야소회사에 의해 한문으로 찬역된 서양 관계의 서적을 한역서학서 또는 한문서학서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야소회사 자신들이 그들이 쓴 서양관계의 서적에서 서양에 관한 학문을 서학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후세의 중국학자들도 그 학문을 서학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明京인 북경에 자리잡게 됨으로써 중국천주교회를 창설하고, 한편 그가 지닌 천문/역산을 중심한 서구학문 기능을 가지고 명왕실에 기여하기 시작한 지 불과 4년 후인 1605년에 남경에 자리잡고 남경천주교회를 주도하게 된 야소회사 Alphonsus Vagnoni高一志(후에 王豊肅으로 개명)는 도합 15종의 한역서학서를 저술하였다. 그 가운데 <서학治平> <민치서학> <수신서학> <서학제가> 등의 서책이 있다....


11/ ... 중국의 현대사가 張蔭麟은 <명청지際서학수입중국攷略>이라는 논문에서 서광계, 이지조, 周子愚, 李天維, 王徵, 焦勗, 方以智 등 20여 명의 이름을 들어 이들을 명말의 중국 서학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명말뿐만 아니라 청초에도 일부 학자들의 서학열은 대단하였거니와, 후에 전례문제로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는 聖祖도 서학에 큰 관심을 가져 야소회사들에게 천문/역법을 進講케 하였으며 지방 巡幸 때에도 이 강의를 중지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이런 점에서 서학이란 '중세적 스콜라 철학에 입각한 가톨릭적 그리스도 교학사상과 야소회사라는 특수 신분에 속하는 인사들이 소화 수용한 서양 중세 및 르네상스기의 서양과학기술을 포괄하는 서구문명의 학적 측면'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12/ 이런 의미에서 서학은 서사지학, 구라파지학, 서양학, 양학 또는 천학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또한 '서태지학'이나 '태서인지학'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신후담은 '서태지학'이라고 적고 있는 바 '西泰子'는 리마두 신부의 自號였으니...


13/ 조선서학은 조선후기사회의 일부 유교적 지식인 사회에서 명/청으로부터 赴京使行員의 손을 거쳐 꾸준히 도입 재래된 한역서학서에 대한 好奇적인, 학문적인 접촉과 연구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인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윤리적 측면의 '理'에 대한 것과 과학적/기술적 측면인 '器'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는 학문활동이었다. 다만 전자만을 가져 그 학문활동을 따로이 지칭할 때는 '천주학' 또는 '천학'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14/ 조선서학은 4단계적 전개를 보이며 생성하였고 발전하였다가 질식하게 되었다.

① 서학접촉기 : 1601~1750년대...

② 서학탐구기 : ...

③ 서학실천기 : 정조 일대(1777~1800)...

④ 서학탄압기 : ...


53/ 당시 북경에 있던 4천주당은 확실히 이색적인 존재였던 모양으로, 조선의 부경사행원들이 북경에 체재할 때 반드시 관광하는 대상이었다...


60/ 한역 서양 학술서의 최초는 루지에리Michael Ruggieri羅明堅가 쓴 <천주聖敎실록>이다. 이것는 1584년에 출판된 것으로...


61/ <천주성교실록>이 처음으로 출간된 1584년으로부터 중국에서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는 청 高宗(건륭제)시대에 포르투갈 왕국에 의하여 중국에서 예수회원이 추방되는 1759년까지 175년간에 총 500여 종의 서양학술서적의 한역 출판이 있었다. 이러한 한역 서양 학술서적을 편술한 서양인 성직자는 모두 60여 명에 이르고 있다...


67/ ... 그의 서학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간절하였는가는 그의 제자 안정복이 영조 22년 처음으로 광주 星村으로 스승을 찾아갔을 때, 이익이 서구인들의 과학적 재능이 중국인이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것이라고 찬양한 바로도 짐작된다. 한편 인조대에 정두원이 중국으로부터 재래한 천문/역산에 관한 한역 서양 학술서가 왕실 秘庫에서 차차 산일되어 감을 한탄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서양 학술서를 읽는 가운데서 얻어진 식견과 자기의 느낌을 그의 학문 메모라 할 <성호사설>에 기록하였다... 특히 <천주실의>에 관해서는 발문을 지어 천주학에 대한 이해를 남기고 있다...


70/ 서양역법과의 최초의 접촉은 인조 9년(1631) 우연한 기회에 登州에서 부경사신 정두원이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 로드리케즈Rodriquez陸若漢와 친분을 맺음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정두원의 일행이었으나 서양의 천문/역법을 연구하기 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된 李榮俊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설명한 <天問略>과 <治曆緣起> 등의 한역 서양 학술서를 독파하고 새삼 서양의 천문 역법 지식이 탁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75/ 이익은 <主制群徵>을 읽고 그의 저서인 <성호사설> 권5, '서학의'에서 서양의술을 소개하였고 '본초'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익은 이 책을 독파하고 그 일부로 기록되어 있는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그것의 생리적 기능을 정리 기록하여 서양 의술을 소개하는 한편 서양 의술이 우수함을 강조하였다. 한편 실학자 이규경도... 인체 구조와 기능을 논하고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그가 부경하였을 때 청국의 尹嘉詮으로부터 네덜란드판의 <소아경험>과 서양의 <洋牧露方> 등의 의서가 우수하다는 말을 듣고 이를 구하고자 애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鄭東愈는 서양인들이 중국 의술이 오행에 치우친 잘못을 지적하고 있음을 <晝永篇>에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이 그의 저서 <醫零>에서 근시와 원시, 그리고 안경의 관계를 논하고 있는 기록 등은...


76/ ... 서양 의술이 수용되어 실제로 활용된 것은 정약용에 의한 종두법의 수용이었고, 최한기에 의한 한역 서양 의학서의 수입이었다.


87/ 한역서학서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기록은 선조대의 학자인 이수광의 저서인 <지봉유설>에 나오는 것으로, 이 기록은 1603년 북경에 事大사행원으로 사행한 바 있는 李光庭이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를 도입하였음을 전해 주고 있다...


93/ 실학자들의 排朱尙古적 유학 연구의 진전에 따라 易理에 터전한 정주학적 세계관, 자연관이 서서히 '天=上帝'의 先儒시대의 세계관, 자연관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04/ ... <천주실의>를 통해 리마두가 중국 고전에 얼마나 깊이있고 넓게 통달하였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1편에서 인간 지능을 설명하고 인류의 공통사상과 운동력과 질서의 논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제2편에서 佛/道를 논박하고 유교에 대하여는 제1질료라 할 '태극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찬동하였다... 중국 고대상에서의 상제의 성격을 11개의 중국문헌을 들어 말하였다. 제3편에서 천국의 필요성을 말하고 식물의 생장력, 동물의 감각력과 인간의 지적 영혼의 구별을 명시하고 그것의 단독성과 영성과 불멸성을 논증한다. 제4편에서 ... 인간 영혼이 신령임을 밝혔다. Profirio의 나무 도표로 有의 구별을 제시하고... 범신론적 일신론을 논박하였다.


하권에 들어 제5편에서 윤회설의 창시자는 Pitagoras이며... 제6편에서.. 사후의 상벌원칙... 지옥/천국 및 연옥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고... 제7편에서는 천주에 대한 인간성과 선악, 자유의지와 인간의 목적을 설명하고... 제8편에서... 천주교사들의 童身制를 해설 옹호하였고... 끝으로 원죄를 말하고 천주강생과 神法 공포를 설명하고...


115/ 성호의 유학은 이언적, 이황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138/ 이익은 시헌력이 탕약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고, 그것이 매우 우수한 사실에 감탄하여 '曆道之極矣'라고 논평하였고, 일월교식에 차류가 없어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라고까지 칭찬하기를 주저치 않았다...


시헌력과 대통력은 24절기의 구분 기준이 다르다. 즉 대통력에서는 일월오성 이른바 칠정의 운행기점이 되는 성기星紀의 중앙인 동지점에서 시작하여 1년을 15일씩 24등분하는 평균법으로 계절을 표시하는 데 대하여, 시헌력은 태양의 궤도인 황경黃經과 적도의 교점의 하나인 춘분을 기점으로 태양 회귀를 24등분하는 정기법定期法을 쓴다. 이익은 이러한 사실을 일천지극日天之極(태양궤도의 양 극점)이 성신천지극星辰天之極(지구 남북 반구의 양극이며 성천星天의 양극)의 '稍東稍高'에 위치하고 있어, 태양이 그의 궤도인 황경을 따라 돌 때, 그 적도와 춘추분에서 교관交貫되며 적도와 황도의 상거相距 1도를 1기一氣로 삼고, 황도는 적도로부터 남북으로 최대 12도까지 서로 떨어져 있는데, 1기가 15일이고 보니, 1년은 365일이 되며, 일행日行은 황도를 따라 주천周天함에 변동이 없다고 하여 서양 역법의 정확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익은 태서泰西, 즉 서양의 역법이 가장 우수하고, 다음이 회회력이고, 중국력은 서국력에 거의 미치지 못한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서양력에는 '무육갑無六甲', '무윤월無閏月'이고, 다만 윤일閏日이 있을 뿐이며, 대개 역서는 사람들이 알기 쉬워야 하는데, 태양을 표준함이 월月의 운행을 표준하는 것보다 알기 쉽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보아 이익은 태음력보다는 태양력이 우수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140/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익은 시헌력과 그 역산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반드시 이를 좇으리라"고 논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47/ ... 이익은 수학을 익히는 것은 능히 경의經義가 깊어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204/ ... 주자는 천지가 이루어지기 전에 리理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만일 리가 없었다면 천지도 인간도 만물도 있을 수 없었다. 리는 기氣 안에 있으며, 리와 기는 유리된 일이 없었고 또한 선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人과 물物은 동성同性인 것이다. 리는 선험적인 것이며 무시無時 무소無所의 보편적 존재이나 기는 감각적/물질적이고 개체성을 지닌 존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리와 기가 태허太虛에서 태을太乙을 이루고, 그 태을에서 음양오행(이오지정二五之精)이 작용하는 가운데 우주와 그 안의 만물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약용은 주자의 음양론과 달리 음과 양은 본래 형체가 없는 것이고 다만 명암明闇이 있을 뿐이며,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음양으로 나타나는 태극이나 리가 만물 화생化生의 창조력을 가진 것이라는 견해를 부인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인 '천天' 즉 '상제'는 결코 주자의 리와 같은 선험적/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위격位格을 갖춘 윤리적/종교적 존재였다... 그는 본연지성은 인과 물이 각기 다르며 인간과 만물은 각기 다른 천명을 타고난 것이어서 서로 이역移易함이 없는 것이라 하며, 주자가 인간과 만물이 비록 기품의 차이는 있을망정 리는 같은 것이라고 한 말을 반대하였다. 인간은 만물과는 달리 도의지성을 가진, 즉 영성/도심道心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였다... 결국 인간은 마땅히 선악을 가릴 수 있도록 품부된 성性에 의하여 천명에 순응코자 노력하여야 하며 죽음과 삶, 화와 복은 천에 의하여 작정된다는 것이다...


248/ ... 이가환李家煥은 <기하원본>을 연구하고 천문학과 기하학에 정진했으며, 그를 가리켜 '그가 죽으면 우리 나라에서 기하학의 종자가 끊길 것'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서양 학술을 가까이 한 인물이었다. 정약전丁若銓도 이벽李檗과 같이 역산에 흥미를 가지고 <기하원본>을 연구하여 그 정오精奧에 도달하였음이, 그의 친동생인 정약용의 묘지墓誌에 기록되고 있다...


258/ ... 서학에서는 '리'와 '기'로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리'와 '물'로 나누어 '물'은 자립자이나 '리'는 의뢰자로 보며 '리'의 실체성을 거부한다... 한편 서학에서는 음양을 모든 현상의 기본 형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내재하는 구성요소로만 인정한다.


259/ ... 홍대용은 음양/오행으로 천문 현상을 설명함을 거부하여... 음양의 실체성을 부인하였고, 오행의 수는 술가들이 억지로 부연한 터무니없는 것이고, 오성을 오행에 분속分屬시킴도 유가의 억설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하늘을 기라 하고, 화火는 태양이며, 수와 토는 육지인데 반하여 목과 금은 태양과 육지에서 생성되는 것이므로 화/수/토와 병립될 수 없는 존재라 하여 마침내 서학의 사행설을 수긍하였다.


한편 다산의 중형인 정약전은 오행을 주제로 한 책문策門에서 사행설의 논설을 펴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전통 유가들의 공격을 받은 바 있다. 다산 정약용 자신도 음양오행을 끝내 수긍치 않았다... 결국 정약용은 서학의 사원론四元論을 역易의 사정괘론四正卦論의 유가적 바탕 위에 수용하여 새로운 자연철학의 기본으로 설정하였다.


266/ 실학의 유파를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와 실사구시파로 흔히 나누고 있다. 이 유파의 각칭에서 볼 수 있듯이 실학자들이 추구한 학문으로서의 '實'은 제도 개량과 行用 질서 확립, 기술 활용과 농업 진흥, 그리고 자기 확인과 자아 확립에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실학을 뒷받침한 기반이 실학사항이었다.


267/ 실학자의 '實'은 실제와 유리된 채 공허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학문과, 봉건적 모순의 확대와 파탄지경의 민생에 대한 절박한 인식을 바탕으로 불만과 정열을 내연시켜,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을 독창하는 자유성과 창의성을 가진 '실'이었다. 또한 경험적이며 실증적인 합리성을 가진 학문 방법에 터전한 '실'이었다. 그것이 근대지향성과 민족지향성을 내포한 '실'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초기의 성리학적 '실'의 학문과 달랐다. 실학은 형이상학적인 학문활동을 중시하던 성리학과는 달리 형이하적인 것, 器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컸던 학문활동이었다. 이 점에서 실학은 '사물의 실'을 추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268/ 서학이 민족사회 밖의 문화가치에 대한 연구였고 대응을 위한 연구였기에, 그 학문에는 처음부터 실천적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이런 의지에는 '리'와 '器', 즉 정신과 사물이라는 '실'의 두 측면을 모두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학의 연구가 축적되면서 마침내 서교=천주교를 수용하여 그것을 현실생활에 실천하게 되었고,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서학의 '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으니, '사물적 실'보다 '정신적 실'의 추구로 귀착된 학문활동이었다.


269/ 실학의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이론도 있으나, 오늘날 대체로 상한을 반계 유형원으로 삼고, 하한을 혜강 최한기로 잡는 데 의견이 집약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동안의 실학 전개를 실학의 유파별 특징에 따라 3기로 구분하여 18세기 전반의 실학이 제1기적 전개를 '경세치용의 실학'으로, 18세기 후반의 제2기적 전개를 '이용후생의 실학'으로, 그리고 19세기 전반의 제3기적 전개를 '실사구시의 실학'으로 정리되고 있다.


한편 조선 서학은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서학 접촉재래기接觸齎來期' '서학 검토연구기'와 '서학 실천수난기'의 3단계로 전개되는데, 제1기는 17세기초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약 120년간이고, 제2기의 전개는 18세기 중엽을 전후한 반세기였으며, 제3기의 전개는 1784년으로부터 약 반 세기를 잡을 수 있었다.


285/ <서학범西學凡>은 서양 학술개론서로서, '서학범해제'에는 <서학범>의 성격을 밝혔고 서양의 建學育才之法이 6분과로 나뉘어 조직되었음을 적고 있다. 이를 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337쪽 참조

[초학과정]

Rhetorica(수사학) ... 문과

[철학과정]

Philosophia(철학) ... 이과理科

1년 : Logic

2년 : Physics

3년 : Metaphysics

4년 : Mathematics

Ethics

[전문과정]

Medicina(의학) ... 의과

Lex(법률학) ... 법과

Canones(종교법학) ... 교과敎科

Theologia(신학) ... 도과道科



'서학범해제'에는... 문과, 즉 수사학을 배우고 철학으로 나감을, 즉 수사학이 철학의 선수과임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문과는 중국의 소학과 같고, 이과는 중국의 대학과 같다'라 논평하고...


390/ 한편 일본 '난학'은 남만학에 의해 선도되었다. 1549년 포르투갈 상선의 種子島 표착, 1549년 사비에르Francisco Xavier의 切利支丹 개교 이후 洋/日 교섭이 시작되면, 철포의 군사적 의의와 총상 치료라는 양의학적 필요의 실용 목적에서 양학의 시작을 보았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서양 의학/천문학/수학/어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일본인들의 葡/西계 서양학의 연구를 '남만학'이라고 부른다...


난학은 바로 이 남만학의 뒤를 이은 일본에서의 서양학인 것이다...


420/ 홍대용은 음양오행으로 천문현상을 설명함을 거부하여...


정약용도 음양오행을 끝내 수긍치 않았다...


470/ ... 한편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실제로 조선사회에서 활용한 최초의 예는 효종 4년에 있은 '시헌력'의 채용이었다. 중국에서 종래의 대통력법 및 회회력법 대신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한 지 불과 8년 후인 1653년에 조선왕국에서도 구래의 <칠정산내외편>을 버리고 시헌력을 취하게 된 것이니 그 재빠른 대응은 놀랍다. 이에는 효종대 실학의 선구자인 관상감제조 김육의 공이 매우 컸다...


474/ ... 그(정약용)가 진보된 '천문역상曆象지설' '농정수리지기農政水利之器' '측량추험推驗지법'에 이끌려 서학에 심취하였고, 실용적 기술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으로 利用監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주역>의 음양과 <서경>의 오행은 한대 금문경학가今文經學家들에 의하여 유교자연철학의 기본개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