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일본의 근대

마루야마 마사오 & 가토 슈이치

by 조영필 Zho YP

1부 번역문화의 도래

27/ ... 번 자체가 반쯤은 국가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에도 시대에는 한어漢語로 쓸 때에는 번을 가리켜 전부 '국가國家'라고 썼습니다. 에도 시대의 문헌에는 '번藩'이라는 말이 놀라울 정도로 드뭅니다. 화문和文이나 구어口語에서도 '번'이라고 하지 않고 '오이에(家)'나 '어디 어디 가家의 가신'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메이지 이후가 되어서야 '번' '번' 하고 불렀던 거죠.


... 막번체제幕藩體制는 일종의 연방국가, 곧 분데스슈타트Bundesstaat가 될까요......


어느 쪽이 되었던 '번'은 미국의 주state보다 독립성이 훨씬 더 강합니다. 검문소(關所 세키쇼)가 있고, 인근의 번 영지로 갈 때는 '데가타(手形)', 곧 여권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막부는 전국 인민에 대한 징세권을 직접 갖고 있지 않았죠. 단지 직할 영지인 덴료(天領)에 한해서만 갖고 있었습니다. 막부의 우월성이라는 건 덴료가 다른 번의 영토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뿐이었지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라는 존재는 대소 영주들과 쇼군 사이의 주종 관계여서 그 이외의 무사는 막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인민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이것은 막부라는 것이 중앙정부가 아니었음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28/ 광산은 전부 직할입니다. 그리고 화폐 주조권도 막부가 독점했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유럽의 왕보다 일본 봉건시대의 쇼군 쪽이 훨씬 강력했던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유럽모델의 봉건제에서 본다면 아시카가=무로마치 시대는 유럽과 비슷했다고 생각됩니다만, 도쿠가와 시대는 훨씬 중앙집권적입니다.


29/ 순수봉건제에 비하면 그렇지요. 법제사 연구자인 이시이 요스케石井良助(1907-1993) 씨 같은 이는 가마쿠라 막부 쪽이 슈고(守護)/지토(地頭)를 통해 전국을 통제해서 중앙집권적이었고, 에도 막부 쪽은 오히려 지방분권적이라고 합니다...


... 일반 인민에게 '기미(君)'란 곧 번주藩主를 가리켰고, '오이에'라고 하면 자기 영주(殿樣)의 이에(家)였던 겁니다...


... 최근 번의 법에 대해서 연구가 진척되고 있습니다만, 대개 막부의 법을 모델로 삼고 있죠. 그런데 모델로 삼기는 해도 원칙은 입법주권立法主權을 취하고 있습니다.


30/ 이번에는 번의 사정을 살펴보지요. 무로마치 시대와 달리 토착 무사는 없어지고 모두 조카마치(城下町, 중세 이래 성곽을 중심으로 영주의 직속 무사단과 상공업자에 의해 형성된 도시)에 살면서 대부분 녹祿으로 쌀을 지급받는 관료가 되고 말았습니다. 곧 토지를 소유한 유력 농민의 계통을 잇는 무사라는 존재는 거의 사라져 버렸던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소규모의 근대국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막부의 영지 몰수나 교체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중세의 봉건제와는 전혀 다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뒤집어 말해서, 폐번치현廢藩置縣(1871)으로 순조롭게 이행한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하나의 번이 말하자면 유사한 형태의 소규모 국가였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기가 쉬웠던 겁니다.


32/ 오규 소라이荻生徂徠(1666-1728)는 <역문전제譯文筌蹄> 초편初編의 머리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쪽 학자들은 방언方言(일본어)을 가지고 쓰고 읽으면서 이를 가리켜 화훈和訓이라고 한다. 이것을 훈고訓詁라고 이해하지만 실은 번역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번역임을 모른다" "저쪽에는 당연히 저쪽의 언어가 있다. 중화中華에는 당연히 중화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체질이 본디 달라서 어느 것에 의거한들 딱 들어맞질 않는다. 이런데도 화훈으로 에둘러 읽고서 통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견강부회일 뿐이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저 화훈에만 따른다."


... <역문전제>의 성립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쇼토쿠(正德, 1711-1716)연간 이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 이미 '고문사古文辭'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자 철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보다 한 단계 이전의 단계에서, 곧 교호(亨保, 1716-1736) 원년 이후 <논어징論語徵> 등을 잇달아 쓰기 전에, 그런 일종의 비교언어학이라고나 할 방법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고문사'는 언어학으로서 시작되었던 것이고, 경학經學으로서의 소라이학이 형성되는 것보다 빠릅니다.


33/ 그는 <역문전제>에서 훈訓은 같지만 뜻이 다른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정靜이라는 글자도 한閑이라는 글자도 훈은 모두 '시즈카'다. 하지만 정靜과 한閑은 한어漢語, 곧 고전중국어에서 뜻이 전혀 다르다라는 데서 시작하는 겁니다... 중국어로는 다른 한자로 표기되지만 훈이 같아지고 말기 때문에, 화훈和訓으로 훈독할 경우에 일본인은 중국의 시詩나 문장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한문 독법에는 유리한 점이 있다. 오히려 중국인보다 유리하다고 말합니다. 일본인은 문법도 다르고 질적으로도 다른 중국어를 일본어로 바꿔 읽고 있는 것인데, 그것인 번역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일기 때문에 안된다. 따라서 만약 번역임을 의식하고 읽기만 한다면 중국어의 구조를 중국인 이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비교언어학이죠. "여산 속에 있는 사람은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不識廬山眞面目, 只綠身在此山中]는 식으로, 중국인은 별 생각 없이 자기 언어를 사용하니까 마치 여산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여산의 참모습을 모른다는 거죠.


34/ 이건 후쿠자와가 말한 '일신이생一身二生'과 아주 비슷합니다. 서양인이 서양문명 속에서 문명을 논하는 데 비해서, 일본인이 문명론을 쓰는 것은 '시조始造'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양인은 몇백 년 전의 봉건에 대해서 열심히 문헌을 뒤져가며 조사해야 하지만 우리는 20년 정도 전에 순수한 봉건의 인민이었고 그 생활을 전반생前半生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전반생과 후반생後半生을 비교하면 문명의 성질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서양인이 서양문명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 '유래'를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일본인의 경험 쪽이 훨씬 더 확실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곤란을 역이용해서, 오히려 자기 문제에 대해 경험을 가진 만큼 유리한 점이 있다는 거지요.


35/ 소라이는 네덜란드어를 봤던 걸까요, 아니면 어떤 식으로 의식하고 있었던 걸까요? 물론 읽지는 못했겠지만, 네덜란드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겠지요.

물론입니다. '주리격설侏離鴃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學則>). 이것은 유럽어를 말하는 것이죠.


주리侏離는 서방 야만인의 음악, 격설鴃舌은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뜻한다. 두 가지 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 말을 비유한 것이다...



36/ <학칙>에서 "중국어도 '주리격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 사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라이는 네덜란드어와 중국어를 똑같이 봅니다. 방법론으로서 탁월하지요.


... 18세기 전반기는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한역양서漢譯洋書의 수입제한을 완화해서(1720) 기독교 관련 서적 외에는 양서 수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난학蘭學이 발흥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37/ ... 소라이가 일본어를 수많은 언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그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일종의 의식혁명이지요.


40/ 소라이의 시대는 에도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지식인들이 다른 문화의 존재를 의식한 시대였고, 그 시대의 번역문제에 관해 가장 날카롭게 표현한 사람이 바로 소라이인 셈이지요.


41/ ...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呼아"라는 식으로만 읽고 있어서는 동문동종론同文同種論 같은 것이어서 동일한 문명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맙니다. 소라이는 그것을 뛰어넘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소라이가 없었다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노리나가가 기본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것은 소라이의 읽는 법이라고 할까, 특히 그의 고문사학古文辭學입니다.


44/ 이질성에 대한 인식은 가치문제로 전화되어서 일본문화 우월론으로 연결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노리나가의 경우에 단순한 일본주의로 빠지지 않은 까닭은, 소라이의 <논어징>을 통해서 다져진 방법론적인 기초가 <고사기전古事記傳>(1764-1798)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언今言을 가지고 고언古言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지금 쓰는 말의 이미지로 고전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은 두 사람에게 공통적입니다. 역사적인 차이나 이질문화의 이해라고 하는 것이 역사의식이 되어서, 옛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그 시대의 언어체계, 곧 디스쿠르discoures를 몰라서는 안된다. 현재의 디스쿠르를 그 시대에 (그대로) 투영하면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고 하는 사고방식에서는 노리나가와 소라이가 완전히 일치하는 거죠.


2부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나

70/ 중국의 경우에는 결국 '경經' '자子' '사史' '집集'입니다... 모든 인류가 '경' '자' '사' '집'인데 우선은 '경', 곧 경전이지요. 경전이란 것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타당한 聖典입니다... 그 다음이 '자', 곧 여러 가지 사상 서적입니다. 그 다음에 '사', 곧 역사책이 오지요.


72/ 중국은 영원한eternal 것에 대한 관심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일본은 모든 것을 시간의 견지aspect에서 파악하죠. 영원이라거나 항상恒常의 견지에서라는 사고방식은 거의 없습니다...


... 그러나 소라이는 "학문은 궁극적으로 역사"(<徂徠先生問答書>)라고 말했죠... 그래서 주자학의 '성리性理', 형이상학에 대항해서 역사야말로 기초이며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지요...


73/ 일본의 경우에 그 규범은 중국입니다. 동시에 유럽인은 극히 역사적이지요. 영국이든 프랑스든, 물곤 19세기 이후의 독일까지도 말입니다. 역사적인 것은 그리스-로마가 자신이 아니니까 자신의 위치를 역사적인 축軸으로 결정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리스-로마가 주욱 이어져 온 것이 중국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겁니다.


74/ 일본인에게는 사서랄까 역사책이 <논어> <맹자>보다 '애독'되었던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삼국지三國志>라거나 말이죠.

음 역사책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전국책戰國策> 같은 것도 그렇고요.

그래도 역사 이야기 아닙니까?

요시카와 고지로吉川幸次郞(1904-1980)씨도 말했습니다만, 중국의 독서인은 <전국책> 같은 것은 설령 읽었더라도 마치 읽지 않은 척했습니다...


75/ 중국에서는 소설, 곧 지어낸 이야기는 거의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요시카와 씨 말입니다만, 사실을 존중하는, 공상보다 진정한 이야기가 '문학文學'이라고 합니다. 경서는 규범이비요. 실제 인간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이야기는, 어쨌든 중국에서는 소설이 인정받지 못하니까, 결국 역사라고 하는 식이 되는 거지요. 아니면 역사 이야기 같은 게 됩니다.

음,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사실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사실을 통해서 명분을 바로 세우는(正名)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공자 자신이 <춘추>를 저술한 의도도 그랬지요. 요컨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무엇이 올바른 삶의 방식이고 또 잘못된 삶의 방식인가 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보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지, 사실에 대한 흥미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도道'라는 영원한 규범에 종속됩니다. 예술도 그렇지요. 따라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거나 역사 그 자체를 즐기는 태도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기>는 좀 다르지요 작자 쓰마첸司馬遷은 예외적인 천재입니다. 역사라고 하면 보통 '편년체編年體'가 우선 떠오르는데, '기전체紀傳體'라는 착상을 한 것부터가 그렇지요. 그런 체계적인 역사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쓰마첸이 유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예외일까요? 확실히 '태사공太史公 왈......'이라는 것마저도 교훈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교적 교훈이 아니라 프랑스인이 말하는 '모럴리스트'의 사고방식과 비슷합니다.

거기에 가깝지요. 인간성이랄지 인간적 흥미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 같은 거지요.


76/ 교훈적이 되는 건 맹자부터지요. 맹자는 윤리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라이는 다른 일본 유학자들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맹자>부터는 인정하지 않지요.


77/ ... 소라이의 해석은 도덕 교과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논어>를 해석하는 전형典型입니다.


78/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도 주자학적 도덕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진사이의 경우에는 매우 학자적입니다...


78/ 요시카와 씨의 주注도 가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1904-1987)의 주도 결국 결정적인 게 아니라 '음,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석해두지만' 하는 식이로군요.


79/ 그것은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가 소라이학 이래 절대적 권위를 상실했다고 하는 시대를 우리 또한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80/ 실제로 유교 자체가 '오경五經'으로 도덕의 일대 체계가 된 것은 한대漢代 이후입니다...

... 나아가 주자학이 '사서四書'를 설파해서 그런 경향을 틀지웠던 거지요.

거기다 과거제도가 결합되면서 차츰 그렇게 됩니다. 그런 변화는 이토 도가이(伊藤東涯, 1670-1736)의 <고금학변古今學辯>(1718년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은 정말 걸작이지요. 고금의 학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쓴 책인데, 나는 거기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자의 경우에는 '인仁'뿐입니다. '인의仁義'라는 말로 '인'과 '의義'를 병칭竝稱하게 된 것은 맹자 때부터지요. 맹자는 '사단四端', 곧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설명할 때, 예컨대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端이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그리 되자 다른 세 가지도 갖추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래서 '인' '의' '예禮' '지智'를 각각 맞추게 되자 '인의'에서 '인/의/예/지'가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 '인/의/예/지/신'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81/ 한대漢代에 '신信'이 추가되어 오상五常이 나옵니다. 마치 공자때부터 '인의예지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자는 '인의'라는 병칭조차도 언급하지 않았고 '인'밖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소라이가 장황하리만큼 말하는 부분입니다. 곧 맹자가 논쟁을 좋아했기 때문에 순자荀子나 묵자墨子에 대항하기 위해 '인의'라는 말을 꺼냈다고 봅니다. 순자에 대해 성선설性善說을 제시한 것도 논쟁에서 생겨난 설이고, 묵자를 해치우려면 '인'만으로는 안된다. 묵자의 '겸애兼愛'는 보편애普遍愛universal love 일변도가 되니까 거기서 '의'라는 것을 동시에 언급하여 차별애差別愛의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반대했다는 거죠... 이런 식으로 성선설이나 '인의'를 늘어놓는 설은 논쟁을 위해서 성인聖人의 도道를 상대화시켜 버리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이 소라이의 설명입니다. 도가이와 일치하는 것은 '오륜五倫'이나 '오상五常'이라는 규범이 어느 시대에 등장하고 그 이전과 비교해서는 어떻게 변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82/ 그건 상당히 빨랐군요.

빠르죠. 도가이의 <조자고助字考>라거나 그런 언어에 대한 관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후세의 언어 범주를 예전의 언설言說discoures로 언급해서는 안된다라는 방법론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인'에서부터 이번에는 '인의'가 되고 '인의예지'가 되고 다시 '인의예지신'이 됩니다. 그리 되자 오륜오상이나 음양오행이라는 개념이 마치 처음부터 유교철학이었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야노 후미오矢野文雄의 <역사독법>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 가운데서 책의 분류가 아주 중요하다고 하면서, 동양의 분류는 조잡하다(粗 또는 束)고 말합니다. 서양의 도서관 분류처럼 좀더 치밀해(密)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동양의 분류가 조잡하다는 증거로서 흥미롭게도 '인의예지신'을 들고 있습니다. '인의예지신'이라고들 말하지만, '인의예신'은 인간교제의 관계이자 규칙이다. 그렇지만 '지'라는 것은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서 성질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로 묶어 버렸다는 것은 동양의 분류가 얼마나 조잡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3/ 첫번째는 원인론적인 관계, 곧 인과율입니다... 대개 일본에서는 적어도 메이지 이전의 문장에서는 because에 해당하는 말이 그리 자주 나오질 않습니다. 그런데 유럽어에서는 쉴새없이 나오지요...


두번째는 지금 이야기한 '분류'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가사(歌)를 분류하든 시詩를 분류하든 예전부터 나열된 분류항목의 내용이 겹쳐 있었어요. '상호배타적mutually exclusive'이지 않죠. 그런 분류 방식은 서양인이 싫어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분류에서 보자면 이상한 겁니다...


세번째는 일반화generalization, 또는 수數의 표현방식입니다. '모두의'와 '약간의' '하나의' '어떤 하나의'라는 말을 영어에서는 관사를 사용해서 상당한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고, 또 all이나 some 같은 말로도 표현하지요.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대개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88/ 복수와 단수의 구별이 없다는 점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말은 민권民權입니다... right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권리여서, 민권이라는 의미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죠. 민권이라고들 하는데 인권과 참정권을 혼동하고 있다고 후쿠자와는 말합니다. 인권은 개인의 권리이지 인민의 권리는 아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인권, 곧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인민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민권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개인과 일반시민의 구별이 없다고 후쿠자와는 지적했습니다...


이 말을 번역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프랑스 민법의 번역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였던가요. 프랑스어 droit civil을 민권이라고 번역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재산권 등 민법상의 사권私權을 말하는 겁니다. 자유민권론과는 다르죠...


89/ 물론입니다. 하지만 자유와 민권을 연결시킬 때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학생이었을 적에는 소극적 자유, 곧 '~로부터의 자유'와 적극적 자유, 곧 '~로의 자유'가 있었지요...


90/ 유럽 정치사상에서는 인권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두 가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그것이 나누어졌지요. 인권 쪽이 자유와 연결되고 민권쪽이 평등과 연결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말하자면 자유로부터 분리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분리된 민권이 생겨났던 셈이죠...


92/ 번역의 경우에 예컨대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의 번역을 읽고 있자면, 기독교를 비판하는 문장인데, 프랑스어 원문에는 자유와 필연을 대비시킨 부분이 나옵니다. 신의 은총이 없으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대목에서, 은총이 필연이라면 인간의 자유는 없어진다. 그러나 자유가 있다면 은총이 없더라도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을 터, 따라서 '은총의 필연과 인간정신의 자유는 양립하지 않는다'라는 논지입니다...


93/ 자유와의 대비였다면 다분히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부터지요. <백일신론百日新論>(1874)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니시의 경우 사상적 연원이 콩트Auguste Comte(1798-1857)니까 철학적 소양은 가장 많았죠. 도리와 물리를 합니다. 그것을 혼동하는 것이 유교의 오류입니다만, 또 하나는 '정통orthodoxy'이라는 생각입니다... 니시는 소라이학(徂徠學)이니까 물리와 도리에 대해서는 아마 다자이 슌다이(大宰春臺, 1680-1747)의 <경제록經濟錄>(1729)에서 배웠을 겁니다. 슌다이는 물리, 곧 '사물의 이치'를 법칙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었던 거지요.


94/ 인과因果도 자주 언급하지요.

인과도 불교로군요.

원래는 인과응보因果應報니까요. 그것이 언제 인과필연因果必然이 되었을까...


95/ 인과연쇄causal chains와 같은 사고방식은 언제 생겨난 걸까요? 비근한 예로는, 사상사에서 말하자면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1715-1746)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성선설이 있고서야 성악설이 나왔다. 성악설이 생겨난 뒤에야 인간의 본성은 선/악 어느 것도 아니라는 설이 나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96/ 도미나가에게도 소라이의 영향은 있지요. 직접은 아니더라도 제자와는 접촉이 있었을 겁니다.

그의 가상설加上說인데 오래된 것에 대한 설명일수록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뭐랄까 요즘 신화학神話學의 주요 명제인데, 일본에서는 보기 드물게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명제가 아닐까요? 일본의 천지개벽론 같은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라의 시작은 이러했다고 하는 식의 당위적인 설명이 후세에 만들어지지요.


도미나가 나카모토는 오사카의 초닌(町人) 학자로서 유교 비판이라고 간주된 <설폐說蔽> 때문에 회덕당懷德堂에서 파문당했다고 하며, 불교를 비판한 역사서인 <출정후어出定後語>에서 모든 교설/언설을 상대화하는 시각, 곧 '가상설加上說'을 제시했다.



99/ 다자이 슌다이도 그렇지요.

슌다이는 훨씬 더 철저합니다. 그는 소라이가 주장한 것에 대해서, 소라이였다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파고드니까 말입니다. 결국 소라이학의 평판이 나빠지게 된 데에는 슌다이에게 책임이 있다고나 할까, 결국 슌다이가 논리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인 셈이죠.


슌다이는 유명한 말로 빈축을 샀지요. 음 무슨 얘기였더라, 결국 남의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은 악이다. 마음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상관없다......


다자이 슌다이는 <변도서弁道書>에서 "성인의 도에는 마음속에 나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예법을 잘 지켜 그 생각을 키우지 않고 몸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군자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나쁜 생각이 드는 것을 죄로 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미인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 미색에 반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이 감정에 몸을 맡겨 예법을 어기고 망령되이 남의 부녀자를 희롱하는 자가 소인일 뿐... 옳고 그름의 유무는 희롱하느냐 희롱하지 않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라 했다.



100/ 마음속에 색정色情이 일었다면 이미 간음을 한 것이다라는 성경의 신조주의信條主義와는 정반대지요... 도덕과 정치를 구별하는 것, 내면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소라이에게서 비롯된 거지만, 소라이는 그렇게까지 외면성에 철저하지는 않았는데, 슌다이는 철저하지요.


101/ 그렇습니다. 소라이에서 시작되어 슌다이를 통해 물리와 도리를 구별하는 사고방식이 등장하고 그 흐름을 계승해서 니시가 나온 거죠. <백일신론百日新論>에서 서양의 피직스physics는 물리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격물수학格物數學' 등 여러 가지로 표현했지만 말이죠.


102/ 그런데 <미쓰쿠리 린쇼 평전>*에 따르면 미쓰쿠리는 1887년(메이지 20)의 연설에서 번역사업에 대해 말하면서, '권리權利'와 '의무義務'는 중국에서 채용했다고 합니다. '동산動産', '부동산不動産', '미필조건未必條件'은 자기가 만든 신조어라고 하면서 "지금은 이 말들이 훌륭하게 통용되고 있다"고 하지요...


*大槻文彦 編, <箕作麟祥君傳>, 丸善, 1907.



103/ '민권民權'이라는 조어에 대해서는 단수와 복수의 문제를 얘기할 때에도 나왔습니다만, 프랑스어 droit civil의 번역으로서는 역시 미쓰쿠리가 1887년의 연설에서 자신의 조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民)에게 권력(權)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논의가 일어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106/ 일반적으로 신조어는 거의 모두 한자라고 해도 되겠죠. 조어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기존 한자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조합해서 쓴 경우, 두번째는 '자유'처럼 이전부터 있었던 한어漢語의 의미를 바꿔서 사용한 경우, 세번째로는 '부동산'처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 경우지요...


3부 만국공법의 이모저모

131/ 휘턴Henry Wheaton(1785-1848)의 책(<만국공법萬國公法>)에는 세계 각국을 문명화된civilized 나라와 문명화되지 않은uncivilized 나라로 분류하는 단락이 있습니다... 문명화된 나라는 서로 주권soverignty을 존중한다. 그러나 문명화되지 않은 나라에는 그런 것이 없으므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제멋대로 정벌하거나 하죠. '중간中間'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가 여기 들어갑니다. '중간' 나라에는 별다른 주장이 없으니까 이쪽 주장을 이해시켜서 약속을 맺어 지키게 한다고 하는, 결코 대등하지 않은 관계지요...


132/ 문명과 미개 같은 단계적 구분은 휘턴뿐만 아니라 진보사관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그로티우스Hugo Grotius(1583-1645) 이래 유럽의 기독교국 사이에서 원래 로마법, 게르만법, 그리스-로마의 고전, 신성로마제국의 장기 지배 같은 공통의 전통을 지닌 국민국가 사이에 발달한 국제법을, 문화도 전통도 다른 지역까지 전지구적으로 확대해버렸던 것이 현대에 와서는 문제인 것이죠.


... 그것을 이슬람이나 불교국가들처럼 가치체계도 전혀 다른 상대방에게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려는 데 문제가 있어요.


4부 사회·문화에 끼친 영향

148/ 왜 화학에 그토록 관심을 가졌을까요? 하나는 염료, 또 하나는 화약, 그것이 큰 동기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화학비료도 관심의 동기였을지 모르죠...

그런데 당시 일본의 심성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주자학적 원소元素입니다. 세계는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음양오행이죠.


149/ <문명론의 개략>을 보면 "사람의 지력과 의론議論은 마치 화학법칙에 따르는 사물과도 같다...... 석회와 요사硵砂(염화암모늄)는 모두 독극물이 아니지만 둘을 합쳐서 요사정硵砂精으로 만들면 그 기운으로 사람을 졸도시킬 수도 있다"고 했지요.


서양 학문의 방법은 실험을 하잖아요. 그게 음양오행과는 정반대로 보였을 겁니다. 방법론적으로 후쿠자와가 의식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뉴턴 역학입니다. 수학적 물리학인 거죠. 화학의 실험은 훨씬 더 일상적인 경이감을 안겨 주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험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이란 점에서 말이죠. 종래 경험적인 지식에만 의존하고 있던 일본인에게 실험experiment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신선했을 겁니다. 음양오행처럼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는 절대진리에서부터 연역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험에 의해서 비로소 올바름이 증명되어 간다고 하는 것은 당시 재능있는 일본인의 눈에는 서양학문의 탁월성을 상징했던 것일 테죠.


151/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과 자연도태natural selection의 해석은 제국주의적인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한 흐름을 만듭니다. 곧잘 이야기 되지만 옌푸嚴復 이후 중국의 진화론 수용방식과는 정반대인 셈이죠. 중국에서는 같은 적자생존이라도 약자편에 선 입장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강자/적자適者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라 제국주의의 입장이 되고 말죠.


152/ ... 중국의 경우 옌푸 이후 진화론의 영향은 결정적이고 혁명적입니다. 옌푸는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천연론天演論>으로 번역했지요. 하늘이 움직인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중국의 천天 신앙이라면 자고로 엄청난 것이었으니까요... 옌푸 자신은 역易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순수형상과 비슷한 거죠-, 곧 움직이는 것의 배후에 있으면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만물의 기초로 둡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옌푸의 소개는 중국 지식인에게 몇천 년 동안의 중국 고전철학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던 겁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유학 자체가 '리'의 계기가 약한 '기'의 철학이라서 만물유전萬物流轉과 같은 사고방식이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영원한 실재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153/ 내가 전에 '후쿠자와에 있어서 '실학實學'의 전회轉回'(1947)라는 논문에서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만, 후쿠자와는 수학적인 물리학, 곧 뉴턴의 역학체계를 서양 학문의 기초에 두었습니다. 동양에는 절대로 없고 서양에만 있는 것이라 본 것이지요. 그는 그것을 '수리학數理學'이라고 불렀죠. 이른바 '실학'이라는 것은 에도 시대에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수학적 물리학에 기반을 둔 '실학'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실학'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유럽문명은 훨씬 추상적인 '리'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라는 겁니다. 그러한 실학 개념을 후쿠자와는 끝까지 전개하고 있습니다... 후쿠자와가 그토록 유교를 혐오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154/ 존재의 법칙과 도리를 혼동하고 있다는 거군요.

그렇죠. 동양철학은 전부 그렇습니다. '도'라는 말이 다 그렇잖아요? '도'에는 두 가지 뜻이 섞여 있죠. '가야 할 길'이라는 '당위'와 객관적 '법칙'이라는 의미, 두 가지가 말입니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실학'을 자주 언급하면서도 추상적 사고의 중요성 또한 늘 주장했던 겁니다.


... 비속한 실용주의와 구별을 하는 겁니다. 아무튼 17세기 이래 자연과학의 방법이 서양문명의 비밀이라는 점을 간파했습니다.


155/ 후쿠자와의 과학관을 살펴보면, 메이지 시기 일본인의 전통적인 사유구조에서 생물학보다도 뉴턴적인 수학적 물리학의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나는 고양이다>(1905)에 나오는 이학사理學士 간게쓰(寒月) 군이 그렇습니다. 그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에게서 충격을 받지요. 생물학이라는 것은 상대가 유기체잖아요. 주자학의 경우에도 이토 진사이(伊藤仁齋)를 비롯해서 천지는 거대한 生氣라는 식으로 '기'를 우위에 두죠. '리'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무기적無機的인 자연, 뉴턴 역학의 자연은 일본의 자연관에 없던 거였어요...


156/ 후쿠자와의 말로는 양면작전이죠. '실학'이라는 말은 주자학에서 심학心學에서도 씁니다. 일상 실천의 학문이 진정한 학문이지 학자의 공론으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후쿠자와의 경우에는 <학문을 권함>의 첫 부분만 유명해져서, 일상적 실천만을 제창하고 그 밖에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초기부터 공리공론의 중요성을 언급하니까요. '허학虛學'이라는 말을 쓰지요. 그리고 그 '허학' 위에 고상한 학문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고상高尙이라는 것은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허학'이라고 할 경우의 용어 사용방식은요?

반어反語로서의 '허학'입니다. 공리공론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대목이 서양문명의 무서운 부분이라고 말하지요.

그것과 '실학'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종래의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실학'으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곧 자연과 인사人事를 철저하게 구별하는 겁니다. 후쿠자와는 "조화造化를 공략하는 것이 자유自由다"라고 말합니다. 조화라는 객관적 자연을 인간이 점점 침식해 들어가는 그 과정이 과학의 진보라는 겁니다. 이렇게 철저한 구별의 논리 위에 서양의 실학이 구축되었다는 말이죠.


과학에 대해서도 후쿠자와는 철저히 기술과 구별합니다. 기술의 기초에 있는 것이 과학이라고 근대과학을 정확히 파악하죠. 막부 말기에도 진보파는 기술 일변도였습니다... 그런데 후쿠자와는 實學이라는 한자에다 '사이엔스'라고 읽는 법을 붙이고, 실학은 기술과는 다르다고 썼지요.


157/ 그게 19세기 말의 일이군요. 서양에서도 뉴턴과 같은 추상적인 자연 이해랄까 물리학은 기술과 동떨어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철도라거나 야금술이 고도로 추상적인 물리학적 세계관과 결합되지 못하다가, 19세기 후반에 열역학 같은 것이 등장하면서 변모했던 거죠...


... 어쨌거나 동양에 없고 서양에는 있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민 독립의 정신이고 또 하나는 과학관이라고 말입니다.


158/ ...따라서 "문명이라는 것은 오류의 진보다"라는 말도 거기에서 나오죠. 가토 히로유키와 예리하게 갈라지는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가토 히로유키는 '인과당연因果當然' 일변도지요. 서양을 인과필연의 이론으로 전부 설명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천부인권 같은 것은 말도 안된다는 식이 되죠. 동양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만, 후쿠자와가 특이하게 실험에 주목한 것은 오히려 듀이John Dewey(1859-1952)의 도구주의에 가깝습니다.


유럽의 경우에 실험이라는 것은 베이컨Roger Bacon(1220?~1292) 정도부터인 것 같습니다...


160/ 토크빌Alexis Tocqueville(1805-1859)은 거의 프랑스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그는 정치가로서 현장의 사람이죠... 그렇게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냉철함, 그것은 실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 점에서는 17세기 이래 프랑스의 전통과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1533-1592), 라 로슈푸코Frnacois de La Rochefoucauld(1613-1680), 생시몽Saint-Simon(1760-1825) 등 모두 다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미묘하게 각성된 관찰력을 가졌지요. 인간의 행동을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거의 자연과학적이라고 할 만큼 임상적으로 관찰하는 경향이 토크빌까지 이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161/ ... 배젓의 책 가운데서는 <영국헌정론>이 많이 읽혔습니다. 배젓이라는 인물도 공교롭게 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입니다만, 그 감각이 모리 오가이森鷗外(1862-1922)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의 책은 '변장한 공화제disguised republic'라고 불렸죠. 군주제를 옹호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은폐된 공화제라는 뜻입니다. 권력을 dignified part와 efficient part, 곧 존엄적 부분과 실행적 부분으로 나눠서 존엄적 부분은 실제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실행적 부분이 의회입니다만 관념상의 의회인 거죠.


후쿠자와의 <제실론帝室論>(1882)이 바로 그렇습니다... 곧 후쿠치 오치福地櫻痴(1841-1906)의 천황제정론에 대항해서 썼던 건데, 그 저본이 배젓이었던 거죠.


164/ 그 밖에도 가토 히로유키가 아주 빨리 소개하고 있고, 후쿠자와도 <민정일신民情一新>(1879)에서 사회운동/사회주의라는 가공할 존재가 유럽에 발생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민정일신>에 따르면, 요컨대 기술의 진보에 의해서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면 사상이 엄청나게 빨리 전파된다. 그렇게 되면 민중에게 어떤 관념이 전파되었을 때, 정부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힘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정情에서 이성으로'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정해情海'의 파도에 사회가 휩쓸린 것이며 그것이 근대문명의 한 현상이다. 따라서 "지금 서양 나라들은 증기와 전신의 발명을 맞이하여 낭패"하고 있다는 거지요.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운동이 발생했다고,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대해서 후쿠자와는 메이지 10년대 초에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171/ 무지까지 포함해서죠. 첫째로 철도는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橫浜 사이였지만 전신은 전국입니다. 따라서 잘 아시다시피 전봇대가 세워진 때가 징병령 발포와 같은 때라서, 전선으로 인민의 피를 운반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폭동이 일어났죠. 메이지 6~7년의 혈세血稅봉기, '혈세'라는 말은 그것과 관련이 있지요...


172/ 이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사례는 히라타파平田派 국학자들의 동향이죠... 메이지 정부는 유신 직후에 히라타파 사람들을 그 신관으로 대거 임명했죠. 그런데 이제 그들을 이용할 방도가 마땅치 않자, 일대 전향인 셈이지만 문명개화의 선동에 이용한 겁니다. 그들을 전국에 파견해서 문명개화를 전파시키지요... 이건 심학 이래의 전통이고, 더 거슬러올라가자면 렌뇨蓮如(1415-1499)까지 갈지도 모르겠어요.


개화물에는 '가이지로(開次郞)'라거나 '규헤이(舊平)'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전자는 개화적이고 후자는 반동적입니다. 규헤이 쪽이 열심히 보수적인 것을 주장하면 가이지로가 되받아치죠. 문답체로 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175/ 아무튼 예술교육은 결국 서양화와 일본화, 양악과 국악의 병행으로 낙착되었죠. 그 병행에는 상호 관계가 없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다른 교사들이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화혼양재가 아니라 화혼화재와 양혼양재의 병립이죠. 자연과학 쪽은, 적어도 국립대학에서는 완전히 서양모델이고요. 모리 오가이가 말했듯이 "의학은 하나다"였죠. 따라서 한의학은 민간에 자리잡아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화혼과 양재가 대립하거나 융합하거나 여러 가지 형태로 교섭한 것은 문제가 훨씬 복잡한 정치/경제/도덕의 영역이죠. 그 복잡성이 실로 멋지게 번역의 문제-무엇을 번역했나, 어떻게 번역했나, 사회가 번역된 개념과 사상을 어떻게 수용했나 등-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 후기

178/ 번역문화라고 해서 독창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시대의 독창성은 일본어 어순으로 바꿔 읽은 한문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던 조루리(淨琉璃)나 하이카이(排諧)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문의 개념을 구사한 유학자의 사상적 작업에도 깃들어 있다. 일본 학자가 동시대 중국학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225/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