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편
중국의 과학과 기술 / 네이산 씨빈
- Sivin이 편집한 Science and Technology in East Asia(New York, 1977)의 서문 발췌역
15/ 정량적 과학분야 ...
① 수학('算') ...
② 수리화성학(數理和聲學, '律' 또는 '律呂') ...
③ 수리천문학('曆' 또는 '曆法') ...
정성적 과학분야 ...
① 의학('醫')과 약재(藥材)에 관한 지식('本草') ...
② 연금술('伏鍊') ...
③ 점성술('天文') ...
④ 풍수설('風水') ...
⑤ 물리적 연구('物理') ...
21/ 지난 5세기 정도에 걸친 신유학新儒學의 커다란 지적 영향을 생각할 때, 나는 과학의 문헌들에서 신유학의 구체적인 철학적 관점들이 너무나 드러나지 않는 사실에 당혹하게 된다...
22/ ... 예를 들어, 15세기 조선朝鮮의 두 왕王의 개인적 취향이 금속주조활자의 오랜 발전을 완결짓는 데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23/ ... 그러나 지난 1천여 년 동안 상인계층의 문화가 발전하면서 그것은 상당한 정도로 주판의 사용에 중심을 둔 특징적인 수학을 발전시켰는데 우리는 이에 대해서 연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지니고 있다.
24/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일본에서는 점성술과 천문학은 몇몇 정해진 가문들의 진정한 독점물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천문학자였던 시부카와(渋川)가家의 성공-서양 우주론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의 그들의 주도적 위치를 포함해서-은 그들이 여러 차례 재주있는 젊은이를 입양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27/ ... 스콜라 학파는 새로운 과학의 보급을 지연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저지하거나 그것 이외의 다른 것들을 지적으로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어낼 수 없었다. '과학혁명'은 맹렬한 추진력으로 대학과 교회의 확립된 제도 바깥에 새로운 지적 공동체 및 그 구성원을 위한 경력을 구성하고, 자연법칙들을 정식화定式化하는 독자적인 권위를 주장하며, 현대에 와서 기술적 조직이 된 것을 점차적으로 형성하기 위해 고대의 제도들의 특권을 없애면서, 스콜라학파의 눈앞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머튼Robert K. Merton이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과학혁명의 아시아 부분에 대한 이해를 얻어내는 작업은 동아시아의 잠재적인 '갈릴레오'와 '데카르트'를 찾고, 그들 자신의 가치나 연상聯想들에 비추어 그들 자신의 배경에 긴밀하게 바탕해서 그들을 연구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중국에서 과학적/기술적으로 다재다능했던 가장 위대한 종합 과학자 심괄沈括(1031-1095)-그의 개인적 철학은 주로 <맹자>의 영향을 받았다-과 뛰어난 천문학자 왕석천王錫闡(1628-1682)-유럽 정밀과학의 비판적 수용에 주된 역할을 했고 "주희 노선의 정통적 유가전통을 자신의 개인적 사명으로 받아들였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29/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과학적/기술적 전통들에 대한 연구와 저술은 주로 몇몇 중국학 학자들이나 중국애호 과학자들-그 방향에 취미는 지녔지만, 더 친숙하고 문제성이 덜한 전통들을 탐구하는 과학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그 주제를 연관시킬 수 있는 준비를 갖추지는 못한-에게 남겨져 있었다. 하르트너Willy Hartner와 니담Joseph Needham은 이에 대한 유럽에서의 첫번째 중요한 예외였다...
중국 과학전통의 결함과 성취 / 조셉 니담
- Poverties and Triumphs of the Chinese Scientific Tradition, 1961년 7월 옥스포드 대학의 과학사 심포지움 발표
32/ 수학과 융합됨으로써 보편성을 가지게 되기 이전까지는, 자연과학은 전인류의 공통적인 재산이 될 수 없었다... 인종에 의존하는 개념체계들의 상호 이해불가능성은 과학적 관념들의 영역에서는 가능한 접촉과 전파를 심하게 제한했다. 이것이 기술적 요소들은 구세계the Old World 전 지역을 통해 널리 퍼졌으나, 과학적 요소들은 대부분그렇지 못한 이유이다.
33/ ... 기원전 1세기까지는 중국 장인匠人들은 십진법으로 눈금이 매겨진 이동 캘리퍼스sliding calipers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작업을 검사하고 있었다. 중국의 사고는 항상 깊이 대수적代數的이었고 기하학적이지는 않았다... 서기 130년경 처음으로 실용적인 지진계를 만들었던 사람은 중국 과학자인 장형張衡이었던 것이다.
34/ 고대와 중세의 중국에서는 물리학 분야들 가운데 광학/음향학/자기학의 세 분야가 특히 발달했다... 왜냐하면 중국 수학이 기하학적이기보다는 항상 대수적이었던 것과 똑같이, 중국 물리학은 원형原型의 파동이론에 충실했고 원자에 대해서는 줄곧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분야들에서도 이런 선호의 대조를 찾아볼 수 있어서, 수차와 풍차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서양의 선조들이 바퀴를 수직으로 설치하는 것을 선호했던 데 반하여, 고대 중국의 기술자는 가능한 한 항상 수평으로 설치했다.
중국의 업적과 유럽의 업적을 비교할 때 매우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유형은, 고대 그리스와 동시대였던 주/진/한 시대의 중국인들이 그리스인들처럼 높은 경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어도 이후의 중국에는 유럽의 암흑기에 해당하는 시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37/ ... 먼저 중국의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은 유기체적 유물론organic materialism이었음을 매우 자세히 보일 수 있다...
또한 이미 언급한 대로 중국의 수학적 사고와 활동은 기하학적이 아니라 변함없이 대수적이었다... 소송蘇頌이 1088년 개봉開封에 거대한 시계탑을 성공적으로 세운 일에 앞서서, 기어의 배열과 전반적 메카니즘을 기본원리들로부터 연구해낸 그의 조수 한공렴韓公廉의 전문적인 이론적 논의의 집필이 있었다. 유럽사람들이 굴대조속장치를 지닌 그들의 최초의 기계적 시계를 만들기 6세기 전인 8세기 초, 일행一行과 양영찬梁令瓚에 의한 이러한 종류의 시계의 최초의 발명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행해졌다...
38/ 세번째로 파동과 입자의 대조가 있다. 진/한 이후 중국 사람들이 계속 몰두했던 원형原型의 파동이론은 두 가지 근본적인 자연원리인 음과 양의 영원한 상승과 하강에 연결되어 있었다. 2세기 이래로 원자론적 이론은 되풀이해서, 특히 불교도들의 인도와의 접촉에 의해서 중국에 도입되었으나 이것들은 중국의 과학문화 속에 결코 아무런 뿌리도 내리지 않았다...
39/ ... 기묘한 역설 한 가지를 말하자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세기 말 중국에 왔을 때 중국사람들이 지닌 수많은 어리석은 생각을 그의 편지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중에는 "중국사람은 수정체천구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유럽인들도 이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을 믿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47/ ... 전통 중국사회에서 어떤 과학분야들은 '정통orthodox'이었으며 어떤 것들은 그 반대였다... 천문학을 항상 정통적 과학분야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수학은 교육받은 학자들의 추구에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물리학은 특히 그것이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의 아주 특징적인 기술사업들에 기여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마찬가지로 간주되었다... 연금술은 명백하게 '비정통unorthodox'이었으며... 의학은 꽤 중간적이다...
51/ ... 중국과 서양에서의 '자연법칙lawof Nature'의 관념들 사이의 대조이다... 서양 문명에서는 법률적인 의미에서의 자연법의 개념과 자연과학의 의미에서의 자연법칙의 개념은 공통적인 뿌리로 거슬러 올라감을 쉽게 보일 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서양 문명의 가장 오래된 관념들 중의 하나는 지상의 입법자인 황제들이 사람들이 지켜야만 할 실정법positive law의 조문들을 제정했듯이, 천상에 있는 지상至上의 합리적 창조주인 신은 광물, 결정, 식물, 동물 그리고 별들이 지켜야만 할 일련의 법칙들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었다. 이 관념이 서양 르네상스 시기의 근대과학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만일 그것이 다른 곳에는 없었다면, 그것이 바로 근대과학이 유럽에서만 일어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말로 하면, 중세에 인식된 소박한 형태의 자연법칙들이 근대과학의 탄생에 필요하지 않았을까?
52/ 인간이 아닌 자연현상에 대해 법을 제정하는 하늘의 입법자라는 관념이 바빌로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 유래되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태양신인 마르두크Marduk는 별에 대한 입법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이런 관념은 그리스의 스토아Stoa학파에 의해 이어지는데, 세계에 내재한 보편적 법칙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관념은 인간은 물론 자연세계의 인간 아닌 부분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기독교 시기에는 법률을 제정하는 신이란 개념은 유대교의 영향의 유입에 의해 크게 증가되었다. 중세를 통해 계속해서 인간 아닌 자연에 대한 신의 법 제정이라는 관념은 어느 정도 상식으로 남아 있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이 은유는 실제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자연관은 이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에 의존했다. 모든 존재들의 조화로운 협동작용은 그것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지상至上의 권위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질서있고 유기적인 유형을 형성하는 전체들의 위계 속의 부분들이라는 사실로부터 연유했으며, 그것들은 단지 그것들 자신의 본성의 내적 명령에 복종할 뿐이었다. 중국인의 법의 관념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자연법칙이라는 생각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첫째로, 중국 사람들은 일찍부터 봉건제에서 관료제로의 이행기 동안에 법가에 속했던 정치인들의 실패로 끝난 독재로부터, 정확하게 정식화定式化된 추상적 성문법에 대한 큰 혐오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관료체계가 마침내 세워졌을 때, 받아들여진 관습과 좋은 습속의 형태로서의 자연법이라는 오래된 관념이 다른 어느 것보다 중국사회의 전형적인 형태에 더 적합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에 따라 실제로 자연법의 요소는 유럽 사회에 비교해서 중국에서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러나 그것의 대부분은 공식적인 법률 형태로 자리잡지 못했고, 그 내용이 압도적으로 인간에 관계되고 윤리적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의 범위를 인간 아닌 자연의 어떤 형태로 확장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한 점으로, '절대자'라는 생각들은 비록 아주 초기부터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곧 비인격화되었으며, 이것은 창조의 관념을 아주 극심하게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 아닌 자연을 위해 천상의 입법자가 제정한 법칙이라는 관념의 발전을 처음부터 막았다. 따라서 만일 절대자가 아닌 보다 덜 합리적인 다른 존재들이 관찰, 실험, 가설, 수학적 추론의 방법들을 사용한다면 위대한 합리적 절대자의 법칙을 해득하거나 재형성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은 뒤따르지 않았다...
53/ 근대과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자연법칙에 명령이나 의무와 같은 관념의 잔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가정한다. 자연법칙은 이제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만, 또는 명시된 크기의 차원에서만 유효한 통계적 규칙성이며, 처방處方이 아닌 기술記述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통계적 규칙성과 그 수학적 표현의 인식이 서양과학이 실제로 밟아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54/ ... 표의문자가 중국에서의 근대과학의 발전에 대한 강력한 저해요소였다는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진 관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향이 일반적으로 크게 과장되고 있다고 믿는다...
56/ ... 모든 시기에 있어서 그들이나 심지어 부유한 상인들의 아들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야망은 관료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중국문화 속의 상인계급이 국가에서 힘있고 영향력 있는, 이를테면 유럽에서 상인계급이 르네상스 시대에 얻어냈던 지위와 비슷한 어떤 것을 획득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했다... 서양의 과학사학자들은... 모두가 15세기로부터 복합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르네상스는 종교개혁 없이는 생각될 수 없고, 종교개혁은 근대과학의 출현 없이는 생각될 수 없으며, 이들 중 어느 것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의 출현 그리고 봉건제도의 쇠퇴 및 소멸 없이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었다...
58/ ... 이러한 사상가들에게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의 행성운동의 설명에 유클리드의 연역적 기하학을 적용한 것이 이미 과학의 정수였으며 르네상스는 이를 전파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이에 상응하는 것은 비유럽문명들에서의 모든 과학적 발전이 실제로는 기술에 지나지 않음을 보이려는 결의에 찬 노력이다.
학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고대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이집트 및 고대 중국과 인도의 기술적 업적들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과학의 본질적 요소, 즉 과학적 설명과 수학적 증명에 대한 일반화된 관념을 결여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영구적이고 균일하며 추상적인 질서와 법칙들-그것으로써 세상에서 관측되는 규칙적인 변화들이 연역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의 가정에 의해, 그리고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과 경험적 검증의 원리들에 따라 맞추어진 과학이론의 일반화된 사용이라는 뛰어난 생각에 의해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자연과학을 발명한 것은 바로 그리스인들인 것 같다. 서양의 과학적 전통이 관심을 두어왔던 과학적 방법론과 과학철학의 주된 문제를 도입한 것은 과학적 설명에 대한 이러한 본질적인 그리스인들의 생각-그 논리적 형태에 있어 '유클리드적인'-이다.*
*A. C. Crombie, "The Siginifcance of Medieval Discussions of Scientific Method for the Scientific Revolution,"... 79면
60/ 여기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말은 1953년에 그가 캘리포니아의 산 마테오San Mateo에 있는 슈비처J. E. Switzer에게 보낸, 지금은 유명해진 편지에 들어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슈비처 선생 귀하.
서양과학의 발전은 두 가지의 위대한 업적들,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한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형식논리학적 체계의 발명과 체계적 실험에 의해 인과관계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의 발견(르네상스기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중국의 현인들이 그러한 단계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발견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인 것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61/ ... 중국의 수학은... 항상 압도적으로 산술적이고 대수적이었으며, 십진법의 위가place-value체계, 소수 및 십진법 도량형, 음수, 부정해석indeterminate analysis, 유한차finite difference 방법, 고차의 수치방정식numerical equation의 해법과 같은 개념과 방법들을 만들어냈다...
중국 전통과학 연구의 문제들 / 김영식
84/ 예를 들어 우리는 전근대의 서양에 여러 과학분야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이론적 지식의 전통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적 활동의 당당한 형태로서 그 분야들은 중세 대학들에서 비록 초보적이고 부수적이기는 하지만 제도적 기반을 획득하기까지 했다. 서유럽의 지식인들이 17세기의 '새로운 과학자들'이 새로운 대답을 내려줄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질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서유럽 문화에 이러한 과학지식의 전통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로 니담의 연구 덕택에 이제 우리는 중국의 전통사회에도 전문적인 자연지식의 전통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전통들은 실제적 목적, 이를테면 달력/치료/점/제조 및 전쟁 등에 이용되는 기술적 지식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이론적이거나 '지적' 흥미를 가지고 탐구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전통들은 중국의 지적 세계의 주류로부터는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85/ 최소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 전통사회의 학문에서 자연지식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세 서양에서의 위치보다 훨씬 더 보잘것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유럽 중세대학의 교과과정과 '사' 계층의 교육에서 표준적 교재로 쓰였던 <신유학선집>들의 목차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반면에 <주자어류>(1270년 편찬)와 <성리대전>(1415년 편찬)과 같은 신유학의 표준선집들에서 자연계에 대한 지식은 훨씬 더 작은 지면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베이컨, 홈즈, 데카르트, 메르센느Mersenne와 파스칼 같은 17세기 유럽의 주요 사상가들이, 회의론과 여러 非아리스토텔레스 학파들의 사상적 도전으로 인해 발생한 지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연세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반면에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중국의 사상가들은-예를 들어 왕양명과 명明 말의 과격했던 태주泰州학파나 더 정통적이었던 동림東林학파 양쪽이 모두-인간의 심성 및 도덕적 수양의 문제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87/ 중국의 관료제에는 역법과 수학 및 의학 전문가들을 위한 부서가 있었다...
88/ 그러나 관료제가 더욱 발전하면서, 특히 정부가 주희의 체계를 과거시험의 기본을 형성할 전통적 해석으로서 채택한 元 이후로는 관리들의 전문분야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89/ 만약 주희의 태도가 '사' 계층의 태도를 대표한다면, '사' 계층은 전문가들에 대해 얕보고 경멸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주희는 역법에 관한 문제이더라도 자신이 보기에 역법 전문가들의 협소한 전문지식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문제들에 관해서는 그들을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90/ ... 예를 들어... 고대의 명가와 묵가... 필자가 보기에 이 두 집단의 방법들과 관련해서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점은 그러한 엄밀한 방법들이 후대의 중국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96/ 중국의 사상사에서 중국의 전통과학 연구와의 연결을 이루어낸 분야가 적어도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도교에 관한 연구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과 도교와의 관련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듯하다. 니담이 '정통'orthodox과학이라 불렀던 수학/천문학/화성학 등 많은 과학분야에서 도교에 대한 관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99/ 필자가 감히 주창해온 '사' 계층의 사상에 있어서의 기본적 개념 및 가정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중국의 자연지식 발전이 밟는 구체적 경로에 대해 우리의 이해를 도와줄 수 있다...
100/ ... '이'는 다만 사물이 그와 같이 존재하고 현상이 그와같이 일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사물의 존재나 현상의 발생을 위한 일종의 필요조건을 나타낸다. 주희 자신의 말을 빌면 "이것을 위한 '이'가 있어야만 이 사물이나 이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이'는 그 사물이나 현상 자체 이상의 내용은 거의 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희가 '이'를 언급했을 뿐 '이' 자체를 분석한다거나 연구하지 않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질문했던 것은 "그러한 '이'가 있느냐?"-물론 그것이 있다면 그것에 해당하는 사물이나 현상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하면서-같은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이'의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의 존재 여부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주희와 그 제자들은 "어디에 '이'가 존재하는가?" "어디서 '이'를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심지어는 "어떻게 '이'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신유학에서 중심적이었던 '격물'의 노력이 비록 사물의 '이'를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지적인 동기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고 학문적 노력만이 아니라 '정靜'과 '경敬' 상태에의 침잠을 추구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101/ 신유학자들의 사상에서 또 하나의 근본적인 개념은 기인데, '기'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구성하고 모든 현상의 밑에 깔려 있다. '기'의 개념에 대해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기'가 취/산/흥/강/굴/신 등 여러 형태의 작용과 움직임을 겪지만 이러한 것들이 '기'의 본질적인 성질이고 외적인 원인의 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사' 계층이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형태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어떤 현상이 일단 '기'의 어떤 작용과 운동으로 인한 것이라고 정해지면 그 현상은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용과 운동들은 '기'에 내재하며, 그것들의 외적 원인들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02/ '기'의 작용과 운동들의 외적인 원인을 찾을 필요의 부재는 더 나아가서 그같은 작용과 운동들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왜 어떤 작용과 운동이 어떤 특정한 현상을 일으키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을-을 막는 역할도 했다...
... 대부분의 경우 자연현상들은 인간이 그것들을 관찰한 형태 그대로 그냥 받아들여졌다. 주희에게 더 중요했고 고려할 가치가 있었던 것은 도덕이나 사회 분야의 더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104/ ... 주희 같은 신유학자들은 세계의 실재성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주장과 내세 위주의 불교 및 도교의 주장을 구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이러컬하게도, 실제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신유학자들의 강조가 그 실제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수 있었을 바로 그 개념들에 대해 그들이 상세하게 고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묵가와 중국 고대의 배경 및 가능성 / A.C. 그레이엄
Graham의 역저 Later Mohist Logic, Ethics and Science (London, 1978)의 서론 부분(3~25면)
109/ 중국의 제자백가 시대에 논쟁하였던 학파들 중에서 공자(기원전 551~479)의 유산에 가장 먼저 도전한 것은 묵가였다. 우리는 기원전 4~3세기 전체를 통해 하나의 조직된 집단으로서 그들을 보게 되는데, 이 조직된 집단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으면서 10개의 구체적 이론(十論)을 신봉했고 '거자鉅子'라고 불리는 한 명의 수령을 받들었다. 기원전 3세기까지 묵가는 서로를 '이단'(別墨)이라고 부르는 세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기원전 221년 진秦왕조에 의한 철학자들의 탄압 이후에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십론'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묵자>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십론'의 각론은 세 분파에 의해 보존된 공통된 구전의 기록들로 짐작되는 상/중/하 세 편으로 되어 있다.(상/중/하로 나누어지는 형태가 3분파의 이설에서 연유한다는 견해는 兪樾이 처음으로 제기했다. 孫詒讓, <墨子閒詁>(북경, 1954)의 서문 참조) 이 책은 그 학파의 창시자인 묵적墨翟에 대해서 의외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그는 어떤 특정한 나라와 연관을 갖고 있지도 아니하였다. 핵심이 되는 장들은 묵자 자신이 한 것으로 알려진 말들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 중에는 공자의 <논어>와 같은 형태로 그의 대화들을 모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를 기원전 5세기 후반의 인물로 추정하게 한다. 그러나 묵가 내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이 후에 각색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묵자 자신에 대한 기록은 하나뿐인데, 그것은 그가 군사기술자로서의 기량에 의해 송宋을 구했다는 얘기이다.
처음 봐서는 묵가의 '십론'이 지닌 의미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현대의 독자에게는 30편의 제목이 종교('天志', '明鬼'), 철학('非命', '兼愛'), 정치('尙賢', '尙同', '非攻'), 잡다한 도덕적 문제('節葬', '節用', '非樂') 등 묘하게 이질적인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집단을 학파로보다는 하나의 교단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들은 '겸애'의 원칙에 기반을 둔 엄격한 도덕성을 주장하고 사치와 음악과 같은 무익한 오락을 비난하였으며, 하늘과 귀신들이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형벌을 내릴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유가의 회의론과 숙명론을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가는 또한 활기차고 독자적인 사상가들로서, 모든 전통적인 도덕이 사회적 유용성에 의해 검증되도록 하였으며, 혁신을 명백히 옹호하였고, 출생 신분이 아닌 능력을 발탁의 근거로 삼는 새로운 종류의 중앙집권국가-봉건질서의 잔재로부터 출현하고 있음을 유가가 개탄하던-를 지지하였다.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도전자로서 그들은 합리적인 논쟁을 통하여 자신들의 원칙들을 옹호한 중국 최초의 사상가들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300년까지 묵가의 종교적인 측면은 고대 중국이 이룩한 이같은 가장 합리화된 체계 속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111/ 고대 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논리적이어서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 묵가는, 또한 가장 평화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군사적이기도 하다. '십론' 중의 하나는 그들의 '겸애' 원칙의 논리적 귀결로서 모든 군사적 침략에 대한 비난이다. 그러나 그들은 방어적인 전쟁을 단지 허용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문으로 삼았다. 그들은 종교적/철학적 집단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집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묵자>의 마지막 20편은 전쟁과 방어전술에 할애되어 있다. 여러 학파의 철학이 혼합된 백과전서인 <여씨춘추>(기원전 240년경)에는 묵가집단의 장인 맹승孟勝이 초楚의 양성공陽城公과 그의 도시를 방어하기로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기원전 381년 양성공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맹승은 약속을 파기하느냐 아니면 가능성 없는 전투에서 초의 묵가들을 희생시키느냐 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송나라의 한 묵가에게 '거자'의 지위 계승을 고하기 위해 사자를 보낸 후에 그는 83명의 제자와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두 명의 사자도 새로 지명된 거자의 명령을 어기고 송으로부터 돌아와 그들과 함께 죽었다.
113/ 그러나 묵가가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는 더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중국 고대사상가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묵가의 움직임이 도시의 상업이나 수공업 분야에서, 다른 면에서는 고대 중국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강한 증거가 있다. 유가가 자신을 그 유래가 불분명한 이름인 '유儒'로 불렀듯이, 묵가는 그들 스스로를 '묵자' 혹은 '묵'이라 불렀는데, 만일 그것이 성이 아니었다면-한漢 이전의 어떤 다른 학파도 창시자의 성에 의해 명명되지는 않았다- '묵적'이란 단순히 이름만 '적'이라고 알려진 묵가의 낮은 계급의 사람으로 보여진다. 어떤 경우에는 왕이 천인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이유로 해서 주周의 혜왕惠王과의 면담이 거절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묵자>에는 그가 결코 설교자나 논쟁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일화가 있다. 즉 공수반公輸盤이라는 기술자가 송宋 수도를 초楚의 군대가 공격할 수 있는 운제雲梯라는 기계를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초로 가서, 공수반에게 그의 아홉 가지 공격을 모두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공수반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자신의 추종자 300명이 이미 송의 성벽을 방어하는 기계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죽여도 소용없다고 얘기하였다. 초에서 돌아오는 길에 묵자는 송을 지나다가 비를 피하려 하였으나 한 수문장이 그를 거절하였다. <묵자> 중의 군사 기술에 관한 편들은 그것들이 확실히 장인에 의해 씌어졌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명백히 반영하고 있다... "당신이 만든 연은 내가 만든 수레의 빗장 하나만큼도 가치가 없소. 잠시 동안에 깍은 세 치의 나무조각으로 50석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소." 이 얘기는 비유적인 의도였던 것 같지는 않은데 묵자가 수레를 만드는 목수였다는 학설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115/ ... 후기의 저술에 드러나는 그들의 사회적 배경은 여전히 기술과 상업 분야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추상적인 주제인 논리학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예들 중에 화폐(상 14, 75), 매매(상 85, 하 3), 가격(상 88, 하 6), 목수일(하 10), 부유한 상인(하 53)에 대한 거듭된 언급을 보게 된다...
117/ ... <좌전>의 상세한 기록은 유감스럽게도 기원전 463년에서 끝나버리지만, 묵가가 등장한 시기인 기원전 5세기에 그들 자신과 백성 전체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종류의 군주를 자신들이 지지할 만한가에 대한 자신들 나름대로의 관념을 형성했을 장인들이 존재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기에는 충분하다.
118/ 묵가의 행동이 중국의 중심적 전통과 거리가 멀고, 그 이론이 외견상 서로 맞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급작스럽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점 등은 묵가집단이 상인/장인 그리고 몰락귀족들의 융합이고 봉건질서가 해체됨에 따라 도시들에서 잠깐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였지만 곧 새로이 관료체제화한 제국에 의해서 그들 본래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벌레 같은 하층신분으로서의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귀족계층의 문화적 세련미는 그 자신 및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매달려 살고 있는 물자들을 낭비하는 그들의 사치스러움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다...
119/ 묵가의 유일한 전통은 수공업이었고, 급속한 사회적/기술적 변화의 시기인 당시에 있어서 혁신은 수공업 전통들의 일부였다. 장인은 제공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주의를 끌었으며, 만일 그가 (묵자와 공수반公輸盤처럼) 새로운 전쟁용 기계를 발명하면 가장 큰 주목을 받을 것이었다. "군자는 따를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君子循而不作)는 유가의 교훈에 대해 묵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예羿는 활을 창시했고, 여伃는 갑옷을, 해중奚仲은 수레를, 교수巧垂는 배를 창시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갑옷이나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는 모두 군자이고, 과거의 네 명의 발명자는 모두 소인이란 말인가?..."...
120/ 귀족적 도덕률에 대한 묵가의 가장 깊은 반감은 그것이 분열을 조장하며 자신의 가족과 주군에 대한 의무를 다른 어떤 사람의 이익에 우선하도록 하라고 군자에게 요구한 데 있다... 묵가는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게 될 도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일한 원리에 의해 통일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121/ 정치에 대한 묵가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인과 공인들이 15세기의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에서의 상인과 공인처럼 중앙집권화와 관료화가 지방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비호해주고 자신들이 세상에서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에 절대군주제를 환영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묵가가 의심하지 않는 주周의 교의 가운데 하나는, 만약 천자가 하늘을 거역하면 그의 신하들의 궁극적인 충성은 하늘로 향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유가에서 인정하는 '혁명의 권리'에 동의했다...
122/ 유가사상과 같은 귀족제적 율법은 '죄'보다는 수치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다... 유가는 하늘이 인격적 존재인가 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하늘과 귀신에 대해 그들의 관습적인 존경을 표시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묵가는... 그들의 지배자들이 자신들 역시 더욱 높은 존재에 종속되어 있음을 잊어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유가인 공맹이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군자는 제사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것은 "손님이 없는데 손님에 대한 예절을 배우고, 고기가 없는데 어망을 만드는" 것과 같다.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명非命'의 이론들의 설명은 길흉의 변화를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것을 그만두고, 하늘과 귀신이 선한 이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내린다는 점을 깨닫게 되어야만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123/ ... 묵가는 새로운 보편적 도덕을 주장하기 때문에 자기 동료들이 존중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재가를 요청했다... 그는 세력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심판을 내릴 인격적인 신에 의해 정해진 보편적 도덕을 갖춘 중동의 大종교들과 같은 방향으로 이끌린다...
처음 보기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합리주의자들은 유가였다는 생각을 가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유가의 현세적 속성은 합리적 추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제공하는 자신의 상은 단지 공유된 가치들의 체계에 있어서 보다 성숙되고 보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서였을 뿐이다. 그의 학파는 다른 학파로부터, 제일 먼저 묵가로부터 도전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합리적인 논의에 들어가지 않았다. 초기 묵가는 당시의 최고급 문화로부터 제외된 무식한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근본주장들이 새로왔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논거를 부여해야만 했다. '십론'을 변호하는 30편 각각은 의심하는 이들을 확신시키기 위한 논거들을 공들여서 모아놓은 것이었다. 논의들 중 어떤 것은 유치해서, 예를 들면 '명귀'편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세 가지의 기준-즉 고대의 권위, 보통의 관찰, 실용적 결과-을 적용함으로써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회의론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박하고 있다. (1) 모든 동네에 귀신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있다... (2) ... <시경>과 <서경>으로부터의 인용들에 의해 귀신의 존재를 믿었음이 증명되는 고대 성왕의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다. (3) 만일 귀신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더 착하게 행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중국에서의 합리적 논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0년 정도 안에 묵가는 모든 고대 중국 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정교한 학파로 발전하게 되었다.
124/ 기원전 350년경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개인주의자 양주楊朱였다...
유가와 묵가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커다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열자>(서기 300년경)에 실려있는... 묵자의 수제자인 금활리禽滑釐는 "만일 당신 몸의 털 한 개로 세상을 도울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일을 하겠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양주를 당황케 했다. 양주의 제자는 "만일 당신 수족 가운데 하나를 잘라서 한 나라를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일을 하겠는가?"라고 물음으로써 공격적 입장을 되찾았다...
125/ 양주에 대해 직접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의 개입이 유가 및 묵가의 기본적인 가정들을 위협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진로로 집어넣은 형이상학적 위기를 야기시켰던 것 같다. 그의 진정으로 폭발적인 공헌은 제3의 상상적 경향으로서 다른 것들과 나란히 발전했을 따름인 그의 개인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한 그의 '성性'이라는 개념이다... <여씨춘추>에 기술되어 있는 개인주의는 손해와 이익을 신중하게 고려한 뒤 적당하게 욕망에 탐닉하는 일종의 쾌락주의로서, 500년 뒤에 <열자>에서 양주의 것으로 돌려진 분별없는 쾌락주의와는 판이하다. 그것은 <회남자>(기원전 130년경)에 기술되어 있는 양주의 가르침인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며 진실됨을 보존하고 외부적인 것을 위해 몸을 곤경에 빠뜨리지 말라"(전성보진全性保眞, 불이물누형不以物累形)는 것과 부합된다.
우리의 본성을 완수하는 삶의 방식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늘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유가와 묵가가 가상하듯이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하늘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났을 때 하늘이 우리 몸 속에 주입시킨 생명의 경향들과 자연 그대로의 성향들을 키우고 조화롭게 함으로써 하늘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127/ 모든 사물의 현존하는 형태에 대해, 길흉의 제어할 수 없는 우연들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본유적이고 그 의지와 관계없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힘인 하늘이 우리의 살아가야 할 원칙들도 정했다는 것은 결코 문제시된 적이 없다. 어떻게 그 지고한 힘이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훌륭한 모든 것의 편에 서지 않을 리 있겠는가? 이제 비로소 형이상학적 의문이 중국 사상에 들어갔고 하늘과 인간, 존재와 당위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늘이 양주의 편이라면 유가와 묵가의 도덕은 무엇에 의존할 것인가?
이같은 문제가 제기되면서 중국 철학은 성숙되었다. 공자의 <논어>를 염두에 두면서 묵자/양주에 대항하여 유가사상을 옹호하고 나선 맹자(기원전 371~289년경)에게 눈을 돌리면, 우리는 새롭고 보다 높은 수준의 철학적 관심으로 올라가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거나, 중립적이라거나, 또는 어떤 인간은 선하고 어떤 인간은 악하다고 하는 세 가지 이론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맹자은 양주의 도전에 대해 충분히 대응한 최초의 이론인 제4의 이론을 제시했다. 논쟁이 그의 관심을 내부로, 즉 외부적인 관습이나 추상화된 도덕원리로부터 선과 악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내적 명령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도덕적 성향은 인간 본성의 자연적인 경향들에 속하고 그것들의 허약함을 공유하며, 인간의 본성은 그 근본에서 선하고, 인간을 금수와 구별짓는 도덕적 잠재력을 완수한 성인만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충분히 실현했다고 결론지었다... 기원전 3세기에 순자는 하늘의 도와 인간의 도 사이의 틈을 인정하고,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도덕은 하늘이 인간에게 심어준 상충하는 욕망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이후 1500년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놓고서는 여타의 철학적 문제가 다 죽어가는 듯할 때에도 논쟁이 계속되었다. 다만 송대(서기 960~1279)에 오래된 문제들이 불교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개념들과 관련해서 재고되면서야 맹자의 해결책이 신유학의 정통이 된 형태로 마침내 천명되었다.
128/ 개인주의자들에게도 하늘과 인간의 분리는 그들이 출발했던 분별있고 안락한 쾌락주의를 무너뜨리는 더 과격한 의미를 금방 드러내었다. 양주로부터 도가인 장자(기원전 369~286년경)로의 단계는 공자에서 맹자 또는 초기 묵가에서 후기 묵가로의 단계와 같은 거리였다. 나의 본성을 따름으로써 내가 하늘과 합일된다면, 생각하는 자아로서의 자발적인 과정으로부터 나 자신을 떼어내고 이익과 손해의 원칙-유가에서의 옳고 그름만큼이나 인위적인-에 따라 하늘이 만들어준 나의 성향들을 조작하자마자 나는 하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옳고 그름, 이익과 손해에 관한 모든 판단을 포기하고, 하늘로부터 인간의 최초의 분리인 자아의 주장을 정지하고, 우리의 내부와 외부에서의 끝없는 소멸의 과정으로부터 더이상 우리를 구별하지 않는 순전한 자발성에 굴복함으로써 하늘과 인간 사이의 틈을 해결하라고 권고했다. 우리는 이기적인 욕망이나 도덕적 요구에 의해 도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일을 그만두자마자 도와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보다 심오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서로 경쟁하는 대답들이 증가되면서 지적 논쟁의 질이 급속히 향상되었다... 기원전 4세기 말에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과 같은 궤변가들인 '명가'가 나타났는데, 그들은 '박애'를 옹호하고 침략적 전쟁을 비난함에 있어서는 묵가와 유사했지만, 아울러 변론 그 자체를 위한 변론을 행했다. 그들은 주로 그들의 역설paradox들 때문에 관심을 끌었는데, 그 가운데 공손룡이 말한 "흰 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역설은 표준적 궤변이 되었다. 궤변가들은 말의 수출에 대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흰 말을 국경을 넘게 하는 데 그 궤변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에 대해서는 단지 <장자>와 <순자>에 설명없이 나열된 궤변들과 <공손룡자>(서기 300~600년경의 위작)에 남아 있는 두 편의 믿을 만한 소론들인 유명한 '백마白馬', '지물指物'과 그리고 아마도 '좌우左右'의 대화편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 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뽑아놓은 것이며, '명실名實' 무후無厚' '무궁無窮' '동이同異' '견백堅白'에 대한 그들의 탐구가 단지 역설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목적만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는 금활리와 맹자가 양주의 이론에 함축된 실용적 의미라고 보았던 것-즉 세상을 구하기 위해 털 하나도 내놓지 않겠다는 것-을 양주가 실제로 설교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는 것과 같다...
130/ '오승삼지五勝三至'를 갖춘 변론의 한 종류는 유감스럽게도 현존하는 문헌에는 어디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기원전 4세기경의 사상가 추연鄒衍-전통적으로 오행학파와 연관되어 있는-에 대한 이야기에, 유가의 <한시외전韓氏外傳>에, 그리고 법가적 양상을 띤 구절들을 후세에 모아놓은 <등석자鄧析子>에 보인다. 추연의 것은 그가 공손룡을 방문한 자리에서 '흰 말' 논의에 대해 답변한 것이라고 한다.
131/ 새로운 변론의 기술은 기원전 3세기의 모든 학파에 각각 다른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장자는 혜시惠施의 친구로서 그와 논쟁하면서 그의 논리를 조롱했다. 중국에서 논리가 처음으로 인식되던 시대에 살았던 장자는 최초의 의식적인 反합리주의자였던 것이다... 두번째 경향은 유가의 순자와 법가의 한비자(기원전 233년 사망)에 의해 대표되는데, 한비자는 마키아벨리처럼 제후들의 실제 정치에 입각하여 그의 정치론을 세우고, 하늘과 하늘의 '道'의 초도덕성으로써 그 무자비함을 정당화했다. 둘은 다 변론술에서의 방법들을 자유롭게 이용하는데, 특히 <순자>의 정명正命편과 한비자의 저술로 알려진 해로解老편이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다. 자신의 용어를 정의하지 않은 채 행하는 논의의 무용성과 같은 변론에 관한 몇 가지 교훈들은 기원전 3세기의 모든 중요한 사상가들이 알고 있는 바였다... 세번째 관점은 묵가에 의해 대표된다. 그들은... 논리만이 그 문제들을 확실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론에 전적으로 정진했다...
132/ ... 묵가 역시 상황의 변화와 옛 권위의 무용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변론에서 시간의 경과에도 끄떡하지 않는 확실성과 영원한 논리적 필연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133/ 다른 학파와 마찬가지로 묵가도 형이상학적 위기에 의해 그들의 근본 주장들을 기초로부터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장자>의 마지막 편은 '경經'에 관한 묵가의 논쟁을 잠깐 비추고 있는데, 이 '경'이란 아마도 묵가의 기본 '십론'인 듯하다.
상리근相里勤의 제자인 오후五侯를 추종하는 무리와 고획苦獲, 기치己齒, 등릉자鄧陵子와 같은 남방의 묵가는 모두 <묵경>을 암송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고, 서로를 '이단'(별묵別墨)이라 불렀으며 '견백' '동이'에 관한 변론으로 서로를 헐뜯었고, 짝이 맞지 않는 언사로써 서로 대답했다.
이와 비슷하게 한비자도 묵가가 세 분파로 나누어졌음을 기술했는데, 그 지도자들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은 <장자>의 그것(상리씨相里氏, 상부씨相夫氏, 등릉씨鄧陵氏)과 일치된다. 이 가운데 어느 분파가 그때부터 묵가가 착수한 위대한 사업-암송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틀림없는 짤막한 '경'들과 처음엔 구두에 의한 유동적인 것이었겠지만 멀지 않아 별도의 모음으로 문자화된 '설說'들로 이루어지는 묵가의 변론의 포괄적 대저술의 편찬-에 참여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사업을 대략 기원전 300년경으로 추정하는 것이 편리하겠지만, 이보다 상당히 이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3세기말까지 계속되었을 수도 있다. 변론에 관한 모든 저술은 '경'과 '설'을 관련시켜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체 자료의 발전에 세 단계를 구별할 수 있다.
134/ (1)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문헌은 단편적인 <어경語經>이다... 첫 부분은 양주에 의해 도입된 '性'의 개념이 유가와 묵가에서 빚어낸 혁명적 의미들을 인정한다. 만일 한 인간이 그의 악한 성향이 자신의 본성에서, 따라서 하늘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하면, 그에게 하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촉구하는 일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어경>은 하늘의 권위와는 관계없이 개개인의 이익과 손해, 욕망과 증오에 입각하여 세워진 윤리체계의 기초를 세웠다.
같은 시기에 묵가는 자신들의 '십론'의 모든 단어의 의미를 규정함으로써 받아들여진 정의定義들의 목록을 모으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문서는 유감스럽게도 유실되었다...
(2) '경'과 '설'은 정의들(상 1~87)과 명제들(상 88~ 하 82)의 두 부분으로 분리되어있다. 그것은 윤리학에 대한 명제가 없는 점(이는 <어경>에 포함될 수 있었을 것이다)을 제외하고는 서술의 절차, 윤리학, 과학과 논리학 등 묵가의 학문의 모든 범위를 포괄한다...
135/ ... 구문을 규칙화한 것과 각각의 문법적 기능에 따라 오직 하나의 조사만을 엄격하게 사용한 일은 아주 일관성 있어서 신중한 결정에 따른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3) 이와 같은 구조를 완성한 뒤에 어떤 주장을 하는 '명제'와 그렇지 않은 '이름(名)' 사이의 차이-'경'에서는 간과된-를 누군가가 인식하였다. 불완전하기는 하나 논리적으로 모순/비약이 없는 논술이며 아마도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씌어졌을 <명실名實>은 새로운 서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 공자에서 한비자에 이르기까지의 다른 사상가들은 철학적 논의를 도덕적 주장과 실제적 설득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했거나 그러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후기 묵가의 경전은 결코 설교하지 않았다. 그것이 도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순전한 윤리학이었던 것이다. 비판을 위해 선택된 명제들은 때로는 다른 학파의 명제들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그것들을 제안한 사상가의 이름을 들지 않은 채로 그것 자체의 가치에 바탕해서 고려되고 있다...
136/ 묵자가 정자程子와 논쟁을 벌이면서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정자가 말하기를 "당신은 유가가 아니거든 어찌하여 공자의 말을 인용하는가?" 묵자가 말하기를 "이 말은 공자의 말 중에서 아주 맞는 말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없는 말이다......"
중국 우주론의 형성과 전개 / 山田慶兒
중국의 시간 개념과 역법曆法 / 네이산 씨빈
210/ ... 중국인들은 그들의 초기의 수리천문학mathematical astronomy에서 이 여분들이 누적되어서 19년 동안에 거의 정확하게 7개월이 되고, 따라서 19년이 235([12X19]+7)개월과 같음을 인식했다... 해(年)와 달이 함께 시작할 수 있는, 즉 초승달이 이론적으로는 천문학상의 1년이 시작하는 동지에 생길 수 있는 것은 19년마다 한 번씩뿐이었다...
212/ ... 19년은 대략 6,940일이고 한 달의 평균 날수(29.53일)로 이것을 나누면 235가 나온다.
중국 천문학자들은... 예를 들어, 목성은 하늘을 한 번 도는 데 대략 12년이 걸리고 기본적인 태양과 달의 사이클은 19년이기 때문에, 이 세 천체들이 모두 그들의 출발점으로 함께 되돌아가는 데에는 228(12X19)년이 소요될 것이다... 그들이 다섯 행성들 모두와 일식/월식 등등을 다루게 되면 이들 주기들 모두의 최소공배수는 엄청나게 큰 숫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실제로 약 2천 년 전 이들 싸이클들의 첫번째의 완전한 체계가 얻어졌을 때, 전체 싸이클은 23,639,040년이라고 밝혀졌다... 모든 싸이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때-... 모든 행성들이 실에 꿰인 구슬들같이 일직선상에 놓였을 때-를 우주의 최초상태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아주 근본적인 의미에서 '시간이 시작된' 순간이다. 똑같은 배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2천 3백만 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두고서 시간은 완전히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우주기宇宙紀'가 시작되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며... 모든 순간은 천체의 위치들의 하나의 특수한 조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확히 우주기만큼 서로 떨어져 있는 순간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진구소秦九韶와 중국 송/원 시대의 수학 / 울리히 리브레히트
235/ 진구소(1202-1261)의 <수서구장數書九章>은 1247년에 출간되었다...
236/ ... 1세기에 편찬된 <구장산술九章算術>은 "... 여기에 수록된 246개의 문제와 같은 풍부한 예제는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어느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의 산술예제집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사실상...... 겨우 후기 헬레니즘 시대와 비잔틴 시대 들어서부터의 것들이다."
241/ <구장산술>은 의심할 바 없이 하급관리의 교육을 위한 교재였으며... 진구소의 책에는 모든 기본공식(심지어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까지도)이 아무 설명 없이 당연한 것처럼 쓰이고 있다...
... 따라서 이 시대의 수학서들이 부분적으로는 (서양의 경우와 같이) 천부적으로 수학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학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제시방법은 중국적인 전통에 따라 실용적인 형태로 제한되었는데, 서양에서 수학문제가 흔히 일화적逸話的인 형태로 제시된 것과 대조된다.
243/ ... 중국의 수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그들의 방법들을 쌓아나갔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의 음악과 화성학 / 빌리 하르트너
253/ ... 음의 비율에 관한 최초의 이론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그것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이론은 기음基音(예를 들어 C)과 그것의 완전 5도(G)의 협화음에만 기초를 두며 음의 다른 비율들은 모두 불협화로 간주한다. 그러한 비율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중국은 그리스인들이 한 것처럼 일현금monochore를 사용하지 않고 '율律'이라고 불리는 각기 다른 길이의 12개의 관을 사용했다. 기본적인 음을 내는 가장 긴 '율'은 길이가 9치(寸)라고 알려져 있다. 그 길이의 3분의 2인 6치로 줄여진 관은 기본음의 완전 5도의 음(G)을 내게 된다. 다음 단계는 d음을 내는 4치의 관을 만들어낼 차례이다. 그러나 이 음은 기음의 8도(octave)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관의 길이는 2배(8치)로 늘려지고, 그래서 D가 된다.
3:2의 비율인 두 음은 하늘(3)과 땅(2)으로서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고 쓰고 있다.
각 '律'의 상대적 음높이를 2:3 또는 4:3을 기준으로 정하는 방법은 기원전 3세기 呂不韋의 <呂氏春秋>에서 처음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黃鐘이 3.9치의 두꺼운 대나무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2律 각각의 상대적 비율을 최초로 수학적으로 계산한 것은 그로부터 1세기 후에 위대한 역사가 司馬遷의 <史記>에 나타난다.
254/ 우선은 이 과정이 단지 4번만 반복되었으며 7음장음계를 만들어내는 그것의 6중重의 적용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5음음계-C, D, E, G, A, (C)-가 모든 시대를 통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상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민속노래뿐만 아니라 사원寺院의 가락도 5음장음계 쪽을 뚜렷이 선호하고 있다.
... 1596년에 명明 황실의 왕족 주재육朱載堉이 1691년의 베르크마이스터Andreas Werckmeister의 유명한 발견을 거의 1세기 앞서서 조율된 음조의 이론을 발표했다. 불행하게도 주재육의 근본적인 혁신은 곧 망각으로 빠져들었던 같고, 그의 이론은 확실히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