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담, 조선의 하늘을 열다

by 조영필 Zho YP

세종시대 천문학 연구의 한국적 특징 / 전용훈

16/ 세종은 즉위초부터 수시력과 대통력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산법 전문가를 양성하고자 했고, 이 역법에 대한 이해가 거의 완전해질 무렵 목간의木簡儀를 제작하고, 이를 기초로 완전한 간의를 제작하였다(세종 14년), 이어서 간의대에서의 관측한 결과에 기초를 두고, 장영실蔣英實은 이 시각제도를 구현한 자격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확립된 조선의 시각제도는 조선 팔도의 시각 표준이 되었다(세종16년). 자격루가 표시하는 시각에 맞추어 밤과 새벽을 알리는 종을 쳤으며, 해그림자를 보고 시각時刻과 절기를 알 수 있는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혜정교惠政橋와 종묘에 설치하였다(세종16년). 이어서 낮에는 태양을 관측하여, 그리고 밤에는 별을 관측하여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완성되었다(세종19년). 일성정시의는 총 4개가 만들어졌는데, 1개는 궁궐 내에, 1개는 서운관에 설치하고, 나머지 2대는 함길도와 평안도의 절제사 영에 주어서 군사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칠정산>의 역사적 의미와 사대부 천문학자 김담 / 문중양

21/ ... <칠정산>은 중국 역사상 당시까지 가장 과학적인 역법인 원나라의 <수시력>을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독자적인 노력으로 완벽하게 소화해 업그레이드시킨 역법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칠정산 내편>이 중국의 고전적 역법인 <수시력>을, <칠정산 외편>이 서구 아랍의 역법인 <회회력>을 각각 업그레이드시킨 계산법들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칠정산>은 15세기 초 당시 동서양의 천문학을 융합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역법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최근 일련의 연구를 통해서 <칠정산>은 <수시력>과 그것의 명나라 수정본인 '대통력'이 갖는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독자적인 새로운 역법 계산을 확립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고 있기도 하다...


25/ 이 글은 <칠정산> 프로젝트를 주도적 위치에서 감독하며 이끌었던 정인지가 쓴 글이다...


26/ "고려에서는 별도의 독자적 역曆 계산을 하지 않았고, 당唐의 '선명력宣明曆' 역서를 수여받아 그대로 써왔다. (중략) 충선왕 때에 이르러 원의 <수시력>을 배워 독자적으로 역 계산을 하려 했으나 '개방술' 등의 계산법을 배우지 못해 (중략) 고려 왕조가 끝날 때까지 마스터하지 못했다."(<고려사> '역지' "서")



이순지와 김담의 성절사행과 역법교류 / 남문현

65/ ... 과학기술 가운데 천문과학은 원 세조忽必烈Kubilai(재위 1260-93)가 페르샤의 마라가 천문대Maragha Observatory를 모범으로 삼아 곽수경郭守敬(1231-1316) 등을 시켜 수도인 대도大都예 세운 태사원太史院 사천대司天臺와 <수시력授時曆>의 창제로 나타났다.


마라가 천문대는 몽골의 정복자 훌라구Hulagu旭烈兀(1218-1265) 칸의 후원으로 당대 저명한 천문학자 Nasir al-Din al-Tusi가 1259년에 건설한 천문대로서 페르샤와 시리아를 비롯하여 중국의 천문학자들이 모여 연구하던 곳으로 이슬람 천문학이 중국으로 전파되는 통로였다. 훌레구Hulegu의 큰 형인 쿠블라이Khublai 칸은 이것을 본떠 상도上都와 대도에 회회사천대回回司天臺를 건설하였고, 마라가 천문대는 1428년에 사마르칸드Samarkand에 건설한 울루그 베그Ulugh Beg 천문대의 모델이 되었다...


66/ 특히 곽수경이 왕순王恂(1235-1282)과 치력治曆을 주도하면서 보여준 사상은 세종에게 적잖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간의대 사업을 주관한 학자들은 곽수경이 "역의 근본은 측험測驗에 있으며, 측험의기側驗儀器로는 의표儀表만 한 것이 없다"는 기술사상을 숙지하고 이것을 의표와 역법 제작의 기본이념으로 삼아 일월성신의 실제 측험을 역볍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측험의 정확도와 가역성, 정밀하고 우량한 천문의기의 중요성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건국하면서 <수시력>을 일부 수정한 <대통력大統曆>을 채용하는 한편, 원대의 회회사천대의 주요 인력을 흠천감欽天監으로 전입시키고 회회흠천감을 설립하였다. 명조는 서역 천문학가의 추산법이 매우 정밀하고 중국 천문학가가 갖추지 못한 위도계산법에 능숙하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활용하여 홍무洪武 16년(1383년) 서역천문서Islamic Zij(Astronomical Handbook)를 한역하였다. 이것은 <명역천문서明譯天文書> 혹은 <천문보서天文寶書>로 불렀으며, 번역자는 마함마馬哈麻(fl. 1383-98)였다. 홍무 18년(1385년)에 마샤이크Mashyk馬沙亦黑(fl. 1379-98) 등은 이것을 <회회역법>이란 이름으로 편역編譯하였다. 이 역법은 민간용 역일曆日과 12궁宮 시각법을 사용함으로써 이슬람 교인들에게도 매우 유용하였다. 명조는 이 역법의 "경위도법"을 활용한 "예추육요간범법預推六曜干犯法"(月과 金, 木, 水, 火, 土 五星의 凌犯)과 "교식추산법交食推算法"을 중시하게 되었다. "오성의 능범"은 성점星占으로 황제의 길흉을 예보하는 데 활용되어 황실에서는 특별히 중요시하였다.


그리스 시대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가 제작한 알마게스트Almagest의 영향을 받아 아랍에서 발전시킨 <회회력>은 일식 예보 성능이 <대통력> 보다 정밀하여 교식을 예보하는 참고자료로서 가치가 있었다. 알마게스트는 초승달이 뜨는 날짜는 알 수 있도록 구성되었지만(이 때부터 단식월인 라마단Ramadan이 시작됨), 시각을 예측하는 데 매우 어려움이 따랐다.


67/ <회회력>은 일식日食의 일부를 달이 지나가거나 달 위를 태양이 지나갈 때만 신월新月이 나타난다는 원리를 9세기경에 개발한 구면기하학을 활용하여 달의 운동과 지평선의 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일식과 월식 예측 역서로 발전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회회력>은 교식예보 성능이 <대통력>보다 정밀하여 교식을 예보하는 참고자료로서 활용가치가 매우 컸다.


<회회력법>은 흠천감에서 보존하였지만, 후계자들이 토반土盤(西域)추산법을 사용함으로써 한족에게는 크게 활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회회력법>을 실용화하기 위한 지침서가 발간되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흠천감감정監正 원통元統(fl. 1384-1393)이 1396년에 저술한 <위도태양통경지緯度太陽通徑誌>이다. 이 책이 언제 한반도에 유입되었는지 얼마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 중국과학기술대학의 석운리石云里 교수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태양통경지>가 이 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68/ ... 또한 1430년을 전후하여 흠천감하관정夏官正인 유신劉信이 <서역역법통경西域曆法通徑>을 저술하였다. 또한 성화成化 6년부터 13년(1470-1477) 간에는 남경흠천감감부監副인 회회천문학자 패림貝琳(?-1490)이 <칠정추보七政推步>를 편사編寫함으로써 비로소 실용화되었다.


패림은 자신이 <칠정추보>를 출간하기 전에 중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원통이 <회회력>을 중국식에 맞춰 추산하여 시행했다고 明刊本 <회회력법/ 지誌>에서 말한 바 있지만, 중국에서는 실전되었다고 진구금陳久金은 주장하였다.


69/ 패림은 여기서 원통을 <회회력법>의 번역자로 보았으나, <명사>에는 오백종吳伯宗, 이충李翀, 마사역흑이 번역하였다고 나온다. 최근 진구금은 <회회력법>의 한문원고는 마샤이크와 원통이 공동으로 작성하였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1442년 <칠정산내편>과 <칠성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假令>, <칠정산외편>과 <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이 완성되어 세종29년(1447년) 8월의 교식(일식, 월식)을 예보하게 된다.


이로써 명나라의 패림이 편찬한 <회회력법>(청대에 편찬한 <사고전서>에는 <칠정추보>로 명칭이 바뀜)보다 30년 앞서 <회회력법>이 실용화된다. 1458년(세조 4)에는 이순지李純之(?-1465)와 김석제金石梯가 <일월교식추보법가령>을 편찬함으로써 세종시대에 편찬한 <교식추보법>에 가령과 주해가 추가되어 <칠정산외편>이 완성된다.


70/ 1420년(세종 2년) 세종은 유정현柳廷顯(1355-1426)의 건의를 받아들여 역법이정에 착수하였고, 5년에는 서운관 역관의 술수術數가 미진하여 문신인 정흠지鄭欽之(1378-1429), 정초鄭招 등에게 <선명력宣明曆과 <수시력>을 비교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후 7년이 지난 1430년 8월 3일에는 기대했던 일식 시각을 추보한 시각과 분수가 들어 맞지 않았다...


71/ ... 이런 일이 있은 뒤 임금 자신도 역법 연구에 참여하여 독려하는 한편, 전문가들을 중국에 파견하여 계산법을 익혀 일식, 월식의 예측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이후 정초의 역산을 돕기 위해 정인지를 합류시켰다. 특히 <수시력경授時曆經>에서 처음 도입한 방원법方圓法을 이해하지 못해 한양의 이지二至(동지와 하지)후 반주야분半晝夜分 입성立成과 일출입분日出入分 입성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따르자 관련자를 연경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방원법이란 <수시력경>에서 반주야분 입성과 일출입분 입성을 구하는 데 필요한 '호시할원술弧矢割圓術'을 말한다.


이 방법은 북송北宋시대 심괄沈括(1031-1095)이 개발한 '회원술會圓術'을 여러번 반복하여 적용하고[補間法] 여기에다 상사 사각형의 비례법을 적용하여 개발한 것으로 현대 구면 삼각법의 중간과정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한은 역관으로서 세종 14년에 연경에 파견되어 흠천감 감원에게서 '호시할원술'을 익히고 돌아와서 이순지 등에게 전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3/ 세종은 이러한 내편의 장점을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기 위하여 중조中朝(명나라)에서 <태양태음통궤通軌>를 얻어 이를 수정하여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데 장점이 있다고 알려진 <회회력법>을 입수하여 이순지와 김담金淡에게 고교考校시켰고, 중원 역관의 차류差謬가 있음을 알아서 다시 윤정潤正을 가하여 외편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칠정산외편>의 편찬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74/ 이로써 세종은 한역된 <회회력법>을 실용하여 일식과 월식을 예보할 수 있는 가령서假令書[계산사례집]를 편찬하여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으로 반포하였다. 이 책들은 <세종실록> 후기 권 156-163에 전문이 실려 있다. <회회력법>의 원본은 중국에도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는 <회회력법>이라는 고서본이 한 부 소장되어 있다. 발문跋文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철종대에 대제학과 관상감 제조提調를 지낸 통유通儒이며 천문학자인 남병철南秉哲(1817-1863)이 1861년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78/ ... 세종은 이순지를 물품을 관리하는 한직을 맡겨 앞서 역법을 익혀 역법교정소에서 역산에 종사한 통사 김한金汗을 함께 보내 흠천감의 역관들과 교류하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역법교정에서 추보법의 미숙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역원의 한어 통사通事들에게 산법을 익혀 파견하게 했던 전례에 따라 세종은 급제후 초년부터 4년간을 승문원承文院에서 외교문서를 다루었던 경력을 고려하여 역법을 연구하는 데 적합한 인물로 이순지를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79/ "<칠정산외편>과 <칠정추보>는 이순지와 패림이 흠천감회회과科의 후계 회회回回 천문학자와 함께 마샤이크의 아랍어 원고를 함께 나누어 번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기한 바 있다...


82/... 마침내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발문에서 밝혔듯이 종래 <수시력>과 <회회력>이 완전 소화됨으로써 한 단계 향상된 조선 실정에 적합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으로 새로 탄생하게 되었다...


83/ ... 결국 <회회력법>의 조선전래를 계기로 제작된 <칠정산외편>은 선덕宣德 정통正統 연간年間(1425-1449)에 긴밀했던 조명 외교 교섭사의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순지·김담과 <칠정산> / 이은희

86/ <칠정산내편>의 배경이 된 수시력은 이미 고려시대에 들어와 시행된 역법이었다. 그러나 고려에서 수시력에 의한 추보推步는 역일曆日을 추정하는 일에 그쳤을 뿐 교식交食과 오성五星의 계산 방법은 알지 못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즉 고려에 전해진 수시력의 추보방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으며 교식과 오성의 계산은 구법인 선명력宣明曆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세종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87/ 그러나 필요한 서적들의 구입에도 산법에 어두운 서운관원들만으로는 수시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같은 해(1422) 12월, 문관출신인 직제학直提學 정흠지鄭欽之를 提擧로 임명하여 역법 교정을 맡겼다...


그러나 역법의 교정이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정흠지의 뒤를 이어 역산의 중책을 맡은 사람은 정초鄭招였다...


88/ 그러나 정인지가 역법 교정에 합류한 후 갑자기 급진전이 일어났다... 이는 1422년, 정흠지에게 역법의 교정을 처음으로 맡긴 지 10년이 지난 후의 결과였다. 임금은 그 동안 애를 태우던 일월식의 문제가 해결되자 바로 의기창제와 간의대 건설을 시작했고, 다음해인 세종 15년(1433년)에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칠정산내편>의 편찬을 명하였다.


89/ ... 이때 제작된 의기들은 의상儀象으로 대소간의大小簡儀, 대소규표大小圭表, 대소일성정시의大小日星定時儀, 혼상渾象, 혼의渾儀, 그리고 구루晷漏에는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앙부일구仰釜日晷, 자격루自擊漏, 흠경각루欽敬閣漏, 행루行漏 등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실록에 근거하여 7년간 의기 창제와 간의대 사업을 통해 제작된 의기들을 제작 순서에 따라 정리한 표이다.



90/ 간의대 사업에서 가장 먼저 제작된 간의의 경우,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만들어 한양의 북극고도(즉 위도)를 관측으로 정한 후, 구리로 대간의와 소간의를 만들어 관측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규표의 경우는 재래의 8척 높이의 규표뿐만 아니라 40척 높이의 규표도 함께 제작하여 관측에 사용하였다. 중국 역사상 원나라를 제외하고는 제작된 적이 없는 40척 높이의 규표가 조선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역법의 정확성을 높이고자 했던 세종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또한 중국 전통 해시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앙의仰儀가 <원사元史>에 소개되고, 또 이에 따라 조선에서 앙부일구로 제작되어 널리 사용된 점 등은 이슬람의 천문학이 중국을 거쳐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더구나 세종은 글을 모르는 백성도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앙부일구의 시반時盤 위에 글자 대신 12지신支神의 동물그림들을 새겨 넣도록 하였으며, 이를 대로변에 두어 오가는 여러 백성들로 하여금 시간을 알게 하였다.


그밖에도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의 각종 해시계와 자격루와 흠경각루 등의 자동물시계까지 완비하면서 한양을 기준으로 표준시각에 따른 시각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91/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기 제작에서 간의가 어느 의기보다 가장 먼저 완성되었는데 이는 간의가 역법의 정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세종 15년(1433), 간의가 완성된 후 세종이 김빈金鑌을 시켜 간의대에서 숙직하며 천상을 관측하고 의기가 제대로 제작되었는지를 살피게 하는 다음의 기사에서는 세종 자신도 매일 간의대로 나가 측험測驗의 중요성을 논하며 측후의 제도를 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제학 정초, 지중추원사 이천, 제학 정인지, 응교 김빈 등이 혼천의를 만들어 올렸다. 임금이 그것을 살펴본 후 세자에게 명하기를... 이에 김빈이 밤에 숙직하므로 옷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임금과 세자가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 정초 등과 함께 의논해 그 제도를 정하였다.


... 간의대의 측험결과를 중요시했던 까닭은... 관측된 결과를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간의와 규표를 갖춘 후 한양의 위도를 정확히 측정하고 한양의 일출입과 주야각을 추보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명사 역지>에 따르면 관측지의 위도를 의미하는 북극출지도北極出地度는 먼저 규표의 그림자 길이로 동지와 하지일을 찾은 다음 간의의 입운환立運環으로 동지와 하지일의 태양 지평고도로부터 구하게 된다. 이어서 구면삼각법에 해당하는 호시할원弧矢割圓의 방법으로 세운 4차방정식을 삼승방三乘方의 산법으로 풀어 이지차二支差를 얻고, 이로부터 매일의 일줄입분과 주야각을 추보하게 된다. 이때 한양의 주야각 계산에 필요한 방원술方園術, 곧 호시할원술을 배워오기 위해 김한金汗을 북경에 파견한 것은 세종 20년(1438)이며 그가 역산의 소임을 다한 것은 세종 22년(1440)이었다.


92/ 간의대 사업이 마무리되며 각종 의기가 거의 완비되어 가던 세종 19년(1437)에 역산소曆算所를 설치한 것을 고려해 보면 아마도 이때쯤 본국력 제정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다음해에 김한을 북경에 파견하여 한양의 주야각 계산을 위한 방원법을 배워오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1440년에는 한양에서의 주야각 추보가 완비될 수 있었고, 1441년, 이순지·김담이 김한과 함께 북경에 한 차례 더 방문한 후, 드디어 1442년에 <칠정산 내·외편>이 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93/ ... <칠정산 내편>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려의 최성지崔誠之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에 갔다가 <수시력법>을 구해 돌아왔고... 역서曆書를 만드는 법은 그런대로 익혔으나 일월교식日月交食과 오성분도五星分度 등의 방법은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태음통궤太陰通軌>와 <태양통궤太陽通軌>를 중국에서 얻어왔는데, 그 법이 <수시력>과 조금 차이가 있으므로 약간 수정하여 <내편>을 만들었다. 또 <회회력법>을 구하여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에게 살펴 바로잡게 했더니, 중국의 역관曆官들에게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다시 고쳐 <외편>을 만들었다. 이로써 역법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할 만큼 되었다."


95/ 즉 역법 교정의 책임을 맡았던 정흠지와 정초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역법 교정에 진척을 보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정인지가 역법 교정에 합류하게 되었고, 정인지가 합류한 다음해인 1432년에 드디어 일월식의 계산과 절기의 계산이 중국의 역과 일치함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자신감을 얻은 세종은 조선의 역법을 만들고자 의기창제와 간의대 건설을 시작하였고, 다음해인 계축년(1433)에는... <칠정산 내편>의 편찬을 명한 것이다.



101/ 일반적으로 <칠정산 내편>은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법통궤를 연구 교정하여 편찬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위의 발문에 따르면 그밖에도 수시력이 기초하게 된 원의 중수대명력과 경오원력까지도 참고하여 그 각각에 대해 교정을 가하였으며, 수시력 이전에 원에서 사용되던 중수대명력에 대해서는 정묘년(1447)에 일어날 일식과 월식의 계산까지 가령으로 편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칠정산 내·외편>에 의한 일월식 계산방법뿐만 아니라 수시력이 기초하게 된 중수대명력의 일월식 계산방법 역시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를 통해 <칠정산 내·외편>의 계산결과가 검증되는 단계를 거쳤음도 알게 된다.


또한 <칠정산 외편>은 명에서 한역漢譯된 회회력법을 연구 교정하여 편찬된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발문에는 "회회력경, 통경通經, 가령假令의 책을 가지고 그 술을 추구하고 약간 손익을 가하여 생략된 것을 보충하여 전서全書로 만들어 <칠정산 외편>이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즉 한역된 회회력법 외에도 회회력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서적들을 참고하고 연구하였으며, 발문에 전하는 <위도태양통경>과 <서역역서> 그리고 <월오성능범> 등이 바로 회회력과 관련된 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앞서 인용된 <칠정산 내편>의 서문에는 중국의 역관들에게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어 이를 다시 고쳐 외편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시윤리石雲里의 연구*에 따르면 이 오류는 회회력법의 역원曆元과 관계된 중대한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계산의 기점인 역원이 틀려지면 당연히 다른 모든 계산값들도 틀려지게 된다. 이때 이순지와 김담은 일월오성日月五星과 사여의 계도計都까지, 관련된 수치의 보정을 통하여 역원과 관계된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태양의 위치뿐만 아니라 달의 위치를 계산하는 기점인 계도까지 보정 값을 통해 한양에서의 일월식 계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Yunli Shi, "The Korean Adaptation of the Chinese-Islamic Astronomical Tables", Arch. Hist. Exact Sci. 57(Springer Verlag, 2003), pp 25-60.

**<칠정산외편>에서는 수의 개황 기미년(599)을 역원으로 하되 당의 무덕 임오년(622)과의 차이(25년)를 보정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102/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이러한 오류조차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회회력에 의한 추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까지 이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실수는 모른 채 회회천문학자에게 그 탓을 돌렸던 명나라의 역관들과, 미완의 회회력법을 받아들였으나 그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을 가하여 일월식의 추보까지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만든 이순지와 김담을 보며, 조선의 역법이 <칠정산>으로 태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이순지와 김담과 같은 뛰어난 인재가 조선에 있어 가능하였다고 본다.


103/ ... 원 명이 교체되면서 수시력이 대통력으로 개력改曆되었고, 서역의 역법인 회회력법 또한 한역漢譯을 거쳐 중국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홍무 17년(1384)에 수시력이 개정되어 대통력법통궤가 완성되고 그 다음 해인 홍무 18년(1385)에는 회회력법도 완성됨에 따라, 명의 태조였던 주원장朱元璋은 이제 중국과 서역의 두 역법을 '하나로 합하여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역법 제도를 이루라'는 새로운 명령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