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김선희

by 조영필 Zho YP

1장 서학과 중국 그리고 조선

14/ 예수회는... 스페인 로욜라 출신으로, 부상을 입고 퇴역한 군인이었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가 파리 대학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1534년에 조직한 가톨릭 수도회의 이름이다. 젊은 일곱 명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종교 결사는 '교황의 기사'로 자처하며 오직 신과 교황에게만 복종하겠다는 의도를 담아 자신들의 결사 명칭을 '예수회'로 지었다. 이들이 진정으로 교황의 기사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이를 식민 지배하기 위해 노력하던 포르투갈의 정책 덕분이었다.


1498년...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이후... 포르투갈의 주앙 3세John III는 교황청에 새 식민지에 동행할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한다... 교황청은... 예수회에게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에 동행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로마에 머물던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1506-1552)가 인도로 떠나기 위해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한 것은 1540년 6월의 일로, 예수회에 대한 교황청의 공식 인가가 나온 것은 그해 9월이었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인도의 고아, 중국 남부의 작은 반도 마카오를 거쳐 결국 황제가 거하는 중국의 수도 북경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기독교Christianity'라는 종교의 포교를 넘어 일종의 학술적 형태를 띠게 된 것은 '리마두利瑪竇'라는 둥국 이름으로 알려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의 전교 정책에 따른 결과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 교의뿐 아니라 르네상스기 유럽의 자연학과 자연철학, 수학과 기술, 지도제작술 등 다양한 지적 정보를 중국에 전달했다...


15/ ... 이후 수세기에 걸쳐 중국에서 이루어진 예수회의 지적, 종교적 도전의 결과를 '서학'이라고 부른다... 예수회를 통해 전해진 중국 철학과 문화는 계몽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 볼테르, 크리스티안 볼프 등 당시 유럽 지식인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었다...


16/ ... 서학을 철학과 자연학적 측면으로, 서교를 종교적 측면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기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종교와 철학이라는 분과적 범주로 나누었던 것은 아니다...


17/ 서학, 그중에서도 수학과 천문학 지식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국가가 주도하는 일종의 관학官學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서구 지식의 전이과정에서 청의 조정과 지식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선별적으로 수용했을 뿐, 유럽의 학술체계로 자신들의 전통 체계를 대체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 시기 중국과 조선의 학자들 중 누구도 당시 유럽의 공식 학술 언어였던 라틴어나 예수회 회원들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 또는 독일어를 통해 서양 지식을 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학서에 담긴 것은 서양의 이념과 지식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유학자들은 번역이라는 매개적 과정을 통해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와 개념으로, 다시 말해 동서양의 교섭에 의한 결과물로서 서양 지식을 수용했던 것이다.


18/ ... 기독교의 신을... '상제上帝'라는... 인격적 신 개념을 활용했고, 대기air를 설명하기 위해 '기氣'라는 중국 고유의 개념을 사용했으며, 스콜라 철학의 아니마anima를 전달하기 위해 '영혼靈魂'이라는 중국어를 사용했다...


... 서양의 종교와 철학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회에 의해 중국의 사유와 개념으로 걸러진, 다시 말해 유학적으로 변용된 '서학西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 이른바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 부정했던 성리학의 저격수들이었다기보다는 성리학의 주변부에 형성되어 있던 일종의 분과 지식을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경세적인 주제들, 즉 실용적인 지식에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학풍으로 옮겨간 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문, 수학, 기계 등 실학자들이 추구했던 실용적인 지식 역시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던 유학자들의 근본적인 관심사였다는 점에서 이들이 보여준 새로운 지적 탐구와 실천의 방향을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불연속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의 체제 교학이던 성리학을 흔든 작은 흑점은 '실학'이 아니라 '서학'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21/ 조선에서는 17세기부터 다양한 서학서들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시헌력時憲曆', 즉 서양식 역법이 국가적으로 공인되는 과정에서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조선 조정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중국으로 파견하던 북경 사행使行, 즉 연행燕行 역시 서양과 그들의 문물, 지식, 서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통로였다...


... 새로운 지식을 담고 있는 서학서들과 지도 등은... 소중화로서의 문화적 자신감과 오랑캐로 부르던 만주족의 중원 통치에 따른 정치적 불안감이 만든 일종의 사상적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중요한 지적 자원이었다.


22/ 본래 조선의 상층부는 외래문화 수용 자체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23/ ... 특히 서학을 통해 조선 지식장을 바라보는 것은 조선 유학의 탄력성과 경직성, 연속성과 불연속성, 표면적인 정치 상황과 지식인의 내적 심리구조 등의 복합적 함수를 드러내는 하나의 프리즘 역할을 한다.


서학이 조선 지식인들에게 자극이 되었던 것은 양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학서에서 강조되던 초월적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 지성적이며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는 성리학에서도 핵심적인 연구 주제였고 더 나아가 국가 운용에 필수적인 천문 역법과 수학에 관한 지식 등은 '치인治人' 즉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유학자들에게 요구되던 기본적인 분과 지식이었다. 조선 유학자들에게는 유학의 학술 주제들과 유사하면서도 더욱 진보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던 서학에 접근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이다.


2장 예수회의 중국 진출과 서학의 형성

31/ ... '예수회耶蘇會The Society of Jesus'는... 1534년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 '영적 대화'를 나누면서 간소한 의식을 치렀고, 이렇게 이루어진 결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예수회의 토대가 되었다.


33/ 15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마테오 리치는 피렌체와 로마 예수회 학교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비롯해 다양하고도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은 뒤, 인도의 고아를 거쳐 1583년 중국에 들어갔다...


만학도였던 이냐시오는 예수회의 설립 초기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강조했는데 이런 전통에 따라 각 지역에 예수회 대학이 설립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마체라타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명문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회 대학 콜레지오 로마노Collegio Romano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콜레지오 로마노에서는 스페인 출신의 신학자 빅토리오Francisco Victoria나 독일 출신의 천문학자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등 다국적 교수진에 의해 당대 최고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성기의 르네상스 시대에 예수회 대학의 표본과도 같은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수학한 마테오 리치도 예수회의 기본 과정은 물론 수하삭, 철학과 수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클리드 기하학 등을 섭렵해야 했다...


34/ ... 1852년에 조경肇京, 즉 마카오에 발을 디딤으로써 중국 전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유럽과 대등한 문명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에 대한 전교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전교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예수회가 중국을 차지하려는 서양의 첩자라고 생각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내에서 이단으로 인식되는 불교의 위상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곧 유학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예수회 사제의 복장 대신 유학자의 복식으로 갈아입은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다. 중국인 관료와 지식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직접 중국어를 배운 일이다... 하층민이 아니라 상층부의 지식인들을, 그것도 종교적 계시가 아니라 합리적 이성으로 설득시켜 기독교 신앙에 이르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35/ ...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자신이 섬기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이나 윤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성리학으로 인해 인격적 존재에 대한 신앙이 끊긴 것일 뿐 고대 중국인들 역시 기독교의 신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마테오 리치는 유럽의 학문적 우수성을 보여주고 신의 질서가 어떻게 현실에 구현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천문학과 수학, 지도, 심지어 기억술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배운 모든 지적 체계를 동원한다...


... 지도와 악기, 자명종 등 발달된 서양 문물을 소개했다... 마테오 리치는 서양과 동양을 이은 최초의 세계인이었으며 중국과 조선,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준 새로운 사상의 전달자였다...


36/ ... 1610년 마테오 리치가 죽은 뒤에 중국 관구장의 직책을 맡은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신부 니콜로 롱고바르디NIccolo Longobardi龍華民(1556-1654)는 유럽에 중국 철학을 전달함으로써 라이프니츠, 볼프 등 계몽철학자들의 중국 이해를 도운 인물이다.


마테오 리치의 전임자였던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羅明堅(1543-1607)와의 친분을 통해 중국 전교를 꿈꾸게 된 롱고바르디는 1597년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소주韶州를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했다...


37/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1646-1716)... 그는 롱고바르디가 1703년에 출한한 <중국인의 종교Traite sur quelques points de la religion des chinois>로부터 중국철학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1716년 <중국인의 자연신학론Discours sur la theologie naturelle des Chinois>을 출판했다. 라이프니츠는 동시대 다른 유럽 학자들과 달리 중국적 사유 역시 당시 유럽인의 이상이던 '보편적 이성'에 포함시켰고 성리학에서 유기체 철학의 가능성과 자연 신학의 의의를 발견하여 이를 자기 철학 안에 통합시키고자 했다.


마테오 리치의 후임자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艾儒略(1582-1649)이다. 알레니는 예수회 중국 전교의 2세대로,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湯若望(1591-1666)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사망한 후에 중국인들은 그를 서양에서 온 공자[西來孔子]라고 부르며 그의 덕망을 칭송하기도 했다.


... 그가 댜양한 활동과 저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광계徐光啓(1562-1633), 이지조李之藻(1571-1630), 楊廷筠(1562-1627) 등 예수회에 우호적인 중국 지식인들과의 교류 덕택이었다. 알레니는 이들의 조력을 바탕으로 인문 지리서인 <직방외기職方外紀>, 유럽의 교육 체계를 해설한 <서학범西學凡>, 영혼론을 다룬 <성학추술性學觕述>, 중국인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전교 일기 <구탁일초口鐸日秒>외에도 <만물진원萬物眞原>, <삼산론학기三山論學記>, <천주강생언행기략天主降生言行紀略>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남겼다.


38/ 알레니만큼 중요한 인물이 탕약망으로 알려진 아담 샬이다. 1622년 중국에 들어온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은 뛰어난 천문학자로 서광계, 이지조 등과 함께 서양식 역법 즉 시헌력의 토대가 된 서양 역법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했고, 후에 천문 관측과 역법 제정을 주관하는 흠천감欽天監의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역시 탕약망이 만든 시헌력을 극찬한 바 있고, 그의 저술 <주제군징主制群徵>을 통해 인체에 관한 서양 지식을 얻었다는 점에서 아담 샬의 활동은 중국은 물론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남회인으로 알려진 페르비스트Ferdinadus Verbiest南懷仁(1623-1688) 역시 예수회의 중국 전교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1623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결국 1659년 중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역시 뛰어난 천문학자로, 1669년 흠천감의 부감이 된 후로 강희제康熙帝의 신임을 얻어 강희제에게 서양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필방제로 알려진 프란체스코 삼비아시Francesco Sambiaso畢方濟(1582-1649)는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다. 삼비아시는 마테오 리치가 세상을 떠난 1610년에 29세의 나이로마카오에 들어갔고... 서양 수학과 역법을 정리하는 등... 특히 그가 저술한 영혼론 관련 서적인 <영언여작靈言蠡勺>은 조선에서 성호와 그의 제자 신후담愼後聃(1702-1761)의 중요한 토론 대상이 되었다.


39/ 요한 테렌츠 쉐렉Johann Terrenz Schreck鄧玉函(1576-1630) 역시 중국과 조선에 중요한 서양 지식을 전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 개종자 왕징王徵(1571-1644)과 함께 <원서기기도설록최遠西奇器圖說錄最>를 편찬했는데 <기기도설>로 약칭되는 이 책은 역학力學의 기본 원리와 기계의 구조를 도설圖說 즉 그림과 함께 설명한 저술이다. 특히 이 책은 정조正祖 시기에 조선에도 유입되어 정약용이 화성 축조를 위해 설계한 起重架 즉 거중기의 제작에 활용되기도 했다.


... 예수회의 전교 방식을 현대의 서구 연구자들은 '적응주의accommodationism'라 부른다...


... 다른 수도회들이 전교에 중국 문화와 언어를 활용하는 예수회의 전교 방식을 비판하자 교황청이 예수회의 전교 방식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청의 조정 역시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사가 금지되었던 것도 그 영향이다. 결과적으로 예수회는 18세기 초에 교황의 명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40/ 예수회의 중국 진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서광계(1562-1633)다. 명말 기독교의 세 기둥[三柱石]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서광계는 명말明末에 활동했던 저명한 관료로, 마테오 리치를 만난 후 1603년 남경南京에서 입교한 뒤 예수회의 입장을 변호하고 지원하는 등 예수회의 중국 활동에 상당한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마테오 리치의 전교 방식을 '유교를 보완하고 불교를 배척한다'는 의미에서 '보유역불補儒易佛'이라고 표현하며 중국 관료와 황실의 의심과 비판을 돌파하고자 했다... 마테오 리치와 함께 저술한 <기하원본幾何原本>(6권)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41/ 서광계, 양정균과 더불어 명말 천주교의 세 기둥으로 불렸던 이지조(1565-1630)도 중요하다. 그는 당시까지의 예수회 회원들의 저작과 자신이 쓴 글을 집대성한 총서 <천학초함天學初函>을 간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기인십편畸人十篇>,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의 책에 서문을 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국어로 번역한 <환유전寰有詮>과 <명리탐名理探>의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마테오 리치가 죽은 뒤 황실에 서양 역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이후 서양 선교사가 중국의 천문 관측 기구를 관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 번째 인물인 양정균(1557-1627)은 앞의 두 인물과 조금 다르다...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 역시 그가 주도했던 자선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55세였던 1611년에 천주교에 입교한 양정균은 다른 천주교도들과 함께 일종의 자선 단체인 '인회仁會'를 결성해서 빈민 구제활동을 한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당시 중국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퇴락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양정균은 <대의편代疑篇> 같은 호교서를 써서 예수회의 활동을 비판하는 중국인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42/ 이밖에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고위관료였던 풍응경馮應京(1555-1606)은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에 서문을 써주기도 하고, 마테오 리치가 편찬한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간행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예수회의 정착과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43/ ...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쓰게 된 것은 전임자 루지에리가 저술한 <천주실록天主實錄>의 한계와 문제 때문이었다...


... 기본적으로 <천주실의>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핵심 개념을 담고 있는 일종의 교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일반적 교리서와 구별되는 것은 신의 계시를 중심으로 신앙의 의미와 구체적 행위를 다루는 일반 기독교 교리서와 달리 철저히 '이성의 빛' 아래에서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마테오 리치는 이성적 추론을 통해 중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같은 계시 신앙적 내용들을 최소화하고 스콜라 철학의 신론과 영혼론 등을 합리적 논리에 따라 사변적으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44/ 마테오 리치가 활동했던 때는 정치적, 사상적 혼란이 지속되던 명나라 말기였다. 명의 황제 만력제萬曆帝(1563-1620, 재위 1572-1620)의 신임을 받으며 과감히 국정을 개혁하고자 했던 장거정張居正(1525-1582)의 개혁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장거정의 강압적 개혁에 반대했던 동림당東林黨의 등장으로 정치적 분열이 격화되었으며, 개인의 개성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은 양명 후학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명말의 중국은 변화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 사상적 혼란 또는 이면의 지적 자유의 풍토에서 마테오 리치는 문인 관료에서부터 저명한 승려, 양명陽明 좌파左派로 불리며 당시 가장 급진적인 학풍을 내세웠던 태주학파泰州學派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인 계층과 만난다. 마테오 리치는 이들을 통해 중국 학문의 다면성과 탄력성을 읽었을 것이고 송대 지식인들이 표방하던 정통의식 즉 도통道統을 일종의 전략적으로 합의된 신념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는 성리학을 정학으로 여기면서도 불교나 도교에 심취해 있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46/ ... 마테오 리치는 특히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의 사서四書에서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과 비교될 만한 중국적 윤리학의 정수를 발견한다. 특히 그는 사서를 그리스 로마 철학과 필적할 수준 높은 윤리서로 이해한다.


47/ ... 그는 고대 중국에 인격적인personal 유일신 개념으로서의 상제 관념이 존재했지만, 성리학을 거치면서 상제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고 결과적으로 '태극' 같은 비인격적impersonal 원리 혹은 무신론적 철학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48/ ... 마테오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속성 개념을 통해 성리학의 이론적 토대인 태극 개념을 무력화하고자 한다. 스콜라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기본적으로 자립하는 실체substantia自立者와 그것에 의존하는 속성accidens依賴者으로 나뉜다. 마테오 리치는 실체로 존재하는 질료와는 달리 태극이 홀수와 짝수의 이론에서 취한 허상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실체에 의존적인 '속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49/ ... 만약 기독교에서 설명하듯 인간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에 있을 상벌 때문에 도덕적 실천을 해야 한다면 유가적 관점에서 그것은 진정한 도덕적 실천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유학자들은 지옥을 피하고 천당에 가기 위해 선한 일을 해야 한다면 이는 사욕私慾을 추구하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동아시아인들은 마테오 리치가 설명하듯 세계가 조화로운 질서를 유지하고 있고 이 질서를 가능하게 한 근원적 실재가 배후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실재가 우주 전체를 무에서 창조한 '창조주'라는 사실을 단번에 연결할 수 없었다. 자발적 생성의 근원으로 만물에 내재하는 태극과 이기理氣라는 전통적 의미망과 개념 틀을 버리지 않고는 인격적인 창조주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 조선 지식인들은 천주를 유대-기독교적 신, 즉 유일하고 전능하며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창조주가 아니라,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천 또는 상제의 의미로, 즉 우주 만물의 생명과 질서에 관계되는 모종의 힘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50/ ... 전례 논쟁 끝에 상제 등 예수회가 채택한 용어들은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의 의례 금지령Ex illa die를 통해 대부분 금지되었고, 중국과 조선 내 기독교 신자들의 조상 제사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 중국인들에게는 지각과 감정, 이성과 도덕적 판단의 주체로서의 '마음心'에 관한 이론이나, 죽은 뒤에도 일정 시간 유지되는 '혼백魂魄'이라는 관념은 있었지만, 초월적 창조자인 신으로부터 부여받아 사후에도 불멸하는 지성적 존재 '영혼anima'은 존재하지 않았다.


51/ ... 인간에게만 고유한 '영혼anima rationalis'을 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이라는 중국어로 번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De Anima>는 중세 형이상학적 인간론의 교본 역할을 했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의 세분화된 맥락들을 중세적 개념과 이론적 틀로 재정립함으로써 인간의 총체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52/ 이에 비해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인간의 영혼을 혼魂과 백魄으로 구분하였다... 혼은 행동을 지시하는 힘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신적인 경험과 지적인 활력이 있다. 이에 비해 백은 몸통과 사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육체의 각 부분에 힘과 운동을 불어넣는다. 죽을 때는 혼과 백이 분리되는 것이 정상이다. 다시 말해 혼백은 영원 불멸하지 않으며 더구나 이성혼과 같은 이성적 사유 활동과는 관계없는 기氣의 양상이다.


53/ 마테오 리치는 영혼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려 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스콜라적 영혼을 중국적 맥락에서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원리로서의 '본성[性]', 그리고 외부에 대한 인식 능력으로서의 '마음[心]'과 뒤섞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 영향은 중국인들은 물론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전해진다. 후에 이들의 삼혼설三魂說은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의 심성론 안에 들어오며 새로운 이론으로 종합되기 때문이다.


<영언여작>은 프란치스코 삼비아시Franciscus Sambiasi畢方濟가 구술하고 서광계가 필록筆錄했다고 알려진 본격적인 영혼론 저술이다...


54/ 이 책을 통해 삼비아시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개괄적으로 소개된 스콜라철학의 영혼론을 확대하고 심화하여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삼비아시는 마테오 리치가 고안해서 사용하던 '영혼'이라는 한역어 대신 책 전체에서 일관되게 '아니마亞尼瑪'라는 음역을 사용한다...


삼비아시가 과감하게 아니마anima라는 스콜라 용어를 음차한 것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혼魂'이라는 개념이 일종의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중국 전통에서 '혼魂'은 언제나 '기氣'와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이 개념에서 물질적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혼'이 '기'의 한 양상인 한, 이에 곧바로 지성적 측면을 연결하기도 어려웠다. '혼'이라는 개념이 주는 물질적인 연상들이 스콜라적 영혼 개념의 전달을 막았던 것이다...


55/ 한편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艾儒略 역시 <성학추술>이라는 영혼론 관련 서학서를 저술한다... 이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De Anima>와 <자연학 소품집Parva naturalia> 두 권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영혼론을 넘어 인간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알레니는 스콜라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의 '영혼'이라는 개념 대신 '성性'이라는 중국적 개념을 사용한다. 더 나아가 그는 영혼의 이성적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영명靈明'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고안한다. '혼'이 주는 오해를 피하고 인간의 이성적, 지성적 능력을 설명하려는 전략이었다. '영혼' 대신 '영명'을 강조하는 이 전략은 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정약용의 철학에서 유의미하게 검토된다.


56/ 이후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湯若望은 <주제군징>>을 통해 <성학추술>이 보여준 인간 이해를 더욱 확장하고자 한다...


57/ ... 이지조가 줄리오 알레니의 지리서 <직방외기>에 붙인 서문 '각직방외기서刻職方外紀序'에 따르면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Nicolas Trigault金泥閣(1577-1628)는 1611년 중국에 들어오면서 7000여 권의 유럽책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1614년에 로마로 돌아갔다가 1620년에 마카오로 돌아왔는데 이때 상당한 양의 서적들을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지조는 당시 한역된 50여 종의 서학서 가운데 종교적/윤리적 성격의 책 10종을 리편理編으로, 자연학이나 수학, 기술에 관한 책 10종을 기편器編으로 나누어 <천학초함>을 편찬하기도 한다.


58/ 이들이 들여온 새로운 자연 지식과 기술 가운데 중국과 조선 지식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 중 하나는 세계 지도와 지리서였다... 알레니의 서학서 가운데 특히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지리학과 천문학 관련 지식을 담은 <직방외기>였다... 이 책은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Diegode Pantoja龐迪我(1571-1618)와 우르시스Sabbatino de Usis熊三拔(1575-1620)가 초안을 잡은 것을 후에 알레니가 최신 정보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증보한 것이다... 총 58개 국가의 향토 산물과 무역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59/ '직방'이란 땅[方]을 담당하는 관직[職] 즉 천하의 지도와 중국 밖에서 들어오는 조공을 관장하는 직책이면서 동시에 이 직방이 관할하던 지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직방외기>란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직방 외의 세계에 대한 각종 정보를 모은 책이라는 의미다... 16세기 말 유럽의 상황은 이미 콜럼부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가 1492년에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였고,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이 지구 일주 항해를 하며 얻은 정보들이 유럽 내에서 상식으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60/ 천문학적 지식 역시 중요한 전교의 도구였다. 예를 들어 <천문략天問略>은 엠마뉴엘 디아즈Emmanuel Diaz陽瑪諾(1574-1659)가 저술한 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로, 1615년에 북경에서 간행되었다... '십이중천설'의 우주론을 기하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회 회원들은 십이중천설을 통해 우주에 실제로 천주가 주재하는 하늘이 있음을 전하고자 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열두 번째의 하늘 즉 영정부동천永靜不動天이다...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이 천문학 이론으로서 십이중천설을 수용하면 자연히 천주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영정부동천의 존재와 기능을 예수회 회원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했다. 이들은 영정부동천이 곧 성리학에서 말하는 태극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다수의 조선 지식인들이 이 책을 연구했고 십이중천설을 이론적으로 승인할 수 있었다. 성호 이익은 이 책으로부터 천문학적 지식을 흡수했으며 후에 <발천문략跋天問略>을 짓기도 했다.


61/ 예수회의 선교 정책에서 수학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선교에서 수학은 단순히 산술적 계산을 위한 대수학이 아니라 기하학이 주를 이루었는데 기하학이 천문학과 지도 제작술, 해시계나 지구의地球儀 제작을 위한 토대였기 때문이다.


64/ 서학에 대한 갈등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것은 서양 역법인 시헌력 도입을 둘러싸고 양광선楊光先(1597-1669)이라는 인물이 아담 샬, 페르비스트 등 예수회 선교사와 대결했던 사건이다...


65/ 시헌력은 전통적인 프톨레마이오스의 태양중심설을 넘어선 당대 유럽의 최신 이론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1546-1601)의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법체계이다... 중국 지식인들에게 역법은 단순한 관측결과와 수식의 종합으로 만들어진 기술적 체제가 아니라 경전을 통해 증명되는 우주에 대한 철학적 이념과 세계관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3장 서학의 조선 유입과 조선 지식장의 변용

73/ 성호의 제자였던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21-1791)의 말에 따르면 조선에서 서학서들은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 말년인 17세기 초부터 유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90년대에 저술이 끝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북경에서 정식으로 간행된 것이 1603년이었으니 큰 시차 없이 중국에서 간행된 서학서들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4/ <천주실의>가 정식으로 간행된 것이 1603년이었고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탈고한 것이 1614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보고가 상당히 이른 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76/ ...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공식적인 서학서의 유입은 인조仁祖(1595-1649, 재위 1623-1649) 재위기에 진주사陳奏使로 중국에 갔다 돌아온 정두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 위의 문장에서 등장하는 '육약한'이란 인물은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Jeronimo Rodriguez陸若漢(1561-1633)를 가리킨다. 당시 예수회 회원들은 중국을 넘어 조선 전교에도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조선 국왕에게 천리경, 자명종, 화포, 화약 등의 서양 문물과 천문 관련 서학서, 지도 등을 선물한 것이다...


77/ ...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에 볼모로 억류되어 있었는데 1644년 9월 북경에서 아담 샬을 직접 만나 교류했다고 알려져 있다...


79/ <천학초함>이 조선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숙종대 학자로 수학에 뛰어났던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자신의 수학책 <구수략九數略>을 집필하면서 <천학초함>을 참조했다고 기록한 바 있는데...


<칠극七克> 역시 <천주실의>와 함께 초기부터 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책 중 하나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와 함께 활동했던 디에고 데 판토하Diego de Pantoja龐迪我가 1614년 북경에서 간행한 일종의 윤리서이다... '칠극'이란 기독교에서 모든 죄의 뿌리로 여기는 칠죄종七罪宗 즉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욕, 나태를 극복하여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83/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비롯해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도가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603년 북경에 갔던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에 의해서였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이광정과 권희가 구라파국여지도 6폭을 홍문관에 보냈다고 기록한 바 있다.


87/ ... 시헌력 도입에 토대를 닦은 사람 중 하나가 조선 중기의 문신 잠곡濳谷 김육金堉(1580-1658)이었다. 그는 16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인조 23년인 1645년에 시헌력의 제정을 공식적으로 건의했다...


89/ 각고의 노력 끝에 조선은 효종 3년인 1652년 이후에야 시헌력의 대략적인 구조와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金尙范의 뒤를 이어 숙종 31년에 관상감원 허원許遠이 연경에서 시헌력의 수학적 토대인 '칠정역법七政曆法'을 배워온 뒤에야 시헌력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92/ 서학중원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당대 중국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매문정梅文鼎(1633-1721)이다...


4장 서학을 향한 성호의 지적 도전

104/ ... 그 대표적인 예가 스토아 철학의 우정론을 바탕으로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교우론交友論>과 판토하가 저술한 <칠극>이다. 성호는 교리, 계시 신앙 같은 신학적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 <칠극>의 기독교 윤리학을 유학의 수양론 차원에서 이해하면서 거부감 없이 수용했다. 또한 성호는 스토아 철학의 우정론을 바탕으로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교우론>을 읽고 뼈에 사무치는 말이라며 가치를 인정하기도 한다...


106/ ... 성호가 서학의 핵심적 종지로 수용한 것 중 하나는 서학서의 삼혼설三魂說로, 성호는 이를 토대로 삼심설三心說을 이론화한다. 서학의 핵심이 무엇인지 묻는 신후담의 질문에 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7/ ... "그가 이르기를 '머리는 생명을 부여받는 근본이다. 머리에는 뇌낭腦囊이 있어 기억의 주체가 된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초목草木에는 생혼生魂이 있고, 금수禽獸에는 각혼覺魂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영혼靈魂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들 학문에서 논하는 대략적인 요체이다. 이는 비록 우리 유학의 심성론과는 같지 않으나 또한 어찌 그것이 반드시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 문장에 뇌낭이란 뇌의 주머니란 뜻으로 두뇌를 의미한다. 본래 스콜라 철학에서는 지각과 기억 등의 기능을 두뇌에, 이성적 판단의 능력을 영혼에 부여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지성적 인식 작용과 판단을 이원화한다. 이에 따라 영혼의 문제를 다룬 서학서 <영언여작>에서는 뇌낭을 기억의 주체라고 설명한다. 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 성호는 뇌낭이 기억의 주체가 된다는 대목에 큰 관심을 보인다.


본래 유학에서 인간의 지각과 판단, 감정과 추론 등을 비롯한 정신적인 능력은 모두 심心을 통해 설명하는 전통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도가 계열의 의학서에서 생명의 중추로 여겨지던 뇌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편 성호는 탕약망, 즉 아담 샬이 저술한 <주제군징主制群徵>을 통해 뇌낭설을 비롯해 다양한 인체관, 생리설 등 서양의학 이론을 접했고 이를 전통적인 유학과 인체관에 접목해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본래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의 근거를 '뇌'에 두는 방식은 기억을 비롯해 정신적인 활동의 주체를 '심心'으로 보는 전통적인 유학-성리학의 입장에서는 낯선 것이다.


108/ 유학에 있어서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심장이었다. 특히 맹자이래 심은 인체의 심장을 의미함과 동시에 사려思慮의 기관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두뇌는 정신적 활동과는 관계없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뇌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연결하는 이런 토론 자체가 전통적인 심성론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호가 뇌낭이 기억의 주체가 된다는 서학의 입장을 수용했다는 것은 단순히 뇌의 역할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체 기관을 통해 인간의 인식과 추론, 사유 등을 설명하는 방식을 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과 감정, 추론과 판단 등 인간의 이지적이고 지적인 측면은 성리학의 심성론에서도 핵심적으로 다루던 주제였지만 성리학에는 인간의 정서적, 지적 능력을 뇌와 같은 신체 기관에 연결해서 설명하는 이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호는 사변적인 심성론에 거리를 두고 실제 인체의 기관과 그것을 운용하는 기氣라는 측면에서 사유와 인식, 기억 등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뇌를 기억의 주체로 보는 주장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성호는 조선에서 최초로 '뇌주설腦主說'을 논한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 성호는 <천주실의>, <영언여작> 등을 수용함으로써 서학의 삼혼설을 접하고 이를 삼심설로 변용함으로써 '심'을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게 이해한다. 우선 성호는 뇌라는 인체기관을 인식 능력과 연결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근거를 신체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뇌낭설을 수용함으로써 성호는 인간의 마음[心] 즉 인식과 감정 같은 정신적 작용을 리(理)나 성(性)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성리학과 다른 경로로 향하게 된다.


109/ ...'심설(心說)'이라는 글에서 성호는 우주 만물 가운데서 마음은 하나가 아니며[心不一] 초목지심(草木之心), 인물지심(人物之心), 천지지심(天地之心)의 세 가지 마음이 있다고 한다.


... 초목의 경우 생장하고 쇠락하는 것은 마치 마음이 있어서 그런 듯하지만 이것들은 지각(知覺)이 없기 때문에 생장지심(生長之心)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금수에게 생장지심이 있는 것은 본래 초목과 같지만, 그러나 또한 이른바 지각지심(知覺之心)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생장지심과 지각지심이 있는 것은 본래 금수와 같지만 또한 이른바 의리지심(義理之心)을 가지고 있다.


성호는 <천주실의>에 등장하는 세 가지 영혼의 품위를 마음으로 전환하여 각각 생장, 지각, 의리의 마음으로 규정한다. 이는 성리학의 일반적인 심성론의 설명 방식과 다른 주장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인심과 도심으로 나눌 뿐, 생장이나 지각 등을 기준으로 분류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호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자荀子>에 유사한 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110/ ... 그러나 <순자>의 이론은 전통적으로 성리학의 심성론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순자> 안에 유사한 이론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성호의 의도가 부각되지 않는다... 이처럼 동기와 맥락을 고려하면 성호는 서학의 삼혼설에서 지적 자극을 받은 뒤 유사한 관점을 순자의 이론에서 찾아 이를 바탕으로 삼심설을 이론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 안정복 역시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마테오 리치의 영혼론에 대응하기 위해 순자를 인용한다...


혹자가 말했다. "마테오 리치는 '영혼에는 세 가지가 있다. 생혼/각혼/영혼이다...'고 말합니다. 이 설은 어떠합니까?"... "우리 중국에도 그런 설이 있다. <순자>에, '물이나 불은기는 있지만 생명은 없고... 그런데 사람은 기도 있고 생명도 있고 지각도 있고 의리도 있으니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주희의 제자인 송대 유학자) 진서산眞西山이 <성리대전性理大全>에서 표출表出한 것이다. 서양 선비의 말은 이것과 대체로 같지만, 다만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말은 석씨와 다름이 없는 것으로, 우리 유가가 말하지 않는 바이다."


... 그렇다면 성호는 왜 전통적인 성리학의 심성론을 벗어나는 삼심설을 새롭게 제안하고자 했던 것일까? 우선 성호는 마음을 세 종류로 구분하는 기준은 심장과 지각이 존재하는가의 여부라고 주장한다. 성호는 심이 곧 지각이라고 간주하는데 여기서 '지각이란 추위를 알고 따뜻함을 느끼며 삶을 바라고 죽음을 싫어하는 본능적 지각능력과 욕구 능력을 의미한다(知覺者, 知寒覺煖欲生惡死之類是也).'...


112/ 이 지점에서 성호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심성론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마음의 층위를 나누는 기준인 지각은 근본적으로 신체적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호는 '지각'이라는 기준을 통해 인간의 인식과 판단, 추론 등의 과정을 더욱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성호는 서학의 이론을 원용하여 성리학의 이론 체계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인간의 인식론적 구조와 지적 능력의 차별성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 성호에 따르면 초목지심, 천지지심처럼 생명력이나 운용의 능력에도 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고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과 욕구에도 마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지만 진정한 심은 생장능력을 넘어서서 지각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도덕적 능력을 의미하며, 이러한 마음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성호는 삼심설을 통해 만물과 인간을 하나의 관점에서 파악하면서도 인간에게만 독특한 도덕성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이론적 지향은 성리학의 폐기나 전환이 아니라 성리학에서 정교하게 설명되기 어려웠던 측면들에 대한 이론적 강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리학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뇌를 비롯한 신체의 측면을 유학의 이론에 도입하는 한편 인간의 지적, 도덕적 능력의 차이를 셜명하는 방식을 새롭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115/ 십이중천설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그 바깥에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항성의 천구가 지구를 감싸며 돌고 있다. 이 위를 다시 세 층위의 하늘이 감싸고 있는데 먼저 수정천Crystalline이 바깥의 천구이며 그 위를 종동천宗動天Primum Mobile이 감싸고 있다. 종동천은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천구의 운행을 가능하게 하는 천구이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이 최고천인 영정부동천永靜不動天Empyrean 즉 영원히 정지해서 움직이지 않는 하늘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 열두 번째의 영정부동천에 천주, 즉 신을 비롯해 모든 신성이 거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정부동천이 바로 천당이다.


117/ ... 주희는 초년부터 <초사楚辭>에서 접한 구천九天의 설에 대해 고민하다가 아홉 가지 천구에 관한 이론, 즉 구중천설九重天說을 통해 고민을 해소했다고 알려져 있다...


... 이런 선행 이론이 있었기 때문에 성호 역시 십이중천설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0/ 그러나 사실상 십이중천설은 당시로서는 시대에 뒤처진 낡은 이론이었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조선에서 1745년에 시행된 새로운 역법은 비교적 정밀한 수학적 토대에서 운영되는 티코 브라헤의 우주구조론과 케플러의 타원궤도설 등 당대 최신 이론을 기반으로 한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이었다...


123/ ... 성호는 무엇보다 정통과 이단이라는 자기중심적 판단에 갇히지 않고 외래의 지적 자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유학의 자장 안에서 주도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5장 서학과 성호학파의 분기

135/ ... <서학변西學辨>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중국과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천주실의>가 아니라 영혼론만을 다룬 <영언여작>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신후담은 본래 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이에 대한 서학의 도전에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136/ 신후담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기氣로 구성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사후에는 기가 흩어진다는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서학의 영혼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신후담에게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천당지옥설이다...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천당지옥설은 불교의 교리로 여겨지던 익숙한 이론이었기 때문에 예수회 회원들은 불교가 천주교의 이론을 훔친 것이라고 주장한다.


138/ 이후 신후담은 <영언여작>에 소개된 삼혼설, 은총, 수동 이성, 능동 이성 등 심화된 스콜라 철학의 영혼론을 소개한 뒤 이를 성리학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비판한다. 신후담은 인간의 혼은 음양의 굴신屈伸의 결과이며 인간의 지적 활동은 마음[心]의 활동의 결과라는 성리학의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회 회원들은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유학자들에게 영혼의 존재와 기능을 납득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미 심, 성, 혼, 기 등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설명하는 기존의 이론을 가지고 있던 유학자들에게 스콜라 철학의 영혼론과 은총 등의 신학적 이론을 소개하는 과정은 사실상 논리적 논파로 달성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개별적인 지식이 아니라 세계관을 전환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39/ 신후담은 천지의 개벽은 사람의 손에서 집이 만들어지는 것과는 다르며, 결국 상제는 목수에 비교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상제는 또한 천지가 형성된 후에 그 사이에서 주재한다는 것으로, 도道와 기器를 합해서 이름한 것"일 뿐, 인격적인 창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144/ 안정복이 척사론 관련 저술을 완성한 것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던 즈음이었다. 안정복은... 1785년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완성한다...


146/ 이밖에도 충청도 지역에 살던 이삼환이 <양학변洋學辨>을, 성호 말년의 제자 윤기가 <벽이단설闢異端說>을 저술하는 등 성호학파 내에서 다양한 역사서들이 나온다...


6장 서학의 내파 : 이벽과 정약용의 서학 연구

... 광암曠菴 아벽李蘗(1754-1786)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154/ 또한 정약용은 이 묘지명(둘째 형 정약전丁若銓(1758-1816)이 유배지였던 우이도에서 사망하자 그를 위해 쓴 묘지명)에서 형인 정약전이 "일찍이 이벽과 교류하며 천문 역법曆法의 이론을 듣고 <기하원본>을 연구하며 정미한 이치를 분석하였는데, 마침내 서교西敎의 설을 듣고는 매우 좋아하였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다."고 밝힌다...


1754년 경기도 광주의 남인 가문에서 태어난 이벽은... 성호 이익의 제자였던 권철신權哲身(1736-1801)에게 배웠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호의 학맥을 이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벽은 같은 남인 소장학자들 즉 이가환李家煥(1742-1801), 정약전, 정약종丁若鍾(1760-1801), 정약용 등과 교류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학자였다.


... 정조 7년이던 1783년 이승훈이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된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소식을 듣고 그에게 서양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도록 권유한다. 이승훈은 이벽의 권유를 받은 뒤 1784년 초에 북당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J.J. De Grammont梁棟材(1736-1812?) 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세례 신자가 된다.


155/ ... 이벽 역시 이승훈에게 세례 받은 뒤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그는 결국 전염병으로 1785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 정약용은 형인 정약전과 형이 따랐던 스승 권철신의 묘지명을 쓰며 주어사走魚寺에서 있었던 강학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 녹암(권철신)이 직접 규정을 정해...


156/ 선형先兄 약전이 권철신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할 때 이벽이 눈 오는 밤에 찾아와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하였다.


... 이벽은 "권철신[鑑湖]은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하고, 드디어 권철신을 방문하여 10여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157/ 정약용은 23세였던 1784년 여름, 정조가 초계문신에게 내준 <중용>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벽을 찾아간다. 이때 이벽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천주실의>를 전제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정약용을 서학으로 이끌었던 이벽과의 만남과 토론은 <중용강의>로 정리되었다... 54세(1814) 때 <중용자잠中庸自箴>을 완성하고, 다시 30여 년 전에 쓴 <중용강의>를 수정 보완 해서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를 완성한다...


158/ '태극도太極圖'라는 것은 감괘坎卦와 리괘離卦의 결합일 뿐으로 감괘와 리괘의 이치는 (<주역>의> '참동계參同契'에 자세히 나와 있다...


... 감괘와 리괘는 곧 음陰과 양陽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이벽은 태극을 물질적인 음양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태극이 음양에 불과하다면 만 가지 이치의 근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159/ 성리학에 대한 이벽의 지적 도전은 그가 <천주실의>를 통해 <중용>을 독해한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태극이 음양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은 태극도가 '홀수와 짝수의 상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吾視無極而太極之圖, 不過取奇偶之象言).'는 마테오 리치의 주장과 유사하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自立者]은 본성도 그것 자체로 존재하지만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依賴者]은 본성도 다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태극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에 의존하는 속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161/ ... 그러나 태극이 인격성은 물론 어떤 규정도 않는 존재 즉 '무극'이기 때문에 도리어 만물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본 동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 마테오 리치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정약용은 마테오 리치가 그러했듯 리의 주재성을 거부한다. 리에 인격성이 없기 때문이다.


162/ ... 정약용은 리를 지운 자리에 상제를 내세우며 상제를 통해 세계의 주재와 가치의 작동을 설명하고자 한다...


163/ ... 그는 인격성이 없는 리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킬 수 없지만 인격적인 상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5/ ... 이정(二程) 형제와 주희 같은 송대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지각과 인식, 도덕적 판단과 실천, 수양 등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인심人心, 도심道心, 사단칠정四端七情, 심통성정心統性情, 미발未發과 이발已發, 중中과 화和, 경敬과 성誠, 함양涵養과 찰식察識 등 수많은 개념들을 바탕으로 정교한 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 리의 위상을 낮추어 우주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리의 위상이 바뀌면 당연히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 있다. 바로 성性이다. 전통적으로 성리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 곧 우주의 근원적 이치가 개별적인 것들의 본성으로 들어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지만 정약용은 리에서 어떤 인격성도 없고 형체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로부터 성을 품부받았다고 한다면 올바른 도리가 될 수 없을 것(而謂吾人稟於此而受性, 亦離乎其爲道矣)'이라며 리와 성의 관계를 끊는다...


166/ 성性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오로지 호오好惡를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어찌 마음[心]이 성性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약용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성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성性이 리理가 아니라 좋아하고 싫어함 즉 '기호嗜好'라고 주장한다.


정약용은 성性을 리里로, 심心을 기氣로 규정하는 이론을 부정한다... 정약용은 <천주실의>로부터 리를 성과 분리시키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정약용은 리理를 세계를 주재하는 근원의 자리에서 내려놓고 성과 리의 관계도 분리한다. 정약용에게 성이 곧 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은 무엇인가? '심은 대체의 차명이고 성은 마음이 기호하는 바(心者吾人大體之借名也, 性者心之所嗜好也.)'다. 정약용은 성이 리 즉 형이상학적 본체가 아니라 마음이 향하는 기호, 그것도 선과 악을 향한 기호로 보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167/ 천명지위성이라는 것은 하늘이 태어날 때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을 허령한 본체 가운데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성은 본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성이라는 것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정약용은 성이 형이상학적 본체가 아니라 선으로 향하는 자연적인 경향성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만물이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각자의 자연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정약용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성을 리로 보는 이론을 부정한 것은 이러한 이론 체계가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이끌어 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68/ ... 맹자 이래 성리학자들은 진심盡心, 지성知性, 지천知天을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도덕성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수양법으로 받아들여 왔다. 정약용은 성리학의 주장을 따라간다면, 진심, 지성, 지천은 단지 리를 이해하려는 사변적인 노력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리를 궁구하고 추구하는 사변적인 행위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도덕적 실천을 할 것인가'라는 실천의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런 맥락에서 정약용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중요한 본질, 즉 인간의 대체大體는 성性이 아니라 심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만약 한 글자를 끌어다 대체의 이름으로 쓰고자 한다면 심이 가까운 것이며 성은 옳지 않다.' 그런 뒤에 정약용은 심 역시 새롭게 규정한다. 가장 먼저 그는 심에 담겨있던 육체성의 의미를 분리해 심과 심장을 별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유학의 역사에서 심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주관하는 사려의 기관이었지만 본래 심장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169/ 유형의 마음인 심장과 달리 무형無形의 마음이 우리의 본체로, 즉 이른바 허령불매虛靈不昧한 것이다. (중략) 그것은 무형의 본체이며, 혈육血肉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정약용은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형체가 없으며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마음을 부여받는다고 말한다. 이 무형의 마음을 '영명무형지체靈明無形之體'라고 부른다. 이 영명한 무형의 마음[영명무형지체]은 인간이 배태되어 생겨날 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유학에서 말하는 도의지심道義之心, 즉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게 근원적인 마음이 곧 영명무형지체이다. 이 무형의 마음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하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제안하는 '영명무형지체'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스콜라 철학의 Anima, 즉 '영혼靈魂'의 규정과 닮아 있다... 마테오 리치는 영혼의 지성적인 측면을 영靈, 영재靈才, 신령神靈 등의 용어로 표현한다. 마테오 리치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은 만물보다 특출하니 안으로 신령을 품부받고 밖으로 이치를 관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에게 있는 영혼[魂神]은 인간의 내면적인 본분이 되어 인간의 육신과 일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을 통해 이치를 논할 수 있기에 지성적 능력[靈才]을 가진 부류에 배열된다.'


170/ ... 이 영명무형지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인식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지성적 능력 외에 영명무형지체에 더 중요한 기능이 있다. 그것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경향성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명무형지체는 단순한 지성적 능력이 아니라 도덕적 지향성을 의미하게 된다. 정약용은 영명하고 무형한 마음의 능력 가운데 하나가 선을 향한 지향성 즉 성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지향성을 심과 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론틀이 아니라 영명무형지체라는 개념 안에 통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약용이 전통적인 성 개념, 즉 일종의 본질에 가까운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성리학적 '성' 개념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171/ 성리학의 맥락에서 '성'은 만물이 공유하는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본성으로, 여기에 좋아하고 싫어함 같은 정감적 능력은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약용에게 성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의 본질 규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경향성이기 때문에 좋아함과 싫어함의 기호로 드러날 수 있다. 정약용은 이 좋아하고 싫어함, 즉 기호가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며, 그러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정약용이 말하는 인간의 기호, 즉 자연성은 육체의 기호와는 다르다. 이는 사실 '도덕성'에 대한 지향과 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육체의 자연성이 아니라 마음의 자연성, 그것도 하늘이 천명으로 부여한 자연성을 의미한다. 정약용은 성이 선을 본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이론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는 유학의 본령으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맹자로부터 시작된 성이 선하다[性善]은 유학의 근본적 명제가 정약용에게 그대로 계승되는 것이다. 다만 그 선함이 우주적 원리인 리理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다.


하늘[天]이 나에게 생명을 부여할 때 덕[善]을 좋아하는 성향과 선을 택하는 능력을 주었다. 이것은 비록 나에게 있는 것이지만 본래 천명天命이다.


172/ 정약용은 스콜라 철학의 인간 이해를 수용함과 동시에 맹자로 대표되는 고대 유학의 인성론을 포괄하는 새로운 인간 이해를 제안한다. 그런데 여기서 정약용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인간에게는 본성의 기호를 운영할 독립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이를 '자주지권능自主之權能' 즉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고 부른다.


목적을 향한 자유로운 행위의 근거로서의 '의지'는 스콜라 철학적 인간론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173/ <천주실의>에 따르면 오직 인간만이 이성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외적인 실천에서 스스로 주관하는 의지, 즉 실제로 선을 택해서 실천하려는 의지를가진다. 스스로 주관하는 의지란 선을 행할 것인지 악을 행할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과 결정의 능력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이 문맥에서 의지는 선과 악을 향한 경향의 실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할 도덕적 의지인 것이다. 마테로 리치의 후임자 줄리오 알레니는 마테오 리치의 용어를 바탕으로 '자전自專'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한다.


174/ 마테오 리치가 참고한 스콜라 철학에서 이성은 인간이 지향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를 현실화하려면 어떤 과정과 방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지는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선택과 결단을 하는 역할을 한다. 정약용 역시 인간의 도덕적 실천이 마음에서 선을 택하여 추구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약용과 스콜라 철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정약용의 자주지권은이성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본성적 기호에서 보장되는 것이다.


175/ ... 정약용이 말하는 자주지권은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근대적 의미의 '자유의지'와는 다르다. 정약용이 말하는 자주지권이란 선과 악 가운데 선을 의지하고 선의 실천을 결정하는 능력, 즉 도덕적 성향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능력이지 일상적 의미의 자유로운 결정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자주지권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가능성으로 머무는 자연적 성향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즉 도덕적 실천의 실질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인간에게 선을 좋아하는 본성적 지향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자주지권'을 두는 것은 도덕적인 본성이 곧 바로 도덕적 실천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76/ ... 선을 향한 본성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이 자주 도덕적 실패 혹은 타락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외부의 상황이 인간의 성향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를 '세勢'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선을 향하는 도덕적 본성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도덕적 실천에 실패하는 것은 객관적인 상황, 즉 세勢가 인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하나의 경향성을 바탕으로 실제로 도덕적 실천을 하게 만드는 힘은 따로 있다. 그것이 선을 의지하고 선택하는 능력으로서의 '자주지권'이다.


... 내 안에서 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싸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나의 '영명靈明'이라는 도덕적 인식 능력과 더불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권능[自主之權]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는 "만일 덕은 내가 새롭게 안 것이 아니요 다만 본래 가지고 있던 바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미 (덕을) 잃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공로란 단지 스스로 배워서 덕을 쌓아 올리는 선에 있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마테오 리치처럼 정약용도 모든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하는 과정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177/ ... 정약용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 그 자체로 완전하며, 이 본성을 회복하는 노력이 곧 도덕성의 완성이라는 성리학의 이론으로는 인간이 왜 도덕적으로 실패하는지, 어떻게 해야 도덕적 실천을 현실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 만약 인간에게 도덕성을 자주적으로 실천할 능력이 있다면 그러한 능력을 부여한 상제와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이 지점에서 정약용의 심성론은 다시 상제관으로 연결된다... 이런 측면에서 정약용의 철학은 밝게 상제를 섬기는 학문, 즉 소사상제지학(昭事上帝之學)으로 연결된다.


178/ 그러나 정약용은 상제를 경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천명을 찾고 구하고 실천하는 노력 외에 별도로 소사지학(昭事之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약용이 강조하는 소사상제지학은 상제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경계함으로써 마음의 반성을 일으키고 도덕적 양심을 일깨우려는 실천적 수양의 성격을 갖는다.


179/ 정약용에게 상제는 사실상 경배를 요구하는 신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일종의 양심의 소리와도 같다... 이 도덕적 실천이 나를 인간답게 한다. 이 점이 정약용이 서학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었을 것이다.


... 그렇게 본다면 이벽과 정약용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신의 신격과 그에 대한 숭배로 향하는 서학과 갈라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들이 꿈꾼 새로운 학문은 아마도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늘을 자신 안에 품은 위대한 인격을 위한 인간학이었을 것이다.


7장 서학과 새로운 격물의 지향

184/ ... 서학은 중국의 조정에서 한 번의 검열 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점에서 중립적 지식의 성격을 띤다... 조선의 입장에서 서학은 서양 측에서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조선이 그들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매개,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비교적 온건하게 전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의 선별과 응용, 평가의 주도권은 조선 유학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185/ ... 조선 후기는 성리학의 핵심 이론인 이기론, 심성론 등의 사변적 논의들과 별도로 다양한 분야의 실용적 지식, 즉 박학博學을 추구하던 지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같은 백과사전적 유서類書들이 저술되고 유통되었던 것도 조선 후기 박학의 추구와 무관하지 않다.


186/ 예를 들어 청의 4대 황제 강희제(1654-1722)는 수학에 관심이 많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논문을 만주어로 쓰게 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만주어를 배워 수학을 강의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강희제는 서양 수학과 중국 전통 수학을 결합한 산학총서 <수리정온數理精蘊> 52권과 서양역법을 다룬 <역상고성曆象考成> 42권 등을 어명으로 완성하게 한다. 이 총서는 강희제가 실용적 관점에서 서양 수학을 어떻게 통제하고 체계화하여 통치에 활용하고자 했는지 잘 보여준다.


187/ <수리정온>은 영조 때인 1730년에 유입된 이래로 관상감 취재 시험에 활용될 정도로 조선에서 보편적인 수학서로 자리잡았다. 홍대용의 대표적인 수학서 <주해수용籌解需用> 역시 전통적인 동양의 산학과 <수리정온>의 서양 수학을 결합한 결과물이다... 수학자로서 최석정崔錫鼎(1646-1715)은 수학서 <구수략>을 저술했는데, 이때 이지조가 편찬한 <천학초함>과 자코모 로Giacomo Rho羅雅谷(1593-1638)가 저술한 <주산籌算> 등에서 얻은 서양 수학 지식을 활용한다...


서양 천문학과 지전설 등을 활용해 성리학적 우주관을 새롭게 구성한 독특한 천문서 <역학이십사도해易學二十四圖解>를 저술한 뛰어난 학자 김석문金錫文(1658-1735) 역시 전통적인 상수법과 천문 역법 안으로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을 끌어들이면서 전통적 우주론을 재해석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88/ 김석문보다 두 세대 아래인 서명응徐命膺(1716-1787) 역시 서양에서 전래된 구중천설과 지구설 등 다양한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 전반을 전통적인 역학의 사고 틀 내에서 해석하고 시도한 인물이다...


190/ ...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서학의 천문학적 지식을 수용해 자신의 견해에 따라 지구설을 신뢰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191/ ...홍대용은 <의산문답醫山問答>을 통해 서양의 기술을 인정하고 특히 지구설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밝힌다.


193/ ... 18세기 중반 조선에서 서학 연구는 개별적 학자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적 자원으로 선별된 것이지 유학에 대한 이념 자체를 포기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이념적 성격을 띠지 않았다...


194/ 오로지 책에서 얻은 지적 자원이 성호를 비롯해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에게 일종의 학문적 주도권과 자율성을 부여했다면, 18세기 이후 연행길에서 지식의 진정한 소유자인 서양인을 직접 대면하고 그들이 지은 서양식 건물 천주당에서 서양식 천문 관측 도구와 악기를 경험했던 18세기 조선 유학자들에게 서양은 책 속에만 존재하는 지적 정보가 아니었다...


이런 경험의 축적은 결과적으로 서양의 지적 자원을 포함해 청의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이른바 '북학론'이 나오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북학론은 그 자체로 청 문물 수용론을 표방한다...


195/ 이들이 지향하는 북학에는 서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서양 선교사를 초빙하거나 조선에 표류한 외국인들로부터의 기술을 이전받는 등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연행을 통해 기술적으로 진보한 중국을 경험한 북학론자들은 중국의 기술적 진보에 상당한 공헌을 한 서양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한 것이다.


북학론자 가운데서도 서학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인물은 홍대용洪大容(1731-1783)이었다... 홍대용은 열두 살때 노론계의 학자였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1702-1772)의 제자로 들어갔고, 이십대에는 김원행이 주관하던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이 시기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을 만났다.


197/ 북경에 들어간 뒤 홍대용은 천주당을 방문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이덕성이라는 관상감원과 함께 조선 연행사들의 사신관에서 가장 가까웠던 남당을 방문해 당시 흠천감정欽天監正이었던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할러슈타인August von Hallerstein劉松齡(1703-1774)과 흠천감 부정副正이었던 고가이슬Anton Gogeisl鮑友管(1701-1771)을 만나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천문 관측 기구를 직접 구경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이들과의 만남을 한문본 연행록인 <담헌연기湛軒燕記> 속에 '유포문답劉鮑問答'으로 정리했다.


198/ 이밖에도 홍대용은 이슬람 사람들을 만나 회교 사원을 구경했고 러시아인들을 만나는 등 북경에서 다양한 외국인들을 만나 견문을 넓혔다. 그는 중국을 통해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202/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들이었지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서양이라는 기술적으로 더 뛰어난 타자는 조선이 더 이상 중국에 기술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대안적 존재였다...


205/ 이기지李器之(1690-1722, <一庵燕記>)에 비해 더욱 흥미로운 사례는 그의 부친 이이명李頤命(1658-1722, <燕行雜識>)이 경험한 서양이다...


한편 그의 문집에는 당시 연행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여서양인소림대진현與西洋人蘇霖戴進賢'에 수록되어 있다. 이 편지의 주인공 대진현戴進賢은 독일인 예수회 회원 쾨글러Ignatius Koegler(1680-1746)이며 소림蘇霖은 포르투갈 예수회 회원 사우레즈J. Saurez(1656-1736)을 말한다...

206/ 이 부분은 이이명이 서학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유학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가치있는 윤리적 담론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8/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이명이 서양 수학을 독자적인 기원을 가진 독립적 지식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8장 척사의 시대 : 서학에서 천주학으로

213/ ... 조선 최초의 세례 신자가 된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정약용의 매형이었고... 황사영黃嗣永(1775-1801)은 정약용의 조카 사위였다... 진산사건의 주인공 윤지충尹持忠(1759-1791)은 정약용의 외가 쪽 6촌이었다.


219/ ... 정학의 권위를 드높이면 해결될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조에게는 서학-천주학에 접촉했다는 명분으로 남인들을 징계하는 일이나 소품체의 패관잡기를 막고 순수한 고문古文을 회복한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과 명분의 일이었다.


220/ ...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기호 남인의 계보를 그 뿌리인 퇴계 이황에 寒岡 鄭逑(1543-1620), 眉叟 許穆(1595-1682), 성호 이익으로 연결한다. 본래 퇴계의 학맥을 계승했다고 인정되던 정구와 허목의 계보에 성호를 올린 것이 채제공이었다...


224/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파견된 것은 이승훈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교구의 주교였던 구베아는... 당시에는 교황청의 엄격한 전교 정책에 따라 예수회의 입지가 약해져 있던 때였고 조선에서는 이미 천주교를 둘러싼 두 번의 교난이 발생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서양인 신부를 파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구베아는 이승훈의 편지를 받은 지 5년 만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조선에 파견했다.


사실 이승훈을 비롯해 조선의 신앙공동체가 원했던 것은 정조와 상층부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서양인, 그것도 천문학이나 수학에 능통한 천문 역법 전문가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천주교회 측은 외모가 유사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중국인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9장 박학의 시대 : 서양의 체험과 지식의 변화

249/ ... <지수염필智水拈筆>을 저술한 홍한주洪翰周(1798~1868)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한 이규경李圭景(1788-1865)이 그 대표자들이다...


250/ ... 이들이 경험한 것은 중국과 조선을 옥죄며 다가오는 강력한 타자, 전쟁에서 중국을 압도한 막강한 무력의 소유자, 조선 앞바다에서도 만날 수 있는 목전의 힘으로서의 서양이었기 때문이다.


253/ ... 홍한주는 중국을 상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그 어떤 위협도 결국 조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257/ 이규경에게 서양의 학문은 배울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양의 지식이 박학의 존재 이유인 학문의 유용성을 담보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260/ ... 그렇다면 전 시대 유학자들과 최한기崔漢綺(1803-1877)는 어떻게 다른가?... 최한기는 당시 상해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개신교 선교단의 번역사업 덕택으로 매우 세분화된 분야까지 19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다양한 과학적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261/ 적어도 최한기는 서양 과학 이론을 학습하거나 전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한기가 서양 과학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기 책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그 지식들이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식보다 우월하거나 정교해서가 아니다. 최한기의 최종적인 목표는 서양 자연학과 기술 이론들을 수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적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서양 과학 이론들을 자기 철학을 증명하고 구체화하는 일종의 증거로 쓰고자 했다는 것이다.


264/ 그는 자신의 기학氣學을 천하의 공학共學이라고 여긴다...


266/ 그에게는 전통적인 예교禮敎의 고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오직 실용과 이익이다.


268/ ... 이처럼 최한기는 동양과 서양을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 파악한다.


10장 다시 조선, 유학 그리고 서학

273/ ...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과 같은 중국인 입교자들뿐 아니라 이벽, 정약용, 정약종 등 조선 유학자들 역시 유학자로서의 신념을 훼손하지 않고도 서학을 주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74/ 이에 대한 가능한 답변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종교로서의 기독교 혹은 르네상스 자연학이 아니라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서양의 종교와 철학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회에 의해 중국의 사유와 개념으로 걸러진, 다시 말해 유학적 용어와 개념을 통해 절충되고 변용된 '서학'이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 결과적으로 마테오 리치로 대표되는 서학의 스펙트럼은 본래의 경로를 벗어나 중국과 조선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276/ 조선에 서학이 등장한 시기는 청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와 극복과 동시에 조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중의 과업이 주어진 시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 후기에 하나의 변수로 등장한 서학을 통해 조선인들은 중국과 대등한 강력한 문명이자, 중국을 능가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보유한 위협적인 타자에 대한 경험을 촉발시켰다. 이 낯선 경험 속에서 어떤 이들은 중국을 상대화하며 조선의 가능성을 최대로 확장한 반면, 어떤 이들은 중국의 그늘 아래서 온건한 방식으로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277/ ... 이들은 모두 목적을 위해 어떤 사상적 자원도 편견 없이 사용하며 결정적으로 자기 철학 안에서 독자적으로 소화한 강력하고 밀도 높은 통찰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지식인들에게 서학과의 만남은 외부의 관점을 통해 자기 언어를 재점검하고 이론적 세부를 다시 조정하는 과정을 통한, 진정한 문명을 향한 유학자의 자기 반성이자 확장의 과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