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 젬선생, 챗선생
주기적 휴일에서 일정한 주기란 주로 달의 삭망에 따른 주기로부터 비롯된다. 달의 주기는 29.5일이나 고대인들은 이중 달 모양의 주요한 변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달의 위상 변화는 7일의 마디 간격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것이 일주일 주기의 유래이다.
그 특정한 날은 가장 초기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는 행동을 삼가해야 하는 금기일이었다. 이는 바빌론 유수시 유대인에게 영향을 주어 안식일이 되었다.
그런데 달의 삭망과 연결되는 7, 14, 21, 28일은 달의 주기 29.5일과 어긋나므로 달의 일정한 모양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달이 시작될 때마다 새로 reset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그들의 천지창조 신화에 근거하여 한 번 시작한 7일의 주기를 달의 모양과 무관하게 끝없이 지속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7일 주기의 무한 루프는 기독교에도 이어졌다.
오늘날 대세가 된 이 음력 유래 7일 주기와 별도로 천문 방위에 입각한 8일 주기(에트루리아)와 십진법에 기초한 10일 주기도 과거 여러 문명권(이집트, 중국 등)에서 존재했다. 이중 10일 주기는 근대에 접어들어서 프랑스혁명기에 혁명을 주도한 급진파에 의해 과격하게 시도되었으나, 오랫동안 민간에 체화된 기독교의 힘을 재삼 확인한 것 외에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에트루리아의 8일 주기는 해나 달의 카렌다와 상관없이 일정하게 지속되는 주기로서는 역사상 처음이므로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특정한 날의 의미도 금기나 휴식이 아니라 시장이 열려 사람들이 모이는 날이었던 점도 특이하다.
오늘날 기독교의 세계적 지배와 맞물려 우리는 서력 기원과 함께 7일 주기의 휴일을 지낸다. 이는 우리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 여부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날에 지켜야 할 금기 따위를 고려하지도 않는다. 물론 하늘에 뜬 달의 삭망과 그 변화에 대해서도 무심하기 짝이 없다. 마침 주말에는 시장에도 가고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예전 문명에서 많이 보아왔던 일이다.
1. 메소포타미아 문명 (바빌로니아)
7일 주기의 기틀을 마련한 곳.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밤하늘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달(Sin)을 시간의 척도로 삼았다.
-관찰: 초승달에서 반달(7일), 보름달(14일), 다시 반달(21일), 그리고 사라지기 직전(28일)이라는 약 7일 간격의 명확한 마디를 발견했다.
-불길한 날(Evil Days): 이 전환점들은 달의 신이 성질을 바꾸거나 힘이 변화하는 시기로 보았기에, 인간이 새로운 일을 벌이기에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날로 간주되었다.
달의 주기가 7일 단위로 끊긴다는 사실은, 당시 그들이 관측했던 7개의 움직이는 천체(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라는 숫자와 기가 막히게 일치했다.
-숫자 7의 위상: 바빌로니아인들에게 '7'은 하늘의 주권을 가진 7신을 상징하는 완결된 숫자이자, 동시에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점성술적 해석: 7, 14, 21, 28일에 금기를 지키는 행위는 단순히 날짜를 세는 것을 넘어, 7개의 천체(신)들이 인간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시기에 몸을 사리는 행위였다.
이 날들은 현대의 즐거운 휴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은 우무 레무(Umu Lemnu, 불길한 날, Evil Days)라고 하여, 이 날에는 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고 믿어 왕조차 업무를 중단하고 자숙했는데, 즉 정기적인 '금기일'이자 '자숙일'이었다. 이날 왕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새 옷을 입지 않으며, 병거를 타거나 판결을 내리는 등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7'은 매우 불길하면서도 강력한 숫자여서 이전 달 시작일부터 누적된 7의 제곱수인 49일째는 특별히 더 위험한 날로 간주.
바빌로니아의 '샤바투(šabattu 또는 shapattu)'는 현대의 안식일(Sabbath)과 언어적으로는 뿌리를 공유하지만, 그 성격과 실질적인 운영 방식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차이를 보인다.
-어원: 아카드어로 '보름달의 날' 또는 '마음의 휴식(신을 달래는 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
-시기: 유대교의 안식일이 매 7일마다 돌아오는 고정 주기를 가진 것과 달리, 바빌로니아의 샤바투는 음력 한 달의 중간인 15일(보름달이 뜨는 날)을 의미.
바빌로니아인들에게 보름달은 달의 신 '신(Sin)'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기이자, 동시에 신들이 인간의 죄를 심판하거나 진노할 수 있는 위험한 전환점으로 인식.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날: '샤바투'는 신의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의미인 '움 누흐 리비(um nuh libbi)'라고도 불렸다. 즉, 인간이 즐겁게 쉬는 날이라기보다, 신이 화를 내지 않도록 정결하게 행동하고 제사를 지내는 '속죄의 날'에 가까웠다.
-샤바투의 확장: 보름달인 15일(샤바투)은 금기일들(7, 14, 21, 28일)과 겹치거나 그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 '불길한 날'들의 속성이 유대교의 안식일 개념에 영향을 주어 '정기적으로 일을 멈추는 날'의 기틀이 되었다.
2. 고대 이집트 문명 (10일 주기)
이집트는 나일강의 범람과 농경을 위해 매우 정교한 태양력을 사용.
-유래: 이집트인들은 1주일을 10일로 잡은 '데칸(Decans)' 시스템을 사용.
-휴일의 성격: 10일 중 마지막 9일째와 10일째를 휴일로 보냈다. 즉, 한 달(30일)에 세 번의 정기 휴일이 있었던 셈입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긴 노동 후에 쉬는 구조였다.
이러한 사실은 왕들의 계곡을 건설했던 장인들의 마을인 '데이르 엘-메디나Deir el-Medina'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오스트라카(Ostraca, 글씨가 쓰인 도자기 파편)를 통해 증명.
-출근부 기록: 발견된 기록에는 노동자들의 출결 상황이 상세히 적혀 있는데, 8일간의 근무 뒤에 9일과 10일째에는 명확히 '휴무'라고 표기.
-추가 휴일: 정기 휴일 외에도 종교 축제, 왕의 즉위 기념일, 심지어 '맥주 양조'나 '전날 가족과의 다툼' 같은 사유로 인한 개인적인 휴가도 꽤 관대하게 허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1년(365일) = 3계절 × 4개월 × 3주(10일씩) + 5일(축제일)
3. 고대 유대 문명 (안식일)
현대 주 7일제의 직접적인 조상. 바빌로니아의 7일 개념을 종교적·윤리적 차원으로 승화.
-유래: 구약성경 창세기에 근거하여,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에 쉬었다는 교리에서 출발.
-휴일의 성격: '샤바트(Shabbat)'라고 불리는 이 안식일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신을 경배하는 날. 이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심지어 가축까지)에게 휴식을 보장한 최초의 성문화된 제도.
학계에서는 유대인들이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시절 바빌로니아의 '7일 주기 금기일'과 '샤바투' 개념을 접한 뒤, 이를 자신들의 창조 신앙과 결합하여 현대적 의미의 'Sabbath(안식일)'로 발전시켰을 것으로 본다.
바빌론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는 7개의 토판으로 구성.
-유대인들은 바빌론 신화가 말하는 "혼돈과 전쟁을 통한 창조"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질서 정연한 7일간의 창조"를 제시.
-숫자 7이 가진 보편적인 신성함(메소포타미아적 배경)을 가져오되, 그 알맹이는 유대교의 윤리적 안식일로 채움.
4. 고대 로마 문명 (8일 주기에서 7일로)
로마는 초기와 후기의 휴일 개념이 크게 다름.
-초기 (눈디나에, Nundinae): 농민들이 7일간 일하고 8일째 되는 날 시장에 나와 물건을 팔고 소식을 듣는 8일 주기를 가졌다.
-변화와 확립: 이후 점차 유대교의 7일 주기와 점성술적 요소가 결합. 서기 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존엄한 태양의 날(Dies Solis일요일)에 모든 재판관과 시민은 쉬어야 한다"고 법령을 선포. 이때부터 유대교의 안식일(토요일) 전통과 기독교의 부활 기념일(일요일)이 로마의 행정 체계 안에서 '일요일 휴무'라는 현대적 형태로 정착하기 시작.
-교회의 결정: 서기 363년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는 기독교인들이 토요일(안식일)에 유대인처럼 쉬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일요일을 존중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는 유대교와의 완전한 신학적 결별을 선언한 사건.
5. 고대 중국 문명 (순과 휴가)
동양에서는 열흘을 한 단위(상순, 중순, 하순)로 묶는 10일 주기를 사용.
-휴목(休沐): 한나라 시대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은 '오일일목(五日一沐)', 즉 5일마다 하루씩 집으로 돌아가 목욕하며 쉬는 날을 가짐. 이후 당나라 시대에는 10일에 한 번 쉬는 '순가(旬假)' 제도로 변모.
6. 고대 인도 문명 (티티와 축제 중심)
고대 인도는 현대와 같은 '정기적인 주말' 개념보다는 달의 위상에 따른 '티티(Tithi, 음력 날짜)'와 종교적 축제가 휴일의 핵심.
-유래: 힌두력(판창가)에 따라 보름달(Purnima)과 그믐(Amavasya), 그리고 달이 차고 기우는 특정 시점(에카다시, 상현달 11일째와 하현달 11일째)과 반달(Ashtami, 상현 8일째)을 성스러운 날로 여겼다.
-휴일의 성격: 정기적인 '요일 휴무'보다는 종교적 정화가 우선. 특히 보름달과 그믐날에는 금식을 하거나 사원을 방문하며 생업을 잠시 멈춘다.
-특이점: 고대 인도인들은 우주적 주기인 '유가(Yuga)'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기에, 일상의 휴식보다는 거대한 제의적 축제(홀리, 디발리 등)를 통해 공동체가 한꺼번에 쉬는 형태.
7. 페르시아 문명 (조로아스터교와 가한바르)
고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사산 왕조 등)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선한 창조'를 기념하는 방식의 휴일.
-가한바르(Gahanbars): 1년을 6개 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의 끝에 5일간 대규모 축제. 이는 하늘, 물, 땅, 식물, 동물, 인간의 창조를 기념하는 정기 휴일.
-노루즈(Nowruz): 춘분을 기점으로 하는 새해 축제로, 자연의 부활을 기념하며 최소 수일에서 길게는 2주까지 모든 사회 활동을 멈추고 축제.
8. 이슬람 문명 (금요일, 주무아)
7세기 이후 아랍 세계를 지배한 이슬람교는 유대교(토요일), 기독교(일요일)와 차별화된 금요일(주무아, Jumu'ah)을 성일로 삼음.
-유래: 아담이 창조된 날이자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날.
-휴일의 성격: 엄밀히 말하면 이슬람교에서 금요일은 유대교의 안식일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은 아님. 쿠란에는 "예배가 끝나면 흩어져서 신의 은총(생업)을 구하라"고 명시.
-현대의 변화: 그러나 공동체 예배가 워낙 중요했기에 점차 금요일이 관공서와 시장이 쉬는 '정기 휴일'로 굳어짐. 많은 아랍 국가들이 금-토 주말을 유지.
9. 중남미 문명 (마야와 아즈텍)
메조아메리카 문명은 두 종류의 달력(260일 주기와 365일 주기)이 맞물리는 정교한 시스템.
-마야 문명: 20일을 한 달(Uinal)로 보았다. 매달 마지막 날이 정기적인 휴일은 아니었으나, 20진법 체계에 따라 특정 숫자가 겹치는 날에 대규모 시장이 열리고 제의를 위해 노동을 멈췄다.
-아즈텍 문명 (5일 시장 주기): 아즈텍인들은 5일을 한 단위로 보았다. 5일마다 열리는 '티앙기스(Tianguis, 시장)' 날이 사실상의 휴일이자 축제일. 이날은 물건을 교환할 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주고받으며 노동의 피로를 풀었다.
-네몬테미(Nemontemi): 365일 주기 달력 끝에 남는 '불길한 5일'. 이때는 나쁜 운을 피하기 위해 요리를 하거나 성관계를 하는 등 모든 일상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며 숨죽여 보냈다.
로마인들이 8일 주기(Nundinae, 눈디나)를 공식적으로 고수한 시점은 로마의 건국 신화와 초기 공화정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에 따르면 로마의 전설적인 초대 왕인 로물루스(Romulus)나 6대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시대에 이미 이 체계가 확립되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로마가 8일 주기를 확립하고 고수하게 된 과정은 크게 세 단계다.
1. 에트루리아의 유산 (기원전 8~7세기)
로마 이전 이탈리아 반도의 강자였던 에트루리아(Etruria)인들이 이미 8일 주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로마는 초기 왕정 시기에 에트루리아의 문명을 흡수하면서 이 시장 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종교적 기원: 에트루리아인들에게 '8'은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는 숫자였으며, 로마인들은 이를 계승하여 유피테르(Jupiter) 신에게 봉헌된 날로 여겼다.
에트루리아는 12개의 주요 도시 국가가 연합한 체제(Dodecapolis)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역을 중심으로 한 베이이(Veii), 타르퀴니아(Tarquinii), 카에레(Caere) 등 12개의 강력한 도시 국가들의 느슨한 결사체였다. 이들은 매년 '볼툼나 신전'에 모여 연맹의 수장을 뽑고 축제를 열었다.
-로마의 위치: 로마는 이들 12도시보다 남쪽인 라티움(Latium) 지역에 위치한 신흥 도시였다.
-지정학적 관계: 로마는 에트루리아 연맹의 최남단 도시인 베이이(Veii)와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으며, 이 베이이와의 전쟁과 교류를 통해 에트루리아 문명을 흡수했다.
-정치적 소통: 8일마다 열리는 시장은 곧 정보의 교류장. 연맹의 새로운 결정이나 법령이 공포되는 날이었기에, '8일'은 경제적 주기를 넘어 정치적 동기화를 위한 도구였다. 이 거대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표준 주기'는 필수적이었다.
2. 렉스 오르텐시아(Lex Hortensia)와 법적 고착 (기원전 287년)
로마 공화정 중기에 이르면 8일 주기는 단순한 관습을 넘어 강력한 법적 지위를 갖게 된다.
-평민회와의 관계: 이전에는 장날(눈디나)에 재판을 열거나 민회를 소집하는 것이 금지된 경우도 있었으나, 기원전 287년 오르텐시아 법을 통해 장날에도 법적·정치적 행위가 가능하도록 규정되었다.
-결과: 이 시점부터 8일 주기는 농민들이 도시에 들어와 물건을 팔면서 동시에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날로 완전히 고착.
3. '리셋 없는 연속성'의 고수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로마가 지중해를 제패한 후에도 이 8일 주기는 매우 강력하게 유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역법 개정(BC 46): 카이사르가 태양력(율리우스력)을 도입하면서 달력을 완전히 뜯어고쳤음에도 불구하고, 8일 주기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
-이유: 농민들의 생활 리듬이 이미 8일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꾸는 것은 국가 경제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다.
-성격: 농민들이 7일 동안 밭에서 일하고, 8일째 되는 날 도시에 와서 농산물을 팔고 법적 소송이나 정무를 처리.
-사회적 기능: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고, 노예들도 이날만큼은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종교적 안식보다는 '상업적 교류와 행정 처리'를 위한 실용적인 휴식이었다.
흔히 로마가 모든 것을 창조한 것으로 알지만, 실상 로마의 종교, 건축, 정치 시스템, 심지어 숫자와 역법의 설계도는 모두 에트루리아인들이 그린 것이었다. 에트루리아는 현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Toscana)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번영했던 '신비로운 기술 관료 문명'.
1. 로마의 '스승'이었던 문명
로마의 초기 왕들은 에트루리아 출신이 많았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했던 핵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여기서 나왔다.
-토목과 건축: 로마의 상징인 아치(Arch) 구조와 하수도 시설(클로아카 맥시마)은 에트루리아의 기술.
-정치 상징: 집정관을 호위하는 권위의 상징 파스케스(Fasces, 도끼발), 귀족들이 입던 토가(Toga)도 에트루리아의 복식.
-문자와 숫자: 로마 숫자의 기원이며, 그리스 알파벳을 수정해 라틴 문자의 기초를 닦았다.
2. '시간과 공간'의 설계자들
에트루리아인들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구획의 명수'들이었다.
-도시 계획: 하늘을 십자로 나누어 방위를 정하고 도시를 격자형으로 배치하는 기술(Cardo와 Decumanus)을 로마에 전수했다.
-8일 주기의 철학: 8일 주기(Nundinae)는 단순히 시장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8년 단위의 마디로 보았고, 문명의 수명도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이는 자연의 무질서에 '숫자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강력한 의지였다.
에트루리아 종교 체계에서 숫자 8은 우주적 질서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단위.
-수평적 구획: 그들은 하늘을 16개(8의 배수)의 구역으로 나누어 신들의 거처를 정했다. 8일 주기는 이러한 천상의 구획을 지상의 시간으로 옮겨온 것.
-수직적 마디: 에트루리아인들은 인간의 수명을 8년 단위의 7단계(총 56년)로 보았다. 이들에게 8일은 단순히 장날이 아니라, 우주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한 칸 이동하는 '운명의 마디'였다.
3. 독특한 사회상: 여성의 높은 지위
그리스나 로마와 비교했을 때 에트루리아가 가장 앞서갔던 부분은 젠더 구조였다.
-여성의 권리: 에트루리아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가졌고, 남편과 나란히 연회에 참석해 술을 마시며 토론. 로마인들은 이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했지만, 실상은 에트루리아가 훨씬 개방적이고 평등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향락과 예술: 벽화에는 춤, 음악, 운동경기를 즐기는 낙천적인 모습이 가득하다. 죽음조차 '축제의 연장'으로 보아 무덤을 화려한 거실처럼 꾸몄다.
4. 왜 '신비의 문명'이라 불리는가?
에트루리아는 강력했지만, 로마에 흡수되면서 그들의 언어와 기록이 거의 사라졌다.
-언어의 고립: 그들의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 않는 고립된 언어. 현재까지도 완벽히 해독되지 않아 그들의 속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패배자의 비애: 로마는 에트루리아로부터 모든 기술을 배웠지만, 역사 기록에서는 그들을 '교만하고 잔인한 패배자'로 묘사하며 흔적을 지우려 했다.
5. 현대어 속에 살아있는 에트루리아의 '유령 단어'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들 중 상당수가 실은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에트루리아어에 뿌리.
현대 영어 에트루리아 어원 원래 의미
Person (Persona) Phersu 가면(Mask).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탈을 의미함.
Satellite Satelles 경호원, 수행원. (주변을 돌며 지키는 존재)
Military Mele 군대 혹은 보병의 대열을 뜻함.
Anthem Antiphona (그리스어 유래설도 있으나) 에트루리아의 제례 음악 형식에서 유입.
프랑스 혁명력(French Revolutionary Calendar)의 '데카드(Décade)'
유럽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10일 휴무제'를 밀어붙였던 시기. 1793년, 혁명 정부는 기독교적 색채(7일 안식일)를 지우고 이성을 숭배하기 위해 달력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구조: 한 달을 30일로 고정하고, 이를 10일씩 3개의 '데카드(Décade)'로 나눴다.
-휴일: 10일의 마지막 날인 '디카디(Décadi)'에만 쉬게 했다.
-결과: 기존의 '7일 중 1일 휴무'에서 '10일 중 1일 휴무'로 바뀌자 노동 강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시민들은 "신보다 혁명이 더 가혹하다"며 불만을 터뜨렸고, 결국 1806년 1월 1일 나폴레옹에 의해 12년 만에 폐지되었다.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에게 기독교, 특히 가톨릭교회와 교황 체제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타파해야 할 구체제(Ancien Régime)의 핵심 기둥'이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를 국왕의 권력을 신성화하고 민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기만적 장치'로 보았다. 혁명 정부가 취한 조치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존 종교 체계를 부정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1. 경제적 거세: 성직자 민사 기본법 (1790)
혁명 초기, 재정 위기에 봉착한 정부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직자의 지위 자체를 국가 공무원으로 바꿔버렸다.
-국가 귀속: 주교와 신부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게 하고,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게 했다.
-교황권 부정: 성직자들에게 프랑스 헌법에 충성한다는 서약을 강요했다. 이는 로마 교황의 간섭을 차단하고 프랑스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결과: 서약을 거부한 '불선서 신부'들은 반혁명 분자로 몰려 박해를 받았고, 이는 독실한 가톨릭 지역인 방데(Vendée) 등에서 참혹한 내전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2. 문화적 말살: 탈그리스도교화(Déchristianisation)
로베스피에르와 급진파들은 기독교의 흔적을 일상에서 지우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을 폈다.
-이성(Reason)의 숭배: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이성의 신전'으로 개조하고, 십자가 대신 이성을 상징하는 여신상을 세웠다. 기독교의 신(God) 대신 인간의 '이성'과 '최고 존재'를 숭배 대상으로 삼았다.
- 언어와 지명의 개정: '생(Saint, 성)'이 들어간 지명을 모두 바꾸고, 앞서 논의한 공화력을 도입하여 7일 주기(주일)를 폐지함으로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을 지워버렸다.
-날짜의 이름: 모든 날에 성인 대신 포도, 당근, 고양이, 쟁기 같은 농작물이나 가축, 농기구의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매일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신이 아닌 '자연'과 '노동'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기독교적 사고의 회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혁명주의자들의 증오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었다.
-계급적 층위: 성직자는 제1신분으로서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을 내지 않는 기득권의 정점이었다.
-정치적 층위: 왕권신수설을 뒷받침하는 교회의 논리는 공화국과 국민 주권의 가장 큰 적이었다.
-철학적 층위: 계몽주의자들에게 가톨릭의 교조주의는 인간의 비판적 사고를 방해하는 미신과 광신의 근원이었다.
1. 계몽주의적 '이성'과 가톨릭의 '도그마' 충돌 - 철학적 층위
부르주아지는 교육받은 시민 계층으로서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 철학을 자양분으로 성장.
-미신으로서의 종교: 그들은 기적, 성물 숭배, 면죄부와 같은 가톨릭의 의례를 합리적 근거가 없는 '미신'이자 민중을 무지 속에 가두는 '기만'으로 보았다.
-과학적 세계관: 부르주아들은 뉴턴의 물리학처럼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믿었다. 반면, 신의 섭리에 따라 수시로 법칙이 바뀔 수 있다는 가톨릭의 세계관은 그들에게 지적으로 열등한 체계였다.
2. 경제적 걸림돌: 교회의 기득권 - 계급적 층위
부르주아지에게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대상이기 전에 거대한 지주이자 독점 기업이었다.
-십일조와 세금 면제: 자신들은 막대한 세금을 내며 국부를 창출하는데, 제1신분인 성직자들은 국토의 10~15%를 소유하고도 세금을 내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다.
-자본주의적 시간관 vs 종교적 시간관: 앞서 논의한 '7일 주기'와 수많은 '성인 축일'은 경제 활동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요소였다. 부르주아들은 노동과 생산을 최적화할 수 있는 십진법적 10일 주기(공화력)를 선호했는데, 이는 시간을 '신의 선물'이 아닌 '관리 가능한 자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 정치적 적대감: 왕권신수설의 보증인 - 정치적 층위
부르주아가 추구한 '국민 주권'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 바로 가톨릭 체제였다.
-권력의 출처: 가톨릭은 국왕의 권력이 신으로부터 온다고 보증했다. 부르주아들은 권력이 '사회 계약'에서 온다고 믿었기에, 교황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정치적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교육의 독점: 당시 교육과 기록(호적)을 교회가 독점하고 있었다는 점도 부르주아들에게는 위협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세속적 교육(Laïcité)을 통해 시민을 양성하고자 했다.
4. 부르주아의 대안: '이성 숭배'와 '최고 존재'
흥미로운 점은 부르주아들이 종교 자체를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새로운 종교'로 대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성의 여신: 1793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이성의 제전'은 기독교의 신 대신 인간의 지혜를 상징하는 여신을 모셨다.
-최고 존재(Supreme Being): 로베스피에르 같은 인물은 완전한 무신론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것을 우려해, 구체적인 교의는 없지만 우주의 창조주를 인정하는 '이신론(Deism)'적 형태의 종교를 국가 공식 의례로 만들었다. 이는 지극히 부르주아적인 '철학적 종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