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1790년(정조 14년)에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의 형)은 사행설을 제출하였다.
경술년 여름 순조의 탄생을 기념하여 가을에 증광별시(增廣別試)가 있었다. 그 별시의 책문(策問)은 오행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약전의 대책이 해원(解元 장원(壯元))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795년(정조 19년)에 부사직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그의 답안이 서양의 사행설을 취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정조가 직접 그의 답안을 검토하게 되었고 그 답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 오행을 말하고 다음 금(金)ㆍ목(木) 이행(二行)을 말하고, 다음에 수(水)ㆍ화(火)ㆍ토(土) 삼행(三行)을 말하고, 또 다음에 토(土)가 사행에 기왕(寄旺)하는 것을 말하고, 끝으로 오행을 거듭 말하여 결론지었다.(始言五行,次言金木二行,次言水火土三行,次言土寄四行,又以五行申結之。) 이행과 삼행으로 갈라서 말하였으니, 망발이라 한다면 가하다. 그러나 이 대책의 내용을 사학邪學이고 서학西學이라 한다면... 이는 매우 허무맹랑한 말이니, 지식 있는 선비라면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이 내용은 매우 소략하여 정약전이 어떤 오행설 또는 사행설을 전개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사실은 사행설이었는데, 정조正祖가 총애하는 신하를 구제하기 위하여, 오행설인 것처럼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전은 이 '사행설'을 한 번 내놓음으로써, 평생 고통을 받았고 결국 유배된 섬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오행설五行說의 지위는 그리도 범접하기 힘든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 19년 을묘(1795) 7월 7일(병진)_양력 1795.08.21.
행 부사직(行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의 이름을 조적(朝籍)에서 삭제하고 전리(田里)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박장설이 상소하기를,
“신이 현재의 일에 대해 삼가 분개하고 걱정하는 점이 있습니다. 신이 봄에 삼가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되었다가 용서받고 돌아오게 된 죄인 이현도(李顯道)의 상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연전에 연석(筵席)에서 내린 하교를 저들도 들어서 알 것이니, 이런 버릇을 철저히 고치지 않는다면 어찌 저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겠는가.’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매우 엄격하며 일깨우고 꾸짖는 것이 지극하셨으므로 신은 땅에 엎드려 황공해하였고 이어서 스스로 슬퍼하였습니다. 신과 이현도는 똑같이 나그네 신하인데 전하께서는 신들을 조금도 충의(忠義)가 없는 선비로 여기시어 이렇게 엄한 하교를 하고 이러한 처분을 내리셨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간악한 역적이 천만 가지 요사를 떨고 악행을 저질러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하게 우리 성상을 무함하고 온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 죄는 신하들이 그동안 올린 장주(章奏)에 이미 다 잘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먼저 그를 잡아가는 바람에 국법이 시행되지 못하여 그의 당여(黨與)가 예전 그대로 결탁하고 있어서 인심이 갈수록 더 미혹되고 있습니다. 성상에 대한 무함이 망극하였는데도 씻어 낼 기약이 없고 의리가 더욱 어두워졌는데도 밝힐 날이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충성스러운 신하와 뜻 있는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힘껏 성토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요직(要職)을 차지하고 있는 공경(公卿)이 모두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할 뿐 지금까지 한 사람도 그 수뇌부를 격파하고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는 것으로 성상에 대한 무함을 분명히 밝히고 이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려는 자가 없습니다. 얼마 안 가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편안히 받아들여서 마침내 만연되고 방치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후세에 오늘날의 조정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아, 서유방(徐有防)은 역적 정동준(鄭東浚)에 비하면, 높은 작위가 어찌 그만 못하였겠으며 융숭한 총애도 어찌 그가 부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도리어 그에게 빌붙는 것을 달갑게 여겨서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하여 어깨만 툭 쳐도 따라나서고 눈썹만 찡긋해도 뜻을 받들어서 이쪽에서 요청하는 것이 있으면 혹시라도 그 뜻을 어길까 두려워하고 저쪽에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곡진히 따라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거간꾼들이 값을 흥정하고 모리배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과 같아서 변화무쌍하게 농락하여 조정을 현혹하고 빈번하게 서로 호응하여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였습니다. 그 결과 의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점점 혼란스럽고 혼탁한 지경이 되었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탄식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아서 간사한 역적의 실상이 탄로 나서 조참(朝參)을 행한 날에 상소와 계사(啓辭)가 번갈아 나왔으니,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성은에 보답할 마음을 가졌다면 진실로 남보다 먼저 엄히 성토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의 죄를 덮어 주려는 생각에서 조금도 놀라거나 분해하는 기색이 없이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닫고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군주를 잊고 자기 당여를 비호하려 한 그의 마음이 분명하여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때 성상의 전교에서 조용히 책망하고 은혜로 관직에 보임(補任)하는 것으로 용서하셨으니, 그의 도리로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땅에 처박고 죄를 인정하고서 견책(譴責)을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감영의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스스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인 양 하였으니, 그의 마음과 행적을 따져 볼 때 일시적으로 가볍게 견책만 하고 끝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이 달포 전에 포도청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여러 해 동안 마음속으로 깊이 걱정하던 것이 이 일로 인해서 갑절이나 더 격하게 일어났습니다. 아, 저 이가환(李家煥)은 한낱 비루하고 음험하며 사악한 무리일 뿐입니다. 글재주를 조금 가지고서 온 세상을 기만하고 의리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의 확고한 죄안(罪案)입니다. 그리고 사학(邪學 천주학(天主學))을 주창하고 유학(儒學)을 위반한 것이 용서하기 어려운 가장 큰 죄입니다. 아, 서양(西洋)의 요사한 학술이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남의 집안과 나라에 화를 끼치는 것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과 노자(老子)와 부처의 도(道)보다도 심한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만력(萬曆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연간에 처음 중국에 들어와 그 뒤에 서남쪽의 여러 오랑캐 지역에 두루 퍼져 갔으며 일본(日本) 종문(宗文)의 당(黨)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난(亂)을 일으키고 화(禍)를 조성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실로 미적(米賊)과 풍각(風角)의 변고보다 더 심한 점이 있었으니, 좌도(左道)를 끼고 요사한 말을 함부로 지껄여서 외환과 내란의 역적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가환은 바로 훌륭한 성상께서 다스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서 어찌 감히 이렇게까지 윤상을 무너뜨리고 성상의 교화를 막는단 말입니까. 자신의 어리석은 생질(甥姪)을 부추겨서 몇 권의 요사스러운 책을 사 오게 한 다음 부유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모아서 허다한 재화를 속여 얻고는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어 그 학술을 널리 전파하여 남의 자식을 해치고 남의 제사를 끊어 버린 것이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을사년(1785, 정조9) 봄에 추조(秋曹 형조)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에 글을 지어서 스스로 빠져나오려고 하였으니, 이는 봄 꿩이 스스로 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연전에 성상께서 책문(策問)을 내어 역상(曆象)에 대해 물으셨을 때에 감히 청몽기(靑濛氣) 등과 같은 불경(不經)한 설을 신법(新法)이라고 하면서 방자하게 지어 올렸고, 그가 과시(科試)를 주관하여 책문의 제목을 오행(五行)에서 냈는데 해원(解元 장원(壯元))이 썼던 답에서는 오로지 서양인의 학설에 입각하여 오행을 교묘하게 사행(四行)으로 바꾸었으니, 그 해원은 바로 그의 제자였습니다. 과시(科試)의 문체는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격하여 보통의 패설(稗說)도 감히 따다가 쓸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에도 없는 요사스러운 말과 사리에 어긋난 내용을 몹시 중요한 요점으로 여기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고서 어려움 없이 발탁하면서 조금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이 몇 가지 일만 가지고도 그가 무리를 이끌고서 세상의 교화를 무너뜨리고 어지럽혔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 번 바뀌어 을사년(1785) 추조의 옥사가 되었고, 두 번 바뀌어 신해년(1791) 두 역적의 변고가 되었고, 세 번 바뀌어 또 이번 포도청의 역적들 사건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들과 관련하여 전후로 내리신 처분이 지극히 엄정하여 눈서리처럼 엄중하고 비이슬처럼 관대하시니, 최필공(崔必恭)처럼 완악한 자도 오히려 감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는 여전히 세력을 확장해 나가서 줄줄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이가환에게서 전염되어서 고질이 된 결과입니다. 그의 죄안(罪案)을 따져 보면 그가 어찌 감히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요사한 도(道)를 배척하고자 하면서 그 괴수를 용서해 준다면, 날마다 백 명, 천 명을 주벌한다 하더라도 징계되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포도청의 사건을 가지고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서 서울과 지방에 널리 공표하고, 그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나누어 각각 그 죄를 올바르게 다스림으로써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학(私學)을 물리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아무리 진작되지 못하였다 하고 조정이 아무리 정돈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찌 감히 이처럼 해괴하고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 점점 쇠약해져서 어제 일도 잊어버리곤 하지만, 그의 상소에서 이른바 ‘저들’이라는 두 글자를 부연한 것을 보고 나니 그때 비답으로 내린 전교가 오히려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렇지만 그 말은 꼭 그와 이현도를 가리켜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저들’이라고 하였고 또 ‘신들’이라고 칭하였으며, 말미에는 ‘신과 이현도는 똑같이 나그네 신하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의심스럽고 애매하여 그 말뜻을 알기 어렵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어찌 감히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인가. 소장(疏章)이 생긴 이래로 보기 드문 바이다.
더구나 그 역시 이 나라에서 벼슬하고 있고 유구국(琉球國)이나 일본국(日本國)에서 어제오늘 귀화한 무리도 아니면서 ‘나그네 신하’라는 말을 어찌 감히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입 밖에 내며 먹물에 붓을 적셔서 소장에 썼단 말인가.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로 그를 책망해서도 안 되지만, 신하로서의 도리로 볼 때에도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린다.’라는 과조(科條)로만 온전히 귀결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현도를 지레 석방해 주었더니, 그가 그 뒤를 이어서 이렇게 상소한 것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상소에서 겉으로는 이현도를 배척하였으니, 그의 생각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다.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사를 하고자 한다면 이현도를 도로 정배한 뒤에 그의 죄를 감처(勘處)하는 것이 일의 체모로 볼 때 진실로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현도를 용서해 준 것은 효(孝)로 나라를 다스리는 혈구지도(絜矩之道)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그를 도로 정배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격이니 이현도는 우선 그대로 놓아두라. 그는 우선 조적(朝籍)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전리(田里)로 내쫓음으로써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신중하게 쓰지 않는 신하들의 경계로 삼도록 하라.
그가 말미에 논한 일은, 말이 어쩌면 그리도 악착스러운가. 듣기만 해도 놀라웠다. 거의 혹독하게 당하였는데 어찌 당여라고 했단 말인가. 경기 감사의 속마음을 나만은 잘 알고 있으니, 일 만들기 좋아하는 어떤 무리가 그에게 이렇게 하도록 사주했단 말인가. 이것이 어찌 경기 감사를 뒤흔드는 계책이 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이른바 애만 쓰고 이익은 없는 것이라 하겠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가환)가 당한 일은 또한 기회를 틈타 돌을 던진 것이라고 하겠다. 홍낙안(洪樂安)이 아직까지 정도(正道)를 부지한 데 대한 표창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그의 심보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저 박장설의 말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불을 땐 적이 없어 검게 그을지 않은 묵적(墨翟)의 굴뚝과는 차이가 나니, 아무 근거 없이 생판으로 무함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연전에 이동직(李東稷)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골짜기로부터 나와 높은 나무에 오르고 썩은 것에서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라는 말로 이가환을 비유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새롭게 될 길을 열게 하고 실정에서 벗어난 이동직의 말을 배척했던 이유이다. 그런데 박장설이 억지로 몰아넣은 것이 이동직이 한 것보다 10배는 더하였으니, 공조 판서의 처지가 딱하다. 그러나 공조 판서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다.’라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대해 스스로를 깊이 징계하고 있다는 것을 근래 연석(筵席)에서 목격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을 물결에 흘려 보내고 다시 남이 열 번에 걸쳐 해내면 자신은 백 번에 걸쳐 해내겠다는 각오로 공부를 한다면 중신(重臣 이가환)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정조실록] 정조 19년 을묘(1795) 7월 24일(계유)_양력 1795.09.07.
관학 유생(館學儒生) 박영원(朴盈源) 등이 상소하기를,
“우리나라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은 중국과 같다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일종의 음흉하고 사특한 무리가 서양의 책을 구입해 와서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어 이단의 학설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자간의 친함을 끊고 군신 간의 분의(分義)를 무시하며, 남녀가 서로 뒤섞여서 부부간의 윤리가 어지러워지고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모두 폐해서 신(神)과 사람 사이의 이치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정욕을 채우려는 마음을 성하게 하여 예악으로 교화할 수 없게 하였고, 천당과 지옥의 설이 일어나서 형정(刑政)으로 제어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예절, 의리, 청렴, 수치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중대한 원칙인데, 이 학문은 상하와 존비를 뒤섞어 놓고서 귀천의 등급을 분별하지 않으며 벌거벗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뜻이 없으니, 이것이 그 가르침이 유행되기 쉬운 이유입니다. 재물과 성욕은 사람들의 커다란 욕구인데, 돈과 곡식을 서로 제공해 주어 가난하고 구걸하는 자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고, 남녀 간에 구별이 없어서 제멋대로 간음하게 하니, 이것이 그 무리가 쉽게 불어나는 이유입니다. 사대부 가운데 재주와 지식이 조금 있는 자들은 이 학설을 빌려다가 우매한 대중을 속이고 현혹하며, 일반 백성들 중에 몽매하여 아무 식견도 없는 자들은 그 도를 좋아하여 신명(神明)처럼 떠받듭니다. 그래서 갈수록 서로 가르치고 꾀어서 수백 명 수천 명의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신은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교도(白蓮敎徒)들의 변고와 같은 일이 반드시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저들이 부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벗들만 중시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벗을 맺고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는 마음으로 속이고 유혹하며 선동한다면 무슨 변고인들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왕년에 일어났던 윤지충(尹持忠)의 변고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그런데도 경기(京畿) 지역과 호서(湖西) 지역에서는 이러한 풍조에 서로 응하고 도성 안에서는 도당이 실로 번성해져서 올해엔 최인길(崔仁吉) 등 세 역적의 변고가 또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우두머리는 아직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고 당여(黨與)만이 약간의 형륙(刑戮)을 당하였을 뿐이니, 이것이 어찌 아주 간악한 사람들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저 이가환(李家煥)의 경우는 애당초 천주교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지만, 끝에 가서 천주교를 논변하여 물리쳤다는 것에는 무슨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까. 그가 지은 죄를 논한다면 양관(兩館)에서의 처벌을 어찌 감히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정약전丁若銓에 대해서는, 이미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으므로 감히 다시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본래 이가환에게서 천주교를 전수받은 신도들로 사특한 학문을 비호했다는 것에 대해 수많은 사람의 입을 막기 어렵습니다. 이승훈(李承薰)이 요사스러운 책을 구입해 와서 그의 흉악한 외삼촌 이가환을 학습시켰다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있으니, 당여에 대한 처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경기 지방의 권일신(權日身)과 호서 지방의 이존창(李存昌)은, 연전의 형옥(刑獄)에서 모두 자복(自服)하였는데 옥문(獄門)을 나오자마자 또다시 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이가환의 무리부터 전형(典刑)대로 명쾌하게 처벌하여 그 도당으로 하여금 그칠 줄을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이 현관(賢關 성균관)에 있으면서 정학(正學)을 밝히고자 하니, 그 말은 옳다. 그러니 어찌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대들은 저 거울은 텅 비어 있고 저울대는 수평을 이루는 본체를 알 것이다. 그 본연의 본체를 보전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공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공정하다는 것은 생각마다 일마다 물체마다 말마다 모두 한결같이 천리(天理)의 올바름에서 나와 어긋나지도 않고 잡되지도 않으며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라는 경계에 대해 치열하게 공부하여 공정한 안목으로 남의 잘못된 점을 살피고 공정한 의론으로 외부의 사특함을 배척한다면 누가 감히 여론이 나오는 곳인 성균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현관이 존엄해지면 정학에 있어서 참으로 여곽(藜藿)을 지키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나의 마음을 그대들의 마음으로 삼고서 물러가 《중용》의 서문(序文)과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을 읽되, 글자마다 글자의 뜻을 이해하고 구절마다 구절의 뜻을 이해하며 침잠하여 음미하고 반복하여 연구해서 그 뜻을 앞장서서 밝힐 방도를 깊이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현관이 존엄하지 못한 것은 많은 선비들의 수치이고, 선비의 풍습이 예스럽지 못한 것은 학관(學官)의 수치이다. 오늘 태학(太學)에서 올린 상소는, 그 내용이 사학(邪學)을 배척한 것으로서 근래 대각(臺閣)의 일을 대신 행하는 잘못된 규례와는 같지 않았으므로 내가 보고서 즉시 비답을 내려 주었다. 그런데 추후에 무슨 말 끝에 그것에 대해 물었더니,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공무를 행하는 재임(齋任)이 없었는데도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제멋대로 써서 올리면서 상소의 첫머리에 ‘관학 유생’이라고 썼다고 했다. 이것은 현관이 생긴 이래로 없던 일이다. 장의(掌議)는 많은 선비를 영솔하므로 그 체모가 도리어 총재(冢宰)가 백관을 총괄하는 것보다 더 중하니, 장의가 반열을 정돈하지 않는다면 태학의 반열이 될 수가 없다. 더구나 상소를 올리는 일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그리고 언급한 일도 시각을 다투는 아주 급한 일이 아니었으니, 장의가 공무를 행할 때까지 조금 기다린 뒤에 소장(疏章)을 올리더라도 무슨 안 될 것이 있다고 이렇게 전에 없던 일을 했단 말인가. 일전에 비답을 내려 유시(諭示)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중용》에 이르기를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교’라는 것은 바로 형정(刑政)이다. 오늘 유생들의 일은 교를 따른 것인가, 따르지 않은 것인가? 삼가 성묘(聖廟 문묘(文廟))의 성문법을 지킨 것인가, 지키지 않은 것인가? 분명하게 드리워 준 훈계도 무시하고 관원의 임무를 침해하는 데 따른 혐의도 돌아다보지 않은 채 앞장서서 장의가 할 일을 대신 행한 거재 유생에 대해 반장(泮長 대사성(大司成))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처벌한 뒤에 초기(草記)하게 하라. 사유(師儒)의 우두머리인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성균관에서 처음 있는 일을 목격하고서도 일이 발생하기 전에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작지 않다. 한 가지 일로 각각 상소한 것도 매우 문제가 있다. 사세(事勢)가 지난번에 대신(臺臣)이 한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그것을 이번 일과 비교하면 예삿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모로 보나 경책(警責)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니, 해당 대사성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推考)하라. 앞으로 장의가 없는 상태에서 소장을 올리는 경우, 유생에게는 태학의 법전에 기재되어 있는 무거운 벌을 시행하고, 성균관 당상에게도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는 것으로 법전에 기재하라.”
하였다.
[여유당전서] 다산시문집 제15권 묘지명 <貞軒의 墓誌銘>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을묘년 봄은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 즉위하신 지 19년째이다. 간신(奸臣) 정동준(鄭東浚)이 이미 주살(誅殺)되니 왕강(王綱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강)이 다시 떨치게 되었다. 상(上)이 인정문(仁政門)에 납시어 군신(群臣)의 조하(朝賀)를 받으실 적에 대단히 노하여 큰 소리로 이르기를,
“조정에 있는 백료(百僚)들은 나의 고명(誥命)을 들으라. 내가 오늘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등용하여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의 권명(眷命)을 받들어 호선 오악(好善惡惡)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백성의 뜻을 크게 안정시키려 하노라.”
하니, 모든 신하들은 두려워 떨며 엄숙한 모습으로 삼가 왕명(王命)을 들었다. 이때 상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臣) 채제공(蔡濟恭)을 기용하시어 좌의정(左議政)에 제수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신 용(鏞)에게 앞으로 나와 뽑게 하시어 전(前) 대사성(大司成) 신 이가환(李家煥)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제수하시니 중외(中外)가 흡족해 하며 ‘선류(善類)가 조정에 모였다.’하였다.
한 달이 지난 뒤 상께서 신 가환과 신 용을 불러 이르기를,
“화성(華城)은 바로 우리 장헌(莊獻)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 금년 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세자의 원(園)을 참배(參拜)하고 왔다. 앞으로 10년이 지난 뒤 나는 거기서 노년을 보낼 것이므로 화성에 노래당(老來堂)을 지었으니 이 화성의 일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원(園) 주위의 식수(植樹)와 궁전(宮殿)ㆍ대사(臺榭 망루)의 축조(築造)와 성지(城池)ㆍ갑병 (甲兵)의 수선과 양곡ㆍ전포(錢布)의 저축에서부터 정관(亭館)ㆍ우전(郵傳)과 노부(鹵簿)ㆍ희뢰(餼牢)에 이르기까지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모두 정리하고 부정(簿正)하여 나라의 전례(典禮)를 밝힐 것이다. 가환아, 그대는 박식(博識)하니 이 일을 잘 맡아하라. 용(鏞)아, 그대는 민첩하니 가환을 도와 일을 처리하라. 규영부(奎瀛府)는 왕의 거처와 가까우므로 매우 엄숙한 곳이니, 그대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놀고 쉬며 학문하라. 그대들에게 궁중(宮中)의 술과 진귀한 찬과 국과 귤과 등자(橙子)와 말린 고기와 엿을 내릴 것이니, 마시고 먹으며 두터운 은혜에 젖으라.”
하시었다. 신들은 엎드려 은혜에 감읍하며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 며칠 뒤 상화조어연(賞花釣魚宴)을 베풀 적에 상께서 말에 오르신 뒤 구마(廐馬)를 내어오라 명하시어 우리에게 타고 따르게 하셨다. 신 제공ㆍ신 가환과 신 용은 상을 따라 청양문(靑陽門)에서 담을 끼고 동쪽으로 석거각(石渠閣)에 다다라 말에서 내렸다. 거기서 부용정(芙蓉亭)으로 가서 낚시질하며 운(韻)을 내어 시(詩)를 지었고, 영화당(映花堂)으로 돌아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이 되자 상께서 촛불을 주시며 원(院)으로 돌아가라 하시었다.
이해 가을에 진산 현감(珍山縣監) 이기양(李基讓)을 부르시어 시험해 보시고는 사제(賜第)하여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특별히 제수하시니, 이때는 소인의 도가 쇠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여 태화(太和 음양이 조화된 기운)가 함육(涵育)하고 만물이 왕성하던, 진실로 빛난 일치(一治)였다. 5년 뒤인 기미년 봄에 신 제공이 죽고 다음해 6월에 상이 승하하셨다. 그 다음해 신유년 봄에 화(禍)가 일어나서 신 가환은 옥사(獄死)하고 신 기양은 단천(端川)으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갔다. 이해 겨울에 악인(惡人) 목만중(睦萬中)ㆍ홍낙안(洪樂安)ㆍ이기경(李基慶) 등이 용사(用事)하여 신 제공의 관작을 추탈하고 다시 신 가환의 죄를 논하여 가율(加律)을 청하고 또 나를 옥에 가두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여러 대신이 구해준 덕에 강진(康津)으로 귀양갔으니 이것이 그동안에 있었던 영고 성쇠의 대략이다.
아, 하늘은 이미 우리 선대왕(先大王 정조)같이 총명 예지(聰明睿智)한 분을 내어 군사(君師)로 세우고 또 몇몇 현준(賢俊)을 내어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 일대(一代)의 장관(壯觀)을 이루게 하더니 다시 전복(顚覆)시켜 총록(寵錄)을 잘 마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하늘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18년 뒤인 무인년(1818, 순조 18)가을에 내가 살아 돌아와서 비로소 몇몇 명신(名臣)의 행적을 서열(敍列)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채공(蔡公)은 이미 묘비(墓碑)와 묘지(墓誌)가 있기에 그만두고 이공(李公)의 행적을 기록하여 지문(誌文)을 짓는다.
공의 휘(諱)는 가환(家煥), 자는 정조(廷藻)이니 여흥 이씨(驪興李氏)이다. 이씨는 조선조에 이르러 대대로 혁혁(赫赫)하였고 그 종족(宗族)이 옛 정릉골[貞陵巷]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정릉 이씨(貞陵李氏)라고도 칭한다. 10대조 계손(繼孫)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5대조 소릉(小陵) 상의(尙毅)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냈으며, 그 손자 매산(梅山) 하진(夏鎭)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다. 매산의 아들 여섯 사람 중에 셋이 현달하였으니, 맏이인 옥동(玉洞) 서(漵)는 찰방(察訪)을 지냈고, 둘째인 섬계(剡溪) 잠(潛)은 평민으로 상소(上疏)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나 뒤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막내인 성호(星湖) 익(瀷)은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성호의 형 침(沈)이 바로 공의 조부(祖父)로서 계부(季父) 명진(明鎭)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침이 용휴(用休)를 낳았는데, 용휴는 진사(進士)가 된 뒤로는 다시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고 문장에 전념하여 우리나라의 속된 문체(文體)를 도태하고 힘써 중국의 문체를 따랐다. 그의 문장은 기이하고 웅장하여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이나 석공(石公) 원굉도(袁宏道)에 못지 않았다. 혜환 거사(惠寰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원릉(元陵 영조(英祖)의 능호(陵號)) 말엽에 명망이 당시의 으뜸이어서 학문을 탁마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찾아와서 질정(質正)하였으므로, 몸은 평민의 열(列)에 있으면서 30년 동안이나 문원(文苑 문단(文壇))의 권(權)을 쥐었으니 예부터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배들의 문자(文字)에 대해 흠을 너무 심하게 끄집어냈기 때문에 속류(俗流)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우리 성호 선생은 하늘이 내신 빼어난 호걸로서 도덕과 학문이 고금(古今)을 통하여 견줄 만한 사람이 없고, 교육을 받은 제자들도 모두 대유(大儒)가 되었다. 정산(貞山) 병휴(秉休)는《역경(易經)》과 삼례(三禮 《예기(禮記)》ㆍ《의례(儀禮)》ㆍ《주례(周禮)》를 전공하고, 만경(萬頃) 맹휴(孟休)는 경제(經濟)와 실용(實用)을 전공하고, 혜환(惠寰) 용휴(用休)는 문장을 전공하고 장천(長川) 철환(嚞煥)은 박흡(博洽)함이 장화(張華)ㆍ간보(干寶)와 같았고, 목재(木齋) 삼환(森煥)은 예(禮)에 익숙함이 숭의(崇義)와 계공(繼公) 같았고, 염촌(剡村) 구환(九煥)도 조부(祖父)의 뒤를 이어 무(武)로 이름이 났으니, 한 집안에 유학(儒學)의 성함이 이와 같았다.
공은 여러 종형제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여러 형들의 보살핌이 매우 깊었다. 더구나 공은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글은 평생토록 잊지 않고 한번 입을 열면 줄줄 내리 외는 것이 마치 치이(鴟夷 호리병)에서 물이 쏟아지고 비탈길에 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으며, 구경(九經)ㆍ사서(四書)에서부터 제자 백가(諸子百家)와 시(詩)ㆍ부(賦)ㆍ잡문(雜文)ㆍ총서(叢書)ㆍ패관(稗官)ㆍ상역(象譯)ㆍ산율(算律)의 학과 우의(牛醫)ㆍ마무(馬巫)의 설과 악창(惡瘡)ㆍ옹루(癰漏)의 처방(處方)에 이르기까지 문자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번 물으면 조금도 막힘없이 쏟아놓는데 모두 연구가 깊고 사실을 고증하여 마치 전공한 사람 같으니 물은 자가 매우 놀라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태학(太學)에 유학(遊學)하였는데, 월과(月課) 시험에 계속 시(詩)가 합격되어 원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더니, 얼마 되지 않아 회시(會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였다. 또 정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증광시(增廣試)에도 급제하여 오래지 않아 제조(諸曹)의 낭중(郎中)이 되고, 이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을사년(1785, 정조 9)에는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지제교(知制敎)에 제수되어 명을 받들어《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였는데, 어연(御筵)에 오를 적마다 자세하고 분명하게 의견을 개진(開陳)하고 인거(引據)가 해박하였다. 하루는 상이 그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이르기를,
“저런 사람을 어찌 끝내 등용하지 않으리오.”
하니, 듣는 자들은 크게 꺼리면서도 그가 크게 등용될 것을 알았다.
이때 번옹(樊翁 채제공)이 당인(黨人 노론(老論))에게 쫓겨나 도성 밖에 살고 있으니 채홍리(蔡弘履)ㆍ목만중(睦萬中) 등이 모두 번옹을 배반하고, 지조가 확실치 않은 자들은 둘 사이를 오가며 눈치를 살폈으나 공은 홀로 청의(淸議 정론(正論))를 가지고 정범조(丁範祖)ㆍ유항주(兪恒柱)ㆍ윤필병(尹弼秉) 등과 함께 지조를 굳게 지켜 변치 않았다. 뒤에 번옹이 10년 동안 집정(執政)할 때 도움이 된 것은 모두 이 몇 사람의 힘이었다. 그 간에《대전통편》을 편찬한 공로로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이내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나갔다. 정주로 나가서는 정치가 깨끗하고 명성이 드높았으나 시론(時論)에 영합하는 어사(御史)는 도리어 공에게 죄가 있다고 아뢰어 파직시키고 금화현(金化縣)으로 귀양보냈다.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포천(抱川)에서 여묘살이를 할 적에 친구 중에 번옹을 배반하는 자가 날로 증가한다는 것을 듣고는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다면서 상복을 입은 채 서울로 와서 유공(兪公)과 상의하였다. 마침 김복인(金復仁)이 개연히 상소하여 번옹의 억울함을 변명하고 드디어 배신한 무리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기뻐하며,
“가려운 데를 긁는 것 같다.”
고 비답(批答)하셨다. 이때 상은 번옹이 친구들의 마음을 다 잃어 우익이 없다고 여겼다가 김공(金公)의 상소(上疏)를 보시고는 비로소 청론(淸論)을 지키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아셨다.
건륭 무신년(1788, 정조 12) 봄 번옹이 정승이 되고, 공도 승선(承宣 승지(承旨))이 되어 자주 정원(政院)에 들어갔다. 상이 한가할 때 공을 인견(引見)하시고 삼한(三韓)과 사군(四郡) 이후의 우리나라 고사(故事)를 물으시면 공은 번번이 이십삼사(二十三史)를 인용하여 막힘없이 대답하니, 상은 크게 경탄하시고 물러나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가환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학사(學士)이다.”
하셨다. 신해년(1791, 정조 15) 겨울에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홍희운(洪羲運)이 번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렸다.
“진신(搢紳 벼슬아치)과 장보(章甫 유생) 중에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자들이 모두 서교(西敎)에 빠졌으니, 장차 황건(黃巾)과 백련(白蓮) 같은 난이 있을 것입니다.”
상은 번옹에게 명하여 관서(官署)에 가서 목만중ㆍ홍희운ㆍ이기경(李基慶) 등을 불러 호남옥사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장악원(掌樂院) 조사 사건이다. 며칠 뒤 이기경이 상중(喪中)에 상소하여 조사한 일이 공정치 못하였다고 공격하니, 상은 크게 노하여 이기경을 경원(慶源)으로 귀양보냈다.
다음해 봄 내가 옥당(玉堂)으로 들어갔고, 겨울에는 공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 공이 시장(試場)을 열어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려 하니, 섬계(剡溪 이잠(李潛)의 호임)를 미워하는 요로(要路)의 자제들이 시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공이 과시(課試)를 그만두려 하자, 상이 그 소문을 듣고 이르기를,
“저희들 스스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엄히 신칙(申飭)하여 공사(公事)를 집행하라.”
하시므로 공은 애써 과시를 마쳤다. 그러나 공의 화(禍)는 실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이 시론(時論)에 영합하기 위하여 상소하여 문체(文體)를 가지고 공을 헐뜯어 반시(泮試 성균관의 과시(課試)임)를 중지시키고자 하니, 상이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너희가, 재신(宰臣) 이가환의 문체는 경전(經傳)을 경시한다는 것으로 화파(話欛 이야기 거리)를 삼았다. 나도 한마디 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던 참인데 그대의 말을 들으니 마치 가려운 데를 긁는 것과 같도다. 근일 내가 치세(治世)의 희음(希音)을 듣고자 하여 몇몇 젊은 문신(文臣)을 일차로 등용하여 이끌어 주고 경각(警覺)시켰더니, 남공철(南公轍)ㆍ김조순(金祖淳)ㆍ이상황(李相璜)ㆍ심상규(沈象奎) 등이 혁혁한 문벌(門閥)로 인하여 순식간에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ㆍ예문관 제학이 되어 공거(貢擧)하면서 많은 선비를 그르쳤고, 말을 윤색하여 왕언(王言)을 욕되게 하였도다. 이는 이른바 훌륭한 악기로 비속한 음악을 연주하고 좋은 술을 와기(瓦器)에 붓는 격이었다. 태학과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을 이들에게 맡겼다가 망쳤으니, 변방으로 귀양가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가환은 그 집안이 본래 좋은 축에 들었으나 오랜 세월을 불우하게 지냈으므로 정숙(精熟)한 문예(文藝)를 쌓고도 스스로 조정의 버림을 받은 초야(草野)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가 토해 내는 말들은 하나같이 비장(悲壯)하고 강개(慷慨)한 것뿐이었고, 그 마음에 맞는 것은 제해(齊諧)와 색은(索隱)뿐이었다. 처신이 불안하면 할수록 말이 더욱 편벽되고 말이 편벽될수록 문장이 더욱 괴퍅해졌다. 화려한 문장은 팔자 좋은 사람들에게 양여(讓與)하고 자신은 이소(離騷)와 구가(九歌)를 빌어 불우한 처지를 읊었도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가환이 좋아서 한 것이겠는가. 이것은 조정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가 특별히 편전(便殿)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란 편액(扁額)을 걸고, 정구팔황(庭衢八荒)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여덟 창문 머리에 붙이고서 아침저녁으로 이를 바라보며 나의 맹세로 삼았다. 이로부터 가난한 선비들이 먼 시골에서 모여들었으니, 가환도 그 중에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공철(公轍)과 같이 별안간 일어난 상도(常道)를 어긴 무리와 한가지로 여겨 배척하니 어찌 가환이 억울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배척해야 마땅한 자는 배척하지 않고 배척해서는 안 될 사람만 배척해서야 되겠는가. 가환은 바야흐로 깊숙한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와 지난날을 잊고 마음가짐이 새로워지고 있으니,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문장이 어찌 점점 아름다운 경지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가령 가환의 재주가 둔하여 삼일 괄목(三日刮目)할 정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아들이나 손자가 또 어찌 문예를 남에게 양여(讓與)하고 스스로 명성을 떨치는 성대함을 본받지 않겠는가. 맹단(盟壇)에 올라 우이(牛耳)를 잡고대일통(大一統)의 대권(大權)을 어둡고 어지러운 이 세상에 다시 밝히는 것을 나는 그의 임무로 여긴다.”
상은 공을 미워하고 꺼리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아시고 더욱 서둘러 부르셨으나 공은 완강히 거절하고 명을 받들지 않으니, 상은 공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내보내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을 내친 것 같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공을 2품으로 승진시키신 것이니 상의 끊임없는 권주(眷注 은총을 베풂)가 이와 같았다.
계축년(1793, 정조 17) 이른 봄에 공이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아무 쓸모없는 사람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몸이니, 세상에 대하여 애당초 원망이나 미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신을 논하는 자들이 연해 헐뜯고 미워하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이겠습니까. 혹은 드러나지 않게 배척하기도 하고 혹은 드러내놓고 배척하기도 하지만 그 핵심은 신의 종조(從祖 이잠(李潛))의 일을 가지고 신의 집안을 헐뜯는 것입니다. 아, 신의 종조 잠(潛)이 당시 세자(世子 경종(景宗)) 보호를 진달(陳達)한 상소는 진심을 토로하여 국가에 충성하고자 했던 것인데, 끝내 이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억울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한 한이 풀리지 않은 채 세월은 흘렀습니다.
신이 차마 붓을 잡고 종조의 일을 다시 제기(提起)할 수는 없습니다만, 열조 (列祖)께서 분명히 변별(辨別)하신 말씀이 국사(國史)에 환히 실려 있어 이목(耳目)으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또 다시 이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신이 일찍이 《어정황극편(御定皇極編)》을 보니, 사실을 차례로 서술하시고 남김없이 분석하시어 일편(一篇)의 문자(文字)가 일성(日星)처럼 밝으므로 신은 이 글을 수없이 읽고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손을 씻고 이 글을 베껴 두었다가 죽는 날에 지하로 가지고 가서 종조를 뵙고 한자한자 전해 드리며 조손(祖孫)이 함께 천대(泉臺 구천(九天))에서 감읍하고, 또 장차 천하 후세에 사실이 이렇노라고 밝히려 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저들과 시끄럽게 시비를 다투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신이 평소 마음 속에 맺혔던 생각을 토로합니다.
주먹과 발길질, 칼과 창을 분수로 알고 사생 화복을 생각 밖으로 돌리고 몸을 이끌고 물러나 성은(聖恩)을 노래하며 자자 손손이 살아서는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하기를 바랄 뿐인데 다시 무엇을 한(恨)하겠습니까?”
하니, 상은 온화한 말씀으로 비답하셨다. 이때 우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잠(潛)의 흉소(凶疏)가 역적 김일경(金一鏡)ㆍ박필몽(朴弼夢) 등이 종사(宗社)를 모해하고 선류(善類)를 해친 장본(張本)이 되었는데, 지난 신임(辛壬) 연간에 추악한 무리들이, 선견(先見)의 지혜가 있고 국가를 위해 죽은 충신이란 말로써 흉인 잠을 추칭(推稱)하여 표창하기를 청하였으니, 흉도(凶徒)끼리 맥락(脈絡)이 서로 통하고 기미(氣味)가 서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끝내는 역적 김 일경이 지은 교문(敎文)에 바로 잠의 성명을 거론(擧論)하며 사신의 무릉[徙薪之茂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환이 감히 흉악한 잠의 일을 가지고 장황하게 말을 하니 패악하고 무엄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은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상소는 아무 까닭없이 송원(訟冤)하는 자와는 다르다. 근래 중비(中批 특지(特旨)로 임명하는 것)한 일로 인한 공격을 견딜 수 없어 오랜 뒤에 상소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밝혔으니, 측은하다고 할 만한데 어찌 반드시 운운(云云)하느냐. 하물며 선왕(先王 숙종) 임술년 9월에 내린 교서(敎書)와 다음해 여름에 내린 교서가 기거주(起居注)에 자세히 실려 있음에랴. 잠의 조카인 이맹휴(李孟休)에 대한 성교(聖敎)도 그처럼 정중하고 간곡하시어 ‘내가 모든 일 깨끗이 씻어버리고 너를 등용할 것이다. 지난날 방미 두점(防微杜漸)의 뜻으로 처분(處分)한 바 있으나, 그 뒤 이잠이 무죄하다고 진달하자 다시 증직(贈職)하였노라. 신임(辛壬) 이후 잠을 포장(褒獎)하는 것도 당심(黨心)이고 잠을 헐뜯는 것도 당심이니, 만약 맹휴가 잠의 조카라 하여 등용치 않는다면 나라 안에 어찌 등용할 사람이 있겠는가.’하시고, 드디어 건극(建極)이란 두 글자로 명하셨도다. 나는 승지에게 이 성교를 들이라 명하여 상고한 뒤에 비로소 가환을 등용한 것을 경(卿)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때 대사성 심환지(沈煥之)도 상소하기를,
“경종대왕께서 동궁(東宮)으로 계실 때 숙종께 문안하시고 부왕(父王)이 드실 음식을 살피시어 문왕(文王)의 무우(無憂)를 이루었는데, 저 흉인(凶人)들은 무엇 때문에 보호(保護)란 말을 하였겠습니까? 양궁(兩宮 경종과 영조)을 이간하여 의리를 괴란(壞亂)시키고 충현(忠賢)을 참살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가환은 이런 사실을 알고서 감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입니까? 선왕께서 순일한 덕으로 중(中)을 세워 세상을 교화하시어 언의(言議)가 같지 않고 취미(臭味)가 다른 세신 고가(世臣故家)들을 모두 극(極)으로 모이게 하여 복을 주시고 한 울안으로 모아 교화하여 만수 일궤(萬殊一軌)하게 하셨는데, 소론(小論)을 말함. 저 가환은 무슨 심성(心性)으로 편벽되게 일방적으로 제 방조(傍祖)의 흉론(凶論)만을 고수, 의리와 혈전을 벌이고 국가와 배치하여 잠의 심보로 제 심보를 삼고 잠의 입으로 제 입을 삼고자 한단 말입니까? 처음에 전하께서 ‘가환은 잠의 방손(傍孫)이니 잠의 흉론(凶論)을 반드시 이어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문묵(文墨)의 재주가 있으니 완전히 버릴 수 없다.’하시고 드디어 그 잘못을 탕척하고 깊은 성덕으로 이끌어 주셨으니 가환은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가슴에 새겨 더욱 의(義)를 힘써야 할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니 가환이 바로 또 하나의 잠입니다. 흉인 잠이 있는데도 엄벌하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입니다. 가환을 변방으로 내쳐 선한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원에서는 언관(言官)이 아니면 의율(擬律)할 수 없는 것인데 심환지의 상소에 내치라고 한 것은 격례(格例)에 어긋난다 하여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상이 은밀히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때 판중추(判中樞) 김종수(金鍾秀)도 상소하기를,
“흉인 잠의 상소는 오로지 양성(兩聖)의 자효(慈孝)를 이간하고 당시의 충현을 도륙(屠戮)할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환이 비록 잠의 흉악한 심보를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역시 선왕의 신하인데 하늘 아래 살면서 어찌 감히 잠이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하였다는 말을 글로 써서 어전(御前)에 바칠 수 있단 말입니까. 세도(世道)를 생각하매 다만 목놓아 울고 싶을 뿐입니다.
조덕린(趙德隣)에 대한 처분은 전하의 실수였습니다. 신이 무신년에 올린 차자(箚子)에 어린 돼지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 돼지가 머뭇거리던 때를 지나 저돌(猪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상이 또 정원에 명하여 그 상소문을 물리치게 하시고, 드디어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를 엄히 신칙하시니, 사나운 기세로 계속 일어나려던 자들이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여움이 산처럼 쌓여 공공연히 역적처럼 꾸짖었고, 공과 사이가 좋던 민종현(閔鍾顯)ㆍ이서구(李書九) 등도 이때부터 갈라져서 서로 말도 하지 않았으며, 섬계(剡溪 이잠의 호)를 미워하는 자들은 젊은 신진(新進)들까지도 모두 공을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공의 화는 실로 여기에서 성립된 것이다. 큰 명망을 지고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는 분으로서 또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의 노여움을 샀으니, 어리석은 사람도 공이 끝내 화를 면치 못할 줄 알았다.
이해 여름 번옹이 영의정이 되어 상소하여 모년(某年)의 일을 말하자 김 종수(金鍾秀)가 심히 공격하니, 상은 부득이하여 금등(金縢)을 열어 근신(近臣)들에게 보여 주셨다. 다음해 겨울 모든 신하가 추가(追加)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휘호(徽號) 올리기를 청하여 도당(都堂)에서 여덟 자를 의논해 올렸으나 장헌세자의 효의가 담긴 금등의 뜻을 천명(闡明)함이 없으므로 상은 글자를 다시 의논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꼬집어 말할 수 없어 번옹에게 물었다. 번옹 역시 무어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공을 불러 물으니 공은 즉석에서,
“개운(開運)이란 두 글자는 옛날 석진(石晉 석륵(石勒)이 세운 후진(後晉))의 연호(年號)였으니, 어찌 할 말이 없음을 근심하십니까.”
라고 대답하므로 대신이 그대로 아뢰었다. 며칠 뒤 상은 그 사실을 아시고 이르기를,
“재상에는 반드시 글 읽은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가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시고, 드디어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만들었는데 번옹을 도제조(都提調)로 삼고 공을 가차(加差)하여 제조로 삼고 용을 도청랑(都廳郞)으로 삼아 그 일을 돕게 하셨다.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었는데 또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유신(儒臣) 한광식(韓光植)이 상소하여 그 소략함을 논박하니 상은 마침내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하시어 옥책문을 다시 짓게 하셨다.
을묘년 봄 공을 정경(正卿 판서)에 발탁하시어 신 용과 함께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짓게 하시고 장차 공을 크게 등용하려 하셨다. 이해 여름에 포장(捕將) 조규진(趙圭鎭)이 최인길(崔仁吉) 등 세 사람을 잡아 왕지(王旨)를 받들어 곤장을 쳐서 죽인 일이 있었는데, 7월 초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상소하여 포장이 죄인을 멋대로 죽인 죄를 논박하였다. 또 며칠 뒤 부사직(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상소하여 스스로 기려(羈旅)의 신하라 칭하고, 먼저 서유방(徐有防)의 간사함을 논박하고 다음으로 포청(捕廳)의 일을 논하면서 공까지 논박하기를,
“가환은 약간의 글 재주를 갖고서 의리를 변란(變亂)하였으며, 섬계(剡溪)의 억울함을 변명한 것을 말함. 사학(邪學)을 창주(倡主)하고 유학(儒學)을 배치(背馳)하였으며, 생질(甥姪) 이 승훈(李承薰) 을 보내어 사학의 책을 사오게 하여 부자들을 유혹하고 속여 제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어 그 사술(邪術)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하고, 또 공이 일찍이 천문 대책(天文對策)에 감히 청몽기(淸蒙氣) 등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말을 하였다고 논박하고, 또 공이 일찍이 동고관(同考官)이 되어 경술년 가을에 증광시(增廣試)가 있었음. 오행(五行)을 책문(策問)하였는데, 해원(解元 장원(壯元)) 나의 중형(仲兄)임. 의 대책은 전적으로 양인(洋人)의 설을 주장하여 오행을 사행(四行)로 만들었다고 논박하며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기를 청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모두 목만중(睦萬中)이 늘 해오던 말로 저는 가만히 있고 박장설을 시켜 논박하게 한 것이다. 상소문이 들어가자 상은 크게 노하여 전교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비록 떨치지 못한다고는 하나 저가 어찌 감히 이처럼 패악(悖惡)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역시 나라 안에서 이름 있는 사대부(士大夫) 집안으로서 유구(琉球)나 일본서 어제오늘 귀화(歸化)한 무리가 아닐진대, 기려란 말을 어찌 감히 마음에 두고 입에 올린단 말인가.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때 공은 여전히 공조 판서로 있었다. 에 대한 논박은 역시 기회를 노려 남을 해치려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다. 홍낙안(洪樂安)도 오히려 부정(扶正)하였다는 칭찬을 받지 못한 것은 내가 그 마음을 미워하기 때문인데, 지금 저 박장설의 말이 홍낙안의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공조 판서가, 이단(異端)을 전공(專攻)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훈계에 깊이 징계하는 것을 근일 경연(經筵)에서 목도(目覩)하였으니 남들이 하는 말이 중신(重臣)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박장설을 먼저 두만강으로 보내고 다음에 동래로 보내고 다음에 제주로 보내고 다음에 압록강으로 보내서 사방을 두루 돌게 하여 기려의 신하란 말에 맞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또 전교하기를,
“의궤(儀軌)를 교정(校正)하는 일은 역시 중책(重責)이라 할 수 있다. 남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았으니 청몽기(淸蒙氣)가 비록 정론(正論)은 아니지만 어찌 이 한 가지를 가지고 그 사람의 평생의 일을 단정해서야 되겠는가. 전어(轉語) 한 구절은 동연(同硯 동문(同門))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기려라 자칭하는 박장설이 어찌 들었겠는가. 곧 이 한가지 일만 가지고 보더라도 풍속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은 박장설이 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다. 교정당상(校正堂上) 이가환은 각별 조심하여 공무(公務)를 행하라.”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생질을 보내어 책을 사오게 했다 하니, 이 무슨 말입니까? 이승훈(李承薰)의 신해년 공사(供辭)에 명백히 사실을 진술하여 이미 소석(昭晳)의 성은을 입어, 저 이승훈도 이미 깨끗이 죄명(罪名)을 벗었는데, 하물며 신에게 그 죄를 끌어붙일 수 있습니까? 또 부자들을 유인하여 모았다 하니 모인 사람의 성명이 의당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해치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과연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이며 그 증거가 있단 말입니까? 증거가 있다면 왜 드러나지 않으며 만약 증거가 없다면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쉽게 한단 말입니까. 또 을사년 질문[作文]의 설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후합니까. 척사(斥邪)의 글이 신의 손에서 나왔다 하니 신이 어찌 굳이 사양하겠습니까마는 사실 신이 지은 것이 아닌데 어찌 신이 지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창 신을 사(邪)라 하여 배척하다가 또 척사(斥邪)했다 하니, 역시 신을 함정에 밀어넣기에 급급한 나머지 일마다 허튼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몽기(蒙氣)의 설은 진(晉) 나라 저작랑(著作郞) 속석(束晳)에게서 나온 말로 역대로 인용했던 말입니다. 가령 그 말이 서양에서 창시(創始)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역상(曆象)의 법이요 사학(邪學)과는 전혀 무관한 것인데, 더구나 옛사람이 이미 말한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옛 글을 강론하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신이 주시(主試)로서 발책(發策 출제(出題))했다는 말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신은 그때 참시관(參試官)에 불과하였는데, 어찌 주시(主試)라 할 수 있으며, 참시관이 어찌 발책할 수 있었겠습니까. 박종악(朴宗岳)이 주시관(主試官), 이만수(李晩秀)가 부시관(副試官), 공이 참시관(參試官)이었다. 더구나 장원을 뽑는 것은 보통 급제(及第)를 뽑는 것과 달라 반드시 중론(衆論)이 일치되어 모두 좋다고 해야만 결정하는 것이니, 이를 꼬투리잡는 것은 너무도 엉성하지 않습니까? 신은 본래 장설과 은혜도 원한도 없으니 어찌 밉고 곱고가 있겠습니까. 신은 본래 성품이 편색하여 악을 미워함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귀신 도깨비 같은 한두 인간이 목만중ㆍ홍낙안 등임. 물고 뜯어 온갖 거짓말을 다 만들어 내어 두려운 말들이 다달이 생겨 나고 있습니다. 지금 장설의 상소도 실은 귀신 도깨비 같은 자들이 일찍부터 떠들던 말로 신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바이니, 신이 장설에게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신이 횡역(橫逆)을 당할 때마다 성은을 입었습니다. 이동직(李東稷)이 상소하여 신을 지척할 적에도 전하의 비답은 은근하고 간곡하셨으며, 또 기궐(剞劂 교서(校書))의 역(役)을 맡게까지 하셨으니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일로 은혜가 후손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또 지금 장설의 상소에 즈음하여 한편 미워하시면서 한편 가르치시되 인십기백(人十己百)의 말씀으로 정중하고 돈독하게 하시어 마치 자애로운 아비가 어리석은 자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이 하시니 지금 신은 이 한 목숨 다하기 전에 모든 일에 보답하기를 도모하여 어리석음도 돌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성덕을 드날리어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치고 세태(世態)의 광란(狂瀾)을 막아, 세상을 교화하시고 풍속을 바로잡으시는 전하의 지극하신 뜻에 저버림이 없게 할 따름입니다.”
하니, 상은 온화한 말씀으로 비답하셨다. 또 전교하기를,
“이른바 청몽기(淸蒙氣)가 진(晉) 나라 사람의 설이라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역(曆)을 물어 대책할 때에는 마땅히 시용(時用)을 말할 것이다.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만들었다는 대책의 시권(試卷)은 단연코 한 번 사정(査正)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임헌 공령(臨軒功令)에 실려 있는 것을 가져다가 상하의 글귀를 몇 차례에 걸쳐 자세히 보니, 애당초 공격하는 자들의 말과 비슷한 곳도 없었다. 처음에 오행을 말하고 다음 금(金)ㆍ목(木) 이행(二行)을 말하고, 다음에 수(水)ㆍ화(火)ㆍ토(土) 삼행(三行)을 말하고, 또 다음에 토(土)가 사행에 기왕(寄旺)하는 것을 말하고, 끝으로 오행을 거듭 말하여 결론지었다. 이행과 삼행으로 갈라 말한 것을 아울러 망발이라 한다면 혹 그럴싸하지만, 이 대책의 내용을 사학(邪學)ㆍ서학(西學)이라 한다면 서양과 교통하기 전에, 8백년 만에 하루씩 틀려가는 대연력(大衍曆)을 바로잡은 당(唐) 나라 일행(一行)의 명자(名字)도 사학이며 일행의 역법(曆法)도 서학이란 말인가? 공격하는 자들의 말은 매우 허무 맹랑하니 식견이 있는 선비라면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나의 형 약전(若銓)을 위하여 소석하신 전교였다. 다만 공이 서서(西書)를 본 것은 사실인데 공의 상소문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만 전념하고 서서를 보게 된 본말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 주기에는 부족하였다. 상이 또 하유하기를,
“전 공조 판서의 사직소(辭職疏)는 사실을 얼버무려 넘기며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기만 하였을 뿐이니 이 어찌 그런 사실이 있다 없다 분명히 말하여 진심을 토로하는 뜻이라 하겠는가. 해박(該博)함이 지나치면 박잡(駁雜)한 폐단이 있는 것은 필연의 이치이니 전일의 허물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일으키어 위로는 부감(孚感)의 방법을 다하고 아래로는 경신(傾信)의 도리를 다하기에 힘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또 연석(筵席)에서 아뢸 때는 진실된 말을 했는데 갑자기 문자상에서는 도리어 그 사실을 숨겼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문계(問啓)하게 하라.”
하였다. 7월 21일 공이 답하여 아뢰기를,
“신은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어, 연전(年前)에 신이 보지 못했던 책이 연경(燕京)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빌려다가 탐독했는데, 혹 신기(新奇)한 내용도 있어 처음에는 대략 섭렵했으나, 좀더 자세히 열람해 보니 그 내용이 허탄하고 바르지 못하여 노불(老佛)과 같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벼슬하지 말고 제사지내지 말라.’는 말은 인륜(人倫)을 거스르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무부 무군(無父無君)이기에 곧 그 잘못을 공격하여 물리칠 것을 나의 임무로 삼고 사교를 피하여 멀리할 뿐만 아니라 기필코 사교를 멸하여 없애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친지(親知)들도 모두 아는 바인데, 그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소본(疏本)에 이런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신이 일찍이 어藰에서 다 실토했으므로 거듭 말하지 않아도 성상께서 통촉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상소는 비방을 변명한 등보(滕甫)의 글과 같은 것이고, 자기의 주의 주장을 역설한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와는 다릅니다. 생각하옵건대 소장(疏章)은 연주(筵奏)와 달라 중외에 반포하는 것이니, 이 소장을 보고서 꼬치꼬치 따져 만약 신이 서서(西書) 본 것으로써 중한 죄안(罪案)을 삼는다면 스스로 해명할 방법이 없겠기에 얼버무려 넘겼던 것이니, 신의 사정 또한 슬프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의 노여움이 풀렸다. 며칠 뒤 전교하기를,
“진심을 알지 못하고 견책하였도다. 문계(問啓)를 보고서야 비로소 나의 처분이 너무 지나쳤음을 알았도다. 옛말에 ‘허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치는 것이 귀하다.’고 하였으니, 설령 한두 가지 눈에 선 것이 있더라도 이것이 특히 기이(奇異)를 힘씀으로 인해서인데 하물며 깨우쳐 고치고 힘껏 지척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가위 장횡거(張橫渠)의 무리라 할 것이며 마침 편간(編簡)의 역에 있으면서 미워하는 자들이 때를 타서 돌을 던지 것인데 그들이 해치게 내버려두는 것도 역시 ‘마음이란 본시 허하여 물에 응하되 자취가 없다.’라는 도가 아니다. 이미 그 본심을 알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어찌 개운히 씻어 털어버릴 방법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전 판서 이가환은 등용하여 그대로 교정 소임을 맡겨 일을 보게 하라.”
하였으나, 26일임 공은 또 소명(召命)을 받들지 않으니, 전교하기를,
“벼슬에 나오도록 강압하는 것도 예(禮)로 부리는 뜻이 아니고 그대로 버려 두는 것도 인재(人材)를 등용하는 도에 어긋나니, 마땅히 한번 조정으로 나오게 하는 예절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 파직(罷職)을 서용(敍用)하여 그 직에 눌러 있게 하였으니, 가서 일하는 것도 중하거니와 고두 사은(叩頭謝恩)하는 것도 급하니 서둘러 소명(召命)에 응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 할 것인데, 패초(牌招)를 어기고 나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공을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제수하시고, 나를 내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삼으셨다. 또 전교하였다.
“서양의 책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지는 수백 년이 되었다. 사고(史庫)와 옥당(玉堂)의 장서(藏書) 속에도 모두 서양의 책이 있어 몇 십 권 정도가 아니니, 연전(年前)에 특명으로 서서(西書)를 구입해 오게 했던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옛 정승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문집(文集)에서도 서양 사람 소림대(蘇霖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법서(法書) 보기를 요구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하느님을 섬기고 성품의 본연(本然)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유학(儒學)과 다름이 없으니 황로(黃老)의 청정(淸淨)이나 석가(釋迦)의 적멸(寂滅)과 동일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응(報應)을 논함에 있어서는 도리어 모니(牟尼)의 법과 흡사하니 이런 교리(敎理)로 천하의 풍속을 바꿔놓기는 어려울 것이다.’하였으니, 충문공의 말은 서교의 내면을 자세히 분별했다 하겠다. 또한 간혹 서교를 심히 공격하는 이도 있으니, 고(故) 찰방(察訪) 이서(李漵)의 시(詩)에,
오랑캐가 이단의 학을 전하니 / 夷人傳異學
도덕에 해가 될까 두렵네 / 恐爲道德寇
라고까지 하였다. 대개 근일 이전에는 박아(博雅)한 선비들이 논리(論理)를 세워 서교를 비평하기는 했으나, 그 비판이 너그럽건 준엄하건 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학(正學)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그 피해가 사설(邪說)보다 심하고 맹수보다 더하니, 오늘날 폐해를 구제하는 길은 정학을 밝히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힘써 권선 징악의 정사를 행한 뒤에야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형벌은 습속을 바로잡는 방법 가운데 말단인데, 하물며 사학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랴.”
이 때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여 서학을 배척하니, 그를 특별히 대사간에 제수하고 전교하기를,
“사학(邪學)을 배척한 최헌중을 이미 발탁하여 썼으니 사서(邪書)를 사들여 온 이승훈이 편안히 집에 있게 버려 두는 것은 형정(刑政)이 아니다.”
하시고, 이승훈을 예산(禮山)으로 유배하여 그 죄를 다스렸으니, 이것이 을묘년 가을에 내린 처분이다. 공이 들어가 하직을 올리니, 상은 공을 위로하여 보내셨다. 이해 겨울 용도 부름을 받아 돌아왔고 공도 내직(內職)으로 들어왔으며, 다음해에 이승훈도 귀양에서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의 물론(物論)은 더욱 험악하여 공을 영원히 매장하여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 하므로 상은 냉각기를 두어 시끄러움을 가라앉히고자 하였고 공 역시 출입을 끊고 한가로이 지내며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 겨울에 병진년 겨울 용이 다시 승지가 되어 규영부로 들어가서 교서(校書)하였는데, 공이 편찬 정리하던 책은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악인들이 뜬소문을 퍼뜨려 말하기를
“번옹도 공을 버리고 거두지 아니하니, 이는 장사(壯士)가 제 팔목을 제가 끊는 수법을 쓴 것이다.”
하였다. 이 소문이 며칠 사이에 온 거리에 퍼져 드디어 조정에까지 들어가니 상께서도 의심하셨다. 번옹과 가까운 자가 있어 조용한 틈을 타서 그 소문의 진부(眞否)를 번옹에게 물으니 번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사년 대보름날 저녁은 구름이 끼었으나 16일에는 달이 밝으니, 윤필병(尹弼秉)ㆍ이정운(李鼎運) 등 여러 사람이 번옹을 찾아가서 함께 답교(踏橋)하기를 청하자, 번옹은,
“오늘 내가 몸이 편치 못하니 그대들은 섭서(葉西) 권 대감(權大監 권엄(權�)) 집으로 가라.”
하였다. 여러 사람이 다 물러가고 이경(二更)이 되자 번옹은 사람을 시켜 공을 청해 오게 하여 함께 광통교(廣通橋)로 나가서 장막 안에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구운 고기와 떡국을 먹으며 즐겁게 고금(古今)을 담론하고 서로 진심을 말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이때 놀러 나온 온 장안의 백성ㆍ서리(胥吏)ㆍ유사(儒士)ㆍ조관(朝官)에서부터 경재(卿宰)의 시종(侍從)과 궁중(宮中)의 소신(小臣)들까지 두 공이 무릎을 맞대고 환담하는 것을 보고 모두 감탄하며 말하기를,
“두 분의 사이가 저렇게도 좋단 말인가?”
하였다. 이 뒤로는 전에 두 분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던 뜬소문이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상의 의심도 풀렸다. 상이 일찍이 경모궁(景慕宮) 재실(齋室)에서 번옹을 불러 조용히 묻기를,
“경이 늙었으니 누가 경을 대신할 만한가?”
하니, 번옹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믿고 쓸 사람으로 이가환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축년 봄의 상소로 인하여 시론(時論)에 미움을 샀기 때문에 기괴한 비방이 있어 감히 용서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은,
“경의 말이 아니라도 내가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다.”
하시고, 일이 있을 적마다 공에게 가부를 물으셨다. 이해 가을에 내가 곡산 도호(谷山都護)로 나가고, 기미년 봄에 번옹마저 죽으니 도와 줄 사람이 없어 공은 더욱 외로워졌다.
상이 공에게 수리(數理)와 역상(曆象)의 본원(本源)을 밝히는 책을 편찬하게 하고자 하여 연경(燕京)에서 책을 구입하려고 어필(御筆)로 공에게 하문하셨는데, 공이,
“풍속이 어리석어 수리(數理)가 무엇이며 교법(敎法 서교(西敎))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통으로 여겨 배척하고 있으니, 이 책을 편찬하면 신에 대한 비방만 더해질 뿐 아니라 위로 성덕(聖德)에까지 누가 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그 일은 드디어 중지가 되었다. 그러나 상께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고 여기셨다.
이해 여름에 내가 조정에 들어와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어 중외의 원옥(冤獄 억울한 옥사)을 다스릴 적에 상이 자주 입대(入對)하게 하시어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게 하시니 당인(黨人)들은 겁을 먹고 더욱 뜬소문을 퍼뜨려 선동 유혹하고 신헌조(申獻朝)가 발계(發啓)하였으나, 상은 엄명으로 막으셨다.
가을에는 내가 공과 함께 번옹의 유집(遺集)을 교정(校正)하였다. 다음해 여름에 정종대왕이 승하하시니, 조정의 판국이 일변하여 당인들이 뜻을 얻어 밤낮으로 몰려다니며 생살부(生殺簿)를 만들어 사람을 죄에 얽어 넣었다.
이때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몰래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한 지 이미 6년이 되었는데, 물이 스며들고 불이 붙듯이 교세(敎勢)가 점점 확장되어 서울에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모여 교습(敎習)하는 상하 남녀가 가는 곳마다 수백 명씩이 되었으나 나와 공은 그 동정(動靜)을 전혀 알지 못하였고 다만 화기(禍機)가 만연하여 불원간 화가 닥치리라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목만중과 홍낙안 등이 은밀히 당로자(當路者)에게 붙어 공을 괴수로 몰아 중외에 떠도는 흉흉한 말을 모두 공에게로 돌렸다. 성기(聲氣)가 서로 멀어 사정을 모르는 당로자들은 이미 서교의 형세가 날로 성해 간다는 말을 들은 터에 또 아무아무가 괴수란 말을 들었으니 격분하여 백성을 위해 해독을 제거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심환지(沈煥之)와 서용보(徐龍輔) 등 당로 대신이 어찌 그에 대한 조처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목만중 등
이 또 스스로 말을 만들어 선동하기를,
“이가환이 척사(斥邪)하는 사람을 미워하여 사흉 팔적(四凶八賊)이라 지목한다.”
하니, 12명 중 반은 바로 만중 저희 무리이고 반은 당로자를 지목한 것이다. 만중 등은 흉적으로 지목된 당로자를 만날 적마다,
“공은 조심하십시오. 머지않아 변란이 생길 것입니다.”
하니, 이때부터 조정이 더욱 흉흉하고 의구심이 짙어가서 공의 화가 날로 임박하였다.
신유년 정월에 대비(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께서 중외에 교유(敎諭)하기를,
“사교에 빠져 개전(改悛)하지 않는 자는 다 죽여 없애라.”
하였다. 이때 마침 한성부(漢城府)에서 우리 집안의 편지가 든 상자를 지고 가는 한 농부를 잡아 드디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2월 9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민명혁(閔命赫) 등이 아뢰기를,
“이가환은 흉추(凶醜 이잠(李潛)을 가리킴)의 여얼(餘孼)로 화심(禍心)을 품고 불평 분자들을 끌어모아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었으니, 이승훈ㆍ정약용도 함께 하옥하여 엄히 국문하소서.”
하였다. 밤중에 체포되어 이튿날 심문을 받았는데 위관(委官)은 영중추(領中樞) 이병모(李秉模)와 시임 대신(時任大臣) 심환지ㆍ이시수(李時秀)ㆍ서용보와 판의금(判義禁) 서정수(徐鼎修), 대사간 신봉조(申鳳朝)이고, 문사낭청(問事郎廳)은 오한원(吳翰源)ㆍ이안묵(李安黙) 등이었다. 신문(訊問)에 임하여 공은 선조(先朝 정조)의 소비(疏批)와 전후에 있었던 전교를 이끌어 변명하였으나, 옥관(獄官)은 모두 심리(審理)하지 않고 다만,
“이런 지목을 받았으니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할 뿐이었다. 심한 고문을 하였으나 끝내 증거가 될 만한 한 장의 문건(文件)이나 함께 잡혀 온 죄수의 공초(供招)도 없었고, 오직 어지러운 문서(文書) 속에서 노인도(老人圖)를 찾아내어 이것이 누구의 상(像)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 역시 증거물이 되기에는 부족하였다.
이때 신봉조가 상소를 올려 오석충(吳錫忠)이 흉얼(凶孼)과 체결한 일을 논박하였는데, 옥문 밖에 한 졸개가 지나가며 홍낙임(洪樂任)이 바로 흉얼이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조금 뒤 안옥대신(按獄大臣)들이,
“흉얼이 누구냐?”
고 묻자, 공이,
“오석충과 홍낙임의 체결 여부를 나는 실로 알지 못한다.”
고 대답하니, 대신들은,
“홍낙임이란 세 글자를 네가 어찌 먼저 말하느냐. 이로 보아 체결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고, 공과 석충을 번갈아 고문하니 살갗이 터지고 피가 흘러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석충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혹 죄를 자인하기도 하고 다시 번복하기도 하여 말에 조리가 없었으나, 공은,
“정경(正卿)인 내가 이런 지목을 받았으니 죄가 죽어 마땅하다.”
하니, 옥관은 드디어 승복한 것으로 여겼다. 공은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단식(斷食)한 지 6~7일 만에 기절(氣絶)하여 죽으니, 끝내 기시(棄市)하였다. 이때가 3월 24일이었다.
아, 국문과 옥사는 예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선조 때의 기축옥사(己丑獄死)와 숙종 때의 경신옥사(庚申獄事) 같은 때에도 반드시 상변(上變)한 자가 있거나 죄수의 초인(招引)이 있고, 또 증거될 만한 문서가 있거나 죄수가 입증(立證)한 뒤에야 체포하여 고문하고 죽여 기시(棄市)하였는데, 이번처럼 대간의 계사(啓辭)로 발단하고 고문하여 그 옥사를 이룬 다음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죽여 기시한 일은 일찍이 기축ㆍ경신 때에도 없었던 일이다. 몇몇 음사(陰邪)한 무리가 입을 놀려 10여 년 동안 근거 없는 말로 선동 현혹하여 당로자들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였으니, 저 당로자들이 어찌 공의 무죄함을 알겠는가. 평소부터 공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옥사가 일어나자 공을 죽인 것뿐이다. 《맹자(孟子)》에도,
“모든 대부(大夫)가 죽여야 한다고 하여도 듣지 말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한 뒤에 살펴서, 죽일 만한 잘못이 있음을 본 뒤에 죽인다.”
하였는데, 온 나라 사람이 이미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다시 살펴주기를 바라겠는가. 정(鄭) 나라에서 그 대부(大夫) 양소(良宵)를 죽인 것을《춘추(春秋)》에 썼거니와, 만약 공을 진실로 죽일 만하여 죽였다면 또 무엇 때문에 역사에 기록하였는가? 아, 슬프도다!
지난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갑진년(1784, 정조 8) 겨울 망우(亡友) 이벽(李檗)이 수표교(水標橋)에서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공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나도 지난날《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의 책을 보니, 그 내용이 비록 좋은 가르침이기는 하나 정학(正學)은 아니었는데, 이벽이 이 서교로 오도(吾道)를 변역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드디어 수표교로 가서 이벽을 꾸짖었으나, 이벽이 능란한 말솜씨로 서교를 설명하며 자신의 주장을 철벽(鐵壁)처럼 고수하므로 공은 말로 다툴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발을 끊고 가지 않았다. 이 뒤로는 공에게 의심할 만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몇 사람이 함사(含沙)하매 모든 사람들이 짖어대어 끝내 괴수라는 죄목(罪目)으로 죽음을 당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세상에서는 지위가 높고 재주가 높은 사람을 영수(領袖)로 삼지만 그들의 법은 그렇지 않아 신분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오직 죽어도 신심(信心)을 바꾸지 않는 사람을 두목(頭目)으로 삼는다. 그런데 공의 여러 차례의 소계(疏啓)와 옥중(獄中)에서 한 말을 보면 서교를 극구 배척하였으니 가령 공이 진실로 서교를 믿었다 할지라도 죽어도 신심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못되는데 어찌 괴수가 될 수 있겠는가. 공이 죽은 뒤 나라 사람의 반수가 공을 가련히 여겨 물의(物議)가 비등하였으며, 또,
“5~6년이 안 되어 임금의 마음이 다시 돌아설 것이니, 사태의 추이(推移)를 알 수 없다.”
고 말들을 하니, 당인(黨人)들은 다시 음모하여 호남옥사(湖南獄事)를 단련(鍛鍊 없는 죄를 꾸며 얽어맴)하여, 공이 을묘년 여름에 권일신(權日身)ㆍ주문모 등과 모의하여 서양 선박(船舶)을 맞아오기 위하여 은(銀) 2일(鎰)을 내었다는 말과 또 경술년 가을에 이미 이런 모의를 하였다는 말을 만들어 냈다. 옥사가 성립되어 포청(捕廳)에서 금부(禁府)로 이송되니, 드디어 공과 이승훈 등에게 가율(加律)하기를 청하였다. 아, 권일신(權日身)은 벌써 신해년에 죽었는데 어찌 4년 뒤인 을묘년의 모의에 참여할 수 있으며, 주문모는 을묘년에 처음 왔는데 어찌 5년 전인 경술년의 모의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경술년 가을에는 공이 주필(朱筆)을 가지고 시장(試場)에 있었고 을묘년 여름에는 공이 편집의 책임을 맡아 규영부(奎瀛府)에 있으면서 상홀(象笏)과 패옥(佩玉)을 차고 날마다 궁전으로 나아갔는데 어떻게 주문모와 비밀히 만났겠는가? 사수(死囚)를 유혹하여 죽은 사람을 무함하게 하여 후일에도 무함을 못 벗도록 안건(案件)을 만들었으니, 매우 잔인하다 하겠다.
공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매우 다른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넓고 깊은 지식을 속에 넣고 있으면서도 저술(著述)은 난삽(難澁)하였으며, 강계(薑桂)와 같은 강직한 성품을 가졌으면서도 적을 만나면 겁을 내었고 천지 만물의 이치를 세밀히 분석하였으면서도 일을 헤아림에는 편색(偏塞)하였다. 계축년의 상소는 그가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여 올린 것이다. 그러나 끝내 이로 인하여 패망하였으니, 그를 아는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공은 평소에 역상서(曆象書)를 좋아하여 일월(日月)의 교식(交蝕)과 오성(五星) 복현(伏見) 시기와 황도(黃道)ㆍ적도(赤道)의 거리 및 차이의 도수에 대하여 모두 그 원리를 통하였으며 아울러 지구(地球)의 둘레와 지름에 대하여서도 별도로 도설(圖說)을 만들어 후생(後生)을 가르쳤으니, 공이 서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된 것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 일찍이 상국(相國) 이시수(李時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남인(南人)들은 고루하여 정조(廷藻 이가환)가 전공(專攻)한 것이 역상법인데, 고루한 자들이 이를 서교로 잘못 알고 꾸짖고 괴이하게 여긴다.”
하였으니, 역시 사리를 아는 말이라 하겠다. 그가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을 적에 몇 사람의 농민을 잡아다가 사교(邪敎)를 믿는다고 치죄하였으며 또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어서는 교인(敎人)들을 잡아다가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치기까지 하였다. 이는 자신이 위험해지자 서교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심하게 다스림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공에게 겁이 많다는 증거이다. 내가 위험하다 하여 백성을 악형(惡刑)으로 다스린다면 그 누가 심복(心服)하겠는가? 신해년 가을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여 홍낙안(洪樂安)의 죄를 논하기를,
“밖으로는 위정(衛正)의 명분을 가탁하나 안으로는 남을 무함할 계획을 하고 있으니 한시라도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갑인년 여름 강세정(姜世靖)이 공에게 상서(上書)하여 홍낙안의 죄를 논하기를,
남을 해치기를 생각하고 일망 타진을 계획하니 마음으로만 절교(絶交)한 것이 아니라 안면(顔面)도 바꾼 것입니다. 시세(時勢)가 변하면 몇 번씩이고 다시 번복하여 이를 갈며 덤벼들 것이니, 세론(世論)이 어찌 안정될 날이 있겠습니까.”
하고, 공에게 자기 아들 준흠(浚欽)을 거두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공은 행동이 엄정(嚴正)하여 거상(居喪)하는 3년 동안 중문(中門)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벼슬이 상경(上卿)에 이르렀으나 집은 낡을 대로 낡았으며 가난하고 검소함이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 때와 같았다. 저서(著書)로는 《금대관집(錦帶館集)》10책이 있는데 편(篇) 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부인 정씨(鄭氏)는 고(故) 판서(判書) 운유(運維)의 따님이다. 딸 둘을 키웠는데, 큰딸은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후손인 권구(權耈)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복암(茯菴)이 이기양(李基讓)의 아들 이방억(李龐億)에게 시집갔다. 종조형(從祖兄 육촌형(六寸兄)) 구환(九煥)의 아들 재적(載績)을 양자(養子)로 삼았는데, 재적은 아들 형제를 두어 이미 모두 성취(成娶)시켰다. 공은 임술년에 나서 신유년에 죽었으니 향년 60세였다. 묘는 덕산(德山) 장천(長川 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서쪽 언덕에 있는데 오좌자향(午坐子向)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영웅 호걸 내시니 / 天降英豪
인류 중에 뛰어나 / 秀拔人群
무성한 잡초 속에 / 雜草蓊鬱
송백처럼 우뚝했네 / 松栝干雲
겹겹이 쌓인 바위 산엔 / 巖磝壘壘
사이사이 옥돌이나 / 介以瑤琨
모양 같은 무리 속엔 / 億貌齊同
다른 것이 홀로 높네 / 殊者獨尊
별의 정기 달의 광채 / 星精月彩
한 가문에 비추었으나 / 萃于一門
막내인 공에게 / 公生最晩
명성이 이루어 졌네 / 聲集諸昆
속에는 만권의 책 간직했고 / 胸韜萬軸
한 번에 천 마디 토해 냈네 / 一吐千言
구고(句股)와 호각(弧角)은 / 句股弧角
호리(豪釐)를 분석했고 / 縷析毫分
훌륭한 재주로 / 鴻毛龍鬣
일세를 드날렸네 / 風掣雲奔
제회가 이미 친밀하니 / 際會旣密
참소가 분분했네 / 謠諑其紛
참소가 성행으나 / 讒夫孔昌
임금은 더욱 후대했네 / 睿照彌敦
문단의 주도권을 쥐게 되니 / 登壇執牛
원망하는 무리 벌떼처럼 일어났네 / 怨師蠭屯
뜻밖에 임금이 일찍 승하하니 / 雲游肇擧
화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 / 火烈燎原
길에 가득한 죄인들 / 赭衣塞路
삼목(三木) 찬 채 죽어갔네 / 三木收魂
귀신 같은 무리 뜻을 얻어 활개치고 / 鬼騩中逵
범처럼 사나운 자가 궁문을 지키고 있네 / 虎守天閽
만물은 끝내 모두 죽는 것이니 / 萬物同歸
공만이 홀로 원통한 것은 아니리 / 公無獨冤
부(附) 한화(閒話)
기미년(1799, 정조 23) 여름 내가 정헌공(貞軒公)을 방문하였더니, 공이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당인(黨人)들이 천금(千金)을 걸고 나를 얽어넣으려 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기에 내가,
“대감을 얽어넣는 데 천금이라면 나 같은 것은 5백금에 불과할 것입니다. 공께서는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하고 서로 크게 웃었다.
하루는 내가 정헌공에게 묻기를,
“다른 경(經)은 대략 통하였으나 《역경(易經)》은 알 수 없으니, 어찌하면 알 수 있습니까?”
하니, 공이,
“나는《역경》은 평생 동안 연구하여도 알지 못할 글로 이미 판단했으니 묻지 말라.”
하였다. 내가 묻기를,
“성옹(星翁)의 《역경질서(易經疾書)》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이는 우리 집안의 책이므로 일찍이 숙독(熟讀)하였으나 역시《주역》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의 호)의《역경심해(易經心解)》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이도 우리 집안의 책이므로 일찍이 숙독하였으나 역시《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내의선(來矣鮮 의선은 지덕(知德)의 자인데 명 나라 사람)의《주역집주(周易集注)》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역시 《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오징(吳澄)의《역찬언(易纂言)》은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역시 《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주진한(朱震漢)의《상역(上易)》은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역시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이정조(李鼎祚)의《주역집해(周易集解)》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이 책이 다른 책에 비하여 조금 나으나 역시《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고, 이어 수십 사람의 역설(易說)을 열거하고는,
“모두 보았으나 역시《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자네는《역경》에 뜻을 두지 말라. 역학(易學)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니, 자네같이 총명한 사람은 절대로 역학을 배울 수 없다.”
하고, 또 이어 말하기를,
“저 궁벽한 시골에 평생 동안《역경》을 읽고서 드디어 노주역(盧周易)이니 최주역(崔周易)이니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은데, 자네도 이런 무리가 되려는가?”
하고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복암(茯菴)은 성품이 소탈하고 혼후(渾厚)하였다. 매양,
“의리(義理)의 싸움이 당론(黨論)으로 돌아갔다.”
하고, 또,
“남을 너무 심히 미워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과 의견이 맞지 않을 적마다 복암은 심히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일찍이 번옹(樊翁)의 석상(席上)에 화성(華城)으로부터 왔다는 어떤 선비가 있어 말하기를,
“근간 제가 시권(詩卷)에 지이(之而) 두 글자를 썼더니, 유수(留守)가 저를 낙방(落榜)시키고 시권을 여러 사람들에게 돌려보이면서 ‘벽서(僻書)ㆍ괴문(怪文)을 어전(御前)에 올릴 수 없다.’고 하므로 저는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승지(承旨) 신광하(申光河)의 시에 지이 두 글자 쓴 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그 출전(出典)을 알지 못하여 힐난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번옹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왕형공(王荊公 형은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의 시에,
고래 잡느라 파도와 싸우니 / 采鯨抗波濤
바람이 일고 비늘이 서네 / 風作鱗之而
란 것이 있는데, 이 시가 노소(老蘇 소순(蘇洵))의 시를 압도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왕형공과 노소의 감정이 이 시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왕형공의 시도 본래 정경(正經)에서 나온 것이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재인위순거장(梓人爲筍虡章)에 ‘움켜 죽이고 물어뜯는 짐승은 반드시 발톱을 감추고 눈은 툭 튀어나오고 비늘은 불거져 나온다.[之而] 발톱을 감추고 눈이 튀어나오고 비늘이 불거지면 사람이 보기에 반드시 발끈 성을 내는 것 같다. 진실로 성을 낸다면 무거운 악기를 짐질 만하다. 여기에 채색까지 갖추면 반드시 소리를 낸다. 발톱을 감추지 않고 눈이 튀어나오지 않고 비늘이 불거져 나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기운이 쇠하여 시들한 짐승이다. 여기에 채색까지 갖추지 못하면 두들겨도 반드시 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은 ‘지이(之而)는 불거져 나오는 것[頰�]’이라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은 ‘협곤(頰�)은 두려운 모양이다.’하였다. 고공기가 어찌 벽서(僻書)란 말인가. 고경(古經)에 어두우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당세를 논하면 좋아서 입이 벌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무리를 두고 한 말이다. 자네는 어찌 이로써 대답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공이 이 《주례》의 글을 욀 적에 빠름이 마치 나는 물굽이와 세찬 물줄기 같아서 온 좌중(座中)이 모두 시원스러워했다.
하루는 당세에 이름 있는 당로학사(當路學士)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대내(大內)에서 내리신 지리책(地理策)에 두 한계[兩戒]와 사열(四列)을 물으셨는데, 그 출전(出典)을 알 수 없으니 가르쳐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당서(唐書)》 천문지(天文志)에 ‘일행(一行)이 천하 산하(山河)의 형상이 두 한계[兩戒]가 있으니 북으로는 융적(戎狄)을 한계하고 남으로는 만이(蠻夷)를 한계한 것이다.’하였으니, 이른바 두 한계란 강하(江河)를 이르는 말이다.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사람들은 무던히도 글을 읽지 않는다. 읽는다 해도 주소(注疏)를 읽지 않고 또 대전(大全)도 읽지 않는다. 대전을 읽어보니, 우공(禹貢《서경》 편명) 채씨(蔡氏) 전(傳 도견장(導岍章))에 ‘왕숙(王肅)과 정현(鄭玄)이 삼조(三條)ㆍ사열(四列)의 명칭을 말한 것은 모두 타당치 않다.’라 하고 그 소주(小註)에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사열에 대한 설은 정현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는 견산(岍山)ㆍ기산(岐山)이 정음열(正陰列), 서경산(西傾山)이 차음열(次陰列), 파총(嶓冢)이 차양열(次陽列), 민산(岷山)이 정양열(正陽列)이라 하였으니, 사열이 비록 옳다고 할지라도 음양 정차(陰陽正次)로 명칭한 것은 타당치 않다.’하였다. 이 말이 어찌 벽서(僻書)에서 나온 것인가.”
하였다. 공은《당서》와 대전의 글을 인용하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줄줄 내려 외었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어 답장 쓰기를,
“사열의 명칭이 집전(集傳 《서경》 집전)에 나오고 그 소주(小註)에 자세히 보이는데, 어찌 그것을 상고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그는 큰 이름이 있는 사람이니 창피를 준다면 감정을 품을 것입니다. 답장을 고쳐 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공은 그렇게 여겨 다시 고쳐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사열은 나도 자세히 몰랐습니다. 지금 《서경》 집전 도견(導岍)의 대문을 상고하여 대략을 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소보(邵寶)의 《용춘당집(容春堂集)》을 보니 나모전(㒩母傳)이란 것이 있는데, 나(㒩)자를 알 수 없어 자서(字書)를 두루 찾아보았으나 이 글자가 없었다. 이에 나는 손뼉을 치며, 이 글자로 정헌(貞軒)을 곤혹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재촉하여 공에게 가서 몇 마디의 말을 주고 받은 뒤 나자의 음(音)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이 글자는 알 수 없다. 자휘(字彙)나 자전(字典)에도 나오지 않는다. 자네가 혹시 소 보의 나모전을 보았는가? 나모전은 모영전(毛穎傳)과 비슷하니 역시 기문(奇文)이다. 나는 마침 기억하고 있다.”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줄줄 내리 외고 나서 말하기를,
“서릉씨(西陵氏)의 딸이 들에 나가 비로소 누에[蠶]의 민숭민숭한 모양을 보고 그를 나조(嫘祖)라 하였다. 나(㒩)자의 음은 당연히 나(嫘)의 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순자(荀子)》 부편(賦篇)에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그 형상이 민숭민숭하여 자주 변화하는 것이 마치 귀신 같다.” 하고, 그 주(註)에 “나(㒩)는 나(倮)로 보아야 한다.” 하였는데 자전(字典)에 보인다.
하루는 여러 학사(學士)들이 정원(政院)에 앉아서 시(詩)를 논하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동파(東坡)의 주행시(舟行詩)에 괴기(怪奇)한 시구가 있는데, 지금 내가 잊어 한두 글자도 욀 수 없으니 한스럽다.”
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조류는 물 가에서 생기고 / 暗潮生渚
지는 달은 버들가지에 걸렸다 / 落月挂柳
라는 시가 아닌가?”
하니, 그 사람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대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분입니다.”
하루는 어떤 어리석은 자가 와서 묻기를,
“선수(蟬酥)와 아편(鴉片)은 어떠한 물건입니까?”
하자, 공이 정색(正色)하며 말하기를,
“소년은 정욕(情慾)을 억제하고 학업을 닦아야 하거늘 이 어인 질문이냐.”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잘못을 빌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뒤 내가 공에게 선수와 아편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음약(淫藥)의 재료이다. 선수는 두꺼비 오줌이고 아편은 앵속각(罌粟殼)의 진액인데, 저 사람이 그것을 조제(調劑)하고자 하기 때문에 내가 일러 주지 않았다.”
공은 또 감식(鑑識)이 정통하여 당ㆍ송ㆍ원ㆍ명(唐宋元明)의 시를 한번 들으면 백 번에 한 번의 착오도 없이 모두 어느 때의 시인지를 알았고, 우리나라 사람의 시로는 더욱 그를 속일 수 없었다. 공의 생질 허질(許瓆)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시집(詩集)을 가지고 그 속에서 시를 뽑아 종일토록 물어도 끝내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허질은 재사(才士)였는데, 중국의 시체(詩體)를 모방하여 한 편의 시를 지어가지고 가서 이 시가 어느 때 누구의 시이냐고 물으니, 공이 한동안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강아지[犬子]의 시이다.”
하였다. 허질이 탄복하며,
“참으로 귀신입니다. 어떻게 내가 지은 것인 줄 아셨습니까?”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웃었다.
그가 광주(廣州)에 있을 적에 이웃 고을 백성이 근산(近山)에 장사지내는 것을 송사(訟事)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율(律)에도 인가 1백 보 이내에는 장사지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공이 판결하기를,
“계무자(季武子)가 집을 짓는데, 두씨(杜氏)의 무덤이 서계(西階) 밑에 있었다. 두씨가 합장(合葬)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율은 진실로 어길 수 없으나 예(禮)에도 증거가 있다.”
하고, 그 사람에게 안장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공의 이 판결이 칭송된다.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은 정해(精該)한 책이다. 한치윤(韓致奫)이 사신(使臣)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연경 선비들이 이 책을 보고 서로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니, 대개 뛰어난 운서(韻書)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본래 이덕무(李德懋)가 만든 것인데, 선조(先朝)께서 그 원고를 가져다가 이가환(李家煥)으로 하여금 그 잘못된 편방(偏旁)ㆍ점획(點畫)을 사정(査正)케 하시고 이명예(李明藝)에게 명하여 정서(淨書)케 하신 책이다. 이명예가 한 장의 정서를 끝낼 적마다 공이 그 잘못된 곳을 사정하여 점 하나 획 하나까지 자세히 살피니, 옆에서 보는 이들이 너무 심하다고 하였다. 이 책에 부(父)자를 ‘처음으로 나를 낳으신 분[始生己]’이라 훈고(訓詁)하고, 시(豉)자를 ‘소금물에 메주를 담그는 것[配鹽幽菽]’이라 훈고하였으니, 이는 모두 고훈(古訓)에 의거한 것이다. 또 이 책은 이덕무의 원고를 정리한 것일 뿐, 공이 주석(註釋)한 것이 아닌데도 공을 미워하는 자들은 이 두 글자의 훈고를 가지고 경연(經筵)에서 공을 참소하여 훼판(毁板)하기를 청하였다. 상은 그들이 참소한다는 것을 아셨으나 역시 그 훈고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셨다. 악당(惡黨)들은 또 세상에 말을 퍼뜨리기를,
“홍계희(洪啓禧)는 《삼운성휘(三韻聲彙)》를 짓고 이가환(李家煥)은 《규장전운(奎章全韻)》을 교정하였다가 모두 패망하였으니, 육서(六書)의 학(學)은 모두 흉화(凶禍)의 근본이다.”
하였다. 남인(南人)들은 자제(子弟)들에게 일부러《규장전운》의 자체(字體)와 틀리게 쓰도록 가르치는데, 《전운》의 자체와 틀리게 쓴다면 자연 글자가 잘못되고 추악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바로 목이 메인다 하여 음식을 전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조정암(趙靜庵)을 죽인 뒤 《소학(小學)》을 흉서(凶書)라 하여 읽지 못하도록 금한 것과 동일한 수법이다. 육서도 역시 《소학》의 일종이다.
참소하는 말이 이와 같았으나 선조(先祖)께서는 말년에 《규장전운옥편(奎章全韻玉篇)》의 편찬을 명하시어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으로 하여금 이가환과 정약용에게 문의하여 잘못된 곳을 수정(修正)한 다음 마지막으로 예재(睿裁 임금 결재)를 받아 결정하게 하셨으니, 이는 모두 어정(御定)하신 책이다. 그런데 상이 승하하신 뒤 어떤 당인(黨人)이 경시관(京試官)으로서 호남 향시(鄕試)의 시관(試官)으로 가서 여러 유생들에게 말하기를,
“시권(試券)에《규장전운》의 자체를 쓴 자는 낙방시킬 것이다.”
하였다. 과장(科場)에 들어온 유생들은《규장전운》을 구경도 못한 처지라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옛날 송(宋) 나라 때 정국(政局)이 뒤집히자 왕씨(王氏 왕안석(王安石))의《자설(字說)》을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어정(御定)하신 책에도 오히려 이런 관습을 쓰는 것은 매우 불공(不恭)한 일이다.
갑인년(1794, 정조 18) 여름에 유생 윤신(尹愼) 등이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판서(判書) 홍 수보(洪秀輔) 부자(父子) 아들은 인호(仁浩) 를 공격하였는데, 이 논의는 처음 한씨(韓氏) 예안장(禮安丈)이 홍씨의 말을 전하였다. 에게서 시작되고, 중간에 박씨(朴氏) 박명섭(朴命燮)이 청교(淸橋) 사는 궁관(宮官) 조씨(趙氏)의 말을 전하였다. 에게서 격렬해져서 집집마다 시끄럽게 떠들어 상에게까지 알려져 마침내 공론이 되었다. 홍 대감은 그 통문을 정헌이 지었다고 여겨 드디어 혈수(血讎)로 삼았다. 그러나 사실은 정헌이 짓지 않았다. 최영춘(崔靈春) 최헌중(崔獻重) 은 그 통문의 출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평생토록 사실을 말하지 않으니, 공에 대한 홍씨의 오해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여유당전서] 다산시문집 제15권 묘지명 <先仲氏의 墓誌銘>
공의 휘(諱)는 약전(若銓), 자는 천전(天全)이며, 누호(樓號)는 일성(一星), 재호(齋號)는 매심(每心)이며, 섬으로 유배(流配)된 뒤의 호는 손암(巽菴)이니, 손(巽)은 입(入)의 뜻이다. 압해 정씨(押海丁氏)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에서부터 현달(顯達)하기 시작하여 계속 대를 이어가며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으나, 이 뒤로는 가운(家運)이 쇠하고 비색하여 3대가 모두 포의로 평생을 마치었다. 휘 도태(道泰)와 휘 항신(恒愼)은 진사(進士)를 하였고, 항신이 휘 지해(志諧)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조부이시다.
선고(先考) 휘 재원(載遠)은 음사(蔭仕)로 여러 고을의 군수를 지내다가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별세하였다. 아들 5형제를 두셨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선비(先妣)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덕렬(德烈)의 따님으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시다.
공은 건륭(乾隆) 무인년 3월 1일에 마현(馬峴) 사택에서 태어났는데 선비의 꿈에 아들 셋을 얻었으므로 아명(兒名)을 삼웅(三雄)이라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자란 뒤에는 더욱 기걸(奇傑)하였다. 서울의 젊은 사류(士類)들과 교유(交遊)하며 견문을 넓히고 뜻을 고상(高尙)히 가져 이윤하(李潤夏)ㆍ이승훈(李承薰)ㆍ김원성(金源星) 등과 굳은 친분을 맺고, 성옹(星翁) 이익(李瀷)의 학문을 전수(傳授) 받아 주자(朱子)를 붙좇고 도학(道學)의 근원을 찾아 공자(孔子)에까지 거슬러 가서 읍양(揖讓)하며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탁마(琢磨)하여 서로 더불어 덕을 쌓고 학업(學業)을 닦았다.
얼마 뒤에는 다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走魚寺)에 임시로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ㆍ권상학(權相學)ㆍ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직접 규정(規程)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正午)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莊嚴)하고 각공(恪恭)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 공은 이와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심유(沈浟)를 빈(賓)으로 불러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 백여 명이 모두,
“삼대(三代)의 의문(儀文)이 찬란하게 다시 밝혀졌다.”
하였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계묘년 가을에 경의(經義)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대과(大科)는 나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이벽(李檗)과 종유(從遊)하여 역수(曆數)의 설을 듣고는 기하(幾何)의 근본을 연구하고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는데, 마침내 서교(西敎)의 설을 듣고는 매우 좋아하였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다. 경술년 여름 금상(今上)의 탄생으로 증광별시(增廣別試)가 행해지자 공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길이 없다.”
하고, 드디어 대책(對策)을 지어가지고 과장(科場)에 들어갔다. 당시 책문(策問)은 오행(五行)에 대한 것이었는데, 공의 대책이 1등으로 뽑혔고, 회시(會試)에서도 대책으로 합격하였다. 급제(及第)로 성명이 발표된 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선보(選補)되었는데, 대신(大臣)의 초계(抄啓)로 인하여 공을 다시 규장각(奎章閣)에 소속시켜 월과(月課)케 하였다. 이때 나는 이미 기유년에 선발되어 반열(班列)이 공의 위에 있었다. 겨울이 되자 상께서,
“형이 아우 밑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하시고, 규장각 월과를 그만두게 하셨다.
공은 일이 없어 한가할 때면 날마다 한치응(韓致應)ㆍ윤영희(尹永僖)ㆍ이유수(李儒修)ㆍ윤지눌(尹持訥) 등과 즐겁게 지냈다. 을묘년 가을에 박장설(朴長卨)이 목만중의 사주(使嗾)를 받아 상소하여 이 가환을 공격하기를,
“이가환이 주시관(主試官)으로 발책(發策 문제를 내는 것)하여 선비를 뽑을 때 해원(解元 장원(壯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정약전(丁若銓)을 가리킴)의 대책(對策)은 오로지 서설(西說)을 주장하여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만들었는데도 가환이 이를 1등으로 뽑았으니 이는 은밀히 저의 문도(門徒)를 구제한 것입니다.”
하였다. 말 뜻이 매우 과격하므로 상이 시권(試券 시험지)을 들이라 하여 한번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오행을 사행으로 만들었다는 대책의 시권을 한번 사정(査正)하지 않을 수 없어 오늘 임헌공령(臨軒功令)에 실려 있는 것을 가져다가 상하의 글귀를 몇 차례에 걸쳐 자세히 보니, 애당초 공격하는 자의 말과 비슷한 곳도 없었다. 처음에 오행을 말하고 다음에 금목(金木) 이행(二行)을 말하였으며 또 다음에 수화토(水火土) 삼행(三行)을 말하고, 또 다음에 토(土)가 사행에 기왕(寄旺)하는 것을 말하고, 끝으로 오행을 거듭 말하여 결론을 지었다. 오행을 이행과 삼행으로 갈라서 말하였으니, 망발(妄發)이라 한다면 가하다. 그러나 이 대책의 내용을 사학(邪學)이고 서학(西學)이라 한다면, 서양(西洋)과 교통하기 이전에 8백년마다 하루의 착오(錯誤)가 생기는 대연력(大衍曆)의 잘못을 바로잡은 당 나라 일행(一行)도 사학(邪學)이며, 일행의 역법(曆法)도 서학이란 말인가? 이는 매우 허무 맹랑한 말이니, 지식 있는 선비라면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 며칠 뒤 나를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내보내시며 전교하기를,
“저가 만약 눈으로 성인(聖人) 비방하는 글을 보지 않고 귀로 경(經)에 어긋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무죄(無罪)이다. 그리고 저의 형도 그런 말과 글을 듣고 보았다면 어떻게 과거에 올랐겠는가?”
하셨으니, 이는 중씨(仲氏)의 죄를 벗겨 주시려는 말씀이다. 상은 이 한마디 말씀으로 우리 형제를 살려 주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로 인하여 불우하고 등용되지 못하였다.
정사년 가을에 나는 곡산 도호(谷山都護)가 되어 나갔으나, 공은 여전히 불우하니 상께서 특별히 생각하시어 공을 친정사관(親政史官)으로 6품에 올려 주시고, 다시 전조(銓曹)에 명하여 공을 조용(調用)하라 하시니, 공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
하시고, 무오년 겨울에 공에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게 하셨으니 공에 대한 총애가 옅지 않았다. 기미년 여름에 대사간(大司諫) 신헌조(申獻朝)가 조정에서 공을 논박하고자 하다가 엄명으로 파출(罷出)되긴 했으나, 이때부터 더욱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다음해에 상이 승하하시니, 그 다음해 신유년 봄에 화(禍)가 일어나 나도 대계(臺啓)로 인하여 하옥(下獄)되고 공도 체포되었다. 대책(對策)의 일로 신문(訊問)하고 추고(推考)하였으나 옥사(獄事)가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대비(大妃)의 작처(酌處)를 입었다. 옥의(獄議 판결문(判決文))에,
“정약전(丁若銓)이 처음에는 서교(西敎)에 빠졌으나 종당에는 뉘우친 것이 약용(若鏞)과 같고, 지난 을묘년 있었던 흉비(凶秘)한 일은 저가 전해 들은 데 불과할 뿐 참견한 흔적이 없으며, 또 약종(若鍾)이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 중씨(仲氏 약전)와 계씨(季氏 약용)가 서학(西學)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으니, 약전이 뉘우치고 깨달은 것은 의심할 것 없을 듯하다. 그러나 처음에 서교에 빠져 바르지 못한 사설(邪說)을 널리 퍼뜨린 죄는 완전히 용서하기 어렵다.”
하고, 또,
“처음에는 비록 미혹되고 빠졌으나 중간에는 잘못을 고치고 뉘우쳤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문적(文籍)이 있으니, 차율(次律)을 시행(施行)하라.”
하고, 공을 신지도(薪智島)로, 나를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시켰다.
이해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어 도천(滔天)의 흉계(凶計)가 담긴 황심(黃沁)의 백서(帛書)가 발견되자,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모의하기를,
“봄에 있었던 옥사(獄事) 때에 비록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죽어 장사지낼 곳도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자신들이 직접 대계(臺啓)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당로자(當路者)를 공동(恐動 위험한 말로 겁주는 것)하여 상소ㆍ발계(發啓)하게 하여, 약전과 약용을 다시 잡아들여 국문하고, 이치훈(李致薰)ㆍ이학규(李學逵)ㆍ이관기(李寬基)ㆍ신여권(申與權)도 함께 잡아들이기를 청하였으니, 그 뜻은 오로지 나를 죽이는 데 있었다. 그들이,
“저 여섯 사람은 역적과 매우 가까운 인척(姻戚)이니, 그 흉계(凶計)를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니, 재신(宰臣) 정일환(鄭日煥)이,
“저들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도 나오지 않았고 흉서(凶書 백서(帛書))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반드시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말로써 그들을 얽어 넣어서야 되겠는가?”
하였고, 상신(相臣) 심환지(沈煥之)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봄 옥사 때 이미 작처(酌處)가 내려졌는데도 이기경(李基慶) 등이 그 처분을 거두고 다시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니, 심환지가 이들의 계사(啓辭)를 윤허하기를 청하여 여섯 사람을 잡아들였다. 이것이 이른바 동옥(冬獄)인데, 사건을 조사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이때 벗 윤영희(尹永僖)가 우리 형제의 생사(生死)를 알려고 대사간 박 장설의 집으로 탐문하러 갔더니, 마침 이때 홍희운이 왔으므로 윤영희는 옆방으로 숨었다. 홍희운이 성질을 내며 주인 박장설에게,
“천 사람을 죽인들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니 박 장설이
“사람의 생사는 본인에게 달린 것이어서 저가 살 짓을 하면 살고 저가 죽을 짓을 하면 죽는 것이니, 저가 죽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저를 죽인단 말이오.”
하였다. 희운은 나를 죽일 논의(論議)를 하도록 권하였으나 박장설은 듣지 않았다. 이튿날 또 대비(大妃)의 작처(酌處)를 입었다. 옥의(獄議)에,
“자지(慈旨 대비(大妃)의 전교(傳敎))를 받들매 덕의(德意)가 매우 넓으시어 역적 황사영 흉서에의 관련 여부로써 살리고 죽이는 한계를 분명히 지시(指示)하셨으니, 신들은 머리를 조아려 자지를 읽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흠모와 감동으로 급급히 자지를 받들어 따랐을 뿐 감히 복심(覆審)과 논란(論難)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약전 형제는 황사영의 흉서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모두 감사(減死)하소서.”
하고, 드디어 공을 흑산도(黑山島)에 유배하고 나를 강진현(康津縣)에 유배하였다. 우리 형제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나 나주(羅州)의 성북(城北)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손을 잡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配所)로 갔으니, 이때가 신유년 11월 하순이었다.
서로 헤어진 16년 뒤인 병자년 6월 6일에 내흑산(內黑山) 우이보(牛耳堡)에서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치셨으니, 아! 슬프다. 공은 섬으로 귀양온 뒤부터 더욱 술을 많이 마시고 오랑캐 같은 섬 사람들과 친구를 하고 다시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으니, 섬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 간간이 우이보에서 흑산도로 나와, 내가 방면(放免)의 은혜를 입었으나 또 대계(臺啓)로 인하여 정지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
하고, 우이보로 돌아가려 하니, 흑산도의 호걸(豪傑)들이 들고 일어나서 공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으므로 공은 은밀히 우이보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타 첩(妾)과 두 아들을 싣고 우이보를 향해 떠났다. 이튿날 아침 공이 떠난 것을 안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급히 몰아 뒤쫓아와서 공을 빼앗아 흑산도로 돌아가니, 공도 어찌할 수 없었다.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공이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情誼)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보로 왔으나, 이때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형제의 상봉을 저지하니 금부(禁府)에서도 관문(關文)을 보내지 않았다. 공이 우이보에서 나를 3년 동안이나 기다렸으나 내가 끝내 오지 않으니 공은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그 뒤 3년 만에 율정(栗亭)의 길로 운구(運柩)하여 돌아왔으니, 악인들의 불선한 행위가 이와 같았다.
내가 강진(康津) 다산(茶山)에 있을 때 흑산도와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곳이었으나 그 거리는 수백리 떨어져 있으므로 자주 편지로써 문안하였다. 나의 《역전(易箋)》이 완성되어 공에게 보냈더니, 이를 보시고 공은,
“세 성인의 마음속 은미한 뜻이 오늘날에 와서 다시 찬란히 밝아졌다.”
하였고, 얼마 뒤 다시 초고를 고쳐 보냈더니, 공은,
“지난번 《역전》이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샛별이라면 이번 원고는 중천(中天)에 밝은 태양(太陽)이다.”
하였다. 《예전(禮箋)》이 완성되자, 공은,
“정리(整理)되고 다듬어진 것이 마치 장탕(張湯)이 옥사(獄事)를 다스린 것과 같아 드러나지 않은 실정이 없다.”
하고, 《악서(樂書)》가 완성되자, 공은,
“2천 년 동안이나 계속된 긴 밤의 꿈속에서 헤매던 악(樂)이 지금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양률(陽律)과 음려(陰呂)는 각각 짝을 맞추되 천(天 양(陽))을 3, 지(地 음(陰))를 2로 해야 마땅하니, 이를테면 황종(黃鐘)의 길이 8촌 1푼의 ⅓을 빼고난 나머지 5촌 4푼이 대려(大呂)이고, 대주(大蔟)의 길이 7촌 8푼의 ⅓을 빼고난 나머지 5촌 2푼이 협종(夾鐘)이고,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니, 십이율(十二律)을 형세에 따라 순서를 정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내가 공의 말을 조용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바꾸지 못할 확론(確論)이었다. 따라서 이미 썼던 원고를 모두 버리고 공의 말대로 다시 원고를 작성하였다. 그러고 보니 《의례(儀禮)》 정현(庭縣)의 순서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와 《국어(國語)》ㆍ《좌전(左傳)》의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數)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이 완성되자 공은,
“주자(朱子)는 ‘사청(辭聽)ㆍ색청(色聽)하여 문권(文券)을 두루 상고하고 질제(質劑 계약서 또는 어음)를 살피면 송사하는 자가 변명을 하지 못한다.’했다.”
하였다. 사서설(四書說)은 공이 대략 훑어보았으나 모두 공의 인정을 받았고, 그런 뒤 다시 박학(博學)하고 다문(多聞)한 선비들에게 두루 보여 시정(是正)을 받았다. 아, 동복(同腹) 형제이면서 지기(知己)가 된 분으로는 세상에 오직 공 한 사람뿐인데, 공이 돌아가신 7년 동안 나만이 홀로 쓸쓸히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공은 찬술(撰述)에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저서(著書)가 많지 않고 《논어난(論語難)》 2권, 《역간(易柬)》 1권, 《자산어보(玆山魚譜)》 2권, 《송정사의(松政私議)》 1권만이 있는데, 이는 모두 해중(海中)에서 지은 것이다. 배(配)는 풍산 김씨(豐山金氏)로 사서(司書) 서구(敍九)의 따님이고 총재(冢宰) 수현(壽賢)의 후손이시다. 아들 학초(學樵) 하나를 두었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경(經)을 연구하였으나 장가들고 나서 요절하였고, 딸 하나는 민사검(閔思儉)에게 시집갔다. 공의 첩(妾)이 학소(學蘇)와 학매(學枚) 형제를 낳았다. 공의 관[柩]은 나주(羅州)에서 옮겨와 충주(忠州) 하담(荷潭)에 있는 선영(先塋)의 동쪽 고총(古塚) 옆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인가(人家)가 총총하고 / 纍纍之叢
땅도 농사짓기에 알맞으니 / 地又宜耕
쟁기로 갈게 되면 / 犂刃攸觸
이 명(銘)이 먼저 드러나리 / 先獲我銘
이곳은 철인의 유골이 묻힌 곳이니 / 是固哲人之骨
드러나게도 말고 손대지도 말라 / 毋暴毋嬰
일찍이 주공ㆍ공자를 사모하여 / 夙慕姬孔
우리들과는 벗도 하지 않았으나 / 友不我與
비천한 무리들과 교유하며 / 游乎祿祿
고관(高官)을 대하듯 하였도다 / 待以刀俎
조정에 들어갔으나 / 翶翔乎朝廷
막혀서 서용되지 못하고 / 閼而弗敍
마침내 불운(不運)을 만나 / 遂遭顚躋
섬으로 유배되니 / 竄于海苫
정통하고 슬기로운 지식을 / 精知慧識
묵묵히 마음 깊이 간직했도다 / 黙焉內斂
이곳이 선영의 고장이라 / 是唯先人之域
멀리서 와서 장사지냈도다 / 遙遙來窆
부 한화
지난 무술년 겨울 아버님께서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계실 때 나는 손암(巽菴)과 함께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讀書)하여 40일 만에 《맹자(孟子)》 한 질(秩)을 다 마쳤는데,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공에게서 적잖이 인가(印可)받았다. 공은 찬물로 양치질하고 눈 내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매양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의 군민(君民)으로 만들 뜻이 있음을 말하였다.
임인년 가을에 우리 형제는 윤모(尹某)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의과(經義科)를 익히고 15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봄 백중계(伯仲季) 삼형제가 함께 감시(監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나만이 급제하였다. 그해 가을에 손암이 감시에 장원(壯元)하고 이어 또 높은 성적으로 회시에 급제하였으므로 영광스럽게 열상(洌上)으로 돌아와서 좌랑(佐郞) 목만중(睦萬中), 교리(校理) 오대익(吳大益), 장령(掌令) 윤필병(尹弼秉), 교리 이정운(李鼎運)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성대하게 노니,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갑진년 4월 15일에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덕조(李德操)가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덕조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와 《칠극(七克)》 등 몇 권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신해년 겨울부터 나라에서 더욱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맺은 것은 풀기 어려운 것이어서 화(禍)가 닥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골육(骨肉)을 서로 해쳐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어찌 그 화를 받아들여 천륜(天倫)에 부끄럼없이 하는 것만 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공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유당전서] 다산시문집 제16권 自撰墓誌銘 集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사(蔭仕)로 벼슬이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고,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용(鏞)을 낳으니 때는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27년이었다.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고려 말엽에 배천에 살았는데, 본조(本朝 조선조를 말함)가 개국하여 도읍을 정하자 마침내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조상은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자급(子伋)이며, 이로부터 계승하여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언벽(彦璧), 병조 참의(兵曹參議)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하여 마현(馬峴)에 옮겨 살았는데 3세(世)가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고조부의 휘는 도태(道泰), 증조부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증조부만이 진사(進士)를 하였다.
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 9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10세가 되어 비로소 학과에 힘썼는데 5년 간은 선고(先考)가 벼슬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냈으므로 용이 이 때문에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을 꽤 부지런히 읽을 수 있었고, 또 시율(詩律)로 칭찬을 받았다.
15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마침 선고(先考)가 다시 벼슬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어 서울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 이공 가환(李公家煥)이 문학으로 한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자부(姊夫) 이승훈(李承薰)이 또 몸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어 모두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 익(瀷)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였다. 용(鏞)이 성호의 유저(遺著)를 보고는 흔연히 학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종 원년 정유에 선고(先考)가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가게 되어 그 이듬해에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하였다. 경자년(정조 4, 1780) 봄 선고가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옮겨져 그로 인해 드디어 진주(晉州)를 유람하고 예천으로 와서 황폐한 향교에서 독서하였다.
임인년(1782, 정조 6) 가을 봉은사(奉恩寺)에 깃들어 경의(經義)의 과문(科文)을 익히고, 계묘년(정조 9 1785) 봄에 경의로 진사(進士)가 되어 태학(太學 성균관(成均館))에 유학(遊學)하였는데, 왕(王)이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를 내렸다. 이때 용의 벗 이벽(李檗)이 박아(博雅 학식이 넓고 성품이 우아함)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함께 의논하여 조대(條對)하였다. 그런데 이발(理發)ㆍ기발(氣發)에 대하여 벽은 퇴계(退溪)의 학설을 주장하였고, 용의 대답한 바는 우연히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珥)이 논한 바와 합치되었다. 주상이 보고 나서는 자주 칭찬하여 제일로 삼았다. 도승지(都承旨) 김상집(金尙集)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정모(丁某)가 이와 같은 포유(褒諭)를 얻었으니, 반드시 크게 떨칠 것이다.”
갑진년(1784, 정조 8) 여름 이벽(李檗)을 따라 두미협(斗尾峽)에서 배를 내려 비로소 서교(西敎)를 듣고 한 권의 서적을 보았다. 그러나 오로지 변려문(騈儷文)을 공부하고 표(表)ㆍ전(箋)ㆍ조(詔)ㆍ제(制)를 익혀 수백 권을 수집하였다. 태학(太學)의 월과(月課)와 순시(旬試)에 번번이 고선(高選 높은 성적으로 선발됨)을 입어 서적과 지필(紙筆)을 상사(賞賜)받고, 근신(近臣)처럼 자주 사대(賜對)하여 등연(登筵)하니, 진실로 물외(物外)에 마음을 치달릴 겨를이 없었다.
정미년(1787, 정조 11) 이래 왕의 총애가 더욱 성대하였다. 자주 이기경(李基慶)의 강정(江亭)에 나아가 학업을 익혔다. 이기경 또한 서교(西敎)를 즐겨 들어 손수 1권을 뽑아 적었는데, 그가 갈라선 것은 무신년(1788, 정조 12)부터였다. 기유년(1789, 정조 13) 봄 용(鏞)이 표문(表文)으로 반시(泮試)에 수석을 차지하여 사제(賜第)받았고, 전시(殿試)에 나아가 갑과(甲科) 제2인을 차지하니, 희릉 직장(禧陵直長)을 제수하였다. 대신(大臣)의 초계(抄啓)로 규장각 월과문신(奎章閣月課文臣)에 들었다.
경술년(1790, 정조 14) 봄 용이 김이교(金履喬)와 한림(翰林)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는데, 이윽고 말썽이 있어 자퇴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월과(月課)에서 수석을 차지하니, 구마(廐馬)와 문피(文皮)를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신해년(1791, 정조 15) 겨울에 왕이 내린 《모시강의(毛詩講義)》 8백여 조에 용이 대답한 것이 홀로 많은 점수를 얻었다. 어비(御批 임금의 비답)에,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용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蘊蓄)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으랴.”
하고, 조목마다 평하고 장려하여 다 예기(預期)한 것보다 넘었다.
이때 호남(湖南)의 권상연(權尙然)ㆍ윤지충(尹持忠)의 옥사가 있었는데, 악인(惡人) 홍낙안(洪樂安) 등이 공모하여 이를 기화로 선류(善類)를 다 제거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에 번옹(樊翁 채제공(蔡濟恭)을 말함)에게 상서(上書)하기를,
“총명 재지(聰明才智)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열에 일여덟은 모두 서교에 젖어 장차 황건(黃巾)ㆍ백련(白蓮)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번옹을 시켜 공서(公署)에 앉아서 목만중(睦萬中)ㆍ홍낙안(洪樂安)ㆍ이기경(李基慶) 등을 불러 그 허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기경이 대답하기를,
“그 서적에 간혹 좋은 곳이 있으므로 신이 이승훈과 일찍이 성균관에서 그 서적을 같이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 서적을 본 죄를 논한다면 신이 이승훈과 벌을 같이 받아야 합니다.”
하고, 곧 용에게 글을 보내어 그 대답하는 바에 권형(權衡 사물의 경중을 고르게 함)이 있음을 말하고 함께 구성(求成 문제를 원만히 해결함)하자고 하였다. 용이 이치훈(李致薰)을 불러 말하기를,
“성균관에서 서교 서적을 본 것이 실로 취리(就理 죄 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음)할 일이니,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지 임금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이치훈은,
“밀고(密告)를 통해 이미 자수하였으니 옥사(獄詞)가 비록 차이나더라도 실로 임금을 속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밀고는 바른 것이 아니고, 옥사는 곧 임금에게 고하는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옥사만 볼 뿐이니 거실(巨室)과 명족(名族)의 공론(公論)이 두렵지 않습니까? 지금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고 정승이 정치를 보좌하니 이때에 미쳐서 종기를 터뜨리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치훈이 듣지 않았다. 이에 이승훈의 옥대(獄對)에서 ‘이기경(李基慶)이 사람을 무함했다.’고 말하여 마침내 백방(白放 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줌)되었다.
이에 이기경이 초토신(草土臣 거상(居喪) 중임을 말함)으로 상소하여 대신이 일을 조사함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헐뜯고, 성균관에서 서교 서적을 본 일을 더욱 자세하게 증명하였다. 주상이 노하여 이기경을 경원(慶源)에 유배하니 방관자(傍觀者)는 이를 시원하게 여겼다. 그러나 용은 말하기를,
“그렇게 생각 마라. 우리들[吾黨]의 화(禍)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하였다. 용이 때때로 이기경의 집 이때 연지동(蓮池洞)에 있었다. 에 가서 그의 어린 자식을 다독거리고, 그의 어머니 상사에 1천 전(錢)을 부조하였다. 을묘년(1795, 정조 19) 봄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이 있었으나 이기경은 석방되지 못하였다. 용이 이익운(李益運)에게 말하기를,
“이기경이 마음씨는 불량하지만, 송사는 억울하게 졌습니다. 일시의 시원함이 다른날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주상께 들어가 고하여 석방시키는 게 낫습니다.”
하였다. 이익운은,
“내 의사도 이러합니다.”
하고, 드디어 내가 말한 대로 들어가 고하였더니, 주상이 특별히 기경을 석방하였다.
기경이 돌아온 지 이미 오래되어 차츰 조정 반열에 들어가니, 지구(知舊)들은 그와 함께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되 용만은 안부를 묻고 평소처럼 대하니 이른바 고구(故舊)란 그 고구된 것을 잃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이기경이 주모(主謀)하여 반드시 용을 죽이고야 말려고 하였다. 그러나 홍의호(洪義浩) 등 여러 사람들을 대할 적에 용에게 말이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하니, 비록 대계(大計)에 몰린 바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 양심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이듬해 임자년(1792, 정조 16) 봄에 용이 홍문관에 뽑혀들어가 수찬(修撰)이 되어 내각(內閣 규장각)에 나아가 갱화한 시권(詩卷)을 편수하였다. 4월에 선고(先考)가 진주에서 연관(捐館 세상을 떠남)하였다. 급보를 듣고 운봉(雲峰)에 이르러 대성(戴星 밤낮 달림)하여 갔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충주에 반구(反柩)하고 장사를 마친 뒤에 마현(馬峴)에 반곡(反哭)하였다. 이때 주상이 연신(筵臣)을 통해 자주 존몰(存歿)을 물었다.
이해 겨울에 수원(水原)에 성을 쌓게 되었다. 주상이 이르기를,
“기유년(1789, 정조 13) 주교(舟橋)의 역사에 용(鏞)이 그 규제(規制)를 진달하여 사공(事功)이 이루어졌으니, 그를 불러 사제(私第)에서 성제(城制)를 조진(條陳)하도록 하라.”
하였다. 용이 이에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 문충공(柳文忠公) 성룡(成龍)의 성설(城說)에서 좋은 제도만 채택하여 모든 초루(譙樓)ㆍ적대(敵臺)ㆍ현안(懸眼)ㆍ오성지(五星池) 등 모든 법을 정리하여 진달하였다. 주상이 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ㆍ《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 인중법(引重法)ㆍ기중법(起重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용이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거(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써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주상이 일렀다.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계축년(1793, 정조 17) 여름에 채 문숙(蔡文肅 문숙은 시호) 제공(濟恭)이 화성 유수(華城留守)로서 들어와 영의정이 되어 상소하여 다시 임오년의 참인(讒人)을 논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말하기를,
“임오년의 연차(聯箚)가 있은 뒤에 이 일을 다시 제기하는 사람은 역적이다.”
하고, 채 문숙공을 극력 공격하였다. 주상이 영고(英考 영조를 말함) 금등(金縢)의 사(詞)를 내어 보임으로써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뛰어난 효도를 밝히니 아무 일이 없었다. 이때 홍인호(洪仁浩)가 한공 광전(韓公光傳)을 대해서 또한 문숙공(文肅公)의 소를 공격하였는데 망발된 말이 많았다. 그래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일제히 홍인호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인년(1794, 정조 18) 사건이다. 홍인호는 내가 논의를 주장한 줄로 의심하여 드디어 그와 틈이 있었는데, 그 뒤에 점차 저절로 의심이 풀렸으나 우리들의 참혹한 화는 대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갑인년 7월에 상을 마치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제수되고 8월에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에 차임(差任)되었으며, 10월에 다시 옥당(玉堂)에 들어가 교리(校理)ㆍ수찬(修撰)이 되었다. 바야흐로 홍문관에 직숙(直宿)하다가 갑자기 왕지(王旨)를 받아 노량진별장 겸 장용영별아병장(露梁鎭別將兼壯勇營別牙兵將)으로 좌천되었다. 밤중에 침전(寢殿)에서 투자(投刺 윗사람을 볼 때에 미리 명함을 드림)를 행하였으니, 기실은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에 명하였던 것이다.
이때 서 정승(徐政丞 서용보(徐龍輔)를 말함)의 가인(家人)으로 마전(麻田)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향교(鄕校)의 땅을 서 정승의 집에 바쳐 가성(佳城 묘지)으로 삼도록 도모하면서 거짓말로 땅이 좋지 못하다고 속이고, 향유(鄕儒)를 위협하여 학궁(學宮 향교의 별칭)을 옮기는데 이미 명륜당(明倫堂)을 뜯어버렸다. 용이 염탐해서 알고는 엄습하여 잡아서 징치(懲治)하였다.
또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칠중하(七重河) 연읍(沿邑)의 조속(糶粟 대여한 곡식)을 돈으로 만들어 고가(高價)로 거두고, 또 말하기를,
“이는 금천(衿川 시흥)의 도로 수치(修治)하는 비용이니, 조(糶)를 가볍게 하려 한들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소민(小民)들이 원망하여,
“괴롭다, 화성(華城)이여! 과천(果川)에도 길이 있는데 어찌하여 금천(衿川)으로 길닦이하는고.”
하였으니, 주상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침(陵寢)에 자주 거둥하였기 때문에 이런 번다한 비용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용이 돌아와서 이 일을 상주하였다.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을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삼고 지사(地師) 김양직(金養直)을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삼았는데, 모두 총애를 믿고 법을 범하여 탐욕함이 기탄이 없었다. 용이 탄핵하여 조율(照律)되었다.
12월에 주상이 명년에 장헌세자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기로 의논하였으니, 을묘년(1795, 정조 19)은 곧 장헌세자가 탄생한 회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비(太妃)와 태빈(太嬪)에게도 또한 존호(尊號)를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예조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채 문숙공(蔡文肅公)이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용과 권평(權坪)은 도청랑(都廳郞)이 되었다.
이때 조신(朝臣)이 휘호(徽號) 8자(字)의 의(議)를 올렸는데 그 의에 금등(金縢)의 창효(彰孝)의 의(義)가 없으므로 주상이 개의(改義)하려 하나 탈잡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문숙공과 이가환(李家煥)에게 비밀히 자문을 구하니, 이 가환은,
“올린 휘호에 개운(開運)이란 글자가 있는데 이것은 석진(石晉)의 연호이니, 이것으로써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주상이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개의를 명하였다. 이에 휘호를 ‘장륜 융범 기명 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 올렸으니 ‘장륜 융범’이 곧 금등의 뜻이다.
대제학(大提學) 서유신(徐有臣)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었는데 또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응교(應敎) 한광식(韓光植)이 소를 올려 그 소루하고 잘못된 점을 논하였다. 주상이 한광식의 소를 도감제신(都監諸臣)에게 내려 개찬(改撰)하는 것이 마땅한지, 또는 혹 한두 구절만 고치는 것이 옳은지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때 도감제조 민종현(閔鍾顯)ㆍ심이지(沈頤之)ㆍ이득신(李得臣)ㆍ이가환(李家煥)이 모두 침음(沈吟 입속으로 웅얼거리어 깊이 생각함)하며 확정짓지 못했다. 용이 말하기를,
“모든 표전(表箋)이나 조고(詔誥) 등은 만일 그 자구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약간은 수정해도 되지만 지금 이 옥책문은 금등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명맥(命脈)이 도무지 잘못되었으므로 부득불 개찬하여 군부에게 근심을 끼침이 없어야 합니다.”
하였다. 도제조 채공이 드디어 개찬하기를 청하였다. 개찬하는 일이 끝나자 장차 봉함해서 바치려 하였다. 서리가 아뢰기를,
“태빈궁(太嬪宮)의 옥책금인(玉冊金印)은 장차 신근봉(臣謹封)이라 쓰리까? 아니면 신(臣)을 쓰지 않으리까?”
하였다. 채공이 의궤(儀軌)를 널리 상고하게 하였으나 모두 의거할 바를 얻지 못하여 한낮이 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용이 나아가 말하기를,
“신근봉(臣謹封)이라 쓰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더니, 채공이 눈으로 주의를 주며 함부로 말하지 말게 하려 하였다. 민공(閔公)과 심공(沈公)이 말하기를,
“어째서인가?”
하기에, 용이 말하기를,
“지금 이 옥책ㆍ옥보(玉寶)ㆍ금인(金印) 등물을 도감제신(都監諸臣)의 이름으로 태비(太妃)와 태빈(太嬪)에게 올린다면, 조정에서 태빈께 평일에 칭신(稱臣)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신이라고 쓰지 않는 것이 가하지만, 지금 우리 제신이 주상의 명을 받들어 이 옥책 등물을 만들어 대전(大殿)께 올리면 대전은 스스로 그 효성으로 태비와 태빈께 바치는 것이니, 지금 우리가 대전께 어떻게 신이라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채공이 크게 깨달아 좋다고 말하고, 온 좌중이 옳다고 일컬었다. 이날 모든 낭관(郞官)ㆍ서리(胥吏)로서 참관한 이는 모두 시원하게 여겼다.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다. 그 뒤 수일이 지나서 채공이 나에게 말하였다.
“신이라 쓰느냐 쓰지 않느냐 하는 것은 관계됨이 매우 크다. 추숭(追崇)하는 의의에 혐의로운 바가 있음을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었는데, 그 경위를 해석하는 말을 듣게 되어서야 개운해졌다.”
이때 내각학사(內閣學士) 정동준(鄭東浚)이 병이라 하고 집에 있으면서 음으로 조권(朝權)을 잡아 사방의 뇌물을 받아들이고, 귀신 명경(貴臣名卿)이 밤마다 백화당(百花堂)에 모여 연회를 베푸니 중외(中外)가 주목하였다. 용이 항상 정동준(鄭東浚)을 치고자 하다가 소를 초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내각(內閣)을 설치한 것은 곧 전하께서 선왕의 미덕을 계술(繼述)하고 문치(文治)를 떨치며 겸하여 원대한 정책을 담은 것입니다. 무릇 신료(臣僚)의 반열에 있는 이로서는 누가 우러러 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뽑아 임명함에 있어 혹 적합한 사람이 아니고 총애가 그 분수에 넘침이 있으면 교만과 사치가 싹트고 비방과 물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각신(閣臣) 정 동준이 병이라 하고 집에 있으면서 밤낮없는 노고를 다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깁니다. 더구나 그 제택(第宅)이 제도에 넘치어 길가는 사람들도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이는 각신의 신분으로 아마도 좋은 소식이 아닌 듯합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조금 제재를 가하여 몸을 삼가고 분수를 지키도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조야(朝野)의 의혹이 풀릴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에게도 복이 될 것입니다.”
갑인년 겨울에 다시 옥당에 들어갔으나 모두 곧 체직되어 그 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을묘년 봄 동준의 일이 발로되자 자결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정월에 특별히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곧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指)에 발탁되었으니, 도감(都監)의 공로 때문이다. 2월에 주상이 태빈(太嬪)을 모시고 또 군주(郡主)ㆍ현주(縣主)를 데리고 화성에 거둥하였다. 하루는 용에게 행장을 꾸리도록 명하였는데 그 직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특별히 병조 참의에 제수하여 시위(侍衛)로 따르도록 하였다. 화성에 있을 적에 잔치에 참여하여 갱화(賡和)하여 총애가 자못 깊었다. 환궁한 뒤에 병조의 직숙(直宿) 중 한밤에 칠언배율(七言排律) 1백 운(韻)을 짓게 하여 지어 올리니 주상의 뜻에 맞았다. 주상이 관각(館閣)의 학사(學士)들인 민종현(閔鍾顯)ㆍ심환지(沈煥之)ㆍ이병정(李秉鼎) 등에게 명하여 비평(批評)하여 올리도록 하고 내각학사(內閣學士) 이만수(李晩秀)를 시켜 낭독하도록 하고, 어비(御批)와 어평(御評)을 가하여 장유(獎諭)함이 융숭한 동시에 녹비(鹿皮) 1영(領)을 하사하여 영예스럽게 하였다. 주상이 근신(近臣)에게 일렀다.
“내가 장차 용을 관각(館閣)에 있게 하려고 짐짓 먼저 의사를 보이는 것이다.”
이해 봄에 용이 회시 일소(會試一所)의 동고관(同考官)이 되었는데, 방(榜)을 부르고 보니 남인(南人)으로 진사가 된 이가 50여 인이었다. 시배(時輩)들이 용이 사정을 두어 자기 편을 도와주었다고 그르게 퍼뜨렸다.
주상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서 하옥하여 10여 일에 이르고 책유(責諭)가 진첩(震疊 존귀한 사람이 몹시 성을 내어 그치지 아니함)하여 ‘방자무기(放恣無忌)하다.’하였다. 또 유시하기를,
“평생에 다시 주필(朱筆)을 잡지 못하리라.”
하고, 또 전조(銓曹)로 하여금 관직에 의망(擬望)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며칠 뒤에 주상이 춘당대(春塘臺)에 임어하여 선비를 시험보일 제 특별히 용을 명하여 대독관(對讀官)으로 삼으므로 용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상이 채홍원(蔡弘遠)에게 이르기를,
“내가 나중에 알고보니 남인이 합격한 자는 모두 이소(二所)에서였고, 정용(丁鏞)은 일소의 시험관이었으니 사정을 둔 일이 없었다.”
하고, 규영부(奎瀛府)에 들어가 이만수(李晩秀)ㆍ이가환(李家煥)ㆍ이익운(李益運)ㆍ홍인호(洪仁浩)ㆍ서준보(徐俊輔)ㆍ김근순(金近淳)ㆍ조석중(曺錫中) 등과 함께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짓게 하였는데, 용이 맡은 바가 특히 많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 상원(上苑)에 온갖 꽃이 활짝 피었다. 주상이 영화당(映花堂) 아래에서 말을 타고, 내각(內閣) 신(臣) 채제공(蔡濟恭) 이하 10여 인 및 신(臣) 용 등 6~7인이 모두 내구마(內廐馬)를 타고 호종하여 궁성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아서 도로 석거문(石渠門) 아래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돌아서 농산정(籠山亭)에 이르러 곡연(曲宴)을 베풀었다. 그리고 모든 금원(禁苑) 안의 수석(水石)과 화훼(花卉)의 승경(勝景)이나 비장된 궤안 도서(几案圖書)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윽고 또 어가(御駕)를 옮겨 서총대(瑞葱臺)에 이르러 주상이 활을 쏘고 신하들에게 구경하도록 하고 저녁 때에 부용정(芙蓉亭)에 이르러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그리고 용 등으로 하여금 태액지(太液池)에 배를 띄우고 분부에 응하여 시를 읊도록 하였다. 저녁 식사를 내린 뒤에 어촉(御燭)을 하사하여 원(院)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뒤 며칠이 지나서 주상이 세심대(洗心臺)에 거둥하여 꽃구경을 하였는데, 용이 또 시종하였다. 술이 한 순배 돈 뒤에 주상이 시를 읊고 여러 학사로 하여금 갱화(賡和)하게 하니, 내시(內侍)가 채전(彩牋) 1축(軸)을 올렸다. 주상이 용에게 어막(御幕) 안으로 들어와서 시를 쓰도록 명하였다. 용이 탑전(榻前)에서 붓을 뽑으니 주상은 지세가 고르지 못하다 하여 어탑(御榻) 위에 시축(詩軸)을 올려 놓고 쓰도록 명하였다. 용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니, 주상이 여러번 나오도록 명하였다. 용이 부득이 명대로 어탑에 나아가 붓을 휘둘러 써내려 가니, 주상이 가까이 다가와서 보고 잘 쓴다고 칭찬하였다. 그 대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4월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變服) 차림으로 몰래 우리나라에 와서 북산(北山) 아래에 숨어서 서교(西敎)를 널리 선전하였다. 진사 한영익(韓永益)이 이를 알고 이석(李晳)에게 고하였는데, 용도 그 말을 들었다. 이석이 채상공(蔡相公 채제공을 가리킴)에게 고하니, 공은 주상에게 비밀히 고하였다. 그래서 주상은 포장(捕將) 조규진(趙奎鎭)에게 명하여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주문모는 달아나고 최인길(崔仁吉)ㆍ윤유일(尹有一)ㆍ지황(池潢) 등 3인을 잡아 장살(杖殺)하였다. 목만중(睦萬中) 등이 뜬말로 선동질하여 이를 기회로 선류(善類)를 다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몰래 박장설(朴長卨)을 사주(使嗾)하여 소를 올려 이가환(李家煥)을 논하도록 하되, 무함하여 말하기를,
“정약전(丁若銓)의 경술년(1790, 정조 14) 대책(對策)에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하였으나, 이가환이 장원으로 뽑았습니다.”
하였다. 주상이 그 대책을 보고 그것이 무고임을 살펴 알고는 하유(下諭)하여 분변하고 박장설을 사예(四裔)에 유배(流配)하였다. 그러나 악당의 비어(飛語)는 날로 심하여졌다. 그래서 시재(時宰)와 세가(勢家)가 그 말을 익히 들었으므로, 이가환 등이 실지로 그 근기이어서 죄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니 주상이 괴롭게 여겼다. 가을에 이가환을 내쳐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보임하고, 용은 금정역 찰방(金井驛察訪)에 보임하고 이승훈(李承薰)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하였다. 그리고 그날 하유하기를,
“그가 만약 눈으로 성인의 글이 아닌 서적을 보지 않고 귀로 경전(經典)의 뜻에 어그러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죄없는 그의 형이 어찌 공거(公車)에 올랐겠는가. 그가 문장을 하려 한다면 육경(六經)과 양한(兩漢)에 제대로 좋은 전지(田地)가 있는데, 반드시 기이함을 힘쓰고 새로움을 찾아서 몸과 이름을 낭패하기에 이르는 것은 또한 무슨 기욕(嗜慾)인가? 비록 종적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나 조야(朝野)에서 이런 소문을 얻었으니 이것이 곧 그의 단안(斷案)이다. 설사, 이미 선으로 향하였다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스스로 분발하면 그에게 있어서 옥성(玉成)이 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전 승지 정용을 금정도 찰방으로 제수하니 길을 떠나면서부터 살아서 한강을 넘어올 방도를 도모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정역은 홍주 땅에 있으니, 역(驛)의 이속(吏屬)이 서교를 많이 익혔다. 주상의 의도는, 용으로 하여금 효유하여 그것을 금지하게 하려 한 것이다.
용이 금정에 이르러 호족(豪族)을 불러 조정의 금령(禁令)을 거듭 이르고 제사지내기를 권하니, 사림(士林)이 이 말을 듣고 면목이 일신되는 효험이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에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을 청하여 온양(溫陽)의 석암사(石巖寺)에 모였다. 이때 내포(內浦)의 명가의 자제로 이를테면 이광교(李廣敎)ㆍ이명환(李鳴煥)ㆍ권기(權夔)ㆍ강이오(姜履五) 등 10여 인이 또한 소문을 듣고 와서 모여 날마다 수사(洙泗)의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리고 성옹(星翁)의 유저(遺著)를 교정하고 10일 만에 파하였다. 또 북계(北溪) 윤취협(尹就協)과 방산(方山) 이도명(李道溟)을 방문하였으니, 모두 뜻이 있는 선비였다.
겨울에 특지(特旨)로 내직에 옮겨졌다. 이때 이정운(李鼎運)이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로 나갔다. 전 관찰사 유강(柳焵)이 이존창(李存昌)을 체포하고 용이 그를 잡는 일에 참여한 바가 있다 하여 용에게 공을 돌려 그 공으로 발탁되도록 하려 하였다. 주상이 듣고 이정운에게 밀유(密諭)를 내려 도임하는 즉시 주문(奏聞)하도록 분부하고, 용으로 하여금 이로 인하여 드디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이 또 주상의 유지를 전하되, 용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이정운에게 부치도록 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옳지 못합니다. 사군자(士君子)가 입신(立身)하여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비록 이 징옥(李澄玉)이나 이 시애(李施愛)를 잡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것으로 공을 삼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이 이존창 같은 하찮은 자인데이겠습니까. 또 일찍이 계책을 내거나 세운 적이 없는데 지금 버젓이 그를 잡은 일을 과장하여 임금의 은혜를 요구하겠습니까? 죽어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주상의 뜻을 따름으로써 나로 하여금 부끄러워서 죽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였더니, 이 익운이 무색하여 갔다. 대개 이 때문에 주상의 뜻에 거슬렸다고 한다.
그 뒤 김이영(金履永)이 또 금정 찰방(金井察訪)에 보임되었다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용이 금정에 있을 적에 성심껏 서교의 무리를 깨우치고 금지하였으며 또 벼슬살이함에 있어 청렴하고 근신하였습니다.”
하고, 심환지(沈煥之)가 주달하기를,
“정용(丁鏞)이 군복(軍服)의 일로 인하여 특명으로 정망(停望 허물 있는 사람에게 벼슬시키는 일을 정지함)되어 지금까지 풀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쓸 만하고 또 금정에서 깨우치고 금지한 바가 많았으니, 다시 수용(收用)하소서.”
하니, 주상이 윤허하였다.
병진년(1796, 정조 20) 봄 형조의 녹계(錄啓)로 인하여 하유하기를,
“요즘 연신(筵臣)의 말을 들으니, 외직에 보임된 찰방(察訪)이 내포(內浦) 일대를 성심껏 가르치고 금지한 일로 괄목(刮目)할 만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하고, 특별히 중화척(中和尺)을 내리고 이어서 어시(御詩) 2수를 내려 용에게 갱화(賡和)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가을에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을 보내어 《규장전운옥편(奎章全韻玉篇)》의 의례(義例)를 이가환 및 용에게 물었다. 겨울이 되자 용을 불러 규영부(奎瀛府)에 들게 하여 이만수(李晩秀)ㆍ이재학(李在學)ㆍ이익진(李翼晋)ㆍ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하고 자주 사대(賜對)하고 서명(書名)을 의정(議定)하였다. 날마다 진기한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또 쌀ㆍ시탄(柴炭)ㆍ꿩ㆍ젓갈ㆍ감ㆍ귤 등속 및 기향 진물(奇香珍物)을 자주 하사하였다. 12월 병조 참지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옮겨지고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정사년(1797, 정조 21) 봄 대유사(大酉舍)에서 사대(賜對)하고 선반(宣飯)한 다음, 화식전(貨殖傳)ㆍ원앙전(袁盎傳)의 의의(疑義)를 하순(下詢)하였다. 명을 받들고 외각(外閣)에 나아가 이서구(李書九)ㆍ윤광안(尹光顔)ㆍ이상황(李相璜) 등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교정하였다. 또 명하여 반시대독관(泮試對讀官)으로 삼고 하유(下諭)하여 주필(朱筆)을 잡고 시권(試券)을 고평(考評)하게 하였으니, 모두 특이한 은총이었다. 6월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본말(本末)을 환하게 진술하여 비방을 초래하게 된 이유를 아뢰었으니, 대략에,
“말이 박절하지 않게 하여 ‘책을 보았다.[看書]’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책을 보는 데에만 그쳤다면 어찌 갑자기 죄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으로 흔연히 좋아하고 사모하였으며 일찍이 거론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 심술에도 일찍이 기름이 배어들고 물이 스며들며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우거지듯 하였으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반복하여 수천 글자로 지어 설명하였더니 주상이 비답하기를,
“선단(善端)의 싹이 애연(藹然)하기가 마치 봄에 훈김이 돌아 만물이 자라나는 것과 같아서 종이 가득히 스스로 열거하니 말이 족히 듣는 이를 느끼게 할 만하다.”
하고, 연신(筵臣)들도 또한 용을 위해 말하는 자가 많으니, 주상이 가장(嘉獎)하였다.
마침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가 폄체(貶遞 강등되어 갈림)되었다. 주상이 어필(御筆)로 용의 이름을 써서 제수하므로 용이 폐사(陛辭)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저번날의 소는 문사(文詞)가 좋고 심사(心事)가 밝았으니 실로 쉽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일단 진용(進用)하려 하나 의논이 매우 많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한두 해 늦더라도 손상될 것이 없다.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이때 당시 귀신(貴臣)들로서 참소하고 미워하는 자가 많으니, 주상의 의사는 용으로 하여금 외직에 수년 간 있게 함으로써 냉각기를 두려 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주상이 김이교(金履喬)ㆍ김이재(金履載)ㆍ홍석주(洪奭周)ㆍ김근순(金近淳)ㆍ서준보(徐俊輔) 등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사기선(史記選)》을 찬주(纂註)하게 하였는데 찬주가 올려지자, 그 번다한 것을 못마땅히 여겨 산정(刪正)하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주상이 이르기를,
“곡산은 한가한 고을이니, 가서 그 찬주를 산정하라.”
하였다. 용이 명을 받고 물러나서는 공문서를 살피는 여가에 깊이 연구하여 수정하였다. 책이 완성된 뒤에 내각(內閣)을 통하여 올렸더니, 이만수가 회보하였다.
“책이 상주되자 주상의 뜻에 맞았다.”
곡산 백성에 이계심(李啓心)이란 자가 있었는데, 본성이 백성의 폐단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전관(前官) 때에 포수보(砲手保) 면포 1필을 돈 9백 전(錢)으로 대징(代徵)하였다. 이계심이 소민(小民) 1천여 인을 거느리고 관부(官府)에 들어가서 다투었다. 관에서 그를 형벌로 다스리려 하니, 1천여 인이 벌떼처럼 이 계심을 옹위하고 계단을 밟고 올라가며 떠드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이노(吏奴)가 막대를 휘두르며 백성을 내쫓으니 이계심은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오영(五營)에서 수사하였으나 그를 잡지 못하였다.
용이 경내에 이르니, 이계심이 민막(民瘼) 10여 조를 쓴 소첩(訴牒)을 가지고 길 옆에 엎드려 자수하였다. 좌우에서 그를 잡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이미 자수하였으니 스스로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이윽고 석방하면서 말하였다.
“관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한 계책을 잘하여 폐단을 들어 관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천금(千金)으로 사들여야 할 것이다.”
이에, 무릇 경영(京營)에 상납하는 포목은 용이 친히 면전에서 재어 보고 받았다. 향교에 《오례의(五禮儀)》가 있었는데, 포백척도(布帛尺圖)가 실려 있었다. 그것을 시용척(時用尺)과 비교해 보니 2촌(寸)이 차이가 났다. 이에 도(圖)를 상고하여 자를 만들어 기필코 경영(京營)의 동척(銅尺)과 합치시켜 백성의 포목을 받아들이니, 백성이 편리하게 여겼다. 그 이듬해 포목이 더욱 귀하여졌다. 용이 칙수전(勅需錢) 및 관봉전(官俸錢) 2천여 냥을 내어 관서(關西)에서 포목을 사서 경납(京納)에 충당하고 그 대가를 백성에게서 거두어 갚으니, 모두 2백 전에 불과하므로 백성들은 집에 송아지 한 마리를 얻었다고 하였다.
국법(國法)에 모든 창고 곡식은 반드시 순(巡)을 나누어 나눠주도록 하니 혹 8~9순에 이르렀다. 용이 매양 하루에 서너 향(鄕)의 백성을 불러 일시에 다 바치게 함으로써 그 항례(恒例)의 비용을 줄이고 그 내왕을 간편하게 하였다.
무오년(1798, 정조 22) 겨울에 양곡의 수납을 거의 마치자, 장재신(掌財臣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주달하여 곡산의 미곡 7천 석을 팔아 작전(作錢)하기를 청하였다. 이해는 농사가 크게 풍년이 들어 쌀값이 1섬[斛] 15두(斗)에 2백 전에 불과한데 상정가(詳定價)는 4백 20전이었다. 용이 이해(利害)를 조목조목 열거하여 상사(上司)에 보고하고, 백성에게 독촉하여 다 수납하게 한 다음 양곡은 창고에 봉하여 두고 기다렸다. 정공(鄭公)이 아뢰기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는 것은 기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청하고 전하께서 윤허하시고 감사가 포고하였는데, 수령이 완악하게 따르지 않으니 어찌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정약용을 죄주어 후인을 징계하소서.”
하니, 주상이 원보(原報)를 가져다 보고 일렀다.
“옛날 장재신(掌財臣)은 팔도(八道)의 시장 가격을 두루 알아, 천하면 사들이고 귀하면 파는 것이 법이었다. 지금 경이 천한 곡식을 팔아 귀한 돈을 장만하려 하니, 용이 따르지 않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무릇 호적 정리 기간이 되면 아전이 백성을 을러서 호수를 늘리니,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뇌물을 바쳐 호구를 늘임이 없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피폐한 마을은 날로 조잔(凋殘)해지고 부유한 마을은 날로 넉넉해져서 백성의 재용이 고르지 않았다. 용이 먼저 침기부(砧基簿)를 작성하여 종횡표(縱橫表)를 만들고, 또 지도를 작성하여 경위선(經緯線)을 두어 백성의 허실 강약(虛實强弱) 및 지역의 활협 원근(濶狹遠近)을 두루 알았다. 이 때문에 적감(籍監)ㆍ적리(籍吏)를 파하고 관에서 부유한 마을과 잔폐한 마을에 따라 신축성 있게 호구를 증감(增減)하니, 호액(戶額)이 다 실정에 맞았다. 며칠이 못 되어 호적 단자(戶籍單子)가 일제히 도착하였는데, 한 사람도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없었다.
향갑(鄕甲)이 군정(軍丁)을 천보(薦報)할 적마다 용이 그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것을 미리 알고서 곧 소리에 응하여 꾸짖기를,
“아무 백성은 새로 모군(某郡)으로부터 와서 홀아비에 다리 병신인데 무슨 방법으로 군포(軍布)에 응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향갑이 깜짝 놀라며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는 모두 침기표(砧基表)를 이용하여 알게 된 것이고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절도사(節度使) 정학경(鄭學畊)이 신칙하여 허록(虛錄)ㆍ백골(白骨)의 군정(軍丁)을 찌붙이게 하므로, 용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입니까? 군포(軍布)는 허록(虛錄)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고 군첨(軍簽)은 백골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니, 절대로 일을 만들지 마시오.”
하였더니, 정(鄭)이 깨닫지 못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군포계(軍布契)가 있고 역근전(役根田)이 있으니 이것이 호포(戶布)입니다. 호포란 국가에서 서둘러 시행하려 하던 바이었으나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백성이 스스로 행하는데 무엇하러 이를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정당(政堂)을 세우고 공해(公廨)를 수리하는 데에 제고(諸庫)ㆍ제청(諸廳)의 사례와 절목(節目)을 가져다가 죄다 폐기(廢棄)하고 새로 조례(條例)를 세워 행하였다. 이전에는 비용이 부족할 적마다 다시 민호(民戶)에서 거두어 들였는데 이로부터 충족하여 여유가 있었다. 그뒤에 수령이 그것을 고치려는 자가 있으면 이민(吏民)이 모두 불가하다고 고집하므로 마침내 한 조목도 고치지 못하였다.
무오년(1798, 정조 22) 늦겨울에 역질(疫疾)이 서로(西路)로부터 들어왔다. 용이 먼저 병에 결렸고, 읍중의 늙은이가 이 병에 걸리면 반드시 죽고 마니, 며칠이 안 되어 곡소리가 온 경내에 진동하였다. 용이 백성에게 권하여 서로 치료하게 하고 미곡으로 그 위급함을 구휼하며 또 주인 없는 시체를 장사지내 주었다. 새해가 되자 용이 바야흐로 이불을 쓰고 있으면서 칙수 감리(勅需監吏)를 재촉해 불러 배천(白川) 강서사(江西寺)에 빨리 가서 젖은 땅에 깔 문석(紋席)을 사오라고 명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며 깨닫지 못하고, 칙사(勅使)가 오느냐고 묻기에 나는, 아니니 어서 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감리(監吏)가 배천에 가서 문석을 사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평산부(平山府)에 이르니, 의주의 파발마(把撥馬)가 나는 듯이 달려 지나가며,
“황제가 붕서(崩逝)하여 칙사가 온다.”
하였다는 것이었다. 감리가 돌아오자 온 부중(府中)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용이 말하였다.
“이상할 것이 없다. 병이 서방으로부터 와서 노인이 모두 죽으니, 이 때문에 알았다.”
봄에 가함(假銜)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황주 영위사(黃州迎慰使)가 되어 황주에 50일 동안 머물렀다. 주상이 밀유(密諭)로 용에게 도내 수령의 선악과 빈객 접대하는 모든 폐해를 염탐하도록 하였다. 수령으로서 수령을 염찰(廉察)하는 것은 또한 드문 일이었다.
이에 앞서 도내에 의옥(疑獄)이 2건 있었는데 용이 밀주(密奏)하였더니, 주상이 감사에게 하유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감사 이의준(李義駿)이 용을 차임(差任)하여 조사하게 하여 두 옥사가 모두 해결되었다.
마침 여름 가뭄이 들었다. 주상이 여러 옥사(獄事)를 심리하고자 하였는데 용의 옥사(獄詞)가 뜻에 맞는다 하여 마침내 병조 참지에 제수하였다. 올라오는 도중에 동부승지에 제수하고, 도성에 들어오니 형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어연(御筵)에 나아가니, 주상이 형조 판서 조상진(趙尙鎭)에게 일러 말하기를,
“경은 지금 늙었고 참의는 연소하고 꽤 총명하니 경은 편히 쉬고 일체 참의에게 맡기도록 하오.”
하였다. 판서가 이 하유를 받고는 모든 옥사의 처결을 일체 용에게 위임하였는데 용이 평번(平反)한 바가 많았다.
어떤 백성 하나가 억울하게 옥사에 걸리었는데 이미 늙어서 밝히려 하지 않았다. 용이 초검(初檢)ㆍ복검(覆檢)의 공안(公案)을 거슬러 상고하여 그 원통함을 밝혀내니, 주상이 곧 형조(刑曹)의 뜰에서 의관(衣冠)을 주어 백방(白放)하도록 명하였다.
무신(武臣) 이성사(李聖師)가 여종 하나를 샀었는데, 이성사가 죽자 송사가 있었다. 마침 대간(臺諫)의 말이 있어 주상을 격노시켰다. 주상이 명하여 그 손자 모(某)를 잡아서 형장(刑杖)으로 1백대를 때려 문초하게 하고, 천위(天威)가 매우 진첩(震疊)하여 그 고문하는 상황을 살피게 하니 온 조중(曹中)이 두려워하였다. 용이 말하기를,
“진실로 고문으로 혹독하게 하면 죽을 뿐이니, 선비를 죽이는 것은 성상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주의시켜 곤장 수만 채운 다음 무죄함을 주달하였더니, 주상의 뜻이 풀어졌다.
어떤 간민(奸民) 하나가 공물(貢物)을 거듭 팔고 핑계하기를,
“주권(朱券)은 화성(華城)에 있어서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이었다. 용이 국문하기를,
“하찮은 소민이 감히 화성을 빙자하여 성사(城社)로 삼으려 하니 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틀 만에 주권(朱券)이 이르렀다.
하루는 주상이 이르기를,
“네가 해서(海西)로부터 왔으니 읍폐(邑弊)와 민막(民瘼)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므로, 용이 초도(椒島)에 방목하는 소의 일에 대해 주달하였더니, 주상이 곧 하유하여 우적(牛籍)을 다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또 칙사(勅使) 영접에 대한 모든 폐단을 주달하였더니, 주상이 이르기를,
“이상 시수(李相時秀)가 원접사(遠接使)를 갓 지냈으니 가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낭비될 만한 것은 모두 보고하여 없애도록 명하였다.
이때 주상의 권주(眷注 왕이 특별히 돌보심)가 날로 깊어져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니, 좋아하지 않는 자가 시기하였다. 홍시보(洪時溥)가 용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삼가시오. 내 하인에 옥당(玉堂)의 서리를 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정공(丁公)의 야대(夜對)가 파하지 않으면 옥당이 서리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고 조심하여 잠을 못 잔다.’ 하니, 그대가 견딜 수 있겠소?”
하였다. 얼마 못 가서 대사간(大司諫) 신헌조(申獻朝)가 권철신(權哲身)을 계론(啓論)하고 드디어 용의 형도 논급하였다. 아룀이 끝나기도 전에 주상이 노하여 견책(譴責)하였는데, 조보(朝報)에도 싣지 않아 용은 알지 못하였다.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이 또 용이 혐의를 무릅쓰고 행공(行公)한다고 논하였다. 그래서 용이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더니, 한 달이 넘어서야 체직되었다.
겨울에 서얼(庶孼) 조화진(趙華鎭)이란 자가 상변(上變)하기를,
“이가환과 정용 등이 음으로 서교(西敎)를 주장하여 불궤(不軌 모반)를 도모하는데, 한영익(韓永益)이 그의 심복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그것이 무고임을 살피고 변서(變書)를 이가환 등에게 선시(宣示)하고 또 이르기를,
“한영익이 북산(北山)의 일을 고발하였는데, 어떻게 복심이 될 수 있으랴.”
하였다. 그리고 각신(閣臣) 심환지(沈煥之)와 충청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모두 무고(誣告)라 하니 그 일이 정지되었다. 조화진이 한영익에게 구혼(求婚)한 적이 있는데, 한영익이 듣지 않고 그의 누이동생을 용의 서제(庶弟) 황(鐄)에게 출가시켰었다. 이 때문에 한영익을 죽이기를 도모하면서 용에게까지 미치도록 한 것이다.
주상이 매양 한 질의 책을 다 읽고 나면 태빈(太嬪)이 음식을 갖추어 세서례(洗書禮)를 행하여 여염의 어린아이들의 풍속을 따르니 주상이 이를 위해 시를 짓고 용으로 하여금 갱화(賡和)하게 하였다.
경신년(1800, 정조 24) 봄 용이, 참소하고 시기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전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를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옛마을로 돌아갔다. 며칠이 못 되어 주상이 듣고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재촉하여 불렀다. 신이 조정에 돌아오자, 주상이 승지를 통하여 하유하였다.
“규영부(奎瀛府)는 지금 춘방(春坊)이 되었으니, 처소가 정해지기를 기다려서 모름지기 들어와 서적을 교정하라. 내가 어찌 그를 버리겠는가.”
6월 12일 달밤에 한가로이 앉았는데,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맞아들이니 곧 내각의 서리였다. 《한서선(漢書選)》 10건을 가지고 와서 하유(下諭)를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대를 불러 서적을 편찬하려 한다. 주자소(鑄字所)를 새로 개수하여 벽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믐께라야 들어와서 등연(登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며, 자상히 위문해 주셨다. 또 이르기를,
“이 《한서선》 5건은 가전물(家傳物)로 남겨 두고, 5건은 제목을 써서 도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내각의 서리가 말하기를,
“하유하실 때에 안색이 몹시 그리워하시고 사지(辭旨)가 온순(溫諄)하였으니,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서리가 나간 뒤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동요되어 스스로 편치 못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옥후(玉候 임금의 안후)가 편치 못하여 28일에 이르러 주상이 마침내 승하하였다. 바로 그날 밤 서리를 보내어 서적을 하사하고 존문(存問)한 것이 드디어 영결(永訣)이 되었으니, 군신(君臣)의 정의가 그날 저녁에 영원히 종결된 것이다. 용이 매양 이 일에 생각이 미칠 적마다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금할 수 없었다. 승하하던 날에 급보를 듣고 홍화문(弘化門) 앞에 이르러 조득영(趙得永)을 만나 서로 가슴을 치며 목놓아 통곡하였다. 찬궁(欑宮)을 바르던 날 숙장문(肅章門) 옆에 앉아 조석중(曺錫中)과 슬픔을 말하였다.
공제(公除)한 뒤 점차 들리는 말은 악당이 기뻐 날뛰며 날마다 유언 비어와 위태로운 말을 지어내어 듣는 자들을 의혹시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이가환(李家煥) 등이 장차 난을 일으켜 4흉(凶)ㆍ8적(賊)을 제거하려 한다.”
라고까지 하였다. 그 4흉ㆍ8적의 명단은 매양 반은 당시 재상과 명사를 열거하고, 반은 스스로 그들의 붕당(朋黨)으로 숫자를 채워 시배(時輩)들의 노여움을 격동시켰다.
용은 화색(禍色)이 날로 급해짐을 헤아리고는 곧 처자를 마현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무르면서 시변(時變)을 살피고 있었다. 겨울에 졸곡(卒哭)을 마친 뒤에 한강 가 소내[苕川]로 아주 돌아오고 삭망(朔望)에만 곡반(哭班)에 나아갔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태비(太妃)가 하유(下諭)하여, 코를 베어 멸망시키겠다[劓殄滅之]는 경계가 있었다.
정월 그믐날에 이유수(李儒修)ㆍ윤지눌(尹持訥)이 편지로 책롱(冊籠)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으므로 용이 빨리 말을 달려 도성에 들어갔다. 이른바 책롱은 곧 5~6인의 문서가 혼잡된 것인데 그 가운데 용의 집 서찰(書札)이 들어 있었다. 윤행임(尹行恁)이 그 상황을 알고서 이익운(李益運)과 의논하고 유원명(柳遠鳴)을 시켜 상소하여, 용을 나문(拿問)하기를 청함으로써 화봉(禍鋒)을 누그러뜨리려 하였고, 최헌중(崔獻重)ㆍ홍시보(洪時溥)ㆍ심규(沈逵)ㆍ이석(李晳) 등도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극력 권하여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용은 모두 듣지 않았다.
2월 8일에 양사(兩司)가 발계(發啓)하여 이가환ㆍ정용ㆍ이승훈을 국문하기를 청하니 모두 하옥하고, 용의 형 약전(若銓)ㆍ약종(若鍾) 및 이기양(李基讓)ㆍ권철신(權哲身)ㆍ오석충(吳錫忠)ㆍ홍낙민(洪樂敏)ㆍ김건순(金健淳)ㆍ김백순(金伯淳) 등이 모두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문서 더미 가운데 도리어 용의 누명을 밝게 벗길 만한 증거가 많았으므로 곧 형틀을 벗기고 금부(禁府) 안에서 보방(保放)되었다. 여러 대신이 때때로 나를 불러 함께 옥사를 의논하였다. 위관(委官)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곧 백방(白放)할 것이니 식사를 많이 들고 자중하라.”
하고, 심환지(沈煥之)는 말하기를,
“허, 혼우(婚友 혼인한 집안의 벗)여! 믿을 수 없군.”
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이서구(李書九)와 승지 김관주(金觀住)가 평번(平反)하여 너그러이 용서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참국 승지(參鞫承旨 죄인 국문에 참여하는 승지) 서미수(徐美修)는 기름파는 노파를 몰래 불러 옥(獄)의 사정을 용의 처자에게 통지하여, 용의 죄정(罪情)이 가벼워서 죽을 염려가 없음을 알게 하고, 식사를 많이 들며 살라고 권하였다.
여러 대신이 모두 백방(白放)하기를 의논하는데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그래서 용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定配)되고 그의 형 약전(若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定配)되었으나 약종(若鍾) 및 나머지는 모두 중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오직 이기양은 단천(端川)으로 귀양가고, 오석충(吳錫忠)은 임자도(荏子島)로 귀양갔다.
이때 악당(惡黨)이, 용이 죽지 않은 것을 알고 흐트러진 문서 더미 가운데 삼구(三仇)의 설을 찾아내어 어거지로 정씨(丁氏)의 집 문서로 정하고 또 무함하여 드디어 약종(若鍾)에게 극률(極律)을 가하여 용의 재기(再起)의 길을 막았다. 이 삼구(三仇)의 설은 고(故) 익찬(翊贊) 안정복(安鼎福)의 저서에 분명 삼구(三仇)의 해설이 있으니, 그것이 무함임이 분명하다. 이해 여름에 옥사가 더욱 만연되어 왕손(王孫) 인(裀), 척신(戚臣) 홍낙임(洪樂任), 각신(閣臣) 윤행임(尹行恁)이 모두 사사(賜死)되었다.
용이 장기(長鬐)에 이르러서는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짓고, 《삼창고훈(三倉詁訓)》을 고증하고, 《이아술(爾雅述)》 6권을 짓고, 끊임없이 시를 읊으면서 스스로 소일하였다.
겨울이 되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었다. 악인 홍희운(洪羲運)과 이기경(李基慶) 등이 온갖 계책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대관(臺官)의 자리에 들어가기를 요구하고, 발계(發啓)해서 용 등을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여 반드시 죽이고야 그만두려 하였다. 홍희운이란 홍낙안(洪樂安)의 변명(變名)이다.
이때 정일환(鄭日煥)이 해서(海西)로부터 돌아와서 용이 해서 지방에 유애(遺愛)가 있으므로 죽여서는 안 됨을 극력 말하고, 또,
“죄수의 초사(招辭)에 나오지 않으면 발포(發捕)하는 법이 없다.”
하고, 심환지에게 동요하지 말라고 권하였다. 심환지가 이에 태비(太妃)에게 청하니, 태비가 윤허하였다. 봄에 대계(臺啓)가 있었다. 이에 약전ㆍ용 및 이치훈(李致薰)ㆍ이관기(李寬基)ㆍ이학규(李學逵)ㆍ신여권(申與權) 등이 또 체포되어 옥에 들어갔다. 위관(委官)이 흉서(凶書)를 용에게 보였다. 용이 말하였다.
“역변(逆變)이 이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서도 또한 어찌하여 생각이 미치지 않습니까?”
무릇, 서양 서적을 한 글자라도 본 사람은 죽음은 있어도 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을 안험(按驗)해 보니 모두 그들과 관여된 형상이 없고 또 여러 대신들도 입수한 문서를 보니, 예설(禮說)ㆍ이아설(爾雅說) 및 전에 지은 시율(詩律)이 있는데, 모두 안한(安閒)하고 정밀하며 적과 교통한 흔적이 없었으므로 마음에 불쌍히 여겨 그 무죄함을 입주(入奏)하였다. 태비도 대계(臺啓)가 무고임을 살피고 6인을 아울러 작방(酌放 참작하여 놓아줌)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호남(湖南)은 아직 남은 걱정거리가 있다 하여, 용을 강진현(康津縣)에 정배하여 진정하게 하고, 약전(若銓)은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도 모두 양남(兩南 호남과 영남)으로 정배하였다.
이때 윤영희(尹永僖)가 용의 생사를 알려고 대사간 박장설(朴長卨)을 방문하여 옥정(獄情)을 묻는데, 홍희운이 마침 오므로 윤영희가 피하여 협실(夾室)로 들어갔다. 홍희운이 말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와서는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천 사람을 죽이더라도 용을 죽이지 않으면 죽이지 않느니만 못한데, 공은 어찌 힘껏 간쟁(諫爭)하지 않습니까?”
하니, 박장설이 말하기를,
“그가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죽이겠소.”
하였다. 홍희운이 가고 나서 박장설이 윤영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답답한 사람이오. 죽일 수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큰 옥사를 다시 일으키고 또 나에게 간쟁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는구려.”
용이 강진에 이르러서는 문을 닫아 걸고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다.
임술년(1802, 순조 2) 여름에 현감 이안묵(李安黙)이 또 하찮은 일로 무고하였는데 사실이 없자 곧 중지되었다.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특명으로 용과 채홍원(蔡弘遠)을 같이 석방하려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저지하였다.
무진년(1808, 순조 8)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대(臺)를 쌓고 못을 파서 화목(花木)을 벌여 심고 물을 끌어들여 비류폭포(飛流瀑布)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암(東庵)과 서암(西庵) 두 암자를 수리해 1천여 권이나 장서하고 글을 지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박(尹博)의 산정(山亭)이었다.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2자를 새겨 표지하였다.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 용의 아들 학연(學淵)이 징을 울려 나라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더니, 형조 판서 김계락(金啓洛)이 상재(上裁 주상의 재결)를 청하여 방축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다. 그런데 홍명주(洪命周)가 소를 올려 그것이 불가함을 논하고 또한 이기경이 발론한 바의 대계(臺啓)가 있어서 끝내 석방되지 못하였다.
갑술년(1814, 순조 14) 여름 대신(臺臣) 조장한(趙章漢)이 정계(停啓 전계(傳啓) 가운데 죄인의 이름을 삭제함)하니, 금부(禁府)에서 관문(關文)을 보내려다가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지독하게 말하므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집두(李集斗)가 두려워하여 감히 보내지 못하였다. 무인년(1818, 순조 18) 여름 응교(應敎)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대계가 정지되었는데도 금부의 관문을 보내지 않는 것은 국조(國朝) 이래에 없던 일이니, 유폐(流弊)가 무궁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상신 남공철(南公轍)이 금부의 제신(諸臣)을 나무라니, 판의금부사 김희순(金羲淳)이 곧 관문을 보내었다. 그래서 용이 향리에 돌아오게 되니 곧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무인년 9월 보름날이다.
당초 신유년(1801, 순조 1) 봄 옥중에 있을 적의 일이다. 하루는 시름에 젖어 있는데 꿈에 한 노부(老父)가 꾸짖기를,
“소무(蘇武)는 19년 동안 참았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가?”
하였다. 그때 옥에서 나오게 되어 계산해 보니 옥에 있은 지 19일이었고, 또 향리로 돌아오게 되어 계산해 보니 경신년(1800, 정조 24)에 유락(流落)한 뒤부터 또 19년이었다. 그러니 인생의 비태(否泰 막힘과 트임)함이 정명(定命)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향리로 돌아오자, 서용보가 바야흐로 서쪽 이웃에 물러나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고 친절한 뜻을 표했다. 기묘년(1819, 순조 19) 봄 다시 상부(相府)에 들어갔는데, 가고 옴에 있어 모두 위문하고 은근한 뜻을 전하였다. 겨울에 조정의 논의가 경전(經田)하는 일에 용을 다시 쓰려하여 논이 이미 정해졌는데, 서용보가 극력 저지하였다.
이해 봄 용이 배를 타고 습수(濕水)를 거슬러 충주(忠州)의 선산을 성묘(省墓)하고, 가을에 용문산(龍門山)에 노닐었다. 경진년(1820, 순조 20) 봄 배를 타고 산수(汕水)를 거슬러 올라가 춘천(春川)의 청평산(淸平山)에 노닐고, 가을에 용문산에 노닐어 산택(山澤) 사이를 소요(逍遙)하며 세월을 보냈다.
용이 해상(海上 강진을 말함)으로 유배되어 가서 생각하기를 ‘소싯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20년 동안 세로(世路)에 빠져 다시 선왕(先王)의 대도(大道)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 여가를 얻게 되었다.’ 하고 드디어 흔연히 스스로 경하하였다.
그리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가져다가 침잠(沈潛)하여 탐구하고, 한위(漢魏) 이래로 명청(明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유자(儒者)의 학설로 경전(經典)에 보익이 될 만한 것은 널리 수집하고 두루 고증하여 오류를 정하고 취사(取捨)하여 일가(一家)의 서(書)를 갖추었다.
이에 선대왕(先大王 정조를 말함)이 비정(批定)한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을 머리로 삼고 따로《강의보(講義補)》 3권을 짓고, 또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 《상례외편(喪禮外編)》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악서고존(樂書孤存)》 12권, 《주역심전(周易心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40권,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6권,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당대학강록(熙政堂大學講錄)》 1권,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을 지었는데, 이상은 경집(經集)으로 모두 2백 32권이다.
《시(詩)》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시(詩)란 간림(諫林)이다. 순(舜) 임금 때 오성(五聲)과 육률(六律)로 오언(五言)을 받아들였으니, 오언이란 육시(六詩) 중의 다섯 가지이다. 풍(風)ㆍ부(賦)ㆍ비(比)ㆍ흥(興)이 아(雅)와 함께 다섯인데 묘송(廟頌)은 포함하지 않았다. 이를 악관(樂官)이 조석으로 풍송(諷誦)하였다. 노래(歌)란 금슬(琴瑟)에 창화(唱和)하여 왕으로 하여금 그 선(善)을 듣고 감발(感發)하며 그 악을 듣고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詩)의 포폄(褒貶)이 《춘추(春秋)》보다 더 엄하여 임금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시(詩)가 없어져서 《춘추》가 지어졌다고 한 것이다. 풍ㆍ부ㆍ비ㆍ흥은 풍자(諷刺)한 것이고, 소아(小雅)ㆍ대아(大雅)는 바른말로 간한 것이다.
《서(書)》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매색(梅賾)의 《상서(尙書)》 25편은 위작(僞作)이다. 《사기(史記)》ㆍ《전한서(前漢書)》ㆍ《후한서(後漢書)》 및 《진서(晉書)》ㆍ《수서(隋書)》의 유림전(儒林傳)과 경적지(經籍志)를 상고해 보니 그것이 위작임이 현저하여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선기옥형(璇璣玉衡)이란 하늘을 형상한 의기(儀器)가 아니고, 우공(禹貢)의 3지적(底績)은 9년에 3번 고적(考績)한 것이고,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는 정전(井田)의 형태이므로 2와 8이 서로 응하고 4와 6이 서로 이어 받는다.
예(禮)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정현(鄭玄)의 주석은 전습(傳襲)의 오류가 없지 않건만, 선유(先儒)가 성경(聖經 성인의 경전)처럼 받드니 그것은 잘못이다.
상의광(喪儀匡)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질병(疾病)이란 목숨이 이미 끊어진 것이고, 남녀 개복(男女改服)이란 담소(淡素)한 의복(衣服)으로 고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천자ㆍ제후(諸侯)의 상(喪)에는 먼저 성복(成服)하고 뒤에 대렴(大斂)을 하며, 천자ㆍ제후ㆍ대부(大夫)ㆍ사(士)는 각기 말우(末虞)를 졸곡(卒哭)으로 삼으니 졸곡에는 따로 제(祭)가 없다. 부(祔)란 신도(神道)로써 합부(合祔)할 뿐이요, 주(主)에 합부하거나 묘(廟)에 합부하는 것은 아니다. 길제(吉祭)란 사시(四時)에 상례(常例)로 행하는 일이요, 소목(昭穆)을 심정하는 것은 아니다.
상구정(喪具訂)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모(冒)는 이금(夷衾)과 같고 자루[橐]에 넣는 것이 아니다. 악수(握手)는 둘이 아니고 가운데를 흰 댕기로 매어 둘이란 것을 상징한 것이다. 이미 엄수(掩首)가 있는 만큼 복건(幅巾)은 폐기해야 한다. 그러나 수첩(竪㡇 세로로 세운 옷깃 끝)은 불가하고 횡첩(橫㡇 가로로 뻗은 옷깃 끝)을 만들어야 한다. 심의(深衣)는 12폭인데 앞이 3폭이고 뒤가 4폭임은 다른 아래옷과 같이 하며, 그 3폭은 앞 옷깃에 겹치고 폭은 두 겨드랑 아래에 주름잡혀[袧] 들어간다. 구변(鉤邊)이란 곧 구변(袧邊)이다. 수장납거(遂匠納車)는 널을 싣는 것이다. 신거(蜃車)란 신회거(蜃灰車)로 네 바퀴가 땅에 닿는 것은 바른 제도가 아니다.
상복상(喪服商)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수질(首絰)을 맞잡아 맨 것이 마땅히 목 뒤에 있어야 한다. 만약 맺음이 좌우(左右)에 있으면 곧 왼쪽 머리[本]는 왼쪽 끝을 겸하고 오른쪽 머리는 오른쪽 끝을 겸한다. 요질(要絰)에 수갈(受葛)해야 세 가닥[三糾]이 있는 것이니 교대(絞帶)를 세 겹으로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상관(喪冠)에 무(武)가 있으니, 참(斬)에도 베 한 가닥 끈으로 무(武)를 삼는 것은 예가 아니다. 오복(五服)의 최(衰)는 모두 제복(祭服)을 본뜬 것이니, 최(衰)란 방심(方心)이고 적(適)이란 곡령(曲領)이고 부(負)란 후수(後綬)이다. 벽령(辟領)에 조각하는 것은 예제(禮制)가 아니고 경복(輕服)에 최(衰)ㆍ적(適)ㆍ부(負)를 버리는 것은 예가 아니다. 대하척(帶下尺)에 횡란(橫幱)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임(衽) 바로 옆에 연미(燕尾)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소렴(小斂) 때의 환질(環絰)은 곧 조복(弔服)의 갈질(葛絰)이다. 천자(天子)가 국군(國君) 이하를 조문할 때 모두 환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군(君)ㆍ대부(大夫)ㆍ사(士)가 동일하다고 한 것이다.
소렴에는 곧바로 규질(繆絰)을 착용한다. 질(絰)은 둘이 없는 것이다.
상기별(喪期別)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기년상(期年喪)에는 11개월 만에 연(練)을 하니, 조부모ㆍ백숙부모(伯叔父母)ㆍ형제ㆍ형제의 아들을 위하여도 모두 연(練)이 있어야 한다. 연(練)을 하지 않는 경우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어머니를 위해 연(練)을 하게 되면 그 복(服)이 도리어 가벼워져서이다. 남의 계자(繼子)가 된 자는 그 본생(本生)의 조부모나 백숙부모를 위하여 불강복대공(不降服大功)을 입고, 강복(降服)하는 경우는 형제로부터 그 이하이니, 마융(馬融)의 유의(遺義)이다. 남의 계자가 되는 자는 혹 아우가 형의 후사가 되기도 하고, 혹 손자가 조부의 후사가 되기도 하므로 명칭은 변하지 않고 자기 부모를 부모로 한다. 조부모를 위하여 승중(承重)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망이 소렴(小斂)ㆍ즉위(卽位)의 예(禮)를 치르기보다 앞서 있는 경우에는 승중(承重)하고, 소렴ㆍ즉위의 예를 치르기보다 뒤에 있는 경우에는 승중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조부가 살아있는데 조모가 죽은 자는 승중하지 않는다. 첩자(妾子)의 아들이 그 첩조모(妾祖母)를 위하여 승중하지 않는다. 천자ㆍ제후의 상에는 모후(母后)도 참죄(斬衰)를 한다. 소원(疎遠)한 자로서도 모두 참(斬)을 하니 친근한 자는 먼저 참(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례고정(祭禮考定)》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제후(諸侯)ㆍ나라의 대부(大夫)의 제사는 3세(世)를 넘을 수 없다. 태조(太祖)는 옮기지 않는 것이니, 별묘(別廟)에 옮길 수 없다. 지자(支子)는 제사를 받들지 않는 것이니. 최장방(最長房)이 신주를 옮겨 모시는 것은 예가 아니다. 대부는 제사를 두 차례 지낼 뿐, 사시(四時)에 거행할 수는 없다. 합호(闔戶)는 상제(殤祭)의 예이니 이미 유식(侑食)하고 삼헌(三獻)을 하였으니 또 합호(闔戶)해서는 안 된다.
태뢰(太牢)ㆍ소뢰(小牢)ㆍ특생(特牲)ㆍ특돈(特豚)에는 그 변두궤형(籩豆簋鉶)의 수효는 각각 정례(定例)가 있으니, 삼례(三禮 《예기(禮記)》ㆍ《주례(周禮)》ㆍ《의례 (儀禮)》)와 《춘추(春秋)》에 간혹 보인다. 군(君)ㆍ대부ㆍ사(士)가 각기 차등이 있으니 마음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 또 술잔[爵]과 국그릇[鉶]ㆍ조[俎]는 기수(奇數)를 사용하고 궤(簋)와 변두(籩豆)는 우수(偶數)를 사용하니,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악(樂)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오성(五聲)과 육률(六律)은 곧 한가지 물건이 아니다. 육률로 악기를 제작하니 악가(樂家)의 선천(先天)이고 오성으로 가락을 나누니 악가의 후천(後天)이다. 추연(鄒衍)ㆍ여불위(呂不韋)ㆍ유안(劉安) 등의 ‘율을 불어 소리를 정한다.[吹律定聲]’는 사설(邪說)을 분변하였다.삼분 손익(三分損益)ㆍ취처생자(娶妻生子)의 설과 괘기 월기(卦氣月氣)ㆍ정반 변반(正半變半)의 설은 모두 취하지 않는 바이다. 육률을 각각 3등분하여 1분을 빼어 육려(六呂)를 낳는 것은 영주 구(怜州鳩)의 대균(大均)ㆍ세균(細均), 3기(三紀)ㆍ6평(六平)의 유의(遺意)를 따른 것이다.
《역(易)》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역(易)에 세 가지 오의(奧義)가 있으니, 첫째 추이(推移), 둘째 효변(爻變), 셋째 호체(互體)이다. 12벽괘(辟卦)로써 사시(四時)를 상징하고 중부괘(中孚卦
)와 소과괘(小過卦
)로써 두 윤월(閏月)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추이(推移)하여 50연괘(衍卦)를 만드니 이것을 추이라 한다.
건괘(乾卦
) 초구(初九)란 건괘가 구괘(姤卦
)로 변[之]한 것이다. 손괘(巽卦
)는 입(入)과 복(伏)이 되기 때문에
잠룡(潛龍)
이라 한 것이다. 건괘(乾卦) 구사(九四)란 건괘가 소축괘(小畜卦
)로 변한 것이다.
손(巽)이 다리[股]가 되니, 아래에서 위로 오르므로 혹약(或躍)이라 한 것이다.
곤괘(坤卦) 초륙(初六)이란 곤괘가 복괘(復卦)로 변한 것이다. 1음(陰)이 비로소 교합(交合)하여 장차 순건(純乾)이 되고, 건(乾)은 괘상이 얼음이 되므로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履箱堅氷至]’ 한 것이니, 이것을 효변(爻變)이라 한다.
태괘(泰卦)의 두 호괘(互卦)가 곧 귀매괘(歸妹卦)가 된다. 4효(爻)가 동하면 또 임괘(臨卦)가 되므로 ‘펄펄 날아서 자기가 부유하지 아니함은 다 부자인 실지를 잃었기 때문이다.[翩翩不當皆失實也]’ 한 것이다. 비괘(否卦)의 두 호괘(互卦)가 곧 점괘(漸卦)가 된다. 5효(爻)가 동하면 또 중간(重艮)이 되므로 ‘망할까 망할까 두려워하여야 뽕나무에 맨다.[其亡其亡繫于桑也]’한 것이다. 물(物)을 잡(雜)함과 덕(德)을 찬(撰)함이 모두 호상(互象)에서 취하였으니, 이것을 호체(互體)라 한다.
세 가지 오의(奧義)가 갖추어져 물상(物像)이 묘합(妙合)하고, 세 가지 오의가 갖추어져 승강(升降)ㆍ왕래ㆍ소장(消長)ㆍ기멸(起滅) 등 오만 변화가 그 안에 붙여 있는 동시에 성인의 정(情)이 사(辭)에 나타난다. 팔(八)을 팔(八)로 곱[乘]하는 것은 목강(木强 변통수 없음을 말함)의 사법(死法)이다.
시괘(蓍卦)의 수는 하늘에서 천수(天數 홀수)를 취하고 땅에서 지수(地數 짝수)를 취하였다. 천수(天數) 1(3)에 지수(地數) 2(2×2=4)이면 소양(少陽) 칠(七)이 되고, 지수(地數) 1(2)에 천수 (天數)2(3×2=6)이면 소음(少陰) 팔(八)이 된다. 그리고 천수(天數)가 3(3×3=9)이면 노양(老陽) 구(九)가 되고, 지수(地數) 3(3×2=6)이면 노음(老陰) 육(六)이 된다. 노양(老陽)ㆍ노음(老陰)은 변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구(九)와 육(六)을 효(爻)라 한다. 6획(畫)은 효가 아니고 6획의 동(動)이 효가 된다.
역괘(易卦)에 있어서 반대(反對)되는 경우란 역(易)의 차례이다. 그 반대가 없는 것은 또 도체(倒體)에서 취하였으므로 대과괘(大過卦)는 전도(顚倒)되었다고 하고 전도하여 기르나 길하다[顚頭吉也] 하였고, 감괘(坎卦)의 육삼효(六三爻)가 손괘(巽卦)의 들어옴[入]이 되고,이괘(離卦)의 초구효(初九爻)가 진괘(震卦)의 도체(倒體)가 된다는 것이다.
역(易)에는 역수(逆數)가 있고 본디 순수(順數)는 없다. 선천도(先天圖)의 괘위(卦位)는 이치에 합하지 않으니, 주자(朱子)가 ‘왕자합(王子合 자합은 우(遇)의 자(字))에게 답한 편지’에 드러내 밝힌 바가 있다.
《춘추》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제후(諸侯)가 주왕(周王)의 정월(正月)을 받든 것은 예(禮)이다. 비록 주(周) 나라가 쇠퇴하였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주왕의 정월을 써야 한다. 그리고 당시의 열국(列國)이 하(夏) 나라 역법(曆法)을 혼용하였으므로 ‘여름에 온(溫)의 보리를 취하고 가을에 성주(成周)의 벼를 취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왕정월(王正月)’이라고 써서 자월(子月)이 됨을 밝힌 것이다.
한 글자의 포장[褒]이 혹 선은 같으나 용례(用例)가 다르고 한 글자의 폄출[貶]이 혹 악은 다르나 용례는 같았다. 하오(夏五)의 유는 사서(史書)의 궐문(闕文)을 따른 것이니 선유(先儒)처럼 곡해할 필요가 없다. 좌씨(左氏)의 책서(策書 사책(史策)의 단행본임)는 춘추의 전(傳)이 아니니. 그 경의(經義)를 해석 한 것은 한유(漢儒)가 몰래 증보한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을 폐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제(郊祭)는 상제(上帝)를 제사하는 것이니 오방(五方)의 상제(上帝)를 제사하는 것은 한유(漢儒)가 진(秦) 나라 사람의 오류를 답습한 것이다. 체(禘)란 오제(五帝)의 제사이니, 《주례(周禮)》에 체(禘)라 말하지 않았는데 ‘오제(五帝)를 제사한다.[祭五帝]’ 한 것이 체(禘)이다. 그러므로 관사보(觀射父)가 매양 체(禘)ㆍ교(郊)에 관한 일로써 연달아 말한 것이다. 동지(冬至)에 원구(圜丘)에 지내는 제사는 별도로 회례(禬禮)이고 곧 교외(郊外)에서 하늘을 제사하는 제례가 아니다. 춘추 시대에는 상기(喪期)가 변하지 않았는데, 두예(杜預)가 양암(諒闇)의 뜻을 세워 단상(短喪)의 잘못을 문식(文飾)하였으니 따를 수 없다.
《논어(論語)》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의(異義)가 더욱 많다. 이를테면 효제(孝弟)는 바로 인(仁)이니, 인(仁)이란 총명(總名)이고 효제는 분목(分目)이다. 인(仁)은 효제로부터 비롯되므로, 인(仁)의 근본이 된다고 한 것이다. 북극성(北極星)이 제자리에 있음으로써 남극(南極)을 바로 하니 인주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상징이다. 한 마음이 바름으로써 백관과 만민이 함께 운화(運化)되니 이른바 ‘모든 별이 함께 돈다.’는 것이다. 공(拱)을 ‘향하다'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없는 말이다. '털이 붉고 뿔이 났다.[騂且角]’ 한 것은 소의 천품(賤品)이다. 소는 유생(黝牲)을 귀히 여기고 견율(繭栗)을 귀히 여기고 악척(握尺)을 귀히 여긴다. 이를테면, 붉고 뿔이 난 것은 산천(山川)의 제사에 돌릴 뿐이다. 중궁(仲弓)의 어짊이 백우(伯牛)만 못하므로 폄하(貶下)하지만 그대로 존속시킨 것이다.
곡삭(告朔)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곡삭(告朔), 둘째 제삭(祭朔), 셋째 시삭(視朔)이다. 네 번 시삭(視朔)하지 않았으나, 제사는 거른 적이 없는 것이다. 네 번 시삭하지 않았는데 그를 몰라서 ‘백년 동안 시삭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치에 당치 않다. 사당[廟]에 제사하는 희생(犧牲)을 희(餼)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희(餼)란 빈희(賓餼 손님에게 대접하는 고기 등을 말함)이다. 주실(周室)이 쇠미해져서 왕인(王人)이 제후(諸侯)에게 곡삭(告朔)을 다시 반포하지 못하였으므로 자공(子貢)이 그 희양(餼羊)을 없애 버리려 한 것이다.
동주(東周)란 동로(東魯)의 은어(隱語)이다.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계씨(季氏)를 배반하여 공실(公室)을 유지하려 하였으므로, 공자(孔子)가 공실(公室)을 옮기고 비읍(費邑)에 웅거하여 동로(東魯)로 삼기를 동주(東周)처럼 하려 한 것이다.
승당(升堂)이란 당산악(堂山樂)이니 아송(雅頌)이 그것이요, 입실(入室)이란 방중악(房中樂)이니 이남(二南)이 그것이다. 자로(子路)의 슬(瑟)은 아송(雅頌)은 잘하나 이남(二南)은 잘하지 못하므로 부자(夫子 공자를 말함)가 비유한 것이다.
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나본 것은 괴외(蒯聵)를 불러와서 모자(母子)의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도록 권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대부(大夫)가 소군(小君 제후(諸侯)의 부인)을 만나보는 일은 당시의 항례(恒禮)였다.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란 성품(性品)의 명칭이 아니다. 선(善)을 지키는 사람은 비록 악한 사람과 서로 가까이 지내도 습관이 변해지지 않으므로 상지(上智)라고 이름한 것이고, 악(惡)을 편안히 여기는 사람은 비록 선한 사람과 서로 가까이 지내도 습관이 변해지지 않으므로 하우(下愚)라 이름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성이 원래 변하지 않는 품등(品等)이 있다고 한다면, 주공(周公)이,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고 한 것은, 성(性)을 모르고 한 말이 되는 것이다.
영 무자(甯武子)가 처음에 위 성공(衛成公)을 따라 몸이 젖고 발이 부르트도록 갖은 험난을 겪었으니, 이것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직한 충성이요, 성공(成公)이 초(楚)에서 환국(還國)하여 공달(孔達)이 정치를 하게 되어서는 권요(權要)의 자리를 피하였으니, 이것은 자신을 편안히 하고 집을 보전하는 지혜이다. 자신을 편안히 하는 지혜는 오히려 따를 수 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직함은 따를 수 없다. 지금 도회(韜晦 재지나 학식을 감추는 것)하는 것으로써 어리석음으로 여긴다면 인주(人主)가 시대의 어려움을 함께 구제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맹자(孟子)》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천자(天子)의 신하가 천승(千乘)을 소유할 수 있다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이 각각 천승을 얻으니 남는 바는 천승뿐이다. 천자가 구신(九臣 삼공(三公)ㆍ육경(六卿))과 각각 천승을 얻으면 10경(卿)의 녹봉(祿俸)이 아닌 소재(小宰)ㆍ소사도(小司徒) 이하는 또 조그마한 녹봉도 받을 수 없다. 만승(萬乘)이란 진(晉)ㆍ제(齊) 등속이고 한(韓)ㆍ위(魏)ㆍ조(趙)ㆍ전씨(田氏 전화(田和)가 세운 제(齊)) 등은 곧 천승의 집[家]으로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이니, 맹자가 본디 연(燕)과 제(齊)를 만승의 나라로 여긴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정치로써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바로 흉년에 진구(賑救)하는 유이고 한 고조(漢高祖)와 송 태조(宋太祖)처럼 도륙(屠戮)을 즐겨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이른 것은 아니다.
하후씨(夏后氏)는 50묘(畝)를 경작하고 은(殷)나라 사람은 70묘(畝)를 경작하였다는 것은, 도랑을 메우고 밭두둑을 헐어 정전(井田)을 고쳐 만든 것은 아니다.
이 기(氣)는 의(義)와 도(道)를 짝하니 의와 도가 없으면 기가 쭈그러든다고 한 것은, 여자약(呂子約)과 이숙헌(李叔獻)의 유의(遺義)이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이다. 형체의 기호가 있고 영지(靈智)의 기호가 있으니, 다같이 성(性)이라 한다. 그러므로 《서경(書經)》 소고(召誥)에 ‘성을 절제하라.’하였고, 《예기(禮記)》왕제(王制)에 ‘백성의 성을 절제케 한다.’ 하였고, 《맹자(孟子)》에는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을 참는다.[動心忍性]’고 하였고, 또 이목(耳目)과 구체(口體)의 기욕(嗜欲)을 성(性)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형체의 기호이다. 하늘이 부여한 것이 성(性)이라는 성(性)과 천도(天道)ㆍ성선(性善)ㆍ진성(盡性)의 성(性)은 곧 영지(靈知)의 기호이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원래 불서(佛書)에서 나와서 우리 유가(儒家)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 서로 빙탄(氷炭)의 처지이니,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서(恕)를 힘쓰고 인(仁)을 구하라는 경계이다. 자식의 도리, 아비의 도리, 형ㆍ아우ㆍ남편ㆍ아내ㆍ손ㆍ주인의 도리로 경례(經禮) 3백 가지와 곡례(曲禮) 3천 가지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니 자신에 돌이켜 성실하면 곧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와서 천하가 다 인(仁)으로 돌아오는 것이요, 만물(萬物)은 일체이고 만법(萬法)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맹자(孟子)가 성(性)을 논함에 있어 이목(耳目)과 구체(口體)에까지 아울러 논급하였으니, 이(理)는 논하고 기(氣)는 논하지 않은 병통은 없다. 왕망(王莽)과 조조(曹操)는 기질(氣質)이 대체로 청(淸)하고, 주발(周勃)과 석분(石奮)은 기질이 대체로 탁(濁)하다. 선악(善惡)은 힘써 행하는 데에 달려 있지 기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용(中庸)》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순(舜) 임금이 명하여 악(樂)을 맡겨서 주자(冑子)를 가르치되 곧되 온화하며 너그럽되 씩씩하며 강하되 포악하지 말며 간이하되 거만하지 말라고 한 것과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 국자(國子)를 가르치되 그들로 하여금 중화(中和)하고 지용(祗庸)하게 한 것이 곧 유법(遺法)이고, 고요(皐陶)가 구덕(九德)으로 사람을 쓴 것과 주공(周公)이 입정(立政)에서 구덕의 행실을 충실히 행할 줄 알았다고 한 것이 곧 그 유법(遺法)이며, 《서경》 홍범(洪範)에 ‘높고 밝은 이는 유(柔)로 다스리고, 깊고 잠긴 이는 강(剛)으로 다스린다.[高明柔克 沈潛剛克]’는 것은 모두 중화(中和)의 뜻이고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允執厥中]’한 것은 오히려 대강(大綱)을 말한 것이다.
용(庸)이란 항구히 끊어지지 않는 덕이다. '도(道)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용(庸)이고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은 지가 오래다.’는 것은 용이고 ‘한 달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은 용이고 ‘나라에 도가 행해져도 궁색(窮塞)했던 때의 마음가짐을 변치 않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죽어도 지조를 변치 않는다.’는 것은 용이고 ‘군자(君子)가 도에 좇아 행하다가 중도에서 폐하고 말기도 하는데 나는 하다 말 수는 없다.’ 한 것은 용이고 ‘평상(平常)의 덕을 행하고 평상의 말을 삼간다.’는 것은 용이고 ‘지극한 정성은 그침이 없다. 그치지 않으면 영구하다.’ 한 것은 용이고 ‘문왕(文王)의 순일(純一)함도 또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용이며 '회(回)는 그 마음이 석 달을 두고 인(仁)을 어기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하루 아니면 한 달 동안 인(仁)에 있을 뿐이다.’한 것은 용이고 '제대로 종일토록 제(帝 하늘)의 열어 줌을 힘쓰지 아니한다.’고 한 것은 용이다. 곧 고요(鼻陶) 구덕(九德)의 조목에서 ‘그 유상(有常)을 빛내소서.’라고 끝맺음하였고, 《서경(書經)》 입정(入政)의 구덕(九德)의 경계에 거듭 말하기를, ‘오직 상덕(常德)으로 하라.’ 하였고, 《역경(易經)》항괘(恒卦)에 ‘능히 중(中)에 오래한다.’ 하였는데 모두 중용(中庸)의 의(義)이다. 중(中)을 하되 능히 용(庸)을 하면 성인일 따름이다.
보지 못한다[不睹]는 것은 곧 내가 보지 못하는 바이고 듣지 못한다[不聞]는 것은 곧 내가 듣지 못하는 바이니, 하늘의 일이다. 은(隱)이란 하늘의 체(體)이고 미(微)란 하늘의 자취[跡]이다. 은암(隱暗)하되 은암한 곳보다 더 드러나는 곳은 없고, 미세하되 미세한 일보다 더 뚜렷해지는 일은 없으므로 두려워하고 삼간다. 하늘이 앎이 없다고 여기므로 거리낌이 없이 행동한다.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발(發)하지 않았다.’는 말은 평거(平居)의 항경(恒境)이고 심지(心知)와 사려(思慮)가 발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그물ㆍ덫ㆍ함정[罟獲陷阱]’이란 유사(有司)에게서 받는 형벌의 화가 아니다. 소은(素隱)이란, 까닭없이 은거(隱居)함을 말함이고, 백이(伯夷)나 태백(泰伯)처럼 인륜(人倫)의 변고를 만난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고치면 그친다.[改而止]’란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보되, 길면 고치고 짧으면 고치고 크면 고치고 작으면 고치어, 예전 도끼자루와 같아진 뒤에 그만두는 것이다. 사람의 강서(强恕)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사람으로서 허물을 고치게 함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다.
도심(道心)ㆍ인심(人心)은 《도경(道經)》에서 나왔고 유일(唯一)ㆍ유정(唯精)은 《순자(荀子)》에서 나왔으니, 의가 서로 연결될 수 없다. 도(道)와 인(人)의 사이에 그 중(中)을 잡을 수 없다. 전일하고 나서 정밀한 것이고 양쪽을 잡아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大學)》은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태학(太學)이란 주자(冑子)와 국자(國子)의 학궁(學宮)이다. 주자(冑子)와 국자(國子)는 아랫사람을 대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이 있으므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하는 방책을 가르친 것이고, 서민(庶民)의 자제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명덕(明德)이란 효(孝)ㆍ제(弟)ㆍ자(慈)이고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이란 근본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이 있는 사물(事物)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란 그 먼저하고 나중할 바를 아는 앎을 투철히 하는 것이다. 성(誠)이란 사물의 마침과 비롯함을 말함이니 뜻을 성실하게 함[誠意]이 나아가서 위에 있게 된 까닭이다. 정심(正心)이란 곧 몸을 닦음이다. 몸에 노여워하는 바를 둔다.[身有所忿懥]는 글의 몸이니 고칠 수 없다.
'늙은이를 늙은이로 여긴다.[老老]’는 것은 태학에서 천자가 늙은이를 봉양하는 것이고 ‘어른을 어른으로 여긴다.[長長]’는 것은 태학에서 세자(世子)가 어른에게 공경하는 것이고, ‘고자(孤子)를 불쌍히 여긴다.[恤孤]’는 것은 태학에서 고자를 잔치하는 것이다. 백성은 나면서 욕심이 있으니 부(富)와 귀(貴)다. 군자는 조정에 있으면서 귀히 되기를 목표하고, 소인은 초야에 있으면서 부자되기를 목표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씀에 있어 공정하지 아니하여, 어진이를 어진이로 여기고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지 않으면 군자가 떠나가며, 재부(財賦)를 거두어들임에 있어 절도없이 하여 백성의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삼고 백성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으면 소인이 배반하는 동시에 나라도 따라서 망한다. 그러므로 편말(篇末)에 거듭 되풀이하여 이 두 가지의 일을 경계한 것이다.
선왕(先王)의 도(道)를 배우는 소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마음의 허령(虛靈)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 감히 본연(本然)이라 하지 못하고 ‘비롯함이 없다.[無始]’라고 하지 못하고 순선(純善)이라 하지 못한다. 마음의 기관은 생각[思]이니, 발(發)하지 아니한 그 이전의 기상을 돌이켜 보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선(善)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것은 재질(才質)이고, 선해지기는 어렵고 악해지기는 쉬운 것은 형세이고, 선을 즐기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성(性)이다. 이 성(性)을 따라서 어김이 없으면 도를 향해 갈 수 있으므로 성선(性善)이라 한 것이다.
두 사람[二人]이 인(仁)이 된다.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는 것이 인(仁)이고 형을 공손으로 섬기는 것이 인이고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 인이고 벗과 신의로 사귀는 것이 인이고 백성을 자(慈)로 다스리는 것이 인이며, 동방(東方)이 물(物)을 낳는 이치와 천지(天地)의 지공(至公)한 마음은 인(仁)이라고 주해(註解)할 수 없다. 서(恕)를 힘써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데에 그보다 가까운 길은 없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도(道)를 배움에는 일관(一貫)으로 답하였고,자공(子貢)이 도(道)를 물음에는 일언(一言)으로 답하였다. 경례(經禮) 3백과 곡례(曲禮) 3천이 서(恕)로써 일관된다. 인(仁)을 함이 자기에게서 비롯되나니,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오는 것이 곧 공문(孔門)의 바른 뜻이다. 성(誠)이란 서(恕)를 성실히 행하는 것이고 경(敬)이란 예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인을 하는 것은 성(誠)과 경(敬)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삼가서 상제(上帝)를 밝게 섬기면 인(仁)을 할 수 있거니와 태극(太極)을 헛되이 높여서 이(理)를 하늘로 삼으면 인을 할 수 없고 하늘만 섬기는 데에 돌아가고 말 뿐이다.
처음에 용(鏞)이, 역(易)을 익히고 예(禮)를 연구하여 모든 경서(經書)에까지 미쳤는데, 한 가지를 깨달을 적마다 마치 신명(神明)이 말없이 깨우쳐 줌이 있는 것과 같아서 남에게 고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형 전(銓)이 흑산도(黑山島)에서 귀향살이하고 있었다. 한 편(編)이 이루어질 적마다 보이면, 형은 보고 말하였다.
“네가 이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너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이다. 아, 도(道)가 천년 동안 없어져서 온갖 부(蔀)로 가려져 있으니, 헤쳐내고 끓어내어 그 가려진 것을 환하게 하는 것이 어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랴.”
《시경(詩經)》 판장(板章)에,
“하늘이 백성을 깨우침이 훈(壎)과 지(篪)가 어울리듯 하네.”
하였으니, 성(性)이 기호(嗜好)임을 알겠고 인(仁)이 효제(孝弟)임을 알겠고 서(恕)가 인(仁)의 방도임을 알겠고 하늘이 강림(降臨)하여 살핀다는 것을 알겠다. 경계하고 공경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서 몸이 늙어지는 것도 모르는 것이 하늘이 용(鏞)에게 내려준 복이 아니겠는가?
또 내가 지은 시율(詩律) 18권이 있는데 산정(刪定)하면 6권은 될 수 있고, 잡문(雜文)으로 전편(前編)이 36권이고 후편(後編)이 24권이며, 또 잡찬(雜纂)이 있는데 문목(門目)이 각각 다르다.
《경세유표(經世遺表)》가 48권이니 편찬의 일을 마치지 못하였고, 《목민심서(牧民心書)》가 48권이고 《흠흠신서(欽欽新書)》가 30권이다.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는 30권인데 완성되지 못하였고,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10권, 《전례고(典禮考)》 2권, 《대동수경(大東水經)》 2권, 《소학주관(小學珠串)》 3권,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의령(醫零)》 1권이다. 이를 통틀어 문집(文集)이라 하니, 모두 2백 60여권이다.
경세(經世)란 무엇인가? 관제(官制)ㆍ군현지제(郡縣之制)ㆍ전제(田制)ㆍ부역(賦役)ㆍ공시(貢市)ㆍ창저(倉儲)ㆍ군제(軍制)ㆍ과제(科制)ㆍ해세(海稅)ㆍ상세(商稅)ㆍ마정(馬政)ㆍ선법(船法)ㆍ영국지제(營國之制 도성을 경영하는 제도) 등을 시용(時用)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베풀어 우리의 오랜 나라를 새롭게 하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목민(牧民)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법을 인하여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율기(律己)ㆍ봉공(奉公)ㆍ애민(愛民)을 기(紀)로 삼고, 이전(吏典)ㆍ호전(戶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형전(刑典)ㆍ공전(工典)을 6전(典)으로 삼고, 진황(振荒) 1목(目)으로 끝맺음하였다. 편(篇)마다 각각 6조씩을 통섭(統攝)하되 고금(古今)을 조사하여 망라하고, 간위(奸僞)를 파헤쳐 내어 목민관(牧民官)에게 주니, 한 백성이라도 그 은택을 입는 자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용(鏞)의 마음이다.
흠흠(欽欽)이란 무엇인가? 인명(人命)에 관한 옥사는 잘 다스리는 자가 적은 것 같다. 경사(經史)로써 근본을 삼고 비의(批議)로써 보좌를 삼으며 공안(公案)을 증거로 삼되 다 상정(商訂 헤아려 평함)하여 옥관(獄官)에게 주어서 원왕(冤枉)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용의 뜻이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써 자기 몸을 닦고 1표(表)와 2서(書)로써 천하ㆍ국가를 다스리니, 본말(本末)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는 적고 나무라는 이는 많으니, 만약 천명(天命)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비록 한 횃불로 태워버려도 좋다.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니, 아버지는 덕렬(德烈), 조부는 두서(斗緖), 증조부(曾祖父)는 이석(爾錫)인데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이다. 아내는 풍산 홍씨(豊山洪氏)이다. 아버지는 화보(花輔)이니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경북 절도사(慶北節度使)이고, 조부는 중후(重厚)이ወ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이며, 증조부는 만기(萬紀)이니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이다.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요사(夭死)한 자가 3분의 2이다. 아들로 맏이 학연(學淵)이요, 다음은 학유(學游)이며,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학연의 아들은 대림(大林)이다.
용(鏞)은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임오년(1762, 영조 38)에 태어나서 지금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임오년(1822, 순조 22)을 만났으니, 한 갑자(甲子) 60년은 모두 죄와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지난날을 거두어서 정리하고 일생을 다시 시작하니, 금년부터 정밀히 닦고 실천하며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드디어 집 뒤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광(壙)의 형태를 그어놓고 그 평생의 언행(言行)을 대략 기록하여 광중(壙中)의 지문(誌文)으로 삼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네가 네 선행(善行) 기록하되 / 爾紀爾善
연편 누독(連篇累牘) 장황하니 / 至於累牘
네 숨은 사특(邪慝) 기록하면 / 紀爾隱慝
책에 다 적을 수 없으리 / 將無罄竹
너는 말하기를, 나는 / 爾曰予知
사서(四書)ㆍ육경(六經)을 안다 하지만 / 書四經六
그 행실 상고하면 / 考厥攸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 能不傀忸
너는 명예 구하나 / 爾則延譽
찬양은 없도다 / 而罔贊揚
몸으로 증명하여 / 盍以身證
나타내고 빛내지 아니하랴 / 以顯以章
네 분운함을 거둬들이고 / 斂爾紛紜
네 창광함을 중지하라 / 戢爾猖狂
힘써 상제(上帝)를 밝게 섬겨야 / 俛焉昭事
마침내 경사 있으리라 / 乃終有慶
보유(補遺)
경술년(1790, 정조 14) 겨울 명을 받아 밤에 상의원(尙衣院)에 있으면서 《논어(論語)》를 읽고 있는데, 홀연히 규장각(奎章閣)의 서리가 와서 소매 속에서 종이 하나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내일 강장(講章)입니다.”
한다. 내가 깜짝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강원(講員)으로서 엿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니, 서리는,
“걱정할 거 없습니다. 이것은 주상의 분부이십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더라도 감히 엿볼 수 없다. 마땅히 전편(全篇)을 읽으리라.”
하였더니, 서리가 웃으며 가버렸다. 그 이튿날 경연에 나아가니, 주상이 각신(閣臣)에게 이르기를,
“정모(丁某 정약용을 가리킴)는 모름지기 다른 장(章)을 별도로 명하라.”
하였다. 강을 하게 되어서 틀리지 아니하니, 주상은 웃으며 말하였다.
“과연 전편을 읽었구나.”
그 뒤 며칠 지나서 밤중에 눈바람이 몰아치고 매우 추웠는데, 대내(大內)에서 독서(讀書)하는 제신(諸臣)에게 음식을 내렸다. 용이 상의원에서 내각(內閣)으로 나아가는데, 밤이 칠흑 같아서 담에 부딪쳐 얼굴을 다쳤다. 그 이튿날 춘당대(春塘臺)에 입시(入侍)하였더니, 얼굴에 납지(蠟紙)를 붙인 것을 주상이 보고 말하기를,
“납지는 왜 붙였는가? 어젯밤에 술을 과음하여 취해 넘어진 것이나 아닌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감히 과음한 것이 아니오라, 밤이 칠흑 같아서입니다.”
하였더니, 주상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취학사(醉學士)가 있었고 또한 전학사(顚學士)가 있었으니 만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도리어 전학사(顚學士)가 아니겠는가?”
계축년(1793, 정조 17) 무렵, 대정(大政) 며칠 전에 주상이 채공(蔡公)에게 밀유(密諭)를 내려 ‘남인(南人) 중에 대통(臺通)에 급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묻고, 아울러 이 가환(李家煥)ㆍ이익운(李益運)ㆍ정용(丁鏞) 등에게까지 각기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였다. 채공과 이가환ㆍ이익운이 모두, 권심언(權心彦)이 가장 급하다고 아뢰었다. 대체로 1백여 년 이래로 남인이 오래도록 기색(枳塞 사정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함)을 당하여 한 차례의 대통(臺通) 때마다 1인에 불과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용(鏞)은 28인을 소록(疏錄)하고 그 세벌(世閥)ㆍ과명(科名) 및 문학(文學)ㆍ정사(政事)의 우열을 자세히 적어 올리며,
“이 28인은 시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누구를 먼저하고 누구를 뒤로 하느냐는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감히 간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며칠 뒤 대정(大政)하는데, 특별히 전관(銓官) 이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에게 유시하여 무릇 소록(疏錄)에 들어간 사람이 8인이 통과하게 되었다. 며칠 뒤에 또다시 통과되어 수년 사이에 거의 다 시행되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 3월에 주상이 용산(龍山) 읍청루(挹淸樓)에 거둥하여 왕손(王孫) 인(䄄)을 심도(沁都 강화의 옛 이름)에서 불러 풍악을 잡히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금군(禁軍)이 철벽처럼 그 북문(北門)을 지키니 대신ㆍ근신(近臣)이 모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잔치가 파하자 특별히 읍청루 위에서 용을 불러 우부승지에 제수하고, 환궁(還宮)하고 나서는 밤중에 용을 불러 어전에 이르게 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머리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니 쟁그랑거리며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보니 상방검(尙方劍)이었다. 하유(下諭)하기를,
“이가환과 이익운 등이 속습(俗習)으로 심적(沁謫)을 토죄(討罪)하니 상소하여 자수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상방검으로 두 사람의 목을 베리라.”
하였다. 용이 생각하기에 주상의 하유가 지당하므로 거역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물러나서 재촉하여 상소하게 하였더니, 그 일이 중지되었다.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용이 바야흐로 살아서 돌아오니 목태석(睦台錫)의 상소가 매우 혹독하였다. 용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 할아버지가 당시에 나를 논함에 있어서도 ‘그만한 지처(地處)와 그만한 문화(文華)로 무슨 벼슬인들 하지 못하랴만, 들어와서는 군부(君父)에게 딱 잘라 말하고 나가서는 예전대로 따라다니며, 스스로 서교(西敎)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네가 지금 어찌 이렇게까지 독설을 퍼붓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집안의 계략이다.”
얼마 뒤에 영남(嶺南) 사람 신석림(辛碩林)이 소를 올려 목태석을 공격하였으니 이태순(李泰淳)을 위해 변론한 것이다.
용(鏞)이 《주례(周禮)》에 익숙하여 새로운 뜻을 많이 세웠다. 육향(六鄕)의 제도를 논함에 있어서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육향(六鄕)은 왕성(王城) 안에 있다. 장인(匠人)이 국성(國城)을 경영함에 있어 9개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왕궁(王宮)은 중앙에 위치하고 앞에는 조정의 관서가 있고 뒤에는 시전(市廛)이 있으며, 좌우에 육향이 둘씩 서로 향하고 있다. 향(鄕)이란 향[嚮]한다는 뜻이다. 하관(夏官) 양인(量人)이 무릇 도비(都鄙 도성과 시골)를 구획함에 있어 모두 구주(九州)로 만들었다. 기자(箕子)가 평양성(平壤城)을 만들 적에 성중에 정형(井形)을 그어 만든 것이 모두 이 법이다. 정현(鄭玄)이 육향을 교외(郊外)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향삼물(鄕三物)로 만민(萬民)을 가르쳤다는 말은 모두 시행될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승지 신작(申綽)이 오히려 정현(鄭玄)의 해의(解義)를 고수하므로 용이 서너 차례 왕복하며 논란하여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밝혔다.
직각(直閣) 김매순(金邁淳)이 용의 《상서평(尙書平)》을 보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은미(隱微)한 것을 밝히 알고 유암(幽暗)한 것을 꿰뚫음은 비위(飛衛)가 이[蝨]를 보는 것과 같고,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굳은 것을 쪼개는 것은 포정(庖丁)이 소를 잡는 것과 같고, 독수(毒手)로 간위(奸僞)를 처형함은 상군(商君)이 위수(渭水)에 임한 것과 같고, 혈성(血誠)으로 정도(正道)를 보위한 것은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운 것과 같다. 한편으로는 어지러움을 정리한 공벽(孔壁)의 원훈(元勳)이 되고 한편으로는 업신여김을 막는 주문(朱門)의 직신(直臣)이 되었다. 유림(儒林)의 대업(大業)이 크게 떨치지 못한 지 오래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적적한 천년 이후 거칠은 구이(九夷) 가운데에 이처럼 뛰어난 기사(奇事)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