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
歲寒圖(세한도)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 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瘀血(어혈)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클어진 삶을 쓸어올리며 나는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血竹(혈죽)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을까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江(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鶴笛(학적)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 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 가는 것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992년신춘문예당선시집, 문학세계사, 1992)
*세한도: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제주에서 제작된 이후 176년 동안 여러 주인을 거쳤습니다. 동아시아 삼국을 오간 〈세한도〉의 여정이 고스란히 남아 현재 긴 두루마리로 전합니다. 2020년 손창근(孫昌根, 1926~ ) 선생의 숭고한 결단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세한도〉가 되었습니다...
〈세한도〉 두루마리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10년대 초 〈세한도〉 소장자였던 김준학(金準學, 1859~1914)이 오랫동안 앓다가 쾌차한 것을 기념하여 1914년에 쓴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와 시가 함께 적혀 있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가 1844년에 제작된 김정희의 〈세한도〉입니다. 세 번째는 중국 청나라 문인 16인이 1845년에 〈세한도〉를 보고 쓴 글 16편과 김준학이 1914년에 추가한 글 2편이 4개의 종이에 쓰인 부분입니다. 네 번째 부분이 753.7cm로 가장 긴데, 한국 근대 지식인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가 1949년에 쓴 3편의 글과 함께 비어 있는 부분이 거의 5m에 이릅니다...
〈세한도〉가 제작된 배경은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와 관련이 깊습니다. 김정희는 반대 세력인 안동 김문의 모함으로 55세 때 억울하게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절해고도(絶海孤島) 위리안치(圍籬安置)였습니다... 언제 유배가 풀릴지 기한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김정희를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죄인 김정희를 변함없이 대하는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어 통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었습니다.
이상적은 중국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책을 제주의 김정희에게 줄곧 보내주었습니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를 공자님 말씀을 담은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유명한 구절에 빗대어 칭찬하고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 둥근 문이 있는 허름한 집 좌우로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세워놓았습니다. 쉽게 쓱 그린 그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줄기와 잎을 표현한 메마르면서 촘촘한 필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물기 없는 마른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칼칼하게 표현했습니다. 언뜻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마른 붓을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김정희는 메마르고 황량한 세한, 가장 추운 겨울날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필법을 찾아낸 것이지요...
...
이상적은 일곱 번째로 떠나는 중국 출장길에 〈세한도〉를 소중히 챙겨갔습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청나라 문인 장요손(張曜孫, 1807~1863)이 주최한 모임에서 〈세한도〉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했거나, 이후 그 그림을 본 청나라 문인 16명이 감상 글을 적었습니다.
청 문인들은 〈세한도〉에 담긴 ‘군자가 송백과 같은 절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장악진(張岳鎭)은 “세한 전 송백의 절조를 먼저 배워야 한다. 오직 그 절조가 항상 있기 때문에 사철 내내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그 절조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도 송백은 태연자약하다.”라며 평소 문인으로서 절개와 지조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장요손의 매형인 오찬(吳贊)은 “군자는 힘들수록 더욱 굳세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무엇을 걱정하랴.”라며 군자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세한도〉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며 올바른 가치를 지키는 자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그림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글 이수경)
... 가로 69.2cm, 세로 23cm 크기의 종이 한가운데 어설픈 집 한 채와 소나무, 잣나무 몇 그루만 그려져 있다. 메마른 붓에 빡빡한 먹을 묻혀 종이에 문지르듯 그린 그림은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김정희는 1786년 대단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채제공은 김정희가 7살 때 쓴 ‘입춘대길’이라는 글씨는 보고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듬해에는 북학파의 박제가가 김정희가 쓴 ‘입춘대길’을 보고 “이 아이를 키워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박제가의 제자가 된 김정희는 그를 통해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한 고증학과 금석학(비석에 새겨진 글을 바탕으로 언어를 연구함)을 배울 수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이때부터 김정희는 기회가 된다면 스승처럼 북경에 가야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23살이 된 김정희는 아버지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함께 중국 연경으로 가게 됐다.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갔던 김정희는 자유롭게 중국의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또 완원, 옹방강 등 중국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키울 수 있었다. 금석학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이었던 두 사람은 김정희의 글씨에 한눈에 매료됐다. 이때부터 김정희의 개성적 서체인 ‘추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김정희는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34세에 장원 급제했다... 규장각에서 대교를 지낸 그는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대단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만 사망 기록이 남겨져 있다. 마지막 관직이 병조참판이었던 김정희는 지위 자체만 보면 실록에 기록될 정도는 아니었다...
... 김정희는 55세 때 정적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됐다... 특히 김정희가 8년간 귀양생활을 한 대정현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사납고 땅이 척박해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곳에서 김정희는 울타리 밖도 벗어날 수 없었다...
...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추위를 그림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아 일반적으로 눈이나 메마른 나무를 통해 표현을 한다”며 “하지만 김정희는 가장 거친 종이 위에 마른 붓과 진한 먹을 사용해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누구보다 멋있게 그렸다”고 말했다. 또 푸른 소나무와 촉백나무는 논어의 구절을, 창문 하나밖에 없는 집은 김정희의 귀양생활을 드러낸다.
화면 좌측에 김정희가 정성스럽게 쓴 제작 사유도 깊이를 더한다. 오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에 이렇게 상세히 그림의 제목과 제작 사유를 쓴 작품은 드물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청나라 문인 16명이 쓴 극찬은 ‘세한도’를 더욱 빛낸다. 최 소장은 “추사가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기에 이같이 함축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또 이를 알아봐 준 추사의 중국 동료 학자들이 있었기에 ‘세한도’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이데일리, 2020. 12. 15.)
*혈죽(血竹):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민영환은 11월 30일 자결했다...
...
민영환의 피묻은 옷과 칼은 민영환 집 뒷방에 봉안되었다. 방문을 잠가둔 지 7개월이 지난 1906년 7월 어느날 가족이 문을 열어보니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마루바닥 틈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이 사실이 대한매일신보 7월 17일자에 보도되면서 경향 각지에서 인파가 밀려들었다.
이후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혈죽(血竹)’으로 명명되었고, 민영환의 자택에는 혈죽을 구경하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문인 학도들도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민영환의 충절을 되새겼다. 박은식도 ‘혈죽기편’을 지어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민영환의 가족은 혈죽을 광목천에 싸서 다락방에 몰래 보관하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민영환의 이름은 해방 후 서울 거리에서 되살아났다. 일제 강점기에 죽첨정(竹添町) 1,2,3 정목(丁目)으로 불리던 지명을 서울시가 1946년 10월 민영환의 시호를 따서 충정로 1,2,3가로 개명한 것이다.
...
... 민영환은 여러 관직을 거쳐 당상관(1881년), 현재의 국립대 총장격인 정3품 성균관 대사성(1882년)에 오르는 등... 이조참판,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 민영환은 고종의 두터운 신임 덕에 두 차례나 세계를 순방했다. 첫 번째는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된 해외 순방이었다. 학부협판 윤치호가 영어 통역을 전담했다.
특사단은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군함·상선·열차 등을 갈아타며 상하이~요코하마∼벤쿠버∼뉴욕∼런던∼베를린∼바르샤바 등을 거쳐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민영환은 대관식에 참석한 뒤 3개월 동안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러시아 관리들과 군사교관 파견, 차관 교섭, 고문관 파견 등을 논의했다.
민영환이 이르쿠츠크∼바이칼호∼블라디보스토크∼부산∼인천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것은 10월 21일이었다. 장장 6개월 20일 동안 민영환이 거쳐간 나라만 11개국에 달했다. 그때의 견문을 기록으로 남긴 '해천추범'은 유길준의 '서유견문록'과 더불어 당대 제일의 세계일주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 귀국 후에는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조선군의 신식훈련에 박차를 가하다가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 6개국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 3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식에 참석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민영환은 3월 24일 인천을 떠나 상하이∼나가사키∼홍콩∼오데사항(흑해)∼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6월 5일 영국 런던에 도착,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7월 17일 귀국했다.
...
5년 7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이승만에게 고종의 밀지를 주어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게 한 것도 민영환이었다. 이승만은 미 정부를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외교청원운동을 벌였으나 당시 미국은 이미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영환의 구국외교는 무위로 돌아갔다.
(조선일보, 김정형, 2013. 12. 4.)
*학적(鶴笛):
조선 종실(宗室) 단천령(端川令) 이주경(李周卿)은 피리의 명수(名手)이다. 그는 아무나 부는 그런 피리가 아니라, 학경골(鶴頸骨)이라 하여 학의 다리를 잘라 만든 피리다. 이 피리는 소리가 우렁찰 뿐 아니라, 신운(神韻)이 있다고 한다.
단천령이 청석골(靑石洞)에서 임꺽정의 패에게 붙잡혀 도둑의 소굴로 끌려갔다. 도둑들은 단천령이 피리를 잘 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불어보라 하였다. 여기서 그는 우조(羽調)를 불어 충천하는 광경을 나타냈으나, 나중에는 계면조(界面調)로 바꾸어 슬픈 기분을 나타내게 하였다. 도둑도 이 소리를 듣고, 모두 회심(悔心)하며 우는 자까지 있었다.
... 두령(頭領) 임꺽정이 그만 중지시키고, 다음 날 돌려보내 주었다고 한다. 단천령이 돌아올 때 임꺽정은 작은 장도까지 내주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보이라고 하였다.
단천령이 장단까지 올 때 또 도둑의 떼를 만나자, 작은 장도를 보이니, 도둑들은 그만 달아났다고 한다... <기재잡기(寄齋雜記)>
(네이버블로그, 재봉틀의 국어방, 2016. 5. 20.)
*시누대:
신우대의 방언, 식물 볏과의 여러해살이 식물. 높이는 1~2미터이며, 잎은 긴 타원형의 피침 모양이다. 자주색의 작은 꽃이 복총상 화서로 피고 열매는 긴 타원형의 영과(穎果)로 가을에 익는다. 줄기는 조리를 만드는 데에 쓰고 잎은 약용하며, 열매는 식용한다. 한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네이버국어사전, 표준국어대사전)
신의대의 방언, 식물 볏과의 대나무. 높이는 30~80cm이며, 가지가 많이 나 있다. 열매는 영과(穎果)를 맺는다. 잎은 약용하고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산기슭에 난다.산기슭에 난다. (네이버국어사전, 표준국어대사전)
... 마을 옆이나 산 기슭에 모여 자라며 키가 5m를 넘지 못하고 굵기도 가는 시누대라고도 부른다. 또 산에서 키가 작으며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산죽(山竹)은 조릿대라고 하는데 새해 정초에 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구입하는 복조리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경주신문, 2003.1.10.)
악기재료로 쓰인 대나무의 일종, 갈대 즉 만호에 가가운 대나무의 일종인 시누대는 향피리와 세피리의 몸통 및 소의 16관을 만들 때 쓰이는 재료이다. (네이버블로그, 수상한 여행자)
조릿대는 대나무 중에 가장 작은 대나무입니다. 전국의 산중턱 큰 나무 밑, 특히 우리나라 중부이남의 산에 빽빽하게 무리지어 흔히 자라는 상록성 식물로 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한 식물로, 키는 1 - 2미터, 지름 3- 6밀리미터쯤 자라고, 잎은 긴 타원 형 피침 꼴로 길이 10∼25센티미터이고 끝은 뾰족하거나 길고 가장자리는 가시 같은 잔톱니와 털이 있습니다.
꽃은 수십년, 또는 수백년에 한번 피는데 4월 경에 피며 열매는 보리알처럼 생겨 6월에 익는데, 한번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나면 대나무 군락 모두가 말라 죽고 다음해에 다시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옵니다.
강한 알카리성으로 성질은 차고 약간 단맛에 청량감이 있어 먹기에도 좋습니다...
...
고려조릿대, 신이대, 신의대라고도 합니다. 우리 지방에선 시누대라고 불렀는데 그것으로 방패연을 만들어서 날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나무보다 만들기가 좋지요. (다음블로그, 띠울)
조릿대는 산죽이라고도 부르는 대나무로 지금도 복조리를 짓는 데에 많이 쓰이니 헷갈릴 일이 없는 대나무다. 그럼 내 아는 시누대는 뭔지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어 먼저 국어 사전을 찾으니 신우대의 잘못이란다... 조릿대는 쌀을 이는 조리를 삼는 데 쓴대서 붙은 이름 아닌가? 내가 아는 신우대라면 낚싯대, 연의 살,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살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다. 내 어릴적 이웃엔 붓을 만드는 집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 신우대를 붓자루로 가장 널리 썼다. 그리고 산 너머 마을엔 활터가 있었고 이곳에는 활과 화살을 만드는 집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신우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신우대는 화살을 만드는 데에 가장 큰 쓸모가 있었다. 우리가 아는 전통 화살을 죄 이 식물로 만들었다. 대나무의 굵기가 알맞지, 대체로 곧지, 그리고 무엇보다 한 마디의 길이가 길고 마디 부분이 다른 대나무들과는 다르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담뱃대도 주로 이 대나무로 만들었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담뱃대는 오죽으로 만든 것을 기억하지만 대체로 담배의 설대는 이 대나무가 쓰였다. 그래서 이 대나무 자체를 아예 설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대나무의 진짜 이름은 조릿대라는 신우대도 아니고 별명인 설대도 아니다. 바로 신의대라고 한다...
... 신우대는 시노다케란 말의 찌꺼기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 둘의 풀이가 같고 발음이 갖고 원래 신의대라는 우리네 다른 이름이 번듯하니 그렇다. 신우대는 아무래도 일본말 시노다케와 우리말 신의대의 트기란 생각이 든다... (네이버블로그, bryoco어리버리)
Note:
1992년에 나는 제대하고 시골에 칩거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집은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새해 첫날 신문에서 이 세한도 시를 보고 무언지 모를 청량감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