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 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문학과사회, 1988 겨울; 입속의검은잎, 1989)
Note:
거위의 시이다. 그런데 오리 같다. 거위를 기르는 얘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말고는 잘 듣지 못했다. 정말 거위가 빗방울과 장난을 쳤을까? 거위는 원래가 고집이 센가? 거위나 오리는 비에 강하다. 오히려 신이 나서 푸드덕 거릴 것이다.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는 거위 곁으로 시간을 빌리러 가는 사람들이 가는 비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