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눈에 보이는 전경과 귀에 꽂은 이어폰의 음악이 딱 붙으면서 주변 모든 것이 뮤비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나의 기분과 주변 상황과 음악의 느낌이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어느 하나라도 범위를 벗어나면 그 느낌이 안 난다. 그리고 내 감정의 골이 깊고 오랫동안 빠져나올 수 없을 때 극적 효과는 커진다.
동생과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야간버스 안에서 정말 오랜만에 넬(NELL)의 노래를 들었다.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사라진 지 수년도 지난 곡들이었다. 무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0여년 전에는 소위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이 골라 듣는 노래 중 하나가 넬이었다. 스타일도 있는 데다가(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적절한 대중성도 갖추고 있는 음악이었다. 한창 들었던 것 같은데, 언제 그리고 왜 지웠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사라질 때와 똑같이 오늘도 아무 이유없이 그냥 꺼내 들었다.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이의 모습속에도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곳에 니가 있어
동생과 먹은 저녁은 오늘의 첫끼이자 마지막 끼니였다. 어제는 특별 근무 때문에 밤을 새웠고, 집에 들어와 잠시 잠을 잔 뒤 다시 사무실로 나갔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업무독촉 메일은 엄청 쌓여있고, 게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없었다. 무지가 주는 공포, 데드라인 안에 내가 해낼 수 없을 것에 대한 걱정, 어느새 생활이 되어버린 이런 무기력에 실컷 샤워를 했다. 그리고선 동생을 보기 위해 인사도 않고 사무실을 뛰쳐 나왔다. 그제야 배가 고팠다. 합정역 근처에서 모든 것을 잠시 잊어버린 채 음식을 삼켰다. 피자 두 판과 파스타 한 접시와 콜라 두 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와중에도 나는 계속 맛있다고 했다. 맛이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다.
처음엔 많이도 힘들었지 인정할 수 없어 괴로웠지 하지만 받아들이고 나니 이젠 그게 너무 슬픈 거지. 사실은 그래 흩어지는데 붙잡아 뭐해 마음만 더 아프게 근데 이렇게 살아지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싶긴해
"저만 힘든가요"
어제 오후, 팀장에게 슬쩍 눙치듯 물었으나 팀장은 이어폰을 낀 채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나만 모르고 나만 허둥지둥 하고 있는 것인지, 당신도 하루를 버티는 것이 이렇게도 고달픈 시기가 있었는지 묻고 싶었는데 기회는 무산 되었다. 하루가 고달프다. 언제쯤 나의 일상은 가벼워질까. 가사처럼 이렇게 살아지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싶다. 오늘의 뮤비는 참 선명하게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