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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안 Apr 26. 2022

아프면 그냥 아프다고 말해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흔한 질문에  가지 시점을 떠올린다. 기왕이면  생에서 가장 즐겁고 흥미진진했던 시간을 고르려고 하지만 막상 이것저것 재다 보면 마땅한  없다. 행복은 언제나 '그때가 좋았어'처럼 추억의 방식으로 저장될 때가 많지만, 불행은 희한하게도 바로  시점에 이것이 불행임을 명확히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보니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찾아가기보단 최악으로 불행했던 시간을 찾아가는 게 더 쉽다. 깨끗하게 지울  있도록, 내가  순간 다른 선택을 하여  불행이 인생에 여진처럼 남아있지 않게 하고 싶다.


나에게 그런 순간은 20년 전이다. 미국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가 날아와 부딪친 해였다. 가을에는 이기찬이란 가수의 '또한번 사랑은 가고'가 유행했고, 신촌이 최고의 유흥가였으며, 홍대에는 인디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모여있던 때였다. 그리고 나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대학입시와 사투를 벌이며 삼수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니 천정의 기하학적인 벽지 무늬가 제일 먼저 보였다. 비교적 또렷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밤새 한숨도 못 잤기 때문이다. 수능을 한 두 달 남겨 놓은 시점부터 사실상 나는 거의 매일을 가수면 내지 불면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날도 눈을 뜨자마자 불쾌한 피로감이 머릿속을 온통 뒤흔들었고, 어깨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근육은 끊어질 것처럼 당겼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낼 수 있을까'

스무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의문을 품고 그날도 꾸역꾸역 독서실로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그 모든 것이 입시를 제때 끝내지 못하고 가족의 부담만 키우는 삼수생에 대한 천형쯤으로 생각했다. 다들 그렇겠지. 나처럼 삼수하는 친구들은 매일 이렇게 힘들겠지. 그러니 내가 지금 겪는 일들을 고통이라 생각한다면 난 너무도 나약하고 양심 없는 것이겠지. 이런 생각으로 매일을 버텼다. 그러나 한번도 이것이 내 잘못이 아님을 의심하지 않았던 탓에 고통이 내 일상을 조금씩 허물어뜨리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불면은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되었다. 때로는 믿기지 않는 난독증에 시달렸고, 익숙한 환경이나 생각이 어느날 갑자기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낯설고 고통스럽게 보이는 이질감 때문에 힘들어했다.


훗날 이것이 불안장애라는 이름이 붙는 질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지독한 시간을 그냥 버텨온 내가 불쌍하고 또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픈 것임을 인정하고 병원에 가보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미련하게도 그 생각을 못 했다. 당시는 정신질환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우울증이라는 말도 없었고 정신과는 말 그대로 격리가 필요한 '정신병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탓에 내가 겪는 어려움이 치료가 필요한지도 몰랐었다. 어쩌면 알았다 해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버티다 서른이 다된 어느 즈음, 고민 끝에 처음으로 병원에 찾아갔고 의사가 처방해준 주황색 알약을 먹고 그날밤 까무룩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지금도 불안장애를 만성으로 안고 산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녀석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애를 써도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의식할수록 덩치를 불리며 나를 위협해왔다. 그래서 내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만성질환'보다는 '동반자'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지독히 버텨온 시간이 아쉽다. 이길 수는 없더라도 조금은 덜 아프게 지내올 수는 없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왜 처음부터 병원을 찾아 도움을 받지 않았는지 후회된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도 조그만 알약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기쁨보단 오히려 허무함에 가까웠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그 녀석과 처음 조우한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다. 그리고 아무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세상에 말하고 싶다. 나 아프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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