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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an 21. 2024

안녕! 그리고 안녕...

-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두 사람이 있다 우연히 혹은 기적처럼 그들은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고 이별했다. 여자의 이름은 캐시, 남자의 이름은 제이미. 이제는 헤어져 각자가 된 두 사람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 조건이 있다. 같은 사랑을 말하지만 두 사람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즉 제이미의 시간은 만남에서 이별로, 캐시의 시간은 헤어짐에서 처음으로. 관객은 이 사랑의 결론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을까.




무대 중앙에는 긴 테이블이 놓인 원형의 무대가 있다. 그 무대 밖으로 두 개의 책상과 의자가 자리를 잡았고 객석과 가까운 곳에는 소파가 있다. 원형의 무대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배우는 돌아가는 무대 위에서 혹은 무대 밖에서 연기한다. 한 사람이 무대 밖에 서 있을 때 원형의 무대 안의 배우와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마치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숫자판을 스쳐 지나는 것 같다.


단순한 무대지만 테이블 앞에서, 위에서 혹은 그것을 타 넘으며 연기하는 배우를 만나기에 흡족한 장소다. 불이 켜지면 긴 테이블 양쪽 끝에 앉은 두 사람이 보인다. 각자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만큼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남자가 남기고 떠난 편지를 읽고 있는 캐시의 시간은 이별 직후다. 캐시는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며 자책한다. 아픔으로 가득한 캐시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환희로 들뜬 제이미가 등장한다. 같은 유대인을 만나야 한다는 부모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캐시를 찾아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이미 캐시의 아픔을 들어버린 관객 입장에서는 제이미의 즐거움이 마냥 좋지는 않다. 신나서 외쳐대는 제이미가 얄밉기까지 하다.


제이미는 사랑스러운 캐시를 만난 것으로 부족해서 막 직업적 성공을 거둘 참이다. 하버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제이미의 글을 출판해 주겠다는 곳을 찾아낸 것이다. 엄청난 찬사와 함께.


두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으니 당연히 둘은 한 무대에서 노래할 수 없다. 딱 한번, 이들의 시간이 만나는, 사랑의 절정이던 그 시간에서만 두 사람의 듀엣을 들을 수 있다. 나머지는 각자의 노래와 감정이 극장을 채운다.




극 초반부터 일찌감치 사회적, 직업적으로 성공해 버린 제이미와 달리 배우를 꿈꾸는 캐시의 도전은 힘겹게 계속된다. 꼰대 같은 남자로만 채워진 심사위원 앞에서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반주에 맞춰 오디션을 반복하는 캐시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이 뮤지컬의 원작자인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Jason Robert Brown)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늙은 남자들로 가득한 뮤지컬 판에서 자신의 재능으로만 승부하려는 캐시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걸 관객도 직감할 수 있다. 그리고 캐시의 사회적, 직업적인 고난은 제이미와의 사랑에도 영향을 준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


5년 동안 지속된 제이미와 캐시의 사랑이 새롭거나 놀랍지는 않다. 사랑에 빠진 누구나 처음에는 상대를 운명이라고 느꼈다가, 뭔가 잘못됐다고 깨닫고, 사랑이란 것이 다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며 이별한다. 관객 모두가 한 번쯤 겪었을 법한 감정이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뒤튼 것만으로 사랑이 가져온 행복과 물러날 때의 아픔을 강조하고 증폭시킨다. 뻔하고 흔한 이야기를 깊고 진하게 만든다.




90분 동안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첼로의 선율이었다. 무대 안쪽에 자리한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과 베이스, 기타로 이루어진 밴드는 클래식과 블루스 같은 전혀 다른 장르를 표현할 뿐 아니라 환희에 찬 기쁨과 결론이 보이는 사랑 앞에서 힘들어하는 두 사람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밴드도 한 명의 배우처럼 느껴졌다. 뮤지컬이 끝나고 처음 한 일은 음악감독의 이름을 확인한 것이다. 다음 티켓팅부터 이 감독의 무대는 빼놓지 않으리라.


캐시역의 민경아 배우는 그냥 캐시 같았다. 배우를 꿈꾸며 끊임없이 오디션에 도전하는 캐시의 이야기만으로 뮤지컬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이미 역의 이충주 배우는 다 가진 남자의 표본을 거침없이 보여줬다. 저 정도 역량은 되어야 뻔뻔해 보일 수도 있는 제이미의 서사를 풀어가기에 적합하다. 정말이지 90분 동안 두 사람의 개인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브라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이 뮤지컬의 이야기는 익숙하고 뻔하다. 원래 사람들은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는 법이다. 하지만 오히려 ‘흔한 이야기’라는 것이 보는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이별한 지 얼마 안 된 분들이라면 무대를 보자마자 감정이입 해 버릴 것이다.


연애나 사랑이 자신과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배우 개인의 역량을 보기 위해 이 공연을 찾을 만하다.  연기하고 노래하는 배우들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이 작은 무대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 그리고 배우들은 진짜 잘한다. 이 뮤지컬은 4월 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시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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