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 남겨진 시간
모든 게 끝났다고, 불안도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날 밤,
나는 나를 또다시 잃고 있었다.
그날 이후, 상진이 형은 내 세상의 전부였다.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알아주는 단 한 사람.
사랑받는다는 게 뭔지, 그 온기를 회복시켜 준 첫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새로운 길이 가능할 것 같았다.
내가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
어긋났던 가족이라는 이름을,
상진이 형은 천천히, 그리고 진심으로 되살려주었다.
상진이 형은 “집을 지어야겠다”라고 자주 말했다.
그 말엔, 가족을 깊이 생각하는 오래된 바람이 담겨 있었다.
형의 어머니는 평생 부엌에서 등을 굽힌 채 살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따라 지방 도시를 전전했고,
배추장사며, 남의 집 일이며,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형은 그런 어머니의 손등을 보며 자랐고.
굳은살이 켜켜이 쌓인 어머니의 손에서, 형은 삶의 결을 읽었다.
“명순아, 나는 우리 엄마 꼭 호강시켜 드릴 거야.”
상진이 형은 가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말없이 내민 봉투 속엔
사우디 건설 현장 계약서가 있었다.
“내가 다녀올게. 잠깐이면 돼. 돈 좀 모으면, 집 사자. 엄마도 모시고.”
형의 눈빛은 단단했고, 나는 믿음직스러운 그에게 자꾸만 기대고 싶어졌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포장마차 아래서 손을 맞잡고,
평소처럼 집으로 향했다.
형은 ‘사랑하는 사람’이기 전에 ‘아들이자 가장’이었고,
그 짐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는 그날.
그의 눈빛에 서려있는 두려움도,
끝내 말하지 못한 떨림 속의 작별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는 소박한 미래를 그렸었다.
서툴지만 진심이었다.
언제나 돌아올 집.
그리고 아이들.
나는 다짐했다.
내가 받은 상처대로 물려주지 않겠다고.
내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말과 웃음, 그리고 믿음을 주겠다고.
그건 내가 처음으로 꿈꾼 ‘진짜 가족’의 모습이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김서린 가락국수 그릇 너머로,
형의 낯선 눈빛이 느껴졌다.
"근데 명순아."
젓가락을 멈춘 내게, 형이 말을 이었다.
"나... 다음 주에 가. 사우디로..."
그 순간, 심장 어딘가에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사우디. 너무 먼 곳.
"벌써...? "
철없던 나는 든든한 그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만 앞섰지,
그가 택한 삶을 함께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거다.
작별이 이리 빨리 올 줄도 모르고...
"공사장 반장 자리가 비었대. 돈도 세고, 오래는 아니야. 1년? 길면 2년. 아니 아니 딱! 3년만..."
가락국수가 목이 메어, 마저 넘기지 못했다.
이별이란 단어는 꺼내지 않았지만, 형의 말엔 이미 '작별'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기다려줄래?"
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날, 형은 내 손을 꼭 잡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엔 따뜻함보다 더 오래된 이별이 배어 있었다.
그렇게 형이 떠났다.
미자언니, 반장언니와 이별하듯, 그렇게 그와 작별했다.
형이 떠난 후, 무대는 달라졌다.
기타 줄은 여전히 팽팽했고, 마이크는 여전히 나를 향했지만,
무대 밖의 나는, 조금씩 무너졌다.
밴드는 어딘가 불완전했고,
형들의 장난도 재미가 없었다.
밴드의 리듬은 흐려졌고, 밤마다 돌아오는 집은 더욱 고요했다.
그렇게 쓸쓸한 겨울이 두 번 지나갔지만,
그에게서는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나조차 잊어야 했을 만큼...
아마 그곳에서의 삶이 그만큼 치열했던 거겠지.
기다리는 것도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그와 조금씩 이별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결국,
내 삶에서 나를 사라지게 만든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어느 날, 클럽에 낯익은 손님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밴드를 바라보던 남자.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음악만 듣고 가는 손님.
말수가 없는 그는 가끔 '수고하셨어요'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사라지곤 했다.
으레 클럽에 오는 손님 대하듯 처음엔 의심했지만, 그는 진지했다.
말 한마디에 무게가 있었고, 침묵 속엔 배려가 있었다.
"저, 건설일 합니다. 박윤철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살게 하고 싶다는 눈빛이 있었다
'잘살아줬으면 좋겠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