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그림자, 온기의 시작.

뜨겁지 않아도 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랑

by 이지아

그날 밤, 빗방울이 천막 위를 두드리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검정 기타 가방을 멘 채, 축축해진 옷자락을 꼭 쥐고 서 있었던 그때,
나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클럽 문을 나설 무렵이었다.

옷자락 끝이 서서히 축축해지며 차가운 기운이 살갗에 스몄다.

나는 검정 기타 가방을 어깨에 멘 채, 조용히 천막 끝자락에 서 있었다.


그때, 익숙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윤철 씨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우산을 펴더니, 자신의 어깨는 반쯤 젖은 채 나에게 우산을 기울였다.

집까지 우산을 씌워주더니, 후다닥 뛰어가버렸다.

한동안 구겨진 종이 같았던 마음이 조금 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좋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나는 누군가를 다시 믿는 게 아직도 두려웠다


그날 비 맞아 감기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공연을 마친 뒤 방 안에서 기침을 연거푸 해댔다.

미열이 있는 듯 몸이 축 늘어졌고, 따뜻한 물을 마셔도 목은 칼칼했다.

대충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천천히 일어섰다.


문을 열자, 윤철 씨가 서 있었다.

손에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고, 봉지 안에는 갓 끓인 듯 김이 오르는 하얀 죽이 있었다.


“기침 소리가 밖에서도 들려서요.”

“죽 좀 끓여봤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죽을 건네주며 윤철 씨는 시선을 피했지만, 다시 나를 바라볼 때는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말을 꺼낼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아플 때, 이렇게 조용히 찾아와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가 놓고 간 죽을 천천히 한 숟갈 떴다.

죽에서 나는 은은한 참기름 냄새가 한순간 방 안의 한기를 몰아냈다.

그리고는 이내 무너졌던 속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명순 씨."


그가 어느 날 문득 말했다.


" 나랑 같이 살아보는 건 어때요?"


그 순간, 상진이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떠난다는 말만 남긴 채, 어느 순간 소식이 끊긴 사람.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지만, 기다림도 결국 사람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처음엔 상진이 형이 문 앞에 서 있을 것 같아,

퇴근 후에도 문고리를 두 번씩 만지곤 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주가 지나고, 계절이 한 번 바뀌는 동안...


나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졌고,

웃던 입꼬리는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자꾸만 어깨가 움츠려 들었고, 식욕이 없었다.


몸은 버티는데, 마음은 조용히 침몰해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윤철 씨는 종종 말했다.


“사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연습 끝난 뒤 뒤편에

조용히 서 있는 명순 씨를 봤는데... 피곤해하던 그 뒷모습이 보였어요.

그때 마음이 흔들렸어요.”


그는 나를 특별히 꾸미거나 애쓰지 않던 날에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웃음이 없던 얼굴, 눈 밑 그늘까지도 애써 보려는 듯한 그 시선은, 내가 아닌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했다.


나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윤철 씨는, 항상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처음엔...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어요.

그냥, 잘 살아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를 데려가겠다고 말하기보다,
내가 내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옆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


나는 윤철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이름이 아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래요... 천천히요."


그날 밤도 상진이 형의 그림자가 방 안에 눌러앉아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림자를 껴안는 대신,

내 안의 고요를 지켜주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랑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다는 나의 절박함이,

새로운 관계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상진이 형을 잊은 게 아니었다.

다만 그가 나를 떠난 삶에서도, 나는 살아야 했기에...

그 기다림이 내 삶을 무너뜨릴 만큼 오래되었기에...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유기하지 않기로 했다."


손끝이 떨려왔지만, 나는 크게 숨을 한번 몰아내 쉬었다.

나의 결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화려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누군가와 함께 불안하지 않은 오늘을 살아내기로 한 결정.


그리고 나는, 나를 갉아먹는 불안에서 벗어나, 새로운 '안식처'를 만들기로 했다.


엄마처럼 무너지는 삶이 아닌,

내가 불안해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는 사람과의 삶.


처음엔 낯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윤철이 있는 집은 ‘기다리는 집’이 아니라 ‘함께 사는 집’이 되었다.


언젠가 이 선택이 또 아플지 모른다는 불안은 있었지만,
윤철 씨의 묵직한 온기가 있었다.


이번엔 달랐다.


이날 밤, 다시 가락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그때처럼 김이 피어오르고, 짠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이번엔, 가락국수가 짜서가 아니라, 마음이 먹먹해서였다.


눈을 감자, 멀리 사막의 붉은빛처럼,
상진이 형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이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어쩌면 이 사랑은 정열도, 눈물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품이 아니라,

이제야 내 삶의 중심에 나를 놓기 시작했다.




『도라지꽃』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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