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렛의 다세계

사라지는 것은 없다

by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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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 자리에 있었던 제게도 아픈 상처가 되었던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 누군가의 큰 상처를 다시 건드리진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너를 기억한다고,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지나왔지만 그때의 추억 한 칸에 네가 있다고 마음을 전하고자 저만의 방식으로 용기를 내어 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우주가 되어 계속 살아간다.” - 에버렛


며칠째 냉기가 소매 안을 파고들다 살짝 훈훈해진 어느 가을날 오후, 친한 동료와 대화 중이었어.


그러니까, 너와 내가 앙숙인 우주도 있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난 그 가정 자체를 못 받아들이겠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너랑 내가 다른 거라니까!

그니까!


둘이 만나면 아이가 된 듯 호들갑스럽게 깔깔거리는 사이였어. 우리의 이야기는 주제처럼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지. 그래도 나는 이것을 믿고 싶다고, 아니, 믿고 있다고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어...


비 오는 밤이었어.


화장실에서 들어가고 나가며 마주친 민망한 순간, 그 애의 발간 볼이 더 붉어졌지. 언제가 마지막 순간이었을까? 내 기억 속에 그 아이가 살아 숨 쉬며 나를 향해 인상을 남긴 순간이. 그 빨개진 볼, 수줍던 웃음, 조용하던 그 소녀가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하진 않았을까? 이 우주의 저편에 있는, 다중 우주의 어느 한 곳에서는 말이야, 그 아이가 이미 호호 할머니가 돼 있을지 모르지.


어느 날, 등교를 했는데 학교가 발칵 뒤집혔어. 아이가 없어진 거야. 전날, 비가 내리던 밤, 아이 역시 밤늦게야 학원을 마치고, 데리러 온 엄마 차에 타고 있었어. 그날도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 있었으니 아마 곯아떨어졌을 거야. 엄마는? 엄마는 역시 고등학생인 남동생이 내려오지 않아 그 앨 차에 두고, 남동생을 데리러 '잠깐' 학원 건물로 올라갔대.


아이는 그 사이에 사라져 버렸어. 아이의 우주에서 '잠깐'은 영원이 돼버렸지. 억측이 많았어. 제 발로 없어진 거다. 공부 스트레스 때문이다. 불량한 친구를 사귄 것은 아니냐. 경찰들의 추측이었어. 아이는 수색 끝에 사라진 지점부터 멀지 않은 빈 공터에서 발견됐어. 하반신이 벗겨진 채. 어린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 아이는 거기까지 끌려가서 몹쓸 짓을 당하고 버려졌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지. 비 오는 밤에...


아이의 고통, 두려움, 마지막 가는 길에 느꼈을 그 공포. 그것 때문에 아이의 엄마는, 그날의 남동생은 두고두고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해. 범인은... 범인은 잡히지 않았어. 미제 사건이 되었지. 어떻게 차 안에 있던 아이를 끌고 갔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추측만 난무할 뿐이었어.


장례식 날, 아이의 관을 실은 차가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갔어. 죽음을 애도하는 진혼곡이 전교에 울려 퍼졌지. 애달픈 음악에 나는 화가 났어. 그 애랑 교회를 같이 다니던 친구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고, 나는 그 모습을 그대로 다 보고만 있었어. 그날의 나는 그 운동장에 있었던 아이 중 하나였어. 그게 얼마나 안전하고 불완전한 자리였는지, 딛고 선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우주가 갈라져 나갔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어.


비 오는 밤이었어. 그래, 잊고 있었는데,,, 다시 어느 비 오는 밤, 수십 년의 기억을 뚫고 그 일이 다시 떠올랐어. 범인도 비 오는 밤이면 가끔 그 일을 떠올릴까? 자신이 파괴해 버린 하나의 우주를.


모든 가능성이 하나의 거대한 필름처럼 무수한 프레임 속에 겹쳐져 있다면, 지금 서 있는 이 우주는, 그 무수한 장면 중 내가 끝내 바라본 한 컷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너를 추억하는 것이 이토록 두렵고, 미안하고, 주저되진 않을 텐데...


나는 엄마가 되었고, 선생님이 되었고, 매일 아이들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어. 참, 너랑 제일 친했던 00이 기억해? 대학교 신입생 때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탔는데, 말괄량이가 어울리지 않게 철학과를 갔다고 말하면서 멋쩍어했어. 웃기지?


볼이 발갛던, 이 우주에선 아직도 소녀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친구야.. 너의 다른 우주에서 네 인생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지 너무나 궁금해.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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