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position

중첩

by 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나는 아무도 아니다.


몸을 뒤척인다.

눈을 감고, 최대한 시간을 유예한다.

세상에서 부여받은 역할 중 그 무엇이 되기 전, 아직 아무도 아닌 상태의 '나'인 채로.


자는 것도 꿈을 꾸는 것도 아닌 대기 상태. 어떤 역할이 되기 전, 오프와 온 사이의 정해지지 않은 지점에서 나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다 시계를 본다. 후다닥 몸을 일으킨다.


이제 오늘 하루의 나는 이미 여러 상태로 켜져 있다.

첫 자아는 '글 쓰는' 나다. 출근 준비 전에 평행우주 연재글을 하나 쓰고 발행 버튼을 누르는 사람. 아차, 어젯밤 차 안에 노트북을 두고 왔다. 가장 사랑하는 작업을 나의 첫 가능성에 두는 일은 오늘도 실패다. 대신,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 그냥 두기로 한다. 출근하면서 화장을 하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카톡을 확인하지 않는다. 차창을 열어 계절의 변화를 살피고, 공기의 흐름을 체크하고, 바람에 흔들리며 간신히 매달린 낙엽 직전의 잎들과 새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자리에 앉자마자 쓰기 위해서.


이른 출근을 하는 나는 짧은 여러 사항을 체크하고 자리에 앉는다. 다시 오프와 온 사이 어딘가에 머무른다. 아주 잠깐. 또 눈을 뜬다. 글 쓰기를 시작한다.


다음 문장을 떠올릴 땐

글 쓰는 사람이 된다.

사람도 스크린도 모두 치우고

글을 읽거나 조용히 눈을 감는 순간,

수행자인 내가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


여러 상태가 동시에 열린 지금의 나


한 점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가다가 멈춰 있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한 상태.


어느 한순간을 잘라 보면

마치 하나로 정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통째로 보면

'이것이면서 저것이고,

여기이면서 저기인' 겹쳐진 상태로 존재한다.


평범한 생활인,

가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사람,

내면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던 사람.

그리고,


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던 인간.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갈구하고

그곳엔 진정 원하는 무엇이 있을 거라고 믿던 사람.


매일 알람을 끄는 손가락 하나에 여섯 개쯤의 내가 겹쳐져 있었다.


“진짜 나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시절이 있었다. 답을 내기 전에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나 자신을 쥐어뜯고 학대하던 시간. ‘나’라는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느라 온몸에 진이 다 빠졌던 때.


늘 나를 하나로 정리정돈해야 한다고 믿고 살았다. 어느 한 칸에 넣어야만 안심하는 존재. 어쩌면 나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나'를 너무 일찍 오답 처리하고 서랍 한 구석에 넣어버린 후 봉인해 버린 건 아닐까. 지금의 나는 이 모든 상태가 아직 갈라지지 않은 채 겹쳐져 있는 중간 구간에 서 있다. 둘 중 어느 쪽도 '가짜'가 아니다. 세계가 아니라, 나라는 작은 우주부터 먼저 정렬해야 한다는 것. 수많은 역할과 가능성으로 중첩된 나를 밀어내지 않고, 겹쳐진 그대로 받아들인 뒤, 문장 하나, 선택 하나로 이 순간에 조금씩 정렬해 보는 편에 이제는 서 있고 싶다.


지난 날에는 각각의 상태가 서로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꼈다. 지금은 이 모든 상태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달래어 본다. 나는 여전히 도망가고 싶어 하는 인간이고, 동시에 아이들 곁에 머무르려는 엄마이고,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이고, 글을 쓰며 오늘의 우주를 해석해 보려는 사람이다. 중첩 상태의 특징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가능성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를 향한 질문을 조금 바꿔 보려고 한다.

“그래서, 너는 뭐가 될 거야?”

대신,


“지금 너는 어떤 상태들을 동시에 품고 있니?”


어떤 나를 지우고,

어떤 나만 살아남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겹쳐져 있는 나들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조금 더 자주' 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하나로 정리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쉽사리 한 줄로 요약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상태가 동시에 열린 지금의 자신을

조금 더 정직하게 바라보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면 어떨까.

언젠가 마지막 관측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이 모든 상태를 겹쳐 안은 채,


어느 한쪽으로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문장을 쓴다.

한 번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그러나 조금씩 정렬되어 가는 우주로써.



** 중첩(superposition): 하나의 입자가 여러 상태를 동시에 지닌 채 존재하다가, 관측 순간 그중 하나의 상태로 드러난다고 보는 양자역학 개념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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