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지구인 Apr 04. 2023

인스타를 지웠다

인스타를 떠나 브런치에게로 가는 여정.

#1


인스타를 지웠다.


2016년 5월 11일, 처음 포스팅을 시작으로

300개의 게시물을 올렸다.


나름 영화를 했다고,

마냥 사진 하나만 단출히 올리기에는

뭔가 영혼이 허락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사실은, 사진만으로 승부가 되지 않는 내 빈자리의 발로였는지도.ㅋ)


어쨌든 난

일과 일상, 가족과 친구들, 내 요즘 정황과 속내들을

너무 꾸미지도, 너무 정제되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열줄 내외의 꾹꾹 눌러 담은 글로 인스타를 쌓았다.



거창하진 않지만,

나를 담은 글들이

생의 작은 점들을 소소히 찍어가는 것 같아, 참 좋았다.


아내와 관련된 글을 올린 다음날 아침이면,

"또 글 썼더라."로 시작하여

"그렇게까지 낱낱이 꼭 써야 돼?"로

아내는 불편한 심기를 거칠게 드러내시지만,

난 꿋꿋이 썼다.


가끔 삼 남매 엄마의 자연인 자태가 담긴 얼굴과 몸이

수위를 넘었다 판단하실 때면,

아내는 일하는 도중에 전화가 온다.


그리고 김경호 혹은 크라잉넛의 샤우팅이 작은 수화기 구멍을 넘어

내가 있는 모든 공간을 채운다.


"장난해? 지금?

 도대체 왜 그래?


"...................."

"빨리 내려! 당장!"


난 진심으로 아내의 정돈되지 않는 자태가 좋은데 말이다.

(그래도 심의 조정을 나름 많이 거쳐 이젠 민원이 많이 줄었다.)


어쨌든

난 그렇게 인스타를 하고팠다.


환희로 탈색된 순간들 말고,

삶의 낮도 밤도 담고팠다.


밤과 아침 사이, 새벽의 으스럼도

낮과 저녁 사이, 노을 진 세상도 담고팠다.


그렇게 빛과 어둠,

그리고 그 경계에서만 볼 수 있는 찰나들에

머물고 싶었다.




#2


오랜만에,

주간 스크린 타임 리포트가 울린다.


3시간 16분.


"엥?"

"진짜?"


나름 다른 sns 라이프를 하고 있단 고상한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 쓸까 말까 하는 인스타에

 온 자투리 시간을 넘치도록 주고 있었다.


때로,

밤이 새도록 키득거리며 보는 시간을 닫을 때,

이상하게 저어기 깊은 영혼의 자리부터 차오르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솔로몬의 고백이 담긴 어떤, 헛헛함이 밀려온다.


아무리 보낸 시간을 길어내려 해도

"그만 봐야지"라는 수 번의 다짐과

그 수 번 더하기 1만큼의 킵고잉이 주는

은근하지만 강렬한 정서다.


"인생이 움켜잡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갔다."

라고 쓴 누군가의 시처럼,


시간이 움켜잡은 모래처럼

인스타 사이로 새어 나갔다.


작년 이맘때,

바탕화면에 두었던 인스타 앱을

손이 닿지 않는 앱뭉치 5번째 페이지 제일 끝으로 밀어놨었다.


그러나 1년여 동안 숙련된 앱 켜기 능력은

무수한 앱 더미 사이 미로 찾기를 절묘하게 지나

초도 채  미치지 못하는 시간 안에

기똥차게 찾을 만큼 자랐다.



#3


지웠다.

인스타 앱을.


7년 만에,

정확히는 6년 10개월 만에.


이상하게 저기 마음 우물 밑 어딘가에

반짝이는 박수소리가 들린다.


"엥?

  내가 그 정도로 잘한 거야?"


대답은 없다.

그저 웃음소리뿐.ㅋ


그리고 새삼,

나의 애써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준다.


나,

브런치 작가임!



#4


긴 글을 쓰는 게

쉽지가 않다.


한편 써내는데

3일이 걸린다.


쉬운 기쁨은 몸에 안 좋을 확률이 많고,

어려운 기쁨일수록 건강해질 확률이 많다.

(고 언제인가 인스타가 얘기해 줬다.)


대학시절,

꽤 글을 썼었다.


어떤 과목 교수님은,

내 리포트가 논문의 초기버전 같다고 했었고,


서술형 시험이 많았던,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어느 교수님은 내 시험지를 잘 읽었다고

만인 앞에서 이따금씩 칭찬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써,

8번 중에 6번 장학금을 받았다.  


아저씨가 되어,

오래 긴 글을 놨지만,


조금은 어렵고,

조금은 몸에 좋은 글을 써보려 한다.


그리고

조금은 호흡이 긴


글의 서사를 가지고 싶다.



ps. 걱정하시는 분이 많은데,

      탈퇴는 안 했어요.


제 인스타는 @storygrapher2012입니다.

친구 해요.ㅋ



작가의 이전글 종묘, 제사, 그리고 안식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