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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Sep 05. 2023

로봇을 위한 세상은 더 이상 SF가 아니다.

[소설] <종의 기원담> - 김보영


강아지는 명백한 생물이다. 사람과 언어가 통하진 않지만, 강아지는 훈련과 반복을 통해 우리의 의도를 조금씩 이해하고 인간사회에 적응한다. 그렇다면 로봇 청소기는 어떨까? 로봇 청소기 역시 반복된 학습을 통해 인간의 명령을 따르니 강아지와 같은 생물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로봇이 생물이라는 말에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낀다. 인간이 정의한 생물이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그 이상으로 '인간다운 로봇'을 보고 우리는 ‘죽어 있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김보영의 연작소설 <종의 기원담>에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생물의 정의가 뒤바뀐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관점이 아닌 로봇의 관점에서. 


한국 최초로 SF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은 2023년 6월에 발행된 연작소설이다. 작품은 총 3편으로 이루어졌으며 1편이 완성된 건 2000년대 즈음이다. 3편이 완성된 시기가 2023년이니 대략 20년 동안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 전과 지금은 문화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궁금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SF 창작물 속에서 답을 찾아내는 것은 더 이상 쓸데없는 시도가 아니다. 그러니, 인간이 더 이상 생물이 아니게 된 작품 속에서도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생물이 아닌 세상


생물이 되는 필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2. 에너지 대사(주로 전기 에너지)를 한다.
3. 칩을 소유한다. 칩은 생명 활동의 기본 매체다.
4. 일반적으로, 공장에서 태어난다.
p.27


소설의 배경은 지구의 주인이 로봇인 세상이다. 과거일지 미래일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식물과 동물 같은 유기체는 살아있는 생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동식물은 위 조건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만족하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 조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움직이는 유기물’ 일뿐 생물이 될 수 없다. 몸속에 칩이 없고, 공장에서 태어나지 않은 우리 인간 역시 이 세상에선 당연히 생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우리는 살아있고, 스스로의 의지가 가득하지만, 그들에게 인간이란 로봇청소기와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 종이를 만드는 곳은 공장이다. 오늘날 로봇의 재료가 로봇뿐이듯이. 종이의 재료도 종이뿐이다. 종이가 생물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종이가 종이 이외의 다른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적이 있었을까? p.93 


이러한 세계에서 소설 속 주인공 ‘케이’는 유기체가 생물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을 반박하는 논물을 작성한다. 그리고 이를 흥미롭게 바라본 로봇 ‘세실’‘칼스트롭’ 교수가 함께 유기체를 생산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결국 식물이 살 수 없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식물을 배양한 이들은 지금껏 생각했던 생물의 정의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유기체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로봇 중 가장 로봇 같지 않은 존재인 2000 모델을 딴 유기생물(신화 속 ‘인간’이라고 불렸던)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소설의 1부가 끝난다.    

 



SF와 현실은 다를 것이라는 거짓된 믿음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신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우리 마음이 한 점까지 지배할 수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들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p.170


이어지는 2부와 3부에서는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부제로 소설이 이어진다. 일부 로봇들은 결국 유기체를 생물로 인정하게 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것들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충성을 다한다. 이에 로봇들은 인본주의자와 비인본주의자로 서로를 나누며 인간을 위해 살아야 할지, 로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를 로봇으로 볼 수 있을까? 인간의 관점에서 로봇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오직 인간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고,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자유의지가 있는 로봇을 만들어냈고, 이는 현재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으로 인간과 로봇의 경계의 어딘가에 서있다. 이처럼 과거에 우리가 알던 로봇의 개념과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면, 생물에 대한 정의 역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있었을지도 모르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언제든지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로봇의 이야기다."


“로봇이 신처럼 위대해졌으므로, 그런 위대한 우리가 모실 신이라면 전지전능하기쯤은 해야 위신이 선다고 믿게 된 것이지요. p.215”


소설 후반부. 인간을 창조한 위대한 로봇 ‘케이’는 자신이 만든 인간을 자신의 의지로 죽이게 된다. 케이는 인간을 살해하는 그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넘쳐나는 애정을 지울 수 없었고, 정신을 잃을 만큼 인간을 사랑했다. 하지만, 케이는 끝내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비인본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케이가 사는 세상은 로봇이 주인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곳은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다. 케이가 선택한 이야기는 인간이 아닌 로봇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에서 벗어나 로봇의 시각으로 이 소설을 읽어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로 인간을 위한 세상일까? 그리고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맞을까? 인공지능과 챗 지피티 등 비약적으로 상승해 버린 로봇의 지위가 인간보다 높아질 것만 같았고, 조만간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인간의 입장에서 로봇은 그저 로봇일 뿐이지만, 반대로 로봇의 입장에서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시각에 따라서 생물의 정의가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머지않은 미래엔, 이 소설처럼 인간이 무생물로 취급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규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로봇을 통제할 수 있는 지금,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지금만이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빠르고 획기적인 기술의 발전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해 발전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면, 언젠가는 창조자인 우리가 피조물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인간이 로봇을 위해 노동하기 시작하는 지금의 모습처럼.



<종의기원담> - 김보영  이미지 출처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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