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들어서니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확연히 달라졌다.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시원한 밤을 보낼 수 있고, 창밖에서 여름 내내 요란하게 울어대던 앞산의 매미소리도 거짓말 같이 뚝 끊어졌다.
지구는 정확하게 공전을 하고 있나 본데 아직도 한낮의 기온이 30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있고 아파트 안의 실내온도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올여름 유난히도 길었던 무더위에 아파트의 콘크리트 벽이 태양열을 너무 오래 빨아들여 쉽사리 식지 않는 것 같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역시 우리 인간에게 있다고 볼 수밖에 없나 보다.
어쨌든 가을의 시작 9월이 되니 여기저기 인터넷에서 가을꽃 피는 곳을 소개한다.
제일 먼저 소개되는 꽃은 상사화(꽃무릇)인데 우리는 해마다 분당까지 찾아가서 꽃무릇 군락지를 보고 온 적이 있지만 서울 근처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월드컵공원의 하늘공원 아래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내일부터 상사화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이곳에 작년에 심었다는 상사화가 얼마나 피었을지 궁금했는데 축제까지 열린다고 하니 반갑다.
축제가 시작되고 소문이 나면 사람이 몰려들고 복잡할 테니 우리는 축제 하루 전날 미리 가서 조용하게 감상해 보기로 했다.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1번 출구에서 모두 열명이 만났다. 여태까지 월드컵공원에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는 친구도 두 명이나 왔다.
일단 경기장 남문 쪽으로 올라가서 월드컵로를 가로지르는 경기장 앞 넓은 육교를 건너서 평화의 광장을 향해 걷는다. 평화의 광장에 서면 오른편에 동산 같은 하늘공원이 서있고 그리로 오르는 계단도 보이지만 오늘 우리는 공원 위로 하늘을 보러 올라가지 않고 하늘공원 아랫 자락으로 걸을 것이다. 입구 쪽으로 가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메타세쿼이아 길”이라고 이정표가 나타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을 “희망의 숲길”이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 길 이름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처음에 그 이름이 좋아서 이 길을 찾아왔는데 말이다.
여기서부터 메타세쿼이아 길이 시작되어 강변을 향하다가 오른편 서쪽으로 구부러지면서 강북 강변로, 자유로를 따라 평행으로 이어진다. 여기가 유명한 상암동 메타세쿼이아 길로 사진에 많이 찍히는 길인데, 이 길의 끝부분이자 “시인의 길” 입구에서 상사화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활짝 핀 상사화를 기대하며 길이 비교적 한산하여 길게 벋은 가로수길을 여유 있게 걸을 수 있겠다고 좋아하려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 예보가 있어서 오늘 걷는 사람이 적은가 보다. 기대하던 꽃도 한참 동안 보이지 않다가 노란 꽃무릇이 드문드문 두 세 송이씩 솟아 올라와 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우리가 또 너무 서둘러 일찍 왔나 보다. 그런데 이제까지 붉은색 꽃무릇만 많이 보았지 노란색 꽃은 처음이어서 새롭기만 하다. 우리야 막 피기 시작한 몇 송이 안 되는 꽃무릇을 보고도 좋아하며 지나가지만 내일 시작한다는 상사화 축제를 생각하면 좀 안타깝다. 꽃도 덜 피었는데 비까지 오면 안 되는데, 하며 준비하는 담당자들이 노심초사할 것까지 대신 걱정하면서 비 내리는 하늘공원로를 따라 북쪽의 난지천공원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일기예보를 못 보고 우산을 안 가져온 친구들이 있어서 잠깐이라도 비를 피해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난지천 공원에 이를 때까지는 큰길이어서 도중에는 아무것도 없다. 난지천 공원에 도착하니 비로소 정자 하나가 나타나서 이곳에서 잠시 쉬며 간식 시간을 갖는다.
난지천 공원은 하늘공원과 상암동 매봉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천 난지천 주변에 조성된 공원으로 월드컵공원의 하나다. 이 공원 자체도 숲길과 잔디밭이 넉넉하여 이 안에서만 걸어도 충분히 하루를 즐길 수 있는 넓이와 규모이다. 오늘 우리는 하늘공원과 난지천 공원을 각각 반 바퀴씩 걸은 셈이다. 난지천 공원은 평탄해서 천천히 여유 있게 걸으면서 비에 젖은 푸른 숲과 잔디를 감상하며 낭만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비는 오는데 우산이 없는 친구도 있으니 식당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여유가 없이 자연히 빨라질 수밖에 없다. 비를 맞아 옷이 너무 젖으면 감기 들까 걱정되니까.
점심 먹을 식당은 경기장 안 쇼핑 몰에 있는 가성비가 아주 좋은 이태리 식당이다. 우리가 월드컵공원에 오면 가끔 들리는 곳이다. 여기서는 커피까지 해결되니 편리하다.
오늘 처음으로 용인에서부터 멀리 찾아온 친구에게 감사하고 그를 초대하고 반갑게 맞아준 다른 친구들도 고맙다.
월드컵공원이 넓기는 넓은가 보다. 하늘공원과 난지천공원의 일부만 걸었는데도 14500 보 넘게 걸었다.
집에 돌아간 후에 한 친구는 단체 수다방에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달아 오늘의 모임을 요약해 준다.
“만나고, 손 마주 잡고 반기고, 걷고, 웃고 이야기하고, 세콰이어는 늘어서 하늘을 찌르고, 노랑 상사화 애련하고,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 없네. 괜찮다 해도 굳이 같이 쓰자고. ㅎㅎ 실은 낙수물이 바깥쪽 팔을 흠뻑 적시건만! 저도 그랬겠지?
이런저런 행복을 뭉쳐서 희가 [사진으로] 펴니, 행복의 여운이 보랏빛 가락을 탑니다.
희야 고마워. 식사마무리 다과처럼!”
2024년 9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