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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Apr 25. 2023

지극히 추악한 비극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영화 <올드보이> 리뷰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받아 점쳐진 운명 속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며, 그 죄책감에 대한 징벌로 자기 눈을 찌르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적 서사와 맞닿아있다. 바로 사회적 금기 위반과 처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적 금기를 깨트리며 실현되는 욕망의 결말은 지극히 추악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오대수_오이디푸스

  현대판 오이디푸스인 <올드보이>의 주인공부터 살펴보겠다. 영화에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가 인생의 신조인 ‘오대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오대수는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고 감금 시설에 갇히게 된다. 딸이 태어난 날에 오대수는 사회적으로 없어진 존재가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받은 운명의 구조 안에 있었듯이, 오대수도 다른 사람이 설계해 놓은 시나리오 구조 안에 들어가서 하루하루를 수습하며 살게 된다. 오대수는 감금된 그 좁은 방에서 군만두만 먹을 수 있었고, 할 수 있는 건 텔레비전 보기밖에 없었다. 어느 날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아내의 살해 소식이 나오고 있었고, 아내를 죽인 용의자가 자신이 되어있는 것을 확인한다. 오대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그를 감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렇게 15년이 흐르고 오대수는 처음 납치됐던 그 장소에 풀려난다. 누군가에 의해 받게 된 15년의 형벌. 오대수는 자신을 가둔 자가 누구인지 찾고자 했다. 


  #15년 만에_상징계로_진입한_오대수

  감금 시설에서 풀려난 오대수는 사회적으로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라캉의 거울 이론을 토대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인간의 주체 형성 과정을 거울 이론을 들어 설명했다. 아이가 태어나 가장 크게 친밀감을 느끼는 가족 대상은 엄마이다. 이때 아이는 자신을 엄마와 동일시하고, 엄마를 거울로 생각한다. 이 단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아이가 조금씩 커가면서 자아가 생기고, 언어를 배우며, 의사소통 표현을 하게 되는 때면 엄마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때 아이는 자기 몸이 통합되고, 사회적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를 매개하는 역할은 아빠가 한다. 이는 상징계이다. 그다음 단계인 실재계는 욕망, 본능과 충동하는 영역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상상계 단계에서 공백이 생기면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생기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것이다. 


  오대수는 사회화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상당히 본능적이고 즉흥적인 상태이다. 그가 풀려나고 처음 먹은 음식은 산낙지였다. 오대수는 자신도 산낙지처럼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듯이 산낙지를 덥석 뜯는다. 그러다 기도가 막혀 쓰러지는데, 그때 일식집 부주방장 미도를 알게 된다. 오대수는 미도를 보고 어딘지 모르게 친밀감을 느낀다. 이것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종의 장치 트릭이 숨겨져 있다. 오대수는 감금 시설에서 텔레비전으로 미도가 나오는 일식집 프로그램을 자주 봤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듣던 민해경의 ‘보고 싶은 얼굴’이라는 노래를 미도가 부르고 있는 장면도 나온다. 이는 오대수가 미도에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둘은 사랑의 감정을 키워간다. 모든 일이 이우진이 계획한 최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오대수는 15년 동안 먹던 군만두를 찾아서 감금 방의 정체를 알아낸다. 자신을 감금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오대수가 인터넷 채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오대수의 닉네임은 ‘몬스터’. 이는 오대수가 상징계에서 사라진, 괴물과 같은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에버그린’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상대가 바로 이우진이다. 이우진은 상록 고등학교 오대수의 동창이었다. 감금한 이유를 알게 되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한 이우진과 이우진이 자신을 왜 가둔 것인지 답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오대수. 이런 이야기 흐름은 오이디푸스 서사를 떼놓고 볼 수가 없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맞닥뜨린다. 스핑크스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져 문제를 풀지 못하면 잡아먹는 괴물이었는데, <올드보이>를 보면 이우진과 스핑크스가 맞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스핑크스는 상징계의 질서를 깨트리는 재앙과 같은 존재였고, 이우진도 이와 마찬가지인 인물이다. 오대수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이우진은 마치 잔혹한 게임을 주도하는 듯 보였다. 


  #복수의_시발점

  마침내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 동안 감금한 이유가 나온다. 고등학생 때 오대수는 우연히 학교에서 이우진과 이우진의 누나인 수아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다. 창문을 통해서 그들을 본 오대수는 친구인 주환에게 자기가 본 것을 말한다. 어찌 보면, 오대수는 수아와의 관계 진전과 같은 자기는 성취하지 못한 욕망을 누군가 성취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말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도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오대수의 말실수는 소문으로 이어졌고, 수아가 임신했다는 소문까지 돌게 된다. 수아는 자신이 진짜 임신했다고 생각해 목숨을 끊는 것을 선택한다. 이우진은 오대수의 혀가 누나를 임신시켰다고, 오대수를 향한 복수의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왜 가두었는지가 아니라, 왜 풀어줬는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오대수는 이우진이 준비한 보라색 상자를 열어본다. 자신과 부인, 그리고 딸아이가 찍힌 사진, 한 장씩 넘기니 딸의 커가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딸은 오대수의 사랑하는 연인 미도였다는 충격적인 결말을 가져온다. 오대수는 자신의 딸과 사랑을 하고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우진의 처절한 복수를 위한 시나리오 속에 오대수가 들어가 있었다. 


  이우진이 수아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을 팔을 뻗어 막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15년 만에 트렁크를 열고 나온 대수가 강아지를 안고 자살하려는 남성을 막는 장면과 겹친다. 오대수가 깨진 창문을 통해 이우진과 수아의 정사 장면을 본 것처럼 우진도 오대수와 미도를 보는 장면도 나온다. 결국 오대수와 이우진의 행동이 똑같은 욕망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우진은 ‘모래알이나 바윗덩어리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을 한다. 모래알처럼 작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오대수의 말실수 하나가 자기를 여기까지 끌고 오게 했다는 일종의 잘못된 정당화를 보여주고 있다. 근친상간이라는 자기 잘못을 오대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오이디푸스_서사구조로_바라본_올드보이

  <올드보이>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의 본질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함에 있다고 말하였다. 사회적 시선과 도덕 윤리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욕망을 마주한 개인의 추악한 모습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온다. 다만, 그런 추악함 속에서도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오대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이우진의 복수에 희생당했고, 미도와의 근친상간도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민이 담긴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오대수는 마지막에 최면술사를 찾아가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우고자 한다. 오대수는 오이디푸스 서사 구조 안에서 근친상간의 죄책감으로 자기 자신을 처벌한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른 것처럼 오대수는 자기의 혀를 자른다. 본인의 말실수로 야기된 비극적인 결말을 징벌하는 것이다. 이우진도 자기 처벌을 수행한다. 이우진은 누나를 끝내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신들을 비난하는 사회적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우진은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며 죽음에 이른다. 오대수는 살아있고 이우진은 죽었다. 그들의 자기 처벌은 상징적인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혀를 자른 오대수는 상징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우진은 자기 처벌을 함으로써 기존에 속하고 있지 않던 상징계 구조 안으로 들어온다. 이우진은 우리는 다 알면서 사랑했는데, 너희도 그럴 수 있느냐고 오대수에게 묻는다. 이 또한, 스핑크스가 던지는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어쩌면 오대수는 답을 풀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우진은 끝내 문제의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오대수의 몫으로 남겨두기만 한 것처럼 보였다.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훌륭한 비극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상호 간의 인과 관계에서 사건이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즉, 주인공의 운명이 반전이나 발견을 모두 수반하는 복합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발견과 반전이 결합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고,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느낀다고 보았다. 따라서 비극의 주인공은 점잖은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마르티아’, 흔히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한 사람이 곧 그런 인물이다. 그래서 오대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알맞다.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평범한 인물인 오대수는 이유도 모른 채 상징계에서 사라져 기약 없는 나날을 감금된 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감금된 이유가 말실수라는 과실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오대수가 행복한 삶에서 불행한 삶으로 전락한 것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과실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대수가 현대판 오이디푸스, 비극의 전형적인 구조 속에서 탄생한 비극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올드보이> 속에서 한 문구가 나온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였다. 우리가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넘나들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봤다. 희극을 마주했을 때와 비극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다르다. 비극을 맞이한 주인공은 더욱 외롭고 근엄해 보이기까지 한다. 오대수가 ‘아무리 짐승보다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부분은 비극의 순간에 몰린 주인공의 처절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직접 자기의 혀를 잘라 징벌을 내리고, 눈 내리는 들판에서 기억을 지우고자 최면을 받는 그를 보며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다. 

  #미도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던 미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우진의 ‘이에는 이, 눈에는 이’ 식의 복수로 인해 희생자로 전락한 건 사실 오대수뿐만이 아니고, 미도가 있다. 미도가 폭력의 영문 모를 피해자로 영원히 남아있게 되어버렸다. 미도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재를 겪으며 가족관계에 공백이 생겼다. 자신이 고아로 자라게 된 이유도 모른 채 커갔을 미도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우진의 보이지 않는 보살핌으로 그저 살아있는 상태였다. 그런 미도에게 오대수는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이우진은 근친상간이라는 사회적 금기를 깨트리고 다 알면서 수아와 사랑을 했다. 그래서 수아를 끝내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고통을 받는다. 오대수와 미도의 사랑은 결이 다르다. 사회적 금기인 줄 모르고 행한 사랑이 근친상간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간의 감정이 모조리 고통으로 돌아온다. 오대수는 영원히 미도가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길 원할 것이다. 오대수와 미도가 함께 있는 눈밭은 모든 비밀과 고통을 뒤덮어줄 정도로 새하얗다. 망각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하얀 눈밭에서 미도는 오대수를 안아준다. 빨간 옷차림의 미도는 눈사람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녹아 사라질 그 아름다운 생명체는 ‘사랑해요, 아저씨’라고 말한다. 그 순간 영화는 지극히 아름답고 추악한 비극의 완결점에 도달한다. 

  

  #올드보이의_숨은_의미

  마지막으로, ‘올드보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이우진을 가리키는 단어이지 않을까. 올드보이는 나이가 많은 소년을 의미한다. 역설적인 표현이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됐지만 어린 시절에 갇혀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우진의 상실감과 그의 처절한 복수를 위해 엉겨진 시계의 초침들. 복수의 시간 동안 이우진 또한, 많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마침내 갇혀있던 어린 시절에서 풀려나오지 않았을까. 복수의 끝에서 어떠한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영화 <올드보이>의 비극적 서사구조에 대해 살펴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비극의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 서사 구조 안에서 비극에 휘말리는 주인공, 그리고 사회적 금기인 근친상간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드보이>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불편함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영화는 지극히 추악한 것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고,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유의미한 지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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