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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ee May 18. 2023

ep.2 [멕시코] 40시간의 하늘 위 여정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멕시코시티까지



ep2.

40시간의

하늘 위 여정


정신없는 한 달이 흘렀다.

그간의 행적이 보일 것만 같은 혼미한 표정으로 화면 속 비친 캘린더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늘까지 모든 작업이 끝났으면 좋았으려만.. 결국 노트북을 가져가야 하잖아?

예상은 했었지만 맘에 썩 들지 않다는 듯이 얕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트북을 닫았다.

노트북 주변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공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번진 스케치가 즐비한 무지 공책 위에 조그만한 다이어리가 놓여있고 바로 옆에는 익숙한 듯 낯선 알들이 빼곡한 책 하나가 쳐져 있었다.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눈앞의 난잡함을 재빠르게 정리하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벌써 2일 뒤야..

여행 준비라고는 2주일 전에 비행기표, 1주일 전에 ESTA비자 발급, 그리고 며칠 전에 예약한 첫날 숙소와 프리다 칼로 박물관 티켓이 전부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여유로운 풍채를 풍기며 청소를 이어갔다.


눈에 띄게 깔끔해진 방을 나와 이번엔 거실로 향하였다. 베란다 구석에 마중 나온 캐리어 두 개 보인다.

캐리어 앞에 서니 아까의 여유로움은 어디 가고 두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작은 기내용 캐리어와 묵직한 캐리어. 둘 중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턱에 손가락 하나를 갔다 대어 아주 짧은 고민을 하다가 늘 들고 다니던 큰 캐리어를 힘겹게 들고 짐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OO아, 캐리어가 너무 큰데??
혼자 들기엔 너무 힘들어

안방으로 향하던 도중 잠시 멈춰 엄마가 말을 건넸다. 눈앞에 훤히 띄는 여유공간들을 보니 내가 봐도 이건 쓸데없이 너무 크다. 돌아올 때 늘어날 짐들이 걱정되다만 옷도 적게 들고 가고 최소한의 짐만 가져가니 어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기내용 캐리어에 옮겨 담았다.


다음 날이 찾아왔다.

정신줄을 한 번 놓으면 한없이 덜렁거리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나는 다시 한번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작업들을 확인하고, 여행 가서 끝맺어야 할 작업들을 체크하였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컴퓨터에 있는 모든 데이터들을 아이클라우드에 옮긴 후, 서랍에 박혀있던 오래된 핸드폰을 하나 챙겨 캐리어 깊숙한 곳에 넣었다. 이전 여정의 과정에서 잃어도 보고 뺏겨도 보며 기계는 잃어버려도 데이터만큼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나만의 큰 깨달음의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기내에 들어갈 비자와 백신 관련 서류, 그리고 가장 귀중한 노트북과 여권이 잘 있는지까지 확인한 후, 핸드폰을 들어 곧 머무를 공간이 만화체로 담겨진 영화 코코를 보며 여행 전 설렘을 만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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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알림의 첫 음이 나오자마자 두 눈 번쩍 떠졌다.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상쾌해진 입 주변의 물기를 닦고 칫솔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며 거실로 향하였다. 깜깜한 새벽의 시간, 혹여나 누구라도 깰까 어둑한 거실에 우둑하니 서서 빠트린 짐은 없는지 처음부터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하늘에서의 속 편한 여정을 위해 귀미테까지 붙여주었다.


이젠 정말 모든 준비를 마쳤다. 비장하게 가방과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캐리어를 들고나가려는 순간 엄마가 잠이 덜 깬 눈으로 거실로 나왔다.


엄마가 데려다줄게

현재 아빠는 지방근무로 평일이 되면 지방으로 내려간다. 이 깜깜한 새벽에 딸을 홀로 보낼 수 없는 엄마는 아빠대신 마중 나가겠다고 졸린 눈을 꿈뻑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해외여행을 온전히 홀로 떠나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무엇보다 어른들에게는 생소하고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멕시코로 향하기 때문에 떠나는 길을 두 눈으로 봐야 마음이 편한 듯하였다.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깜깜한 검은색의 새벽을 마주하러 현관문 앞에서 섰다. 나아갈 여정을 위한 기도를 읊조리고 문을 열자마자 두 뺨에 부딪히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매끄러운 바닥과 바퀴가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조용한 공백 속에서 치고 들어오는 바퀴 소리에 이제야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며 긴장감과 설렘 그 사이가 간드럽게 균형을 맞춰갔다.


3년 3개월 만에 마주하는 공항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여행이 가고 싶을 때면 늘 지나가는 공항버스를 바라보며 잠시나마 추억을 회상하고 다가올 여행을 기대하였는데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운영이 중단되어 내심 속상한 마음이 있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공항버스와 재개된 나의 여행의 기쁨을 곱씹으며 어서 버스가 오기만을 바라였다.


'인천공항' 네 글자의 단어가 커다랗게 적힌 버스가 다가온다.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를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고 늘 앉던 익숙한 자리에 앉자마자 스르륵 눈이 감기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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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웅장하게 퍼지며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가 번갈아 들려온다.

올림픽대로를 따라 흘러가는 한강의 물줄기를 보며 설렘을 느꼈던 이전의 탑승과 달리 잠에 바로 든 탓에 눈 깜짝할 새 도착해버렸다. 그리웠던 공항. 그리웠던 게이트. 그리웠던 거대한 모니터 속 비행기 일정표들. 이른 시간임에도 쿠바여행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밝은 표정들이 비치는 사람들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산뜻한 발걸음으로 공항 안에 들어섰다.


수하물을 부치고 딱히 할 게 없었던 나는 바로 출국심사로 향하였다. 공항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검사대도 새롭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 비행은 기다리는 줄 없이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혜를 준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짐이 가득한 가방을 열어 묵직한 노트북을 꺼내고 홀쭉해진 가방과 카메라를 올려둔다. 그리고 직원의 손짓에 두 팔을 머리에 갖다고 기계가 내 온몸을 스캔하면 귀찮은 일은 끝이다. 가벼운 몸으로 기계에서 빠져나와 검사대에서 뱉어내는 짐을 가져가려는 순간, 검사대 직원은 갑작스레 나의 가방을 가져갔다.


문제될 만한 물건이 전혀없었기에 영문도 모른 채 직원을 뒤따라 섰다. 직원은 나와 마주한 채로 가방을 열더니 안에 있던 하늘색 파우치를 하나 꺼내 들었다. 비행기를 타면 멀미와 체를 동시다발로 하는 나를 위 각종 약들과 손톱깎이, 가위를 챙긴 파우치였다. 빵빵한 파우치를 열어 쏟아질 것 같은 내부를 쓰윽 살펴보시더니 원하는 목표를 찾은 듯 바로 물건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바로 나의 애정품이자 골동품 15년산 가위였다.


잠시만요 지금 내새끼를 눈앞에서 떠나보내라고요..?

물건을 아무 생각 없이 막굴리는 사람이다만 간혹 이상한 포인트로 애정하는 나만의 물건들이 있다. 그중에는 나의 15년 산 가위 그리고 어엿 10년은 된 것 같은 손톱깎이가 있다. 숫자로 메기니 골동품 수준이다만 이 친구들은 새로 산 친구들보다 그립갑, 가위질이 아주 출중하여 늘 나의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성비 최강의 애정템이었다. 나의 모든 해외 여정 내내 바다와 하늘을 함께 거닐정도로 손 떼가 많이 묻은 아이들이었다. 그중 한 아이가 그것도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잘라야 하는 앞머리 전용 가위를 두 눈앞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니 엄청난 속상함이 몰려들어왔다. 직원이 박스 테이프를 길게 뜯어 가위의 칼날을 돌돌 말 때마다 내 입꼬리는 땅바닥으로 내려갔고 축 처진 어깨로 검사대를 빠져나왔다.


아니 근데 생각할수록 개웃기잖아?

사연 깊은 가위와의 예상치 못한 헤어짐에 돌연 속상했지만 가위를 테이프에 말면 말수록 입꼬리가 쳐지는 나와 이를 마주하고 있는 직원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나지않아 민망함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어린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뺏긴거 마냥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는 행동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몸만 컸지 정신은 아직 애 그자체다


조급증에 걸려있는 나는 이번에도 역시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였다. 그래도 괜찮다, 게이트 안에서는 시간 때울 것들이 차고 넘친다. 들어오자마자 눈에 보이는 면세점에 자연스레 이끌려 들어왔다. 면세점에 오면 사고싶었던 향수를 하나 사들고 가려고 일부로 향수를 하나도 안 들고 왔는데 온갖 화장품 냄새와 향수 냄새에 급 멀미가 밀려오면서 5분만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빈손으로 게이트로 향하기엔 시간이 너무 흘러 넘쳐 가는 길에 향수매장 대신 편의점을 택하였다. 물먹는 하마처럼 물을 오지게 먹기 때문에 물을 하나 옆에 두고 멀미 유도를 방지할만한 간식거리인 군밤을 씹으며 손에 쥔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바라보았다.


스트레스가 뭐죠?

바라만 봐도 행복감이 싹 돋는 비행기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군밤을 비우다 보니 어느새 탑승 안내가 흘러나왔다. 80%외국인들과 나머지는 누가 봐도 유학생들로 보이는 한국인들이 승무원들의 지시에 맞춰 움직인다. '흠 이곳에 한국인 여행자는 나뿐인가' 머쓱한 표정으로 나 또한 슬슬 엉덩이 들어 드디어 시작된 여행에 신난 궁둥이를 흔들거리며 늘어진 줄에 합류하였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밝은 승무원들의 인사와 함께 펼쳐진 좁은 의자 틈 사이로 들어왔다. 12시간의 비행은 썩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하늘을 가로지르는 여정은 늘 기분을 들뜨게 한다.


어떠한 교통편에서도 멀미를 빼지 않는 나의 위대한 저질 기관지는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잠재우게 만들었다. 그렇게 2-3시간을 꿀잠에 청하다 바삐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와 쟁반이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뱅기에서 하겐다즈와 스타벅스 실화입니까?

밀폐된 상태로 움직이는 공간에서는 멀미와 더불어 체를 잘하기 때문에 기내식 사육이 썩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출중한 퀄리티에 식도를 개방하였다. 델타 항공은 처음이었는데 기내식과 서비스가 전반적으로 좋아 만족하였다.


그렇게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갔다 오면 다시 또 잠이 들고 잠이 깨면 잠시 영화를 보다가 영화가 지루해지면 지도 보기를 클릭하여 혼자 좋다고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지구본을 굴리며 보길 반복하였다. 혼자 정신없이 놀다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렀겠지?'싶어 비행시간을 확인해 보면 고작 3-4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제발 내보내주..

무엇보다 비행기에서 한시라도 빨리 내리고 싶었던 이유는 지루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큰 엄청난 이유가 있었다. 이번 비행에서는 옆에 있던 승객이 제대로 잘못 걸려 비행이 정말 편치 않았다. 차마 블로그에는 적을 수 없는 비방용 이야기라 언급은 못하겠다만, 자리를 바꾸고 싶었을 정도 이상한 외국인 덕분에 그저 그의 행동을 못 본 체 하며 잠만 자기를 택하였다.


세상엔 또라이들이 참으로 많다


30분의 딜레이 그리고 12시간 30분의 비행. 총 13시간의 존버 끝에 경유지에 도착하였다. 멕시코로 향하기 위해 잠시 들린 경유지는 미국의 디트로이트였다.


디트로이트가 어디쥬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면서 알게 된 도시였지만 생소하였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 도시에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어도 내게 하루라는 시간이 있으니 잠시 이곳을 즐겨보기로 하였다.


납작해진 엉덩이를 들어 그리웠던 상쾌한 공기와 마주하러 간다. 손에 쥐어진 캐리어를 끌고 시내로 향하려니 막막하긴 하지만 일단 핸드폰을 들어 밖으로 향하였다.


근데 나 대체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해..?

단 하루만 있다가기도 하고 이전 LA에서 하루 레이오버 했을 때 비싼 물가에 꽤나 충격을 받 먹을 것을 제외하고는 많은 지출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오늘 밤은 두 발 뻗을 수 있는 숙소 대신 움츠려서 잘 공항노숙을 할 예정이었고, 50달러가 넘는 우버 대신 2달러짜리 로컬 버스를 이용해 시내로 향할 생각이었다. 더불어 유심까지 없어 와이파이에만 의존하는 환경에 미리 로컬 버스 정보를 찾아왔지만, 지도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크나큰 공항에 압도되어 길을 제대로 잃고 말았다.


지도를 따라 어영부영 나온 곳에서는 직원용 버스만이 오갔다. 5분에 한 번씩 오는 버스를 3대 정도 보냈을 때 여긴 도저히 아닌 것 같아 표지판을 따라 버스 환승대로 이동했다. 이번엔 수많은 버스 브랜드가 표지판에 적혀있었다. 내가 타야 하는 것은 숫자가 적힌 버스인데 큼지막한 브랜드 로고만이 눈에 띄는 이곳에서 당황함의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하염없이 돌려댔다.


안희.. 진짜 모르겠어효
아저씨, 혹시 이 버스 다운타운으로 가나요?
OOOO 버스를 찾고 있는데 도저히 모르겠어요..ㅠㅠ

일단 사람이 없는 아무 버스에 머리를 들이밀어 보기로 하였다. 아저씨는 아니라는 대답과 함께 이 한껏 간 내가 안타까웠는지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손을 뻗어주셨다. 너무나 감사하였지만 끝끝내 답은 못 찾고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을 휘젓고 다녔다.


벌써 1시간이 흘러버렸다. 이러다가 바깥공기도 못 마시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와이파이가 되는 곳으로 돌아가 구글에 켜 다시 검색해보았다. 역시나 한글로는 아무리 검색해도 로컬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는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영어로 검색해 보면 혹시 몰라. 역시나 이것도 허탕이다.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구글맵에 찍혀있는 교통 정보였다. 지도에는 분명 지금 장소로 뜨는데 도저히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지도에 표기된 빨간 점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 공간에 대해 박학다식할 것 같은 청소부 직원에게 이 버스를 아냐고 물어봤다.


4층으로 가면 돼


 감사합니닥!!!!!!!

스윗한 미소와 함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 공항이 4층까지 있었다니.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지하 1층과 지상 1층, 2층만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했던 것이다.


얼마만에 맡는 산뜻한 공기인가

1시간이 넘는 방황을 끝에 드디어 내가 원하는 버스 정류장에 마주할 수 있었다.


나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진이 싸악 빠졌지만 바깥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공기를 들이마시며 10여분을 더 기다 로컬 버스에 입성하였다. 거대한 체구와 달리 사람이 몇 없는 버스에 들어오자마자 돈통이 바로 눈에 띄었다. 오직 현금만 된다는 것을 어련히 눈치챈 후, 가방 깊숙한 곳에 있던 지갑을 꺼내들었다.


혹시 10달러도 가능한가요?

태국에산 코끼리 지갑에는 10달러 이상 단위의 지폐로 가득하였다. 약간의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을 건네보았지만 별다른 대답 없이 버스 기사는 앞만 보고 달렸다.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을 때 기사는 10달러를 내면 거스름돈을 다 동전으로 받아야 된다고 짧은 대답을 주었다. 돈은 내긴 해야 하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버스 앞에 서서 애꿎은 지갑만 만지고 있을 때 버스기사는 돈은 됐고 위험하니 뒤에 가서 앉으라고 크게 소리쳤다.


겉보기엔 엄청 화를 낸 것 같지만 안전(?)을 위해 뭐라 한 거라 기분 나쁘다는 생각 없이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심지어 돈은 됐고 앉으라니 나야 땡큐아닌가. 공항에서도 그렇고 버스에서도 그렇고 여자 현인들이 유독 깍쟁이 같은 면이 있으면서도 도와줄 건 확실히 도와주는 느낌이었다.


차가운듯 은근히 느껴지는 친절함에 이곳이 도시이긴 도시구나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주위를 살피었다. 캐리어를 든 여행자는 오직 나 1명이었고 주변엔 현지인들로 가득하였다. 흑인들 사이에서 유일한 황인은 어색한 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무채색으로 색이 변하는 하늘과 수두룩한 무채색 주택을 지나간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빠진다. 작은 버스에서 서로 오가는 이야기를 라디오 삼으며 무채색 도시 속 노란색빛 빌딩을 향해 1시간을 달려갔다.


지도의 빨간 점이 파란색 북마크 표기에 가까워졌다. 이제 다음 정거장이면 내려야 하는 나는 1시간 동안 관찰했던 현지인들을 따라 창문에 걸쳐진 줄을 당겼다.


창문에 걸쳐진 줄을 땡기면 다음 정거장에서 버스가 멈쳤다
하 얼마 만에 밟아본 지상이야

캐리어와 함께 발을 내딛지 마자 시원하게 한마디 내뱉으며 이 도시와 마주하였다.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곧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이었다. 하늘 아래 노란색과 회색 그리고 가끔씩 혼자 튀는 적색의 건물들로 시선을 내리며 심심해 보이는 거리를 누비기 시작하였다.


얼마 없는 사람들로 조용한 거리 속 혼자 튀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민망했던 건지 아니면 비가 올 것만 같은 먹색의 구름이 두려웠던 것인지 재빠르게 점심식사로 할 곳으로 이동하였다.


한 명이요

오후 3시, 사람들 소리보다는 티비 속 야구 캐스터의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피자펍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말로만 듣던 본토 디트로이트 피자라니. 비행기표를 끊을 때부터 꼭 오고 싶었던 디트로이트를 대표하는 네모모양 피자를 파는 식당이었다. 앉자마자 수없이 길게 나열된 피자 종류를 잠시 훑어보다 직원의 추천을 전적으로 믿어보기로 한다. 할 것이 딱히 없는 도시와 여행객들이 전혀 없는 여행은 조금 재미없지만 현지인들로 가득한 이 도시를 관찰하는 일은 내게 충분한 재미거리가 되어주었다. 몇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바라보다가 한가한 듯 바삐 움직이는 직원들을 봤다가 매장에 틀어주는 티비 속 장면들을 보다가 길에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어느덧 내 코에 피자 냄새가 퍼졌다.


너구나?

생각보다 큰 피자 크기에 1차 당황을 하며 직원이 추천해 준 맥주부터 들이켰다. 오랜만에 흘러들어온 시원함에 피곤이 풀리는 듯하다. 이번에는 내 손바닥만 한 피자 한 피스를 들어 올렸다. 외관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바삭함과 미국에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짠맛이 내 혀를 자극하였다.


기내식 사육을 당한 탓인지 피자가 생각한 것보다 커서 그런지 1개 반을 간신히 먹고 나머지는 포장의 길을 선택하였다. 웨이터를 불러 결제를 요청하였다. 이곳의 결제방법은 매우 편리하고도 새로 보는 방법이었다. 영수증을 주더니, 영수증에 적힌 QR로 결제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카드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결제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니..? 정말 별거 아닌 거에 재미를 느끼며 확실히 IT강국 나라는 결제 방식도 다르긴 하구나를 체감하였다.


혹여나 결제가 안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직원에게 확인까지 한 후, 안 그래도 무거운 짐에 피자박스까지 추가된 무직해진 양손으로 다시 밖을 나왔다.


도시에서 할 것은 생각보다 더 없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다녀 보았지만, 관광도시가 아니었기에 특별한 재미거리는 없었다. 정처 없이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다 몸에 스친 빗방울에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 순간 얼굴에 떨어지는 수많은 물방울을 들이받으며 예정된 비를 맞게 되었다.


당장 그칠 것 같지 않는 빗방울에 어느 곳이든 들어가야 했다. 한국에서는 안 파는 음료들을 먹어보기 위해 피자펍에서 미리 찾아둔 스타벅스 매장으로 달려갔다. 축축해진 피자박스와 물방울이 가득한 캐리어를 자리에 내려두고 생쥐꼴로 계산대 앞에 섰다. 미리 찜해둔 메뉴를 다시금 확인한 뒤 주문을 하려는 찰나 인싸 재질의 아주머니가 인사를 하며 스타벅스 매장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를 주문을 하려는 나를 발견한 후 가까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말을 건넸다.


너 너무 아름답다!!!!! 어느 사람이야?
제가 혹시 아주머니 음료까지 결제해야 할까요?

장거리 이동으로 못 씻어 매우 꼬질꼬질한 상태에서 비까지 맞아 물미역이 된 나를 보고 향한 말이었다. 독특하신 아주머니의 취향에 놀라고 갑작스러운 칭산세례와 질문세례에 당황했지만 밝은 환대에 기분이 괜시리 좋아졌다.


보라보라

피자펍에 이어 이곳에서도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직원분이 번호표를 안 주고 음료를 모든 손님에게 직접 자리까지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 도시가 그런 것인지 이 스타벅스 매장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갑작스러운 엄청난 친절들에 몸 둘 바를 어찌할지 몰랐다. 갖다 준 용과에이드를 한 모금 크게 삼키니 샤워 후 제티 털어마셨던 옛 생각이 스치면서 기분을 한층 더 시원하게 해주었다. 스타벅스 오는 길에서도 피자박스를 든 나를 향해 '피자 맛있겠다.. 나한테 주라' 하며 장난치는 분도 계셔서 깔깔 거리며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심심한 도시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니 이만하면 후회되지 않는 레이오버라고 생각되었다. 겉은 차갑고 크나큰 특색이 없어 보이는 무채색 끝에는 차가움 속의 친절, 그들만의 따뜻한 노란색 빛을 보았다. 먹색의 하늘 저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노란색의 해를 어렴풋이 짐작하며 이번엔 2달러를 손에 쥐고 로컬버스에 올라타 이곳에서의 짧은 여행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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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공항은 우리나라 공항과 달리 탑승하기 10시간 이전에도 체크인이 가능하였다. 맘 편한, 몸 따뜻한 공항 노숙을 하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매우 이른 체크인을 하러 이동했다.


노숙할 곳 좀 찾아볼까?

남은 피자를 먹으며 잠시 한국에 보내야 할 작업을 하다가 11시경 잘 공간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게이트 내부를 훑기 시작하였다. 장거리 비행을 몇 번 경험해본 결과 대부분의 경유지와 공항에는 의자에 팔걸이를 붙여 둔다.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누우면 외관적으로 좋지 않으니 일부로 붙여두는 경우가 많다. 이곳도 역시 팔걸이들이 다 붙여있어 눕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디트로이트 공항 내부에 호텔이 있어서 그런지 나 같은 공항 노숙을 하는 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 같은 이들이 꽤나 있으면 눈치 덜 보고 누울 만한 공간을 어찌저찌 찾을 수 있는데 새벽 비행기 탑승자들과 매장 직원들 밖에 보이지 않아 앉아서 자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눕는 거를 세상 좋아하는 나는 집 밖에 나오는 순간부터 바닥에 등도 못 붙여보고 35시간을 흘러 보냈다.


아침 7시, 애매한 잠을 지속하다 보니 드디어 비행기 탑승할 시간이 찾아왔다.

이제 5시간의 비행만 마치면 내가 그토록 바라던 곳의 땅을 밟아볼 수 있다. 이젠 내겐 5시간 비행은 잠 한 번 자면 도착하는 단기이동이다. 애매한 잠을 잔 탓에 꽤나 피곤했던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잠 청하며 마지막 비행에 지친 몸을 맡겼다.


하 진짜 고생 많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40시간의 여정에 꽤나 지쳤음을 알리며 드디어 낯선 냄새로 가득한 이곳에 닿았다. 여행도 시작 전에 이미 여행을 다 한 것만 같은 지친 기색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길게 나열된 입국대기줄에 섰다. 수많은 인파와 시끄러운 분위기. 나라마다 입국장의 분위기도 가지각색이다. 그리고 입국장에 놓인 나의 외관도 늘 가지각색이다. 홀로 피부색과 생김새가 눈에 띄는 나는 이전 입국장에서와 달리 온몸에 새로운 장비들이 불어나있었다. 앞으로 맨 가방에 가려진 허리복대와 그 사이를 잇는 꾸불꾸불한 줄을 따라가면 핸드폰이 있었다. 더불어 한층 시원해진 아웃핏으로 십여분을 기다리다 손을 든 직원에게 다가갔다.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을 잠시 오가다 초록색 인장이 나의 초록색 여권에 찍혔다. '도장 색상마저도 초록색이라니, 멕시코에 오긴 왔구나' 여권에 새롭게 찍힌 도장을 바라보며 지친 몸을 씻겨주듯 설렘이 밀려들어왔고 그 위엔 긴장감이 쌓아 올려졌다.


막 올라온 떨림도 다 느끼기 전 멕시코에서의 첫 공기를 마시기 위해 마지막 부스터를 끌어올려야 하였다. 이곳의 지상을 밟기 위해서 환전과 유심구매 그리고 택시 예약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익숙한 공항의 모습에서 빠져나오면 1층에 빽빽이 나열된 환전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수없이 나열된 환전소에 잠시 멘붕이 오다가 정신을 차리고 투명한 문에 걸친 모니터 속 크게 적힌 숫자들을 비교하며 내 나름대로 신중을 다했다. 고민 끝에 달러를 멕시코페소로 바꿀 때도 페소에서 달러 바꿀 때도 가장 최적의 숫자가 적힌 조그마한 환전소 앞에 서서 첫 번째 할 일을 마쳤다.


후 환전만 했는데 벌써 30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다. 이번엔 유심을 찾을 차례다. 1층을 휘젓고 다니는 내내 일반적인 공항들과 달리 눈에 띄는 유심가게가 보이지 않았다. 대게 누가 봐도 외관상 '나 유심가게야!!!!'가 보여야 하는데 이곳은 암만 봐도 환전소 아니면 먹는 가게로만 가득 차 있었다. 무식하게 발만 계속 뻗다가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 지나치는 직원과 인포메이션 직원 등등 직원들이 보이는 족족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심카드 파는 곳이 어디에 있나요??

영어가 안되시는 직원은 젊은 직원을 부르더니 내게 붙여주었다. 이번에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젊은 청년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바로 몸을 돌렸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매장 앞에까지 데려다주고 확실하지 않지만 이곳에 있을 거라고 말을 해주며 쿨하게 떠났다.


도착한 곳은 'oxxo' 문구와 함께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과일을 파는 비좁은 편의점이었다.


여기에 유심이 판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지으며 길고 좁은 공간에 맞춰 줄을 선 사람들 뒤에 섰다. 줄이 줄들 때마다 의구심은 점차 커졌지만 아는 것이 전무한 나는 일단 밑져야 본전이다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혹시.. 심카드가 있나요..?

이미 없을 거라는 확신을 한 채 입을 떼자마자 주인은 뒤를 돈뒤 심카드를 쓰윽 내밀었다. 반가운 카드의 등장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지갑을 열려고 하는 순간, 직원이 말을 붙였다.


2기가짜리 밖에 없는데 괜찮아?

10일간의 여행에서 2기가라.. 밖에서 지도보고 검색을 하면 금방 닳는 양이기에 잠시 고민을 하다 더 큰 데이터를 파는 곳은 없냐고 물어봤다. '[모빌]이라는 매장을 가면 있을 거야'라는 대답을 얻고 가벼운 손으로 이곳을 나왔다.


다시 1층을 둘러봤지만 모빌이라는 매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넓은 이 1층의 공간을 대체 몇 번을 온 간 것인지.. 지겨움에 험한말이 올라오기 직전, 이번에도 눈에 보이는 젊은 현지 직원마다 말을 건네며 그들이 알려준 곳으로 또 다시 이동하였다.


저깄다!!!!

드디어 찾은 통신 매장에 기뻐 캐리어가 바닥에서 떨어질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매장 안에 들어가자마자 여러 종류의 심카드를 발견하였다. 휴 일단 다행이다. 안도의 긴 숨과 함께 심카드 앞에 다다르니 이곳의 데이터 크기도 크게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실망감과 동시에 이번엔 기겁을 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물건을 구매하려던 나는 '$'표기에 당황하며 미국 달러로 혼동을 하고만 것이다. 사람이 당황하기 시작하면 정말 한 없이 멍청해지는데 지금 바로 내가 딱 그 상태였다.


사람이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아니 유심칩 가격이 제일 싼 게 100달러라고?? 미친 거 아니야?

미친 것은 나 자신인데 자기객관화가 덜된 나는 충격을 먹으며 허탈한 발걸음으로 매장 밖을 나왔다. 현재 시각은 1시. 입국도장을 찍은 지 어엿 1시간이 넘었다. 18시간의 비행, 22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1시간의 방황. 2일간 장시간 비행부터 비까지 맞고 공항노숙을 하며 길까지 잃은 나는 지쳐버릴 때로 지쳐 넉넉한 데이터는 안중에도 없고 제발 씻고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하였다. 그렇게 기나긴 방황의 끝은 순정으로, 첫 매장으로 다시 향하였고 작고 소중한 2기가의 유심으로 갈아 끼운 후에야 공항에서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간절했던 이곳의 공기를 여유롭게 들이마시기도 전, 눈앞에 보이는 택시 매표소로 가 숙소까지 이동 금액지불하고 바로 앞에서 손짓하는 기사님을 따라 택시에 탑승하였다.



올라, 부에나스 따르떼스-!

인사말과 함께 드디어 드디어 택시에 올라탔다.

여행의 첫인상은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정해진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라디오 소리와 함께 흩날리는 머리를 돌려 열려있는 창밖을 바라다. 말도 안 될 정도로 푸른 하늘 아래 익숙한 형형색색의 건물 속에 낯선 선인장과 벽화들. 낯선 냄새 속에 익숙한 매연 냄새. 익숙함에 '이곳이 중남미지'를 느끼고 낯섦에 '이곳이 멕시코이구나'를 느낀다. 두근대는 심장이 낯섦의 설레임인지 긴장감인지도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으로 화려한 색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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