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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ee Aug 21. 2023

ep.5 [멕시코] 추억이 되어줄 이날의 하루

멕시코의 똘란똥고에서


ep5.

추억이 되어줄
이날의 하루


유난히 발이 한가하지 않았던 하루의 끝, 베갯잇에 파고들어 혼잣말을 반복해서 읊조린다.


하 미치겠다.. 진짜 너무 귀찮은데 어떡하지?

침대에 널브러져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아직 다가 오지도 않은 귀찮음에 미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가 길었던 만큼, 내일을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운 모양 새였다.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니 이자가 참 지칠뻔하기도 하였다. 눈을 뜨자마자 어제 잘못 들린 프리다칼로 뮤지엄을 다시 다녀오고 룸메 언니와 멕시코의 부자 동네 뽈론꼬로 향한 뒤, 동네로 돌아가자마자 B언니와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잠시 만나 이야기하고, A언니와 호텔 루프탑에서 잠시 수영까지 마친 후, 마지막 만찬으로 대만음식으로 배를 채우고서야 지금 이 자리에 누워있을 수 있게 되었다.


눕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저질체력 때문인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침대에 한 몸이 되어있는 나에게 룸메언니가 말을 건넸다.


그래서 내일 똘란똥고 가기로 했어?

정신없는 하루 틈에 잠시 B언니를 만난 이유가, 아직 벌어지지도 않는 일에 대한 귀찮음에 머리를 쥐어뜯었던 이유가, 바로 '똘란똥고'였다.


똘란똥고, 너 때문에 멕시코에 왔는데 이렇게 귀찮아질 수가...

'거대한 규모의 자연 동굴 온천'이라는 웅장한 말 뒤에 가려진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꽤나 험난한 여정을 예정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만 4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경유하는 일은 물론이다. 더불어 이전에 모여진 4명의 여행자들 중 동선과 일정이 맞지 않아 B언니와 나, 단둘로 줄어들고 1박 2일 여정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와야 하는 상황에 왕복 8시간의 장정은 꽤나 우릴 두렵게 만들었다.


언니 우리 내일 가요... 마요...

자그마한 MAYO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1시간가량 의논한 것이 무색하게 전화의 첫 대화는 다시 원초적인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다행인 것인지 언니 또한 나와 동일한 마음이었다.


마음만큼은 이미 버스 탔는데 몸이 너무 귀찮은데 어떡하져...

반복되는 말의 핑퐁을 오가다 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 이제는 정말 결정할 때가 왔다. 결정장애가 생길 때는 가장 쉬운 방법은 '본능'에 이끄는 것이다. 가고 싶다고? 그럼 가! 아니 근데 몸이 귀찮다니까? 그럼 가지 마! 에서 끝난던 대화에 한 가지를 덧붙여보았다. '그럼 출발 시간을 늦추면 되잖아?!!!'


밤새 붙든 전화는 단순하지만, 다소 멍청한 쳇바퀴 같은 결론이 아닌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현명한 대답에는 도달할 수 있었다. 버스 간격으로 인해 물에서 놀 수 있는 시간이 2시간이나 줄어들었지만, 우리가 가기도 전부터 고민을 하게 만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한 막심한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

.

.



북부터미널이요

새벽에 맞아야 할 차가운 바람을 해가 다 뜬 상태로 맞으니 가는 길이 지금 메고 있는 짐처럼 한결 가벼워졌다. 버스 티켓도 먹을 것도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지만, 일단 늘 그랬던 대로 머리 먼저 들이밀어보는 거다.


처음으로 마주한 거대한 북부터미널은 익숙한 터미널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나 왼쪽의 맨 끝, 유난히 자그마한 창구 앞으로 향하였다.


언니!!!!!!

용케 그들은 만나였다. 이제는 걷잡을 수도 없다. 창구에서 익스미낄판으로 가는 티켓을 구매까지 하였으니, 정말 똘란똥고로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엉덩이만 붙이면 맘 편히 갈 수 있는 패키지 대신 선택한 고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몇 안 되는 불투명한 인터넷 세상 속의 정보만으로 가지고 떠나는 여정의 길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총기소지 국가인만큼 버스 티켓확인부터 짐검사를 힘들게 이어갔고 수많은 대기열과 소음 속에 합류하였다.


빽빽하게 나열된 거대한 버스를 틈 사이에서 유난히 몸집이 작은 버스가 오늘 우리와 함께 할 버스이다. 기사님께 '익스미낄판!!!'을 외치며 이곳에 도착하면 알려달라고 간절하게 말한 뒤에 자리로 향하였다.


똘란똥고... 가긴 가는군하...
탑승 완!

작은 버스는 빠르게 사람들로 채워지고 그에 맞춰 버스도 떠날 준비를 마치었다. '치-' 첫음을 울리며 작은 몸집이 움직였다. 동시에 고요했던 버스 맨 앞의 티비 한 대가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었다. 소음과 소리 그 사이의 데시벨에서는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이질감에 한껏 놀라 크게 뜬 두 눈으로 빼꼼 티비를 바라보니 한국인이 주인공인 멕시코 영화와 함께 오늘의 진짜 여정이 시작되었다.


경유지까지 향하는 3시간 내내 단 한순간도 조용할 틈을 주지 않았다. 티비는 버스가 떠나가라 울려 퍼졌고, 잠시 정차한 틈 사이에는 상인들이 차례로 들어오며 먹을 것을 팔고 빠지셨다. 정신없는 눈앞의 풍경을 돌려 밖을 바라보면 바로 옆 장난감같이 작은 4인승 올드카에 6명이 낑겨앉아 타고 있었다. 버스 내부와 외부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정신이라는 게 하나도 없다. 근데 이 광경이 왠지 모를 친숙함에 반가움을 느꼈다.


아날로그 끝 시대를 지나오고 자란 90년대 후반의 아이는 어느덧 커 버려 현대문명이 완벽하게 수용되어 있는 한국에 살고 있다. 거리를 드나들면, 도로에는 반짝거리는 새 차들과, 양 옆 도보에는 에어맥스를 귀에 꽂고 지나 드는 사람들을 보면 이곳이 한국이고 서울임을 느낀다. 잠시 눈을 감은 사이에 익숙했던 현재의 한국을 떠올리다 눈을 떠 펼쳐진 이곳을 바라보면 지금의 한국에서는 없는, 00년대의 한국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잊고 지냈던 향수에 젖어 이곳을 있는 그대로 즐기다 보니 기사 아저씨가 익스미낄판을 외쳤다. 3시간, 생각보다 금방이다. 얼추 우리와 비슷한 여행객으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내려 마지막 버스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 핸드폰을 켜 캡처해 온 내용들을 빠르게 훑어보고 거리로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똘란똥고?

누가 봐도 똘란똥고 가게 생겼던 우리를 보고 붙잡았다. 버스 정류장까지 승합차를 타고 가란다. 걸어서 가면 20분, 차로 가면 10분. 15~20분 뒤에 똘란똥고로 가는 버스가 출발한다. 그리고 그 버스를 놓치면 무려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예상치 못했던 차량 탑승 제안이었지만 놓치는 순간 똘란똥고 근처에 발을 디딛지도 못할 수도 있었다.


다들 얼마 내라고 하였어요?

장기 여행을 하고 있던 언니는 사기꾼들의 행보에 도가 터있어서 앉자마자 승합차에 타고 있던 다른 관광객들에게 가격을 물었었다. 다행히 가격은 똑같았지만, 블로그에 적힌 금액보다 5페소가 더 많은 사실에 괜히 찜찜한 마음이었다. 여행을 하면 한 푼 한 푼이 귀하지만, 싸울 체력도 없고 시간도 없었던 우리는 여지없이 승합차에 몸을 맡기기로 하였다.


익스미낄판 시내를 지나 10여분을 지나니, 천막으로 만들어진 작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분명 지금 와야 하는데? 무슨 버스이지..?'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서 출발하려는 버스에 손을 흔들며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똘란똥고??? 똘란똥고 갈 거예요!!!

급한 마음에 똘란똥고를 외쳤지만 고개를 젓는 기사님에 이 버스가 아닌가 하고 다시 내렸다. 그러고 천막에 있었던 관광객에게 물으니 저 버스가 똘란똥고 가는 버스가 맞다는 것이다. 한껏 급해진 마음에 다시 손을 흔들고, 다른 관광객들도 입석을 한 후해야 버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마 기사님은 버스가 만석이라 처음에 돌려보낸 것 같았었다. 1시간의 버스 길을 서서 이동해야 했었다. 서있는 사람들 마저도 꽉 차있었다. 내 뒤에는 갓난아이를 앉고 1시간을 함께 버텨내어야 했었다. 딱 봐도 쉽지 않은 여정이겠지만, 일단 제시간에 탔으니 반은 성공이다.


용케 용케 마지막 버스도 탑승 완
고생길 가보자고~

똘란똥고로 향하는 버스는 만화 속에 나오는 버스처럼 귀엽게 생겼었다. 미국 만화에서나 볼법한 스쿨버스 느낌의 버스로, 앞 창문에 도착지가 마카로 적혀있고 이용금액 8페소가 거대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번 버스 또한 조용히 가질 않았다. 1시간 내내 특유의 멕시코 뽕짝노래가 울려 퍼졌다. 신나는 뽕짝노래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골 풍경에 멕시코 와서 처음으로 관광여행이 아닌 진짜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30분을 평탄한 시골길을 이어가다 갑자기 엄청난 절벽길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구불구불 가파른 절벽이 이어진다. 아니 잠깐만...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스토리인 걸...?


절벽을 가른다고는 아무도 말 안 했잖아;;
근데 시작부터 넘 재밌잖아???

멀미가 유독 심한 내가 꽤나 흥분을 했었던 것인지 이례적으로 멀미도 전혀 안 하고 아주 재밌게 이 길들을 즐겼다. 심심하면 옆에 있는 애기를 보다가 애기가 고개를 잠시 돌리면 창밖의 절벽 아래로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았다. 절벽을 가르는 길에 서서 가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지만, 뽕짝 노래가 묘하게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울다가 마주친 커여운 애기 :>
너도나도 찍을 수밖에 없는 바깥풍경

이젠 정말 끝이 보이는 것인가..? 슬슬 지침이 오려고 할 때 절벽 끝에 푸른빛이 희끗희끗 보였다. 점점 푸른빛과 가까워지는 순간 승객들의 흥을 돋우던 노래도 꺼졌다. 후 이제는 정말 도착인 것인가? 생각한 것보다 더 고생스러운 똘란똥고의 길이었다. 무려 5시간의 대장정의 끝에, 너무 기뻐 나도 모르게 머리 위로 박수를 쳤다. 그리고 가만히 있던 현지인들이 두 팔 벌려 머리 위로 박수를 치는 나를 보고 웃겼는지 함께 환호해 주었다.


내가 왔다 요놈덜아

환호와 함께 도착을 한 줄 알았으나.. 머쓱하게도 잠시 티켓을 사기 위해 정차한 곳이었다. 티켓을 사고 바깥공기를 마신다음 10분을 더 거스른 끝에 드디어 드디어 도착을 하였다.


쥴라게 보고 싶었다!!!!!!
광기 넘치게 물놀이 시작해 보자군하

여행을 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가치 중 하나는 고생을 즐기게 된다. 왜냐면 그 끝에 맛 보일 과실이 너무나 달 걸 알기에, 무엇보다 고생하는 과정 또한 재미요소가 되어준다. 물놀이 전부터 여행을 이미 끝난 것 같은 고생을 맛보게 해 주었지만, 물냄새와 파란 물줄기가 내 눈앞에 다가올수록 눈과 입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5시간을 달려온 이유....

밀키스 색깔로 가득 메운 자연의 온천수. 이곳을 오기까지 매우 귀찮아했던 어제의 나였는데... 용케 이곳까지 오게 만들어준 바로 옆에 있는 언니와 희미하게라도 이곳을 가고 싶다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던 나의 두 번째 자아가 너무나 기특하여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내게 너무나 흥미로웠고, 눈앞에 펼쳐진 빛과 날씨는 이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물에 들어가기 전, 기나긴 이동으로 아직까지 식사를 하지 못했던 우리는 북부터미널에서 사 온 파파이스 버거를 꺼내 들었다. 앉을자리는 그저 그늘이 있다면, 그곳이 나의 식사자리인 것이다. 수많은 인파들로 겨우 찾은 그늘에서 햄버거를 들었을 때 단 한 가지 빠트린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널 어케 참니;;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첫끼를 먹는 우리는 허겁지겁 햄버거랑 맥주를 들이켰다. 자갈 위에서 수영복만 입은 채 먹는 식사는 꿀같았다고 엉덩이는 매우 아팠다. 작고 뾰족한 돌들이 나의 새로운 타투로 새겨져 갈 때 뒤에 있던 현지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손짓과 함께 말을 건넸다.


일루 와, 우리 돗자리에 앉아

순간 호의보다 혹여나 소매치기에 대한 염려 때문에 약간의 경계를 하였지만, 돌멩이들에게 짓눌려 소리치고 있는 엉덩이의 외침에 따라 돗자리에 냉큼 올라탔다. 그리고 남은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켜고 있을 때, 아주머니 남편 분께서 먹고 있던 과자를 들이미셨다.


자고로 맥주 안주에는 이게 짱이야

거대한 크기의 치토스 치즈맛 봉지를 우리 앞에 놓으시며, 양껏 퍼가라고 하셨다. 양심껏 적당히 주어 담은 후 멕시코를 오고 처음 맛보는 과자를 입에 담았다.


쥰나 맛있잖아?????

햇빛으로 반딱거리는 나의 이마를 내리치며 생각보다 더 맛있는 과자맛에 콧쿠녕이 벌렁거렸다. 반응이 좋은 게 괜시리 만족스러운 것이었는지 이번에는 매운맛+라임맛이 섞인 빨간색의 과자 봉지를 내미셨다.


묘하게 손이 가는 맛;;;

난생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시고 매운데 엄청 짰다. 그래서 맥주랑 진짜 잘 어울렸다. 아저씨의 참입맛에 연달라 박수를 치며 감사인사를 전하였다. 부부께서는 가방을 우리에게 맡기고 편하게 놀아도 된다라고 하셨지만, 호옥시나 하는 마음에 정중히 인사드리고 짐보관소로 향해 짐을 맡긴 후 본격적으로 물놀이에 들어가 보았다.


첫 번째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동굴 온천인 그루타스로 가보기로 하였다. 똘란똥고는 그루타스와 포지타스로 나누어져 있다. 포지타스는 이곳에서 10분을 또 이동해야 하는데, 막차를 타고 가려면 남은 시간이 고작 2시간 밖에 없어 우리는 과감하게 포기하였다. 그루타스로 들어가는 진입구에는 경찰들이 반입불가한 물건들을 체크하였다. 아무래도 폭포수다 보니 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물병 반입조차도 불가하였다.


물병조차도 안된다니 당연히 아무 생각 없이 수건도 없는, 가진 거라고는 짐보관 열쇠와 핸드폰 말곤 없는 가벼운 몸으로 이곳으로 향하였다.


나 좀 설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풍경

기다란 줄을 기다리는 내내 자그만한 동굴 속에서 사람들의 기분 좋은 비명 소리와 물줄기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동굴을 들어가려면 땅으로 내리치는 물줄기를 맞닥뜨려야 한다. 쭈뻣쭈뻣 옆사람이 발을 내밀었다 말았다를 반복하고 있을 때 나의 몸은 제 빠르게 물소리가 가득한 검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미쳤다 개 재밌잖아??

머리끝에서부터 눈썹의 결을 따라 눈 속으로 들어온 물방울들을 세수하듯 비벼대며 동굴을 둘러싼 밧줄을 붙잡았다. 진짜 말도 안되게 재밌다. 발밑을 살포시 잠그던 물은 어느새 내 허리까지 차고 안전요원이 보이는 동굴의 끝에는 온몸을 입수하며 밧줄을 따라 작은 동굴을 한 바퀴 빙 돌았다.


후... 진짜 신명 나게 재밌었ㄷ..ㅏ..

밖을 나오자마자 감탄사가 섞인 웃음을 남발하는 것도 잠시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나왔다. 정말이지 좋은데 고도가 높아져서 그런가 너무 추웠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벌써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 물에서 조금 놀고, 샤워실에서 씻고 하면 시간이 금방이기에 충격적이었던 그루타스의 경험은 짜릿했던 첫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기로 하였다.


다시 햄버거를 먹었던 계단식 온천수로 내려왔다. 어째 아까보다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다. 남은 시간은 이곳에서 뜨끈한 물에 다시 적셔 풍경을 한 없이 바라보다 가야지. 그렇게 물속으로 들어가 멍~이나 함 때리자고 입수를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혹시 한국인이에요?

불길한 질문이 들려온다. 똘란똥고에 진입을 하고서부터는 언니와 나는 걸어 다니기만 하면 특히나 어린 여자아이들이 입 틀어막으며 소리 지르고 쳐다보았었다. 우리는 벌써 익숙해진 것인지 속으로 '또.. 시작이구나...' 하면서 가던 길을 이어갔을 뿐이다. BTS와 블랙핑크, 오징어게임 등... 덕분에 한국의 위상이 정말 많이 올라가있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온몸으로 체감한다. 근데 문제는 그 옆에 너무나도 작은 존재인, 아니 어쩌면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았던 한국인의 여행자 또한 멱살 잡고 딸려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대체 왜?

한국인이라는 존재가 신기한 건지, 특히나 중미와 남미를 가면 한국인을 환호하는 수준이 아닌 연예인을 보듯 아니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우리를 쳐다보고 사진 찍어달라고 하였다. 대부분 그들은 케이팝 팬인 경우가 다수였다. (아닌 경우도 있긴 하다..) 멕시티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가족단위로 오는 똘란똥고를 오니 성지 그 자체였다. 바위에 앉아 부들부들 뜨끈뜨끈한 물의 촉감을 느끼기도 전, 한 아이가 말을 건 것이다.


다시 시작되었구나.. 싶었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말을 건넨 어린 여자아이는 케이팝에 관심이 없는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저 외국인과 영어로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이때다 싶어 아는 스페인어를 총집합해 보았다.


꼬모 뗴 야마스?
메 야모 OO (내 이름은 OO야)

지나가는 멕시코 강아지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문장을 건네보며 몇몇 대화를 하였다. 할 말 다했겠다 '이제 좋은 시간 보내...!' 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사진.. 한 번 같이 찍어줄 수 있어요? 저희 할머니가 한국드라마 팬이라서요...!!


하하하 호호호... 이 물속에서요?

사진 솔직히 난 상관이 없다. 근데 머리는 물미역에 아까 바들바들 떨어서 입술도 똥색으로 변했는데 사진이라.. 지금만큼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반짝반짝한 눈으로 서 계시는 할머니의 기대를 어떻게 져버릴 수 있는가!


여자아이도 이런 부탁에 민망해하는 것 같아 열심히 찍혀(?) 주었다. 할머니, 이모... 등등 물속에서 둥둥  차례로 바뀌는 사람들과 찰칵찰칵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버렸다.


워낙 넓은 곳이라 이동을 하는데만 십여분이 걸리고, 샤워도 20분은 잡아야 하니 이쯤에서 너무 아쉽지만 일어서기로 한다.


사진만 찍다가네...^^ 그래도 진짜 너무 좋았다!
그니깐요..ㅎㅜㅠ
근데 여기 밤에 텐트 치고 자면 진짜 레전드일 것 같아요. 별 진짜 잘 보일 것 같은데... 담엔 꼭 텐트 치고 1박 하는 걸루...


여행은 늘 아쉬울 때 떠나는 법이다. 아쉬워야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으니까. 다음 여정을 지속으로 갈망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어쩌면 아쉬운 것이 다음 여정의 이유가 되어주니 오히려 더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짧았지만 너무나 달았던 똘란똥고 담에 또 봐잉

사라진 나의 눈썹 그 위로 반짝이는 이마, 민둥맨둥한 베이비로 돌아간 얼굴로 멕시티로 가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 시작된다. 왔던 길이 힘들었다는 걸 경험했기에 가는 길은 더욱 힘들 예정이다. 지친 상태로 4시간을 달려야 한다니.. 버스에 올라타기 전 매점에서 1L 물을 하나 구매하여 시원하게 들이켜고 겨드랑이에 끼며 준비를 마친 듯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20분이나 일찍 왔잖아?라는 오만한 생각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잠식되었다. 이미 대기줄은 꽉 차 있었고 우리가 마지막 탑승인원이었다. 이십 여분을 기다려 대기 명단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이 차례로 불러졌다. 차곡차곡 다 낡아진 버스에 사람들이 다시금 채워져 간다. 어느덧 모든 자리가 꽉 찬 것만 같았을 때 내 이름이 들려왔다.


순후~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내 이름에 폭소를 하며 8페소를 움켜쥐고 버스 위로 올라갔다. 8페소를 기사님께 건네드리고 눈알을 미친 듯이 굴렸다. 우리의 자리 따위 없는 빵빵한 버스에서 주저 없이 눈에 보이는 유일한 공간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기 우리가 앉아도 되나요?

빈자리 없이 꽉 채워진 사람들 속 유일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이었던 버스 뒷문의 계단을 가리켰다. 뒷문은 애초에 쓰지를 앉아 이미 탑승객들이 캐리어를 몇 개 올려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가능하지!

우리는 캐리어로 뒷문을 막아져 있는, 커다란 2개의 계단이 놓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래도 저래도 어떠하리. 난 지금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


우리가 자리에 앉고 버스의 앞문도 문이 닫혔다. 깔끔하게 채워진 좌석과 버스 꼬랑지에 앉은 2명의 여행객이 탑승한 버스는 다시 아까의 뽕짝 멕시코 음악소리와 함께 절벽의 길로 올라탔다.


살고자 붙잡는 안전봉

덜컹덜컹 들썩들썩.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 몸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휘어졌다. 우리는 각자 옆에 있는 안전봉을 부여잡았다. 귀에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음악이 더 고조되고 버스의 움직임에 떨궈진 고개를 팍 들면 내 눈앞엔 절벽의 풍경이 보였다.


같은 돈 내고 이게 무슨 일이람...
근데  또 버스 뒷칸에 언제 한 번 앉아보겠어~!!


육체는 이리저리 흔들흔들 고생을 사서하고 있는데 내 얼굴에 걸린 입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흉흉한 후기와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 너무 겁을 먹고 간 멕시코 여행의 첫 도착지는 비교적 조용한 소나로사, 로마노르떼에서 시작되었다. 구시가지를 좋아하는 나에게 정갈하면서도 조용한 이 동네는 그다지 흥미로운 동네는 아니었었다. 구시가지로 넘어오고 이제야 나의 여행이 제대로 시작되었음을 느끼고, 지금의 이곳 똘란똥고로 와서 온몸을 구르고서야 나의 이전 여행을 되찾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멕시코 여행 중 가장 고된 지금 이 순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운전기사의 손놀림 물놀이로 지친 조용한 승객들을 대신하여 흥을 돋우는 음악과 뒷문의 작은 틈 사이에 펑 트여있는 시골 풍경 속 서서히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려야만 행복한 삶이 아닌 나는 지금 고생 속에서 태양의 빛만을 쫓고 음악의 흥만을 느끼고 있다. 이 순간만큼은 물질, 재력, 사람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들이 단 한 명도 부럽지가 않다. 달리는 버스 속에서 청춘의 한 시기를 서로에게 기록하고 있는 지금, 평생이 추억이 되어줄 하루를 채워갔다.


가끔씩 생각나는 뽕짝의 노래





epilogue.


잘 지내고 있어요? 오늘 문득 똘란똥고가 생각이 나서!
...
추억을 먹고사는 게 맞나 봐요
함께 했기에 더 즐거웠어요!
...


평범했던 하루에 특별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그냥 오늘도 크나큰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하루에 잠시 이날의 추억을 회상해 본다.


나는 예쁜 옷을 좋아하지만, 더 예쁜 옷, 더 예쁜 공간 그보다 더 많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에는 생각보다 큰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평생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매해 끊임없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매일을 그렇게 살 수 없으니 어느 한순간에 잠시라도 말이다. 매일 스쳐가는 순간마다 변함없이 지난 추억들을 회상하곤 한다. 그래서 내가 당장의 지금, 그리고 미래에 하는 일들은 '추억 될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해서이다. 고생을 할수록 좋다. 실패를 할수록 더더욱 좋다. 나의 이야기엔 더 다채로운 추억과 대조되는 감정들이 쌓여 그 이야기의 농도를 짙어내게 해 줄 터이니.


평범한 하루를 오랫동안 버텨내어야, 극적으로 꼬여버리는 실패의 연속을 버터내어야 이야기의 끝이 생동감으로 불어넣어 주게 될 것이니. 갑자기 찾아온 추억이라는 선물을 회상하며 평범한 하루의 끝에 감사함을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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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6월부터 로컬 여행자의 여정기를 소개하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

매주 목요일마다

한 달에 1명의 여행자씩

짧고 간결하게

정보성이 아닌 '이야기'를 중점으로

여정의 길을 늘 갈망하는 이들에게 재미난 에피소드로, 일상의 지루한 틈을 타 짧은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경험이 모여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게 만들어 주는 동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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