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퇴근길. 하필이면 타야 할 버스를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는 15분 남짓, 괜스레 정류장 근처에 있는 도넛 가게에 가서 도넛 서너 개를 골라 들고 나왔는데도 10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온열 기능이 있는 벤치에 앉았다. 몸의 무게에 더해 가방 무게까지 실어 한 자세로 있다 보니 엉덩이가 뜨거워져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어섰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3분가량이 남아있었다.
노이즈 캔슬링이 없는 이어폰이 흘려주는 음악소리를 비집고 웬 고함소리가 들렸다. 연배가 꽤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머니 등에는 빵빵해진 가방이 메어져 있고 손에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검정 마스크는 턱스크도 아닌 코스크, 입은 내놓으신 채 마스크를 위로 접어 올려 코만 가린 상태셨다. 계속 큰 소리로 뭔가를 외치시는데 뭐라시는 건지 도통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홈리스이신가 싶었는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하던 아주머니는 나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신 채 정류장에 선 어떤 버스에 올라타셨다. 실례인 줄 알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내 시선은 아주머니를 좇았다. 아주머니는 버스에 타서도 큰 소리의 혼잣말을 멈추시지 않았다. 버스기사분은 룸미러를 통해 아주머니를 몇 차례 바라보시다가 이내 문을 닫고 버스를 출발시키셨다.
아니, 그런데, 아주머니, 요금 안 내신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다면 아주머니는 버스 요금을 내지 않으신 채 탑승하셨다. 기사님께서는 그런 아주머니를 주목하셨지만 아주머니를 자극하면 소란이 발생할까 싶어 그냥 출발하신 것 같았다. 아주머니께서 계속해서 큰 소리를 내신다면 같은 버스에 탄 다른 승객들 가운데 누군가는 불편해하거나 무서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움직이고 흔들리는 폐쇄된 공간인 버스에서는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이어갈 찰나 내가 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기까지 고작해야 서너 정거장이다. 그 버스를 탈 때면 집에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하! 하! 하!"
버스에 올라 교통카드를 리더기에 대니 기사님이 아주 큰 목소리로 스타카토로 끊어 인위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깜짝 놀라 기사님을 바라보았지만 그분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황했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버스 앞문 바로 앞자리에 앉는 경우도 많았지만 도통 거기에 앉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가급적 기사님과 멀어지자, 버스 뒤편으로 가서 앉았다.
버스는 빠르게도 갔다가 아주 느리게도 갔다가 종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집을 향해갔다. 중간에 한 정류장에서 백팩을 멘 승객이 하차벨을 누르고 카드를 리더기에 태그했다. 기사님은 그분을 향해 "앞으로 와서 카드 다시 한번 찍어주세요!"라고 크고 또박또박하게 외쳤다.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승객분은 기사님의 말씀대로 했고 알 수 없는 말을 웅얼이던 기사님은 그 승객분께 다시 크고 또박또박하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건넸다.
대체 왜 기사님은 그 승객분을 부른 것인가. 웅얼거림을 알아듣지 못한 탓에 그 이유를 당최 추측할 수가 없었다. 혹시 다음에 내가 내릴 때 나를 부르면 어쩌나 싶었다. 호출당한 그분처럼 나도 안경을 쓰고 있고 백팩을 메고 있었다. 버스에 탈 때 나한테 하!하!하!라고 하기도 했다. 웃음과 운전 속도와 승객 호출에 이르기까지 그 버스기사분은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마주 오던 같은 노선 버스의 기사님께 손도 안 흔드신 것 같았다!
버스 승객이 예측불가의 인물일 때도 무서운 일이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이 그럴 때는 공포가 한층 배가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제발 날 부르는 일 없이 내려주세요.
최대한 눈에 띄지 말자고 생각했다. 내가 하차벨을 누르지도 않았다. 하차할 정류장이 도달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정류장에 막 도착해 버스가 서기 직전 얼른 뒷문 앞에 섰다. 지목당하기 전에 얼른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또 하필 그 버스의 뒷문은 마지막에 열리는 속도가 느려졌고 가방이 문과 지지봉 사이에 끼는 바람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정체모를 소리를 내면서 버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기사분이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버스회사에서 채용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시는 분이 기사님들이신데 회사 입장에서는 최대한 리스크를 줄이고 싶을 거다. 그래도 방정맞게 뛰는 심장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 이어폰에서는 요사이 내가 퇴근할 때 가장 즐겨 듣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 더문샤이너스(The Moonshiners)
지친 하루 해가 뉘엿거리며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와
붉은 석양을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라네
흥에 겨워서 행복에 겨워서
집으로 돌아가네
어슬렁대며 또 밤이 찾아와
세상은 보랏빛으로 물드네
달무리에 젖어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라네
그저 기뻐서 피식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네
달무리에 젖어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라네
그저 기뻐서 피식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네 방으로 들어가네 방으로 들어가네 방으로 들어가네
지나치게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밍. 퇴근요 덕분에 일상의 스릴러를 겪고도 -사실은 '만들고도'- 나는 아직 미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제의 오늘의 내일의 버스 안 모든 분들 안전하고 편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