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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o Mar 29. 2022

냉정한 이타주의자 - 윌리엄 맥어스킬 지음

우음마식(牛飮馬食) - 책 이야기


표지를 보고 웃음이 났다. 이 책의 원제는 ‘Doing Good Better’, ‘더 나은 선행을 하라’ 정도인데 번역본의 제목은 ‘냉정한 이타주의자’. 이건 너무 자극적으로 바꾼 게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냉정한 이타주의자’라는 표현에 이 책의 핵심이 드러나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대부호가 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만큼의 돈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라면 우선 교통이 좋은 지역의 역세권에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를 두 채 산다. 한 채는 직접 거주하고 다른 한 채는 월세를 준다. 월세를 받으며 살다가 노후에는 살던 아파트로 주택연금을 받으며 더욱 안락하게 산다. 나는 꽤나 합리적인 게으름뱅이다. 그러고도 내게는 큰돈이 남아있다. 남은 돈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럴 때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목 좋은 곳에 있는 건물을 사서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가게들에게, 젠트리피케이션 따위는 걱정하지 않도록, 싸게 임대한다. 둘째,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투자한다.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사실 나로서는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실제로 그런 사업을 벌일 수 있다면 내 선행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한 이타주의자』에 따르면 그런 식의 안일한 선택은 지양해야 한다. 우리는 “선의가 해악을 끼치는 부작용 없이 최대한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는 방법”(p.18)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이 책은 ‘효율적 이타주의’를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말 그대로 효율과 이타주의가 결합된 용어이다. 이것은 착한 일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지를 검토하고 실천하는 태도를 말한다.(pp.26-27 참조) 효율적 이타주의는 이타적 행위가 데이터와 이성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산출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보다 계산적이고 냉철한 태도다. 만약 나의 가족이나 친구를 돕는 행위보다 내가 미워하는 상대를 돕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 행해야 한다. 여기에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효율적 이타주의는 비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정 없다’, 혹은 ‘비인간적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효율적 이타주의는 냉정한 계산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지속적인 선행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도덕적 허가 효과’를 방지할 수 있다.


도덕적 허가(moral licensing) 효과는 “착한 일을 한 번 하고 나면 이후에 선행을 덜 실천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경향”(p.199)이다. 일종의 자아도취랄까.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를 했으니 카페 종업원에게 반말을 하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재능기부에 동참했으니 대중교통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쯤이야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는 식이다. 도덕적 허가 효과의 더욱 놀라운 점은 그저 착한 일을 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보상심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도덕적 허가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고통받는 자영업자를 돕는다느니, 소방관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느니 하는 상상만으로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네’라며 흐뭇해했다. 최대한 관대하게 생각해도 내가 엄청난 부자가 될 가능성은 티끌만큼도 없다. 당연히 그런 식의 선행을 할 수 있을 가능성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결국 착한 일을 할 때, 효율적 이타주의 냉정한 성격은 두 가지 면에서 그 진가가 발휘된다. 선행의 실천에 있어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실제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선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게끔 한다.


영양가 없는 상상을 시작한 김에 끝을 내 보도록 하자. 내가 대부호가 된다면 나는 자영업자들의 안정적인 영업을 도와야 하는가 아니면 소방관들의 구조 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소방 장비를 지원해야 하는가. 『냉정한 이타주의자』를 읽어버린 지금, 답은 후자다. 같은 비용으로 살 수 있는 건물의 효용과 소방장비의 효용은 큰 차이가 난다. 자영업소 서너 곳을 지원했을 때, 해당 업주의 만족감은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만족도는 점포의 임대료와는 그다지 상관없다. 반면에 소방관 수백 명의 안전을 높인다면, 그들의 업무 효율은 크게 올라간다. 그렇다면 수백 명에 대한 지원으로 수천, 수만 명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며 거짓된 만족을 느끼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할 수 없다며 괴로워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이의 고통에 반응하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소고기가 아닌 치킨을 먹지 않을 수도 있고, 가난한 국가의 노동착취 공장에서 나온 물건을 구매할 수도 있고, 윤리적 소비를 줄일 수도 있다(믿기 어렵겠지만 이것들을 모두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 효과가 있다고 제시된 방안들이다). 또는 높은 성과를 보이는 자선단체에 기부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효율적 이타주의는 그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다면 나 자신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삶을 더 나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바로 오늘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여정의 첫발을 내딛는 날이라고 생각하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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