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킴의 영회 리뷰: 저리뷰
일단 본격적인 영화 리뷰를 하기에 앞서 미리 전제를 깔자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박찬욱 영화 중 단연 1위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수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그런 기조에 맞춰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화 리뷰를 할 예정이니 혹시 영화가 재미없다거나 실망스러웠던 사람들은 부디 지금이라도 뒤로 가기를 눌러 혹평 리뷰에 가서 놀기를 바란다.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호불호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과는 단 한 글자도 영화 관련 논의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내가 본 박찬욱 영화 중 최고로 재밌고 훌륭한 영화였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은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어쩔 수가 없이' 또 하나의 걸작이자 라이벌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가 더 우월하다고 평가하기 어려울 만큼 각자의 색깔을 잘 담아낸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먼저 개봉한 '기생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식은 있지 않았을까 추측뿐..)
솔직히 나는 박찬욱 감독에 대한 호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이다. <올드보이>도, <친절한 금자씨>도, <아가씨>도 재미있게 봤지만 극찬할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박찬욱에 대해서는 오히려 호감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2시간 20분의 시간 동안 숨도 제대로 한 번 못 쉴 만큼 박장대소를 하고, 또 몰입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봤을 정도였다. (평생 처음 N차 관람에 대한 욕구가 생각날 정도)
이제 내가 왜 그렇게 호감도 없었던 감독의 영화에 푹 빠지게 되었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보려고 한다. 당연하게도 해당 리뷰에는 다수의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고 와서 다시 후기를 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지금 극장에서 보면 전체 대관 느낌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상은 정말 엄청나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동안 우리가 습관처럼 해왔던 모든 일들이 하루아침에 불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다. 산업 혁명이 많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듯 AI 혁명은 자동화,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기에 기업은 '어쩔 수가 없이' 근로 인원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이루고 행복한 가정과 함께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만수는 25년간 일해온 제지 공장에서 하루아침에 '모가지'가 날아가는 참사를 겪게 된다. 3개월이면 충분히 재취업이 가능할 거라 믿었던 그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사라지며 서서히 궁지로 몰리게 된다. 가족의 불안한 눈빛, 대출금의 압박 등으로 심리적인 불안감에 둘러 쌓인 그는 오랜만에 잡힌 면접에 중언부언하며 엉뚱한 답변을 잔뜩 늘어놓게 된다.
이미 정보화, 디지털화된 시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제지 산업은 규모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고, AI 혁명으로 인해 그마저도 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만수는 그 한정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차지하겠다는 불순한 상상을 하게 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선 업계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문 제지'의 최선출 반장과 잠재적 경쟁자인 구범모와 고시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시작하고 우여곡절 끝에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을 차례로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꿈에 그리던 재취업에 성공하게 되며, 만수의 아내 미리, 범모의 아내 아라, 그리고 날카로운(?) 형사들의 직간접적인 도움으로 범죄 사실도 영원히 미궁 속에 빠지게 되며 극은 마무리된다.
극 중 대부분의 인물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인 만수를 비롯하여, 범모와 시조 모두 제지 경력이 전부인 인물들로 두려움과 자존심으로 인해 다른 일을 찾기를 꺼리게 된다. 좁아진 제지 업계의 취업 경쟁은 더욱 심화되지만 그들은 잠시 다른 일을 하면서 다시 제지 업계로의 진입을 꿈꾸지만 좀처럼 길은 열리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방법적인 면에서 달랐을 뿐이지 세 사람 중 누구라도 서로의 증발을 진심으로 원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만수의 부인인 미리 역시 결국 만수의 범행을 모두 눈치챘음에도 딸의 첼로 레슨, 아들의 비행, 경매에 붙일 위기에 처한 집, 재혼 가정을 유지해야 하는 불안함 등 모든 상황을 고려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남편인 만수의 범행을 모르는 척해주기로 결심한다.
또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범모의 아내 아라 역시 무기력한 남편을 대신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극단 후배와 외도를 하게 되고 그것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가 없이' 남편인 범모를 살해하는데 얼떨결에 동참하게 된다.
아, 물론 아무리 '어쩔 수가 없다'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자비가 있을 리 없겠지만 이것은 분명한 영화적 상상력의 발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영화의 개연성'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훌륭한 자세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분명 '어쩔 수가 없는' 그런 상황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하게 된다. 보기 싫은 상사를 매일 봐야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또 생업에 나서야 하고, 너무 바쁜 가운데에도 꼭 식사를 챙겨 먹거나 잠을 자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그 '어쩔 수가 없는' 상황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다. 만약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이 사회의 낙오자나 루저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영화 중 <JSA 공동경비구역>을 제외하면 코미디 장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수의 영화에 간간히 희극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풍자 코미디를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그 코미디의 수위가 정말 일품이다. 그동안 어떻게 참아왔나 싶을 정도로 웬만한 본격 코미디 영화보다도 훨씬 더 짜임새 있고 퀄리티가 높다. 극장에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웃음을 터트렸고, 또 몇 번의 박수와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극의 무거움과 진중함은 전혀 놓치지 않은 것도 정말 대단한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정말 근래 보았던 어떤 영화보다도 가장 많이, 가장 크게 웃은 영화일 정도로 코미디적으로 대단히 완성도가 높은 영화였다. 특히 웃음을 유도한 부분에서는 거의 100% 크고 작은 웃음이 터졌다. 많지 않은 관객이었지만 대부분 같은 곳에서 웃었고 같은 곳에서 박수를 쳤으며 같은 곳에서 감탄을 자아냈다. 솔직히 그동안 너무 진지한 영화를 많이 연출했던 박찬욱 감독이 앞으로는 이런 블랙 코미디 영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이다.
주인공 만수는 그 엉뚱한 상상을 계획할 당시에만 해도 실제로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그들을 관찰하면서도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땀을 흘리며 긴장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더구나 관찰하는 과정에서 범모의 종이에 대한 진심을 알게 되면서 심리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범모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동정심이 더해지며 제거를 망설이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어쩔 수가 없이' 만수는 실행에 옮기려 했고, 그 순간 범모의 아내까지 엮이면서 결국 범모의 아내가 범모를 살해하게 되어 민수의 첫 번째 계획은 운 좋게 성공하게 된다.
두 번째 목표인 시조가 일하는 구두 가게에서 역시나 시조가 손님들에게 멸시받는 장면이나, 또 시조의 딸이 용돈을 받으러 오는 장면 등을 보면서 잠시 망설이며 가게를 나가려 했으나 둘은 결국 짧은 대화를 통해 종이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만수는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려 한다. 역시나 이번에도 한 번에 냉정하게 실행하지는 못하였으나 시조가 만수의 총을 치고 달아나자 얼떨결에 총을 쏘아 첫 살인을 경험하게 된다.
첫 번째 살인은 허둥대다가 범모 아내의 도움을 받아 죽이게 되었고, 두 번째 살인 역시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으나 얼떨결에 총으로 살인을 했다면 마지막 목표인 최선출 반장의 경우에는 좀 더 과감한 방법으로 실행하게 된다. 직접 그가 소유한 외딴섬의 별장으로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노출하고 술을 마시며 친분을 쌓기까지 하는 등 대담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죽이는 방식에서도 앞 선 두 번과는 다르게 가학적인 방식으로 치밀하게 살해 현장까지 정리하여 혼자서 술 마시다 자신의 토사물에 기도가 막힌 것으로 완벽히 위장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처음엔 머릿속에서만 상상하며 두려웠던 살인이 세 번의 실행을 거치면서 점점 대범해지고 치밀해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약 제거해야 할 대상이 셋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면 아마 더 치밀하고 과감하게 실행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수가 마지막 제거 대상인 선출을 제거하기에 앞서 혼잣말로 술 취해 있는 선출에게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여기서 멈추면 앞에 두 사람의 희생이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즉 만수의 초반 '어쩔 수가 없다'는 실제로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실행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마지막에서의 '어쩔 수가 없다'는 자신의 행위를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변명, 자기 암시 같은 측면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AI와 자동화로 공장의 인원이 줄어들면서 해고되는 영화는 그동안 많이 있어왔다. 그런 영화들은 보편적으로 해고자와 고용주의 갈등을 법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을 소재로 삼는데 반해 이 영화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약자들을 공격하는 것에서 찾는다. 심지어 최선출 반장의 경우에는 해고를 당한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재취업을 위해 영문도 모르고 희생을 당하는 상황까지 연출되기도 했다.
또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남편을 극한의 상황에 몰린 만수의 아내 미리는 자기 자신이 치과 의사와 불륜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추측이긴 하나 합리적 의심 : 테니스, 댄스 교실, 치과 등에서의 다정한 행동들) 정작 남편의 행동에 지속적인 확인을 위해 주기적으로 영상통화를 시도한다. 또한 아들이 경찰서에 갇히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자신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던 만수의 친구 동호 아빠에게 반대로 속옷을 풀어 자신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핵심 모티브가 되는 것은 바로 '종이'인데,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는 행위는 곧 사람을 해고하는 행위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만수의 살인 행위까지 의미가 확장되는 셈이다. 종이를 천직으로 삼고 있는 만수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심은 사과나무 밑에는 예전 아버지가 키우던 돼지들의 사체, 경쟁자인 시조의 시체, 아들이 훔쳐온 핸드폰까지 3대에 걸쳐 역사가 연결되는 아이러니가 펼쳐지기도 한다.
간단하게 해 보려던 영화 리뷰가 거의 단편 소설급으로 길어지게 되었다. 그만큼 영화에 대한 여운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꽤 오래 이어질 듯하다. 심지어 더 하고 싶은 말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도 하고, 미처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거나 생각은 했었으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까지 합치면 훨씬 더 길어질 수도 있지만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보려고 한다.
아마도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N차 관람을 할 예정이고, 또 <어쩔 수가 없다>에 대한 영화 전문가들의 리뷰가 쏟아지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 더 추가적으로 할 이야기가 생기면 리뷰 2탄으로 돌아올 수도 있음을 미리 공지하는 바이다.
각종 유튜브나 뉴스기사 네이버 영화 리뷰 등에 1점 테러 수준의 후기나 댓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백 번 양보해서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1점을 줄 정도로 최악의 영화는 아니지 않은가? 그게 박찬욱이기 때문에 더 점수가 짠 것인지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살인의 개연성을 따지기엔 <올드보이>에서 학창 시절의 철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15년을 가둬놓고 만두만 먹이는 것은 과연 개연성이 있나? 그럼에도 <올드보이>는 네이버 평점이 무려 9.33이다. <어쩔 수가 없다>와는 무려 평점 2점 차이.
개인적으로 박찬호, 봉준호 등에 대한 심각한 열등의식이나 부러움에 대한 질투, 명성에 대한 맹목적 내려치기 외에는 설명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작품 중에도 정말 대중성이든, 작품성이든, 개연성이든 논란이 될만한 작품들이 없지는 않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을 보면서 약간의 지루함을 느꼈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심지어 박감독의 영화인줄도 몰라서 아직 보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게 1점을 줄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아직 <어쩔 수가 없다>를 관람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일단 매우 부럽다. 그리고 당장 극장에 가서 보기를 추천한다. 지금은 거의 영화 내려오기 직전이라 영화관 전세를 내는 느낌으로 관람할 수 있다. 다음에 2차 리뷰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장편 리뷰를 여기서 마친다.